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 인문학
정윤옥 시집
정윤옥의 시집 『배꼽 인문학』. 이 시집은 정윤옥의 시 작품을 엮은 책이다. 크게 3부로 나뉘어 있으며 책에 담긴 주옥같은 시편들을 통해 독자들을 시인의 시 세계로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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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시적 질료로 삼아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해냈다
시인이란 존재는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주변의 풍경 속에 은폐된 진실 혹은 사실을 그 자신만의 시각과 눈썰미로 발견해내는 사람이다. 하지만 '없는 사실'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해내는 사람이며, 사물이나 세상 속에 은폐된 사실 혹은 진실을 발견하느냐, 못 하느냐가 시적 성패를 판가름할 수 있다. 정윤옥의 이번 시집은 독자들에게 거창한 시적 요리를 선보이기보다는 소박한 시적 밥상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우리 자신의 생활현장 속에 흔히 체험한 일상현실을 다루되 상투성을 배제한 채 그만의 시각, 그만의 목소리로 담아내고 있다. 이 시집 실린「수납기」,「검침」,「선풍기」,「스마트폰」,「매운탕을 끓이며」,「노안」등의 시편은 그동안 누구도 다루지 않았던 사소하고 생소한 시적 주제, 즉 그가 일상에서 맞닥뜨린 것들을 시적 질료로 삼아 우리가 지금껏 음미해보지 못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해냈다. 그런 의미에서 정윤옥은 '발견자'로서 시인의 의미를 잘 구현하고 있다.
- 이승철(시인,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총장)
보편적 기억과 生의 궁극적 긍정
정윤옥 시인의 시는 직접적 체험과 기억이 묻혀 있는 사실적 공간에서 나를 통해 보는 개성적 균열이 없음에도 극점에 도달하는 자아가 면밀하게 공존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시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문장과 언어수단을 선택하고, 독자와 작가 두 주체를 상호의존적인 관계로 연결할 고리를 찾아 고민한다.
창작은 모방이나 파생에 의한 것이 아닌 '독창성'과 '개성'을 중요시하므로 현실 이상의 진실성을 갖추어야 시로서 함축된 언어를 승화시킬 수 있는 가치가 발생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生을 적절한 시구를 통해 연결하고, 그 사고의 긍정적 의미를 독자와 공유하고 끊임없이 소통의 구조에 대한 얼개를 짜고자 고민한 흔적이 각 시편마다 역력하다.
철학자 '퍼스'가 처음 만들어낸 실용주의에 기반 한 '기호실재론'의 지표指標에 대한 '방향'이나 '목적' '기준'을 나타낼만한 구체적 반어적 시심詩心은 시인에게서 찾을 수 없으나, 대상체 사이의 인과적인 관계는 곳곳에 내재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발이봉 정상 선들바람처럼
바람 씽씽 나오는 농협 골안지점
한쪽 귀퉁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공과금 수납기
월말 가까워지면
목구멍이 꽉 찰 때까지
우주인 특별식 같은 난 숫자와 바코드가 찍힌
얇은 종잇조각 염탐하듯 삼키곤
번역한 언어의 답례표 한 장
달랑 내밀더니
허한 속 과식으로 탈 나
응급실 밥 먹듯 갔던
해당화 마을 보라 엄마같이
삼킨 난수표를 울컥울컥 다 토해내기도 한다
마시고 내뱉고
채우고 또 내보내며
수위조절 하는 일상이 누릇한 은유
한 가닥 잡아채보면
내 안에도
나만의 바코드를 읽어내는 수납기 하나 웅크리고 있다
- 「수납기」 전문
시중 어느 은행에 가더라도 이젠 보편적 사물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수납기, 그 수납기를 통해 시인은 독자와 인과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시인은 현실의 구체성이라는 자신의 시적 시심을 근원적이고 원형적인 것에 대한 영역으로 현저하게 이월시킨다.
