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정치사 연구(양장본 HardCover)
Regular price
$38.20
Sale price
Regular price
✈️
Estimated delivery date 예상 배송일
Standard Shipping
불러오는 중...
주문일로부터 8-12 영업일
Express Shipping
불러오는 중...
주문일로부터 6-8 영업일
조선왕조의 정치사에서 가장 드라마의 소재로 많이 다루어지고, 현실 정치판에서도 언급이 많이 된 두 사건은 태종 이방원이 주연인 ‘제1차 왕자 난’과 세조 수양대군이 주연인 ‘계유정난’이다.
‘제1차 왕자 난’을 다룬 것들로는 [용의 눈물]을 비롯해, [정도전], 최근의 [육룡이 나르샤]까지, ‘계유정난’을 다룬 것들로는 [왕과 비]를 비롯, [공주의 남자], [관상] 등 수없이 많은 드라마, 영화, 소설 등으로 만들어져 왔다. 이만큼 여러 인간군상들의 욕망과 비루함, 형제와 조카들에까지 칼을 들이대는 권력의 민낯,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비극의 탄생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들도 드물다는 얘기일 것이다.
보통 이 두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신권과 왕권’ 간의 정치주도권 투쟁 및 그에 따른 조선전기 정치체제의 정립이란 데서 찾는 것이다. 그리고 두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이자 동력들로 이방원과 수양대군 두 ‘풍운아’의 ‘권력욕=정치적 야심’을 손꼽는다.
그간 역사학계에서 꾸준히 조선전기 정치사에 대한 연구를 다져온 저자 한춘순 교수는 조선왕조의 정치틀을 결정한 두 사건의 원인과 귀결에 대해 이와는 다른 점들을 이번 책에서 찾아 보여준다.
‘제1차 왕자 난’을 다룬 것들로는 [용의 눈물]을 비롯해, [정도전], 최근의 [육룡이 나르샤]까지, ‘계유정난’을 다룬 것들로는 [왕과 비]를 비롯, [공주의 남자], [관상] 등 수없이 많은 드라마, 영화, 소설 등으로 만들어져 왔다. 이만큼 여러 인간군상들의 욕망과 비루함, 형제와 조카들에까지 칼을 들이대는 권력의 민낯,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비극의 탄생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들도 드물다는 얘기일 것이다.
보통 이 두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신권과 왕권’ 간의 정치주도권 투쟁 및 그에 따른 조선전기 정치체제의 정립이란 데서 찾는 것이다. 그리고 두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이자 동력들로 이방원과 수양대군 두 ‘풍운아’의 ‘권력욕=정치적 야심’을 손꼽는다.
그간 역사학계에서 꾸준히 조선전기 정치사에 대한 연구를 다져온 저자 한춘순 교수는 조선왕조의 정치틀을 결정한 두 사건의 원인과 귀결에 대해 이와는 다른 점들을 이번 책에서 찾아 보여준다.
Couldn't load pickup availability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조선의 정치체제를 놓고 신권과 왕권, 두 노선의 시작과 끝을 다루다!
조선왕조의 정치사에서 가장 드라마의 소재로 많이 다루어지고, 현실 정치판에서도 언급이 많이 된 두 사건은 태종 이방원이 주연인 '제1차 왕자 난'과 세조 수양대군이 주연인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제1차 왕자 난'을 다룬 것들로는 [용의 눈물]을 비롯해, [정도전], 최근의 [육룡이 나르샤]까지, '계유정난'을 다룬 것들로는 [왕과 비]를 비롯, [공주의 남자], [관상] 등 수없이 많은 드라마, 영화, 소설 등으로 만들어져 왔다. 이만큼 여러 인간군상들의 욕망과 비루함, 형제와 조카들에까지 칼을 들이대는 권력의 민낯,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비극의 탄생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들도 드물다는 얘기일 것이다.
보통 이 두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신권과 왕권' 간의 정치주도권 투쟁 및 그에 따른 조선전기 정치체제의 정립이란 데서 찾는 것이다. 그리고 두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이자 동력들로 이방원과 수양대군 두 '풍운아'의 '권력욕=정치적 야심'을 손꼽는다.
