서계 박세당의 연행록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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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 박세당의 연행록 연구』는 서양 문명의 이식기에 접어든 시대적 추이 속에서 서계 박세당이 나섰던 사행의 결과인 <서계연록>과 <사연록> 두 종류의 연행록을 연구한 책이다. <서계연록>에는 청초의저 유명한 역법논쟁에 관한 견문 내용이 등재되있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2010년 우수저작및출판지원사업’ 당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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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체계화한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이 남긴 두 종류의 연행록인『서계연록(西溪燕錄)』과 『사연록(使燕錄)』을 대상으로 한 본격 연구서가 이번에 혜안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서계연록』은 특히 박세당이 남긴 저술 가운데 지금껏 미공개 상태를 유지해 온 마지막 저술로 그 구체적인 내용 소개와 분석이 아쉬운 상황이었다. 올해 6월 『서계연록』의 정갈하고 읽기 쉬운 국역본을 소개한 바 있는 저자 김종수는 『서계연록』?의 주요 내용을 사행(使行) 시집인 『사연록』과의 관계성을 고려하면서 그 전모를 특정 주제별로 나누어 입체적인 조명을 시도하였다.
저자는 효율적인 논의를 위한 전략으로서 이른바 사상문화적 연구 방법론을 채택하여 위의 두 연행록을 박세당의 여타 저술 혹은 사상체계와 접목시키는 논의 방식을 시종 적용하였다. 결과적으로 저자가 채택한 연구방법론은 논의의 폭을 확장하고 깊이를 더해줌으로써, 연록과 박세당 사상체계 간의 정합적인 논의를 이끌어내주었다. 또 그 연장선에서 저자는 두 연행록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로서 사실주의적(事實主義的) 사조에 주목하여 이를 박세당 사상체계의 전체적 규모와 연관시켜 논의를 개진하였는데, 이 책만이 갖는 고유한 특징이라 하겠다.
책 내용
박세당이 구축한 사상체계는 일단 사서(四書)·이경(二經)을 대상으로 한 탈주자학적 경학론과 노장(老莊)사상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박세당의 학문세계는 『색경』으로 표방되는 농학(農學)과 독자적인 고증학(考證學), 그리고 양명학과 역(易) 방면에까지 천착하는 등 실로 다양한 경계지대를 아우르면서 17세기 중·후반 조선 지성계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 박세당은 빈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약 10세의 늦은 나이에 글공부를 시작하여 32세의 나이에 입사(入仕)하였으나, 그마저도 8년이라는 극히 짧은 관직생활을 마감하고 수락산 석천동으로 퇴은하였다.
이후 박세당은 직접 농사를 지으며 곤궁한 여건 속에서 강학과 연구 활동에 몰두했다. 박세당은 당시 노론의 거두 송시열(宋時烈)과 대립하여 사문난적으로 낙인이 찍힌 끝에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였으나, 그의 경학은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본격적인 포문을 열어 후대 다산(茶山) 경학론의 중요한 연원을 제공해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은 박세당이 석천동으로 퇴은하기 직전인 1668년에 동지사의 서장관 자격으로 청의 수도 연경(燕京)을 다녀오면서 작성한 연행록을 다양한 시각으로 분석한 것이다. 저자는 처음에는 박세당이 연경(북경)에서 남긴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 『서계연록』을 접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박세당은 황폐한 당시 북경의 모습과 지적 소양이 결여된 북경 사류(士類)들에 대한 지극한 실망감만을 형인 박세견에게 띄운 서신에서 피력하였을 뿐이다. 형에게 보낸 서신은 박세당이 창안한 훈고학적 경학방법론의 자생성을 시사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 행간의 의미가 가볍지 않다.
저자는 박세당이 북경에서 남긴 족적을 추적하려던 당초의 계획 대신『서계연록』에 등재된 주요 서술단위들의 내용에 주목했다. 실제 두 연행록에 기재된 서술단위들의 목록과 그 순위는 박세당 내면에 은장된 의도인 서브텍스트(subtext)를 차별적으로 대변해 주는 지표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무엇보다 저자는 박세당이 사행 동안 내내 청조(淸朝) 정국을 대상으로 한 일련의 정탐(偵探)에 주목하였다. 이러한 정탐 활동은 대청탐규(對淸探窺)로 명명할 만한 사안으로서, 연행의 왕환 노정에서 보여준 그의 치열한 실증적 탐구노력과 더불어『서계연록』의 가장 특징적인 국면을 형성하고 있다. 기실 『사연록』이 시의 소재로 삼은 여양(閭陽)·고평(高平)·광녕(光寧)·요하(遼河)·요택(遼澤)·산해관(山海關)·이제묘(夷齊廟)·계주(?州)·통주(通州)·북경(北京)·옥류천(玉溜泉)·연대(燕臺)·조양문(朝陽門)·조어대(釣魚臺)·영평(永平)·연대(烟臺) 등의 역사적 공간과 주요 상관물들 역시 대표적인 두 서술단위들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 책의 목차에서도 드러나듯 박세당이 수행한 대청 정탐 활동의 대상은 실로 광범위하였다.