"월말 가까워지면 / 목구멍이 꽉 찰 때까지 / 우주인 특별식 같은 난 숫자와 바코드가 찍힌", 이 궁극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주부들에 대해 시인 자신의 경험으로 언어를 부활시키고 있다.
또한 시의 문맥으로만 보면 다른 상황의 기억, 보라 엄마를 통해 난수표를 의인화해가는 과정에서 시인의 직접적 체험과 기억이 묻혀 있는 사실적 공간이자 동시에 시인이 아스라이 넘어온 만만찮은 세월을 은유하는 상징적 공간이라 할 것이다.
달거리처럼
그는 매달 녹색 스쿠터를 타고 와
혈압 재듯 집의 내밀한
어둠의 사용량을 체크한다
문득,
절약이라는 단어를 책장 갈피에 넣어두고
펑펑 써 버린 수돗물과 전기 그리고 가스,
혹 내 맘도
얼마만큼이나 소비 했을지
와락! 붉은 계기판 바늘이 멈춘
고요가 궁금하다
때때로 안절부절 불안한
씨앗을 흩뿌려놓았던 가슴께 텃밭은
쇠비름 바랭이 풀까지 가득하여
도무지 내 심사의 사용량을 더듬을 수 없다
머릿속 산만하던 날
여직 사용되지 않은 숱한 욕망의 양을
꼼꼼히 검침해보는데
어쩌나
또 두어 눈금 올라 간
바늘의 지표
아, 비옥하지도 않은 이 욕망의 눈금을
언제쯤 다 소비하고
더디게 더디게 도는 계량기의 속도와 보폭을 맞출 것인가
- 「검침」 전문
이 작품에서 시인은 대상의 구체적 부재에 의해 생겨나는 결핍의 정서를 그 안의 대상에 대한 간절한 집착을 숨기고 있지만 절약이란 욕망과는 달리 이제 그 대상을 상대로 안도감을 담아내고 있다. 극적 그 자체로 생의 형식을 구성하고 대상에 대한 실제적인 만남을 욕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문득, / 절약이라는 단어를 책장 갈피에 넣어두고 / 펑펑 써 버린 수돗물과 전기"의 현실에 문득 다가서며 기다리는 대상이 현실적으로 나타날 것에 대한 소망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 자체가 생의 불가피한 형식이라는 점을 노래하고 있다.
나아가 시인은 언어를 충분히 가라앉히면서 자신의 내면과 실존을 향하는 구심력의 목소리를 정성스럽게 시의 언어로 끌어들이고 있으며 "어쩌나 / 또 두어 눈금 올라 간 / 바늘의 지표 / 아, 비옥하지도 않은 이 욕망의 눈금 / 언제쯤 다 소비하고", 삶과 사물을 파악하는 키워드로 보편적이고 원형적인 세계에 깊은 침잠沈潛을 시도한다.
또한 시인의 시심은 직접적 체험과 사실적 공간이자 동시에 인생의 강가를 서성이고 있는 기억이 너무 멀어, 버리고 싶은 길을 두고 벽에 기대어 선 채 뭉개진 반쪽 생애를 부활하고 있다 할 것이다.
결국 시인의 인생론이 회한과 긍정을 다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시간에 대한 그리움의 상생을 통해 생의 궁극적 긍정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 적멸의 목소리는 시편 곳곳에 씨줄날줄로 풍경을 복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검침」의 작품은 충분히 시인의 시적 풍미를 더한다 할 것이다.
