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체제 자유주의적 비판 뛰어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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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시각으로 살펴본 박정희 체제
『박정희체제, 자유주의적 비판 뛰어넘기』는 5.16쿠데타 50주기를 맞이하여 진보의 시각으로 박정희 체제를 재조명한 책이다. 진보적 정치학자가 1961년 5월 16일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계속되었던 박정희 체제의 등장과 몰락을 분석하고 있다. 박정희의 정치 성향을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억압과 동의를 분리하는 ‘자유주의적 이분법’으로 정의하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박정희의 정치법에 대해 진보의 시각으로 비판하고 있다. 또한 현재까지 박정희 체제가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살펴본다.
『박정희체제, 자유주의적 비판 뛰어넘기』는 5.16쿠데타 50주기를 맞이하여 진보의 시각으로 박정희 체제를 재조명한 책이다. 진보적 정치학자가 1961년 5월 16일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계속되었던 박정희 체제의 등장과 몰락을 분석하고 있다. 박정희의 정치 성향을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억압과 동의를 분리하는 ‘자유주의적 이분법’으로 정의하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박정희의 정치법에 대해 진보의 시각으로 비판하고 있다. 또한 현재까지 박정희 체제가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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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자유주의의 '늪', 진보의 '덫',
박정희체제 뛰어넘기
"돌이켜보면 자유주의정치세력의 리더들은 5ㆍ16쿠데타 이후, 특히 유신체제 이후 그것과 대결하였지만, 결국 그들과 함께 하였다. '박정권 타도선언'을 했던 YS는 박정희체제의 적자이자 자신이 '죽음의 단식'으로 넘고자 했던 신군부와 3당합당을 통해 하나가 되었다. 동경에서 박정희정권에 납치되어 죽음의 경계에 섰고 '5ㆍ18민중항쟁의 배후조종자'로 신군부에 사형을 선고받았던 DJ 또한 유신본당을 자처하는 세력과 DJP연합을 통해 하나가 되었다. 뜻하지 않은 독자집권 이후 '바보 노무현'도 그 뒤를 이어 대연정을 제안한 바 있다.
왜 그랬을까?"
■ 5ㆍ16쿠데타 50주기를 맞이하여, '자유주의적 시각'이 아닌 '진보의 시각'으로 박정희 체제를 재조명하다!
■ '박정희'는 어떻게 '박정희체제'가 됐나? 진보적 정치학자가 1961.5.16.부터 1979.10.26.까지 박정희 체제의 등장과 몰락을 분석하다!
■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억압과 동의를 분리하는 '자유주의적 이분법'을 통해 끊임없이 유지되고 재생산되는 박정희 신화에 진보의 비판을 드리대다!
■ 자유주의 개혁세력의 집권이 왜 '잃어버린 10년'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의 한계 속에서 해명해 낸 연구서!
■ 자유주의에게는 '늪'이고, 진보에는 '덫'인 박정희체제를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통해 근본적으로 뛰어넘을 것을 제안!
■ 박정희체제에서 자라고, 박정희체제에 저항했으나, 아직도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에 안주하고 있는 486세대들의 성찰을 위한 책!
두 얼굴의 '박정희'
5ㆍ16군사쿠데타가 반발한 지 올해로 꼭 50년이 된 지금, 한국사회에는 두 얼굴의 '박정희'가 있다.
"못난 후손들에게 홀대를 받던 박정희의 환생"을 꿈꾸는 이들은 박정희 기념관 건립과 교과서 수정 작업 등을 통해 박정희가 5천년의 가난을 극복한 "불세출의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로 재조명되길 갈망한다. 그들에게 5ㆍ16군사쿠데타는 조국근대화 혁명의 출발점이고, 경제개발과 경제성장은 한국사회를 가난에서 해방시켰으며, 경제 발전이 가져온 풍요가 이후 민주화의 토대가 됐고, 유신체제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발현으로 평가된다. 나아가 그들은 "대한민국 전체가 박정희의 기념관이자 박물관"이 되길 꿈꾼다.
박정희의 또 다른 얼굴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이른바 '자유주의적 평가'이다. 박정희체제가 "경제개발과 경제성장에서 크게 공헌"했지만, "군사쿠데타를 통해 민주주의의 자생적 발전을 가로막은 독재자"였고, "민주주의를 희생시켜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이며, 유신체제는 반민주 독재체제라는 평가가 그것이다.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평가는 박정희체제가 '경제성장과 독재'라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독재와 인권유린'이라는 얼굴만이 집중 평가되고 부각되길 바란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박정희와 박정희체제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이 두 대극을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산업화가 먼저냐? vs 민주화가 먼저냐?", "경제 발전이 가져오는 풍요가 민주주의를 동반한다 vs 민주주의를 먼저 했어도 경제 성장이 가능했다"는 논쟁구도가 그것이다.
비판의 초점은 '박정희'가 아닌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이분법'
박정희와 박정희체제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이러한 두 대척점과 논쟁구도는 타당한가? <박정희체제, 자유주의적 비판 뛰어넘기>는 이 논쟁구도 자체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책은 박정희체제에 대한 그 흔한 비판서가 아니다. 그것은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에 대한 비판서'이다. 즉 비판의 초점이 '박정희'가 아니라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이분법'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 통념화된 '자유주의적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을 때에만 박정희체제를 분명하게 극복할 수 있다고 필자는 판단하기 때문이다.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이분법에 기초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드러난다.
"박정희 정권이 그나마 최소민주주의가 유지되었던 제3공화정을 유신체제라는 공개적 독재체제로 전화시켰기 때문에, 즉 최소민주주의를 부정하였기에 비판받아야 한다"는 평가와 "'한강의 기적'으로 상징되는 경제발전을 이룬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유신체제라는 반인권, 억압의 독재체제를 한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받아야 한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이분법'에 대해 필자는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이해', 즉 "국가가 과연 민주주의의 담지자, 그 주체일 수 있는가"라는 관점과 '경제와 정치를 분리시킬 수 있는가?', 즉 "국가의 반인권, 억압의 주요 대상이었던 노동자, 농민, 빈민의 문제를 경제 문제와 분리시킬 수 있는가"라는 관점 두 측면에서 발본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필자에게 '정치'는 '민주주의의 실현'이고, 민주주의란 곧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이자, '인민의 자기지배의 실현'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선거민주주의와 동일시하거나 한정시키는 자유주의적 이분법으로는 '자기의지의 실현'으로서의 민주주의의 재구성은 이루어질 수 없다. '민주주의'를 자유주의적 이분법의 틀로 한정시킬 때, 박정희체제에 대한 평가 역시 앞의 이분법의 틀에 갇혀버린다.
또한 필자는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이 "노동자와 민중들의 삶과 노동의 고통이 곧 경제성장의 열쇠였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경제발전의 업적은 인정하나 독재를 했기에 비판받아야 한다"는 평가는 경제발전과 외재적으로 독재 자체를 분리시켜 결국 '경제성장이라는 신화'를 받아들이고, 경제발전 자체에 내재해 있는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에 눈을 감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그 결과 '자유주의의 이분법적 평가'를 매개로 해서 박정희체제의 신화와 정당성은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자유주의 세력은 자신이 집권하는 기간에 바로 그 '경제성장'을 위해 민주주의란 외피를 쓰고 '또 다른 독재'를 수행한다. 그래서 또 다시 '경제성장'이라는 신화 때문에 정권을 박정희의 후예들에게 내주고 만다.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이 바로 박정희 신화를 유지시키고 박정희체제를 환생시키는 생명수인 것이다.
문제는 '박정희 체제의 실패'가 아니라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 실패의 역사'다
<박정희체제, 자유주의적 비판 뛰어넘기>는 모두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과 2장에서는 유신체제의 등장과 몰락의 과정을 둘러싼 논의, 박정희체제의 역사적 공과를 둘러싼 기존의 논의를 검토하면서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이분법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3장에서는 5ㆍ16쿠데타를 통한 박정희체제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던 1950~60년대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기존의 '신식민지 국독자론'과 '종속 파시즘론'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50년대를 독점자본의 형성기로, 5ㆍ16쿠데타와 한일협정을 계기로 한 60년대 중반 이후를 독점자본의 급속한 지배력 강화기로, 유신체제를 매개로 한 70년대 중반 이후를 독점자본의 지배력이 일반화되는 시기"라 주장한다.