먼저 박세당의 대청탐규는 중국에서의 명·청(明淸) 간 왕조교체에 따른 조선왕조의 첨예한 관심사가 잘 드러난 결과였다. 박세당은 청조의 정국 전반에 걸친 정보는 물론이고 황제 강희제에 관한 정보를 획득하는 데에도 무척 부심하였다. 실제로 황제 관련 사항은 조선왕조가 가장 궁금해하는 일급 정보였고, 박세당은 1669년 정월 초하룻날 진행된 조참의(朝參儀) 때 강희제의 일거수일거족에 예의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나아가 한족이 받는 차별적 실상과 '희봉사'로 별칭된 몽골의 군사적 동향, 소수민족인 묘족의 동태까지 예의 주시하면서 정탐활동을 지속하였다. 특히 남명정권의 동향과 반청세력의 활동에 대한 그의 지대한 관심은, 암암리에 명조 부흥을 갈망한 조선왕조와 지성계의 관심을 극명하게 반영한 사례였다.
이상과 같은 정치·군사적 탐규에 추가하여 박세당은 소위 관풍(觀風)으로 지칭되는 대청 풍속 및 예악의 관찰에도 상당한 집중력을 발휘한다. 특히 변모한 대륙의 언어와 복제, 두발 상태를 누차 접한 끝에 그 화이혼속(華夷混俗) 양상에 비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러한 심정은 원일(元日)의 조참의와 그에 부속된 오후의 연회석상에서도 재차 읽을 수 있다. 박세당은 조회가 진행되는 동안 여타 번국 사절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았던 조선의 초라한 위상을 누차 확인했다. 게다가 전투 장면을 형상화한 청조의 희극과 제왕 대신들의 폐·전 위에서의 춤 한마당, 누릿하니 기름진 차맛 등은 그에게 상스러운 이미지의 원천을 제공해준다. 결국 진(塵)이라는 기호로 압축된 박세당의 대청 이미지는 귀국 후 소론계 주요 인사들의 연행 자문에 응하는 과정에서 연속적으로 재생되기에 이른다. 『사연록』의 기저를 장식하는 한(恨)스러운 심색(心色)도 이 '진'이라는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다. 이상이 제2장과 제3장의 주요 내용이다.
한편 또 다른 대표적 서술단위인 제4장 <『서계연록』의 고증기록과 실증적 탐구>는 박세당의 진지하면서도 치열한 학문적 태도를 환기시켜 준다. 박세당이 보여준 실증적 관심권 속에는 연행 때 그가 참고한 『지지(地志)』와 앞선 사절단들이 남긴 전록(前錄)은 물론이거니와, 비석과 사원, 누각[樓]과 누대[臺] 및 묘지, 성(城)과 강하 등의 명칭과 여타의 산천지리 관련 소재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심지어 박세당은 북경에 체류했을 때 사용한 숙소인 회동관(會同館)의 벽면 낙서까지 무심히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나아가 박세당은 그가 참고한 전록까지 고증해 내고, 길거리 통신류의 와전된 소문도 그 실상을 규명해 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실증적 탐구 과정 속에서 박세당은 전칭(傳稱)·상전(相傳)·전설(傳說)의 오류로 명명되는 해석학적 각성을 싹틔우게 된다. 실제 박세당이 지적한 오류 유형들은 해석학적 전구조(前構造)에 상응하는 의미로서, 경전 주석학의 전통에서 운위되는 소위 전문(轉聞)의 오류와 내용상 동의어에 해당한다. 이처럼 박세당이 연행 노정에서 획득한 해석학적 이해구조에의 각성은 차후 그가 개척한 비판적 경학론에서 더욱 완결된 형식의 해석학적 체계로 재조직된다. 결국 연행 노정에서 시도된 박세당의 실증적 탐구 노력은 그가 무신년 사행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물로 남게 된다.