주먹만 한 씨감자, 씨눈을 보석 다루듯 부드러운 손길로 요리조리 잘나낸다
수십 명의 생개 회원들이
비닐 씌우고 오차 없는 눈대중으로 간격 맞추어
씨감자를 모셔놓는다
모종삽으로 씨감자에 흙을 덮는 중년 촌부들
흐드러지게 핀 꽃처럼 보인다
농사가 주업인 아낙네들 손놀림은 달인 수준이다
한 생을 조목조목 펼쳐가며 평상 위에 앉아 달게 먹었던
분이 왁자한 찐 감자를 그려보다가
어젯밤 숨죽이고 읽어 내려가던 시 한 편을
막 떠올려 보는 찰라,
농협 부녀부장님 양손에 들고 오신 간식거리가
희미했던 시 구절을 환하게 밝힌다
씨감자가 피워내는 보랏빛 꽃대에 시 한 편 열리면
알알이 여문 땅 속 의문에
나는 그대로 시들고 만다
- 「시, 감자를 심던 날」 전문
적멸寂滅이라는 절대적 고요 앞에서 시인이 추스르는 것은 풍경의 몰입이 아니라 자연에서 자신의 마음을 발견하고 그것을 시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또한 시인이 확연한 전경前景으로 삼고 있는 것은 '씨'라는 상징 공간을 통해 발견하는 시의 힘겨움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득하게 피어나는 그리움의 정서를 노래하는 것이다. "한 생을 조목조목 펼쳐가며 평상 위에 앉아 달게 먹었던 / 분이 왁자한 찐 감자를 그려보다가 / 어젯밤 숨죽이고 읽어 내려가던 시 한 편을 / 막 떠올려 보는 찰라, / 농협 부녀부장님 양손에 들고 오신 간식거리가 / 희미했던 시 구절을 환하게 밝힌다"
시인의 시적 자아는 강인한 사회적 상상력에서 부드럽고도 겸허한 근원적 상상력으로 바꾸는 힘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심미적 분위기로서 극적 반전의 시상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시인 스스로의 몸을 열어 대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주체 의지를 대다수 시에서 비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씨감자가 피워내는 보랏빛 꽃대에 시 한 편 열리면 / 알알이 여문 땅 속 의문에 / 나는 그대로 시들고 만다" 여기서 시인은 스스로의 지지대, 밝히고 싶지 않은 심연의 고뇌를 어렴풋이 독자들과 소통한다. "나는 그대로 시들고 만다"의 마지막 행은 다음 작품에 선명하게 나타날 것이라 기대해본다.
따라서 시인은 오직 시를 통해 한 몸이 되어 열려 있는 이들의 상상적이고 심미적인 풍경을 직조하는 통로가 된다.
환갑 진갑 다 지난 남편에게서 여자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간이 페트꽃병에
진달래 철쭉 아카시아 꽃을 꽂자 푸드득 새소리가
주방을 맴돈다
자존심 깃발처럼 꼿꼿이 세워 생고집 꽈배기처럼 틀고
쩌렁대던 목젖 울림도 단잠을 자는 듯
여성 호르몬이 척척 담장을 쌓고 있다
식사 후 발우 공양이라도 하시듯 습관처럼 옮겨놓는 식기들에서
향수가 발아되고 있다. 그윽하다
잘 드셨다는 고마움의 표시, 얼굴에 선명히 낙관되어 액자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간다
한쪽 귀를 닫아 둘 줄도
한 발 뒤로 물러설 줄도,
다정해진 어감에서
카멜레온 채송화가 피었다 진다
여자의 DNA를 이식하고 있는 남편의 목덜미에 하얀 성애가 핀다
당신이 있어 내가 시 밭을 일구고 있습니다.
- 「DNA를 이식하고 있다」 전문
그 힘겨운 여정旅程의 동반에는 자연스럽게 짝, 남편과 부인이란 고유명사가 있다. 눈부심과 그리움에 이르는 실존적 경로가 바로 가정이다. 시인은 여기에서 낙관의 존재 의미를 다양하게 구현한다. 부정과 긍정, 소진과 부활, 결핍과 의지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으로 생을 해석하고 그것을 시의 안쪽으로 적극 끌어들임으로서 시상의 깊이를 구상화한다. 거기에 아름다운 시의 합의를 부여하는 힘의 근원은 '돋보기' 같은 실존이라는 끈질긴 행위에서 이루어진다.
