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로원야화기
요로원 두 길손의 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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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로원 두 길손의 문답
이 책은 조선시대의 사회정책과 제도를 문답형식으로 신랄하게 풍자한 동암 박두세의 수필집《요로원야화기》를 한석수 교수가 역주한 것이다. 박두세가 과거에 실패하고 시골로 돌아가는 길에 충청도의 요로원이라는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겪게 되는 일을 다루고 있다. 서울 양반과 시골 양반의 대화를 통해 당시 양반들의 허위의식과 문제점 등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의 사회정책과 제도를 문답형식으로 신랄하게 풍자한 동암 박두세의 수필집《요로원야화기》를 한석수 교수가 역주한 것이다. 박두세가 과거에 실패하고 시골로 돌아가는 길에 충청도의 요로원이라는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겪게 되는 일을 다루고 있다. 서울 양반과 시골 양반의 대화를 통해 당시 양반들의 허위의식과 문제점 등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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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이 책은 동암 박두세의 <요로원야화기>를 역주한 것이다. 이 <요로원야화기>는 일찍부터 국문학계에 알려져 학자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원작은 한문본이었으나 뒤에 국문본도 나왔고 한문본과 국문본을 합하여 여러 이본으로 유통되어 왔다. 이러한 사실은 이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난 뒤에도 상당한 독자를 확보한 문제작이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진작에 여러 선학들에게 주목받은 작품이면서도 아직까지 제대로 된 번역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우선 작품의 분량이 단행본으로 출간하기에 애매하고, 다음으로 난삽한 내용의 한시가 많이 삽입된 것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작품의 작자인 박두세(1650-1733)는 그 아버지와 그의 형제가 문과에 합격한 울산박씨의 후예이며 운학(韻學)에 조예가 깊어 관련된 저서도 남겼다. 그러나 그는 당색이 남인으로 벼슬은 크게 현달하지 못했고 당대의 현실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 시각을 가진 것이 이 작품을 통하여 드러나 있다. 특히 과거제도의 부패상이나 당색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 작품에 삽입된 여러 편의 시는 매우 골계적이다. 특히 우리말의 음과 운을 이용한 언어유희(pun)를 보면 당대 우리말의 모습을 일부 유추할 수도 있어 중세어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속의 요로원은 지금에 와서 흔적이 불분명하고 지명도 '요란'으로 변음이 되어 전한다. 당시에는 서울에서 천안을 거쳐 예산을 가려면 반드시 요로원을 거쳐야 했다. 현재 아산군 음봉면 신정리 요로원의 원 터 앞으로는 큰 도로가 남북으로 뚫려 있어 이곳이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책은 필자와 필자의 제자들이 함께 읽은 것을 가다듬은 것이다. 그리고 번역상 난해한 부분은 석촌(石村) 이두희(李斗熙)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 이 자리를 빌어 제자들의 노고와 이두희 선생님의 도움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필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번역상 부족한 부분이 많을 것이다. 이는 모두 필자의 천학(淺學) 때문이니 기탄없는 질정(叱正)을 주시기 바란다.
끝으로 출판사의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영리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이런 책을 기꺼이 만들어 준 박문사의 사장님과 박문사 편집부 직원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책머리에
2010년 늦은 4월
不?堂 書室에서
韓 碩 洙 頓首
<요로원야화기>와 박두세
박두세(朴斗世) 1650(효종 1)~1733(영조 9) 울산박씨 대동보에는 '子 斗世 崇禎 庚寅 八月 二日 生 英祖 癸丑 五月 一日 卒 享年 八十四'로 기재 되어 있으므로 박두세의 생몰연대는 1650(효종 1)~1733(영조 9)이다.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울산. 자는 사앙(士?)호는 동암(東巖).
율(?) 박율: 문과 급제자로 殷山縣監을 지냈으며 天文數學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의 아들이며 충청도 대흥(현 충남 예산군 大興면) 사람이다. 1677(숙종 3, 丁巳)년 사마시에 중형 태세(泰世), 삼형 규세(奎世) 울산박씨 대동보에는 박두세의 형이 셋이 있었으나 伯兄인 鼎世가 19세에 요절하였다. 따라서 태세는 중형이 된다.
