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라서(오늘의 시선집 29)
이수진 시집
우연히 아프리카 tv에서 '낭만대통령의 문학토크'를 듣고 늦게 시 창작의 길로 들어선 이수진 시인의 시집 『그리움이라서』.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을 꾸려가고 있는 시인은 200여 편의 시, 시조 가사 문학 발표 등 열정 넘치는 창작 정신을 발휘하고 있다. 시인의 시는 일상의 시어들을 통해, 자연스레 이끌어 나가는 시어 배치 그리고 선명한 이미지 구현을 위해 여러 지각적 이미지들의 입체화, 낯설게 하기를 통해 새로운 해석, 구상과 추상의 적절한 배합 등 다채로운 사색의 길을 체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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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포구에 갇힌 배 한 척은 오지 않는 그리운 뭍 소식만 기다리고 있다. 다 잠들고 깃대만 빼꼼히 기다리다가, 그나마 잠들어 버린 바닷가, 고요가 짙게 깔리고 있다. 간혹 파도 끝에서 갈매기들이 물낯 가르며 갸륵갸륵 소리를 내지른다. 또 다시 하루가 길다. 허무 가득한 하루 끝, 저녁놀 은빛 가슴에 담아 바람결에 실어 보내고 있는 시적 화자의 가슴은 쓸쓸하기만 하다. 겨울 바닷가의 정경이 그대로 독자의 가슴에 스며들고, 그 안에서 갈매기 소리만 갸륵대고 있다.
〈이수진시인의 제1시집 출간을 축하하며〉 中에서
- 한실 문예창작 지도 교수 박덕은
■평론
이수진 시인의 시집 '그리움이라서'에 대하여
이수진 시인이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은 '물안개'이다. 산야의 신비로움을 감싸 안고 흐르는, 그래서 시의 리듬을 닮은 물안개, 산골짜기를 촉촉이 껴안아 주는 보드라움, 각자의 위치에서 개성을 발하는 나무와 풀과 꽃에게 계절마다 생기와 에너지를 불어 넣어 주는 물안개, 이 거대한 위로가 바로 이수진 시인이다.
이수진 시인과 필자와의 만남은 우연이었나, 필연이었나. 필자가 아프리카tv에서 "낭만대통령의 문학토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어떤 문우의 소개로 이 방송을 듣게 된 이수진 시인, 그녀는 필자의 제자들로 이뤄진 문학 동아리에서 가장 늦게 시 창작의 길로 들어섰다.
얼마 동안은 적응하느라 힘들어 하다가, 어느 날부터 본격적으로 시 창작에 돌입했다. 그러다가 시뿐만 아니라 시조, 가사 문학 등의 문학 장르까지 도전하는 열정을 보이기 시작했다.
시 창작을 시작한 지 1년도 안 되어, 시 부문 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문단 데뷔를 하였고, [충주문학관] 문학상 장원 수상, 200여 편의 시, 시조, 가사 문학 발표 등의 열매를 거머쥐었다. 어디서 이런 열정과 성실과 의지가 솟구쳐 나오는 것일까. 도무지 알 수 없다. 그 작은 몸에서 어찌 이리 커다란 시심의 메아리가 울려 퍼진단 말인가.
이수진 시인의 낭군이 후광으로 깔아 놓은 사랑과 배려 때문일까. 아들과 딸이 경쟁적으로 펼치는 효심의 배경 때문일까. 아니면, 언니들과 형부들이 지속적으로 이뤄준 격려의 그릇 때문일까. 무엇이 이 시인의 활기를 불태워 주는 걸까. 천부적인 착함과 귀여움, 원석처럼 박혀진 순수, 밝게 보는 눈길, 당당한 삶의 태도 등이 어우러져 오늘의 품성을 조각해낸 걸까.
아무튼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을 꾸려가고 있는 이수진 시인과 봇물 터지듯 휘몰아치듯 써 놓은 그녀의 시 세계로 탐구 여행을 떠나보고픈 강한 유혹을 느낀다. 자, 이수진 첫 시집 [그리움이라서] 그 아름다운 시 세계로 지금 당장 떠나보자.
꽃이라서
가슴밭에 향기를 남기고
나무라서
둥근 나이테를 남기고
그리움이라서
마음밭에 쉼 없이 내리네.
- [미련.1]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미련을 대변하고 있다. 미련이 꽃이라서 가슴밭에 향기를 남긴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미련이 꽃일까. 게다가 가슴밭에 향기를 남기는 존재일까.
미련은 못다 한 사랑일 수 있다. 그래서 안타깝고 아쉽고 애틋하다. 그게 어찌 가슴밭에 향기를 남길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분노와 짜증과 회한을 남기는 건 아닐까. 그런데도 시적 화자는 향기라고 고집하고 있다. 아예 부정적인 해석의 꼭지를 잠궈 버린 듯하다. 초긍정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해석을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번에는 미련을 나무라 한다. 그래서 둥근 나이테를 남길 수 있다 한다. 그 미련이 나무가 될 만큼 시적 화자의 인생에 크나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랑을 했건, 그 사랑이 떠나 미련만 남았을지라도 그 감성을 끝까지 소중히 여기겠다는 인생관이 여기서 엿보인다. 이번에는 미련이 그리움이라 한다. 이 그리움은 마음밭에 쉼 없이 내린다고 여긴다. 어제도 내리고 오늘도 내리고 내일도 내릴 것이다. 그렇다면 이 미련이라는 그리움은 시적 화자의 인생 전체를 흔들 수 있고, 지배할 수 있는 존재로 남게 된다.