"환갑 진갑 다 지난 남편에게서 여자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이 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명퇴한 또래의 내가 있다. 시대가 걸린 우울증이다. 그러나 시인의 역설은 남편이라는 지극히 보편적인 긍정을 시심에서 이식 시킨다. 아내, 남편 그리고 가정과 소통해야 하는 당위성을 조절적 기능의 일환으로, 통일되고 일괄된 주체의 구조를 드러내는 기능을 떠맡는다. "식사 후 발우 공양이라도 하시듯 습관처럼 옮겨놓는 식기들에서 / 향수가 발아되고 있다. 그윽하다", "습관처럼 옮겨놓는 식기들에서" 혹 '그리움'은 아닐까? 대상의 풍부하고도 모호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늘 그리움이란 '기억'을 거치지 않고는 현실의 주체를 경험적으로 회복할 수 없다. "향수가 발아되고 있다" 이 행을 주의하면 시인의 아름다운 정서가 매혹적으로 다가섬을 알 수 있다.
사랑과 감사, 그리고 존경은 동일성의 감각에 의해 발원되고 구축되는 시적 언어의 한 구성 원리가 된다. '기억(과거)'의 원리가 서정시의 핵심이라는 슈타이거의 말을 이 순간만은 긍정할 수밖에 없는 까닭도 공동체적 가치를 현재적 삶에서 회복하려는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한쪽 귀를 닫아 둘 줄도 / 한 발 뒤로 물러설 줄도, 다정해진 어감에서 / 카멜레온 채송화가 피었다 진다" 여전히 시인은 시적 행간마다 생의 긍정적 가치를 행하고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래서 시인의 이번 첫 시집은 이전 과거와의 급격한 단절이 아니라 더 깊이 있는 현재로의 점진적 전이轉移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전히 시인이 보는 대상엔 굳이 여성의 DNA를 이식시키고 있는 모습이 아닐지라도 치유의 선명한 각인이 있다. 그로 인한 안정적 구조, 안온한 가정 그 점에서 내면의 간단치 않은 파동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꽃샘추위 번갈아 오갈 때 혈관질환 조심하란다
120,000km,
그 아득한 길을 사십육 초에
뭍 사연 쉼 없이 자양분 실어 나르는 길마다 자국이 선명하다
폭우로 잘려지고 찢겨나간
자전거 도로 구간을 막고 쌓고 붙이는 공사가 한창이다
그 길에도 녹슨 혈관들이 시뻘건 녹물을 토해놓고 있다
누구도 엿볼 수 없는 길
혹, 나날마다 먹고 마셔 쌓인 낙엽사리 없는지
낯선 기기 앞에 서서
멀미를 한다
내 몸 길마다 핀 녹이 사뭇 궁금하다
- 「내 몸의 길」 전문
시인은 일인칭 목소리로 보편적 자화상을 그린다. 그것도 몸, 자신의 몸의 부속인 혈관을 통한 사회 병리를 독파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우리 시대 복판에서 광범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피해에 대한 집단적 소통구조를 잘 묘사함으로 무기력한 사회상을 극적으로 비판하는가 하면 화자가 체득한 긍정주의에 시적 당당함을 노래한 것은 문학적 내상을 입지 않고는 독자의 눈물을 가늠할 수 없다.
시인은 굳이 말하지 않지만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시를 보자.
