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으로 읽는 신심명(김태완 선원장 설법 시리즈 2)(반양장)
선불교에서 ‘문자로서는 최고의 문자’라는 극찬을 받고 있으며 가장 유명한 선시(禪詩) 가운데 하나인 삼조 승찬 대사의 [신심명(信心銘)]을 무심선원 김태완 원장이 선(禪)의 핵심을 곧장 가리키는 언어로 설법했다. 조사선(祖師禪)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전문가이자, 실제 눈을 뜬 공부 체험을 바탕으로 수행자들을 지도하고 있는 김태완 원장의 설법은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는 선불교의 정신에 충실하게 곧바로 마음을 가리킨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다양하게 도를 가리키지만, 언제나 바로 이것, 지금 여기에 초점을 두고 있는 까닭에 쉽게 읽히면서도 저절로 도(道)에 몰입되게 한다. 선(禪)에 관심이 있거나 마음공부를 하는 독자에게 좋은 지침이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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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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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서는 최고의 문자, 신심명
중국 선종 제3조 승찬 대사가 지은 [신심명]은 146구 584자의 짧은 글이지만 불교의 모든 가르침과 선(禪)의 근본이 모두 이 글 속에 담겨 있고, 팔만대장경의 심오한 가르침과 온갖 화두의 본질이 모두 이 글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여,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이후로 '문자로서는 최고의 문자'라는 극찬을 받고 있다.
《선(禪)으로 읽는 신심명》은 14개의 법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법문에 앞서 [신심명]의 원문을 충분히 음미하도록 73수 전문과, 조사선 전문가인 지은이의 엄밀한 번역을 수록했다.
중국 선종의 삼조 승찬 대사
북제 천평 2년에 나이 마흔을 넘긴 거사가 찾아와서 이조 혜가 스님께 물었다.
"저의 몸이 중풍에 걸려 있습니다. 스님께서 죄를 씻어 주십시오."
"죄를 가져오너라. 너의 죄를 씻어 주겠다."
거사가 잠시 묵묵히 있다가 대답했다.
"죄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혜가 스님이 말했다.
"너의 죄를 다 씻어 주었다."
이 거사가 훗날의 삼조 승찬 대사다. 마음을 가져오라는 달마의 요구에 마음을 찾을 수 없다고 답했던 혜가의 일화를 연상케 하는 이 대화를 통해 승찬 스님은 무엇을 깨달았던 것일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어렵지 않으며 단순하다는 것. 스님은 자신이 깨달은 단순한 진실을 후인들도 쉽게 깨달을 수 있도록 보석 같은 가르침을 [신심명] 73수에 오롯이 담아 전해 주었다.
도(道)는 어렵지 않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다만 가려서 선택하지만 말라."
[신심명]의 첫 수는 이렇게, 선(禪) 공부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한 구절인,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으로 시작한다. 지극한 도를 어렵지 않다고 생각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평생 치열하게 수행해도 도를 깨치기는 어렵다고 믿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찬 대사는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아가 두 번째 수에서는 "싫어하거나 좋아하지만 않으면 막힘없이 밝고 분명하리라."고 말한다. 즉, 가려서 선택하지만 않으면, 좋아하거나 싫어하지만 않으면, 도는 어렵지 않으며 밝고 분명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신심명]의 핵심이 담겨 있다. 한마디로, 분별하지만 않으면 도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분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와 너가 따로 있고, 이것과 저것이 따로 있고, 좋아함과 싫어함이 따로 있고, 옳음과 그름이 따로 있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따로 있고, 여기와 저기가 따로 있고,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고, 있다와 없다가 따로 있다고 보는 것이다. 모양을 좇고 이름을 좇아서 다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분별심은 진실을 가리고 갈등을 일으키며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그렇다면 목석처럼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으면 되는가? 지은이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분별이 도가 아니듯이, 분별이 없는 무분별 역시 도가 아닙니다. 분별과 무분별은 또 하나의 분별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별이 망상이라면 분별하지 않으면 된다'고 이해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렇게 분별과 무분별, 있음과 없음의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면, 중도(中道)는 꿈도 못 꾸는 겁니다. 중도에서는 양쪽이 없어요. 아무리 분별해도 분별이 없고, 아무 분별이 없는 곳에서 얼마든지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중도입니다."
