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봉사(연세국학총서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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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봉사』는 주희의 저술 가운데 봉사만을 따로 떼어내어 한 권의 책으로 편집, 간행한 책이다. 이것은 '조선주자학'이 성립된 이후 당시 조선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주희의 봉사에서 찾고하 한 데에 기인한 것이다. 율곡 이이를 비롯하여 우암 송시열 등이 여기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국왕영조와 정조 역시 <주자봉사>를 경연의 자료료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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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주자봉사는 어떤 책인가?
「주자봉사(朱子封事)」는 17세기 중반 조선사회에서 간행되었던 책으로, 남송대 주자(朱子:朱熹, 1130~1200)가 관료로 재직 중 군주에게 올렸던(혹은 올리려 했던) 봉사(封事), 주차(奏箚), 차자(箚子) 등의 글을 묶은 작은 책자로, 모두 33편이 4권 체재로 담겨 있다. 책 제목을 '봉사'로 삼았으나 실제 실려 있는 것은 봉사와 주차, 차자 등 다양한 형식의 글이다. 곧 거질의 주자 문집에서 주요 상소문만을 이용하기 쉽게 별도의 책으로 만든 것이라 할 수 있어, 말하자면 「주자봉사」는 주희의 여러 글 가운데 일부를 추려 엮은 일종의 상소문 선집이었다.
이 책의 여러 상소문들은 주자가 그가 살았던 남송의 현실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현실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모습을 풍부하게 보여준다. 주자가 관직에 나아가 있는 동안 남송을 다스렸던 군주는 고종, 효종, 광종, 영종 등 모두 4명이었다. 그들은 금나라의 중국 침략으로 국도를 양자강 남쪽으로 옮겨 새로이 출발한 남송의 초기 군주들로, 위기에 빠진 국가질서를 재정비하고 안정시켜야 하는 한편으로 금에게서 오는 위협을 적절히 풀어가야 하는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었다.
「주자봉사」에는 주자의 경세론이 다양하게 담겨 있다고 할 것인데, 현실 속에서의 주자학의 실천성을 확인하려고 할 경우, 이 책에서 그 어떤 자료보다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책의 상소문들은 그 담고 있는 내용, 주제 등과 연관하여 두 측면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하나는 국왕의 구언교에 응하여 작성하거나 혹은 국왕을 직접 만나 진술한 것으로, 이들 글에서는 대체로 제왕학의 근본, 그리고 남송이 처한 현실 문제를 타개할 수 있는 근본 대책을 다루고 있다. 다른 하나는 지방관으로 재직하며, 실제 그 지방의 사회경제적 현안 문제를 발견하고 이에 대한 정치적 대책을 제시했던 경우이다.
이 책이 조선 사회에 처음 출현한 시기는 17세기 중엽, 효종~현종대로 추측된다. 이는 이 무렵 간행된 「고사촬요(故事撮要)」에 4권 체재의 「주자봉사」가 출판되어 있다는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때의 「주자봉사」를 누가 혹은 어떤 기관에서 만들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숙종대 송시열과 박세채 등이 강독하였던 「주자봉사」와 현존하고 있는 「주자봉사」는 같은 책임은 분명하다. 이런 「주자봉사」의 간행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없던 조선 학계만의 개성을 충분히 드러내는 사례이거니와, 이 책을 통해 조선 사람들은 주자의 학문과 사상을 풍부하게 익힐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조선의 위정자ㆍ지식인들은 주자의 성리설, 주자의 경서 해석 등을 통해 주자학을 익혔지만, 주자 상소문 또한 주자의 정신을 익혀나감에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조선사회에서 주자봉사의 의미
조선사회에서의 주자의 경세론 이해는 이미 조선초기부터 여러 자료를 통해 이루어졌다.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주자의 봉사문에 제시된 여러 정치론을 원용하며 조선의 국가체제를 구상했던 것부터,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에서의 주자 봉사문의 많은 인용 등은 그 대표적 예이다.
특히 16~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서, '이적'의 야만족으로 여기던 여진족에게 군사적 정치적으로 신복(臣服)하는 관계를 맺어야 했던 조선의 상황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군사력에 밀려 국토의 일부를 잃어버리고 국도를 옮기며 새로이 남송의 역사를 개척해야 했던 12세기 송나라와 크게 유사한 점이 있었던 점에서 17세기 이후 조선사회에서 주자학의 정치론을 보다 확대하기를 바라는 요청이 거셌던 것은 당연했다.