"120,000km, / 그 아득한 길을 사십육 초에 / 뭍 사연 쉼 없이 자양분 실어 나르는 길마다 자국이 선명하다" 여기서 화자는 인체의 길, 핏줄의 길이를 의학적으로 풀어놓았다. 그 길마다 심연의 자국을 대조와 대비의 시적 표현으로 변화무쌍한 가락과 리듬을 살려두었다. 뿐만 아니라 "폭우로 잘려지고 찢겨나간 / 자전거 도로 구간을 막고 쌓고 붙이는 공사가 한창이다" 사려 깊은 독자들은 시인 특유의 파괴적 상상력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정윤옥 시인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 즉, 본질성에 치유의 가능성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 길에도 녹슨 혈관들이 시뻘건 녹물을 토해놓고 있다" 동서남북으로 수많은 도로들이 건설되고, 폐자재들이 환경에 미치는 폭력성을 시뻘건 녹물로, 화자가 지켜낸 육십여 년을 함부로 닦아낸 길로, 비탈진 혈관의 길은 '나'에게 물어야 할 잘못이 아닌 사회적 모순의 구조를 적나라하게 시적 공간으로 옮겨놓았다.
이것은 시인의 시에 폭넓게 나타나고 있는 내향적 이성의 합리성에 근거한 포스트모더니즘 전형의 맥락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작이나 위조를 결코 허락하지 않는 시인의 극단적 정직성이 오히려 시를 멍들게 하고, 때론 정직한 분노마저 자기 결벽성에 묻어버림으로서 시맥을 잠식하는 안타까움을 엿볼 수 있다.
남편에게 생물 오징어를 손질해달라고 부탁했다
선생님 말씀 잘 듣는 학생처럼 남편은
내 맘에 쏙 들게 손질해놓았으나
그렇지, 터질 듯 부푼 배꼽이 뇌리에 꽈리를 수놓는다.
벗어둔 안경을 끼고 주방을 보니
점심 식사 후 씻어놓은 식기에 주근깨 같은 점, 점들
무엇이지
순간 번개처럼 스쳐오는
맞아!
오징어 먹물이었다.
오직 하나, 둘을 더하지 못하는 남편의 손길을 믿었던 나는
배보다 큰 배꼽이 되어 허물어지고 말았다
주방 벽, 식기에 묻은 깨알 같은 흑점, 한나절 꿈의 결정체였다
닦는 시간 위로 덧칠되는
얼큰하고 달짝지근한 오징어볶음 맛 바람이 휭!
주방 안을 헹군다
- 「배꼽 인문학」 전문
이 시의 시제가 정윤옥 시인의 첫 시집 제호題號로 선택한 분명한 이유가 있으리라 본다. 시인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시상詩想을 얻는 공간으로서 가정이란 스크린과 이웃, 피붙이와의 면경面鏡은 화자 자신이 설정해둔 하나의 테마파크라 할 수 있다. 화자 자신의 검인정 사유의 공간 내 거울에 해당한다.
아주 사소한 일상을 낙아 채 원고지에 가두는 시인의 보헤미안(Bohemian ボヘミアン)적 자유분방함이 때론 경이롭다. 그러나 아쉬움도 있다. 감정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언어의 남발로 시어의 축소가 설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간과한다는 점이다.
시인에게 언어의 절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 그것은 적절한 시어의 개발과 감정의 압축을 전제한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자조하지 않는 궁극적 긍정을 선택한다. 내적 소통을 달리 표현한 것이지만 터질 듯 부푼 배꼽이 뇌리에 꽈리를 수놓는다. 여기서 「배꼽 인문학」이 탄생하게 되는 시연試演이 시작된다. 이어 시인은 점심 식사 후 씻어놓은 식기에 주근깨 같은 점, 점들 '점'을 이용한 인문학 서막을 스크린에 투사함으로서 시의 극적 구성과 긴장감을 고취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이어 시인은 "주방 벽, 식기에 묻은 깨알 같은 흑점, 한나절 꿈의 결정체였다"의 '흑점'을 넌지시 "한나절 꿈의 결정체" 로 도치(inversion, 倒置法)시킴으로서 시의 절정과 동시에 한 편의 '인문학'을 완성하는데 이른다. 이 시에선 시의 교침, 즉 베갯모 같은 기승전결이 잘 이루어진 드라마를 완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노숙자로 떠돌다
구멍 숭숭 뚫려 얇은 뱃가죽만 남았구나
알면서,
사각대는 네 속울음 못 들은 척
툭, 툭
발끝으로 널 읽지 않았다
허름한 쉼터에 핏기 없이 앉아
새들처럼 깃털도 없이 구름 위를 거닐며
시인을 꿈꾸던
윤기 나던 젊은 그 즈음 더듬다가
옴팍한 사색이란 골짜기에서 길을 잃고 만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즈믄 생生 길목 어귀에서
흐드러지게 나뒹굴다, 나뒹굴다 되돌아갈 수 없는 길
그 길목에서
푸르른 시절 몸,
몸을 접어 대지의 탯줄에
기대선 네 모습에 어느 짧은 시 한 수를 놓으련다.
