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아슬한 희망
《아슬아슬한 희망》은 제목 그대로 갈수록 암담하고 점점 나락의 길을 걷고 있는 시대에 참된 삶의 의미를 묻고 사람과 역사에 대한 ‘희망’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어루만지는 글들로 채워져 있다.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의 현실을 외면한 채 하늘을 말할 수는 없었”고 “하늘을 말하지 않고는 땅의 희망을 말하기 어려웠다”고 고백하는 저자는 신앙과 삶에 대한 고정관념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가 놓치고 살아가는 아름다움과 깨우침을 드러내준다. 그래서 그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팍팍한 일상과 암울한 시대에 세월이 참 무상하지만 불멸의 의미를 추구하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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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아슬아슬한 희망》은 제목 그대로 갈수록 암담하고 점점 나락의 길을 걷고 있는 시대에 참된 삶의 의미를 묻고 사람과 역사에 대한 '희망'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어루만지는 글들로 채워져 있다.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의 현실을 외면한 채 하늘을 말할 수는 없었"고 "하늘을 말하지 않고는 땅의 희망을 말하기 어려웠다"고 고백하는 저자는 신앙과 삶에 대한 고정관념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가 놓치고 살아가는 아름다움과 깨우침을 드러내준다. 그래서 그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팍팍한 일상과 암울한 시대에 세월이 참 무상하지만 불멸의 의미를 추구하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이 책은 오늘날 한국사회와 지구촌이 겪고 있는 고통을 마주하며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며 어떤 자세로 실천의 길에 들어설 것인지 일깨우고 있다. 예수를 따르는 이의 순결한 마음과 진지한 성찰, 그리고 의로움을 저버리지 않는 외로운 결연함이 스며있다.
어떤 이는 그의 글에 대해 "몸에 박힌 가시일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고통 받고 억눌린 이들의 현실을 주시하고, 이들의 삶을 괴롭게 하고 있는 권력과 현실의 힘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며 바로 그것이 예수의 마음임을 일깨우는 그의 글은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에 깊숙이 박히고 있는 가시다. 그러나 그 가시는 진정 무엇 때문에 아파해야 하며 무엇 때문에 눈물 흘려야 하며 무엇 때문에 기도하고 무엇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지 일깨우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와 닿는다. 그의 글은 시종일관 진지하다. 하지만 그 진지함은 지루하거나 구태의연하지 않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삶이 보여주는 성실함의 무게와, 성서 해석의 진실성, 그리고 현실에 대한 가슴 아픔이 깊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며, 웃는 자와 함께 웃는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고, 억울한 고통에 시달려 우는 자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들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 다름 아닌 복음의 진정한 역할이다. 그런 까닭에 김기석 목사의 글을 읽으면 우리가 서슴없이 직면해야 할 현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현실과 외롭게 쟁투하고 있는 사람들과 우리가 어떻게 함께 해야 할 것인지 분명해진다.
김기석 목사의 글을 읽고 있으면 사람음의 본래 가치가 회복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오염되지 않고 맑고 경건한 울림으로 이 세상을 일깨우는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생명은 기적이다"라는 글의 마무리에서 "내가 기적인 것처럼,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이들은 기적이다. 그렇기에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면서 등굣길의 초등학생, 산책중인 아주머니, 보행이 자유롭지 못한 할머니, 자원봉사중인 아저씨들을 위해 화살기도를 날린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에게도 하나하나 사랑을 불어놓는 따스한 온기와 함께 그 사랑을 훼방하고 가로막는 힘과 싸워야 할 때는 물러섬이 없다. 그런데 이 예언자적 육성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질서에서 쫓겨나고 밀려난 자의 삶과 맞닿아 있다.
생명에 대한 소명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교회가 갈 길이라고 외치는 그의 육성은 그의 책 곳곳에 스며있다. 이는 어쩌면 이미 세상의 대세를 쥐고 있는 질서에 대한 역습과 전복(顚覆)이 된다. 하여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글은 오늘날, 힘없이 현실의 위력에 무너지고 있는 이들에게 무한한 용기와 격려가 된다.
김기석 목사의 설교가 고사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빛과 소금이 되게 하는 말씀의 전범(典範)이 될 만하다면, 그의 칼럼은 탁류가 넘치는 강을 뚫고 솟아오르는 맑은 샘물줄기와 같다.