앞서의 내용에 이어 제5장의 불교 관련 서술단위, 제6장의 조선 피로인(被擄人) 묘사와 민물(民物) 견문 등은 『서계연록』의 차상위 소재거리에 해당한다. 저자는 박세당을 원시유학을 강력히 지향한 근본 유자로 보면서도 연록의 불교 관련 서술단위가 박세당이 견지한 구도적 성향의 일단을 은연중에 대변해준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그 불교적 서술단위를 토대로 박세당의 전·후반기 불교인식의 전모를 소상히 추적·분석하였다. 박세당은『서계연록』에서 청초 사원의 외양과 승려를 묘사하고 조·청(朝淸) 간의 계율과 수행의 가풍을 비교 관점에서 관찰하기도 하였다. 또한 파계를 일삼는 라마승에게는 심히 부정적 인식을, 이와 달리 불도가 높은 고승에게는 깊은 관심을 보였다. 실제로 귀국 후 박세당은 다수의 승려들과 교분을 유지하고, 석현 화상에게는 육체의 구속을 초월한 세계를 향한 근원적인 향수를 토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제법무아를 체득하기 위한 불교적 인식론인 반야공관을 부분적으로 긍정하면서 진리인식론의 정당한 가치를 부여할 정도로 문호개방적 시각을 견지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는 여전히 선불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기조를 유지하였으며 이는 연행 때 그가 감상한 와선(臥禪) 관음상에 대한 평가에서 이미 감지되었다. 선불교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인식은 불교승단의 무노동성과 비생산성에 대한 강한 질타와 더불어 불교인식의 부정적 측면을 대변하는 사례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박세당은 끝내 인격적 천에 대한 믿음과 함께 유학적 인륜의 강을 차마 건너뛸 수가 없었다.
제6장 <조선 피로인 묘사와 민물(民物) 견문>은 각기 과거와 현재라는 시점에 기초한 서술단위를 분석한 것이다. 무신년 봉사단이 사행에 나선 시기는 병자호란이 발발한 지 32년이 지난 시점이어서 자연 사행 노정에서 포로로 끌려간 조선 피로인들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 그 자신 역시 전화(戰禍)의 고통을 직접 맛보았던 박세당은 이 피로인들의 애절한 현지 적응 실상을 연록에 채록하고 그들의 아픔에 진정 공감하였다. 저자는 이들 조선 피로인을 『서계집』에 수록된 중국인 귀화인 강세작의 성공적인 이주담과 대비적으로 소개하면서, 이주 문제에서 차지하는 인간 실존의 자유의지의 중요성을 흥미롭게 분석하였다.
이어지는 박세당의 민물 견문에 관한 소재들은 가칭 청조 충격으로 명명할 만한 일대 계기적 사건의 성격을 띠고 있다. 박세당은 사행 때 직접 목격한 청의 발전된 경제적 현실에 큰 충격을 받는다. 무성한 시사(市肆)와 번잡한 거리, 웅장한 가옥과 수레 및 선박 등에 대한 관찰 결과를 연록에 기재하면서 큰 놀라움을 표했다. 원일 정조 때의 화려한 기물이며 복제, 그리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안장을 지운 말"들도 그의 시선을 끌었다. 거기에다 북경에서 역법논쟁으로 대변되는 앞선 서양의 첨단문물을 체험하기도 했다. 당시의 신역법은 천문 관측기구와 더불어 서양의 첨단문물을 상징하는 과학기술이었다. 그럼에도 박세당은 귀국 후 청에서 접한 이런 일련의 문명충격을 발전적 차원에서 경세론의 세부적 각론으로 문명 번안하는 작업을 시도하지 않는다. 대신에 석천동에서 주경야독과 강학 활동에 전념하며 주자학 이후 전개될 신문명 기획에 관한 비판적 경학론을 순차적으로 제출해 나간다.
제7장 <결론>에서 저자는 두 연행록에서 통찰한 하나의 키워드인 사실주의적(事實主義的) 사조를 박세당 사상체계의 전체적 규모에 비추어 평가하였다. 이 작업에 앞서 저자는 사실주의(寫實主義)로 번안되는 서구의 리얼리즘(realism)과 박세당식 사실주의 간의 개념적 동이를 지적하였다. 저자는 리얼리즘과 박세당식 사실주의는 동 시대 인간의 삶과 사회의 제반 측면을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하지만 박세당식 사실주의가 프락시스와 프랙티스, 곧 경학론과 경세론을 아우르는 지평 위에 구축되었다는 점에서, 양자 간에 유지되는 분명한 절연관계를 확인해 보였다.
