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처가 옹이였다
조현숙 시집
조현숙 시집 『내 상처가 옹이였다』. 조현숙 시인의 시 작품을 담은 책이다. 크게 4부로 나뉘어 있으며 '나의 심상엔 언제나', '무수리 초상집', '4월의 언저리', '예비된 탈출' 등 을 수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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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이 산고를 멈출 수 있겠는가
불이라는 거울이 있다.
흙이라는 거울이 있다.
불과 흙이 서로 길항하면서 때로 불화하면서 가까스로 도달한 '붉은 불덩이 환상'의 시간이 아프다. 시인은 자신이 마주한 거울 속에서 도예(그릇)와 시가 한 몸이라고 묵언으로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달 항아리를 채운 "고요함도 빛바램도 / 바람도 구름도 모두 숨이 멎은 순간" 이라는 고백이 바로 그것 아니었겠는가. 조현숙 시인에게 시는 "붉디붉은 철화를 고스란히 입고 선 자태"를 열망하는 대발심大發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자궁 속 / 1300도 붉디붉은 숫접은 산고"의 고행이 시의 길이었음이다.
세상이 아주 소란할 때 조현숙 시를 읽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정월 대보름날 촛불평야에 나투신(月面佛)을 뵈오며 잘 빚은 두 항아리 ㅡ 달 항아리, 석류 항아리를 읽는 밤 또한 축복이리라. 그렇다 "저 달 어디에 붓을 찍어야/ 이 산고를 멈출 수 있겠는가" 시가 태어나는 황홀한 시간이다.
- 홍일선 (시인)
■ 십육여 년 간 연민의 별곡別曲
조현숙 시인의 이번 첫 시집은 십육 년의 자서전이라 할만하다. 절망이라는 순간에서 떠나야만 했던 수많은 길, 그 길엔 늘 물이 있다. 강물 또는 바다, 빗물, 그러한 물은 곧 사유화되어 시인의 관조에 끊임없이 안착한다.
시인은 늘 외롭다. 「내 상처가 옹이였다」에서도 시인은 견고한 외로움의 틀 안에다 '야무지게 방어'의 논리를 펴고 있지만 그것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의 무늬를 관조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외로움이 길어지면
겉은 고집과 아집으로
야무지게 방어를 한다지만
속은 결코 그게 아니라는 것
나중에,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
내 삶 깊게 박힌 상처
그 상처 옹이가 되어 도리질 치면
나도 모르게 만들어진
단단한 벽으로
이렇게 내가 굳어가고 있음을 어찌 알았으리
- 「내 상처가 옹이였다」 전문
"내 삶 깊게 박힌 상처 / 그 상처 옹이가 되어 도리질치"며 그것을 수 없이 되풀이하다 옹이가 된다는 사실에 화자 자신도 인지할 수 없는 공간 안에 단단한 벽을 세우는 무심의 빈 그림자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자주 바다를 찾는다고 한다. 시를 한 행도 지을 수 없을 때, 도자기를 미친 듯 빚다가 문득 그리움이 낚아챌 때, 화자의 가슴에 차오른 그 무엇을 퍼내려 했던 곳이 바다였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원고지 위로 쏟아놓은 비릿한 꿈의 시어들을 보면 끊임없이 허기진 시심이다.
「조가비」를 보면 "차갑게 떨고 있는 조가비 서넛 사려 넣고 왔다" 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엇인가를 버리고 채우려는 울부짖음의 문맥에서 치열한 시 정신을 간파할 수 있다
강은 늘 시인과 같이 있다. 시인이 사는 곳과 강의 거리가 몇 자락이나 될까마는 「강 그리고 나」 시편은 강과 화자를 동일시하는 겸허한 몸짓을 실감케 한다. 시인은 강을 길로서 적극적으로 사유화 한다. "앞뒷산 젖줄 모아 태동시킨 푸르디푸른 길" 이렇듯 시인의 가락에서는 정지용의 「향수」를 상기 시킨다.
시인에게서 강은 한 모금의 생명수가 아니라 화자와 함께 흐르는 길이다. "옥양목 같은 안개의 마디마디가 / 거미줄을 튕겨내자"로 이어지는 시인의 절창은 운율과 음률의 조화로움에 미각이 살아난다.
