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은 사선으로 튄다(우리시 시인선 58)
윤순호 시집
윤순호 시인의 작품 세계는 크게 둘로 구분된다. 이 둘은 시간상으로 과거와 현재, 즉 어린 시절 고향 농촌에서 보냈던 기억의 시편과 그곳을 떠나 도시에 살면서 주변 풍경을 그린 시편이다. 이 둘의 관계를 기계적인 방식으로 규명할 수는 없으나,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삶에 깔려 있음이 분명하다. 도시 주변부를 절제 미학으로 그 린 시의 저변에는 기억 속의 풍경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둘의 관계에 대해 시 「동창회」에서 비유적으로 암 시하고 있다. 검버섯 나이에 시골에서 함께 자란 초등학교 동창들이 대부도로 관광버스를 타고 동창회에 간 듯하다. 동창회라는 것이 추억으로 하나가 되는 것 인데, 행사를 마치고 서로 버스 이별을 하면서 눈매가 그렁그렁하다는 표현과 함께 “갈라논 민물과 바닷물 도/ 닿을 듯 닿을 듯 애를 태우고/ 시퍼렇게 출렁이는 발싸심만 둑에 닿는다”라고 맺고 있다. 여기서 발싸심 이란 어떤 일을 하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고 들먹거리며 애를 쓰는 짓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아마 대 부도에 민물과 바닷물을 갈라놓은 제방이 있어 양쪽 의 물이 출렁대는 것을 서로 닿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모습으로 비유한 듯하다. 민물과 바닷물이 그리움으로 몸부림치는 것, 기억과 풍경 사이에서 무한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요동치고 있어, 시인의 내면에 출렁 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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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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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으로 이어서]
도시의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노년에 생계가 막막한 할머니가 불편한 몸으로 폐휴지 수레를 끄는 장면이다. 2연에서 보면, 아들의 모습은 보이질 않고, 며느리는 피붙이를 시어머니에게 팽개치고 밤 봇짐을 싼 듯하다. 할머니를 길거리로 내몬 것은 할머니 와 어린 피붙이의 죽음보다 더 무서운 생존의 절박함 이다. 마지막 장면 "땅거미가 다가와 둥근 노인을 끌고 있다"라는 언술 속에 기억 속의 고향에서 기나긴 콩밭 이랑을 타시던 어머니의 뒷모습, 둥근 등과 겹쳐 보인 다. 시인은 애잔한 마음을 누르면서 담담하게 밑그림 을 그리고, 그림의 여백을 상상으로 메운다. 시인은 도시 주변의 삶을 독자에게 사실적으로 보여 준다. 경로당 노인들이 봄철을 당하여 거리 벚꽃 아래 도열하듯 앉아 있고, 도시 길거리의 좌판, 억새 축제의 현장, 고층 상가의 등쌀에 밀려나는 골목 가게, 홀몸인 국학원장 뷔페식당 나들이, 술집에 도열해 있는 공병 들, 변두리 장례식장, 치킨집의 폐업, 종각역 부근의 노인들만 출입하는 이발소, 부부가 함께하는 수선집, 갈월동 쪽방촌 독거노인, 슈퍼 앞 파라솔 아래에서의 노년의 사랑, 고가철도 아래 닭비둘기, 새 축에도 끼지 못 하는 도시의 참새, 중랑천의 산란기를 맞이한 잉어, 골목 막다른 기와집에서 나온 골동품 등을 보여준다. 이밖에도 이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사물시의 형태를 띠 고 있는 겨울철 서릿발 아파트, 효자손, 매화, 전봇대, 의류 수거함, 선풍기, 분재 등이 등장한다. 이것들은 도시 주변의 일상적 풍경이다. 시의 대상이 황혼기를 맞이한 노인이거나 도시의 삶에서 소외되거나 낙오된, 힘없는 자들이다. 시의 대상이 사물인 경우, 특별할 것이 없는 것들이 도시나 집안의 한쪽 구석을 조용히 차지하고 있다. 왜 시인의 시선이 도시의 삶에서 소외되고 무시되는 인물이나 사물에 가 닿는가? 이들은 존재의 빛을 발하는 영광의 산물이 아니라 점점 사라져갈 운명에 처한 것들로 시인이 각별하게 이들에게 애정을 쏟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기억의 시편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 한다. 가난한 고향을 갈등 없이 껴안은 시인의 포근함 에 답이 있을 거로 생각한다. 기억 속의 고향의 원만하고 포근함으로 도시 주변의 파편화된 타인의 삶을 껴안으려는 시인의 자세다. 특이한 점은 도시 주변 풍경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 이다. 시인은 소설로 치자면 3인칭 관찰자 시점을 유지하며 사실주의적인 시각을 견지한다. 이점이 화자의 자의식이 넘쳐나는, 사물을 화자의 시각에 의해 굴절 된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여느 현대시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시인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그대로 전달하거나 그려 보이며 약간의 정서적 반응을 짧게 피력할 뿐이다. 급기야는 다음 시와 같은 변형된 모습으로 사 물로 주체를 대체한다.
