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의 낮잠(양장본 Hardcover)
적대와 정치
Regular price
$16.85
Sale price
Regular price
✈️
Estimated delivery date 예상 배송일
Standard Shipping
불러오는 중...
주문일로부터 8-12 영업일
Express Shipping
불러오는 중...
주문일로부터 6-8 영업일
사회학자 서동진, 그가 말하는 변증법적 부정의 정치학이란?
『변증법의 낮잠』은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라는 책을 통해 신자유주의 시대 강박적으로 자기계발에 매달리는 새로운 주체의 형성을 규명해냈던 사회학자 서동진. 그가 이번에는 ‘정치의 죽음’ 이라는 말로 설명되는 오늘 현실에서 사회변혁의 주체였던 인민들이 어떻게 자기이해의 충실한 시민이 되었는지를 시작으로 경제와 정치의 변증법적 종합을 시도하고 있다.
최악의 세계에 살고 있는 무력한 허무주의와 최선의 세계에 살고 싶다는 초조한 능동주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우리에게 그가 말하는 변증법적 부정의 정치학은 무엇인일까? 저자는 행복의 정치라는 긍정의 정치와 진리의 정치라는 순수한 부정의 정치, 두 가지의 유혹으로부터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유혹은 오늘날 우리가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는 정치에 관한 이론 그리고 실천을 통해 끊임없이 출현한다. 저자는 이 두가 유혹에 맞서 싸우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정치와 그것을 궁리하기 위한 물음들을 제시한다.
『변증법의 낮잠』은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라는 책을 통해 신자유주의 시대 강박적으로 자기계발에 매달리는 새로운 주체의 형성을 규명해냈던 사회학자 서동진. 그가 이번에는 ‘정치의 죽음’ 이라는 말로 설명되는 오늘 현실에서 사회변혁의 주체였던 인민들이 어떻게 자기이해의 충실한 시민이 되었는지를 시작으로 경제와 정치의 변증법적 종합을 시도하고 있다.
최악의 세계에 살고 있는 무력한 허무주의와 최선의 세계에 살고 싶다는 초조한 능동주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우리에게 그가 말하는 변증법적 부정의 정치학은 무엇인일까? 저자는 행복의 정치라는 긍정의 정치와 진리의 정치라는 순수한 부정의 정치, 두 가지의 유혹으로부터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유혹은 오늘날 우리가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는 정치에 관한 이론 그리고 실천을 통해 끊임없이 출현한다. 저자는 이 두가 유혹에 맞서 싸우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정치와 그것을 궁리하기 위한 물음들을 제시한다.
Couldn't load pickup availability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책 소개]
변증법이 긴 낮잠에 빠져 있다
그렇다면 깊은 망각 속에 잠든 변증법을
어떻게 깨울 것인가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사회 담론들-―예컨대 '피로사회' 등으로 불리는―에 앞서 2009년에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라는 책을 통해 신자유주의 시대에 강박적으로 자기계발에 매달리는 새로운 주체의 형성을 규명해냈던 사회학자 서동진은 이번에는 '정치의 죽음'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오늘의 현실에서 과거 사회변혁의 주체였던 인민이 어떻게 자기이해에 충실한 시민들로 개별화되었으며 민주주의란 것 또한 부정(否定)을 부정하는 체제유지의 알리바이로 전락하였는지를 따지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제대로 해명되어보지 못한 경제와 정치의 변증법적 종합을 시도한다. 최악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무력한 허무주의와 최선의 세계에 살고 싶다는 초조한 능동주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우리에게 그가 말하려는 변증법적 부정의 정치학은 무엇일까? 그는 브레히트를 빌려 '모순은 희망'이라고 말한다. 모든 일과 사물과 사람에게는 그것들을 지금의 상태로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고, 동시에 다르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 지금 있는 것들 안에는 현재에 적대적인 것들을 품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모순일 것이다. 오늘로 말하자면 그것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적 적대이고 이 모순이 정치의 장소이다. 모순에서 희망을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최선인 듯 보이는 세계와 최악인 듯 보이는 세계를 조율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은 새로이 발명되는 수밖에는 없다. 이 책은 그러한 분투의 소산이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행복과 힐링의 전도서로 전락한 인문사회과학에게 던지는 근원적 물음