4장에서 6장까지는 5ㆍ16쿠데타의 발발 배경, 6ㆍ3항쟁 이후의 정치적 반동의 강화와 민주주의 후퇴, 71년 대선과 총선을 통해 드러난 대중의 이반, 70년대 초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 - 새마을 운동, 국가보위법과 긴급조치, 8ㆍ3조치 등 - 그리고 이 모든 정치적 귀결로서의 유신체제의 등장, 즉 공개적 독재체제의 제도적 완료를 분석하고 있다.
7장에서는 유신체제 이후의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의 확대, 그리고 재야세력(비판적 자유주의세력)의 등장과 헤게모니의 확대 과정, 야당의 선명투쟁노선으로의 복귀, 이 모든 투쟁의 귀결로서의 1979년 부마항쟁, 그리고 그에 따른 지배세력 내부의 균열의 표현인 10ㆍ26사태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특히 자유주의세력 내부에서 야당과 재야 사이의 관계, 자유주의세력과 노동자민중들의 대중투쟁과의 관계의 역동적인 변화가 어떻게 지배세력 내부를 분열시키고 유신체제의 붕괴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심도있게 분석하고 있다.
마지막 8장에서 필자는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평가'가 결국 "경제발전의 토대 위에서만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지배적 발상의 수용으로 귀결될 수 있음을 비판하면서,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통해, 자칫 진보에게도 '덫'이 될 수 있는 자유주의적 이분법을 극복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문제는 "박정희체제의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그 비판세력들의 한계"라는 것이고,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의 실패'의 역사로서 박정희체제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고 필자는 주장하고 있다.
한국사회는 지난 50여 년간 '박정희체제'와 그리고 그 '늪'에 갇힌 자유주의적 정권 모두를 경험했다. 이제 이 두 대립항의 시대, 그 이분법의 '덫'을 어떻게 벗어던질 것인가가 역사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보수지배세력은 이 두 대립항, 즉 산업화와 민주화를 '선진화'로 통합하자는 시도를 한다. 자유주의세력은 '과거로의 회귀'를 비판하며 여전히 '민주 대 반민주'의 틀에 안주한다. <박정희체제, 자유주의적 비판 뛰어넘기>는 이런 대립항을 뛰어넘어 이론과 실천에서의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제안하고 있다. 이 책이 과거의 '박정희체제'에 대한 평가만이 아니라, 미래의 한국사회가 어떤 길을 갈 것인지, 역사의 진보를 꿈꾸는 자들이 박정희체제라는 '늪'을 벗어나고 자유주의적 이분법이라는 '덫'을 벗어던질 수 있는 논의와 성찰의 출발이 되길 기대해 본다.
<책속으로 추가>
"5.16군부쿠데타세력은 그 정당성의 확보를 적극적인 반공정책과 민주당 정권의 정치지도력 부재 및 민생고의 해결에서 구했던 만큼 4.19민주혁명의 쁘띠부르주아적 요구를 수용하여 내자위주의 내포적 공업화 정책을 통한 자립경제의 실현과 민생고 해결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군사쿠데타세력의 계획은 50년대를 경과하면서 구조화된 미국으로의 한국경제의 포섭, 국가권력과 관료독점자본의 유착, 차관도입의 부진 및 화폐개혁을 통한 내자동원의 실패 등으로 현실화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쿠데타세력은 4.19혁명의 계승을 공공연히 표방하였음에도 4.19혁명의 대중적 힘을 국가발전에 이용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억압하였으며 그것은 역으로 미국과 관료독점자본의 이해가 관철되어 가는 것을 의미하였다."(56~57쪽)
"유신체제 등장 전후의 전반적인 계급분화는 주변계급의 누적 확대 및 비생산적 산업의 확장이라는 주변화론의 견해와는 달리 한국사회의 계급분화가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계급분화 양상을 반영하여 생산적인 노동자층의 성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관련, 참고로 4.19혁명이 발발했던 1960년의 계급구성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농민층이 약 65% 정도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비농非農 반프롤레타리아층을 포함한 비농쁘띠부르주아계급이 10.3%, 주변적 무산자층이 10.6%의 비중을 보인 반면, 노동자계급은 10.3%만을 차지하였고 그중 산업노동자는 단지 5.6%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계급구조는 50년대 말의 광범위한 쁘띠부르주아지계급의 존재 및 그들의 생활상의 요구와 이에 대한 지식인, 학생의 동의가 맞물리면서 표출된 4.19민주혁명의 발발과 그 귀결의 객관적 지표를 제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와 비교할 때, 60년대 후반 노동자계급의 급격한 성장을 핵심으로 하는 한국사회 계급분화의 추이는 50년대와는 달리 독점자본의 급속한 지배력 강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유신체제 출범 시기 국가권력의 파시스트화 경향의 객관적 근거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74~75쪽)
"이 지점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쿠데타 주도세력이 최소한 반미/용공주의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된 후, 미국은 상이한 카드로 쿠데타세력의 행보를 통제하면서 자신들의 동북아전략을 관철시키는데 진력을 다했다는 점이다. 즉 미국은 쿠데타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 구조적 규정력과 직접적 압력으로 군정의 성격을 규정했던 것이다. 이것은 쿠데타세력을 미국의 하위파트너로 길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군정 초기에 실시하고자 하였던'내포적 산업화 전략에 근거한 경제개발계획'의 수정, 한일협정의 체결 과정에서의 미국의 개입은 그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92쪽)
"6.3항쟁이 국민적인 투쟁으로 발전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굴욕적인 한일회담'인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5.16쿠데타 이후 점차 노골화하는 지배세력의 정치적 반동화, 개선되지 않은 대중의 민생고와 당시 대중들 속에서 주요 비판의 대상이었던 '구악舊惡을 능가하는 신악新惡'-증권파동, 새나라자동차 사건, 워커힐 사건, 빠찡코 사건 등 중앙정보국이 개입한 것으로 입증된 이른바'4대의혹 사건'이 대표적이다-등 부정부패를 고려할 때만이 민정이양 후 불과 3개월여 만에 본격화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성격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63년 민정이양을 위한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신승한 것은 군정이 내세운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부분적 지지철회가 표현된 것으로, 그리고 6.3항쟁은 한일회담반대투쟁을 계기로 주권자인 대중이 직접 나서 박정희 정권을 타도하고자 한 60년대 마지막 국민적 저항이었으며 4.19혁명의 역사적 의의 및 민주적 요구를 복원시키고자 하는 마지막 행보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98~99쪽)
"5.16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장이 된 박정희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임을 반복 강조하면서, 이후 집권 공화당은 농민을 상징하는 황소가 그려진 당기를 앞세우고 토지개혁 이후 몰락의 길을 걷고 있던 농민들에게 지지를 얻고자 하였다. 3공화정 시기 박정희 정권은 농협, 농촌진흥청 등을 위로부터 조직하며 자주적인 농민조직의 성장 발전을 차단, 수렴하는 한편 농어촌고리채 정리법안, 농산물가격유지법 등 혁신적인 대對농민입법조치를 단행함으로써 농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정책이 실패하거나 효력이 반감하고 독점자본 중심의 개방경제체제로의 전환 이후 농지세의 물납제 부활, 자립안정농가 조성사업의 중단 및 협업화시범농장의 좌절 등에서 보이듯 소위 쁘띠부르주아적 중농주의정책은 자본의 논리 앞에서 그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이에 국가권력은 장기적이며 구조적인 대농업정책을 포기하고 60년대 말 이후 고미가 정책, 다수확품종개량에 의한 식량증산정책 등 미시적이고 단기간에 효과가 드러나는 정책을 채택하여 농민지지를 유도해 내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들 정책은 수출드라이브를 위한 저곡가정책과 모순을 불러일으키면서 한계를 드러내고 그 한계는 결국 대중동원과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의해 메워지는데, 뒤에서 살피겠지만 새마을운동은 그 전형이라 할 수 있다."(131쪽)
"이는 신식민지 혹은 종속적인 국가의 경우 중산층이 파시즘에 대해 적극적으로 투쟁하지는 않지만 또한 스스로 파시즘적인 사회경제적 관점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견해의 유효함을 보여준다. 오히려 3선개헌이라는 군부정권의 정치적 반동에 부가하여 70년대 초 그들의 물적 기반인 종속적 독점자본의 축적 위기는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기층대중과 중산층을 분리시키기 위한 물적 조건의 확보를 더욱 어렵게 함으로써 중산층의 정치적 반동으로부터의 이탈을 촉진시키는데, 이는 바로 이들이 70년대 자유주의적 민주화운동의 핵심 주체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바로 이러한 객관적인 사회경제적 위기와 갈등에 기인하는 정치적 균열의 확대는 71년 양대 선거에서 지배권력의 패배로 나타나고 그와 같은 정치지형의 변화-특히 이 시기가 노동운동과 지식인, 학생운동이 점차 상호침투해가는 과정이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양대 선거 이후 휴교령, 위수령, 국가비상사태 선언(12월 6일) 등으로 시민적 헌법질서와 노동자계급에 예방적 공세를 취하며 군부파시스트세력이 정치전면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상황이 이러함에도 3공화정의 지배가 '대중적 동의'에 기반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143쪽)