아마도 시인의 이러한 시적 메시지가 있기에 시인을 관념적이라 치부할 수 없을 것이다. "맥놀이가 어둠사리를 / 살풀이 몸짓으로 견고한 여울목 하나 지었다"로 이어지는 시인의 호흡이 다양하게 변주되면서 시적 변용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젖을 물렸던가 / 내 안에 희미한 강 무덤 자리에 소昭만 흥건하다" 엄마로서의 젖이 비로소 여인으로서 강으로 순환 되어지는 시인의 강은 무슨 까닭이기에 앞서 절실하게 동경하는 서정적 정감으로 시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시인이 거처하는 곳은 개량형 기와집으로 자갈이 깔린 넓은 마당과 뒤뜰, 그리고 나지막한 돌담이 둘러쳐진 고즈넉한 집으로 이곳엔 시인의 도예작업장과 도예생들의 학습장이 같이 있다.
이 시는 아마 어느 봄날의 풍경인 듯하다. 이렇듯 시인의 주변엔 시심이 흥건하다. 무릇 시심의 가을걷이라 할만하다.
누군가에겐 쌉싸름한 봄철 민들레가 점심나절 밥상의 쌈으로 자리한다면, 시인에겐 시상의 허기를 채울수 있는 호기이지 않겠는가? 시인의 일상이 그윽한 향수와 함께 향토가 아름다운 서정의 가락으로 노래되었기에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독자가 한 편의 시를 읊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면 그것으로서 시는 시인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봄날은 있었을 것이다.
그 봄날을 내밀하게 그려낸 「민들레와 정임 씨」, 어느 봄날을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담장 안 도자기 작업장 뜰,
노란 민들레꽃들이 멋내기가 한창인데요
연하고 쌉쌀한 그 맛을
입맛 돋운다는 이기심을
쌈 싸 잡숴 보겠다고
낯모르는 부부가 배낭을 지고
맛,
맛으로 조금도 아니고 뿌리까지
가방을 채우고 있었다지요
실습생인 정임 씨
안 된다고
정말 안 된다고
버티고 서서 소리 질렀지요
작업장 울안에 것은 모두 내 것이라고
제멋대로 자라고 있는 쑥부쟁이까지도
자기가 곱게 기르고 있는 거라고 했다지요
지금
흐드러진 민들레꽃들이
옆 뜰로 터 잡을 수 있는 것은
다 정임 씨 덕분이지요
- 「민들레와 정임 씨」 전문
조현숙 시인이 아니고서는 담아낼 수 없는 시편에 전율을 느낀다. 흙의 위대함을 일깨우는 드라마 같은 경건함이다. 청량한 음향을 독특한 발상으로 애절하게 파장을 일으키는 은유적 창법에 담아낸 시어들 하나하나가 기도문을 접하는 듯하다.
순우리말 '애절임, 애면글면'을 적절히 구사한 것 또한 신선한 충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의 손으로 직접 흙의 형상을 빚고, 불로서 그 응축된 시간을 담아낸 도공의 손길에 머문 시인의 시심에 경의를 표한다.
"속으로, 속으로 엉켜든 애절임은 / 굳어버린 엄지의 고통이었지" 무언의 흙 입자에서 한 점 형상을 빚어내기 위한 엄지의 고통은 형이상학적 지문의 울음임을 식별한다면 도공을 감히 위로한다 할 수 있을까?
시구 한 올에서 엿볼 수 있는 "상아빛 순결한 모태로 / 애면글면 물레를 차며 형상을 빚어갈 때" 메아리는 너무도 선명하여 감동의 산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시인의 시심은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러 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자궁 속 / 1300도 붉디붉은 숫접은 산고로 삭힌 / 청아한 인고의 보석" 이쯤에서는 필자도 숙연해진다. 여심만이 집어낼 수 있는 전통적 정취와 함께 흙냄새와 어머니의 냄새가 물씬 안겨오며 지적 갈등을 애절하게 씻어준다. "난 마디마디를 잃은 도공의 생채기로 울컥 각혈을 한다" 얼마만큼 도공의 외마디 비명을 독자들이 느낄 수 있을까? 시인은 각혈을 한다. 시인의 견고한 시 세계는 이제 서술적이고 관념적이지 않은 순수 서정시의 직조를 보이고 있다.
시인의 또 다른 영역이다. 도공으로서 시인은 존재를 바라보는 사유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이제 시인의 언어는 사물들 속에서 제각각의 의미를 가진 목숨의 풍경으로 응집된다.