그간 역사학계에서 꾸준히 조선전기 정치사에 대한 연구를 다져온 저자 한춘순 교수는 조선왕조의 정치틀을 결정한 두 사건의 원인과 귀결에 대해 이와는 다른 점들을 이번 책에서 찾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우선 '제1차 왕자 난(무인지변)'을 보자. 보통 언급되는 이방원과 정도전의 대립구도 보다 저자가 주목한 것은 태조 이성계와 이방원 간의 갈등이다. 조선 개국초 태조와 조준ㆍ정도전 등의 합의로 정해진 52명의 개국공신에, 아들인 이방과와 이방원은 배제되었다. 이방원은 태조의 계비인 강비와 외척에 의해 조직적으로 견제를 당했고, 그 사이 세자 책립ㆍ공신 책록 등이 급박하게 추진되었다. 또한 처음과는 달리 태조는 이방원을 동북면으로 보내놓고는 바로 전라도절제사로 제수하여, 같은 날 친군위절제사로 삼아 동북면을 맡긴 이복동생 이방번에게 가별치를 양도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태조는 한양천도나 긴급한 외교현안 같은 대사에는 이방원의 지략을 빌리려 하였다. 이어 태조가 자신의 중병과 세자 이방석의 안정적 승계를 염두에 두고 사병 혁파를 단행하자, 숙청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이방원은, 하륜의 계책에 따라 태조의 병환이 위급해져 모든 이들의 관심이 쏠려 있을 때를 기회로 판단하고, 외척, 무인세력, 개국동조세력들과 연계하여 무방비 상태로 있던 정도전ㆍ남은 등을 급습하여 제거하는 '제1차 왕자 난'을 일으킨 것이다. 조준을 앞세워 도당(都堂)을 장악한 이방원은 이방과를 세자로 추대하여 명분과 실익을 다 얻었다. 그리고 정도전의 죄목을, 최종적으로 요동 공격을 실행하기 위해 이방석을 세우려 한 것과 정도전 자신의 명나라 호송에 찬성한 이방과에 대한 원한으로 종친을 살해하려 했다는 것으로 구체화하였다. 그러나 이방원이 정도전의 죄과를 나열하고, 사직을 위한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제1차 왕자 난'은 결국 태조에 대한 이방원의 반기(反旗)로 귀착된다.
두 번째로 '계유정난'은 어떠했을까. 흔히 알려진 수양대군 대 김종서ㆍ황보인 간의 대립구도 보다 저자는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을 주목한다. 조카 단종에게 번병(藩屛)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은 세종 후반부터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국정에 크게 힘을 보탰지만, 다른 관료들과의 교유나 접촉은 거의 없는 편이었다. 안평대군도 공사에 참여하였지만, 수양대군에 비해 비중이 작았다. 그러나 그는 학문과 예술을 좋아하고 시서화에도 뛰어났으며 왕실의 불사(佛事)에도 주력하였다. 이런 성향과 성삼문과의 인척 관계 등으로 문사들이 몰려 엘리트인 집현전 학사 이개ㆍ박팽년ㆍ신숙주ㆍ정인지 및 김종서와 교유를 맺고 있었다. 문종대에도 무계정사를 지어 은거하면서도 이들과의 교류를 계속하였다. 반면 수양대군은 뒤늦게 불사를 설행하는 등의 방법으로 문종 원년 이후에 제조를 맡는 등 입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단종이 즉위하자, 안평대군은 단종을 보필하는 환관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단종의 보호자 격이어서 권세가 있었다. 위상과 권력이 더욱 강화된 상태에서, 그는 김종서ㆍ황보인을 비롯한 대신들과 왕래하면서 국정에 대한 의견을 듣고 나누었다. 반면 당시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던 수양대군은 단종 즉위직후부터 안평대군을 모반자로 단정하여 제거할 뜻을 드러내었다. 그에 따르는 윤리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정실인사로 비난받던 김종서ㆍ황보인을 모반을 부추긴 원흉으로 조작해 놓고, 그들을 먼저 제거하려 하였다. 수양대군은 왕위와 관련된 풍수설을 조작하여 이를 안평대군의 측근 이현로의 주장으로 만들고, 풍수명당에 무계정사를 지은 것을 안평대군의 모반의 증거로 삼았는데, 그 계략은 성공하였다. 수양이 무인ㆍ종친ㆍ왕실세력도 확보한 상태에서, 정변을 인지하지 못했던 김종서ㆍ황보인은 계속 정실인사를 하였고, 도청을 신속하게 혁파하지 않고, 부역하는 선군(船軍)을 보내려는 단종의 뜻도 받들지 않았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수양 일파는 단종의 분노가 고조되고, 도청이 혁파되기 직전이어서 정변의 명분과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날인 10월 10일을 정변일로 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기습적으로 거사하여 당일 밤에 김종서 부자를 살해하였고, 잇따라 황보인 등 관료들을 제거하였다. 곧 계유정난은 왕권이 취약한 상태에서 정치적 코너에 몰린 수양대군이 자신들의 준비가 완료되자, 단종을 보호하던 김종서ㆍ황보인 등을 모반에 가담한 자로 몰아 먼저 제거하고, 얼마 후 본래 목표였던 안평대군까지 죽여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계유정난을 발판으로 집권한 세조는 별시를 매우 자주 설행하였고, 대단히 파격적으로 인물을 선발하였다. 신료들의 반대에도 성종 역시 별시를 자주 설행하였다. 당시 과거가 사익을 추구하는 통로로 활용되면서 시험에 부정행위가 만연하였고, 성균관의 교육 기능이 무력화되고 있었다. 조선왕조 최초로 성종 초반에 수렴청정을 한 세조 비 정희왕후(대비)는 육조직계제로 정책 결정을 좌우하면서 원상의 영향력을 최소화하였고, 왕의 장인 한명회를 왕실의 대리인으로 내세워 '겸 병조판서'에 제수하는 한편 좌리공신을 책봉하여 발탁한 척신을 '정조(政曹) 겸 판서'로 삼아 훈구의 인사 독점을 저지하였다.