"애초 성장, 발전주의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약속했던 것, 즉'분배와 민주주의'는 언제까지 고통을 감내해야만 맛볼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약속 이행을 요구하는 순간, 즉 대중들이 자신들이 믿고 있던 지배이데올로기의 실현을 즉각 요구하는 순간, 나아가 그것을 강제하고자 하는 순간, 기존 지배이데올로기는 위기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바로 전태일의 외침과 분신은 이 순간을 상징한다. 바로 이 순간 기존의 성장, 발전이데올로기는 대외종속적 개방경제체제의 재생산을 위해 노동자계급에 유혈적 테일러리즘을 강요하는 내외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이며 그들과 결탁, 융합된 비민주적 정치권력의 자기정당화 논리라는 인식이 상식의 구성부분으로 인입되는 것이다. 물론 대중은 지배권력이 내걸었던 구호와 이상, 그리고 대중 자신의 현실적 고통 사이에 조성된 점증하는 괴리를 상식적인 단 한마디로 표현하는데, 바로 그것이"더 이상 속지 않아!"이다.
국가를 지배계급이 그 지배를 정당화하고 유지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통치하는 하위계급의 능동적 동의를 확보하는 실천적 및 이론적 복합체라 한다면, 노동자계급 등 대중으로부터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 순응非自發的順應'을 이끌어내어 왔던 이들 지배이데올로기의 균열, 특히 축적 위기와 맞물린 성장, 발전이데올로기의 균열은 다른 한편으로 이완되었지만 여전히 손상되지 않은 채 그것들을 떠받치고 있던 반공, 안보이데올로기를 동반한 파시스트적 억압의 강제가 전면에 대두할 가능성과 그 현실성을 제고시키는 것이었다."(159쪽)
"농촌에서부터 실시된 새마을운동은 농촌의 노동력을 자본화하여 도로와 주택, 주변 환경을 개선함으로써 농업에 있어 높은 생산성과 효율성에 기여할 가시적인 자산을 늘려가려는 노력이었지만 결국 그 의도 여부와 무관하게 농촌지역의 자본에의 포섭력을 더 증대시킨 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새마을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지배권력에 대한 지지 속에 잠재되어 있는 농민의 불만을 오히려 농민의 집단적 노력동원과 경쟁을 통해 예방하고자 하는 국가권력의 적극적인 농민통제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168쪽)
"박정희 정권에게 이음異音그 자체로 간주된 것이 바로 정치였다. 그리고 근대정치의 핵심이 민주주의라는 점에서 이음異音의 부정은 곧 민주주의의 부정을 의미하였기에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란 '이음異音으로서의 정치'를 부정하고 추방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런 측면에서 박정희 정권이야말로 '정치가 아닌 치안의 상징'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 박정희 정권이 민족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며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을 재현하고자 한 비밀이, 나아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민주주의와 함께 할 수 없는 이유가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의 내면화'는 감수성이 예민한 초등교육에서부터 이루어졌다. 즉 70년대 초중반 영웅들의 전기들이 고전교양도서로 되어 국민(초등)학교와 중학교 등에서 의무적으로 읽혔고 자유교양대회라는 것을 통해 그것의 내면화 정도가 평가되었다. 각 초, 중등학교에서 선발된 인원들은 지역(시, 도), 전국대회 등에 참여하여 시험과 독후감 등으로 실력을 겨루었고 그에 따른 보상이 이루어졌다"(182쪽)
"8.3조치는 국가개입이 단지 축적 위기의 방어라는 소극적인 역할에만 머무르지 않듯이 단순히 기업의 채무부담 해소를 위한 조치만은 아니었으며, 자본축적 위기의 도래로 전면에 대두한 경공업 중심의 수출구조가 갖는 한계를 타개하고 중화학공업 육성의 지반 확보를 위한 금융개혁이라는 측면을 함께 지니는 것이었다. 즉 8.3조치는 중화학공업부문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동원을 위한 저금리시대의 개막을 의미하는 한편, 72년의 단기금융업법의 제정에서 보이듯 사私금융시장의 유통자금을 중화학공업부문의 투자로 전환시키기 위한 성격 또한 아울러 내포하고 있었다."(188쪽)
"8.3조치가 60년대 후반 고도축적에 내재한 모순의 발현으로 나타난 위기를 국가권력의 폭력적 개입에 의해 해소함으로써 새로운 단계의 자본축적의 재개를 위한 지반형성을 견고히 하였다면, 유신체제의 등장은 새로운 자본축적의 원활한 재생산을 위한 억압적 국가장치의 공식화된 재편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특히 독점자본주의의 경우, 가치실현을 위해 국가의 경제적 개입은 물론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개입을 필수조건으로 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점은 박정희 정권의 시민적 헌법질서에 대한 위협및 동결이 71년 양대 선거에서의 실질적 패배 이후 강화되고 같은 해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선언과 27일 국가보위법이 불법 통과되면서 급속히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며, 이런 맥락에서 유신체제의 등장은 기존의 파쇼화 경향이 공식적인 체제원리로 전환, 마무리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91쪽)
"전태일의 분신과 광주대단지폭동 등은 어떤 사회정치적 영향을 미쳤을까. 이들 사건은 저임금저곡가 기제에 근거한 대외개방형 수출지향 발전전략의 한계가 표현된 것이라는 점에서 박정희 정권의 사회정치적 기반의 취약성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그런 측면에서 정치적인 위협을 함축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 그에 저항하는 사회정치세력에게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 중요하다. 전태일은 자신에게 지식인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즉 고통 받는 노동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지식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전태일의 분신에 많은 지식인과 학생들, 나아가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인 정치인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노동자들의 열약한 노동조건과 무권리 때문이라기보다 바로 자신들이 그러한 현실을 방조하고 있었다는 자책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이들은 경제성장의 뒤안길에서 소외된 노동자 등 대중의 삶, 기본권 보장 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이러한 흐름은 민중지향적인 자유주의세력 - 비판적 자유주의 혹은 개혁 자유주의 - 이 형성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218~219쪽)
"유신정권의 민청학련의 성격에 대한 규정과 관련하여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민청학련이 3선개헌 반대투쟁, 71년 교련반대투쟁과 위수령 발동시기에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에 의해 지도되었으며 이념적으로 '비판적 자유주의'에 지배되었다는 점이다. 즉 민청학련은 당시 반유신정서가 대중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것에 기초하여 전국적인 반정부투쟁을 계획하기는 했으나 지배체제의 본질적인 성격에 대한 인식은 물론 유신체제에 대한 변혁적 전망 역시 지니고 있지 못하였다"(222~223쪽)
"박정희 정권시기 반체제운동을 관통하였던 '자유주의세력의 헤게모니'는 상이한 영역에서, 상이한 요구를 내걸고 전개된 다양한 대중투쟁을 '반독재 민주화'로 수렴시키면서 결국 자유주의세력의 특수한 이해에 종속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력은 대중의 삶의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한 재야, 학생운동의 방향선회에 기인하는 측면이 없지 않았으나 그들을 추종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대중운동의 빈곤, 최소한 그들을 대표하고자 하는 진보 정치세력의 부재에 기인하는 바 또한 컸다. 따라서 자유주의세력이 주도한 당시 반체제운동은 민중들 자신의 인지 여부에 관계없이 그들이 자유주의세력이 설정한 경계를 넘어 나아가고자 하는 순간, 분열될 수밖에 없었다."(230~231쪽)
"YH노동조합의 투쟁과 관련, 가장 쟁점이 되는 것은 그것이 유신체제의 붕괴에 미친 영향이다. 흔히 유신체제는 지배권력 안의 갈등의 표현인 10.26사태가 발생하여 박정희가 제거됨으로써 붕괴되었다고 주장된다. 물론 지배블록 내'강경파'와'온건파'의 갈등이 반영된 10.26사태가 박정희 제거의 직접적인 계기였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러한 갈등이 표면화되기까지 전태일 등 노동자들의 분신, YH노동조합의 투쟁과 같은 노동자 등 대중들의 반유신투쟁이 단속적으로 전개되어 그러한 갈등의 폭과 깊이를 증폭시키는 계기를 제공하였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도 안 된다.