"손사위에 잡힐 만큼의 가래4)로 형상을 / 보거라! 이제 네게 생명을 주리라 양 손가락들이 움직여 눈, 코, 입, 귀를 더듬어 만들고 눈썹과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섬세히 심고 나면" 시인은 미세한 입자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한 시맥을 찾아 먼 고행의 길 위를 서성인다. 산문시이면서도 서정적인 무늬가 시선으로 어우러져 공명의 메아리가 시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목선은 어깨를 지나 가슴선 탱탱하게 뉘를 애타 그리워하였기에 그리 선이 아름다운 것인가 허리 곡선은 비천의 모습, 아래로 흐르고 흘러 곧고 긴 다리 끝으로 설핏 유성流星 하나 살포시 스며든다" 이제 시에 선과 곡선이 흐르고 육감적 곧고 긴 다리엔 별빛들이 소복해진다. 아니 생명의 시어들과 흙이 입자로 소멸하므로 이름을 부여 받을 준비를 한다.
"그늘진 선반에서 열흘쯤 피접하고 나면, 더 야물어지려 가마 내화판 위 살포시 올려 세우면, 아! 이제야 불길 흐름 사이사잇길 마련하여 재임을 끝낸다" 선형적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듯, 시인의 촉수에 포착된 시어들은 불길의 자연적 존재로 향해 있다. 그리하여 시인의 손길이 미치는 곳마다 흙은 생의 비경을 존재론적 사유로 제공하고 있다.
"450°c, 그쯤에서 느슨했던 숨길 다 열고 가쁜 열기 휘돌아 치면 순도를 높인 1000℃의 단벌구이 완성할 때, 그뜨거웠던 거친 불 숨은 잦아들어 적막의 의식에 그림자 드리운다" 흙의 존재에 대해 착목하고 서정과 순도 높은 열기가 뱉어내는 화엄의 시어들도 깊은 의식에 순응한다. 손으로 빚은 도공의 사적 체험을 깊디깊은 사유로 기록한다. 생명의 환원이다. 장엄한 겹침 속에 시인의 울림이 전해진다.
"흙은 튼실하게 굳고 굳어 붉고 단단한 황토빛 토우로 변신하였다 / 너에게 한 움큼의 소임을 부여하련다. / 결 고운 햇살과 마주하면 그 즈음 부음 접한 곡소리에 다봇이 생명의 향기를 피워 올린다. / 긴 생명줄을 기워 올려 영원 길목 지키는 어느 이의 동반자 되면 너
에게 부여된 인고의 이름은 가히 천 년을 가리라" 이 어찌 인생의 한 나절과 은유할 수 있으랴만 시어 곳곳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형상들이 도공과 시인이 대비되어 생사와 불멸성에 대한 성찰을 일깨우고 있다. 시인은 천 년의 소리를 떠나지 못한 채 심안心眼을 얻어 돌담 밖을 엿보고 있다.
시인의 행간을 채웠던 것은 진솔한 지아비의 손길이 머물렀던 모든 것에 시인만이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그를 형상화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의 행간마다 세 아이의 길을 만들었다. 지아비의 온기를 향기로 채워내는 시인의 짠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대 발아래 폭신한 길을 / 내어드리진 못했어도 이 깊고 눅진한 어둠 속에서도 도란도란 / 우리 이야기는 천 년을 / 가고도 가뭇한 훗날 / 어느 이의 손길에서 / 예서체로 옮겨질 / 그날 우리의 여행은 / 여명을 맞이하리 / 행복했던 이야기들로 / 서러웠던 이야기들로 / 무덤에 하얀 꽃 한 줄기 피워내리라" 시인의 심상이 참으로 변화무쌍함을 볼 수 있다. 시인의 지아비가 잠들어 있는 곳은 마을 어귀 선산이다.
시인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이승에서 눅진했던 한을 짧은 행 가리 속에 저민 음률의 가창은 그대로 노래이다. 지아비가 다 완성해내지 못한 순도 높은 불길을 다시 지피고, 그것이 함빡 불길을 사르면 지아비의 무덤에 하얗게 빚은 토우 한 점이 아마도 하얀 꽃이리라, 천 년의 시간을 감당하리란 믿음이 있어 더욱 슬픈 선율이지 아닐까 싶다. 시인은 한 점 토우도 가진 것이 없는 빈자의 슬픈 노래를 시어로 직조한 것이다.