그 어느 때보다 '구체적인 유토피아'를 만들자고 외치는 목소리가 도처에서 울려퍼지고 있다. 유토피아란 본디 지금 여기의 현실을 넘어서려는 정신과 행위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유토피아란 단어 앞에 '구체적인'이란 말이 슬그머니, 혹은 강박적으로 붙게 된 것일까? 그리하여 어떤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유토피아란 '지금 여기'에서 찾을 수 있는 대안이고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를테면 『백만 개의 조용한 혁명』이라는 어느 책 제목처럼, 누구나 자신의 자리에서 시도하고 실현할 수 있는 작은 유토피아적 기획이란 것은 끝도 없이 다양할 것이다. 마을 만들기, 밥상공동체, 협동조합, 공제조합, 셰어하우스, 대안은행 등에 이르는 '깨알 같은' 프로젝트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들을 가로지르는 정신은 아마도 '행복'일 것이다. 그렇다. 오늘의 현실은 너무 불행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장에라도 힐링을 받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안달이고, 영원히 불행에 머물까봐 행복할 방도를 찾기 위해 더없이 초조하다. 유토피아는 너무 멀리 있다. 민주주의는 너무 추상적이거나 공허하다. 그러므로 오늘의 불행을 거부하고 기꺼이 이룰 수 있는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거부할 도리가 없다. 행복과 힐링의 전도사로 변한 인문학자와 사회학자들이 넘쳐나는 까닭이다. 그들은 지금 여기에서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기꺼이 그래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현실적인 이상주의자'가 되자? 과연 그래도 좋은 것일까? 혹시 그것은 현실을 넘어서려는 유토피아의 정신을 영구히 무덤 속에 가두어두려는 자유주의적 헛소리이거나 치명적 사기가 아닐까?
행복은 노예들의 범주이다
행복을 꿈꾸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도 아니며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에 해당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긍정적 현실'은 적어도 정치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행복은 감각적으로 느끼고 상상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삶의 상태이다. 그것은 일종의 예언을 불러일으킨다. 예언을 위해 굳이 정치가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예언의 과학을 자처하는 지식들은 보험설계니 재무분석이니 하는 이름으로 온갖 변수를 고려하여 미래를 예언한다. 그들은 우리가 세계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일을 우리가 실현할 수 있는 삶의 상태의 문제로 환원한다. 예를 들어 의료보험이 건강이라는 행복과 죽음, 질병이라는 불행이 미래에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를 셈하듯이 말이다. 이렇듯 성인 남성 암 발병률 얼마를 들먹이며 실비보험에 가입하도록 강권하는 보험 광고 속에서 우리는 행복을 예언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불안하고 초조한 낯빛으로 보험상품을 살피는 이들보다 더 호모 사케르 같은 존재가 어디 있을까.
2014년 10월 8일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독자들과 슬라보예 지젝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독자 가운데 한 명이 "오늘날 행복은 중요한 걸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당신이라면 어떤 방법을 제안하겠습니까"라고 물음을 던졌다.
"행복이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게 아니다. 그것에 관해 꿈을 꾸는 것이다. 행복이란 기회주의자를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지극히 만족스러운 삶이란 영원한 투쟁의 삶, 특히 자신과 투쟁하는 삶이라 생각한다. …… 행복하게 지낼 양이면 쪼다로 살면 된다. 진정한 주인들이란 결코 행복하지 않다. 행복은 노예들의 범주이다."