바람 부는 날에도 밭에 나가고 구름이 낀 날에도 들판에 나간다. 그것이 예수를 따르는 이의 갈 길이다. 이 암담하고 답답한 시대의 거리에서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온통 열기에 지쳐 가는 가 했더니, 생명의 멋진 바람이 분다. 김기석 목사의 말과 글은 그렇게 우리의 삶에 새로운 용기와 기력을 부어준다. 물론, 그것이 김기석 목사의 헌신과 능력의 소산이겠지만, 그건 무엇보다도 그를 통해 이 세상에 들려주고 싶으신 하나님의 마음이 그득 담긴 말씀이기에 그렇다.
이제 그의 책에 대한 소개를 따로 뭔가 하는 것보다는 그래서 그가 쓴 문장들을 음미하는 편이 훨씬 낫다. 자칫 그가 쓴 문장들을 추상화하고 그로써 글맛을 잃게 할까 싶어서다.
그에게 희망은 무엇일까?
"희망은 그렇게 늘 위태롭다. 희希 자에는 '바라다'라는 뜻도 있지만 '성기다', '드물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희망이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이다. 희망은 낙관적 전망이 아니라, 기어코 살아내기 위한 안간힘이다. 상처를 빛나는 흔적으로 만들고, 연약한 것을 보듬어 안고, 뿌리가 드러난 것을 북돋는 이들이야말로 희망의 전사戰士라 할 수 있다."(66쪽)
욕망과 두려움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사람이라야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다. 희망은 언제나 허황해 보인다. 하지만 그 희망을 망각하지 않고 끈질기게 붙드는 이들과 더불어 새 세상이 도래한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찾아가 자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했던 과부와 같은 이들이 하나둘 늘어난다면 희망의 나무는 커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희망의 나무'는 오롯이 현재의 삶에서 움트기 시작한다.
"삶이란 오늘의 점철點綴이다. 오늘이라는 점들이 모여 우리 삶의 풍경을 이룬다. 점 하나를 바로 찍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도 정성껏 살아내야 한다."(70쪽)
그래도 그는 묻기 시작한다. 일상이 쌓여 인생이 되는 것이건만 우리는 그 인생의 일상적 의미에서 스스로 소외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일상은 기억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삶의 대부분은 일상적인 일들로 채워진다. 잘 산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 아닐까?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고, 걷기도 하고, 사랑을 하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가끔은 멍하니 앉아 있는 것, 삶이란 그런 것이다. 일상은 대개 담담하고 심심하다."(153쪽)
그렇지 않은가? 일상에 뿌리를 두지 않고 우리는 자랄 수 없으며, 그 일상의 시간 속에서 길러지지 못한 생각과 습관 그리고 성찰은 자연히 뿌리가 얕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상의 자리로 돌아와 성찰의 시간을 익혀나가는 인생은 아름다워진다. 그건 마치 오랜 손맛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된장 맛이며, 그로써 우리의 일상에 건강함이 채워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 일상으로 제대로 돌아오기에는 우리의 현실이 번거롭기만 하다.
"희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리듯이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참 삶의 길을 조망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일상 속에서 늘 접하는 거짓에 대해 우리는 어지간히 무감각해졌다. '괜히 거짓의 맨 얼굴을 폭로하려다가 봉변당할 필요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포승줄처럼 우리를 묶고 있다."(100쪽)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이란다. 맞다. 그래서 우리는 대단한 것을 세우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마음과 영혼은 자꾸 폐허를 닮아가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 "거짓에 대해 우리는 어지간히 무감각해졌다." '진리'로 성숙해져야 할 영혼의 공간이 폐물이 되어간다는 것이 다. 우린 그걸 일상에서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는 그러면서 이러한 상황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한 소소한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건 조르쥬 쇠라의 그림 한 장을 보고 쓴 이야기다.
"조르쥬 쇠라가 1886년에 출품한 그림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을 바라본다. 수많은 색점을 찍어 그린 이 그림은 색감이 부드럽고 따뜻하다. 눈부신 햇살 아래서 휴일의 한 때를 즐기는 이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호수에는 작은 배들도 떠있다. 그런데 화면은 마치 시간이 일시에 정지되어 버린 듯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쇠라의 그림 속에서 일상은 영원과 잇대어 있다."(70쪽)
이런 재창조의 순간을 갖지 못한 사람은 날로 그 삶이 폐허로 변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 비극을 더욱 조장하고 있다.