조현숙 시인은 선택받은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삶의 곳곳이 시심을 담아낼 심상의 울타리가 되어 주고 있다.
시 「폭설」은 시인의 기침소리에 닿아 있다. "돌담장 안이 남극이다 / 눈 무게에 모두가 기절 중"이다. 어떤 사람은 폭설을 느끼려면 시 외곽을 찾아 나서야 그 폭설의 의미를 확연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담장 안에서 그 무게를 느낀다는 소회를 담담하게 그려 내고 있다. 대자연의 순환적 의미는 무엇일까? 사계절이 뚜렷하여 피고 짐과 결실, 그리고 흐름과 녹음이 있는 환경은 다채로운 시적 감화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모든 시인이 이를 노래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조현숙 시인의 시는 유독 바다와 강을 직유적 관조가 치밀하게 내포된 씻김굿 같은 요소들로 오밀조밀 성을 쌓아가는 시편들이 많다. 다시 말하면 시인의 전언前言처럼 한 생의 구비를 돌아 꿈과 희망의 소야곡을 제창하려는 엄숙한 의식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가차이 느끼고픈 숨소리를 먼, 무음으로 다가올 발자국 흔적이라 기도했지" 뉘의 숨소리를 먼 무음으로 듣고파하는 시인의 심상은 오로지 십육 년 전, 그 시간을 애달파하는 것이다. 내려놓으려 찾아든 바다는 더욱 명징하게 시인의 가슴을 적시고, 이제 적멸보궁 석가래 아래 사리를 튼 그 기다림을 "덜컥 세찬 너울이 삼켜버리고 / 하얀 거품만 멍울질 때면" 삼켜버린 하얀 거품이 또 다른 시어를 잉태하는 것이다. 시인은 짧디짧은 찰라, 그 순간에도 비유적 노래를 읊고 있다. "또 하나의 기대를 잉태하고 / 쉼 없는 나날을 키워놓고 아픔이란 / 씨앗을 양수도 없이 순산한다" 시인은 이렇듯 거침없이 언어의 견고함을 지켜낸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자아를 잉태하는 아픔의 심상구조를 순산하고 키워내는 여인임을 외친다. 이제 시인의 관념적 관조의 틀이 부서지고 그 자리를 메워가는 자유로운 경험의 언어들이 시적 얼개 구조를 지탱하려고 한다. "풀려버린 낱줄은 무수히 쏟아지는 별 하나 / 매달지 못한 채 / 뭇 기억들이 소롯이 잠든" 시인은 그렇게 기억을 홑이불 삼아 새로운 꿈을 꾸려 자각의 심연에 깊이 침잠한다.
시인의 한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카페, 레반트」는 한 무리 여류시인들의 한나절을 소롯이 표현함이 정갈하다. 창포물에 감은 머리가 잘 빗질된 어머니의 머릿결을 보는 듯, 우아함이 경이롭다. "소리와 언어들이 고였다 헤어지는 / 머물러 오래가지 않는 곳 / 공간은 늘 기억의 페이지를 오독한다" 소리는 음악 또는 수다로 언어는 공간적 시어들이 고였다 헤어지는 '머물러 오래가지 않는 곳' 우리들의 전형적인 어머니 모습을 떠 올려보면 피식 입가에 웃음이 머문다. 소소한 어머니들의 밥상 걱정이 시인들을 오래 머물 수 없게 하는 사회적공간의 배타성이 안쓰럽기만 하다. 어제의 공간은 오늘을 오독하므로 늘 낯선 곳, 모든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프고 때론 피접하고픈 시간의 빛이 염장되어지는 공간, 그 공간을 찾아든 여류시인들, 아니 우리 모두의 어머니에 대한 공간적 배려가 턱없이 부족한 사회적 무책임성이 시인의 상그러운 시심을 자극했을지언정 시인의 시적 문체의 맥놀이는 여전하다. "끊임없이 섞이기 위해 뭉쳐지는 / 말하기 위해 말을 묻고 / 말속에서 변명을 해야 하는 지성이 야성 되는" 여기서 시는 자웅을 가리려 한다. 끊임없이 섞이기 위해 공존하는 감각적 사고를 사유한다. 너와 내가 섞이고, 가족 구성원이 섞이고, 사회공동체가 섞이고, 민족이 섞이고, 세계가 섞이고, 부富와 빈貧이 섞여야만 하는 중심축의 수레바퀴는 기울임이 없을 것이다. 시의 한 행에 시가 이렀듯 확장성을 공유할 수 있을 때, 그 비유적 완성도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린 지금 지성적 사고를 우문처럼 여기는 시대와 소통하려 한다. 시인의 은유같이 때론 지성이 야성 되는 시간의 쳇바퀴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간은 극히 짧아야 할 것이다. 지성과 야성이 혼용되는 동시간대는 혼란이 급기야 지성과 야성을 동시에 침탈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이야기하고자했던 시적 의미에서 너무 비약되어진 감이 없진 않으나 시인의 시적 요소 마디마다 그 확장성의 지대함으로 시인들이 피접한 일상 시어들 또한 완성도가 높다는 의미적 해석이라 이해 바란다.