엽록소 잃고 / 노을에 불타다 만 / 귀휴하는 나그네여!
- 「낙엽에게」 전문
이 시는 시인 특유의 서정성과 더불어 '나'와 '너'라는 공간적 미학을 탐구한다. 정윤옥 시인의 시의 본질은 아마도 서정성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숙자로 떠돌다 / 구멍 숭숭 뚫려 얇은 뱃가죽만 남았구나" 첫 시구부터 낙엽을 노숙자로 의인화擬人化시킨다.
'시'란 독자와의 소통구조에 대한 얼개를 짜는 것인데 시 첫 행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끌고 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시인은 과감하다. 그리고 호흡도 거침이 없다. "사각대는 네 속울음 못 들은 척 / 툭, 툭 / 발끝으로 널 읽지 않았다" 이 연에서는 통제하는 이성과 분출하려는 감성 사이에서 번민한다. 그럼으로 미적 경험을 확장 또는 유지하려는 태도로 한 단계 전이轉移되는 소묘를 노래하고 있다.
이어서 "허름한 쉼터에 핏기 없이 앉아 / (중략) / 윤기 나던 젊은 그 즈음 더듬다가 / 옴팍한 사색이란 골짜기에서 길을 잃고 만다" 시인은 미적 세계로 몰입하려는 의미 있는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다. 치밀하게 조명한 아픔 한 자락을 깔아두고 "이제야 알 것 같다 / 즈믄 생生 길목 어귀에서 / 흐드러지게 나뒹굴다, 나뒹굴다 되돌아갈 수 없는 길" 생존을 위한 인식 구조 안에서 시인은 기억 속에 잠재된 이미지와 흔적들 대부분은 돌아갈 수 없다는 '꼭지'에서 발견된다. "그 길목에서 / 푸르른 시절 몸, / 몸을 접어 대지의 탯줄에" 감각이나 내성을 통해 획득한 시인의 감정이입이 결부되어 다른 맥락에서 인식할 필요가 있고, 독자와의 미적거리를 적당히 유지하여 심미적 긴장감을 극대화해 나가는 시인의 절창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저 작은 텃밭에도 사람들 욕망으로
갈등의 씨알들 키 재기하듯 무성하게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늘구멍 소견으로
내 것, 네 것 촘촘하게 따지면 눈을 가린 저울천사가
농익은 결정을 미룰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심지 않은 텅 빈 공터 하나쯤 있어도 좋겠다
구름 한 점 없는 초가을 하늘이 온통 여백으로 쾌청하다
- 「여백의 미」 부분
시인의 미적 속성은 추상적 사고를 통하여 얻어진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이성적 인식이 아닌 감성적 인식을 노래한다. 또한 시편들의 주관적 정서나 내면 울림을 고정된 인식과 일상화된 감각의 틀을 벗어나려 노력하는 과정이 참으로 아름다워 보인다.
나아가 충족할 수 없는 결핍을 체험하며 사고하는 노력이 이 시의 전문에 흐르고 있다. 그렇기에 시인의 본질은 어쩔 수 없이 독자와 소통구조를 일상화시키는 작업에 전념하는 내적 갈등이 심함을 보여준다. 따라서 정윤옥 시인은 화자를 주인공으로서 체득한 주체적 낙관주의와 이 시대의 복판에 내던지는 시적 당당함을 서정적 운율에 싣고 있다.