와 함께 동방급제(同榜及第)하였고 1682(숙종 8)년에 삼형 규세와 함께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문장에 능했고 운학(韻學)에도 밝았다. 홍문관직을 제수받았으나 1686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일 때 권대운(權大運)의 압송사건에 편의를 제공했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진주목사를 거쳐 중추부사에까지 이르렀다. 당색은 남인에 속하였으며 벼슬길이 순탄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요로원야화기>는 1678년 지은이가 과거에 실패하고 시골로 돌아가는 길에 충청도의 요로원이라는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겪은 일을 다루어 당시 사회의 실정을 폭로하고 정치제도에 대한 불만을 풍자적으로 서술한 문답형식의 작품이다. 박두세의 운학에 대한 저술로는 <삼운보유(三韻補遺)>와 그것을 증보한 <증보삼운통고(三補三韻通考)>가 있다.
요로원과 박두세 생가 및 묘소
요로원은 충남 아산시 음봉면 신정리(陰峰面 新井里)에 있었던 옛 원(院)의 이름이다. 옛날 요로원이 있던 자리는 현재도 그 위치가 분명한데 다만 '요로원'이 음편(音便) 현상을 일으켜 '요란'이란 지명으로 불리고 있다. 요란: 신정리 입구에는 현재 '요란수퍼'가 있다.
요로원은 서울에서 과천과 천안을 거쳐 아산, 예산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다. 박두세의 고향인 대흥을 가려면 이 요로원을 지나 아산을 거쳐 예산을 통과해야 한다.
박두세의 출생지는 현재 충남 예산군 신양면 녹문리 229번지이며 그 집을 박두세의 호를 따서 동암집 또는 수명정(水明亭)이라고 한다. 동암 박두세의 출생지에는 그의 10대 종손인 朴敬秀씨와 종친회장인 8대손 朴奎鎭씨, 종친회 총무인 9대손 朴承敎씨 세 분이 현장에까지 인도하여 주었으면 현재 그 터에는 큰 집의 종손인 朴龍太씨가 살고 있다. 건물은 최근에 다시 지은 것이나 박두세 당시에 쓰던 우물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생가 터 옆으로는 금강의 지류이며 지금의 예당저수지 상류인 상당히 폭이 넓고 제법 깊은 강이 얕은 절벽 아래로 흐르는데, 동암은 형제들과 이 언덕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풍월을 즐겼다고 한다. 이 집은 강가에 있고 주변의 풍광이 수려한 편이다.
묘소는 예산군 대흥면 대율리 51-2번지에 위치해 있다. 박두세의 묘소: 필자는 2009년 6월 28일에 대학원 제자들과 동암의 묘소를 답사한 바 있다. 동암의 후손에 의하면 그의 후손 중에 특별히 高官顯職에 오른 사람이 없었고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도 없어 산소를 제대로 가꾸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최근에 산소를 새로 단장하였는데 풍수적 관점에서 석물을 하는 터가 아니라고 하여 석물은 하지 않고 봉분과 그 주위만 말끔하게 정리하였다. 묘소는 대흥면 소재지에서 산길을 따라 차로 한참을 달려서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데 묘소에 올라서면 시야가 넓게 트여 조망이 좋다.
1) 울산박씨 대동보에는 '子 斗世 崇禎 庚寅 八月 二日 生 英祖 癸丑 五月 一日 卒 享年 八十四'로 기재 되어 있으므로 박두세의 생몰연대는 1650(효종 1)~1733(영조 9)이다.
2) 박율: 문과 급제자로 殷山縣監을 지냈으며 天文數學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3) 울산박씨 대동보에는 박두세의 형이 셋이 있었으나 伯兄인 鼎世가 19세에 요절하였다. 따라서 태세는 중형이 된다.
4) 요란: 신정리 입구에는 현재 '요란수퍼'가 있다.
5) 동암 박두세의 출생지에는 그의 10대 종손인 朴敬秀씨와 종친회장인 8대손 朴奎鎭씨, 종친회 총무인 9대손 朴承敎씨 세 분이 현장에까지 인도하여 주었으면 현재 그 터에는 큰 집의 종손인 朴龍太씨가 살고 있다. 건물은 최근에 다시 지은 것이나 박두세 당시에 쓰던 우물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생가 터 옆으로는 금강의 지류이며 지금의 예당저수지 상류인 상당히 폭이 넓고 제법 깊은 강이 얕은 절벽 아래로 흐르는데, 동암은 형제들과 이 언덕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풍월을 즐겼다고 한다. 이 집은 강가에 있고 주변의 풍광이 수려한 편이다.