"순례를 끝낸 자모음들이 / 내려앉은 적막은 멀고 누추한데 / 시인들은 늘 뉘엿한 곤함에 / 푸른 수혈을 마치면 / 선명한 언어의 흔적 돌팍에 새겨 놓는 / 그곳" 시인은 적절한 시어를 늘 수혈해야 한다. 조현숙 시인의 시적 확장성은 참으로 경이롭다. 그 인고의 산통을 위로하고 싶다. 누구는 단숨에 시 몇 편을 쓴다고 하지만 시인같이 재활용 종이에 연필 또는 무딘 펜으로 수 없이 퇴고를 거듭하는 정성이 아니면, 이렇게 완성도 높은 작품을 선보일 수 없을 것이다.
소리와 언어들이 고였다 헤어지는
고즈넉이
머물러 오래 가지 않는 곳,
공간은 늘 기억의 페이지를 오독한다
해질녘이면 물여울 가득 피워내는
한낮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던 불빛은
주변을 보름달처럼 닦아 빛을 염장한다
끊임없이 섞이기 위해 뭉쳐지는
말하기 위해 말을 묻고
말속에서 변명을 해야 하는 지성이 야성 되는
허무한 시간의 지릿대를 버티면
순례를 끝낸 자모음들이
내려앉은 적막은 멀고 누추한데
시인들은 늘 뉘엿한 곤함에
푸른 수혈을 마치면
선명한 언어의 흔적 돌팍에 새겨놓는
아련한 그곳,
카페, 레반트
- 「카페, 레반트」 전문
조현숙 시인은 이제 어느 귀착점에 도달해 있다. 시인의 시심은 여울목에 잠길 정도로 농익어 있기도 하다. 다만 시인의 삶과 일상에서 흐드러진 시상을 무심코 흘려버리는 안타까움이 곳곳에 있다.
시인은 도예인이기도 하다. 또한 수묵화와 연필화는 수준급으로 공동전시회를 수차례 열기도 하였다 한다. 그 속에 사리를 틀고 있는 시맥을 시인은 찾지 못하고, 오로지 십육 년의 시간을 부여잡고 관념적 사고에 젖어 길 위를 서성이는 시인이 안타깝기만 하다.
조현숙 시인의 십육 년 시간을 유린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다만 시인의 심상이 너무 애처롭고 시인이 이제 떠나보내려는 시간들 또한 안타까움을 형언할 수 없다. 시인의 관념을 타래처럼 휘감았던 관념적 사고로부터 자유롭게 사유를 획득할 시간을 시인은 말하고 있다.
첫 시집 상재와 더불어 시간의 자유를 내면적으로 완성하려는 시인의 절규가 깊은 울림으로 귓전을 때린다.
조현숙 시인은 십육 년의 시간을 그리움과 기다림의 아픔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홀시어머니를 십여 년 모시다 떠나보낸 기막힌 슬픔을 칭칭 동여매고, 세 아이 엄마로서 아이들을 석사까지 마치게 한 지극한 모성애에 칭송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모진 생채기의 상처는 시인의 깊은 심연에 옹이로 자리 잡아 여러 시편에서 터 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시인의 이러한 삶에 대한 기개로 볼 때, 시에 대한 열정을 의심치 않는다.