YH노동조합의 투쟁은 유신정권이 주장하듯이 도시산업선교회가 어린 여공들을 사주하여, 혹은 노사 문제를 반정부투쟁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재야나 신민당의 정략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의 쟁의가 '정치적 요구'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이미 노동현장은 '정치의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자본의 헤게모니 빈곤과 공개적 독재체제로의 이행은 생산현장에서 일어난 노자 사이의 아주'사소한 일trivial thing'조차도 국가기구들과의 극단적인 갈등으로 나아가게 하는 경직된 구조를 내재화시켰던 것이다."(249~250쪽)
"이러한 발상의 문제는 이 글의 모두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박정희=유신체제'를 전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박정희를 비대칭적인 사회관계들, 그 안에 내재하여 작동하는 권력관계들 속에 위치시켜 이해하기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해함으로써 박정희의 살해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로 상징되는 부당한 사회관계들 및 권력관계들이 계속 재생산되었던 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효과를 산출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발상으로 인해 유신체제는 박정희의 피살에도 불구하고 붕괴되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이 재편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자유주의 사회정치세력들이 대중에게 유포한 반독재 민주화담론의 핵심이기도 한 '박정희=유신체제'라는 발상은 최측근에 의한 박정희의 피살과 맞물려 유신체제의 붕괴를 기정사실화시키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조성하는데 일조하였고, 그 결과 대중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할 중차대한 시기-이른바'서울의 봄 시기'-에 모든 이들이 박정희의 죽음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함으로써 바로 그 대중정치를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시키는 효과를 발휘하였던 것이다."(273쪽)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은 공개적 독재체제로서의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기독교와 지식인들에 대한 탄압의 성격을 띄고 있었지만, 그 기저에는 전태일의 분신 이후 '민중과의 연대'라는 모토에 근거한 노동자 등 민중에 대한 의식화 활동의 확산, 그리고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사회비판적 인식의 심화를 차단하기 위한 정치권력의 의도 또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사건은 유신정권의 고문과 인권유린을 통한 사건조작이라는 수준을 넘어 노동운동(정치)의 향후 발전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자유주의적, 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부터 점차 이탈하고자 하는 진보적 지식인과 대중노동운동의 연대를 모색하는 것에 대한 유신정권의 선제적 공세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276쪽)
"이 시대 박정희체제를 평가할 때,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경제신화, 즉'한강의 기적'에 관한 논의들, 평가들을 접할 때이다. 자유주의에 입각한 논의는 물론 일부'진보'를 포함한 대체적 시각은 "'경제적 성장'을 이룬 업적은 부인할 수 없는 것 아닌가!"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 인식,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성장 위에서만 분배, 복지 등'삶의 질'을 둘러싼 논의가 가능하다는 담론을 수용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즉 성장, 나눌 수 있는 빵이 없는데 어떻게 분배와 복지를 말할 수 있는가라는 식의 논의구도로 끌려들어가 결국 '성장과 발전'을 인정할 것인지, 말 것인지 여부가 핵심적인 쟁점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구도로의 이끌림은 경제발전의 토대 위에서만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지배적 발상의 수용으로 귀결된다. 바로 이것이 1990년, 1997년'산업화세력(수구세력)과 민주화세력(자유주의세력)의 연합'이라는 언술로 포장된 3당합당, DJP연합이 가능할 수 있었던 기저의 논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발상들은 이데올로기이다. 왜냐하면 근대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장, 발전과 착취, 수탈은 결코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았고 그런 역사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285쪽)
"한 가지 의아한 것은 박정희체제를 다루는 여러 논의들이 그것의 비민주성, 반민주성을 다루면서도 결국 민주주의의 동력인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 문제를 충분히 고민하고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박정희체제 20년을 공개적 독재체제, 즉 종속적인 파시즘체제의 등장과정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바로'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의 실패'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제는 박정희체제의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그 비판세력들의 한계가 더 냉정하고 깊이 있게 성찰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될 때, 박정희체제, 그것의 확대재생산으로서의 신자유주의경쟁국가가 강제하는 분절된 삶들을 해소, 극복하기 하기 위한 제도 안팎의 다양한 시도들 또한 최소한의 역사적 의미를 담보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이미 '자유주의자들에게 늪이 된 박정희'가 진보에게 덫으로 기능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290~291쪽)
박정희체제 뛰어넘기
"돌이켜보면 자유주의정치세력의 리더들은 5ㆍ16쿠데타 이후, 특히 유신체제 이후 그것과 대결하였지만, 결국 그들과 함께 하였다. '박정권 타도선언'을 했던 YS는 박정희체제의 적자이자 자신이 '죽음의 단식'으로 넘고자 했던 신군부와 3당합당을 통해 하나가 되었다. 동경에서 박정희정권에 납치되어 죽음의 경계에 섰고 '5ㆍ18민중항쟁의 배후조종자'로 신군부에 사형을 선고받았던 DJ 또한 유신본당을 자처하는 세력과 DJP연합을 통해 하나가 되었다. 뜻하지 않은 독자집권 이후 '바보 노무현'도 그 뒤를 이어 대연정을 제안한 바 있다.
왜 그랬을까?"
■ 5ㆍ16쿠데타 50주기를 맞이하여, '자유주의적 시각'이 아닌 '진보의 시각'으로 박정희 체제를 재조명하다!
■ '박정희'는 어떻게 '박정희체제'가 됐나? 진보적 정치학자가 1961.5.16.부터 1979.10.26.까지 박정희 체제의 등장과 몰락을 분석하다!
■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억압과 동의를 분리하는 '자유주의적 이분법'을 통해 끊임없이 유지되고 재생산되는 박정희 신화에 진보의 비판을 드리대다!
■ 자유주의 개혁세력의 집권이 왜 '잃어버린 10년'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의 한계 속에서 해명해 낸 연구서!
■ 자유주의에게는 '늪'이고, 진보에는 '덫'인 박정희체제를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통해 근본적으로 뛰어넘을 것을 제안!
■ 박정희체제에서 자라고, 박정희체제에 저항했으나, 아직도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에 안주하고 있는 486세대들의 성찰을 위한 책!
두 얼굴의 '박정희'
5ㆍ16군사쿠데타가 반발한 지 올해로 꼭 50년이 된 지금, 한국사회에는 두 얼굴의 '박정희'가 있다.