나아가 저자는 박세당이 구축한 사실주의의 주요 외연으로서 ①현실인식론과 ②비판적 경학론, 그리고 ③실효(實效) 지향의 경세론과 ④주충신(主忠信)의 인간학이라는 네 가지 범주를 설정하였다. 그런 다음 이 네 가지 범주를 관통하는 공약수로서 전통적인 개념 구분 방식인 실학(實學)과 도학(道學)을 유인함으로써 하나의 잠정적인 결론을 도출하고자 했다. 저자에 의하면 두 가지 연행록과 박세당의 사상체계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사실주의적 사조의 두 성분인 실학과 도학은, 최소한 존재론적 차원에서는 일방의 것이 타방이 것에 각기 상감·접목된 이른바 차연(差延, Differance)의 방식을 취함으로써 구조 내적 긴장을 유발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그러나 실학과 도학이 현실적으로 표출되는 국면을 맞게 되면 이 네 가지 외연 사이에는 불가피한 분열의 징후가 감지되게 된다. 저자는 그 원인을 사실주의의 한 축인 경세론적 전망에서 찾고, 『서계연록』을 위시한 여타의 저술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단초에 주목했다. 그 중에는 사행에서 체험한 가칭 청조 충격을 빈 괄호 안에 넣어 판단을 중지시켰던 귀국 이후의 문명 번안 자세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태도는 후대의 북학파(北學派)가 보여준 선도적인 문명 번안 자세와는 명백히 대비되는 양상인데, 그 이면에는 분명 시간성의 문제도 깊이 관여하고 있을 것이다. 대신 박세당은 소유의 영역보다는 존재 지향의 인간학에 몰입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에 저자는, 『서계연록』은 박세당이 구축한 사실주의의 외연 속에는 시간의 분절(分節)이 겹으로 교차하는 무늬로 아로새겨질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으며, 그의 사실주의는 그 뚜렷한 윤곽에도 불구하고 가시적이고 입체적인 건립이 어려운 한계를 보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박세당의 사상체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로서 사실주의적 양상을 형상화하고 그 한계까지 제시한 이 책은 주텍스트와 서브텍스트, 복합테스트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사료를 읽는 시각을 명확히 하고, 사료에 담긴 역사적 진실을 추적한 뛰어난 저작이다. 역사 전문학자의 온축된 결과를 잘 반영한 이 책이 앞으로 박세당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리라 기대된다.
저자는 효율적인 논의를 위한 전략으로서 이른바 사상문화적 연구 방법론을 채택하여 위의 두 연행록을 박세당의 여타 저술 혹은 사상체계와 접목시키는 논의 방식을 시종 적용하였다. 결과적으로 저자가 채택한 연구방법론은 논의의 폭을 확장하고 깊이를 더해줌으로써, 연록과 박세당 사상체계 간의 정합적인 논의를 이끌어내주었다. 또 그 연장선에서 저자는 두 연행록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로서 사실주의적(事實主義的) 사조에 주목하여 이를 박세당 사상체계의 전체적 규모와 연관시켜 논의를 개진하였는데, 이 책만이 갖는 고유한 특징이라 하겠다.
책 내용
박세당이 구축한 사상체계는 일단 사서(四書)·이경(二經)을 대상으로 한 탈주자학적 경학론과 노장(老莊)사상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박세당의 학문세계는 『색경』으로 표방되는 농학(農學)과 독자적인 고증학(考證學), 그리고 양명학과 역(易) 방면에까지 천착하는 등 실로 다양한 경계지대를 아우르면서 17세기 중·후반 조선 지성계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 박세당은 빈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약 10세의 늦은 나이에 글공부를 시작하여 32세의 나이에 입사(入仕)하였으나, 그마저도 8년이라는 극히 짧은 관직생활을 마감하고 수락산 석천동으로 퇴은하였다.