어느 시점 시인은 그 두꺼운 관념적 사고의 껍질을 깨고 서정적 사유가 집대성된 정의에 충실한 시를 접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박희호 (시인)
내가 쓰고 있는 것이 과연 시인지의 의문 속에서 이십여 년을 삭히며 의기소침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관절을 앓으면서도 한 걸음씩 다가섰습니다. 때론 사위어 가는 시심을 다행이라 여길 때도 있었습니다. 세 아이의 엄마로, 종갓집 종부로 살아내는 것이 시일 것이라고 위안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늘 제 자신을 돌아보면 허기졌습니다. 그 허기의 정체성을 찾아 끊임없이 방황하며 빈 원고지의 기억을 지워낼 수 없었습니다.
이제 조심스럽게 그 시상을 더듬어 내며 결코 채울 수 없는 자아를 찾아 수많은 길 위에 나를 세워봅니다.
헤진 옷을 기워내듯 한 올 한 올 직조한 것들의 환영이 시란 명목을 명패처럼 달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검은 진주를 손에 넣던 날, 손마디는 턱턱 갈라지고 빨갛게 날선 생살은 이명처럼 짓무른 진액을 흘렸습니다. 닦아낼 여유도 없이 흙으로 상처를 덧칠하고, 흙속에 묻고, 1300도의 불가마에 나를 염하며 살아온 나날들. 다행히 삼남매 어여삐 영글어 아빠의 뒤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영상을 제작하는 예술가의 가정으로 자리매김하는 이 돌담 안에서, 긴 시간 숭숭한 가슴, 이제 미약한 언어의 미학이라 위로하며 한 권 시집을 엮어봅니다.
내 생의 버팀목이 되어주신 부모님, 『내 상처가 옹이였다』의 한 권 시집으로 탄생시켜 준 박희호 선생님, 필을 다시 들게 해주신 한창희 님, 그리고 사랑하는 모든 지인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 시인의 말에서
목차
목차
1부 ― 카페, 레반트
카페, 레반트 ― 12
자유부인 ― 14
건봉사 ― 18
민들레와 정임 씨 ― 20
강 그리고 나 ― 22
나그네와 그림자 ― 24
늪 ― 26
둘째 딸 메모 - 아빠의 부재에 대하여 ― 28
불면 ― 31
토우 1 ― 32
눈 내리는 샛강 ― 34
봄날의 새 ― 36
허기도 품격이 있다 ― 38
고택 ― 40
조가비 ― 42
만월滿月 ― 43
또 다른 봄날 ― 44
그대는 ― 45
무심의 꽃으로 ― 46
즈믄 날 바라춤 ― 48
당신에 대한 일기 ― 50
파도 ― 52
두고 간 사람아 ― 54
열꽃 ― 56
빈들 ― 58
2부 ― 내 상처가 옹이였다
내 상처가 옹이였다 ― 60
2월 ― 61
산책길 ― 62
달 항아리 ― 64
토우 2 ― 66
눈꽃 ― 68
봄비 ― 69
당신 ― 70
홀씨 ― 72
보슬비 ― 73
4월의 꽃망울들 ― 74
고목 ― 76
수채화 ― 78
꽃상여 - 시어머니를 모시고 ― 80
동백꽃 잔영 ― 82
눈 덮인 적막, 그 여행지 ― 84
당신이 떠난 그날 후 ― 86
봉포리 ― 88
메아리 없는 독백 ― 90
태동 ― 92
화진호, 그 바람소리 ― 94
텃새 ― 96
계사년 이천십삼 년 끝자락 ― 98
단풍 ― 99
기다림 ― 100
3부 ― 석류 항아리
석류 항아리 ― 104
나의 심상心想엔 언제나 ― 106
무수리 초상집(喪家) ― 108
4월의 언저리 ― 110
예비된 탈출 ― 112
지난날 ― 114
폭설 ― 115
창가에서 ― 116
도토리 ― 118
가슴앓이 - 속초 ― 120
종이배 ― 122
쉰아홉의 위안 ― 124
감나무 ― 126
눈 속 언어言語 ― 128
고향의 바다 ― 130
무제 1 ― 132
무제 2 ― 133
이방인 ― 134
떠나는 소리 ― 135
빗소리 ― 136
해녀의 꿈 ― 138
봄날 ― 140
나이 ― 142
씨앗이여 ― 144
그림자 ― 146
발문 : 십육여 년 간 연민의 별곡別曲 (박희호) ― 147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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