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지식IN 사전(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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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를 통해 본 역사 속 인물과 사건들의 진실!
『세계사 지식IN 사전』은 세계사의 상식과 지식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구성하여 명쾌하게 풀어썼다. 세계사의 다양한 테마와 소재를 담고 있는 이 책은, 세계사를 움직인 정치적 사건 이외에도 위대한 발명이나 발견, 그리고 그 이면에 감추어진 통한의 뒤안길까지 다룬다. 역사의 이면에 숨어 있는 장면을 놓치지 않고 각 에피소드마다 명쾌한 해설을 달아 세계사의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준다.
『세계사 지식IN 사전』은 세계사의 상식과 지식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구성하여 명쾌하게 풀어썼다. 세계사의 다양한 테마와 소재를 담고 있는 이 책은, 세계사를 움직인 정치적 사건 이외에도 위대한 발명이나 발견, 그리고 그 이면에 감추어진 통한의 뒤안길까지 다룬다. 역사의 이면에 숨어 있는 장면을 놓치지 않고 각 에피소드마다 명쾌한 해설을 달아 세계사의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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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세계사 지식in 사전>은 현대인이라면 꼭 알아야 할 세계사의 상식과 지식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구성하여 명쾌하게 풀어 쓴 책이다. 이슬람교도는 왜 돼지고기를 먹지 않을까? 모나리자의 얼굴에는 왜 눈썹이 없을까? 역사의 이면에 숨어 있는 장면을 놓치지 않고 각 에피소드마다 명쾌한 해설을 달아 세계사의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준다. 세계사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수세기에 걸쳐 윤색된 여러 역사적인 인물과 사건들의 진면목을 한 꺼풀 벗겨내, 독자들을 유쾌하고 재미있는 지식의 바다로 안내할 것이다.
유쾌한 지식의 가지에서 세계사의 뿌리를 찾는다
이 책은 <세계사 오류 사전>에 이은 두 번째 세계사 시리즈물이다.
<세계사 오류 사전>이 세계사의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았다면, 이 책은 세계사의 다양한 테마와 소재를 담고 있다. 세계사를 움직인 정치적 사건 이외에도 위대한 발명이나 발견, 그리고 그 이면에 감추어진 통한의 뒤안길까지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계사의 흐름은 표면적인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라는 거대한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돛단배라고나 할까. 바다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내륙에서 흘러나오는 수많은 강물이 필요하다. 바다를 지원하는 강물 또한 냇물이나 지류의 지원 없이는 강의 생태를 보존할 수가 없다. 이 책은 소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바로 이런 역사의 지류, 세계사의 작은 물줄기를 담고 있다. 거대한 바다의 질 좋은 자양분은 이런 작은 물줄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사실 우리는 역사의 큰 물줄기에만 집착해 왔다. 절대 권력, 통치자, 혁명, 황제 등의 낱말은 우리의 귀에 너무나 익숙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사소한 발명이나 단순한 발견, 어원 따위가 우리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게 되면 역사의 관점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역사는 우리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의 광장이다. 화려하고 웅대한 광장이 있는가 하면, 참담하고 비통한 역사의 광장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의 물줄기를 끊임없이 기어오르는 한 마리의 연어와 같다. 과연 그런 역사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것인가. 동서고금의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역사 여행을 하는 것이야말로 현대 지식인으로서의 유쾌한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이 책이 단순한 역사의 '입담거리'나 '통설'로 그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비록 그 내용이 빈약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짧은 내용 속에는 역사의 큰 줄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석과 박스 부분을 활용해 그 시기와 연대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참고문헌을 두어 지식 세계를 강화했다.
책속으로 추가
로마 대화재가 일어난 것은 네로가 황제로 즉위한 지 꼭 10년이 되던 해였다. 초기 기독교는 아직 민중의 신망을 얻고 있지 못한 종파로 마술을 일삼는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로마 대화재 이후 체포된 방화범들 중에는 광신적인 기독교 극단주의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들이 처형된 이유는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회의 안전을 위협한 '방화범'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시 로마 이외 어느 곳에서도 기독교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박해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즉 기독교 박해는 로마 시내에 거주하는 신자에게만 국한했고 또 단 한 차례로 끝났다.
사실 네로 황제는 엄밀히 말해 기독교 박해와는 관련이 없고 그의 모습은 역사적으로 지나치게 왜곡되어 왔다. 네로가 죽은 지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원로원 출신의 타키투스는 네로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바로 여기서부터 네로가 왜곡되기 시작했다. 네로가 포악한 황제로 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가 유럽에서 국교로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 이전에는 기독교 신자들을 학살했던 사실은 네로의 평가에서 문제로 삼지도 않았다. 네로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던 독일의 작가 반덴베르크는 "기독교가 국교로 자리 잡은 4세기가 되어서야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들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지르고 나서 기독교인들에게 죄를 덮어씌웠다는 이야기도 이때부터 나오게 된 것이다."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다르지 않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불행하게도 거기에 말려들었고, 그것이 오늘날 네로를 기독교 박해의 원흉으로 몬 계기가 되었다. 후대의 기독교는 초기 순교자들의 삶을 미화하기 위해 역사적 신빙성이 빈약한 야사와 같은 사료들을 기본으로, 로마제국 말기부터 중세를 거쳐 지금까지 네로를 악마처럼 취급해 오고 있는 것이다.(본문 57-58쪽)
콜로세움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 이는 플라비우스 왕조 때 세워진 것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황제로 이어지면서 4층까지 완성됐다. 콜로세움은 세 황제를 거치기는 했지만 건축 기간은 5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는 간결한 설계와 뛰어난 시공 기술, 수많은 노예 노동력 덕택이다. 이런 짧은 공사 기간은 불가사의한 일로, 오늘날의 기술로도 이 정도 규모라면 5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고대 로마 권력의 상징인 콜로세움은 5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고, 입석까지 포함하면 7만 명이 들어갈 수 있다. 웬만한 도시 인구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크기인데도 관중들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데는 15분이 넘지 않도록 설계되었다고. 콜로세움에서는 검투사의 시합과 맹수들의 서커스 등이 펼쳐져 로마 시민들의 오락장으로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경기장은 직경의 긴 쪽은 188미터, 짧은 쪽은 156미터에 달하며 둘레는 527미터의 타원형이고, 외벽은 높이 48미터의 4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콜로세움이라는 명칭은 근처에 네로의 거상이 있었던 데에 유래한다.
콜로세움이 최초의 돔구장이라고 불리는 것은 구경꾼들을 궂은 날씨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거대한 천막인 벨라리움으로 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4층에 나무 봉을 매달아 천막으로 하늘을 덮어 돔구장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콜로세움은 칸마다 창문 위에 천막을 치는 데 쓰이는 꽂을대 용도의 돌이 세 개씩 튀어나와 있다. 이 꽂을대의 나무 깃대를 꽂아 삼각 돛 모양의 천막으로 하늘을 가렸다. 천막을 치는 일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으므로 나폴리 만의 미세눔 해군기지에서 파견된 특수요원들이 상주하면서 작업을 담당했다.(본문 78-80쪽)
많은 사람들이 <동방견문록>의 저자는 마르코 폴로라고 알고 있으나, 원저자는 루스티켈로(Rustichello)이다. 1290년 중국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마르코 폴로는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이 동방에서 겪었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도리어 그를 허풍쟁이로 몰았다. 그러던 중 마르코 폴로는 베네치아와 제노바 전쟁 때 포로로 잡혀 제노바 감옥에 투옥되었다. 어둡고 습기 찬 감옥에서 수감자들의 유일한 낙은 서로에게 이야기를 전해 주고 또 듣는 것이었다. 이때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중국 원나라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같은 수감자들에게 상세히 들려주었다.
마르코 폴로는 어느새 감옥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꾼이 되었고, 누군가 그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였다.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 중에는 루스티켈로도 있었는데, 그는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를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냈다. 이것이 바로 <동방견문록>이다. 이 책은 좀 과장된 점이 있긴 하지만, 당시의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중국 등에 관한 기사가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는 몇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다. 마르코 폴로는 17년이란 긴 세월 동안 몽골제국에 있었다고 했는데, 만리장성이나 당시 중국의 진귀한 관습 중의 하나인 여성의 전족(纏足), 중국의 연중행사, 한자의 구조 등의 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훗날 역사학자들은 과연 마르코 폴로가 정말 중국에 갔었는지 의문을 품고 있다.(본문 83-84쪽)
영국의 런던탑은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11세기부터 17세기까지 약 500년 동안 국왕을 배신한 자를 가차없이 처벌하던 악명 높은 곳이었다. 중세 시대 이곳에서 자행되던 처형 방법은 실로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1483년 리처드 3세가 어린 조카들인 에드워드 3세의 두 아들을 이곳에 가두었다가 비밀리에 죽였다. 이 탑의 반대편 템스 강 쪽에는 유명한 처형자의 문(Traitors Gate)이 있고 내성으로 들어서면 화이트 타워(White Tower)와 헨리 8세의 2명에 부인인 앤 불린과 캐서린 하워드가 처형된 잔디밭이 있다. 추기경 토머스 월시는 이곳에 유폐되자 헨리 8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을 정도로 고문 수법이 잔혹했다. 월시의 편지는 지금도 런던탑에 전시되어 있다.