지젝은 행복이란 '기회주의자들'에게나 알맞은 말이고 '노예들의 범주'일 뿐이라고 사납게 단정한다. 그것은 오래전 조지 오웰이 정치적 전략과 예언을 구분하려 했던 것과 의미가 닿는다. 오웰은 행복이란 사회주의적 전략의 부산물일 수는 있어도 목표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은 인류애의 실현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원하는 것을 얻는 것과 꿈을 꾸는 것을 구분되어야 한다. 오웰이 그렇듯 지젝 역시 원하는 것을 얻는 게 아니라 꿈을 꾸는 것을 택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그가 말하는 꿈이란 주관적인 환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부정의 몸짓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정치란 불가능한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지상낙원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최종적인 목적을 설정하는 일이란 금지되어야 하며 영원한 운동과 부정이 있을 뿐이라고 억지를 부리려서는 안 된다. 다만 행복이 정치의 목표가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일 뿐이며, 행복이라는 정신을 통해 이뤄지는 우리 시대의 부정(否定) 아닌 부정, 그것의 백치 같은 면모를 깨닫지 않는 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정치란 불가능할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구체적인 삶의 현실이라는 감각성의 이쪽 세계와 자유와 평등이라는 본체적인 저쪽 세계 사이에 선을 긋고 그것을 넘어서려 시도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실은 아주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특히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 세계화의 압도적 현실 속에서 자본주의 너머의 세계는 초월적인 이상일 뿐 현실적인 계획으로 전환시키려는 순간 무모한 전체주의적 폭력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라는 비난은 우파 이데올로그들만이 아니라 자칭 좌파 정치-경제학자 사이에도 만연되어 있다. 이러한 현실은 또 다른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일체의 현실적인 삶을 변화시키려는 구체적 계획을 거부하고 오직 이상으로서의 진리 자체에 충실하여야 한다는 이른바 포스트 구조주의 이후의 정치철학자들의 주장은 오늘날 많은 이들을 매료시킨다. 존재자의 세계에 한 눈을 팔지 말고 존재적인 것에 대하여 굽힘없이 헌신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듣노라면 어딘지 숭고한 울림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이 역시 행복이라는 이상에 굴복하는 것 못잖게 공허하다. 위대한 부정의 몸짓을 찬미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 부정을 통해 어떤 세상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책임을 회피하고 기꺼이 궂은일을 마다치 않을 각오로부터 도망가는 것은 졸렬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의 유혹을 피해야 한다. 행복의 정치라는 긍정의 정치와 진리의 정치라는 순수한 부정의 정치, 두 가지 유혹 말이다. 이 두 가지의 유혹은 오늘날 우리가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는 정치에 관한 이론 그리고 실천을 통해 끊임없이 출현한다.
이 책은 이 두 가지 유혹에 맞서 싸우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정치와 그것을 궁리하기 위한 물음들을 제시하고 답하려 애쓴 시도이자 기록이다.
변증법이 긴 낮잠에 빠져 있다
그렇다면 깊은 망각 속에 잠든 변증법을
어떻게 깨울 것인가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사회 담론들-―예컨대 '피로사회' 등으로 불리는―에 앞서 2009년에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라는 책을 통해 신자유주의 시대에 강박적으로 자기계발에 매달리는 새로운 주체의 형성을 규명해냈던 사회학자 서동진은 이번에는 '정치의 죽음'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오늘의 현실에서 과거 사회변혁의 주체였던 인민이 어떻게 자기이해에 충실한 시민들로 개별화되었으며 민주주의란 것 또한 부정(否定)을 부정하는 체제유지의 알리바이로 전락하였는지를 따지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제대로 해명되어보지 못한 경제와 정치의 변증법적 종합을 시도한다. 최악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무력한 허무주의와 최선의 세계에 살고 싶다는 초조한 능동주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우리에게 그가 말하려는 변증법적 부정의 정치학은 무엇일까? 그는 브레히트를 빌려 '모순은 희망'이라고 말한다. 모든 일과 사물과 사람에게는 그것들을 지금의 상태로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고, 동시에 다르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 지금 있는 것들 안에는 현재에 적대적인 것들을 품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모순일 것이다. 오늘로 말하자면 그것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적 적대이고 이 모순이 정치의 장소이다. 모순에서 희망을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최선인 듯 보이는 세계와 최악인 듯 보이는 세계를 조율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은 새로이 발명되는 수밖에는 없다. 이 책은 그러한 분투의 소산이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행복과 힐링의 전도서로 전락한 인문사회과학에게 던지는 근원적 물음
그 어느 때보다 '구체적인 유토피아'를 만들자고 외치는 목소리가 도처에서 울려퍼지고 있다. 유토피아란 본디 지금 여기의 현실을 넘어서려는 정신과 행위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유토피아란 단어 앞에 '구체적인'이란 말이 슬그머니, 혹은 강박적으로 붙게 된 것일까? 그리하여 어떤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유토피아란 '지금 여기'에서 찾을 수 있는 대안이고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를테면 『백만 개의 조용한 혁명』이라는 어느 책 제목처럼, 누구나 자신의 자리에서 시도하고 실현할 수 있는 작은 유토피아적 기획이란 것은 끝도 없이 다양할 것이다. 마을 만들기, 밥상공동체, 협동조합, 공제조합, 셰어하우스, 대안은행 등에 이르는 '깨알 같은' 프로젝트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들을 가로지르는 정신은 아마도 '행복'일 것이다. 그렇다. 오늘의 현실은 너무 불행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장에라도 힐링을 받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안달이고, 영원히 불행에 머물까봐 행복할 방도를 찾기 위해 더없이 초조하다. 유토피아는 너무 멀리 있다. 민주주의는 너무 추상적이거나 공허하다. 그러므로 오늘의 불행을 거부하고 기꺼이 이룰 수 있는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거부할 도리가 없다. 행복과 힐링의 전도사로 변한 인문학자와 사회학자들이 넘쳐나는 까닭이다. 그들은 지금 여기에서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기꺼이 그래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현실적인 이상주의자'가 되자? 과연 그래도 좋은 것일까? 혹시 그것은 현실을 넘어서려는 유토피아의 정신을 영구히 무덤 속에 가두어두려는 자유주의적 헛소리이거나 치명적 사기가 아닐까?