6) 박두세의 묘소: 필자는 2009년 6월 28일에 대학원 제자들과 동암의 묘소를 답사한 바 있다. 동암의 후손에 의하면 그의 후손 중에 특별히 高官顯職에 오른 사람이 없었고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도 없어 산소를 제대로 가꾸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최근에 산소를 새로 단장하였는데 풍수적 관점에서 석물을 하는 터가 아니라고 하여 석물은 하지 않고 봉분과 그 주위만 말끔하게 정리하였다. 묘소는 대흥면 소재지에서 산길을 따라 차로 한참을 달려서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데 묘소에 올라서면 시야가 넓게 트여 조망이 좋다.
그러나 이 작품은 진작에 여러 선학들에게 주목받은 작품이면서도 아직까지 제대로 된 번역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우선 작품의 분량이 단행본으로 출간하기에 애매하고, 다음으로 난삽한 내용의 한시가 많이 삽입된 것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작품의 작자인 박두세(1650-1733)는 그 아버지와 그의 형제가 문과에 합격한 울산박씨의 후예이며 운학(韻學)에 조예가 깊어 관련된 저서도 남겼다. 그러나 그는 당색이 남인으로 벼슬은 크게 현달하지 못했고 당대의 현실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 시각을 가진 것이 이 작품을 통하여 드러나 있다. 특히 과거제도의 부패상이나 당색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 작품에 삽입된 여러 편의 시는 매우 골계적이다. 특히 우리말의 음과 운을 이용한 언어유희(pun)를 보면 당대 우리말의 모습을 일부 유추할 수도 있어 중세어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속의 요로원은 지금에 와서 흔적이 불분명하고 지명도 '요란'으로 변음이 되어 전한다. 당시에는 서울에서 천안을 거쳐 예산을 가려면 반드시 요로원을 거쳐야 했다. 현재 아산군 음봉면 신정리 요로원의 원 터 앞으로는 큰 도로가 남북으로 뚫려 있어 이곳이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책은 필자와 필자의 제자들이 함께 읽은 것을 가다듬은 것이다. 그리고 번역상 난해한 부분은 석촌(石村) 이두희(李斗熙)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 이 자리를 빌어 제자들의 노고와 이두희 선생님의 도움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필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번역상 부족한 부분이 많을 것이다. 이는 모두 필자의 천학(淺學) 때문이니 기탄없는 질정(叱正)을 주시기 바란다.
끝으로 출판사의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영리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이런 책을 기꺼이 만들어 준 박문사의 사장님과 박문사 편집부 직원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책머리에
2010년 늦은 4월
不?堂 書室에서
韓 碩 洙 頓首
<요로원야화기>와 박두세
박두세(朴斗世) 1650(효종 1)~1733(영조 9) 울산박씨 대동보에는 '子 斗世 崇禎 庚寅 八月 二日 生 英祖 癸丑 五月 一日 卒 享年 八十四'로 기재 되어 있으므로 박두세의 생몰연대는 1650(효종 1)~1733(영조 9)이다.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울산. 자는 사앙(士?)호는 동암(東巖).
율(?) 박율: 문과 급제자로 殷山縣監을 지냈으며 天文數學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의 아들이며 충청도 대흥(현 충남 예산군 大興면) 사람이다. 1677(숙종 3, 丁巳)년 사마시에 중형 태세(泰世), 삼형 규세(奎世) 울산박씨 대동보에는 박두세의 형이 셋이 있었으나 伯兄인 鼎世가 19세에 요절하였다. 따라서 태세는 중형이 된다.
와 함께 동방급제(同榜及第)하였고 1682(숙종 8)년에 삼형 규세와 함께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문장에 능했고 운학(韻學)에도 밝았다. 홍문관직을 제수받았으나 1686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일 때 권대운(權大運)의 압송사건에 편의를 제공했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진주목사를 거쳐 중추부사에까지 이르렀다. 당색은 남인에 속하였으며 벼슬길이 순탄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요로원야화기>는 1678년 지은이가 과거에 실패하고 시골로 돌아가는 길에 충청도의 요로원이라는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겪은 일을 다루어 당시 사회의 실정을 폭로하고 정치제도에 대한 불만을 풍자적으로 서술한 문답형식의 작품이다. 박두세의 운학에 대한 저술로는 <삼운보유(三韻補遺)>와 그것을 증보한 <증보삼운통고(三補三韻通考)>가 있다.