이후 박세당은 직접 농사를 지으며 곤궁한 여건 속에서 강학과 연구 활동에 몰두했다. 박세당은 당시 노론의 거두 송시열(宋時烈)과 대립하여 사문난적으로 낙인이 찍힌 끝에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였으나, 그의 경학은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본격적인 포문을 열어 후대 다산(茶山) 경학론의 중요한 연원을 제공해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은 박세당이 석천동으로 퇴은하기 직전인 1668년에 동지사의 서장관 자격으로 청의 수도 연경(燕京)을 다녀오면서 작성한 연행록을 다양한 시각으로 분석한 것이다. 저자는 처음에는 박세당이 연경(북경)에서 남긴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 『서계연록』을 접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박세당은 황폐한 당시 북경의 모습과 지적 소양이 결여된 북경 사류(士類)들에 대한 지극한 실망감만을 형인 박세견에게 띄운 서신에서 피력하였을 뿐이다. 형에게 보낸 서신은 박세당이 창안한 훈고학적 경학방법론의 자생성을 시사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 행간의 의미가 가볍지 않다.
저자는 박세당이 북경에서 남긴 족적을 추적하려던 당초의 계획 대신『서계연록』에 등재된 주요 서술단위들의 내용에 주목했다. 실제 두 연행록에 기재된 서술단위들의 목록과 그 순위는 박세당 내면에 은장된 의도인 서브텍스트(subtext)를 차별적으로 대변해 주는 지표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무엇보다 저자는 박세당이 사행 동안 내내 청조(淸朝) 정국을 대상으로 한 일련의 정탐(偵探)에 주목하였다. 이러한 정탐 활동은 대청탐규(對淸探窺)로 명명할 만한 사안으로서, 연행의 왕환 노정에서 보여준 그의 치열한 실증적 탐구노력과 더불어『서계연록』의 가장 특징적인 국면을 형성하고 있다. 기실 『사연록』이 시의 소재로 삼은 여양(閭陽)·고평(高平)·광녕(光寧)·요하(遼河)·요택(遼澤)·산해관(山海關)·이제묘(夷齊廟)·계주(?州)·통주(通州)·북경(北京)·옥류천(玉溜泉)·연대(燕臺)·조양문(朝陽門)·조어대(釣魚臺)·영평(永平)·연대(烟臺) 등의 역사적 공간과 주요 상관물들 역시 대표적인 두 서술단위들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 책의 목차에서도 드러나듯 박세당이 수행한 대청 정탐 활동의 대상은 실로 광범위하였다.
먼저 박세당의 대청탐규는 중국에서의 명·청(明淸) 간 왕조교체에 따른 조선왕조의 첨예한 관심사가 잘 드러난 결과였다. 박세당은 청조의 정국 전반에 걸친 정보는 물론이고 황제 강희제에 관한 정보를 획득하는 데에도 무척 부심하였다. 실제로 황제 관련 사항은 조선왕조가 가장 궁금해하는 일급 정보였고, 박세당은 1669년 정월 초하룻날 진행된 조참의(朝參儀) 때 강희제의 일거수일거족에 예의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나아가 한족이 받는 차별적 실상과 '희봉사'로 별칭된 몽골의 군사적 동향, 소수민족인 묘족의 동태까지 예의 주시하면서 정탐활동을 지속하였다. 특히 남명정권의 동향과 반청세력의 활동에 대한 그의 지대한 관심은, 암암리에 명조 부흥을 갈망한 조선왕조와 지성계의 관심을 극명하게 반영한 사례였다.
이상과 같은 정치·군사적 탐규에 추가하여 박세당은 소위 관풍(觀風)으로 지칭되는 대청 풍속 및 예악의 관찰에도 상당한 집중력을 발휘한다. 특히 변모한 대륙의 언어와 복제, 두발 상태를 누차 접한 끝에 그 화이혼속(華夷混俗) 양상에 비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러한 심정은 원일(元日)의 조참의와 그에 부속된 오후의 연회석상에서도 재차 읽을 수 있다. 박세당은 조회가 진행되는 동안 여타 번국 사절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았던 조선의 초라한 위상을 누차 확인했다. 게다가 전투 장면을 형상화한 청조의 희극과 제왕 대신들의 폐·전 위에서의 춤 한마당, 누릿하니 기름진 차맛 등은 그에게 상스러운 이미지의 원천을 제공해준다. 결국 진(塵)이라는 기호로 압축된 박세당의 대청 이미지는 귀국 후 소론계 주요 인사들의 연행 자문에 응하는 과정에서 연속적으로 재생되기에 이른다. 『사연록』의 기저를 장식하는 한(恨)스러운 심색(心色)도 이 '진'이라는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다. 이상이 제2장과 제3장의 주요 내용이다.