이러한 흐름을 주도했던 정치세력은 서인이었으며, 송시열(宋時烈)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효종ㆍ현종ㆍ숙종대에 활동했던 송시열은 양반과 지주의 신분적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체제의 수립을 도모하고, 사상 문화의 측면에서 조선의 허약함을 중화계승의 이념을 통하여 벗어날 것, 사상적ㆍ정신적으로 청나라에 굴복하지 말 것, 국가의 힘을 보다 강화하여 복수설치(復讐雪恥)할 것 등을 극력 강조했다. 그가 내세운 논리는 이 시기 조선의 많은 사람들이 그 필요성을 공감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었는데, 송시열은 이러한 의견을 철저히 주자학의 사유에 기초하여 모색했다. 특히, 주희의 봉사문은 그가 상소문이나 정책 토론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해 나감에 주요한 전거였다. 이 시기 많은 사람들이 주희의 상소문을 활용하고 있었지만, 송시열만큼 주희의 상소문을 중시한 사람은 없었다. 17세기 중엽 「주자봉사」가 책으로 간행되며 유통되었던 것은 그러한 사회적 수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조선의 양반지식인, 위정자들은 보다 쉽게 그리고 집중적으로 주자의 경세론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책을 경연(經筵)에서 읽었던 영조와 정조는, 이를 통하여 주자가 제시한 바 국가를 경영하는데 필요한 기본 논리와 방도를 구체적으로 익힐 수 있었다. 이들이 주자의 생각에만 경도되어 정치사상을 키웠던 것은 아니지만, 주자의 사상 또한 폭넓게 검토하여 사유의 자양분으로 삼는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다양한 학문과 사상, 복잡한 정치적 관점을 절충하고 통합하며 조선을 다스리려던 이들에게 주자학의 학습은 그러한 노력의 하나였다.
17ㆍ18세기 조선에서의 「주자봉사」의 간행, 그리고 경연에서의 이 책 강독은 조선 사람들이 주자학을 어떻게 자기 것으로 영유하고 또 활용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이 일을 통해 조선의 국왕이 주자학을 어떻게 학습하고 소화하는지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주자봉사」의 번역은 국내 학계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이 일 자체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거니와 한국사, 한국한문학, 한국철학을 전공한 여러 학자들이 모여 오랫동안 같이 읽고 같이 번역한 사실 또한 눈여겨 볼 수 있다. 이들 연구자들은 「주차집보(朱箚輯補)」와 같은, 조선후기에 나온 주석서들을 최대한 참고하며 난해하기 그지없는 「주자봉사」의 번역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과거 한 시대를 풍미하고 지배했던 사유의 실체에 접근하는 일이 쉽지 않게 되어버린 오늘날, 그 사유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수단 하나를 우리 사회에 제시했고, 또 조선시대 이해에 필요한 필수 고전문헌에 대해 꼼꼼히 번역하고 주석을 가함으로써 한국 전통시대의 고전문헌에 대한 기초 연구가 여전히 부실한 학계의 현실을 조금은 낫게 만들었다.
이 책은 전통시대 고전문헌에 대한 전문학자들의 충분한 연구와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성취이다. 이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15~16년 전에 주자사상연구회를 만들어 주자학 관련 원서 읽기를 꾸준히 해 왔으며, 그 성과로 그간 「주서백선(朱書百選)」을 번역, 간행했고 「주자학과 조선의 유자」, 「조선의 주자학과 실학」과 같은 연구서도 낸 바 있다.
근년 정조에 대한 '개혁 이미지'의 강조, 영정조대 실학과 윤휴 등 남인·소론계열 학자들의 '개혁사상'에 조명이 집중됨으로써 이 시기에 대한 관심들은 높아졌지만, 정작 당대 대부분 양반 관료나 유학자들의 사상이나 현실인식에 대한 이해는 별로 없었다. 이 시기 역사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을 갖추기 위해서도, 국왕부터 관료, 양반지식인들이 '정치교본'으로 여기고 학습했던 「주자봉사」를 반드시 일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주자봉사(朱子封事)」는 17세기 중반 조선사회에서 간행되었던 책으로, 남송대 주자(朱子:朱熹, 1130~1200)가 관료로 재직 중 군주에게 올렸던(혹은 올리려 했던) 봉사(封事), 주차(奏箚), 차자(箚子) 등의 글을 묶은 작은 책자로, 모두 33편이 4권 체재로 담겨 있다. 책 제목을 '봉사'로 삼았으나 실제 실려 있는 것은 봉사와 주차, 차자 등 다양한 형식의 글이다. 곧 거질의 주자 문집에서 주요 상소문만을 이용하기 쉽게 별도의 책으로 만든 것이라 할 수 있어, 말하자면 「주자봉사」는 주희의 여러 글 가운데 일부를 추려 엮은 일종의 상소문 선집이었다.