행복은 노예들의 범주이다
행복을 꿈꾸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도 아니며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에 해당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긍정적 현실'은 적어도 정치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행복은 감각적으로 느끼고 상상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삶의 상태이다. 그것은 일종의 예언을 불러일으킨다. 예언을 위해 굳이 정치가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예언의 과학을 자처하는 지식들은 보험설계니 재무분석이니 하는 이름으로 온갖 변수를 고려하여 미래를 예언한다. 그들은 우리가 세계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일을 우리가 실현할 수 있는 삶의 상태의 문제로 환원한다. 예를 들어 의료보험이 건강이라는 행복과 죽음, 질병이라는 불행이 미래에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를 셈하듯이 말이다. 이렇듯 성인 남성 암 발병률 얼마를 들먹이며 실비보험에 가입하도록 강권하는 보험 광고 속에서 우리는 행복을 예언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불안하고 초조한 낯빛으로 보험상품을 살피는 이들보다 더 호모 사케르 같은 존재가 어디 있을까.
2014년 10월 8일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독자들과 슬라보예 지젝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독자 가운데 한 명이 "오늘날 행복은 중요한 걸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당신이라면 어떤 방법을 제안하겠습니까"라고 물음을 던졌다.
"행복이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게 아니다. 그것에 관해 꿈을 꾸는 것이다. 행복이란 기회주의자를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지극히 만족스러운 삶이란 영원한 투쟁의 삶, 특히 자신과 투쟁하는 삶이라 생각한다. …… 행복하게 지낼 양이면 쪼다로 살면 된다. 진정한 주인들이란 결코 행복하지 않다. 행복은 노예들의 범주이다."
지젝은 행복이란 '기회주의자들'에게나 알맞은 말이고 '노예들의 범주'일 뿐이라고 사납게 단정한다. 그것은 오래전 조지 오웰이 정치적 전략과 예언을 구분하려 했던 것과 의미가 닿는다. 오웰은 행복이란 사회주의적 전략의 부산물일 수는 있어도 목표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은 인류애의 실현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원하는 것을 얻는 것과 꿈을 꾸는 것을 구분되어야 한다. 오웰이 그렇듯 지젝 역시 원하는 것을 얻는 게 아니라 꿈을 꾸는 것을 택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그가 말하는 꿈이란 주관적인 환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부정의 몸짓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정치란 불가능한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지상낙원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최종적인 목적을 설정하는 일이란 금지되어야 하며 영원한 운동과 부정이 있을 뿐이라고 억지를 부리려서는 안 된다. 다만 행복이 정치의 목표가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일 뿐이며, 행복이라는 정신을 통해 이뤄지는 우리 시대의 부정(否定) 아닌 부정, 그것의 백치 같은 면모를 깨닫지 않는 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정치란 불가능할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구체적인 삶의 현실이라는 감각성의 이쪽 세계와 자유와 평등이라는 본체적인 저쪽 세계 사이에 선을 긋고 그것을 넘어서려 시도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실은 아주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특히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 세계화의 압도적 현실 속에서 자본주의 너머의 세계는 초월적인 이상일 뿐 현실적인 계획으로 전환시키려는 순간 무모한 전체주의적 폭력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라는 비난은 우파 이데올로그들만이 아니라 자칭 좌파 정치-경제학자 사이에도 만연되어 있다. 이러한 현실은 또 다른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일체의 현실적인 삶을 변화시키려는 구체적 계획을 거부하고 오직 이상으로서의 진리 자체에 충실하여야 한다는 이른바 포스트 구조주의 이후의 정치철학자들의 주장은 오늘날 많은 이들을 매료시킨다. 존재자의 세계에 한 눈을 팔지 말고 존재적인 것에 대하여 굽힘없이 헌신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듣노라면 어딘지 숭고한 울림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이 역시 행복이라는 이상에 굴복하는 것 못잖게 공허하다. 위대한 부정의 몸짓을 찬미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 부정을 통해 어떤 세상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책임을 회피하고 기꺼이 궂은일을 마다치 않을 각오로부터 도망가는 것은 졸렬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의 유혹을 피해야 한다. 행복의 정치라는 긍정의 정치와 진리의 정치라는 순수한 부정의 정치, 두 가지 유혹 말이다. 이 두 가지의 유혹은 오늘날 우리가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는 정치에 관한 이론 그리고 실천을 통해 끊임없이 출현한다.