한편 또 다른 대표적 서술단위인 제4장 <『서계연록』의 고증기록과 실증적 탐구>는 박세당의 진지하면서도 치열한 학문적 태도를 환기시켜 준다. 박세당이 보여준 실증적 관심권 속에는 연행 때 그가 참고한 『지지(地志)』와 앞선 사절단들이 남긴 전록(前錄)은 물론이거니와, 비석과 사원, 누각[樓]과 누대[臺] 및 묘지, 성(城)과 강하 등의 명칭과 여타의 산천지리 관련 소재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심지어 박세당은 북경에 체류했을 때 사용한 숙소인 회동관(會同館)의 벽면 낙서까지 무심히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나아가 박세당은 그가 참고한 전록까지 고증해 내고, 길거리 통신류의 와전된 소문도 그 실상을 규명해 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실증적 탐구 과정 속에서 박세당은 전칭(傳稱)·상전(相傳)·전설(傳說)의 오류로 명명되는 해석학적 각성을 싹틔우게 된다. 실제 박세당이 지적한 오류 유형들은 해석학적 전구조(前構造)에 상응하는 의미로서, 경전 주석학의 전통에서 운위되는 소위 전문(轉聞)의 오류와 내용상 동의어에 해당한다. 이처럼 박세당이 연행 노정에서 획득한 해석학적 이해구조에의 각성은 차후 그가 개척한 비판적 경학론에서 더욱 완결된 형식의 해석학적 체계로 재조직된다. 결국 연행 노정에서 시도된 박세당의 실증적 탐구 노력은 그가 무신년 사행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물로 남게 된다.
앞서의 내용에 이어 제5장의 불교 관련 서술단위, 제6장의 조선 피로인(被擄人) 묘사와 민물(民物) 견문 등은 『서계연록』의 차상위 소재거리에 해당한다. 저자는 박세당을 원시유학을 강력히 지향한 근본 유자로 보면서도 연록의 불교 관련 서술단위가 박세당이 견지한 구도적 성향의 일단을 은연중에 대변해준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그 불교적 서술단위를 토대로 박세당의 전·후반기 불교인식의 전모를 소상히 추적·분석하였다. 박세당은『서계연록』에서 청초 사원의 외양과 승려를 묘사하고 조·청(朝淸) 간의 계율과 수행의 가풍을 비교 관점에서 관찰하기도 하였다. 또한 파계를 일삼는 라마승에게는 심히 부정적 인식을, 이와 달리 불도가 높은 고승에게는 깊은 관심을 보였다. 실제로 귀국 후 박세당은 다수의 승려들과 교분을 유지하고, 석현 화상에게는 육체의 구속을 초월한 세계를 향한 근원적인 향수를 토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제법무아를 체득하기 위한 불교적 인식론인 반야공관을 부분적으로 긍정하면서 진리인식론의 정당한 가치를 부여할 정도로 문호개방적 시각을 견지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는 여전히 선불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기조를 유지하였으며 이는 연행 때 그가 감상한 와선(臥禪) 관음상에 대한 평가에서 이미 감지되었다. 선불교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인식은 불교승단의 무노동성과 비생산성에 대한 강한 질타와 더불어 불교인식의 부정적 측면을 대변하는 사례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박세당은 끝내 인격적 천에 대한 믿음과 함께 유학적 인륜의 강을 차마 건너뛸 수가 없었다.
제6장 <조선 피로인 묘사와 민물(民物) 견문>은 각기 과거와 현재라는 시점에 기초한 서술단위를 분석한 것이다. 무신년 봉사단이 사행에 나선 시기는 병자호란이 발발한 지 32년이 지난 시점이어서 자연 사행 노정에서 포로로 끌려간 조선 피로인들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 그 자신 역시 전화(戰禍)의 고통을 직접 맛보았던 박세당은 이 피로인들의 애절한 현지 적응 실상을 연록에 채록하고 그들의 아픔에 진정 공감하였다. 저자는 이들 조선 피로인을 『서계집』에 수록된 중국인 귀화인 강세작의 성공적인 이주담과 대비적으로 소개하면서, 이주 문제에서 차지하는 인간 실존의 자유의지의 중요성을 흥미롭게 분석하였다.