이후 친정(親政)을 시작한 성종 역시 정희왕후의 이러한 국정운영 방식을 이어받아 영돈녕 이상에게 자문을 구하면서도 많은 경우 스스로 정책을 결정하였고, 무신을 중용하거나 특정 척신을 특대하는 방식으로 훈구를 견제하였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학계 통설과는 달리 세조~성종대 당시 정치 주도세력은 '훈구'가 아닌 '훈·척'이었으며, 왕권은 취약하지 않았고, 정책 결정이나 인사에서 원상 또는 영돈녕 이상의 영향력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다. 또한 조선전기에 왕실의 번병으로서 일정한 역할을 했던 종친의 부거(赴擧: 과거 응시)가 성종 즉위 후에 금지된 배경과, 위상이 추락한 종친들을 대우하기 위해 성종의 대책, 그리고 종친의 실제 처지와 생활 양태까지 성종대의 정치운영 실태들을 밝혔다.
이어 저자는 명문 광주이씨 출신으로 세조대에 입사한 이래 문무를 겸전한 관료이자 여진 정책 전문가였던 이극균家의 몰락 과정을 통해 연산군대 정치를 바라본다. 조선전기에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정치적 관행이나 제스처를 무시하고, 유생들과 대간, 관료들이 왕을 업신여긴다는 판단에 사로잡힌 데다 비극적인 어머니의 죽음까지 겹치며 '왕권의 폭주'가 사화와 폭정으로 이어졌다. 연산군은 이극균의 조카 이세좌가 어주를 쏟아버린 사건과 홍귀달家의 후궁간택 도피를 빌미로 갑자사화란 대숙청을 통해 이극균家 등 유력 훈구가문들과 마음에 안드는 대간들을 거의 멸문시켰다. 그리고 그 대가는 신하들에 의한 중종반정과 연산군의 교동도로의 유배, 급작스런 죽음이었다.
이 책은 조선전기 정치사에 관한 총 10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양한 주제로 이루어진 이 책의 내용을 아우르는 키워드는 '왕권'이라 할 수 있다. 책에서 언급된 태조·세종·문종·단종ㆍ성종ㆍ연산군대의 국정 운영을 실증적으로 검토한 결과를 보면, 전체적 흐름은 왕권은 신권보다 우위에서 행사되고 있었다. 또한 과거제의 설행을 통해 본 세조대의 왕권은 전제적 성향까지 보였고, 그 행사의 절정이자 폭주의 끝은 연산군대 왕권에서 보인다. 그리하여 조선의 어떤 국왕보다도 화려하고 제멋대로의 삶을 누렸던 연산군이지만, 그 죽음은 누구보다 비참하고 쓸쓸한 것이었다. 태종의 피의 숙청을 거치면서 세종대 신권과 왕권의 조화로운 시스템으로 안착한 듯했던 조선의 권력구조나 군신권력관계가 이후 어떻게 파열음을 내고 재수습하는 과정을 반복했는지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의 정치사에서 가장 드라마의 소재로 많이 다루어지고, 현실 정치판에서도 언급이 많이 된 두 사건은 태종 이방원이 주연인 '제1차 왕자 난'과 세조 수양대군이 주연인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제1차 왕자 난'을 다룬 것들로는 [용의 눈물]을 비롯해, [정도전], 최근의 [육룡이 나르샤]까지, '계유정난'을 다룬 것들로는 [왕과 비]를 비롯, [공주의 남자], [관상] 등 수없이 많은 드라마, 영화, 소설 등으로 만들어져 왔다. 이만큼 여러 인간군상들의 욕망과 비루함, 형제와 조카들에까지 칼을 들이대는 권력의 민낯,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비극의 탄생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들도 드물다는 얘기일 것이다.