"못난 후손들에게 홀대를 받던 박정희의 환생"을 꿈꾸는 이들은 박정희 기념관 건립과 교과서 수정 작업 등을 통해 박정희가 5천년의 가난을 극복한 "불세출의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로 재조명되길 갈망한다. 그들에게 5ㆍ16군사쿠데타는 조국근대화 혁명의 출발점이고, 경제개발과 경제성장은 한국사회를 가난에서 해방시켰으며, 경제 발전이 가져온 풍요가 이후 민주화의 토대가 됐고, 유신체제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발현으로 평가된다. 나아가 그들은 "대한민국 전체가 박정희의 기념관이자 박물관"이 되길 꿈꾼다.
박정희의 또 다른 얼굴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이른바 '자유주의적 평가'이다. 박정희체제가 "경제개발과 경제성장에서 크게 공헌"했지만, "군사쿠데타를 통해 민주주의의 자생적 발전을 가로막은 독재자"였고, "민주주의를 희생시켜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이며, 유신체제는 반민주 독재체제라는 평가가 그것이다.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평가는 박정희체제가 '경제성장과 독재'라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독재와 인권유린'이라는 얼굴만이 집중 평가되고 부각되길 바란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박정희와 박정희체제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이 두 대극을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산업화가 먼저냐? vs 민주화가 먼저냐?", "경제 발전이 가져오는 풍요가 민주주의를 동반한다 vs 민주주의를 먼저 했어도 경제 성장이 가능했다"는 논쟁구도가 그것이다.
비판의 초점은 '박정희'가 아닌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이분법'
박정희와 박정희체제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이러한 두 대척점과 논쟁구도는 타당한가? <박정희체제, 자유주의적 비판 뛰어넘기>는 이 논쟁구도 자체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책은 박정희체제에 대한 그 흔한 비판서가 아니다. 그것은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에 대한 비판서'이다. 즉 비판의 초점이 '박정희'가 아니라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이분법'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 통념화된 '자유주의적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을 때에만 박정희체제를 분명하게 극복할 수 있다고 필자는 판단하기 때문이다.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이분법에 기초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드러난다.
"박정희 정권이 그나마 최소민주주의가 유지되었던 제3공화정을 유신체제라는 공개적 독재체제로 전화시켰기 때문에, 즉 최소민주주의를 부정하였기에 비판받아야 한다"는 평가와 "'한강의 기적'으로 상징되는 경제발전을 이룬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유신체제라는 반인권, 억압의 독재체제를 한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받아야 한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이분법'에 대해 필자는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이해', 즉 "국가가 과연 민주주의의 담지자, 그 주체일 수 있는가"라는 관점과 '경제와 정치를 분리시킬 수 있는가?', 즉 "국가의 반인권, 억압의 주요 대상이었던 노동자, 농민, 빈민의 문제를 경제 문제와 분리시킬 수 있는가"라는 관점 두 측면에서 발본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필자에게 '정치'는 '민주주의의 실현'이고, 민주주의란 곧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이자, '인민의 자기지배의 실현'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선거민주주의와 동일시하거나 한정시키는 자유주의적 이분법으로는 '자기의지의 실현'으로서의 민주주의의 재구성은 이루어질 수 없다. '민주주의'를 자유주의적 이분법의 틀로 한정시킬 때, 박정희체제에 대한 평가 역시 앞의 이분법의 틀에 갇혀버린다.
또한 필자는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이 "노동자와 민중들의 삶과 노동의 고통이 곧 경제성장의 열쇠였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경제발전의 업적은 인정하나 독재를 했기에 비판받아야 한다"는 평가는 경제발전과 외재적으로 독재 자체를 분리시켜 결국 '경제성장이라는 신화'를 받아들이고, 경제발전 자체에 내재해 있는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에 눈을 감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그 결과 '자유주의의 이분법적 평가'를 매개로 해서 박정희체제의 신화와 정당성은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자유주의 세력은 자신이 집권하는 기간에 바로 그 '경제성장'을 위해 민주주의란 외피를 쓰고 '또 다른 독재'를 수행한다. 그래서 또 다시 '경제성장'이라는 신화 때문에 정권을 박정희의 후예들에게 내주고 만다.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이 바로 박정희 신화를 유지시키고 박정희체제를 환생시키는 생명수인 것이다.
문제는 '박정희 체제의 실패'가 아니라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 실패의 역사'다
<박정희체제, 자유주의적 비판 뛰어넘기>는 모두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과 2장에서는 유신체제의 등장과 몰락의 과정을 둘러싼 논의, 박정희체제의 역사적 공과를 둘러싼 기존의 논의를 검토하면서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이분법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3장에서는 5ㆍ16쿠데타를 통한 박정희체제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던 1950~60년대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기존의 '신식민지 국독자론'과 '종속 파시즘론'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50년대를 독점자본의 형성기로, 5ㆍ16쿠데타와 한일협정을 계기로 한 60년대 중반 이후를 독점자본의 급속한 지배력 강화기로, 유신체제를 매개로 한 70년대 중반 이후를 독점자본의 지배력이 일반화되는 시기"라 주장한다.
4장에서 6장까지는 5ㆍ16쿠데타의 발발 배경, 6ㆍ3항쟁 이후의 정치적 반동의 강화와 민주주의 후퇴, 71년 대선과 총선을 통해 드러난 대중의 이반, 70년대 초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 - 새마을 운동, 국가보위법과 긴급조치, 8ㆍ3조치 등 - 그리고 이 모든 정치적 귀결로서의 유신체제의 등장, 즉 공개적 독재체제의 제도적 완료를 분석하고 있다.
7장에서는 유신체제 이후의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의 확대, 그리고 재야세력(비판적 자유주의세력)의 등장과 헤게모니의 확대 과정, 야당의 선명투쟁노선으로의 복귀, 이 모든 투쟁의 귀결로서의 1979년 부마항쟁, 그리고 그에 따른 지배세력 내부의 균열의 표현인 10ㆍ26사태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특히 자유주의세력 내부에서 야당과 재야 사이의 관계, 자유주의세력과 노동자민중들의 대중투쟁과의 관계의 역동적인 변화가 어떻게 지배세력 내부를 분열시키고 유신체제의 붕괴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심도있게 분석하고 있다.
마지막 8장에서 필자는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평가'가 결국 "경제발전의 토대 위에서만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지배적 발상의 수용으로 귀결될 수 있음을 비판하면서,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통해, 자칫 진보에게도 '덫'이 될 수 있는 자유주의적 이분법을 극복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문제는 "박정희체제의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그 비판세력들의 한계"라는 것이고,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의 실패'의 역사로서 박정희체제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고 필자는 주장하고 있다.
한국사회는 지난 50여 년간 '박정희체제'와 그리고 그 '늪'에 갇힌 자유주의적 정권 모두를 경험했다. 이제 이 두 대립항의 시대, 그 이분법의 '덫'을 어떻게 벗어던질 것인가가 역사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보수지배세력은 이 두 대립항, 즉 산업화와 민주화를 '선진화'로 통합하자는 시도를 한다. 자유주의세력은 '과거로의 회귀'를 비판하며 여전히 '민주 대 반민주'의 틀에 안주한다. <박정희체제, 자유주의적 비판 뛰어넘기>는 이런 대립항을 뛰어넘어 이론과 실천에서의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제안하고 있다. 이 책이 과거의 '박정희체제'에 대한 평가만이 아니라, 미래의 한국사회가 어떤 길을 갈 것인지, 역사의 진보를 꿈꾸는 자들이 박정희체제라는 '늪'을 벗어나고 자유주의적 이분법이라는 '덫'을 벗어던질 수 있는 논의와 성찰의 출발이 되길 기대해 본다.