입 꼭 다물고
스치는 바람결에도 속내 보이지 않던
자연빌라 24호에 사는 여자
무슨 비밀 많은지
삼복더위에 짝 달라붙는 면 티셔츠 겹겹이 껴입고
시장과 마트에 매일 나왔다
곱슬머리, 눈 크고 키 작은 그녀
맨드롬한 우윳빛 속살에
모나지 않은 성격인 줄 알았는데
똘똘 뭉쳐 화석으로 응어리진,
가슴 몰래 안고
여러 해 버티더니
어쩌다,
어쩌다 정신병동 입원하게 되었는지
그 여자 비밀 벗겨 내느라
동네 아줌마들 손끝에서 양파의 속살이 희디희다
- 「양파를 까며」 전문
정윤옥 시인은 이 시에서 비로소 현실의 구체성인 자신의 시적 표식을 구체화하고, 나아가 시의 정조情調를 보다 더 폭 넓게 전면화한다.
또한 시인은 외부와의 의식 교류는 시의 형식을 구성할 뿐 대상에 대한 실제적인 만남을 욕망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은둔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밀도를 기억이 묻혀 있는 사실적 공간으로 치환한다. 동시에 시인이 넘어온 만만찮은 세월을 은유의 상징적 밀폐로 유도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아줌마'란 힘의 모순을 자연빌라 24호에 사는 여자로 사실적 정보는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전언傅言을 통해 겪은 오랜 고통의 기억들을 양파껍질 벗기듯 영혼에 의해 화창和唱하는 이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오징어순대라 쓰인 사각간판
몸살 같은 떨림들
겨우 지탱한 채
고향 땅 눈썹 위에 두고
오골오골 금 안에 모여 사는 실향민 가슴에
늘 황사만 처연히 날린다
가슴속 엉겨 붙은 앙금들
유통기한도 없는지
새끼줄에 거꾸로 매달린 채
마른오징어 같은 설움만 골목 안을 서성인다
- 「청호동 골목」 부분
이 「청호동 골목」은 어찌 보면 눈이란 렌즈를 통해본 단조로운 흑백 피사체에 불과하다 할 것이나 시인은 유배의 겸허함을 배우고, 나아가 그 아릿함을 시편에 담아냄으로서 현재의 우리 정세를 눈여겨보는 아픔을 인식하고 있다.
또한 절대적 고요 앞에서 시인이 추스르는 것은 그러한 풍경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발견하고 그것을 시적으로 재구성하면서 북조선의 토속음식 순대와 돌아갈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이 세월 앞에서 처연하게도 "가슴속 엉겨 붙은 앙금들 / 유통기한도 없는지 / 새끼줄에 거꾸로 매달린 채 / 마른오징어 같은 설움만 골목 안을 서성인다"
이런 유서 같은 심미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시적 심상을 마지막으로 담아냈다는 것이다.
시인의 칠십여 시편들 곳곳에 자연과 인간의 궁극적 소통을 위한 시인의 심리적 거리(psychic distance)와 사적 영역까지 진솔하게 노래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볼 때, 정윤옥 시인의 다음 시집에 많은 기대를 갖는다. 아울러 시인의 시편 전편을 보고 지적 아닌 부탁을 부연하고자 한다.
시인은 여러 시풍에 휘둘리거나 기웃거리지 말고, 지금 그렇게 한가한 시간이 시인에게 주어질지에 대한 시간적 제약이 내제된 육십여 년이란 세월을 되돌리거나 묶어둘 수 없다는 현실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시상에 대한 본질은 거듭 이야기하지만 생활의 애환과 나아가 주변과 연관되어지는 서정성이 짙다 할 것이다. 서정적 시풍을 일관되게 추구함으로서 시인의 시맥을 찾아내는 체험적 시상과 그로 인한 인본적 내면을 충분히 역설할 수 있는 시의 얼개를 짜 독자와 소통하는 적극적 시풍의 일가를 이루길 바란다.