분별심을 버려야 한다는 판단도 이미 분별심이라는 것이다. 어쩌란 말인가?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분별심을 버리려 하면 안 된다니……. 이렇게 해도 어긋나고 저렇게 해도 어긋나며, 어떻게 해 보려고 해도 어긋나고, 어떻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어긋난다니…….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된다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지은이는 말한다.
"그래서 생각으로는 전혀 접근할 수가 없어요. 잘 보십시오. 가리켜 드립니다."
다만, 여기에 생생히 살아 있는 진실을 보라
선사들은 이치에 맞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개념들을 동원하여 머리로 이해되게끔 납득시키려 하지 않는다. 개념을 동원하여 설명해 주면, 이미 수행자가 가지고 있는 개념 위에 더 많은 개념을 더해 줌으로써 오히려 진실과는 더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며, 어차피 생각으로는 진리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선사들이 어떤 설명을 해 준다면, 그것은 임제 스님의 말대로 "어린아이를 이끌고 달래며 병에 따라 처방하는 약"일 뿐이다. 선에는 본래 방편도 수행도 없다. 법(法)은, 진리 혹은 진실은 수행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남악회양 스님이 마조 스님 앞에서 벽돌을 갈면서 보여 준 일은 왜 그런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일화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선사들은 어떻게 하는가? 생각이 갈 곳을 잃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보다 직접적으로는, 가리킨다. 가리키고 가리킨다. 가리킴으로써 곧바로 진실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선에서의 가르침은 언제나 여기(죽비를 들어 올리며)를 다만 가리킬 뿐입니다. 어떠한 분별도 설명도 없이 다만 곧장 가리킬 뿐이죠."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는 조사들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는 지은이 역시 가리킨다. 법(法)을 향해 가리키며, 수없이 다양한 말을 통해 다양한 모양으로 가리킨다. 혹은, 지은이의 말을 빌자면, 끊임없이 물을 휘저어 물을 보여 준다.
이 가리킴을 생각으로 이해하려 하면 앞뒤가 꽉 막힐 것이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자리에서 생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지은이가 가리키는 곳을 꾸준히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
"불교는 다만 이 불이법문(不二法門) 하나를 가리키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여기(손을 흔들며)에서 문득 모든 차별이 사라지게 되면, 오랫동안 갑갑하게 막혀 있던 속이 쑥 뚫려 버리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세계가 새로워집니다. 세계의 겉모습은 지금까지 보아 왔던 그 세계이지만, 스스로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있습니다. …… 이제 순간순간 삶을 즐기게 됩니다. 모든 순간에 이것이 눈앞에서 팔딱팔딱 살아 있습니다. 이 즐거움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죠."
목차
목차
삼조 승찬 대사에 관하여
머리말
신심명 73수 전문
첫 번째 법문
두 번째 법문
세 번째 법문
네 번째 법문
다섯 번째 법문
여섯 번째 법문
일곱 번째 법문
여덟 번째 법문
아홉 번째 법문
열 번째 법문
열한 번째 법문
열두 번째 법문
열세 번째 법문
열네 번째 법문
저자
저자
무심선원 원장.
저서 및 역서
《마조어록》 《달마어록》 《육조단경》 《황벽어록》 《임제어록》 《무문관》 《백장어록》 《간화선 창시자의 禪》(상,하) 《선으로 읽는 금강경》 《선으로 읽는 반야심경》 《선으로 읽는 신심명》 《선으로 읽는 대승찬》 《선으로 읽는 마하무드라의 노래》 《선으로 읽는 사라하의 노래》 《유마경》 《금강반야경 문수반야경》 《바로 이것!》 《참선의 길잡이》 《조사선의 실천과 사상》 《선문염송 염송설화》 《대혜보각선사어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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