런던탑 마당에는 이 탑의 귀하신 몸인 까마귀가 있는데, 찰스 2세 때부터 이 탑에는 희한한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런던탑에 살고 있는 까마귀가 사라지게 되면 탑이 붕괴되고 영국도 멸망해 버린다."
이런 전설을 믿고 있었던 찰스 2세는 런던탑에 있는 까마귀들이 제국의 몰락을 지켜주는 성조(聖鳥)로 여겼다. 그래서 까마귀들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날개를 잘라 죽을 때까지 런던탑에 살게 했다. 까마귀들은 오래도록 런던탑에서 '행운의 심벌'로 살아왔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 폭격에 놀라 그만 모두 죽고 말았다. 현재 런던탑에 살고 있는 까마귀들은 2차 대전이 끝난 후 영국 정부가 1946년에 다시 풀어놓은 것이다.
성 안에는 항상 6마리 이상의 큰 까마귀가 사육되고 있으며, 날개 잘린 큰 까마귀를 돌보는 것도 관리인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이다. 영국 정부는 런던탑의 까마귀가 죽으면 새로운 까마귀를 다시 탑으로 들려와 살게 해서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본문 100-102쪽)
베르사유 궁의 주인 루이 14세는 '짐은 국가다'라는 말로 잘 알려진 절대군주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발레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고, 정작 자신도 17세기의 유명한 무용수이기도 했다.
루이 14세가 발레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5세 때, 왕위에 즉위하면서부터였다. 5세에 왕위에 오르긴 했으나, 허수아비에 불과한 자신의 처지를 일찌감치 깨달은 루이 14세는 매일 무용 수업을 받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삼았다. 하루에 3시간에서 5시간 정도 무용 연습을 했다. 그 뒤 정식으로 궁정 무용을 통해 발레를 배운 그는 1656년에는 2개월 동안 무려 7편의 가면극과 발레에 출연하기도 했다. 1670년 무용을 그만두기까지 루이 14세는 무려 26편의 발레에서 주역 무용수로 활동했다.
또한 루이 14세는 발레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왕이기도 했다. 그는 베르사유에 호화찬란한 대궁전을 짓고 귀족과 왕족들을 불러들여 매일 사치스러운 연회와 공연을 열었다. 그는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귀족과 왕족들을 유흥에 빠지게 하고 왕의 절대적 힘을 보여 주기 위해 끊임없이 무도회를 열었다. 귀족들에게는 사치와 낭비에 젖게 하여 세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에게 주어진 왕권은 더욱 강화시키려는 의도였던 것이다.(본문 106-107쪽)
수녀원은 본래 신앙생활을 원하는 여성들이 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무렵 유럽의 수녀원은 여성들의 은둔 장소 혹은 유배지나 다름없었다. 가난해서 생계를 이을 수 없거나 가족에게 버림받은 처녀, 혼기 놓친 노처녀, 남편 잃은 과부 등 수녀원에 모여드는 여성들은 별별 사람이 다 있었다. 카타리나도 그중 하나였다. 작센의 몰락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카타리나는 열 살 때 새어머니를 맞은 다음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당시 수녀원은 이탈을 허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녀의 탈출을 돕는 자는 사형에 처할 수도 있었다.
루터는 어느 날 밤 무려 열두 명의 수녀들을 마차에 태워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열두 명의 수녀 가운데 세 명은 부모에게 돌려보내고 여덟 명을 결혼을 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수녀 카타리나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했다.
카타리나는 남편의 신앙심 깊은 '영적 동료'로서 남편에게 협조하고 위안을 주는 충실한 아내였다. 그는 집안을 따스하게 가꾸고 루터가 좋아하는 포도주와 맥주를 항상 빚어 놓았으며, 딸 셋 아들 셋을 낳아 키웠다. 그중 딸 둘은 어려서 죽었다. 루터 역시 아내 카타리나를 사랑했다. 루터가 자신의 결혼 생활을 얼마나 만족스럽게 여겼는지는 그의 글에서 알 수 있다.
"거룩한 결혼 생활은 하나님의 말씀 다음으로 귀한 보물이다. 경건하고 쾌활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가정을 잘 관리하는 아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카타리나는 종교개혁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여성상의 모범이요, 두 사람이 일군 가정은 종교개혁으로 새롭게 태어난 프로테스탄트 가정의 모델이라 할 만하다. 독일 프로테스탄트들은 가장 행복한 가정의 모습으로 루터가 아이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트리를 둘러싸고 성탄 찬송을 부르는 장면을 꼽고 있다.(본문 111-112쪽)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에 집착했던 가장 큰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는 인쇄기를 발명하자마자, 곧바로 돈이 될 만한 것을 찾아 나섰다. '면죄부'는 가장 구미가 돋는 '상품'이었다. 이것은 구텐베르크의 인쇄 기술이 종교개혁이나 사회변혁 이념과는 상관없이 철저히 이익 창출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면죄부로 재미를 보지 못했던 구텐베르크는 이번에는 성서 출판에 손을 댄다. 당시 성서 출판은 니콜라우스가 10년 동안 주창해 온 개혁 사업이었다.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은 난산 끝에 세상에 나왔는데, 1455년에 발간된 금속활자본 라틴어 성서의 가격은 800플로린이었다. 하위 성직자의 3년 급여와 맞먹었지만 베끼는 데만 5년에서 20년이 걸리는 필사본보다는 훨씬 저렴했다. 성서의 성공적인 인쇄에도 불구하고 구텐베르크는 큰돈을 벌지 못했다. 결국 재정난과 소송까지 당해 인쇄 기술과 장비를 자본주인 푸스트에게 넘겨야 했다.
구텐베르크 사후 활판 인쇄술은 빠르게 전파돼 1500년에는 260개 도시에서 인쇄기가 돌아가며 지식 혁명을 낳았다. 종교개혁을 촉발시킨 마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도 그의 인쇄술 덕분이었다. 성서의 번역 활자본이 나오면서 문맹과 맹목적인 복종이 사라지고 지식 독점구조가 깨졌다.(본문 131-134쪽)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조각 작품인 모세상(像)을 보면 머리에 뿔이 돋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중세 예술가들은 모세를 그릴 때 머리에 뿔이 솟아나 있는 모습을 그렸다. 그들은 왜 모세의 머리에 뿔을 그려 넣은 것일까?
이것은 성서 번역에서 찾을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분노하고 있으나 매우 억제하고 있는 모습이다.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백성들에게 다가서자 얼굴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광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garan 혹은 karon인데, 성경이 라틴어로 번역될 때 이 단어가 horn(뿔)으로 잘못 번역되었던 것이다. 뿔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geren이다. 그래서 라틴어로 구약을 번역한 불게이트는 이 부분을 '그 얼굴에 뿔이 돋아나 있었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본래 의미에 적합하지 않아서 대부분 후대 주석가들은 '모세 얼굴이 빛이 났는데 그 형태가 뿔 모양이었다'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뿔'을 뜻하는 히브리어에는 '광채'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예로부터 동물의 뿔은 공격과 방어 무기로 사용되어 물리적 힘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또한 사람들은 뿔에 초자연적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미술에서 신적 존재는 힘의 상징인 뿔을 끼워 넣은 관으로 장식했다. 헬레니즘 시대에도 권력가들은 자신의 초상을 이마에 뿔이 있는 모습으로 메달이나 동전에 새기는 것을 좋아했다. 더군다나 구약성서에서 황소 뿔은 하느님의 힘이나 왕이 백성들을 보호하거나 원수를 물리치는 상징으로 종종 사용되었다.(본문 138-139쪽)
고대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던 바빌로니아의 상징물은 바벨탑이다. 바벨이라는 말은 '신의 문'이라는 뜻으로 그리스인은 이를 '바빌론'이라 불렀으며, 바빌론 시에 있던 메소포타미아 남쪽 지방을 '바빌로니아'라고 불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의 폴리스를 평정한 후 그리스인 병사를 이끌고 동방 원정에 나서 기원전 330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했다. 그는 원정에 참가한 그리스인을 이주시키기 위해 제국 내에 여러 도시를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붙여 알렉산드리아로 명명했다. 이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를 동방에 전파하기 위한 전진 기지가 되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민족의 통치 수단으로서 그리스 문화와 토착 오리엔트 문화의 결합을 시도했다. 그 결과 '헬레니즘'이라 불리는 인류 최초의 세계 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런 알렉산드로스의 마지막 염원 중의 하나는 '바벨탑'의 재건이었다. 바빌로니아를 상징하는 건축물을 재건하여 동방 문화를 흡수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바벨탑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을 정복하기 150여 년 전인 기원전 479년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철저히 파괴됐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바빌론을 점령하자마자 곧 폐허가 된 바벨탑 재건 착수에 들어갔다. 그러나 천하의 알렉산드로스도 바벨탑 재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세계를 정복하는 일보다 바벨탑을 쌓아올리는 것이 더욱 거창한 사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바벨탑 재건 사업에 1만여 명의 인원을 2개월간 투입한 후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바벨탑이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는 문헌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이중으로 된 바빌론 성벽 위는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가 양쪽에서 달려와도 염려할 것이 없을 정도로 넓었다고 전하고 있다. 바벨탑은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두크를 숭배하기 위한 국가적이고도 민족적인 성역이었다. 탑 옆의 마르두크 신전에는 옥좌 위에 순금으로 된 마르두크의 신상이 앉아 있었다. 이 신상과 보좌 등의 무게(순금의 무게)는 무려 800달란트(약 22톤)나 되었다고 한다.(본문 163-164쪽)
엘리자베스 1세가 영국 성공회를 확립하게 된 배경은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 헨리 8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헨리 8세는 죽은 형의 아내, 즉 형수와 정치적인 이유(형수 캐서린이 에스파냐의 공주)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메리라는 딸을 얻었다. 하지만 헨리 8세는 아내 캐서린을 멀리하고 시녀인 앤 불린을 더 사랑했다.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로마 교황에게 캐서린과 이혼하게 해달라고 신청했지만, 가톨릭에서는 이를 반대했다. 가톨릭은 이혼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본문 194쪽)
고대 시대는 화폐의 가치 용도가 다양했을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 필요한 것은 대부분 화폐의 대용 가치로 이용해 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자주 사용되었던 것이 쌀, 보리, 밀 등의 곡식 화폐, 즉 '곡화(穀貨)'였다. 곡화 다음으로 화폐로 사용했던 것이 소금이다. 인간에게 필수적인 소금은 얻기가 매우 힘든 것이어서 소금의 생산과 분배 문제는 일찍부터 중요시되어 왔다. 특히 통치자들은 소금을 국가 체계 안으로 편입시켜 국가 재정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백성을 통제했다.