이 책의 여러 상소문들은 주자가 그가 살았던 남송의 현실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현실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모습을 풍부하게 보여준다. 주자가 관직에 나아가 있는 동안 남송을 다스렸던 군주는 고종, 효종, 광종, 영종 등 모두 4명이었다. 그들은 금나라의 중국 침략으로 국도를 양자강 남쪽으로 옮겨 새로이 출발한 남송의 초기 군주들로, 위기에 빠진 국가질서를 재정비하고 안정시켜야 하는 한편으로 금에게서 오는 위협을 적절히 풀어가야 하는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었다.
「주자봉사」에는 주자의 경세론이 다양하게 담겨 있다고 할 것인데, 현실 속에서의 주자학의 실천성을 확인하려고 할 경우, 이 책에서 그 어떤 자료보다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책의 상소문들은 그 담고 있는 내용, 주제 등과 연관하여 두 측면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하나는 국왕의 구언교에 응하여 작성하거나 혹은 국왕을 직접 만나 진술한 것으로, 이들 글에서는 대체로 제왕학의 근본, 그리고 남송이 처한 현실 문제를 타개할 수 있는 근본 대책을 다루고 있다. 다른 하나는 지방관으로 재직하며, 실제 그 지방의 사회경제적 현안 문제를 발견하고 이에 대한 정치적 대책을 제시했던 경우이다.
이 책이 조선 사회에 처음 출현한 시기는 17세기 중엽, 효종~현종대로 추측된다. 이는 이 무렵 간행된 「고사촬요(故事撮要)」에 4권 체재의 「주자봉사」가 출판되어 있다는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때의 「주자봉사」를 누가 혹은 어떤 기관에서 만들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숙종대 송시열과 박세채 등이 강독하였던 「주자봉사」와 현존하고 있는 「주자봉사」는 같은 책임은 분명하다. 이런 「주자봉사」의 간행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없던 조선 학계만의 개성을 충분히 드러내는 사례이거니와, 이 책을 통해 조선 사람들은 주자의 학문과 사상을 풍부하게 익힐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조선의 위정자ㆍ지식인들은 주자의 성리설, 주자의 경서 해석 등을 통해 주자학을 익혔지만, 주자 상소문 또한 주자의 정신을 익혀나감에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조선사회에서 주자봉사의 의미
조선사회에서의 주자의 경세론 이해는 이미 조선초기부터 여러 자료를 통해 이루어졌다.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주자의 봉사문에 제시된 여러 정치론을 원용하며 조선의 국가체제를 구상했던 것부터,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에서의 주자 봉사문의 많은 인용 등은 그 대표적 예이다.
특히 16~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서, '이적'의 야만족으로 여기던 여진족에게 군사적 정치적으로 신복(臣服)하는 관계를 맺어야 했던 조선의 상황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군사력에 밀려 국토의 일부를 잃어버리고 국도를 옮기며 새로이 남송의 역사를 개척해야 했던 12세기 송나라와 크게 유사한 점이 있었던 점에서 17세기 이후 조선사회에서 주자학의 정치론을 보다 확대하기를 바라는 요청이 거셌던 것은 당연했다.