종이컵이 소주를 챙겨 낚시가방을 꾸렸다
날밤을 시조始釣로 택한 것은 꼭두새벽 월척의 시장기
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별이 이슥해서 으슬으슬 밤공기를 데우느라 소주가
생라면을 으스러뜨렸다
일출이 안개 양탄자를 깔 때까지 월척은 응답이 없음으
로 시조는 빈 구럭만 챙겼을 뿐이다
남은 지렁이가 추위를 돌돌 말아 낙엽 속으로 길 때 취
기가 흐물흐물한 컵은 거꾸로 처박혔다 월척을 만나지 못한 종이컵이 버드나무 아래서 길을 잃
은 것
흘린 라면 부스러기가 새들을 낚고 있다
― 「낚시」 전문
이 시는 낚시터 풍경이다. 날밤을 꼬박 새웠으나 고 기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허탕을 쳤다. 그런데 이 시 는 첫 연부터 통상적인 문법과는 이질적이다. 낚시가방 을 꾸린 것은 사람일 터인데 종이컵이 소주를 챙기고 낚시가방을 꾸렸다고 한다. 주체 자리에 인물이나 화자는 뒤로 빼지고 당돌한 종이컵이 떡하니 앉아 있다. 화자가 낚시가방을 챙길 때 모처럼 출조出釣의 설렘이 나 기대를 싹둑 잘라버리고 그 자리에 멍텅구리 종이컵을 주체 자리에 앉히면, 주체로서 화자는 정서의 출 구를 봉쇄당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화법은 이 시의 연마다 나타난다. 주체를 사물로 대치하는 극단적인 선택이다. 또한 시인은 시집 전편에서 환유적인 수법을 간간이 사용한다. 예를 들면, "알반지가 손지갑 지퍼로 마음 을 열었다"(시 「수작酬酌」)에서 마음을 연 주체는 어디 까지나 '알반지(를 낀 여인네)'일 것이다. 그런데 알반 지가 사람을 대신하여 마음을 열었다고 말한다. 이것 은 인물이나 화자의 의식이 개입하는 것을 회피하는 현 상이다. 이러한 시의 경향은 급기야 시 「빨래집게」, 「전봇대」, 「의류 수거함」, 「선풍기」 등의 사물시에 이르면 더욱 두드러져 아예 사물이 주체 자리를 독차지하고 있다. 숫 제 인물은 보이지 않고 사물이 의인화되어 주체처럼 행동하고 의식한다. 이런 시에서 화자의 의식은 끼어들 틈새가 없다. 시인이 주체인 화자의 의식을 극도로 억 제하고 있다. 시인은 이와 같은 시작의 비밀을 발설한 적이 없다. 이 시집 전편을 샅샅이 뒤져도 그것을 밝힐 만한 단서를 찾을 수 없다. 다만 유추 해석하자면, 시인들의 자 의식이 넘쳐 사물을 왜곡되게 그리고 있는 현대시의 반동으로 보인다. 서구의 시가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 사실주의를 거쳐 현대시에 이르면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주지주의를 통과하면서 시인의 의식이 강조되고, 몽상적으로 비뚤어지고, 사물의 실상이 왜곡되면서 눈에 보이는 풍경마저 온전히 그릴 수 없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한시漢詩의 전통만 하더라도 온전한 풍경 속에 시인의 정조가 배여 있는데, 현대시에서는 풍경이 풍경으로 자리잡기가 매우 협소해졌다. 시인의 기억은 온전한 공동체적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시인은 도시 주변의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서도 되도록 이지러지지 않는 모습으로 온전히 그리고자 한 다. 이런 열망으로 시인은 화자의 의식을 억제하는 외 부 관찰자 시각을 고수하고 있는 듯하다.