소금의 화폐 가치는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 왕은 피라미드의 건설에 종사한 사람들에게 노동의 대가로서 소금을 지불했다. 고대 로마 제국에서는 관료나 군인들에게 소금을 살 수 있는 특별 '수당'을 지급했는데 이를 라틴어로 '살라리움(salarium)이라고 한다. 급료나 봉급을 의미하는 영어의 '샐러리(salary)'는 살라리움에서 유래한 것이다. 병사를 의미하는 솔저(soldier)의 어원 역시 소금인 솔트(salt)에서 유래된 말이다. 로마 제정시대 때부터 급료를 돈으로 지급했지만, 이를 여전히 살라리움이라고 불렀다. 고대 로마의 제염소가 있는 테베르 강 하구의 마을은 귀중한 소금을 적의 약탈로부터 지키기 위해 병사가 배치되고 그 급여의 일부가 소금으로 지급되었다.(본문 202-203쪽)
십자군 전쟁은 '성지 탈환'이란 명분으로 약 2백 년간 계속되었다. 8차까지 진행된 십자군 전쟁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 특이한 집단이 있는데, 그게 바로 매춘부들이다. 제1차 십자군(1096-1099년)에 종군했던 매춘부는 5천여 명에 이르렀다. 또 알브레이트 1세가 신성로마황제로서 슈트라스부르크에 입성했을 때(1298년)는 8백여 명의 매춘부가 동행했으며, 스페인 알바공의 네덜란드 원정 때는 4백여 명의 기마 매춘부와 8백여 명의 도보 매춘부가 참가했다.
이들 매춘부는 연대를 조직했을 뿐만 아니라 병사와 마찬가지로 급료를 받는 용병이었다. 이들을 참가시킨 데는 무엇보다도 병사들의 욕구불만을 위로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십자군 병사가 외국 여자에게 성병을 옮거나 동성애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가톨릭 성직자들은 전쟁에 나선 병사들이 요염한 여자들이 있으면 더 열심히 싸울 것이라고 생각했다.(본문 221-222쪽)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은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기념물로 세워졌다. 에펠탑이 처음 파리에 세워졌을 때 파리 시민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지금이야 프랑스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빼놓지 않는 관광 코스 중의 하나지만, 당시에 이 에펠탑은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파리의 밤을 밝히는 아름다운 건축물은커녕 '쓸모없고 괴기스러운 건축물' '파리의 배꼽에 박힌 등대' '거대하고 흉측한 해골'이라 부르며 비난했다.
애초에 에펠탑은 20년 동안만 그 자리에 있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파리의 예술인과 지식인들은 20년도 너무 길다면서 조속히 철거해야 한다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나섰다. 파리 시민들은 에펠탑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파리 당국은 계속되는 불평과 비난을 고려해 건립 20년이 완료되면 에펠탑을 해체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다.
그러나 라디오가 발명되고 난 뒤 상황이 급변했다. 수천 피트 높이의 에펠탑이 전파를 송출하는 데 필요한 안테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7년 프랑스 정부는 에펠탑을 해체하지 않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즉 라디오가 에펠탑을 살려낸 셈이다. 에펠탑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TV가 발명된 이후에는 TV 송신탑으로 이용했다.(본문 244-245쪽)
그리스에서는 붉은 빛의 와인은 '포도주의 신'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와도 결부되었다. 디오니소스의 '피'인 와인을 마시면 이듬해에 풍작을 약속해준다고 믿었던 것이다. 와인은 포도 열매가 완전히 짓이겨진 후 와인으로 소생한다는 점에서 '불사(不死)'를 의미하는 술로 불려졌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 축제 때 사람들이 디오니소스 신전인 나이온에 모여 포도에서 와인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기쁨을 체험하고 밤새도록 와인을 즐겼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원래 와인을 마시는 풍습이 없었다. 그리스로부터 포도 재배가 전해진 로마는 피정복 지역에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를 적극 장려했다. 이는 유럽 여러 지역으로 포도 재배가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로마에서 와인이 처음 문헌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121년이다. 초기 로마에서는 여성이 와인을 마시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를 어기면 사형에 처해졌다. 그 이유는 자녀를 낳는 어머니인 여성이 '와인'이라는 이질적인 피를 마시는 것은 부정행위나 마찬가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 시대에는 와인이 매우 고가품으로 애용되었으며, 제정기가 되면서 누구나 손쉽게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아진 여성도 이때부터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393년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된 기독교에서는 와인이 예수의 거룩한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 미사에 이용되었다. 마치 포도즙이 와인으로 바뀌듯이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본문 260-261쪽)
이발사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때부터 존재해 있었다. 영어에서 이발사를 '바버(barber)'라고 하는데, 이것은 수염을 의미하는 라틴어 '바루바(barba)'에서 유래된 말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칼날을 취급하는 면도사가 외과의사를 겸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외과의학이라는 별도의 학문 분야가 없었다. 외과의사는 이발사를 겸하는 천한 직업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면도를 할 뿐만 아니라 머리도 깎고, 피를 빼내는 일을 했으며, 종기도 째고 고름을 짜내는 등 외과의사의 역할을 대신했다.
중세 시대에는 진통제도 마취약도 없었으므로, 외과수술은 고문보다도 훨씬 끔찍하였다. 환자의 몸을 쇠사슬로 묶은 후 외과의사(이발사)는 톱, 망치 등을 써서 무지막지하게 수술한 후, 빨갛게 달군 인두로 상처를 지져서 지혈을 하였다. 수술 도중 환자가 죽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오늘날 이발소의 앞에는 빨강, 파랑, 하양의 3색 나선상 간판이 있는데, 이것은 빨강이 동맥, 파랑이 정맥, 하양이 붕대를 의미한다. 급한 응급 환자가 다쳤을 경우 병원(이발소)의 위치가 눈에 잘 들어오도록 세 가지 색을 가진 간판을 내건 것이다. 그 간판이 바로 삼색등의 시초이다.
외과의학이 천한 직업에서 학문의 한 분야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파레(Ambroise Pare)의 공이 컸다. '근대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파레는 여러 이발소들을 전전하면서 외과 의술을 배웠고, 파리에서 공부한 후 정식으로 외과의사가 되었다. 당시 프랑스를 통치하던 프랑수아 1세는 주변국과 잦은 전쟁을 일으켰는데, 파레는 군에 종군하는 군의가 되어 전쟁 때마다 부대를 따라다니면서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또한 그는 환자의 고통을 줄이고 효과를 높일 수 있는 여러 치료법을 개발했다. 인두로 지져서 상처를 지혈하는 난폭한 방법 대신에 새로운 지혈법을 개발했으며, 처음으로 틀니, 의안, 의족 등을 고안하기도 하였다.
이발사와 외과의사가 분리된 것은 18세기 이후이다. 그 후 이발사는 수염과 머리만을 취급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발사의 주 업무가 수염을 깎는 것으로부터 머리를 깎는 것으로 옮겨지게 된 것은 안전 면도기가 출현한 20세기 이후부터이다.(본문 262-264쪽)
중세 대학은 그리스 로마 문명 쇠퇴 후 지적 생활을 부활시키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대학(University)이라는 말은 길드란 뜻으로, 원래 '전체'라는 의미의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에서 유래하였다. 실제로 교육을 위한 길드라고 볼 수 있다.
중세 전반기의 학문과 교육의 중심은 수도원이었다. 대학은 12세기 이후 수도원의 부속학교(Schola)로서 더욱 발전하였다. 당시 중세 대학의 교육 과정은 7개 자유교과목으로, 초기의 유명한 대학으로는 볼로냐 대학과 파리 대학을 꼽을 수 있다. 파리 대학은 교수 조합, 볼로냐 대학은 학생 조합으로 이루어져 다른 대학의 모범이 되었다. 특히 볼로냐 학생들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생활의 안정과 협조를 위해 조합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볼로냐 대학은 학생 조합이 교칙 및 학과목을 정하고 교사를 임명하였다. 그들은 교수들이 수업료만큼의 강의를 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조직을 만들었고, 방세 및 식비를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중세 대학으로 공부하러 온 학생들은 조합(길드)을 만들어 하숙비나 학비 인하를 학교 측과 교섭하기도 했다. 그들은 교수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투쟁도 서슴지 않았다. 교수에 대한 학생들의 투쟁 수단은 집단적인 수업 포기, 곧 '등교 거부'였다. 당시의 대학에서 교수는 학생 집단이 내는 수업료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수업 거부는 교수의 생계를 위협하는 것이었다.(본문 313-315쪽)
유쾌한 지식의 가지에서 세계사의 뿌리를 찾는다
이 책은 <세계사 오류 사전>에 이은 두 번째 세계사 시리즈물이다.