요로원과 박두세 생가 및 묘소
요로원은 충남 아산시 음봉면 신정리(陰峰面 新井里)에 있었던 옛 원(院)의 이름이다. 옛날 요로원이 있던 자리는 현재도 그 위치가 분명한데 다만 '요로원'이 음편(音便) 현상을 일으켜 '요란'이란 지명으로 불리고 있다. 요란: 신정리 입구에는 현재 '요란수퍼'가 있다.
요로원은 서울에서 과천과 천안을 거쳐 아산, 예산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다. 박두세의 고향인 대흥을 가려면 이 요로원을 지나 아산을 거쳐 예산을 통과해야 한다.
박두세의 출생지는 현재 충남 예산군 신양면 녹문리 229번지이며 그 집을 박두세의 호를 따서 동암집 또는 수명정(水明亭)이라고 한다. 동암 박두세의 출생지에는 그의 10대 종손인 朴敬秀씨와 종친회장인 8대손 朴奎鎭씨, 종친회 총무인 9대손 朴承敎씨 세 분이 현장에까지 인도하여 주었으면 현재 그 터에는 큰 집의 종손인 朴龍太씨가 살고 있다. 건물은 최근에 다시 지은 것이나 박두세 당시에 쓰던 우물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생가 터 옆으로는 금강의 지류이며 지금의 예당저수지 상류인 상당히 폭이 넓고 제법 깊은 강이 얕은 절벽 아래로 흐르는데, 동암은 형제들과 이 언덕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풍월을 즐겼다고 한다. 이 집은 강가에 있고 주변의 풍광이 수려한 편이다.
묘소는 예산군 대흥면 대율리 51-2번지에 위치해 있다. 박두세의 묘소: 필자는 2009년 6월 28일에 대학원 제자들과 동암의 묘소를 답사한 바 있다. 동암의 후손에 의하면 그의 후손 중에 특별히 高官顯職에 오른 사람이 없었고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도 없어 산소를 제대로 가꾸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최근에 산소를 새로 단장하였는데 풍수적 관점에서 석물을 하는 터가 아니라고 하여 석물은 하지 않고 봉분과 그 주위만 말끔하게 정리하였다. 묘소는 대흥면 소재지에서 산길을 따라 차로 한참을 달려서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데 묘소에 올라서면 시야가 넓게 트여 조망이 좋다.
1) 울산박씨 대동보에는 '子 斗世 崇禎 庚寅 八月 二日 生 英祖 癸丑 五月 一日 卒 享年 八十四'로 기재 되어 있으므로 박두세의 생몰연대는 1650(효종 1)~1733(영조 9)이다.
2) 박율: 문과 급제자로 殷山縣監을 지냈으며 天文數學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3) 울산박씨 대동보에는 박두세의 형이 셋이 있었으나 伯兄인 鼎世가 19세에 요절하였다. 따라서 태세는 중형이 된다.
4) 요란: 신정리 입구에는 현재 '요란수퍼'가 있다.
5) 동암 박두세의 출생지에는 그의 10대 종손인 朴敬秀씨와 종친회장인 8대손 朴奎鎭씨, 종친회 총무인 9대손 朴承敎씨 세 분이 현장에까지 인도하여 주었으면 현재 그 터에는 큰 집의 종손인 朴龍太씨가 살고 있다. 건물은 최근에 다시 지은 것이나 박두세 당시에 쓰던 우물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생가 터 옆으로는 금강의 지류이며 지금의 예당저수지 상류인 상당히 폭이 넓고 제법 깊은 강이 얕은 절벽 아래로 흐르는데, 동암은 형제들과 이 언덕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풍월을 즐겼다고 한다. 이 집은 강가에 있고 주변의 풍광이 수려한 편이다.
6) 박두세의 묘소: 필자는 2009년 6월 28일에 대학원 제자들과 동암의 묘소를 답사한 바 있다. 동암의 후손에 의하면 그의 후손 중에 특별히 高官顯職에 오른 사람이 없었고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도 없어 산소를 제대로 가꾸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최근에 산소를 새로 단장하였는데 풍수적 관점에서 석물을 하는 터가 아니라고 하여 석물은 하지 않고 봉분과 그 주위만 말끔하게 정리하였다. 묘소는 대흥면 소재지에서 산길을 따라 차로 한참을 달려서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데 묘소에 올라서면 시야가 넓게 트여 조망이 좋다.
목차
목차
머리말
요로원야화기와 박두세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
요로원야화기와 박두세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
저자
저자
박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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