보통 이 두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신권과 왕권' 간의 정치주도권 투쟁 및 그에 따른 조선전기 정치체제의 정립이란 데서 찾는 것이다. 그리고 두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이자 동력들로 이방원과 수양대군 두 '풍운아'의 '권력욕=정치적 야심'을 손꼽는다.
그간 역사학계에서 꾸준히 조선전기 정치사에 대한 연구를 다져온 저자 한춘순 교수는 조선왕조의 정치틀을 결정한 두 사건의 원인과 귀결에 대해 이와는 다른 점들을 이번 책에서 찾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우선 '제1차 왕자 난(무인지변)'을 보자. 보통 언급되는 이방원과 정도전의 대립구도 보다 저자가 주목한 것은 태조 이성계와 이방원 간의 갈등이다. 조선 개국초 태조와 조준ㆍ정도전 등의 합의로 정해진 52명의 개국공신에, 아들인 이방과와 이방원은 배제되었다. 이방원은 태조의 계비인 강비와 외척에 의해 조직적으로 견제를 당했고, 그 사이 세자 책립ㆍ공신 책록 등이 급박하게 추진되었다. 또한 처음과는 달리 태조는 이방원을 동북면으로 보내놓고는 바로 전라도절제사로 제수하여, 같은 날 친군위절제사로 삼아 동북면을 맡긴 이복동생 이방번에게 가별치를 양도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태조는 한양천도나 긴급한 외교현안 같은 대사에는 이방원의 지략을 빌리려 하였다. 이어 태조가 자신의 중병과 세자 이방석의 안정적 승계를 염두에 두고 사병 혁파를 단행하자, 숙청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이방원은, 하륜의 계책에 따라 태조의 병환이 위급해져 모든 이들의 관심이 쏠려 있을 때를 기회로 판단하고, 외척, 무인세력, 개국동조세력들과 연계하여 무방비 상태로 있던 정도전ㆍ남은 등을 급습하여 제거하는 '제1차 왕자 난'을 일으킨 것이다. 조준을 앞세워 도당(都堂)을 장악한 이방원은 이방과를 세자로 추대하여 명분과 실익을 다 얻었다. 그리고 정도전의 죄목을, 최종적으로 요동 공격을 실행하기 위해 이방석을 세우려 한 것과 정도전 자신의 명나라 호송에 찬성한 이방과에 대한 원한으로 종친을 살해하려 했다는 것으로 구체화하였다. 그러나 이방원이 정도전의 죄과를 나열하고, 사직을 위한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제1차 왕자 난'은 결국 태조에 대한 이방원의 반기(反旗)로 귀착된다.
두 번째로 '계유정난'은 어떠했을까. 흔히 알려진 수양대군 대 김종서ㆍ황보인 간의 대립구도 보다 저자는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을 주목한다. 조카 단종에게 번병(藩屛)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은 세종 후반부터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국정에 크게 힘을 보탰지만, 다른 관료들과의 교유나 접촉은 거의 없는 편이었다. 안평대군도 공사에 참여하였지만, 수양대군에 비해 비중이 작았다. 그러나 그는 학문과 예술을 좋아하고 시서화에도 뛰어났으며 왕실의 불사(佛事)에도 주력하였다. 이런 성향과 성삼문과의 인척 관계 등으로 문사들이 몰려 엘리트인 집현전 학사 이개ㆍ박팽년ㆍ신숙주ㆍ정인지 및 김종서와 교유를 맺고 있었다. 문종대에도 무계정사를 지어 은거하면서도 이들과의 교류를 계속하였다. 반면 수양대군은 뒤늦게 불사를 설행하는 등의 방법으로 문종 원년 이후에 제조를 맡는 등 입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단종이 즉위하자, 안평대군은 단종을 보필하는 환관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단종의 보호자 격이어서 권세가 있었다. 위상과 권력이 더욱 강화된 상태에서, 그는 김종서ㆍ황보인을 비롯한 대신들과 왕래하면서 국정에 대한 의견을 듣고 나누었다. 