<책속으로 추가>
"5.16군부쿠데타세력은 그 정당성의 확보를 적극적인 반공정책과 민주당 정권의 정치지도력 부재 및 민생고의 해결에서 구했던 만큼 4.19민주혁명의 쁘띠부르주아적 요구를 수용하여 내자위주의 내포적 공업화 정책을 통한 자립경제의 실현과 민생고 해결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군사쿠데타세력의 계획은 50년대를 경과하면서 구조화된 미국으로의 한국경제의 포섭, 국가권력과 관료독점자본의 유착, 차관도입의 부진 및 화폐개혁을 통한 내자동원의 실패 등으로 현실화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쿠데타세력은 4.19혁명의 계승을 공공연히 표방하였음에도 4.19혁명의 대중적 힘을 국가발전에 이용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억압하였으며 그것은 역으로 미국과 관료독점자본의 이해가 관철되어 가는 것을 의미하였다."(56~57쪽)
"유신체제 등장 전후의 전반적인 계급분화는 주변계급의 누적 확대 및 비생산적 산업의 확장이라는 주변화론의 견해와는 달리 한국사회의 계급분화가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계급분화 양상을 반영하여 생산적인 노동자층의 성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관련, 참고로 4.19혁명이 발발했던 1960년의 계급구성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농민층이 약 65% 정도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비농非農 반프롤레타리아층을 포함한 비농쁘띠부르주아계급이 10.3%, 주변적 무산자층이 10.6%의 비중을 보인 반면, 노동자계급은 10.3%만을 차지하였고 그중 산업노동자는 단지 5.6%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계급구조는 50년대 말의 광범위한 쁘띠부르주아지계급의 존재 및 그들의 생활상의 요구와 이에 대한 지식인, 학생의 동의가 맞물리면서 표출된 4.19민주혁명의 발발과 그 귀결의 객관적 지표를 제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와 비교할 때, 60년대 후반 노동자계급의 급격한 성장을 핵심으로 하는 한국사회 계급분화의 추이는 50년대와는 달리 독점자본의 급속한 지배력 강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유신체제 출범 시기 국가권력의 파시스트화 경향의 객관적 근거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74~75쪽)
"이 지점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쿠데타 주도세력이 최소한 반미/용공주의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된 후, 미국은 상이한 카드로 쿠데타세력의 행보를 통제하면서 자신들의 동북아전략을 관철시키는데 진력을 다했다는 점이다. 즉 미국은 쿠데타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 구조적 규정력과 직접적 압력으로 군정의 성격을 규정했던 것이다. 이것은 쿠데타세력을 미국의 하위파트너로 길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군정 초기에 실시하고자 하였던'내포적 산업화 전략에 근거한 경제개발계획'의 수정, 한일협정의 체결 과정에서의 미국의 개입은 그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92쪽)
"6.3항쟁이 국민적인 투쟁으로 발전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굴욕적인 한일회담'인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5.16쿠데타 이후 점차 노골화하는 지배세력의 정치적 반동화, 개선되지 않은 대중의 민생고와 당시 대중들 속에서 주요 비판의 대상이었던 '구악舊惡을 능가하는 신악新惡'-증권파동, 새나라자동차 사건, 워커힐 사건, 빠찡코 사건 등 중앙정보국이 개입한 것으로 입증된 이른바'4대의혹 사건'이 대표적이다-등 부정부패를 고려할 때만이 민정이양 후 불과 3개월여 만에 본격화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성격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63년 민정이양을 위한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신승한 것은 군정이 내세운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부분적 지지철회가 표현된 것으로, 그리고 6.3항쟁은 한일회담반대투쟁을 계기로 주권자인 대중이 직접 나서 박정희 정권을 타도하고자 한 60년대 마지막 국민적 저항이었으며 4.19혁명의 역사적 의의 및 민주적 요구를 복원시키고자 하는 마지막 행보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98~99쪽)
"5.16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장이 된 박정희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임을 반복 강조하면서, 이후 집권 공화당은 농민을 상징하는 황소가 그려진 당기를 앞세우고 토지개혁 이후 몰락의 길을 걷고 있던 농민들에게 지지를 얻고자 하였다. 3공화정 시기 박정희 정권은 농협, 농촌진흥청 등을 위로부터 조직하며 자주적인 농민조직의 성장 발전을 차단, 수렴하는 한편 농어촌고리채 정리법안, 농산물가격유지법 등 혁신적인 대對농민입법조치를 단행함으로써 농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정책이 실패하거나 효력이 반감하고 독점자본 중심의 개방경제체제로의 전환 이후 농지세의 물납제 부활, 자립안정농가 조성사업의 중단 및 협업화시범농장의 좌절 등에서 보이듯 소위 쁘띠부르주아적 중농주의정책은 자본의 논리 앞에서 그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이에 국가권력은 장기적이며 구조적인 대농업정책을 포기하고 60년대 말 이후 고미가 정책, 다수확품종개량에 의한 식량증산정책 등 미시적이고 단기간에 효과가 드러나는 정책을 채택하여 농민지지를 유도해 내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들 정책은 수출드라이브를 위한 저곡가정책과 모순을 불러일으키면서 한계를 드러내고 그 한계는 결국 대중동원과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의해 메워지는데, 뒤에서 살피겠지만 새마을운동은 그 전형이라 할 수 있다."(131쪽)
"이는 신식민지 혹은 종속적인 국가의 경우 중산층이 파시즘에 대해 적극적으로 투쟁하지는 않지만 또한 스스로 파시즘적인 사회경제적 관점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견해의 유효함을 보여준다. 오히려 3선개헌이라는 군부정권의 정치적 반동에 부가하여 70년대 초 그들의 물적 기반인 종속적 독점자본의 축적 위기는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기층대중과 중산층을 분리시키기 위한 물적 조건의 확보를 더욱 어렵게 함으로써 중산층의 정치적 반동으로부터의 이탈을 촉진시키는데, 이는 바로 이들이 70년대 자유주의적 민주화운동의 핵심 주체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바로 이러한 객관적인 사회경제적 위기와 갈등에 기인하는 정치적 균열의 확대는 71년 양대 선거에서 지배권력의 패배로 나타나고 그와 같은 정치지형의 변화-특히 이 시기가 노동운동과 지식인, 학생운동이 점차 상호침투해가는 과정이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양대 선거 이후 휴교령, 위수령, 국가비상사태 선언(12월 6일) 등으로 시민적 헌법질서와 노동자계급에 예방적 공세를 취하며 군부파시스트세력이 정치전면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상황이 이러함에도 3공화정의 지배가 '대중적 동의'에 기반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143쪽)
"애초 성장, 발전주의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약속했던 것, 즉'분배와 민주주의'는 언제까지 고통을 감내해야만 맛볼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약속 이행을 요구하는 순간, 즉 대중들이 자신들이 믿고 있던 지배이데올로기의 실현을 즉각 요구하는 순간, 나아가 그것을 강제하고자 하는 순간, 기존 지배이데올로기는 위기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바로 전태일의 외침과 분신은 이 순간을 상징한다. 바로 이 순간 기존의 성장, 발전이데올로기는 대외종속적 개방경제체제의 재생산을 위해 노동자계급에 유혈적 테일러리즘을 강요하는 내외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이며 그들과 결탁, 융합된 비민주적 정치권력의 자기정당화 논리라는 인식이 상식의 구성부분으로 인입되는 것이다. 물론 대중은 지배권력이 내걸었던 구호와 이상, 그리고 대중 자신의 현실적 고통 사이에 조성된 점증하는 괴리를 상식적인 단 한마디로 표현하는데, 바로 그것이"더 이상 속지 않아!"이다.