이러한 흐름을 주도했던 정치세력은 서인이었으며, 송시열(宋時烈)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효종ㆍ현종ㆍ숙종대에 활동했던 송시열은 양반과 지주의 신분적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체제의 수립을 도모하고, 사상 문화의 측면에서 조선의 허약함을 중화계승의 이념을 통하여 벗어날 것, 사상적ㆍ정신적으로 청나라에 굴복하지 말 것, 국가의 힘을 보다 강화하여 복수설치(復讐雪恥)할 것 등을 극력 강조했다. 그가 내세운 논리는 이 시기 조선의 많은 사람들이 그 필요성을 공감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었는데, 송시열은 이러한 의견을 철저히 주자학의 사유에 기초하여 모색했다. 특히, 주희의 봉사문은 그가 상소문이나 정책 토론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해 나감에 주요한 전거였다. 이 시기 많은 사람들이 주희의 상소문을 활용하고 있었지만, 송시열만큼 주희의 상소문을 중시한 사람은 없었다. 17세기 중엽 「주자봉사」가 책으로 간행되며 유통되었던 것은 그러한 사회적 수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조선의 양반지식인, 위정자들은 보다 쉽게 그리고 집중적으로 주자의 경세론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책을 경연(經筵)에서 읽었던 영조와 정조는, 이를 통하여 주자가 제시한 바 국가를 경영하는데 필요한 기본 논리와 방도를 구체적으로 익힐 수 있었다. 이들이 주자의 생각에만 경도되어 정치사상을 키웠던 것은 아니지만, 주자의 사상 또한 폭넓게 검토하여 사유의 자양분으로 삼는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다양한 학문과 사상, 복잡한 정치적 관점을 절충하고 통합하며 조선을 다스리려던 이들에게 주자학의 학습은 그러한 노력의 하나였다.
17ㆍ18세기 조선에서의 「주자봉사」의 간행, 그리고 경연에서의 이 책 강독은 조선 사람들이 주자학을 어떻게 자기 것으로 영유하고 또 활용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이 일을 통해 조선의 국왕이 주자학을 어떻게 학습하고 소화하는지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주자봉사」의 번역은 국내 학계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이 일 자체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거니와 한국사, 한국한문학, 한국철학을 전공한 여러 학자들이 모여 오랫동안 같이 읽고 같이 번역한 사실 또한 눈여겨 볼 수 있다. 이들 연구자들은 「주차집보(朱箚輯補)」와 같은, 조선후기에 나온 주석서들을 최대한 참고하며 난해하기 그지없는 「주자봉사」의 번역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과거 한 시대를 풍미하고 지배했던 사유의 실체에 접근하는 일이 쉽지 않게 되어버린 오늘날, 그 사유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수단 하나를 우리 사회에 제시했고, 또 조선시대 이해에 필요한 필수 고전문헌에 대해 꼼꼼히 번역하고 주석을 가함으로써 한국 전통시대의 고전문헌에 대한 기초 연구가 여전히 부실한 학계의 현실을 조금은 낫게 만들었다.
이 책은 전통시대 고전문헌에 대한 전문학자들의 충분한 연구와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성취이다. 이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15~16년 전에 주자사상연구회를 만들어 주자학 관련 원서 읽기를 꾸준히 해 왔으며, 그 성과로 그간 「주서백선(朱書百選)」을 번역, 간행했고 「주자학과 조선의 유자」, 「조선의 주자학과 실학」과 같은 연구서도 낸 바 있다.
근년 정조에 대한 '개혁 이미지'의 강조, 영정조대 실학과 윤휴 등 남인·소론계열 학자들의 '개혁사상'에 조명이 집중됨으로써 이 시기에 대한 관심들은 높아졌지만, 정작 당대 대부분 양반 관료나 유학자들의 사상이나 현실인식에 대한 이해는 별로 없었다. 이 시기 역사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을 갖추기 위해서도, 국왕부터 관료, 양반지식인들이 '정치교본'으로 여기고 학습했던 「주자봉사」를 반드시 일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목차
목차
머리말
조선후기「 주자봉사(朱子封事)」의 간행과 활용
주자봉사 권1
임오년 봉사 壬午應詔封事
경자년 봉사 庚子應詔封事
진주원(進奏院)에 올리는 글 進奏疏狀
무신년 봉사 戊申封事
주자봉사 권2
기유년(1189)에 올리려던 봉사 己酉擬上封事
갑인년(1194)에 올리려던 봉사 甲寅擬上封事
주자봉사 권3
계미년(1163) 수공전(垂拱殿)에서 올린 주차 1 癸未垂拱奏箚 一
수공전(垂拱殿)에서 올린 주차 2 垂拱奏箚 二
수공전(垂拱殿)에서 올린 주차 3 垂拱奏箚 三