반면 당시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던 수양대군은 단종 즉위직후부터 안평대군을 모반자로 단정하여 제거할 뜻을 드러내었다. 그에 따르는 윤리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정실인사로 비난받던 김종서ㆍ황보인을 모반을 부추긴 원흉으로 조작해 놓고, 그들을 먼저 제거하려 하였다. 수양대군은 왕위와 관련된 풍수설을 조작하여 이를 안평대군의 측근 이현로의 주장으로 만들고, 풍수명당에 무계정사를 지은 것을 안평대군의 모반의 증거로 삼았는데, 그 계략은 성공하였다. 수양이 무인ㆍ종친ㆍ왕실세력도 확보한 상태에서, 정변을 인지하지 못했던 김종서ㆍ황보인은 계속 정실인사를 하였고, 도청을 신속하게 혁파하지 않고, 부역하는 선군(船軍)을 보내려는 단종의 뜻도 받들지 않았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수양 일파는 단종의 분노가 고조되고, 도청이 혁파되기 직전이어서 정변의 명분과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날인 10월 10일을 정변일로 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기습적으로 거사하여 당일 밤에 김종서 부자를 살해하였고, 잇따라 황보인 등 관료들을 제거하였다. 곧 계유정난은 왕권이 취약한 상태에서 정치적 코너에 몰린 수양대군이 자신들의 준비가 완료되자, 단종을 보호하던 김종서ㆍ황보인 등을 모반에 가담한 자로 몰아 먼저 제거하고, 얼마 후 본래 목표였던 안평대군까지 죽여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계유정난을 발판으로 집권한 세조는 별시를 매우 자주 설행하였고, 대단히 파격적으로 인물을 선발하였다. 신료들의 반대에도 성종 역시 별시를 자주 설행하였다. 당시 과거가 사익을 추구하는 통로로 활용되면서 시험에 부정행위가 만연하였고, 성균관의 교육 기능이 무력화되고 있었다. 조선왕조 최초로 성종 초반에 수렴청정을 한 세조 비 정희왕후(대비)는 육조직계제로 정책 결정을 좌우하면서 원상의 영향력을 최소화하였고, 왕의 장인 한명회를 왕실의 대리인으로 내세워 '겸 병조판서'에 제수하는 한편 좌리공신을 책봉하여 발탁한 척신을 '정조(政曹) 겸 판서'로 삼아 훈구의 인사 독점을 저지하였다.
이후 친정(親政)을 시작한 성종 역시 정희왕후의 이러한 국정운영 방식을 이어받아 영돈녕 이상에게 자문을 구하면서도 많은 경우 스스로 정책을 결정하였고, 무신을 중용하거나 특정 척신을 특대하는 방식으로 훈구를 견제하였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학계 통설과는 달리 세조~성종대 당시 정치 주도세력은 '훈구'가 아닌 '훈·척'이었으며, 왕권은 취약하지 않았고, 정책 결정이나 인사에서 원상 또는 영돈녕 이상의 영향력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다. 또한 조선전기에 왕실의 번병으로서 일정한 역할을 했던 종친의 부거(赴擧: 과거 응시)가 성종 즉위 후에 금지된 배경과, 위상이 추락한 종친들을 대우하기 위해 성종의 대책, 그리고 종친의 실제 처지와 생활 양태까지 성종대의 정치운영 실태들을 밝혔다.
이어 저자는 명문 광주이씨 출신으로 세조대에 입사한 이래 문무를 겸전한 관료이자 여진 정책 전문가였던 이극균家의 몰락 과정을 통해 연산군대 정치를 바라본다. 조선전기에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정치적 관행이나 제스처를 무시하고, 유생들과 대간, 관료들이 왕을 업신여긴다는 판단에 사로잡힌 데다 비극적인 어머니의 죽음까지 겹치며 '왕권의 폭주'가 사화와 폭정으로 이어졌다. 연산군은 이극균의 조카 이세좌가 어주를 쏟아버린 사건과 홍귀달家의 후궁간택 도피를 빌미로 갑자사화란 대숙청을 통해 이극균家 등 유력 훈구가문들과 마음에 안드는 대간들을 거의 멸문시켰다. 그리고 그 대가는 신하들에 의한 중종반정과 연산군의 교동도로의 유배, 급작스런 죽음이었다.