이어지는 박세당의 민물 견문에 관한 소재들은 가칭 청조 충격으로 명명할 만한 일대 계기적 사건의 성격을 띠고 있다. 박세당은 사행 때 직접 목격한 청의 발전된 경제적 현실에 큰 충격을 받는다. 무성한 시사(市肆)와 번잡한 거리, 웅장한 가옥과 수레 및 선박 등에 대한 관찰 결과를 연록에 기재하면서 큰 놀라움을 표했다. 원일 정조 때의 화려한 기물이며 복제, 그리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안장을 지운 말"들도 그의 시선을 끌었다. 거기에다 북경에서 역법논쟁으로 대변되는 앞선 서양의 첨단문물을 체험하기도 했다. 당시의 신역법은 천문 관측기구와 더불어 서양의 첨단문물을 상징하는 과학기술이었다. 그럼에도 박세당은 귀국 후 청에서 접한 이런 일련의 문명충격을 발전적 차원에서 경세론의 세부적 각론으로 문명 번안하는 작업을 시도하지 않는다. 대신에 석천동에서 주경야독과 강학 활동에 전념하며 주자학 이후 전개될 신문명 기획에 관한 비판적 경학론을 순차적으로 제출해 나간다.
제7장 <결론>에서 저자는 두 연행록에서 통찰한 하나의 키워드인 사실주의적(事實主義的) 사조를 박세당 사상체계의 전체적 규모에 비추어 평가하였다. 이 작업에 앞서 저자는 사실주의(寫實主義)로 번안되는 서구의 리얼리즘(realism)과 박세당식 사실주의 간의 개념적 동이를 지적하였다. 저자는 리얼리즘과 박세당식 사실주의는 동 시대 인간의 삶과 사회의 제반 측면을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하지만 박세당식 사실주의가 프락시스와 프랙티스, 곧 경학론과 경세론을 아우르는 지평 위에 구축되었다는 점에서, 양자 간에 유지되는 분명한 절연관계를 확인해 보였다.
나아가 저자는 박세당이 구축한 사실주의의 주요 외연으로서 ①현실인식론과 ②비판적 경학론, 그리고 ③실효(實效) 지향의 경세론과 ④주충신(主忠信)의 인간학이라는 네 가지 범주를 설정하였다. 그런 다음 이 네 가지 범주를 관통하는 공약수로서 전통적인 개념 구분 방식인 실학(實學)과 도학(道學)을 유인함으로써 하나의 잠정적인 결론을 도출하고자 했다. 저자에 의하면 두 가지 연행록과 박세당의 사상체계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사실주의적 사조의 두 성분인 실학과 도학은, 최소한 존재론적 차원에서는 일방의 것이 타방이 것에 각기 상감·접목된 이른바 차연(差延, Differance)의 방식을 취함으로써 구조 내적 긴장을 유발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그러나 실학과 도학이 현실적으로 표출되는 국면을 맞게 되면 이 네 가지 외연 사이에는 불가피한 분열의 징후가 감지되게 된다. 저자는 그 원인을 사실주의의 한 축인 경세론적 전망에서 찾고, 『서계연록』을 위시한 여타의 저술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단초에 주목했다. 그 중에는 사행에서 체험한 가칭 청조 충격을 빈 괄호 안에 넣어 판단을 중지시켰던 귀국 이후의 문명 번안 자세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태도는 후대의 북학파(北學派)가 보여준 선도적인 문명 번안 자세와는 명백히 대비되는 양상인데, 그 이면에는 분명 시간성의 문제도 깊이 관여하고 있을 것이다. 대신 박세당은 소유의 영역보다는 존재 지향의 인간학에 몰입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에 저자는, 『서계연록』은 박세당이 구축한 사실주의의 외연 속에는 시간의 분절(分節)이 겹으로 교차하는 무늬로 아로새겨질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으며, 그의 사실주의는 그 뚜렷한 윤곽에도 불구하고 가시적이고 입체적인 건립이 어려운 한계를 보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박세당의 사상체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로서 사실주의적 양상을 형상화하고 그 한계까지 제시한 이 책은 주텍스트와 서브텍스트, 복합테스트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사료를 읽는 시각을 명확히 하고, 사료에 담긴 역사적 진실을 추적한 뛰어난 저작이다. 역사 전문학자의 온축된 결과를 잘 반영한 이 책이 앞으로 박세당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리라 기대된다.