신축년(1181)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1 辛丑延和奏箚 一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2 延和奏箚 二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3 延和奏箚 三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4 延和奏箚 四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5 延和奏箚 五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6 延和奏箚 六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7 延和奏箚 七
주자봉사 권4
무신년(1188)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1 戊申延和奏箚 一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2 延和奏箚 二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3 延和奏箚 三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4 延和奏箚 四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5 延和奏箚 五
갑인년(1194) 행궁(行宮)의 편전에서 올린 주차 1 甲寅行宮便殿奏箚 一
행궁(行宮)의 편전에서 올린 주차 2 行宮便殿奏箚 二
행궁(行宮)의 편전에서 올린 주차 3 行宮便殿奏箚 三
행궁(行宮)의 편전에서 올린 주차 4 行宮便殿奏箚 四
행궁(行宮)의 편전에서 올린 주차 5 行宮便殿奏箚 五
덕업(德業)에 매진하기를 요청하는 차자 乞進德箚子
휴가와 일에 구애되지 말고 날마다 진강(進講)을 하도록 간청하는 차자 乞不以假故逐日進講箚子
담당 관리를 뽑아서 봉사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간청하는 차자 乞差官看詳封事箚子
서경절(瑞慶節)에 하례를 받지 말도록 요청하는 차자 乞瑞慶節不受賀箚子
경연이 끝나고 혼자 남아 면대하면서 네 가지 일을 진언한 차자 經筵留身面陳四事箚子
재이(災異)를 논하는 차자 論災異箚子
간상봉사관(看詳封事官)이 임금께 직접 보고하도록 요청하는 차자 乞令看詳封事官面奏箚子
상복(喪服)에 대한 토론을 요청하는 차자 乞討論喪服箚子
삼례(三禮)를 수찬하도록 요청하는 차자 乞脩三禮箚子
原 文
조선후기「 주자봉사(朱子封事)」의 간행과 활용
주자봉사 권1
임오년 봉사 壬午應詔封事
경자년 봉사 庚子應詔封事
진주원(進奏院)에 올리는 글 進奏疏狀
무신년 봉사 戊申封事
주자봉사 권2
기유년(1189)에 올리려던 봉사 己酉擬上封事
갑인년(1194)에 올리려던 봉사 甲寅擬上封事
주자봉사 권3
계미년(1163) 수공전(垂拱殿)에서 올린 주차 1 癸未垂拱奏箚 一
수공전(垂拱殿)에서 올린 주차 2 垂拱奏箚 二
수공전(垂拱殿)에서 올린 주차 3 垂拱奏箚 三
신축년(1181)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1 辛丑延和奏箚 一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2 延和奏箚 二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3 延和奏箚 三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4 延和奏箚 四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5 延和奏箚 五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6 延和奏箚 六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7 延和奏箚 七
주자봉사 권4
무신년(1188)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1 戊申延和奏箚 一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2 延和奏箚 二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3 延和奏箚 三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4 延和奏箚 四
연화전(延和殿)에서 올린 주차 5 延和奏箚 五
갑인년(1194) 행궁(行宮)의 편전에서 올린 주차 1 甲寅行宮便殿奏箚 一
행궁(行宮)의 편전에서 올린 주차 2 行宮便殿奏箚 二
행궁(行宮)의 편전에서 올린 주차 3 行宮便殿奏箚 三
행궁(行宮)의 편전에서 올린 주차 4 行宮便殿奏箚 四
행궁(行宮)의 편전에서 올린 주차 5 行宮便殿奏箚 五
덕업(德業)에 매진하기를 요청하는 차자 乞進德箚子
휴가와 일에 구애되지 말고 날마다 진강(進講)을 하도록 간청하는 차자 乞不以假故逐日進講箚子
담당 관리를 뽑아서 봉사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간청하는 차자 乞差官看詳封事箚子
서경절(瑞慶節)에 하례를 받지 말도록 요청하는 차자 乞瑞慶節不受賀箚子
경연이 끝나고 혼자 남아 면대하면서 네 가지 일을 진언한 차자 經筵留身面陳四事箚子
재이(災異)를 논하는 차자 論災異箚子
간상봉사관(看詳封事官)이 임금께 직접 보고하도록 요청하는 차자 乞令看詳封事官面奏箚子
상복(喪服)에 대한 토론을 요청하는 차자 乞討論喪服箚子
삼례(三禮)를 수찬하도록 요청하는 차자 乞脩三禮箚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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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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