이 책은 조선전기 정치사에 관한 총 10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양한 주제로 이루어진 이 책의 내용을 아우르는 키워드는 '왕권'이라 할 수 있다. 책에서 언급된 태조·세종·문종·단종ㆍ성종ㆍ연산군대의 국정 운영을 실증적으로 검토한 결과를 보면, 전체적 흐름은 왕권은 신권보다 우위에서 행사되고 있었다. 또한 과거제의 설행을 통해 본 세조대의 왕권은 전제적 성향까지 보였고, 그 행사의 절정이자 폭주의 끝은 연산군대 왕권에서 보인다. 그리하여 조선의 어떤 국왕보다도 화려하고 제멋대로의 삶을 누렸던 연산군이지만, 그 죽음은 누구보다 비참하고 쓸쓸한 것이었다. 태종의 피의 숙청을 거치면서 세종대 신권과 왕권의 조화로운 시스템으로 안착한 듯했던 조선의 권력구조나 군신권력관계가 이후 어떻게 파열음을 내고 재수습하는 과정을 반복했는지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목차
책을 내면서
太祖 7年(1398) '제1차 왕자 난[戊寅之變]'의 재검토
Ⅰ. 머리말
Ⅱ. 開國 前 이성계의 정치 역정과 李芳遠
Ⅲ. '제1차 왕자 난[戊寅之變]'의 원인에 대한 새 해석
1. 개국 초 外戚의 견제와 이방원의 추락
2. 鄭道傳과 遼東攻擊論의 실체
3. 태조의 重患으로 인한 變數와 私兵 革罷
Ⅳ. '제1차 왕자 난[戊寅之變]' 발생과 그 성격
Ⅴ. 맺음말
文宗代의 國政運營
Ⅰ. 머리말
Ⅱ. 문종의 국정 운영 방식
1. 육조직계제와 의정부서사제를 절충한 국정 논의 구조와 그 변화
2. 宦官을 통한 大小 出納
Ⅲ. 인사 행정-문종의 인사권 행사
Ⅳ. 佛敎施策과 宗親
1. 불교시책의 내용
2. 불교시책의 추진과 안평대군ㆍ수양대군
Ⅴ. 맺음말
단종대 癸酉靖難과 그 성격
Ⅰ. 머리말
Ⅱ. 문종대 불교시책과 안평대군의 위상 강화
Ⅲ. 단종대 정국 추이와 首陽大君의 政變 모의
1. 金宗瑞?皇甫仁의 국정 운영(인사권)
2. 안평대군의 교유 관계와 권력 강화
3. 수양대군의 정치적 고립과 政變 모의
Ⅳ. 癸酉靖難의 발생과 그 성격
Ⅴ. 맺음말
세조~성종대 과거에 관한 일 고찰
Ⅰ. 머리말
Ⅱ. 세조~성종대 왕권과 정치 상황
Ⅲ. 과거 시행의 추이
1. 별시
2. 중시
3. 향시
Ⅳ. 응시 자격을 둘러싼 논란
Ⅴ. 성균관 교육과 강경론ㆍ제술론
Ⅵ. 맺음말
成宗 초기 貞熹王后(세조 비)의 政治 聽斷과 국정 주도의 실제
Ⅰ. 머리말
Ⅱ. 정치 청단의 배경
Ⅲ. 대비의 육조직계제 운용과 국정 주도
1. 대비의 정책 결정 주도
2. 성종의 국정 운영과 정책 결정 방식
3. 왕명을 통한 대비의 정책 주도
Ⅳ. 대비의 勳戚支配體制 운용
1. 즉위 초 정치상황과 佐理功臣의 책봉
2. 政曹 중심의 훈척지배체제 운용
Ⅴ. 승정원의 위상과 기능
Ⅵ. 맺음말
朝鮮 成宗의 六曹直啓制 運用과 承政院-親政期를 중심으로-
Ⅰ. 머리말
Ⅱ. 成宗의 親政 시작과 王權
Ⅲ. 六曹直?制 運用의 실제
1. 經筵?視事에서의 정책 계달
2. 성종의 政策 集中과 주도적 국정 운영
Ⅳ. 承政院의 位相과 도승지
1. 승정원의 위상과 기능
2. 도승지를 둘러싼 紛亂
Ⅴ. 맺음말
朝鮮 成宗의 王權과 인사 주도의 실제-親政期 勳戚支配體制운용을 중심으로-
Ⅰ. 머리말
Ⅱ. 성종의 친정과 勳戚支配體制 운용
1. 성종의 친정과 의정부ㆍ정조ㆍ승정원 인사
2. 정치세력 변화와 성종의 훈척지배체제 보완
Ⅲ. 훈척지배체제의 실제
1. 이ㆍ병조 인사의 두 측면
2. 정실ㆍ청탁인사의 정치ㆍ경제적 배경과 의미
Ⅳ. 훈척지배체제 운용을 둘러싼 성종과 대간 갈등의 본질
Ⅴ. 맺음말
조선 成宗代 王權과 宗親
Ⅰ. 머리말
Ⅱ. 세조 왕권과 종친
Ⅲ.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성종 즉위년~7년 정월)과 종친
1. 성종 즉위초 정국 상황과 龜城君 李浚 제거
2. 종친 赴試 금지
Ⅳ. 성종의 친정(성종 7년 정월~25년)과 종친 加資