"아들과 딸을 생각할 때마다 김승희 시인의 [제도]를 떠올린다. 아이는 하루 종일 색칠 공부 책을 칠하고 있다. 나비도 있고 꽃도 있고 구름도 있고 강물도 있다. 아이는 금 밖으로 색칠이 나갈까 두려워한다. 아이는 금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나비도 꽃도 구름도 강물도 선 안에 갇혀 있다. 답답하다. 죽은 풍경이다."(168쪽)
그렇게 그는 인간을 옥죄이는 것에 저항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인식될 때 인간의 존엄은 스러지고 만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삶'을 상상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사람들이 하나 둘 돈의 전능함이라는 허구의 신화에서 벗어나는 순간, 행복을 구성하는 다른 방법을 알아차리는 순간, 자유와 진리에의 열정이 회복되는 순간, 우리를 휘몰아가던 그 맹목적인 열정은 잦아든다. 비로소 이웃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몸을 낮춘다. 바로 그때 참 사람의 길이 열린다."(100쪽)
아, "그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몸을 낮춘다. 바로 그때 참 사람의 길이 열린다"라는 문장 하나만 제대로 잡고 살아도 우린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것에 대한 그의 단상은 또 이렇게 펼쳐진다.
"모든 길은 단순히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는 공간이 아니다. 길은 사람들이 걸어 생기는 것이지만, 길은 그 길을 걷는 이들에 대한 기억의 온축이다. 길은 지향이기에 희망이고, 기억을 환기시키기에 그리움이다. 현대인의 불행은 길을 잊었다는 데 있다. 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에 불안한 시선을 던지며 걷는 동안에는 희망도 그리움도 떠오르지 않는다."(55쪽)
우리는 사실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건 일상의 경치다. 그러나 경치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불안하다. 아니, 늘 아슬아슬한 인생을 살아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우리의 현실에서는 이런 인간들만 자꾸 늘어나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유가족들을 향해 '그만 하면 되지 않았느냐', '이제 그만 해라', '그 문제에 붙들려 경제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사회가 가하는 폭력이다."(129쪽)
그래서 그는 이런 세상에 가득 찬 것을 이렇게 질타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한 마디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들과 만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들은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주변세계를 재배치한다. 그들과 만나 상처를 입지 않고 물러나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들은 욥의 세 친구를 닮았다. 느닷없이 닥쳐온 불행 앞에서 넋이 빠진 친구들에 그들은 인과응보의 잣대를 들이댔다. 욥의 죄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그가 겪는 불행이 그의 죄를 입증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판 욥의 친구들이 참 많다. 쓰나미나 자연재해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사태를 두고 불신앙 운운 하는 종교인들 말이다. '모름'을 용납하지 못하는 '앎'은 독선이요 폭력이 아니던가? 딛고 서야 할 땅을 진창으로 만들어버리는 폭우처럼 '안다'고 하는 자부심은 때로 함께 살아야 할 세상을 진창으로 만들어버릴 때가 많다. 나의 '앎' 혹은 '옳음'에 대한 확신이 강할수록 타자와 소통할 여지는 줄어든다. 타자는 동화시켜야 할 대상일 뿐이다."(171쪽)
여기에 더해 이렇듯 "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척하면서 실은 신앙과 관계없는 목적을 추구하"면서 '표독'해지는 이들을 자기 확장의 욕망과 관련된 것이라며 "욕망이라는 이름의 끈을 자르지 않는 한 자유로운 질주는 불가능하다"며 날선 비판과 함께 가느다란 실눈을 뜨게 한다.