국가를 지배계급이 그 지배를 정당화하고 유지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통치하는 하위계급의 능동적 동의를 확보하는 실천적 및 이론적 복합체라 한다면, 노동자계급 등 대중으로부터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 순응非自發的順應'을 이끌어내어 왔던 이들 지배이데올로기의 균열, 특히 축적 위기와 맞물린 성장, 발전이데올로기의 균열은 다른 한편으로 이완되었지만 여전히 손상되지 않은 채 그것들을 떠받치고 있던 반공, 안보이데올로기를 동반한 파시스트적 억압의 강제가 전면에 대두할 가능성과 그 현실성을 제고시키는 것이었다."(159쪽)
"농촌에서부터 실시된 새마을운동은 농촌의 노동력을 자본화하여 도로와 주택, 주변 환경을 개선함으로써 농업에 있어 높은 생산성과 효율성에 기여할 가시적인 자산을 늘려가려는 노력이었지만 결국 그 의도 여부와 무관하게 농촌지역의 자본에의 포섭력을 더 증대시킨 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새마을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지배권력에 대한 지지 속에 잠재되어 있는 농민의 불만을 오히려 농민의 집단적 노력동원과 경쟁을 통해 예방하고자 하는 국가권력의 적극적인 농민통제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168쪽)
"박정희 정권에게 이음異音그 자체로 간주된 것이 바로 정치였다. 그리고 근대정치의 핵심이 민주주의라는 점에서 이음異音의 부정은 곧 민주주의의 부정을 의미하였기에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란 '이음異音으로서의 정치'를 부정하고 추방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런 측면에서 박정희 정권이야말로 '정치가 아닌 치안의 상징'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 박정희 정권이 민족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며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을 재현하고자 한 비밀이, 나아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민주주의와 함께 할 수 없는 이유가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의 내면화'는 감수성이 예민한 초등교육에서부터 이루어졌다. 즉 70년대 초중반 영웅들의 전기들이 고전교양도서로 되어 국민(초등)학교와 중학교 등에서 의무적으로 읽혔고 자유교양대회라는 것을 통해 그것의 내면화 정도가 평가되었다. 각 초, 중등학교에서 선발된 인원들은 지역(시, 도), 전국대회 등에 참여하여 시험과 독후감 등으로 실력을 겨루었고 그에 따른 보상이 이루어졌다"(182쪽)
"8.3조치는 국가개입이 단지 축적 위기의 방어라는 소극적인 역할에만 머무르지 않듯이 단순히 기업의 채무부담 해소를 위한 조치만은 아니었으며, 자본축적 위기의 도래로 전면에 대두한 경공업 중심의 수출구조가 갖는 한계를 타개하고 중화학공업 육성의 지반 확보를 위한 금융개혁이라는 측면을 함께 지니는 것이었다. 즉 8.3조치는 중화학공업부문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동원을 위한 저금리시대의 개막을 의미하는 한편, 72년의 단기금융업법의 제정에서 보이듯 사私금융시장의 유통자금을 중화학공업부문의 투자로 전환시키기 위한 성격 또한 아울러 내포하고 있었다."(188쪽)
"8.3조치가 60년대 후반 고도축적에 내재한 모순의 발현으로 나타난 위기를 국가권력의 폭력적 개입에 의해 해소함으로써 새로운 단계의 자본축적의 재개를 위한 지반형성을 견고히 하였다면, 유신체제의 등장은 새로운 자본축적의 원활한 재생산을 위한 억압적 국가장치의 공식화된 재편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특히 독점자본주의의 경우, 가치실현을 위해 국가의 경제적 개입은 물론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개입을 필수조건으로 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점은 박정희 정권의 시민적 헌법질서에 대한 위협및 동결이 71년 양대 선거에서의 실질적 패배 이후 강화되고 같은 해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선언과 27일 국가보위법이 불법 통과되면서 급속히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며, 이런 맥락에서 유신체제의 등장은 기존의 파쇼화 경향이 공식적인 체제원리로 전환, 마무리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91쪽)
"전태일의 분신과 광주대단지폭동 등은 어떤 사회정치적 영향을 미쳤을까. 이들 사건은 저임금저곡가 기제에 근거한 대외개방형 수출지향 발전전략의 한계가 표현된 것이라는 점에서 박정희 정권의 사회정치적 기반의 취약성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그런 측면에서 정치적인 위협을 함축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 그에 저항하는 사회정치세력에게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 중요하다. 전태일은 자신에게 지식인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즉 고통 받는 노동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지식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전태일의 분신에 많은 지식인과 학생들, 나아가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인 정치인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노동자들의 열약한 노동조건과 무권리 때문이라기보다 바로 자신들이 그러한 현실을 방조하고 있었다는 자책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이들은 경제성장의 뒤안길에서 소외된 노동자 등 대중의 삶, 기본권 보장 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이러한 흐름은 민중지향적인 자유주의세력 - 비판적 자유주의 혹은 개혁 자유주의 - 이 형성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218~219쪽)
"유신정권의 민청학련의 성격에 대한 규정과 관련하여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민청학련이 3선개헌 반대투쟁, 71년 교련반대투쟁과 위수령 발동시기에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에 의해 지도되었으며 이념적으로 '비판적 자유주의'에 지배되었다는 점이다. 즉 민청학련은 당시 반유신정서가 대중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것에 기초하여 전국적인 반정부투쟁을 계획하기는 했으나 지배체제의 본질적인 성격에 대한 인식은 물론 유신체제에 대한 변혁적 전망 역시 지니고 있지 못하였다"(222~223쪽)
"박정희 정권시기 반체제운동을 관통하였던 '자유주의세력의 헤게모니'는 상이한 영역에서, 상이한 요구를 내걸고 전개된 다양한 대중투쟁을 '반독재 민주화'로 수렴시키면서 결국 자유주의세력의 특수한 이해에 종속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력은 대중의 삶의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한 재야, 학생운동의 방향선회에 기인하는 측면이 없지 않았으나 그들을 추종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대중운동의 빈곤, 최소한 그들을 대표하고자 하는 진보 정치세력의 부재에 기인하는 바 또한 컸다. 따라서 자유주의세력이 주도한 당시 반체제운동은 민중들 자신의 인지 여부에 관계없이 그들이 자유주의세력이 설정한 경계를 넘어 나아가고자 하는 순간, 분열될 수밖에 없었다."(230~231쪽)
"YH노동조합의 투쟁과 관련, 가장 쟁점이 되는 것은 그것이 유신체제의 붕괴에 미친 영향이다. 흔히 유신체제는 지배권력 안의 갈등의 표현인 10.26사태가 발생하여 박정희가 제거됨으로써 붕괴되었다고 주장된다. 물론 지배블록 내'강경파'와'온건파'의 갈등이 반영된 10.26사태가 박정희 제거의 직접적인 계기였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러한 갈등이 표면화되기까지 전태일 등 노동자들의 분신, YH노동조합의 투쟁과 같은 노동자 등 대중들의 반유신투쟁이 단속적으로 전개되어 그러한 갈등의 폭과 깊이를 증폭시키는 계기를 제공하였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도 안 된다.
