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백 1: 백제무장
이원호 역사소설『계백』제1권. 고구려, 신라, 백제…신토불이 정통 삼국지 동아시아의 대영웅 장군 계백을 통하여 1300년만에 대백제 황산벌의 신화를 작가 이원호의 필치로 생동감있게 그려냈다. 또한 용장 계백의 군주(君主)에 대한 충성과 군주의 신하에 대한 애정을 주제로 삼아,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사회지도층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본보기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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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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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은 서기 660년 7월 10일 황산벌에서 전사한 백제의 장군이다.
전사 당시의 그의 직위는 제2품 달솔이었으나 휘하에 1품 좌평을 거느리고 있었으니 의자왕이 마지막 기대를 건 싸움이었고 장수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5천결사대는 신라 김유신의 5만 군사를 맞아 네 번을 싸워 네 번을 이겼으나 다섯 번째에 전멸하였다. 계백은 사비도성에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황산벌에 3개 영으로 군사를 나누기 전에 외치기를;
"옛적 월나라 구천은 5천 군사로 오나라 70만 대군을 격파했으니라. 너희들은 죽기로 결심하고 싸워 국은에 보답하라."
그러자 군사들이 일제히 함성으로 대답했다.
조선실록에 전대(前代)의 여러 왕릉보호와 함께 명신들을 추려 묘에 단을 세우고 보호하라는 영을 내렸는데 그 명신에;
'신라에 김유신, 김양, 백제의 성충, 계백, 고려의 강감찬, 정몽주'의 여섯을 뽑았다.
그러나 신라와 고려의 명신들은 여러 기록과 설화에 의하여 자취를 많이 남기고 있으나 백제의 성충과 계백의 기록은 거의 소멸되었다. 이것은 백제 유적도 마찬가지여서 동방 제1을 자랑하던 사비도성은 함락후 7주야를 불태워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역사는 정복자의 기록이라는 것이 실감될 뿐이다. 계백의 기록은 전무(全無)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나 유사보다도 오히려 중국의 자료에 드문드문 실려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계백은 황산벌에 나가기 전에 처자식을 칼로 쳐 죽였다.
"살아서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어라."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나 어떤 기록에는 계백의 처가 계백에게;
"살아 노예가 되느니 먼저 죽이고 가 주십시오." 하고 부탁을 한 것으로 나온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계백과 계백의 처는 백제의 멸망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계백은 5천 군사에게 오나라 구천의 예를 들면서 죽기로 싸워 국은에 보답하라고 외친다. 이미 그는 자신의 죽음과 백제의 멸망을 예상했던 터였고 5천 군사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래서 5천 군사는 전멸했다. 부상당해 잡힌 포로가 좌평 충상 등 20여명뿐이었으니 참으로 비장한 전투였으니 처절한 종말이다.
신라군은 4전 4패를 하자 본진인 곰티산성에서 작전회의를 하였다. 그래서 장군 김흠춘의 아들 화랑 반굴을 선봉으로 쳐 나가게 했으나 백제 장수의 칼을 맞아 바로 죽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장군 품일이 자신의 아들 화랑 관창을 선봉으로 내보냈다. 옛적 싸움에는 선봉 장수가 칼을 휘두르며 나와 이름과 관등을 대고 적장과의 교전을 원했던 것이다. 관창도 백제 장수의 상대가 안 되었다. 말에서 굴러 떨어진 관창을 백제 장수가 끌고 돌아왔을 때 그것을 본 백제군은 환성을 질렀으며 신라군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계백은 어린 관창을 얼굴에서 아비로부터 적진에 보내진 상처에다. 잡힌 치욕을 틀림없이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장군 품일이 자식을 희생양으로 내놓은 뜻도 모를 리가 없다. 계백은 관창을 놓아 보냈고 관창은 다시 혼자서 공격해왔다. 계백은 다시 잡힌 관창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낸다. 그래서 신라군이 분기를 일으켜 백제군을 쳐 이기는 것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기록만으로도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백제군 장수들이 계백에게 말한다.
"장군, 이놈이 열 번 오더라도 잡아 살려 보냅시다. 그럴수록 신라군은 더욱 사기가 떨어질 것이오."
관창이 울며 소리쳤다.
"나를 죽여라!"
그때 계백이 관창의 앞으로 한걸음 다가섰다.
"관창, 네 나이가 몇이냐?"
"열여섯이오."