"사람들은 자기 욕망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이 시대는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을 정직이라 말하고, 남을 짓밟는 것을 경쟁력이라 말하고, 사람들의 능력을 쥐어짜는 것을 효율성이라 말한다."(192쪽) "욕망의 특색은 도취와 중독이다. 욕망에 중독된 영혼은 파괴되는 문화와 자연을 위해 울지 않는다."(28쪽)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일까? 있다. 욕망의 허구성에 대해 눈을 뜨면 된다. 우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 아니 우리가 차마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은 하찮은 것일 수도 있다. 마음에 등불 하나 밝혀지면 과도한 욕망에 바탕을 둔 행복의 꿈이 환상임을 깨닫게 된다."(290쪽) "먼빛의 눈길로 현실을 바라보는 순간 욕망의 지배력은 약화되고 내적 자유가 유입된다."(250쪽)
주옥같은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그 주옥같은 이야기에는 진심이 있고 겸허한 자기 성찰이 있다. 그의 이러한 성찰은 교회, 기독교를 향해서도 가차 없이 쏟아진다.
"크기의 신화가 거룩함이라는 지향을 대체한 후 교회는 더 이상 다른 세계에 눈길을 보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의 교회는 시인으로 하여금 30만 원으로도 당당하게 살 수 있게 해주었던 그 든든함과 넉넉함을 주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오히려 추문거리가 되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상호금융권에 대한 감사를 벌이다 보니 교회에 대출해 준 돈이 4조9천억 원에 이른다 한다. 제1금융권이 대출해 준 4조원을 합하면 거의 10조에 이른다. 교회가 매달 금융권에 이자로 갚아야 하는 돈이 600억 원이라 하니, 과부의 두 렙돈을 칭찬했던 예수의 가르침이 무색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세상의 '빛이 되라' 했더니 세상의 '빚이 되었다'며 비아냥거린다."(95-96쪽)
이제 그는 일상을 넘어 우리가 마주하는 시대의 아픔에 다다른다.
"분향소 앞, 세찬 바람에 일렁이는 노란색 깃발은 마치 죽어간 이들의 넋인 듯하여 나는 그저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어떤 이는 돌아선 채 눈물을 훔쳤고, 또 어떤 이는 처연한 표정으로 두 손을 그러쥔 채 영정 앞을 떠나지 못했다. 애도의 물결을 막으려는 이들, 애도가 분노로 화하지 않을 방도 찾기에 여념이 없는 이들에게 저 펄럭이는 노란색 깃발은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다."(186쪽)
분향소 앞 광장에서 흔들리는 깃발을 보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듣는 그는 이 시대의 아우성을 듣는다.
"그러나 지금 광장마다 내걸린 깃발은 우리를 '애수'의 정한으로 이끌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잊지 않겠다는 결의이다. 그들을 성급하게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하냥다짐이다. 신은 무고하게 죽임당한 아벨의 피가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고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잊어도 신은 잊지 않는다. 신은 우리가 동료 인간에게 지은 죄를 당신이 받는 모욕으로 간주하신다.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189쪽)
이러한 애끓음은 팽목항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우리는 또 다른 피에타를 보고 있다. 그 피에타는 저 무심한 진도 앞바다를 품고 있는 팽목항에 있다. 돌아올, 아니 돌아와야만 할 자식의 젖은 몸을 덮어주려고 담요를 든 채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그런데 그 피에타의 품에는 자식이 없다. 이보다 더 큰 슬픔이 어디 있을까? 돈 귀신에 들린 기업가, 관리 감독 책임을 방기한 관료들, 생명을 살리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기보다는 책임 회피에 급급했던 해경, 그리고 무능하기 이를 데 없는 정부, 그리고 이런 세상을 만들어 놓고도 '별 일 없겠지' 하며 무사안일하게 살아온 우리가 공모하여 죽인 이들이 지금은 거울이 되어 우리 양심을 돌아보라고 다그친다. 팽목항 앞의 피에타 앞에서 우리는 눈물을 그칠 수 없다."(215쪽)
그러면 절망하기만 해야 하는가? 아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털어놓는다.
"호이나키의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를 읽다가 '한 사람의 혁명'이라는 말에 붙들렸다. 깊이 각성된 한 사람이 검질기게 추구하는 새로운 삶의 길은 비록 좁지만 종국에는 생명 세상과 통하게 될 것이다. 아침 저녁으로 식물에 물을 주고, 염천을 마다하지 않고 밴 것을 솎아내고, 벌레를 잡아주는 농부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야말로 혁명가가 아닌가? 누구는 그런 이를 가리켜 최초의 인간이라 했고, 하늘의 빛과 만나 눈이 밝아진 바울은 그런 이를 가리켜 새로운 아담이라 했다. 시절은 바야흐로 새로운 아담을 기다리고 있다."(87쪽)
그는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문풍지가 된 사람들'을 그리며 희망의 불빛을 티운다.