<세계사 오류 사전>이 세계사의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았다면, 이 책은 세계사의 다양한 테마와 소재를 담고 있다. 세계사를 움직인 정치적 사건 이외에도 위대한 발명이나 발견, 그리고 그 이면에 감추어진 통한의 뒤안길까지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계사의 흐름은 표면적인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라는 거대한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돛단배라고나 할까. 바다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내륙에서 흘러나오는 수많은 강물이 필요하다. 바다를 지원하는 강물 또한 냇물이나 지류의 지원 없이는 강의 생태를 보존할 수가 없다. 이 책은 소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바로 이런 역사의 지류, 세계사의 작은 물줄기를 담고 있다. 거대한 바다의 질 좋은 자양분은 이런 작은 물줄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사실 우리는 역사의 큰 물줄기에만 집착해 왔다. 절대 권력, 통치자, 혁명, 황제 등의 낱말은 우리의 귀에 너무나 익숙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사소한 발명이나 단순한 발견, 어원 따위가 우리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게 되면 역사의 관점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역사는 우리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의 광장이다. 화려하고 웅대한 광장이 있는가 하면, 참담하고 비통한 역사의 광장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의 물줄기를 끊임없이 기어오르는 한 마리의 연어와 같다. 과연 그런 역사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것인가. 동서고금의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역사 여행을 하는 것이야말로 현대 지식인으로서의 유쾌한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이 책이 단순한 역사의 '입담거리'나 '통설'로 그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비록 그 내용이 빈약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짧은 내용 속에는 역사의 큰 줄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석과 박스 부분을 활용해 그 시기와 연대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참고문헌을 두어 지식 세계를 강화했다.
책속으로 추가
로마 대화재가 일어난 것은 네로가 황제로 즉위한 지 꼭 10년이 되던 해였다. 초기 기독교는 아직 민중의 신망을 얻고 있지 못한 종파로 마술을 일삼는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로마 대화재 이후 체포된 방화범들 중에는 광신적인 기독교 극단주의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들이 처형된 이유는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회의 안전을 위협한 '방화범'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시 로마 이외 어느 곳에서도 기독교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박해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즉 기독교 박해는 로마 시내에 거주하는 신자에게만 국한했고 또 단 한 차례로 끝났다.
사실 네로 황제는 엄밀히 말해 기독교 박해와는 관련이 없고 그의 모습은 역사적으로 지나치게 왜곡되어 왔다. 네로가 죽은 지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원로원 출신의 타키투스는 네로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바로 여기서부터 네로가 왜곡되기 시작했다. 네로가 포악한 황제로 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가 유럽에서 국교로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 이전에는 기독교 신자들을 학살했던 사실은 네로의 평가에서 문제로 삼지도 않았다. 네로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던 독일의 작가 반덴베르크는 "기독교가 국교로 자리 잡은 4세기가 되어서야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들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지르고 나서 기독교인들에게 죄를 덮어씌웠다는 이야기도 이때부터 나오게 된 것이다."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다르지 않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불행하게도 거기에 말려들었고, 그것이 오늘날 네로를 기독교 박해의 원흉으로 몬 계기가 되었다. 후대의 기독교는 초기 순교자들의 삶을 미화하기 위해 역사적 신빙성이 빈약한 야사와 같은 사료들을 기본으로, 로마제국 말기부터 중세를 거쳐 지금까지 네로를 악마처럼 취급해 오고 있는 것이다.(본문 57-58쪽)
콜로세움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 이는 플라비우스 왕조 때 세워진 것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황제로 이어지면서 4층까지 완성됐다. 콜로세움은 세 황제를 거치기는 했지만 건축 기간은 5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는 간결한 설계와 뛰어난 시공 기술, 수많은 노예 노동력 덕택이다. 이런 짧은 공사 기간은 불가사의한 일로, 오늘날의 기술로도 이 정도 규모라면 5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고대 로마 권력의 상징인 콜로세움은 5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고, 입석까지 포함하면 7만 명이 들어갈 수 있다. 웬만한 도시 인구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크기인데도 관중들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데는 15분이 넘지 않도록 설계되었다고. 콜로세움에서는 검투사의 시합과 맹수들의 서커스 등이 펼쳐져 로마 시민들의 오락장으로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경기장은 직경의 긴 쪽은 188미터, 짧은 쪽은 156미터에 달하며 둘레는 527미터의 타원형이고, 외벽은 높이 48미터의 4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콜로세움이라는 명칭은 근처에 네로의 거상이 있었던 데에 유래한다.
콜로세움이 최초의 돔구장이라고 불리는 것은 구경꾼들을 궂은 날씨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거대한 천막인 벨라리움으로 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4층에 나무 봉을 매달아 천막으로 하늘을 덮어 돔구장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콜로세움은 칸마다 창문 위에 천막을 치는 데 쓰이는 꽂을대 용도의 돌이 세 개씩 튀어나와 있다. 이 꽂을대의 나무 깃대를 꽂아 삼각 돛 모양의 천막으로 하늘을 가렸다. 천막을 치는 일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으므로 나폴리 만의 미세눔 해군기지에서 파견된 특수요원들이 상주하면서 작업을 담당했다.(본문 78-80쪽)
많은 사람들이 <동방견문록>의 저자는 마르코 폴로라고 알고 있으나, 원저자는 루스티켈로(Rustichello)이다. 1290년 중국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마르코 폴로는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이 동방에서 겪었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도리어 그를 허풍쟁이로 몰았다. 그러던 중 마르코 폴로는 베네치아와 제노바 전쟁 때 포로로 잡혀 제노바 감옥에 투옥되었다. 어둡고 습기 찬 감옥에서 수감자들의 유일한 낙은 서로에게 이야기를 전해 주고 또 듣는 것이었다. 이때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중국 원나라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같은 수감자들에게 상세히 들려주었다.
마르코 폴로는 어느새 감옥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꾼이 되었고, 누군가 그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였다.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 중에는 루스티켈로도 있었는데, 그는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를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냈다. 이것이 바로 <동방견문록>이다. 이 책은 좀 과장된 점이 있긴 하지만, 당시의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중국 등에 관한 기사가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는 몇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다. 마르코 폴로는 17년이란 긴 세월 동안 몽골제국에 있었다고 했는데, 만리장성이나 당시 중국의 진귀한 관습 중의 하나인 여성의 전족(纏足), 중국의 연중행사, 한자의 구조 등의 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훗날 역사학자들은 과연 마르코 폴로가 정말 중국에 갔었는지 의문을 품고 있다.(본문 83-84쪽)
영국의 런던탑은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11세기부터 17세기까지 약 500년 동안 국왕을 배신한 자를 가차없이 처벌하던 악명 높은 곳이었다. 중세 시대 이곳에서 자행되던 처형 방법은 실로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1483년 리처드 3세가 어린 조카들인 에드워드 3세의 두 아들을 이곳에 가두었다가 비밀리에 죽였다. 이 탑의 반대편 템스 강 쪽에는 유명한 처형자의 문(Traitors Gate)이 있고 내성으로 들어서면 화이트 타워(White Tower)와 헨리 8세의 2명에 부인인 앤 불린과 캐서린 하워드가 처형된 잔디밭이 있다. 추기경 토머스 월시는 이곳에 유폐되자 헨리 8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을 정도로 고문 수법이 잔혹했다. 월시의 편지는 지금도 런던탑에 전시되어 있다.
런던탑 마당에는 이 탑의 귀하신 몸인 까마귀가 있는데, 찰스 2세 때부터 이 탑에는 희한한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런던탑에 살고 있는 까마귀가 사라지게 되면 탑이 붕괴되고 영국도 멸망해 버린다."
이런 전설을 믿고 있었던 찰스 2세는 런던탑에 있는 까마귀들이 제국의 몰락을 지켜주는 성조(聖鳥)로 여겼다. 그래서 까마귀들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날개를 잘라 죽을 때까지 런던탑에 살게 했다. 까마귀들은 오래도록 런던탑에서 '행운의 심벌'로 살아왔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 폭격에 놀라 그만 모두 죽고 말았다. 현재 런던탑에 살고 있는 까마귀들은 2차 대전이 끝난 후 영국 정부가 1946년에 다시 풀어놓은 것이다.
성 안에는 항상 6마리 이상의 큰 까마귀가 사육되고 있으며, 날개 잘린 큰 까마귀를 돌보는 것도 관리인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이다. 영국 정부는 런던탑의 까마귀가 죽으면 새로운 까마귀를 다시 탑으로 들려와 살게 해서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본문 100-102쪽)
베르사유 궁의 주인 루이 14세는 '짐은 국가다'라는 말로 잘 알려진 절대군주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발레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고, 정작 자신도 17세기의 유명한 무용수이기도 했다.