YH노동조합의 투쟁은 유신정권이 주장하듯이 도시산업선교회가 어린 여공들을 사주하여, 혹은 노사 문제를 반정부투쟁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재야나 신민당의 정략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의 쟁의가 '정치적 요구'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이미 노동현장은 '정치의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자본의 헤게모니 빈곤과 공개적 독재체제로의 이행은 생산현장에서 일어난 노자 사이의 아주'사소한 일trivial thing'조차도 국가기구들과의 극단적인 갈등으로 나아가게 하는 경직된 구조를 내재화시켰던 것이다."(249~250쪽)
"이러한 발상의 문제는 이 글의 모두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박정희=유신체제'를 전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박정희를 비대칭적인 사회관계들, 그 안에 내재하여 작동하는 권력관계들 속에 위치시켜 이해하기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해함으로써 박정희의 살해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로 상징되는 부당한 사회관계들 및 권력관계들이 계속 재생산되었던 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효과를 산출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발상으로 인해 유신체제는 박정희의 피살에도 불구하고 붕괴되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이 재편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자유주의 사회정치세력들이 대중에게 유포한 반독재 민주화담론의 핵심이기도 한 '박정희=유신체제'라는 발상은 최측근에 의한 박정희의 피살과 맞물려 유신체제의 붕괴를 기정사실화시키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조성하는데 일조하였고, 그 결과 대중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할 중차대한 시기-이른바'서울의 봄 시기'-에 모든 이들이 박정희의 죽음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함으로써 바로 그 대중정치를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시키는 효과를 발휘하였던 것이다."(273쪽)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은 공개적 독재체제로서의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기독교와 지식인들에 대한 탄압의 성격을 띄고 있었지만, 그 기저에는 전태일의 분신 이후 '민중과의 연대'라는 모토에 근거한 노동자 등 민중에 대한 의식화 활동의 확산, 그리고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사회비판적 인식의 심화를 차단하기 위한 정치권력의 의도 또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사건은 유신정권의 고문과 인권유린을 통한 사건조작이라는 수준을 넘어 노동운동(정치)의 향후 발전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자유주의적, 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부터 점차 이탈하고자 하는 진보적 지식인과 대중노동운동의 연대를 모색하는 것에 대한 유신정권의 선제적 공세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276쪽)
"이 시대 박정희체제를 평가할 때,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경제신화, 즉'한강의 기적'에 관한 논의들, 평가들을 접할 때이다. 자유주의에 입각한 논의는 물론 일부'진보'를 포함한 대체적 시각은 "'경제적 성장'을 이룬 업적은 부인할 수 없는 것 아닌가!"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 인식,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성장 위에서만 분배, 복지 등'삶의 질'을 둘러싼 논의가 가능하다는 담론을 수용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즉 성장, 나눌 수 있는 빵이 없는데 어떻게 분배와 복지를 말할 수 있는가라는 식의 논의구도로 끌려들어가 결국 '성장과 발전'을 인정할 것인지, 말 것인지 여부가 핵심적인 쟁점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구도로의 이끌림은 경제발전의 토대 위에서만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지배적 발상의 수용으로 귀결된다. 바로 이것이 1990년, 1997년'산업화세력(수구세력)과 민주화세력(자유주의세력)의 연합'이라는 언술로 포장된 3당합당, DJP연합이 가능할 수 있었던 기저의 논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발상들은 이데올로기이다. 왜냐하면 근대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장, 발전과 착취, 수탈은 결코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았고 그런 역사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285쪽)
"한 가지 의아한 것은 박정희체제를 다루는 여러 논의들이 그것의 비민주성, 반민주성을 다루면서도 결국 민주주의의 동력인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 문제를 충분히 고민하고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박정희체제 20년을 공개적 독재체제, 즉 종속적인 파시즘체제의 등장과정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바로'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의 실패'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제는 박정희체제의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그 비판세력들의 한계가 더 냉정하고 깊이 있게 성찰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될 때, 박정희체제, 그것의 확대재생산으로서의 신자유주의경쟁국가가 강제하는 분절된 삶들을 해소, 극복하기 하기 위한 제도 안팎의 다양한 시도들 또한 최소한의 역사적 의미를 담보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이미 '자유주의자들에게 늪이 된 박정희'가 진보에게 덫으로 기능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290~291쪽)
목차
목차
책머리에
1장. 박정희제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자유주의적 이분법'의 발상을 넘어서
2장. 기존 연구 및 평가의 재음미
1. 유신체제의 등장과 몰락에 관한 논의들
2. '박정희체제'의 역사적 공과를 둘러싼 논의들
3장. '혁명과 쿠데타'의 물적 배경: 1950~60년대 사회경제적 분화와 삶의 양상
1. 독점자본의 형성과 지배력의 강화
2. 계급분화 및 객관적 존재상태
4장. 3공화정의 등장: 정치적 억압의 증대와 헌법질서의 균열
1. 5ㆍ16쿠데타의 배경과 발발
2. 6ㆍ3항쟁의 좌절, 정치적 반동의 강화와 '민주주의'의 후퇴
5장. 3공화정과 '체제 위기'
1. 축적 위기의 현재화, 사회적 긴장과 갈등의 제고
2. 71년 대선과 총선, 대중 이반의 확인
3. 지배이데올로기의 이완 및 균열
6장. 위기에의 대응과 유신체제
1. 새마을운동과 대중동원: 도시와 노동의 포위
2. 전통의 재구성을 통한 일상의 규율, 정치의 추방
3. 국가보위법의 발동: 실질적 헌정중단과 8ㆍ3조치
4. 유신체제 등장과 독점자본의 지배 심화
1) 유신체제, 공개적 독재체제의 제도적 완료
2) 노동의 배제와 중화학공업화정책의 추진: 대자본의 지배력 확대
7장. '반체제운동'과 공개적 독재체제의 붕괴
1. 비판적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등장과 헤게모니
1) 청계천에서의 노동자의 외침과 경기도 광주에서의 빈민의 아우성
2) 재야在野,' 비판적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성장과 헤게모니
2.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의 확대와 유신체제의 붕괴
1) 야당의 선명투쟁노선으로의 복귀와 노동자, 농민의 투쟁
2) 야당 존재의 부정과 '박정희 정권 타도 선언', 그리고 두 가지 삽화
3) '치안에 대한 대중정치투쟁'으로서의 부마항쟁과 10ㆍ26사태
3. 공개적 독재체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저항: 자유주의를 넘어, 대중을 향해
8장. '이분법의 이데올로기'를 넘어 민주주의의 급진화로
참고문헌
찾아보기
1장. 박정희제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자유주의적 이분법'의 발상을 넘어서
2장. 기존 연구 및 평가의 재음미
1. 유신체제의 등장과 몰락에 관한 논의들
2. '박정희체제'의 역사적 공과를 둘러싼 논의들
3장. '혁명과 쿠데타'의 물적 배경: 1950~60년대 사회경제적 분화와 삶의 양상
1. 독점자본의 형성과 지배력의 강화
2. 계급분화 및 객관적 존재상태
4장. 3공화정의 등장: 정치적 억압의 증대와 헌법질서의 균열
1. 5ㆍ16쿠데타의 배경과 발발
2. 6ㆍ3항쟁의 좌절, 정치적 반동의 강화와 '민주주의'의 후퇴
5장. 3공화정과 '체제 위기'
1. 축적 위기의 현재화, 사회적 긴장과 갈등의 제고
2. 71년 대선과 총선, 대중 이반의 확인
3. 지배이데올로기의 이완 및 균열
6장. 위기에의 대응과 유신체제
1. 새마을운동과 대중동원: 도시와 노동의 포위
2. 전통의 재구성을 통한 일상의 규율, 정치의 추방
3. 국가보위법의 발동: 실질적 헌정중단과 8ㆍ3조치
4. 유신체제 등장과 독점자본의 지배 심화
1) 유신체제, 공개적 독재체제의 제도적 완료
2) 노동의 배제와 중화학공업화정책의 추진: 대자본의 지배력 확대
7장. '반체제운동'과 공개적 독재체제의 붕괴
1. 비판적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등장과 헤게모니
1) 청계천에서의 노동자의 외침과 경기도 광주에서의 빈민의 아우성
2) 재야在野,' 비판적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성장과 헤게모니
2.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의 확대와 유신체제의 붕괴
1) 야당의 선명투쟁노선으로의 복귀와 노동자, 농민의 투쟁
2) 야당 존재의 부정과 '박정희 정권 타도 선언', 그리고 두 가지 삽화
3) '치안에 대한 대중정치투쟁'으로서의 부마항쟁과 10ㆍ26사태
3. 공개적 독재체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저항: 자유주의를 넘어, 대중을 향해
8장. '이분법의 이데올로기'를 넘어 민주주의의 급진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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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저자
이광일
저자 이광일(비정규직 대학 강사, 정치학)은 서울 하왕십리에서 태어났다. 유소년기에는 박정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박정희를 '훌륭한 정치지도자'라고 생각했다. 비판사회과학(정치학)을 접하면서 박정희를 객관화시켜 볼 수 있게 되었고 그 '인간적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 《박정희체제, 자유주의적 비판 뛰어넘기》는 그 결과물이다. 경계의 외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 그들과 함께 하는 이들의 몸짓을 학문과 글쓰기의 이정표로 삼고 있다. 저서로는 이 책의 후사(後史)이기도 한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 한국 급진노동운동의 형성과 궤적》(메이데이, 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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