"어둑새벽 거리는 지난밤의 향락과 도취의 흔적들로 인해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다. 도시인의 말끔한 아침을 위해 야광천을 덧댄 옷을 입은 채 새벽거리를 쓸고 있는 환경미화원들을 본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묵묵히 비질을 하는 그분들을 보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혼곤한 소비의 흔적들을 수거하기 위해 청소차에 매달린 채 달려가는 이들, 화려한 도시의 불빛 저편 어둠 속에서 몸을 옹송그린 채 잠을 청하는 노숙인들을 돌보기 위해 달려가는 이들을 본다. 절망의 황소바람에 맞서며 역사 속에 온기와 웃음을 불어넣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있다. 문풍지로 선 그들에게서 문득 거룩함의 온기를 느낀다."(274쪽)
이런 모든 의식과 자세와 깨우침이 이 척박한 세상에 희망을 일구는 길이다. 인간의 자유로움을 지켜내고 그 존엄한 권리를 옹호하며 생명의 세계를 평화의 영으로 가득 차게 하는 일, 그것이 이 땅에 살아가는 이들이 순례의 경건함으로 재창조되는 방식이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해서 성소가 되어간다. 우리 안에 이미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가?
목차
목차
살똥스럽고 몰강스러운 세파에 휘둘리는 이들에게 - 9
여는 글_ 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김기석 12
1. 샛별을 품에 안고
생명은 기적이다 _20
하늘의 북소리를 듣는 이들 _ 27
상투어 깨뜨리기 _30
봄이 우리를 부른다 36
저주는 이 어미가 받으마 _ 42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정성으로 _49
길은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_ 53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_57
아슬아슬한 희망 _62
세 개의 의자 69
불의에 저항할 때 _80
2. 빛의 알갱이 되어
한 사람의 혁명 84
홀로 찬 바람과 마주하는 나무처럼 _88
바늘로 우물을 파는 참 바보 _94
바구니를 둘러엎는 사람 99
엎드림으로 깨어나라 _105
누가 사람인가? _111
잔다리를 밟아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해도 _115
봄바람이 차갑다 _120
피르자다 씨의 시간 126
낮은 곳을 향해 흐르는 물처럼 _132
3. 마음의 심지에 불을 붙이고
순례자로 산다는 것 136
우주심과의 접속 _153
밤의 수심을 재다 _157
산책을 즐기다 _163
진짜 어른을 보고 싶다 _ 167
'그놈'에게서 벗어나는 법 175
그림자 노동에 초대받다 179
깃발로 나부끼다 _185
몽상과 꿈 사이에서 191
상승과 회귀의 선순환 195
희망의 표징 _198
4. 별을 낳는 사람들
메피스토펠레스의 해법 _203
봄은 어떻게 오는가? _207
팽목항의 피에타 _213
나는 저항한다 _218
진노의 팔을 붙잡는 손 _ 224
광장에서 _229
길들여짐에 저항하라 _234
너를 향해 내민 손 _239
느른해진 영혼 _244
5. 눈길 닿는 곳 어디나
아뜩함과 무력감을 넘어 249
얼굴 하나 보러 왔지 _252
한 걸음 속에 인생이 있다 _257
궂은일을 즐겨 택하자 260
아침은 어떻게 밝아오는가? _265
외로움의 영토가 넓어질 때 _ 269
문풍지가 된 사람들 272
느릿느릿 살아갈 용기 277
만물의 합창에 끼어들다 281
목기에 파인 비늘처럼 284
마음에 등불 하나 밝히면 _ 289
마음에 핀 꽃 293
얼굴빛 환한 사람 _296
저자
저자
감리교신학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청파교회 전도사, 이화여고 교목, 청파교회 부목사를 거쳐 1997년부터 청파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 《오래된 새 길》, 《내 영혼의 작은 흔들림》,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서다》,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 《삶이 메시지다》, 《일상 순례자》 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 《가난한 마음과 결혼한 성자》, 《예수 새로 보기》, 《예수의 비유 새롭게 듣기》, 《기도의 사람 토머스 머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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