루이 14세가 발레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5세 때, 왕위에 즉위하면서부터였다. 5세에 왕위에 오르긴 했으나, 허수아비에 불과한 자신의 처지를 일찌감치 깨달은 루이 14세는 매일 무용 수업을 받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삼았다. 하루에 3시간에서 5시간 정도 무용 연습을 했다. 그 뒤 정식으로 궁정 무용을 통해 발레를 배운 그는 1656년에는 2개월 동안 무려 7편의 가면극과 발레에 출연하기도 했다. 1670년 무용을 그만두기까지 루이 14세는 무려 26편의 발레에서 주역 무용수로 활동했다.
또한 루이 14세는 발레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왕이기도 했다. 그는 베르사유에 호화찬란한 대궁전을 짓고 귀족과 왕족들을 불러들여 매일 사치스러운 연회와 공연을 열었다. 그는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귀족과 왕족들을 유흥에 빠지게 하고 왕의 절대적 힘을 보여 주기 위해 끊임없이 무도회를 열었다. 귀족들에게는 사치와 낭비에 젖게 하여 세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에게 주어진 왕권은 더욱 강화시키려는 의도였던 것이다.(본문 106-107쪽)
수녀원은 본래 신앙생활을 원하는 여성들이 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무렵 유럽의 수녀원은 여성들의 은둔 장소 혹은 유배지나 다름없었다. 가난해서 생계를 이을 수 없거나 가족에게 버림받은 처녀, 혼기 놓친 노처녀, 남편 잃은 과부 등 수녀원에 모여드는 여성들은 별별 사람이 다 있었다. 카타리나도 그중 하나였다. 작센의 몰락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카타리나는 열 살 때 새어머니를 맞은 다음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당시 수녀원은 이탈을 허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녀의 탈출을 돕는 자는 사형에 처할 수도 있었다.
루터는 어느 날 밤 무려 열두 명의 수녀들을 마차에 태워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열두 명의 수녀 가운데 세 명은 부모에게 돌려보내고 여덟 명을 결혼을 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수녀 카타리나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했다.
카타리나는 남편의 신앙심 깊은 '영적 동료'로서 남편에게 협조하고 위안을 주는 충실한 아내였다. 그는 집안을 따스하게 가꾸고 루터가 좋아하는 포도주와 맥주를 항상 빚어 놓았으며, 딸 셋 아들 셋을 낳아 키웠다. 그중 딸 둘은 어려서 죽었다. 루터 역시 아내 카타리나를 사랑했다. 루터가 자신의 결혼 생활을 얼마나 만족스럽게 여겼는지는 그의 글에서 알 수 있다.
"거룩한 결혼 생활은 하나님의 말씀 다음으로 귀한 보물이다. 경건하고 쾌활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가정을 잘 관리하는 아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카타리나는 종교개혁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여성상의 모범이요, 두 사람이 일군 가정은 종교개혁으로 새롭게 태어난 프로테스탄트 가정의 모델이라 할 만하다. 독일 프로테스탄트들은 가장 행복한 가정의 모습으로 루터가 아이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트리를 둘러싸고 성탄 찬송을 부르는 장면을 꼽고 있다.(본문 111-112쪽)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에 집착했던 가장 큰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는 인쇄기를 발명하자마자, 곧바로 돈이 될 만한 것을 찾아 나섰다. '면죄부'는 가장 구미가 돋는 '상품'이었다. 이것은 구텐베르크의 인쇄 기술이 종교개혁이나 사회변혁 이념과는 상관없이 철저히 이익 창출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면죄부로 재미를 보지 못했던 구텐베르크는 이번에는 성서 출판에 손을 댄다. 당시 성서 출판은 니콜라우스가 10년 동안 주창해 온 개혁 사업이었다.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은 난산 끝에 세상에 나왔는데, 1455년에 발간된 금속활자본 라틴어 성서의 가격은 800플로린이었다. 하위 성직자의 3년 급여와 맞먹었지만 베끼는 데만 5년에서 20년이 걸리는 필사본보다는 훨씬 저렴했다. 성서의 성공적인 인쇄에도 불구하고 구텐베르크는 큰돈을 벌지 못했다. 결국 재정난과 소송까지 당해 인쇄 기술과 장비를 자본주인 푸스트에게 넘겨야 했다.
구텐베르크 사후 활판 인쇄술은 빠르게 전파돼 1500년에는 260개 도시에서 인쇄기가 돌아가며 지식 혁명을 낳았다. 종교개혁을 촉발시킨 마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도 그의 인쇄술 덕분이었다. 성서의 번역 활자본이 나오면서 문맹과 맹목적인 복종이 사라지고 지식 독점구조가 깨졌다.(본문 131-134쪽)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조각 작품인 모세상(像)을 보면 머리에 뿔이 돋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중세 예술가들은 모세를 그릴 때 머리에 뿔이 솟아나 있는 모습을 그렸다. 그들은 왜 모세의 머리에 뿔을 그려 넣은 것일까?
이것은 성서 번역에서 찾을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분노하고 있으나 매우 억제하고 있는 모습이다.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백성들에게 다가서자 얼굴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광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garan 혹은 karon인데, 성경이 라틴어로 번역될 때 이 단어가 horn(뿔)으로 잘못 번역되었던 것이다. 뿔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geren이다. 그래서 라틴어로 구약을 번역한 불게이트는 이 부분을 '그 얼굴에 뿔이 돋아나 있었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본래 의미에 적합하지 않아서 대부분 후대 주석가들은 '모세 얼굴이 빛이 났는데 그 형태가 뿔 모양이었다'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뿔'을 뜻하는 히브리어에는 '광채'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예로부터 동물의 뿔은 공격과 방어 무기로 사용되어 물리적 힘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또한 사람들은 뿔에 초자연적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미술에서 신적 존재는 힘의 상징인 뿔을 끼워 넣은 관으로 장식했다. 헬레니즘 시대에도 권력가들은 자신의 초상을 이마에 뿔이 있는 모습으로 메달이나 동전에 새기는 것을 좋아했다. 더군다나 구약성서에서 황소 뿔은 하느님의 힘이나 왕이 백성들을 보호하거나 원수를 물리치는 상징으로 종종 사용되었다.(본문 138-139쪽)
고대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던 바빌로니아의 상징물은 바벨탑이다. 바벨이라는 말은 '신의 문'이라는 뜻으로 그리스인은 이를 '바빌론'이라 불렀으며, 바빌론 시에 있던 메소포타미아 남쪽 지방을 '바빌로니아'라고 불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의 폴리스를 평정한 후 그리스인 병사를 이끌고 동방 원정에 나서 기원전 330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했다. 그는 원정에 참가한 그리스인을 이주시키기 위해 제국 내에 여러 도시를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붙여 알렉산드리아로 명명했다. 이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를 동방에 전파하기 위한 전진 기지가 되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민족의 통치 수단으로서 그리스 문화와 토착 오리엔트 문화의 결합을 시도했다. 그 결과 '헬레니즘'이라 불리는 인류 최초의 세계 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런 알렉산드로스의 마지막 염원 중의 하나는 '바벨탑'의 재건이었다. 바빌로니아를 상징하는 건축물을 재건하여 동방 문화를 흡수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바벨탑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을 정복하기 150여 년 전인 기원전 479년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철저히 파괴됐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바빌론을 점령하자마자 곧 폐허가 된 바벨탑 재건 착수에 들어갔다. 그러나 천하의 알렉산드로스도 바벨탑 재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세계를 정복하는 일보다 바벨탑을 쌓아올리는 것이 더욱 거창한 사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바벨탑 재건 사업에 1만여 명의 인원을 2개월간 투입한 후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바벨탑이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는 문헌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이중으로 된 바빌론 성벽 위는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가 양쪽에서 달려와도 염려할 것이 없을 정도로 넓었다고 전하고 있다. 바벨탑은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두크를 숭배하기 위한 국가적이고도 민족적인 성역이었다. 탑 옆의 마르두크 신전에는 옥좌 위에 순금으로 된 마르두크의 신상이 앉아 있었다. 이 신상과 보좌 등의 무게(순금의 무게)는 무려 800달란트(약 22톤)나 되었다고 한다.(본문 163-164쪽)
엘리자베스 1세가 영국 성공회를 확립하게 된 배경은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 헨리 8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헨리 8세는 죽은 형의 아내, 즉 형수와 정치적인 이유(형수 캐서린이 에스파냐의 공주)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메리라는 딸을 얻었다. 하지만 헨리 8세는 아내 캐서린을 멀리하고 시녀인 앤 불린을 더 사랑했다.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로마 교황에게 캐서린과 이혼하게 해달라고 신청했지만, 가톨릭에서는 이를 반대했다. 가톨릭은 이혼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본문 194쪽)
고대 시대는 화폐의 가치 용도가 다양했을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 필요한 것은 대부분 화폐의 대용 가치로 이용해 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자주 사용되었던 것이 쌀, 보리, 밀 등의 곡식 화폐, 즉 '곡화(穀貨)'였다. 곡화 다음으로 화폐로 사용했던 것이 소금이다. 인간에게 필수적인 소금은 얻기가 매우 힘든 것이어서 소금의 생산과 분배 문제는 일찍부터 중요시되어 왔다. 특히 통치자들은 소금을 국가 체계 안으로 편입시켜 국가 재정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백성을 통제했다.