이 책은 이 두 가지 유혹에 맞서 싸우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정치와 그것을 궁리하기 위한 물음들을 제시하고 답하려 애쓴 시도이자 기록이다.
목차
목차
프롤로그 _ 지루한 행복 007
1부 인민이여 안녕, 민주주의여 안녕
1%의 논리적 위상 023
두 개의 인민 027
인민은 누구이며,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035
해방과 평등의 정치_ 새로운 이름의 주체를 찾아서 041
2부 달아나는 사회, 그리고 사회?주의 이후의 정치
사회적인 것의 황혼 051
사회적인 것 없는 정치는 없다 057
주권의 아포리아와 그것을 뛰어 넘는다는 것 070
경제에 맞서는 사회? 083
3부 제거할 수 없는 정치의 불변항, 노동
노동과 대표의 역설 091
노동권과 노동의 권리_시민의 권리에서 상품의 권리로 096
실업이라는 미스터리 116
가난의 시학에서 착취의 과학으로_ 노동권의 역설 128
4부 종합할 수 없는 두 가지, 정치와 경제
정치와 경제_불가분한 것과 종합 145
정치의 이율배반 151
전경(前景)과 배경(背景) 161
포퓰리즘이라는 수수께끼 182
5부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말해질 수 없는 것
_세월호 참사 이후, 다시 생각하는 정치 187
코다(coda)_낮잠 자는 변증법 217
1부 인민이여 안녕, 민주주의여 안녕
1%의 논리적 위상 023
두 개의 인민 027
인민은 누구이며,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035
해방과 평등의 정치_ 새로운 이름의 주체를 찾아서 041
2부 달아나는 사회, 그리고 사회?주의 이후의 정치
사회적인 것의 황혼 051
사회적인 것 없는 정치는 없다 057
주권의 아포리아와 그것을 뛰어 넘는다는 것 070
경제에 맞서는 사회? 083
3부 제거할 수 없는 정치의 불변항, 노동
노동과 대표의 역설 091
노동권과 노동의 권리_시민의 권리에서 상품의 권리로 096
실업이라는 미스터리 116
가난의 시학에서 착취의 과학으로_ 노동권의 역설 128
4부 종합할 수 없는 두 가지, 정치와 경제
정치와 경제_불가분한 것과 종합 145
정치의 이율배반 151
전경(前景)과 배경(背景) 161
포퓰리즘이라는 수수께끼 182
5부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말해질 수 없는 것
_세월호 참사 이후, 다시 생각하는 정치 187
코다(coda)_낮잠 자는 변증법 217
저자
저자
서동진
저자 서동진은 계원디자인예술대학교 융합예술학과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저서로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2009), 『디자인 멜랑콜리아』(2009) 등이 있고, 역서로 『섹슈얼리티: 성의 정치』(1999) 등이 있다. 「전진하는 미학: 사회와 정치 그리고 예술의 동요」(2012), 「알튀세르와 푸코의 부재하는 대화: 정치적 유물론의 분기」(2011)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경제와 문화의 관계에 관심을 두고,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관계를 연구한다.
Payment & Security
Payment methods
Your payment information is processed securely. We do not store credit card details nor have access to your credit card informat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