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알로이시오 신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아버지
『소 알로이시오 신부』는 1983년 막사이사이상을 받았고, 1984년과 1992년에 걸쳐 두 번이나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던 국제적 박애주의자 소 알로이시오 신부(Rev. Aloysius Schwartz)의 자서전적 에세이다. 1957년, 6·25로 잿더미가 된 한국에 선교 사제로 입국한 이래 1992년 루게릭병으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해준 것’이라는 정신으로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살다 간 소 알로이시오 신부의 생애가 잔잔한 감동으로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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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한 사제의 감동적인 이야기
"이 책을 읽으면서 거의 전율에 가까운 감동을 맛보았다.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 사랑합니다. 당신을 통해 주님의 현존을 믿나이다"
-작가 박완서 (추천의 글 중에서)
이 책은 1983년 막사이사이상을 받았고, 1984년과 1992년에 걸쳐 두 번이나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던 국제적 박애주의자 소 알로이시오 신부(Rev. Aloysius Schwartz)의 자서전적 에세이다. 1957년, 6·25로 잿더미가 된 한국에 선교 사제로 입국한 이래 1992년 루게릭병으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해준 것'이라는 정신으로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살다 간 소 알로이시오 신부의 생애가 잔잔한 감동으로 그려져 있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신부를 꿈꾸다
1930년 미국 워싱턴에서 태어난 소 알로이시오 신부는 어릴 때부터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을 도와주는 가난한 선교 사제가 되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소신학교를 졸업하고, 메리놀회 신학대학에 들어가 사제 수업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 미국은 세계의 보물창고라 불릴 정도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고, 메리놀회 신학생들 역시 세계 상위 5%의 부자들이 누리는 정도의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가난한 나라의 선교 사제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신학생이 물질적으로 그렇게 풍요로운 생활을 한다는 것에 도덕적 불편함을 느꼈고, 그리하여 메리놀회를 떠나게 된다.
메리놀회를 떠난 소 알로이시오 신부는, 사제가 되어 가난한 나라로 가 그 나라 주교 밑에서 일하는 것이 원칙인 선교회를 찾아 벨기에로 향했고, 그곳 루벵 신학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1957년, 마침내 사제 서품을 받는다. 그리고 그해 12월, 6·25로 잿더미가 된 한국을 선교지로 택하고, 부산 교구 소속 신부가 되어 한국에 첫발을 디디게 된다.
50여년 전 긴급구호가 필요했던 나라, 한국!
그곳을 선택한 미국인 소 알로이시오 신부
부산 송도 성당에서 일하게 된 소 알로이시오 신부는 부산의 판잣집들과 천막촌을 찾아다니며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부모 잃은 아이들을 직접 만났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 피를 팔아야 하는 어린 딸, 부모를 잃고 넝마주이가 된 아이들, 아무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가는 병든 사람들을 보면서, 소 알로이시오 신부는 이들을 위해 미국에 모금기관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모금된 돈으로 부녀자들에게 일거리를 마련해주는 '손수건 사업'을 펼치고, 여러 구호기관에 기금을 지원해준다.
손수건 사업은 부녀자들의 자활에 큰 효과를 거둔 반면, 구호기관에 지원해준 돈은 당시 한국 구호기관들의 부정부패가 심해 헛되이 쓰이는 일이 잦았다. 그 결과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인간 이하의 수준으로 방치되는 일이 많았다. 결국, 기금 후원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 소 알로이시오 신부는 송도 성당 주임신부직을 그만두고, 자신이 직접 구호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바로 《소년의 집》 사업이다.
고아와 가난한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다
6·25가 끝난 뒤 한국에는 전쟁고아들과, 가난 때문에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 무척 많았다. 그렇지만 국가는 이들을 돌봐줄 형편이 되지 못했고, 아이들은 방치되어 거리를 떠돌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지 못하면 한국의 미래도 없다고 생각한 소 알로이시오 신부는 아이들을 위한 구호사업부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소년의 집》 사업이다.
소 알로이시오 신부는 《마리아수녀회》를 창설해 수녀들로 하여금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 아이들을 돌보게 했고, 단순히 아이들을 먹이고 재우고 입히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소년의 집》 안에 학교를 세워 아이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배우지 않으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하게 되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소년의 집》 안에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 전문대학까지 세웠고, 그곳에서 아이들은 고등교육까지 마치고 사회에 나가 스스로 살아갈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한국 최초의 무료병원'을 세우다
소 알로이시오 신부는 《소년의 집》 사업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진료 사업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없어 진료 한번 받지 못한 채 죽어가는 일이 많았고, 이들을 받아주는 병원은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그리하여 소 알로이시오 신부는 부산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던 아미동에 의사 1명과 몇 명의 간호사로 이루어진 무료 진료소를 열게 된다. 그러자 가난한 병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한 명의 의사가 하루에 200명 가까운 환자를 진찰해야 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소 신부는 또 다른 가난한 동네 2곳에 무료 진료소를 연다. 하지만 여전히 환자들은 넘쳐났고 무엇보다 진료소는 1차 진료기관이었기에 치료의 한계가 많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소 알로이시오 신부는 120개 병상 규모를 갖춘 한국 최초의 무료 병원인 《구호병원》을 세운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서울 《소년의 집》 안에도 무료병원인 《도티 기념병원》을 세워 가난한 사람이면 누구나 돈 걱정 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마리아수녀회》를 통해 계속되고 있는 소 알로이시오 신부의 정신
소 알로이시오 신부는 《소년의 집》 사업과 무료병원 사업을 한국에 그치지 않고 가난한 나라로 계속해서 넓혀 나갔다. 그리하여 1985년에는 필리핀에, 1991년에는 멕시코에 《소년의 집》과 무료병원을 세웠고, 소 알로이시오 신부가 돌아가신 1992년 이후에는 소 알로이시오 신부의 뜻을 이어받은 《마리아수녀회》를 통해 과테말라와 브라질에까지 《소년의 집》이 세워졌다. 그리하여 오늘 이 순간에도 5개 나라의 《소년의 집》에서 수만 명 가난한 아이들이 엄마 수녀님의 따뜻한 돌봄과 교육을 받으며 희망 속에 자라고 있다.
목차
목차
옮긴이 머리말┃가난한 사제의 선물 (박우택)
Part1.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신부를 꿈꾸다
춥고 배고픈 나라, 한국에 가다 _ 16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거룩한 부르심 _ 36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법 _ 62
아름다운 시골 풍경 뒤에 도사리고 있는 굶주림 _ 76
요양을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다 _ 90
최 주교님과 함께한 모금 여행 _ 102
다시 돌아온 한국, 부산을 걷다 _ 124
Part2. 가난한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다
가난한 성당의 본당신부가 되다 _ 142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가장 좋은 방법 _ 150
마태오 씨의 남겨진 아이들 _ 162
가난한 아이들의 엄마가 된 사람들 _ 172
아이들에게 따뜻한 가정을 만들어주다 _ 182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병원을 열다 _ 190
병든 거리생활자들을 위한 구호 활동 _ 200
부산 《소년의 집》이 문을 열기까지 _ 212
2천 명이 한 지붕 아래, 서울 《소년의 집》 _ 232
판잣집 사제관에서 보낸 4년 9개월 _ 242
부록∥ 여전히 살아계신 신부님 _ 257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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