소금의 화폐 가치는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 왕은 피라미드의 건설에 종사한 사람들에게 노동의 대가로서 소금을 지불했다. 고대 로마 제국에서는 관료나 군인들에게 소금을 살 수 있는 특별 '수당'을 지급했는데 이를 라틴어로 '살라리움(salarium)이라고 한다. 급료나 봉급을 의미하는 영어의 '샐러리(salary)'는 살라리움에서 유래한 것이다. 병사를 의미하는 솔저(soldier)의 어원 역시 소금인 솔트(salt)에서 유래된 말이다. 로마 제정시대 때부터 급료를 돈으로 지급했지만, 이를 여전히 살라리움이라고 불렀다. 고대 로마의 제염소가 있는 테베르 강 하구의 마을은 귀중한 소금을 적의 약탈로부터 지키기 위해 병사가 배치되고 그 급여의 일부가 소금으로 지급되었다.(본문 202-203쪽)
십자군 전쟁은 '성지 탈환'이란 명분으로 약 2백 년간 계속되었다. 8차까지 진행된 십자군 전쟁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 특이한 집단이 있는데, 그게 바로 매춘부들이다. 제1차 십자군(1096-1099년)에 종군했던 매춘부는 5천여 명에 이르렀다. 또 알브레이트 1세가 신성로마황제로서 슈트라스부르크에 입성했을 때(1298년)는 8백여 명의 매춘부가 동행했으며, 스페인 알바공의 네덜란드 원정 때는 4백여 명의 기마 매춘부와 8백여 명의 도보 매춘부가 참가했다.
이들 매춘부는 연대를 조직했을 뿐만 아니라 병사와 마찬가지로 급료를 받는 용병이었다. 이들을 참가시킨 데는 무엇보다도 병사들의 욕구불만을 위로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십자군 병사가 외국 여자에게 성병을 옮거나 동성애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가톨릭 성직자들은 전쟁에 나선 병사들이 요염한 여자들이 있으면 더 열심히 싸울 것이라고 생각했다.(본문 221-222쪽)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은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기념물로 세워졌다. 에펠탑이 처음 파리에 세워졌을 때 파리 시민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지금이야 프랑스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빼놓지 않는 관광 코스 중의 하나지만, 당시에 이 에펠탑은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파리의 밤을 밝히는 아름다운 건축물은커녕 '쓸모없고 괴기스러운 건축물' '파리의 배꼽에 박힌 등대' '거대하고 흉측한 해골'이라 부르며 비난했다.
애초에 에펠탑은 20년 동안만 그 자리에 있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파리의 예술인과 지식인들은 20년도 너무 길다면서 조속히 철거해야 한다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나섰다. 파리 시민들은 에펠탑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파리 당국은 계속되는 불평과 비난을 고려해 건립 20년이 완료되면 에펠탑을 해체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다.
그러나 라디오가 발명되고 난 뒤 상황이 급변했다. 수천 피트 높이의 에펠탑이 전파를 송출하는 데 필요한 안테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7년 프랑스 정부는 에펠탑을 해체하지 않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즉 라디오가 에펠탑을 살려낸 셈이다. 에펠탑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TV가 발명된 이후에는 TV 송신탑으로 이용했다.(본문 244-245쪽)
그리스에서는 붉은 빛의 와인은 '포도주의 신'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와도 결부되었다. 디오니소스의 '피'인 와인을 마시면 이듬해에 풍작을 약속해준다고 믿었던 것이다. 와인은 포도 열매가 완전히 짓이겨진 후 와인으로 소생한다는 점에서 '불사(不死)'를 의미하는 술로 불려졌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 축제 때 사람들이 디오니소스 신전인 나이온에 모여 포도에서 와인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기쁨을 체험하고 밤새도록 와인을 즐겼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원래 와인을 마시는 풍습이 없었다. 그리스로부터 포도 재배가 전해진 로마는 피정복 지역에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를 적극 장려했다. 이는 유럽 여러 지역으로 포도 재배가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로마에서 와인이 처음 문헌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121년이다. 초기 로마에서는 여성이 와인을 마시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를 어기면 사형에 처해졌다. 그 이유는 자녀를 낳는 어머니인 여성이 '와인'이라는 이질적인 피를 마시는 것은 부정행위나 마찬가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 시대에는 와인이 매우 고가품으로 애용되었으며, 제정기가 되면서 누구나 손쉽게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아진 여성도 이때부터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393년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된 기독교에서는 와인이 예수의 거룩한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 미사에 이용되었다. 마치 포도즙이 와인으로 바뀌듯이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본문 260-261쪽)
이발사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때부터 존재해 있었다. 영어에서 이발사를 '바버(barber)'라고 하는데, 이것은 수염을 의미하는 라틴어 '바루바(barba)'에서 유래된 말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칼날을 취급하는 면도사가 외과의사를 겸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외과의학이라는 별도의 학문 분야가 없었다. 외과의사는 이발사를 겸하는 천한 직업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면도를 할 뿐만 아니라 머리도 깎고, 피를 빼내는 일을 했으며, 종기도 째고 고름을 짜내는 등 외과의사의 역할을 대신했다.
중세 시대에는 진통제도 마취약도 없었으므로, 외과수술은 고문보다도 훨씬 끔찍하였다. 환자의 몸을 쇠사슬로 묶은 후 외과의사(이발사)는 톱, 망치 등을 써서 무지막지하게 수술한 후, 빨갛게 달군 인두로 상처를 지져서 지혈을 하였다. 수술 도중 환자가 죽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오늘날 이발소의 앞에는 빨강, 파랑, 하양의 3색 나선상 간판이 있는데, 이것은 빨강이 동맥, 파랑이 정맥, 하양이 붕대를 의미한다. 급한 응급 환자가 다쳤을 경우 병원(이발소)의 위치가 눈에 잘 들어오도록 세 가지 색을 가진 간판을 내건 것이다. 그 간판이 바로 삼색등의 시초이다.
외과의학이 천한 직업에서 학문의 한 분야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파레(Ambroise Pare)의 공이 컸다. '근대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파레는 여러 이발소들을 전전하면서 외과 의술을 배웠고, 파리에서 공부한 후 정식으로 외과의사가 되었다. 당시 프랑스를 통치하던 프랑수아 1세는 주변국과 잦은 전쟁을 일으켰는데, 파레는 군에 종군하는 군의가 되어 전쟁 때마다 부대를 따라다니면서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또한 그는 환자의 고통을 줄이고 효과를 높일 수 있는 여러 치료법을 개발했다. 인두로 지져서 상처를 지혈하는 난폭한 방법 대신에 새로운 지혈법을 개발했으며, 처음으로 틀니, 의안, 의족 등을 고안하기도 하였다.
이발사와 외과의사가 분리된 것은 18세기 이후이다. 그 후 이발사는 수염과 머리만을 취급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발사의 주 업무가 수염을 깎는 것으로부터 머리를 깎는 것으로 옮겨지게 된 것은 안전 면도기가 출현한 20세기 이후부터이다.(본문 262-264쪽)
중세 대학은 그리스 로마 문명 쇠퇴 후 지적 생활을 부활시키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대학(University)이라는 말은 길드란 뜻으로, 원래 '전체'라는 의미의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에서 유래하였다. 실제로 교육을 위한 길드라고 볼 수 있다.
중세 전반기의 학문과 교육의 중심은 수도원이었다. 대학은 12세기 이후 수도원의 부속학교(Schola)로서 더욱 발전하였다. 당시 중세 대학의 교육 과정은 7개 자유교과목으로, 초기의 유명한 대학으로는 볼로냐 대학과 파리 대학을 꼽을 수 있다. 파리 대학은 교수 조합, 볼로냐 대학은 학생 조합으로 이루어져 다른 대학의 모범이 되었다. 특히 볼로냐 학생들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생활의 안정과 협조를 위해 조합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볼로냐 대학은 학생 조합이 교칙 및 학과목을 정하고 교사를 임명하였다. 그들은 교수들이 수업료만큼의 강의를 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조직을 만들었고, 방세 및 식비를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중세 대학으로 공부하러 온 학생들은 조합(길드)을 만들어 하숙비나 학비 인하를 학교 측과 교섭하기도 했다. 그들은 교수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투쟁도 서슴지 않았다. 교수에 대한 학생들의 투쟁 수단은 집단적인 수업 포기, 곧 '등교 거부'였다. 당시의 대학에서 교수는 학생 집단이 내는 수업료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수업 거부는 교수의 생계를 위협하는 것이었다.(본문 313-315쪽)
목차
목차
머리말
ㄱ
갈릴레이│갈릴레이는 왜 목성의 위성을 '메디치의 별'로 불렀을까?
감자│아일랜드의 감자에는 통한의 역사가 담겨 있다
갑골문자│갑골문자는 왜 동물 뼈에 새겨졌을까?
게릴라│게릴라의 원조는 스페인에서 시작되었다
고대 올림픽│고대 올림픽 참가자는 왜 알몸으로 참가했을까?
골프│골프의 최초 발상지는 중국이다?
공자│공자 노자 등에 '자(子)'를 붙이는 이유는?
과거 시험│중국의 과거 시험장에도 커닝이 있었다
그레고리력│달력에서 1582년 열흘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스 시인│고대 그리스 시인은 왜 장님이 되었을까?