맛과 시, 또는 시의 맛
끝으로 여담이지만 시인은 탁월한 미식가이다. 미식가와 식도락가는 물론 다르다. 식도락가는 먹는 것 자 체를 즐기는 자이지만, 미식가는 음식에 대해 특별한 기호를 가진 사람이다. 그가 추천하는 먹거리는 항상 신뢰할 만하며, 그의 삶에서 이것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그러나 시인의 구미를 당기는 먹거리는 소 위 내로라하는 미식가들의 일반적 취향과는 사뭇 다르다. 그가 찾는 곳은 버젓한 일류 식당가가 아니라 허름한 뒷골목, 음식 냄새가 진동하는 서민풍이다. 한마디로 그가 탐하는 먹거리는 고향의 맛이다. 그의 맛에 관 한 시 한 편을 보기로 하자.
숭숭 풋고추가 무친 조개젓 비린
아침 식탁에
가물가물 몽쇠 아재가 궁금하다
댓잎 서리꽃 지는
두레박 우물가
뽀얀 입김이 세수를 망설이는 참
빡빡머리에 수건 졸라매고
몽쇠 아재 까만 얼굴이
탱자 울 사립 밖에 지게를 바친다
젓 비린내
통째로 곰삭고 있는 바지게,
"젓장시 왔어라오!"
쇠죽솥 아침 살피던 아버지
환한 반색이 허리춤을 추스린다
"요놈이 오늘 심심허요,
풋고치 매운 놈 썰어 쪼물락쪼물락 허믄…"퉤퉤, 지전에 붙은 아침재수를
정수리에 쓱쓱 쓸어 담는 마수걸이
맨발 짚신이 질척질척하여라
누런 이가 합죽하게 웃는 아재
- 「몽쇠 아재」 전문
먹거리 '조개젓'에 관한 내력 있는 이야기다. 화자 가 숭숭 풋고추를 썰어 무친 비린내 나는 조개젓이 차려진 아침 식탁을 대하면서 기억 속의 젓장수 몽쇠 아 재를 불러낸다. 조개젓의 비린 듯 알싸하게 짠맛이 그 의 미각을 돋우는데, 이 남도의 싸한 미각은 투박한 말맛과 곁들여야 더욱 감칠맛이 난다. 조개젓은 '몽쇠 아 재'라는 짜리몽땅하고 단단한,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름과 '댓잎 서리꽃', '두레박 우물가', '탱자 울 사립', '바지게' 등의 배경과 '곰삭다', '젓장시', '쇠죽솥', '요 놈이 오늘 심심허요, 풋고치 매운 놈을 썰어 쪼물락쪼 물락 허믄…' 이란 토속어들과 함께 무쳐야 그 맛이 제 대로 살아난다. 그의 미각은 그가 쓰는 말과 떼래야 뗄 수 없다. 오늘날 마트에서 중국산 조개젓을 사다가 아 파트 부엌에서 비닐장갑 낀 손으로 온갖 양념 듬뿍 넣고 버무려 유리그릇에 내놓은들 과연 그 맛이 날까? 시인이 이 시집에서 추천하는 먹거리는 굴비, 두부, 붕어찜, 전어, 돔배젓, 홍어, 삶은 감자, 해우(김) 들이 다. 시인이 이런 먹거리를 탐한다는 것은 각박한 도시 의 삶에서 온전함으로 남아 있는 기억 속으로 떠남을 의미한다.
목차
목차
1부
세일 13
의자 14
선풍기 15
애늙은이 16
의류수거함 18
고무줄 20
병법兵法 22
전봇대 24
매화 26
효자손 28
수작酬酌 30
매물賣物 31
풍경 32
낚시 34
빨래집게 36
장례식장 38
수정아파트 40
2부
두부 45
가게 46
황혼 47
굴비窟非 48
검진 50
억새 52
스트레스 대리점 54
도시 공해 56
세밑 58
퇴촌 60
눈치 62
폐업 63
길 64
부부 66
소식消息 67
관계 68
전어 70
동참 72
잔치 74
3부
덧니 79
폭우 80
시궁창 82
부사리 84
독毒 86
꽃봉이 88
불구경 90
밤마실 92
해영아! 94
짝사랑 96
미나리꽝집 연가 98
가을 이야기 100
꽃징이 빈집 102
몽쇠 아재 104
동창회 106
성애 108
청맹과니 110
4부
여름 115
칠월 116
내력 118
날개 120
홍어 122
쌍가락지 124
낙관落款 126
해우 128
누님 전 상서 130
택배 132
형 134
나들이 136
기침 138
가을비 140
콩밭 142
어머니의 노래 144
신월리에 가면 146
해설 | 기억과 풍경 149
저자
저자
2016년 월간 《우리詩》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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