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의 늪
이병주 소설
『망명의 늪』은 문학ㆍ역사ㆍ철학에 두루 능통한 작가 나림 이병주의 중단편 소설 세편을 엮어 낸 책이다. 그 한 편 한 편으로도 문학적 가치가 빼어난 작품이지만, 세 작품이 여러모로 지닌 유사성으로 인해 세 편을 묶어 공통의 시각으로 탐독할 때 그 흥미로움이 배가된다. 소설적 이야기의 극적인 구성을 통해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고,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흡입력 강한 전개는 작가 이병주의 오래고도 익숙한 특징에 해당하는데, ≪망명의 늪≫에 실린 세 이야기는 여기에 추리소설적 전개가 가미되어 책장을 넘기는 막간마저 사뭇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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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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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소설과 문학의 대중성
이야기만 재미있다고 해서 좋은 소설인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소설이 독자의 구미를 북돋우기 어려우며, 작가와 독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나 감응력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앞선 시대의 작가인 이병주에게서 이 고색창연한 미덕을 요연하고 풍성하게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은 중요하면서도 소중한 일이다. 이병주의 소설은 이성적 논의가 날카롭게 빛나고 철학적 토론을 유발할 만한 주제를 부각시키는 여정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그 종착점은 언제나 감성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지향에 닿아 있다. 따라서 그가 이끌어내는 우리 모두의 비루하고 저열한 인간적 속성이, 때로는 제삼자의 그것처럼 멀게 느껴지다가도 글을 읽는 도중 문득 마치 가까운 이의 모습처럼 다가오는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 밤이 있은 뒤 지옥이란 관념이 나의 뇌리를 스치든지 지옥이란 말을 듣든지 하면, 황량한 겨울 풍경을 바탕으로 하고 요염하게 꽃을 만발한 한 그루 매화나무가 눈앞에 떠오르곤, 광녀 머리칼처럼 흐트러진 수근(樹根)의 가닥가닥이 썩어가는 시체를 휘어감고, 그 부식 과정에서 분비되는 액체를 탐람하게 빨아올리는 식물이란 생명의 비적(秘蹟)이 일폭의 투시화가 되어 그 매화나무의 환상에 겹쳐지는 것이다."
- 《매화나무의 인과》 중에서 p.161
내면 지향적 삶 의식과 룸펜, 《망명의 늪》
비루하기 짝이 없는 주인공 '나'와, 심지어는 주인공이 존경하지만 더욱 더 비루하기 짝이 없는 '하인립'의 행적을 그저 한심하다고 치부해 버릴 수는 없는 어떤 지점에서 1970년대와 2010년대가 소통하는 접점이 등장한다. 주인공이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을 2015년의 누군가가 지금 한다고 해서 과연 그 말이 어색하고 무의미할까?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짓밟지 않는 한, 돈을 벌지 못한다는 걸 알았어요. 자기의 천국을 만들기 위해 무수한 지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어요. 그렇게 해서 돈을 벌어 뭣하겠습니까. 나는 히피처럼 살아가렵니다."
- 《망명의 늪》 중에서 p.68
통상적 인식의 초월과 귀환, 《철학적 살인》
이병주는 그의 다른 소설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輓詞)》에서 온전한 테러는 산 사람을 죽이는 '살생'이 아니라 이미 정신이 죽은 자를 죽이는 '살사(殺死)'라는 논리를 펼친 바 있다. 《철학적 살인》에 등장하는 '살인'은 이에 잇대어 설명될 수 있는 개념이다. 이 짧지만 강렬한 단편 《철학적 살인》의 배경 역시 1970년대 중반의 경제 성장 시대로, 작품이 기대고 있는 인간상은, 내면의 자아는 궁핍의 기억에 묶여 있는데, 삶의 외형은 도회적 부유와 해외 소통으로 확장되어 그 둘의 불협화가 발생하는 그 언저리에 존재한다. 살인에 철학을 덧붙이고 있는, 읽기에 편치 않은 이 어색하고 불편한 이야기가 마침내 수긍될 수밖에 없도록 꾸며나가는 작가 이병주의 소설적 설득력과 대중친화력을 발견할 수 있다.
인과응보와 비극적 운명론, 《매화나무의 인과》
이야기의 시작은 "지옥이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라는 전혀 뜬금없는 화두로부터 열린다. 작가의 현학 취미를 과시하듯 박람강기한 '지옥론'이 한동안 계속된 다음, 이야기는 '성 참봉집 매화나무'로 넘어가는 액자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작품의 제목이 표상하는 바와 같이 무슨 설화를 바탕에 둔 듯한, 숨겨진 사연을 암시하는 형국으로 진행되는 이 이야기는, 액자소설 형식의 경계를 넘어 또 시대의 구분을 넘어, 비장(秘藏)의 과거사를 찾아가는 소설적 기술 또한 추리소설적 대중성과 그 담화의 재미에 일익을 더하고 있다.
1970년대 중반에 발표된 《망명의 늪》이나 《철학적 살인》보다 10년 전인 1966년의 작품인 이 이야기는 전근대적 계급 사회의 구조와 변화하는 현대적 동시대 사회를 동시에 가로지르는 이야기를 통해, 행세하는 한 집안의 수장이 순간의 탐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저지른 살인과 그로 인한 집안의 궤멸을 추리소설적 기법으로 그렸다. 작가 이병주는 이 모골 송연한 담화를 이끌어가면서 겉보기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풀어두고 마무리에 이르러서야 실상을 드러내는 이야기 전개의 완급 조절 기량으로, 독자의 따라 읽기 호흡을 아주 능란하게 알아차리며 리드하고 있다.
목차
목차
2. 철학적 살인
3. 매화나무의 인과
저자
저자
1961년 5ㆍ16이 일어난 지 엿새 만에 "조국은 없고 산하만 있다"는 내용의 논설을 쓴 이유로 혁명재판소에서 10년 선고를 받아 2년 7개월을 복역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강의하다 마흔네 살 늦깎이로 작가의 길에 들어섰으며 1992년 지병으로 타계할 때까지 한 달 평균 200자 원고지 1,000여 매 분량을 써내는 초인적인 집필로 80여 권의 작품을 남겼다.
진실을 밝히는 기개와 용기를 지닌 사관(史官)이자 언관(言官)이고자 했던 언론인 경험은 문학 세계를 이루는 자양분이 되었다. 감옥에서 ≪사기≫를 정독하기도 한 그는 한 시대의 '기록자로서의 소설가' '증언자로서의 소설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제 강점기로부터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체험은 민족의 비극에 대해 지식인으로서 깊이 고뇌하게 하였고, 이를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1965년 《소설ㆍ알렉산드리아》를 ≪세대≫에 발표하며 등단했고 ≪관부연락선≫ ≪지리산≫ ≪산하≫ ≪소설 남로당≫ ≪그해 5월≫로 이어지는 대하 장편은 작가의 문학적 지향을 보여준다. 소설 문학 본연의 서사를 이상적으로 구현하고 역사에 대한 희망, 인간에 대한 애정의 시선으로 깊은 감동을 자아내는 작품은 세대를 넘어 주목받고 있다. 1977년 장편 ≪낙엽≫과 중편 《망명의 늪》으로 한국문학작가상과 한국창작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84년 장편 ≪비창≫으로 한국펜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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