금과 은│고대 바빌로니아는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을 어떻게 정했을까?
ㄴ
낙하산│낙하산이 비행기보다 먼저 발명되었다
네로│악마의 숫자 666은 네로 황제이다?
넬슨│바다의 사나이 넬슨 제독은 평생 배 멀미로 고생했다
노스트라다무스│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는 가짜 화장품을 만들었다
뉴턴│뉴턴은 경쟁자를 매장한 명예욕의 화신이었다
ㄷ
단두대│단두대의 기원은 프랑스 혁명이 아니다
단테│단테는 왜 3이라는 숫자에 집착했을까?
돈키호테│소설 <돈키호테>는 왜 금서(禁書)가 되었나?
돔구장│최초의 돔구장은 로마의 콜로세움이다
동방견문록│<동방견문록>에 나오는 황금의 나라는 어디일까?
동성애자 군대│고대 그리스 테베에는 동성애자로 구성된 군대가 있었다
돼지고기│이슬람교도는 왜 돼지고기를 먹지 않을까?
디오게네스│디오게네스는 고향에서 가짜 돈을 만들었다
ㄹ
라마단│이슬람의 라마단은 왜 매년 바뀌는 것일까?
러시아 정교회│러시아 정교회는 술이 만들어준 국교였다
런던탑│런던탑의 까마귀가 사라지면 영국은 망한다?
로제타석│천재 언어학자가 4천년 이집트의 수수께끼를 풀다
루이 14세│태양왕 루이 14세는 최고의 발레 무용수였다
루터│종교개혁가 루터의 아내는 수녀였다
ㅁ
마리 앙투아네트│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 앞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마술피리│모차르트의 <마술피리>는 프리메이슨의 의식을 반영한 오페라이다
만년필│계약을 망친 보험 외판원이 만년필의 역사를 바꾸었다
만리장성│만리장성의 벽돌은 밥풀로 붙여진 것이다?
만우절│만우절은 왜 4월 1일이 되었을까?
맨해튼 섬│맨해튼 섬을 통째로 사들이는 데는 24달러에 불과했다
면죄부│구텐베르크는 돈을 벌기 위해 '면죄부'를 찍어냈다
모나리자│모나리자의 얼굴에는 왜 눈썹이 없을까?
모세상의 뿔│미켈란젤로의 모세상에는 왜 뿔이 달려 있을까?
모헨조다로│인류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은 모헨조다로에 있었다
목화 조면기│남북전쟁을 일으킨 주범은 목화 조면기였다
문어│게르만 민족은 왜 문어를 먹지 않을까?
미국 황제│샌프란시스코에는 미국의 초대 황제가 있었다
미라│이집트인들은 미라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밀로의 비너스│밀로의 비너스는 황금비율로 만들어졌다
ㅂ
바벨탑 1│바벨탑은 실제로 존재한 건축물이었다?
바벨탑 2│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왜 바벨탑의 재건을 포기했을까?
바이킹│러시아 건국의 주인은 바이킹이다
번지점프│번지점프는 성인이 되기 위한 전통 의식이다
베르사유 궁│베르사유 궁에는 화장실이 없다?
베살리우스│최초의 해부학자는 시체 절도범이었다
베토벤│베토벤은 왜 영웅교향곡을 나폴레옹에게 바치지 않았나?
보이콧│보이콧은 아일랜드인의 보이콧으로 쫓겨났다
비키니│비키니는 원자폭탄을 실험한 섬에서 따왔다
ㅅ
사마천│사마천은 왜 궁형(宮刑)을 택했을까?
삼장법사│서유기의 모델 삼장법사는 위대한 번역가였다
설교 대행소│중세 유럽에는 설교를 대신해 주는 대행소가 있었다
성공회│영국 성공회는 이혼 금지에 반발하여 탄생했다
성모 마리아│성모마리아는 왜 파란색 옷을 입고 있을까?
성유물│토마스 아퀴나스의 시신은 왜 냄비에 삶아졌을까?
소금│고대 로마 병사의 월급은 소금이었다
소년 십자군│소년 십자군은 노예로 팔리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소크라테스│소크라테스는 영원한 백수였다?
수에즈 운하│최초의 수에즈 운하는 페르시아 제국이 만들었다
수염세│수염을 깎지 않는 자에게는 세금을 징수하라
스핑크스의 코│스핑크스의 코는 왜 사라졌을까?
신분증명제│최초의 신분증명제는 고해성사에서 시작되었다
십자군│십자군 원정길에는 매춘부도 동행했다
ㅇ
아담의 사과│아담의 사과는 밀턴의 실낙원에서 처음 등장했다
아라비안나이트│<아라비안나이트>는 왕의 분노를 풀기 위해 탄생했다
아마존│아마존의 기원은 스키타이 유목 민족이었다
알렉산드로스│알렉산드로스의 유언에는 철학이 담겨 있다
알렉산드리아│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책은 어떻게 모았을까?
에디슨의 전구│에디슨의 전구를 만든 것은 동양의 부채였다
에펠탑│철거 위기에 놓인 에펠탑을 구한 것은 라디오였다
엘리자베스│엘리자베스 여왕은 왜 평생 독신으로 살았을까?
연│인류 최초의 비행 도구는 '연'이었다
오케스트라│오케스트라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
올림픽│올림픽은 왜 1500년 동안 중단되었을까?
와인│로마에서 와인을 마시는 여성은 사형에 처해졌다
외과의사│중세 유럽의 외과의사는 이발사였다
용병│중세 유럽은 용병들의 천국이었다
우편│중세 유럽의 민영 우편은 푸줏간에서 시작되었다
유목제국│거대 유목제국을 탄생시킨 것은 '재갈'과 '고삐'였다
이반 4세│코끼리도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대가를 치러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꼬마 소녀의 부탁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태어났다
1달러 지폐│1달러 지폐에는 왜 피라미드가 그려져 있을까?
일부다처제│이슬람 남성은 네 명의 아내를 가질 수 있다?
잉카 제국│잉카 제국은 왜 멸망했을까?
ㅈ
자유의 여신상│자유의 여신상의 모델은 조각가의 어머니다
장미 문장│왜 영국 왕실의 문장에는 장미가 그려져 있을까?
전족│중국 여자에게 발은 생명보다 더 소중하다?
점성술사│점성술사의 달력에는 예언이 담겨 있다
점자│브라유 점자는 어린 아이가 발명했다
정조대│19세기 유럽에는 남성용 정조대가 있었다
좌파·우파│좌파·우파라는 말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July│7월은 왜 July가 되었을까?
중세 대학 1│12세기 유럽 대학에는 등록금 인하 투쟁이 있었다
중세 대학 2│초기 유럽의 대학에서는 교수가 학생에게 충성 서약을 했다
조르다노 브루노│내 몸이 화형에 처해져도 나의 이론은 변함이 없다
ㅊ
청바지의 유래│청바지는 텐트용 천막에서 시작되었다
초야권│결혼을 앞둔 신부는 영주에게 '처녀'를 받쳐야 한다?
최초의 병원│최초의 병원은 순례자를 위한 숙박소였다
최초의 세계대전│인류 최초의 세계 대전은 카탈로니아 전투이다
7대 불가사의│고대 '7대 불가사의'는 어떻게 선정되었을까?
ㅌ
타지마할│타지마할은 최고의 건축가가 참여한 글로벌 프로젝트이다
통조림│통조림은 나폴레옹이 현상 공모한 발명품이다
ㅋ
커피│로마 교황이 커피에게 세례를 내리다
커피하우스│보험회사는 커피하우스에서 탄생했다
코페르니쿠스│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클레오파트라│클레오파트라는 문학과 외국어에도 뛰어난 만능 탤런트였다
ㅍ
파나마 운하│파나마 운하가 건설된 것은 한 장의 우표 때문이었다
파르테논 신전│파르테논 신전에는 직선이 없다
파스퇴르│파스퇴르와의 의리를 위해 자살을 선택하다
프랑스의 상징│프랑스의 상징은 왜 닭이 되었을까?
프린스 오브 웨일스│영국의 황태자를 왜 '프린스 오브 웨일스'라고 할까?
플라톤│플라톤의 꿈은 레슬링 선수였다?
피라미드│피라미드는 왜 정사각뿔로 만들어졌을까?
ㅎ
학사모│학사모는 왜 사각으로 만들었을까?
함무라비 법전│탈리오 법칙의 원조는 함무라비 법전이다
향신료│중세 유럽인은 왜 향신료에 열광했을까?
허니문│허니문은 신부를 훔쳐 도망치는 약탈혼에서 시작되었다
헤어스타일│중국의 지배는 헤어스타일에 따라 좌우되었다
홍차│미국 독립운동의 씨앗은 '홍차'였다
환관│환관은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흑사병│흑사병을 물리치기 위해 기발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희망봉│희망봉의 원래 이름은 '폭풍의 곶'이었다
ㄱ
갈릴레이│갈릴레이는 왜 목성의 위성을 '메디치의 별'로 불렀을까?
감자│아일랜드의 감자에는 통한의 역사가 담겨 있다
갑골문자│갑골문자는 왜 동물 뼈에 새겨졌을까?
게릴라│게릴라의 원조는 스페인에서 시작되었다
고대 올림픽│고대 올림픽 참가자는 왜 알몸으로 참가했을까?
골프│골프의 최초 발상지는 중국이다?
