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부원록(강화고려역사재단 학술총서 1)
1866년 병인양요의 알려지지 않은 실상을 새롭게 밝힌 기록『개성부원록』.이 책은 1866년(고종3) 병인양요가 발생하자, 개성에서 편성된 지원부대의 종군기로, 본서는 일반인들도 읽기 쉽게 한국사 전공학자들이 이를 번역하고, 주석과 해제를 단 것이다. 책에서는 당시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병인양요와 관련하여 당시 군대와 지방의 생생한 장면이 눈에 그려질 정도이다. 지방민의 동향, 선비와 평민들의 생각, 행동방식, 보고서의 혼란, 잘못된 정보와 소문, 서양인에 대한 평가 등 전시상태에서 벌어지는 당혹감과 혼란 상태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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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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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부원록(開城赴援錄)]은 1866년(고종3) 병인양요가 발생하자, 개성에서 편성된 지원부대의 종군기로, 본서는 일반인들도 읽기 쉽게 한국사 전공학자들이 이를 번역하고, 주석과 해제를 단 것이다.
1866년 9월 6일(음력) 강화에 나타난 프랑스 군함에서 병사들이 기습적으로 강화 갑곶에 상륙했다. 이들의 공격으로 8일에 강화읍이 함락되고 강화유수는 강화도 서쪽으로 피난했다. 프랑스군의 침공보고를 받은 정부는 즉시 순무영을 조직하고, 오군영의 병사를 동원하는 한편, 강화에 인접한 개성과 교동에도 지원부대를 편성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을 받아 개성부에서 지원부대를 편성한 것이 9월 11일(음력)이었다. 이 부대는 김포반도 북쪽 해안인 정곶과 김포반도를 오가며 강화도 도하를 모색했다. 그러나 조선군의 강화진입을 방지하려는 프랑스 군함의 포격으로 개성군이나 순무영군 모두 도하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10월 1일(음력), 순무영 천총 양헌수가 순무영군 500명을 이끌고 도하에 성공, 정족산성으로 들어갔다. 강화읍에 있던 프랑스군은 이 사실을 알고 양헌수군을 공격하다가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했다. 당황한 프랑스군은 10월 5일(음력)에 철수했다. 개성의 지원군은 정족산성 전투와 철수로 프랑스군의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10월 4일(음력)에 강화에 진입했다. 개성군이 강화읍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프랑스군이 철군하는 바람에 개성군은 직접적인 교전은 벌이지 못했다. 그러나 치안유지, 프랑스 군의 재침을 경계하기 위한 경계업무 등을 수행하며 강화의 복구를 지원하게 되었다. 강화도 지원을 목적으로 편성된 군대는 공식적으로 10월 14일(음력)에 해산했고 개성의 중군과 장교들 등 유수영 근무자들은 일상적인 근무로 돌아갔다. 이것이 병인양요의 전말이며, ?개성부원록?은 이때까지 이들 지원군의 활약상을 담은 기록이다.
[개성부원록]은 상하(乾?坤하) 2권으로 구성되었는데, 출간되지는 않았고 필사본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병인양요가 끝나고 그에 따른 개성군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한 작업이 1866년 12월 말부터 1867년 1월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때까지 개성의 하급장교들이나 향리들에 대한 포상이 없었기 때문에 개성부의 차원에서 이에 대한 정리가 필요했다. 실은 개성 지원군, 특히 하급장교인 향리들의 활약상을 당시 정부에서 높게 평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개성부 유수였던 김수현은 공조판서로, 강화유수 이장렴은 삼도통어사로, 천총 양헌수는 강화중군으로 임명되었지만, 개성군에 대한 치하는 상대적으로 소략했다. 개성부 사족과 주민에 대한 포상도 있었지만 개별적인 포상은 거의가 개성군 종군자가 아니라 자기 재산을 털어 군량미를 제공한 부호들에게 시상되었다. 즉 전쟁에 필요한 물자지원과 군수품 수송, 군사들의 접대 등에 사재를 털고 고생한 인물들에 대한 보상적 포상이 대다수였다. 정작 전투에 참전한 개성군의 참전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포상도 내려오지 않았다. 개성 지원군에 참전해서 고생했던 사람들은 불만이 컸을 것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활약과 노고에 대한 일대 정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에 ?병인부원기?와 ?개성부원록?을 작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현판을 제작, 그 내용까지 ?개성부원록?에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보았는지 정부는 뒤늦게 1871년 3월 25일 개성유수 서형순의 보고를 근거로 개성군 참전자에 대한 포상을 하였다.
[개성부원록]의 편찬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력하게 추정할 수 있는 사람은 개성의 사족, 유생인 왕석수와 민치오이다. 물론 누가 편찬자이든 간에 중요한 사실은 ?개성부원록?이 개성부의 관리와 향리, 참전자들의 증언과 협력을 통해 탄생한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책의 구성은 책을 쓰게 된 동기 부분과 1866년 7월 12일부터 다음해 1월 11일까지의 날짜별 기록, 마지막의 기문 ?병인부원기?로 구분, 편집되어 있다.
[개성부원록]에서는 당시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병인양요와 관련하여 당시 군대와 지방의 생생한 장면이 눈에 그려질 정도이다. 지방민의 동향, 선비와 평민들의 생각, 행동방식, 보고서의 혼란, 잘못된 정보와 소문, 서양인에 대한 평가 등 전시상태에서 벌어지는 당혹감과 혼란 상태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강화를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개성군 중 자발적으로 참여한 양반층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생각하는 이양선, 서양오랑캐라고 부르는 외세에 대한 내용을 보면 개성군과 프랑스군의 직접 교전이 없었던 탓에 조선의 덕화에 힘입어 서양오랑캐가 스스로 물러갔다고 하는 등 당시 국제정세나 서양에 대한 정확한 정보 혹은 지식이 상당히 부족했던 측면 등을 볼 수 있다.
[개성부원록]은 병인양요의 새로운 자료일 뿐 아니라 전쟁사와 한말 지식인의 지성사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귀중하고 독보적인 자료이다. 특히 기존의 병인양요 관련 기록이 정부 측 시각이나 강화를 침공한 프랑스 군의 입장에서 쓰여진 기록인데 반해, ?개성부원록?은 현지의 지방관, 사족, 향리와 군교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가치를 지닌 자료이다. 병인양요만이 아니라 한말 지방인의 인식과 행동방식에 대한 지성사적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도서출판 혜안 T) 02-3141-3711 김태규 정리
목차
목차
범 례
해제_ 한말 지방민의 현실인식과 서양에 대한 대응
1. 개성부원록의 편찬경위
2. 개성부원록의 주요 내용과 자료적 가치
開城赴援錄 上 31
開城赴援錄 下 175
부록_ 인물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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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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