1. 종친의 가자 요청과 가자 방안(1)-殿講?觀射
2. 가자 방안(2)-試藝法?別試
Ⅴ. 종친 대우와 위상하락 및 생활 양태
Ⅵ. 맺음말
조선전기 李克均의 정치 활동과 甲子士禍
Ⅰ. 머리말
Ⅱ. 世祖代 內職 및 西征에서의 활약
Ⅲ. 예종?성종대 정치 활동의 확대
1. 절도사ㆍ관찰사 및 중앙 정치 활동(예종 즉위년~성종 14년 6월)
2. 국정 참여 및 都元帥?관찰사로서의 치적(성종 14년 6월~24년 12월)
Ⅳ. 연산군대 여진정책 주도와 甲子士禍
1. 평안도관찰사?警邊使로서 여진정책 실패(즉위년~6년 3월)
2. 정승으로서의폐정개혁과 갑자사화로말미암은 몰락(6년4월~10년 윤4월)
Ⅴ. 맺음말
漁村 沈彦光의 정치 역정과 생애
Ⅰ. 머리말
Ⅱ. 제1기:출생과 학문 연마(성종 18, 1487~중종 7, 1512)
Ⅲ. 제2기:初入仕와 관직 생활
1. 초입사~己卯士禍까지(중종 8, 1513~중종 14, 1519)
2. 기묘사화 이후~김안로 등장 이전의 관직 생활(중종 15, 1520~ 중종 23, 1528)
Ⅳ. 제3기:심언광의 정치 활동과 김안로(중종24,1529~중종 33, 1538)
1. 심언광의 대간 활동과 김안로(중종 24, 1529~중종 26, 1531)
2. 김안로의 정계 재복귀와 敗死 및 심언광의 활동과 몰락 (중종 27, 1532~중종 33, 1538)
Ⅴ. 맺음말
참고문헌
찾아보기
太祖 7年(1398) '제1차 왕자 난[戊寅之變]'의 재검토
Ⅰ. 머리말
Ⅱ. 開國 前 이성계의 정치 역정과 李芳遠
Ⅲ. '제1차 왕자 난[戊寅之變]'의 원인에 대한 새 해석
1. 개국 초 外戚의 견제와 이방원의 추락
2. 鄭道傳과 遼東攻擊論의 실체
3. 태조의 重患으로 인한 變數와 私兵 革罷
Ⅳ. '제1차 왕자 난[戊寅之變]' 발생과 그 성격
Ⅴ. 맺음말
文宗代의 國政運營
Ⅰ. 머리말
Ⅱ. 문종의 국정 운영 방식
1. 육조직계제와 의정부서사제를 절충한 국정 논의 구조와 그 변화
2. 宦官을 통한 大小 出納
Ⅲ. 인사 행정-문종의 인사권 행사
Ⅳ. 佛敎施策과 宗親
1. 불교시책의 내용
2. 불교시책의 추진과 안평대군ㆍ수양대군
Ⅴ. 맺음말
단종대 癸酉靖難과 그 성격
Ⅰ. 머리말
Ⅱ. 문종대 불교시책과 안평대군의 위상 강화
Ⅲ. 단종대 정국 추이와 首陽大君의 政變 모의
1. 金宗瑞?皇甫仁의 국정 운영(인사권)
2. 안평대군의 교유 관계와 권력 강화
3. 수양대군의 정치적 고립과 政變 모의
Ⅳ. 癸酉靖難의 발생과 그 성격
Ⅴ. 맺음말
세조~성종대 과거에 관한 일 고찰
Ⅰ. 머리말
Ⅱ. 세조~성종대 왕권과 정치 상황
Ⅲ. 과거 시행의 추이
1. 별시
2. 중시
3. 향시
Ⅳ. 응시 자격을 둘러싼 논란
Ⅴ. 성균관 교육과 강경론ㆍ제술론
Ⅵ. 맺음말
成宗 초기 貞熹王后(세조 비)의 政治 聽斷과 국정 주도의 실제
Ⅰ. 머리말
Ⅱ. 정치 청단의 배경
Ⅲ. 대비의 육조직계제 운용과 국정 주도
1. 대비의 정책 결정 주도
2. 성종의 국정 운영과 정책 결정 방식
3. 왕명을 통한 대비의 정책 주도
Ⅳ. 대비의 勳戚支配體制 운용
1. 즉위 초 정치상황과 佐理功臣의 책봉
2. 政曹 중심의 훈척지배체제 운용
Ⅴ. 승정원의 위상과 기능
Ⅵ. 맺음말
朝鮮 成宗의 六曹直啓制 運用과 承政院-親政期를 중심으로-
Ⅰ. 머리말
Ⅱ. 成宗의 親政 시작과 王權
Ⅲ. 六曹直?制 運用의 실제
1. 經筵?視事에서의 정책 계달
2. 성종의 政策 集中과 주도적 국정 운영
Ⅳ. 承政院의 位相과 도승지
1. 승정원의 위상과 기능
2. 도승지를 둘러싼 紛亂
Ⅴ. 맺음말
朝鮮 成宗의 王權과 인사 주도의 실제-親政期 勳戚支配體制운용을 중심으로-
Ⅰ. 머리말
Ⅱ. 성종의 친정과 勳戚支配體制 운용
1. 성종의 친정과 의정부ㆍ정조ㆍ승정원 인사
2. 정치세력 변화와 성종의 훈척지배체제 보완
Ⅲ. 훈척지배체제의 실제
1. 이ㆍ병조 인사의 두 측면
2. 정실ㆍ청탁인사의 정치ㆍ경제적 배경과 의미