공자│공자 노자 등에 '자(子)'를 붙이는 이유는?
과거 시험│중국의 과거 시험장에도 커닝이 있었다
그레고리력│달력에서 1582년 열흘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스 시인│고대 그리스 시인은 왜 장님이 되었을까?
금과 은│고대 바빌로니아는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을 어떻게 정했을까?
ㄴ
낙하산│낙하산이 비행기보다 먼저 발명되었다
네로│악마의 숫자 666은 네로 황제이다?
넬슨│바다의 사나이 넬슨 제독은 평생 배 멀미로 고생했다
노스트라다무스│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는 가짜 화장품을 만들었다
뉴턴│뉴턴은 경쟁자를 매장한 명예욕의 화신이었다
ㄷ
단두대│단두대의 기원은 프랑스 혁명이 아니다
단테│단테는 왜 3이라는 숫자에 집착했을까?
돈키호테│소설 <돈키호테>는 왜 금서(禁書)가 되었나?
돔구장│최초의 돔구장은 로마의 콜로세움이다
동방견문록│<동방견문록>에 나오는 황금의 나라는 어디일까?
동성애자 군대│고대 그리스 테베에는 동성애자로 구성된 군대가 있었다
돼지고기│이슬람교도는 왜 돼지고기를 먹지 않을까?
디오게네스│디오게네스는 고향에서 가짜 돈을 만들었다
ㄹ
라마단│이슬람의 라마단은 왜 매년 바뀌는 것일까?
러시아 정교회│러시아 정교회는 술이 만들어준 국교였다
런던탑│런던탑의 까마귀가 사라지면 영국은 망한다?
로제타석│천재 언어학자가 4천년 이집트의 수수께끼를 풀다
루이 14세│태양왕 루이 14세는 최고의 발레 무용수였다
루터│종교개혁가 루터의 아내는 수녀였다
ㅁ
마리 앙투아네트│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 앞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마술피리│모차르트의 <마술피리>는 프리메이슨의 의식을 반영한 오페라이다
만년필│계약을 망친 보험 외판원이 만년필의 역사를 바꾸었다
만리장성│만리장성의 벽돌은 밥풀로 붙여진 것이다?
만우절│만우절은 왜 4월 1일이 되었을까?
맨해튼 섬│맨해튼 섬을 통째로 사들이는 데는 24달러에 불과했다
면죄부│구텐베르크는 돈을 벌기 위해 '면죄부'를 찍어냈다
모나리자│모나리자의 얼굴에는 왜 눈썹이 없을까?
모세상의 뿔│미켈란젤로의 모세상에는 왜 뿔이 달려 있을까?
모헨조다로│인류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은 모헨조다로에 있었다
목화 조면기│남북전쟁을 일으킨 주범은 목화 조면기였다
문어│게르만 민족은 왜 문어를 먹지 않을까?
미국 황제│샌프란시스코에는 미국의 초대 황제가 있었다
미라│이집트인들은 미라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밀로의 비너스│밀로의 비너스는 황금비율로 만들어졌다
ㅂ
바벨탑 1│바벨탑은 실제로 존재한 건축물이었다?
바벨탑 2│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왜 바벨탑의 재건을 포기했을까?
바이킹│러시아 건국의 주인은 바이킹이다
번지점프│번지점프는 성인이 되기 위한 전통 의식이다
베르사유 궁│베르사유 궁에는 화장실이 없다?
베살리우스│최초의 해부학자는 시체 절도범이었다
베토벤│베토벤은 왜 영웅교향곡을 나폴레옹에게 바치지 않았나?
보이콧│보이콧은 아일랜드인의 보이콧으로 쫓겨났다
비키니│비키니는 원자폭탄을 실험한 섬에서 따왔다
ㅅ
사마천│사마천은 왜 궁형(宮刑)을 택했을까?
삼장법사│서유기의 모델 삼장법사는 위대한 번역가였다
설교 대행소│중세 유럽에는 설교를 대신해 주는 대행소가 있었다
성공회│영국 성공회는 이혼 금지에 반발하여 탄생했다
성모 마리아│성모마리아는 왜 파란색 옷을 입고 있을까?
성유물│토마스 아퀴나스의 시신은 왜 냄비에 삶아졌을까?
소금│고대 로마 병사의 월급은 소금이었다
소년 십자군│소년 십자군은 노예로 팔리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소크라테스│소크라테스는 영원한 백수였다?
수에즈 운하│최초의 수에즈 운하는 페르시아 제국이 만들었다
수염세│수염을 깎지 않는 자에게는 세금을 징수하라
스핑크스의 코│스핑크스의 코는 왜 사라졌을까?
신분증명제│최초의 신분증명제는 고해성사에서 시작되었다
십자군│십자군 원정길에는 매춘부도 동행했다
ㅇ
아담의 사과│아담의 사과는 밀턴의 실낙원에서 처음 등장했다
아라비안나이트│<아라비안나이트>는 왕의 분노를 풀기 위해 탄생했다
아마존│아마존의 기원은 스키타이 유목 민족이었다
알렉산드로스│알렉산드로스의 유언에는 철학이 담겨 있다
알렉산드리아│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책은 어떻게 모았을까?
에디슨의 전구│에디슨의 전구를 만든 것은 동양의 부채였다
에펠탑│철거 위기에 놓인 에펠탑을 구한 것은 라디오였다
엘리자베스│엘리자베스 여왕은 왜 평생 독신으로 살았을까?
연│인류 최초의 비행 도구는 '연'이었다
오케스트라│오케스트라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
올림픽│올림픽은 왜 1500년 동안 중단되었을까?
와인│로마에서 와인을 마시는 여성은 사형에 처해졌다
외과의사│중세 유럽의 외과의사는 이발사였다
용병│중세 유럽은 용병들의 천국이었다
우편│중세 유럽의 민영 우편은 푸줏간에서 시작되었다
유목제국│거대 유목제국을 탄생시킨 것은 '재갈'과 '고삐'였다
이반 4세│코끼리도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대가를 치러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꼬마 소녀의 부탁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태어났다
1달러 지폐│1달러 지폐에는 왜 피라미드가 그려져 있을까?
일부다처제│이슬람 남성은 네 명의 아내를 가질 수 있다?
잉카 제국│잉카 제국은 왜 멸망했을까?
ㅈ
자유의 여신상│자유의 여신상의 모델은 조각가의 어머니다
장미 문장│왜 영국 왕실의 문장에는 장미가 그려져 있을까?
전족│중국 여자에게 발은 생명보다 더 소중하다?
점성술사│점성술사의 달력에는 예언이 담겨 있다
점자│브라유 점자는 어린 아이가 발명했다
정조대│19세기 유럽에는 남성용 정조대가 있었다
좌파·우파│좌파·우파라는 말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July│7월은 왜 July가 되었을까?
중세 대학 1│12세기 유럽 대학에는 등록금 인하 투쟁이 있었다
중세 대학 2│초기 유럽의 대학에서는 교수가 학생에게 충성 서약을 했다
조르다노 브루노│내 몸이 화형에 처해져도 나의 이론은 변함이 없다
ㅊ
청바지의 유래│청바지는 텐트용 천막에서 시작되었다
초야권│결혼을 앞둔 신부는 영주에게 '처녀'를 받쳐야 한다?
최초의 병원│최초의 병원은 순례자를 위한 숙박소였다
최초의 세계대전│인류 최초의 세계 대전은 카탈로니아 전투이다
7대 불가사의│고대 '7대 불가사의'는 어떻게 선정되었을까?
ㅌ
타지마할│타지마할은 최고의 건축가가 참여한 글로벌 프로젝트이다
통조림│통조림은 나폴레옹이 현상 공모한 발명품이다
ㅋ
커피│로마 교황이 커피에게 세례를 내리다
커피하우스│보험회사는 커피하우스에서 탄생했다
코페르니쿠스│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클레오파트라│클레오파트라는 문학과 외국어에도 뛰어난 만능 탤런트였다
ㅍ
파나마 운하│파나마 운하가 건설된 것은 한 장의 우표 때문이었다
파르테논 신전│파르테논 신전에는 직선이 없다
파스퇴르│파스퇴르와의 의리를 위해 자살을 선택하다
프랑스의 상징│프랑스의 상징은 왜 닭이 되었을까?
프린스 오브 웨일스│영국의 황태자를 왜 '프린스 오브 웨일스'라고 할까?
플라톤│플라톤의 꿈은 레슬링 선수였다?
피라미드│피라미드는 왜 정사각뿔로 만들어졌을까?
ㅎ
학사모│학사모는 왜 사각으로 만들었을까?
함무라비 법전│탈리오 법칙의 원조는 함무라비 법전이다
향신료│중세 유럽인은 왜 향신료에 열광했을까?
허니문│허니문은 신부를 훔쳐 도망치는 약탈혼에서 시작되었다
헤어스타일│중국의 지배는 헤어스타일에 따라 좌우되었다
홍차│미국 독립운동의 씨앗은 '홍차'였다
환관│환관은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흑사병│흑사병을 물리치기 위해 기발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희망봉│희망봉의 원래 이름은 '폭풍의 곶'이었다
저자
저자
조병일
저자 조병일은 서울대 중문과와 동 대학원 중문과를 졸업했다. 지은 책으로는 <모택동 전기>(공저), <세계사 오류 사전>이 있고, <중국 어업 협정 관련 법전>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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