계백이 허리에 찬 칼을 뽑았으므로 주위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어젯밤 그 칼로 계백은 처자식을 베었다. 죽은 둘째 아들의 나이도 열여섯이다.
계백의 칼이 날았고 관창의 목이 떨어졌다.
소설 『계백』은 이렇듯 기록에 살을 붙인 것이다. 계백에 대한 모든 기록을 찾았으나 그것은 한줌뿐이었다. 따라서 주위의 방대한 자료를 섞어 계백 장군이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다.
백제의 동방의 강국이었다. 중국대륙 동쪽에 백제령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왜국은 백제와 피를 나눈 형제국이며 속령이었다. 무왕과 의자왕 당시의 왜국에는 섭정 소가 에미시와 죠오메이 애왕이 있었는데 소가 에미시는 백제인 목협만치의 후손이며 서기 642년에 백제의 대왕은 의자왕이었고 왜왕은 의자왕의 누님인 부여보였다(황극천왕으로 불림. 642년 1월 즉위). 따라서 신라는 멸망직전의 상태에 있었으니 의자왕 즉위 2년에는 신라의 서변 40여성을 함락시켜 영토의 3분지 1을 빼앗고 김추추의 사위 품석과 딸을 죽였다. 백제는 고구려와 동맹상태에 있었으므로 함께 당을 공격하려면 등을 찌르는 세력을 없애야만 했던 것이다. 당은 이세민이 기반을 잡아가고 있었으나 동북쪽의 고구려와 동쪽의 백제가 공격해오면 감당해낼 수 없었다. 백제는 멸망 당시의 기록으로 5부(部), 200성, 76만호에 본국의 인구가 620만 거국(巨國)이었으니 해외 백제령과 왜국의 백제인을 합하면 1천만이 넘었을 것이고 고구려 또한 이와 비슷했다. 당의 기록은 인구가 4천6백만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민족의 집단이다. 단일민족인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군은 당해내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의 동맹에 위협을 느낀 것은 신라뿐만 아니라 당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신라와 당은 밀착했고 신라는 당의 속령이 되기를 간청했다. 진덕여왕은 당고종의 치적을 칭송하는 오언시를 직접 수를 놓아 보냈으며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당에 들어가 입조하고 관복(官服)을 자진해서 당의 관복으로 바꿨다. 또한 김춘추는 아들 문왕을 데리고 들어가 특진이라는 벼슬도 받았고 후에는 아들 인문(仁門)을 보내어 당 고종을 숙위케 했다. 자진해서 인진을 맡긴 것이다. 진평왕 시절부터 당에 수십 번 보낸 걸사표는 지금도 기록에 남아있으나 역사는 역시 승리자의 것이다. 그것은 미화(美化)되었고 합리화 되어왔다.
『계백』은 소설이다. 기록에 근거하여 살을 붙였고 결코 어느 한쪽에 치우치려 하지 않았으며 7세기 초, 중반의 동북아시아 형세를 배경으로 했다.
백제와 신라, 고구려와 왜, 당의 5개국으로 나눠진 상황에서 백제는 가장 안정되고 세력권이 단단한 강국이었다. 의자왕 10년 이후 20년에 멸망될 때까지 10년 동안에 의자왕 황음과 부패 등으로 멸망이 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진단은 없다. 36년 일제 식민지 시대에 백제 역사는 많이 왜곡, 축소되었고 지금도 그 영향이 남아있는 것이다.
소설 『계백』은 계백의 충성과 의자왕과의 관계에 집중시켰다.
의자왕은 태자시절 해동증자로 불릴 만큼 영민하고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다. 말기에 갑자기 황음에 빠진 이유를 누구하나 구체적으로 지적해낸 사람이 없다.
이 소설은 용장 계백의 군주(君主)에 대한 충성과 군주의 신하에 대한 애정을 주제로 삼았다. 또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사회지도층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본보기를 보여준다.
작금의 우리 현실은 정부수립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소설 『계백』을 반면교사로 하여 국력을 하나로 모으고 이 위기를 탈줄 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아보면 어떨까.
목차
목차
제1장 가잠성의 혼(魂)
제2장 난세수련(亂世修鍊)
제3장 풍운 속으로
제4장 백제령의 반란
제5장 야습
제6장 성주의 자질
제7장 서곡성 공방(攻防)
제8장 무장(武將)의 여인
제9장 음모(陰謨)의 아스카
제10장 연쇄 살인
제11장 기습군
제12장 역적의 딸
제13장 반역자들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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