목차
목차
책머리에
제1장 서 론
1. 연구 범위와 방법론
2. 『서계연록(西溪燕錄)』의 구성과 특징
3. 생애와 연행
1) 생애
2) 연행 전후
제2장 박세당의 대청탐규(對淸探窺)
1. 정치·군사적 정탐
1) 한족(漢族)의 실태와 청조의 범죄자 및 반민(叛民) 대책
(1) 사행과 탐규 (2) 한족의 차별 실상 (3) 청조의 범죄자와 반민 처벌
2) 청조와 몽골의 군사적 동향 정탐
(1) 청조의 정국과 거리 탐문 (2) 반청세력의 정탐과 반청복명에 대한 기대
(3) 몽골의 범경(犯境) 사태:희봉사(喜峯事)
3) 소결
2. 사회·문화적 탐문:대청(對淸) 예속(禮俗) 인식
1) 풍속 관찰
2) 예악(禮樂) 관찰
3) 소결
제3장 1669년 원일(元日)의 조의기(朝儀記)
1. 조참의와 주요 관찰 포인트
1) 원일 정조
2) 황제의 동정(動靜)과 여타의 시점
2. 사연(賜宴)과 주요 관찰 포인트
3. 소결
제4장 『서계연록』의 고증기록과 실증적 탐구
1. 산천지리의 실증과 그 원칙
2. 사원과 성 및 여타의 소재
3. 비(碑) · 명(銘)과 회동관의 벽서 고증
4. 소결
제5장 불교적 서술단위와 박세당의 불교 인식
1. 사원과 승려에 관한 묘사
2. 계율·수행 인식과 몇 쟁점
3. 소결
제6장 조선 피로인 묘사와 민물(民物) 견문
1. 병자호란의 잔흔과 이주의 몇 유형
1) 『서계연록』 속의 조선 피로인
2) 쇄래(刷來) 이주와 동래(東來) 이주
(1) 쇄래 이주 (2) 동래 이주:「강세작전(康世爵傳)」
3) 소결
2. 사행(使行)과 청조 문물의 체험
1) 민물 견문
2) 역법논쟁의 체험
3) 소결
제7장 결론 :『서계연록』과 박세당식 사실주의(事實主義)
참고문헌
찾아보기
제1장 서 론
1. 연구 범위와 방법론
2. 『서계연록(西溪燕錄)』의 구성과 특징
3. 생애와 연행
1) 생애
2) 연행 전후
제2장 박세당의 대청탐규(對淸探窺)
1. 정치·군사적 정탐
1) 한족(漢族)의 실태와 청조의 범죄자 및 반민(叛民) 대책
(1) 사행과 탐규 (2) 한족의 차별 실상 (3) 청조의 범죄자와 반민 처벌
2) 청조와 몽골의 군사적 동향 정탐
(1) 청조의 정국과 거리 탐문 (2) 반청세력의 정탐과 반청복명에 대한 기대
(3) 몽골의 범경(犯境) 사태:희봉사(喜峯事)
3) 소결
2. 사회·문화적 탐문:대청(對淸) 예속(禮俗) 인식
1) 풍속 관찰
2) 예악(禮樂) 관찰
3) 소결
제3장 1669년 원일(元日)의 조의기(朝儀記)
1. 조참의와 주요 관찰 포인트
1) 원일 정조
2) 황제의 동정(動靜)과 여타의 시점
2. 사연(賜宴)과 주요 관찰 포인트
3. 소결
제4장 『서계연록』의 고증기록과 실증적 탐구
1. 산천지리의 실증과 그 원칙
2. 사원과 성 및 여타의 소재
3. 비(碑) · 명(銘)과 회동관의 벽서 고증
4. 소결
제5장 불교적 서술단위와 박세당의 불교 인식
1. 사원과 승려에 관한 묘사
2. 계율·수행 인식과 몇 쟁점
3. 소결
제6장 조선 피로인 묘사와 민물(民物) 견문
1. 병자호란의 잔흔과 이주의 몇 유형
1) 『서계연록』 속의 조선 피로인
2) 쇄래(刷來) 이주와 동래(東來) 이주
(1) 쇄래 이주 (2) 동래 이주:「강세작전(康世爵傳)」
3) 소결
2. 사행(使行)과 청조 문물의 체험
1) 민물 견문
2) 역법논쟁의 체험
3) 소결
제7장 결론 :『서계연록』과 박세당식 사실주의(事實主義)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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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저자
김종수
저자 김종수(金鍾秀)는 1963년 경남 하동 출생. 1986년 부산대학교 사범대 윤리교육과 졸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한국철학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사단법인 유도회 한문연수원과 가산불교문화연구원 등에서 수학. 강릉대·인천교대·청주교대·한국교원대·한양대 등에서 강의. 현재 세명대학교 교양학부 강사.
역주서로 『국역 서계연록』이 있으며, 박세당 사상과 관련한 다수의 논문 발표.
역주서로 『국역 서계연록』이 있으며, 박세당 사상과 관련한 다수의 논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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