Ⅳ. 훈척지배체제 운용을 둘러싼 성종과 대간 갈등의 본질
Ⅴ. 맺음말
조선 成宗代 王權과 宗親
Ⅰ. 머리말
Ⅱ. 세조 왕권과 종친
Ⅲ.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성종 즉위년~7년 정월)과 종친
1. 성종 즉위초 정국 상황과 龜城君 李浚 제거
2. 종친 赴試 금지
Ⅳ. 성종의 친정(성종 7년 정월~25년)과 종친 加資
1. 종친의 가자 요청과 가자 방안(1)-殿講?觀射
2. 가자 방안(2)-試藝法?別試
Ⅴ. 종친 대우와 위상하락 및 생활 양태
Ⅵ. 맺음말
조선전기 李克均의 정치 활동과 甲子士禍
Ⅰ. 머리말
Ⅱ. 世祖代 內職 및 西征에서의 활약
Ⅲ. 예종?성종대 정치 활동의 확대
1. 절도사ㆍ관찰사 및 중앙 정치 활동(예종 즉위년~성종 14년 6월)
2. 국정 참여 및 都元帥?관찰사로서의 치적(성종 14년 6월~24년 12월)
Ⅳ. 연산군대 여진정책 주도와 甲子士禍
1. 평안도관찰사?警邊使로서 여진정책 실패(즉위년~6년 3월)
2. 정승으로서의폐정개혁과 갑자사화로말미암은 몰락(6년4월~10년 윤4월)
Ⅴ. 맺음말
漁村 沈彦光의 정치 역정과 생애
Ⅰ. 머리말
Ⅱ. 제1기:출생과 학문 연마(성종 18, 1487~중종 7, 1512)
Ⅲ. 제2기:初入仕와 관직 생활
1. 초입사~己卯士禍까지(중종 8, 1513~중종 14, 1519)
2. 기묘사화 이후~김안로 등장 이전의 관직 생활(중종 15, 1520~ 중종 23, 1528)
Ⅳ. 제3기:심언광의 정치 활동과 김안로(중종24,1529~중종 33, 1538)
1. 심언광의 대간 활동과 김안로(중종 24, 1529~중종 26, 1531)
2. 김안로의 정계 재복귀와 敗死 및 심언광의 활동과 몰락 (중종 27, 1532~중종 33, 1538)
Ⅴ. 맺음말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저자
한춘순
저자 한춘순은 경희대학교 사학과 졸업(문학사, 문학석사, 문학박사),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 국사편찬위원회 토대 연구 박사급 연구원(2007.8~2010.7), 경희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2009.3~2010.2), 경희대, 경희 사이버대, 서일대, 인천대 강사 역임
논저:「조선 성종의 왕권과 훈척정치-친정기 훈척지배체제를 중심으로」 『경희사학』24(사학과 창과 50주년 기념호, 2006);「太祖 7年(1398) '제1차 왕자 난'의 재검토」 『조선시대사학보』55(2010);「조선 명종 대 불교정책과 그 성격」 『한국사상사학』제44집(2013);「단종 대 癸酉靖難과 그 성격」 『한국사연구』174(2016);『명종대 훈척정치 연구』(2006);『조선 중기 훈구·사림과 광주 이씨』(공저, 2011);『어촌 심언광의 문학과 사상』(공저, 2014)
논저:「조선 성종의 왕권과 훈척정치-친정기 훈척지배체제를 중심으로」 『경희사학』24(사학과 창과 50주년 기념호, 2006);「太祖 7年(1398) '제1차 왕자 난'의 재검토」 『조선시대사학보』55(2010);「조선 명종 대 불교정책과 그 성격」 『한국사상사학』제44집(2013);「단종 대 癸酉靖難과 그 성격」 『한국사연구』174(2016);『명종대 훈척정치 연구』(2006);『조선 중기 훈구·사림과 광주 이씨』(공저, 2011);『어촌 심언광의 문학과 사상』(공저, 2014)
Payment & Security
Payment methods
Your payment information is processed securely. We do not store credit card details nor have access to your credit card informat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