이 지면을 통해 정윤옥 시인의 첫 시집을 엮어낼 수 있도록 시간적 공간을 마련해준 가족과 지인들께 감사드리며, 아울러 시인께도 축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 박희호(시인)
시도 잘 모르던 내가 시를 접하게 된 지 벌써 이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두 아이를 키우며 일상의 소소한 가족 이야기를 매월 가족문집으로 엮었습니다. 지인들과 나누어 보면서 내 꿈도 조금씩 키웠습니다.
평교원 시창작교실로 시를 배우러 가는 날이면 영락없이 가슴이 설레고 발길은 구름 위를 걷듯 가뿐했습니다. 시의 밭에 씨를 뿌리고 가꾸면서 행복에 흠뻑 취하고 시의 행간마다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에 때론 절망하며 나 자신과 수없이 묻고 답하면서 시심을 키웠습니다.
문학모임의 문우님들과 동행해오고 있는 이 소중한 일상들이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나이 육십에 시와 늦은 열애로 낳은 작품들을 모아 첫 시집으로 엮어봅니다.
이번 첫 시집을 엮을 수 있도록 큰 힘이 되어주신 박희호 선생님, 너른고을문학 선후배님, 든든한 생의 버팀목으로 자리 잡고 계신 고령의 아버지와 평온 속에서 시를 쓸 수 있도록 말없이 도와준 사랑하는 가족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 시인의 말에서
목차
목차
1부 - 시와 동행
청호동 골목 - 12
수납기 - 14
양파를 까며 - 16
DNA를 이식하고 있다 - 18
검침 - 20
까치의 건축학 - 22
귀휴歸休 - 24
어미 새 - 26
막국수 - 28
시, 감자를 심던 날 - 30
첫 월급의 기억 - 32
시와 동행 - 33
깔딱고개 - 34
가로등 - 36
낙엽에게 - 38
선풍기 - 40
오이지 - 41
메기 - 42
스마트폰 - 44
장미 - 46
폭우 - 48
2부 - 배꼽 인문학
내 몸의 길 - 52
매실주 - 54
동동주 - 56
젖지 않을 잎은 없다 - 58
배꼽 인문학 - 60
나도 파도의 모래톱이다 - 62
낙방도 자산이다 - 64
꽃집에서 꽃은 팔지 않는다 - 66
매운탕을 끓이며 - 68
그날도 잔칫날이었다 - 70
감전되다 - 72
고욤나무 - 75
한낮 - 76
그 시절엔 그랬지 - 78
호떡과 생生 - 80
김장김치 - 82
장롱면허 - 84
산행 - 86
어떤 실화 - 88
투표장 가는 길 - 90
소문이 돌다 - 92
참외 - 94
향기를 비비는 여자 - 96
나비 커플 - 98
국밥 - 100
3부 - 가족 음악회
류마티즘 - 104
장농을 바라보다 - 105
노안 - 106
시외버스 - 108
새벽기도 - 110
부부란 - 112
뼛속이 비어간다 - 114
몸살을 앓다 - 116
염색을 하며 - 118
시간을 닦다 - 120
추억의 냄새 - 122
엄마의 기제 날 - 124
가족 음악회 - 126
기도 - 128
사전 모의 - 130
순자 언니 - 132
여백의 미 - 134
고사告祀 - 136
해녀가 되고 싶다 - 138
삶이 거기 있었다 - 140
전쟁 중이다 - 142
바람 - 144
그림자 - 146
지천을 지나다 - 148
(발문) 보편적 기억과 生의 궁극적 긍정 (박희호) - 149
저자
저자
경기 용인 출생
계간 참여문학 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한국참여문학인협회 회원
너른고을문학 회원
한국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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