한번 출범한 사랑, 이 사랑이 설령 도중에 중단되었다 할지라도, 시적 화자가 줄곧 사랑하는 이에 대한 예의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돋보이는 시이다. 이런 시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줄 아는 이수진 시인이 참으로 자랑스럽고 대견스럽다.
칼바람
등에 업고
봄마중
간다.
- [미련.2]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 역시 미련처럼 칼바람 등에 업고 봄마중을 나간다. 지금 현실은 칼바람 부는 겨울이다. 다들 웅크린 채 잠잠히 침묵할 시기에, 시적 화자는 길을 나선다. 역경과 시련의 상징인 칼바람을 등에 업는다. 단순히 피하는 게 아니라 등에 업음으로 적극적인 해결책을 찾아낸다.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시적 화자가 이렇게 결심을 굳힌 건 다름 아닌 봄 때문이다. 이 봄을 맞이하기 위해, 그 어떤 시련도 감수하겠다 한다. 봄이 무엇보다도 절실했던 시적 화자는 겨울의 혹독한 환경을 뚫고 봄마중 하러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용기의 집행자 노릇을 하고 있다. 비록 미련이긴 하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인생의 그 어떤 감성일지라도, 그 가치, 그 의미를 인정하고 존중하려는 세계관이 여기에 담겨 있는 듯하다. 이처럼 이수진 시인은 우리 인생에서 여기저기 흘러 다니는 소소한 감성까지도 예리하게 포착하여 시적 형상화를 해내고 있어, 본격적인 시인의 시대를 열어갈 것으로 보인다.
산기슭 오르면
허름한 집 한 채
기와도 아닌 너와 지붕
서리꽃 이고 있네
탯줄에 매달렸던 사랑과
님의 체취 고스란히 남겨 두고
떠난 그곳
심장 멈추는 그 순간에도
잡았던 손의 온기
아직도 그대로 느껴지는데
한없이 내주던 그 마음과
남루한 이불마저
짐승에게 다 내어주고
칼바람 흩어지던 그곳
그리워 애타게 부르는 이름
대답은 없고
허기진 메아리만 가슴밭 파고드네.
- [어머니]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으로 어쩔 줄 몰라 한다. 그 이유는 뭘까.
산기슭을 오르면 허름한 집 한 채가 있다. 기와도 아닌 너와 지붕을 이고 있다. 그 위에 서리꽃이 앉아 있다. 그곳에서 어머니가 살았다. 그곳에는 탯줄에 매달렸던 엄마의 사랑, 엄마의 체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심장이 멈추는 그 마지막 순간에도 잡았던 엄마 손의 따스함이 아직도 그대로 느껴지는 곳, 한없이 내주는 엄마의 마음과 남루한 이불마저 짐승에게 다 내주었고, 그 뒤로 칼바람이 흩어지는 곳, 그리워 애타게 불러도 대답이 없고, 허기진 메아리만 가슴밭을 파고드는 곳, 그곳이 바로 고향집이고, 그 고향집이 바로 어머니이다.
어머니와 고향집을 교묘히 오버랩시켜 놓은 시가 이미지 시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시적 이미지(산기슭, 허름한 집 한 채, 너와 지붕, 서리꽃, 남루한 이불)와 촉각 이미지(체취 고스란히 남겨 두고, 잡았던 손의 온기, 한없이 내주던 그 마음, 가슴밭 파고드네)와 청각 이미지(칼바람 흩어지던 그곳, 애타게 부르는 이름, 대답은 없고, 허기진 메아리만)의 어우러짐이 이 시의 이미지 구현에 큰 도움을 주고 있어, 시적 형상화와 시상의 흐름이 좀더 자연스럽고 멋스러웠지 않았나 싶다.
낡은 앨범 속에서
숨죽이고 있는 젊은 날의 초상
희미하게 피어나는
옛 추억의 조각 조각들
늦은 후회로 몸을 싣는
개울가 오솔길
물수제비 만들던 강가
버들가지 가녀린 몸짓
달빛도 숨어 버린 동네 어귀
껌벅껌벅 졸고 있는 가로등
돌담길 어루만지고 더듬거리다
우루루 몰려와 안아 주는 온기들
까만 밤을 뜬눈으로 불태우고
마음을 여는 여명의 빛
문틈 사이로 비춰지니
그때서야 숨을 내쉬네.
- [그리움.2]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문틈으로 비춰지는 잔영들을 하나 하나 표현하면서 자신의 추억을 되돌아보고 있다.
낡은 앨범 속에서는 숨죽이고 있는 젊은 날의 초상을 본다. 아마도 청춘은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숨죽이고 있는 걸 보니, 활짝 펴지 못하는 소극적인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옛 추억의 조각들이 희미하게 피어나고 있다. 늦은 후회로 몸을 싣는 개울가 오솔길로 떠오른다. 어쩌면 그곳에서 사랑을 놓쳐 버린 후회를 지금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늦은 후회라고 하는 걸 보니, 이미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 되어 버린 듯하다.
물수제비뜨던 강가도 보이고, 버들가지 가녀린 몸짓도 보이는 걸로 봐서, 시적 화자는 과거에 매우 소극적이고 수줍고 내성적인 시절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시적 화자는 어느덧 나이를 먹었고, 이제 달빛도 숨어 버린 동네 어귀를 향하고 있다. 지금은 껌벅껌벅 가로등조차 졸고 있다. 마치 시적 화자의 현실, 지금의 삶이 껌벅껌벅 졸고 있는 것처럼. 돌담길을 어루만지고 더듬거리며 걷다가 우루루 몰려와 안아 주는 온기들을 만난다.
정겨운 추억 속에는 간혹 안아 주고픈 것들도 있다. 다시 돌아가면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감성들, 어째서 과거에는 그게 그처럼 소중했다는 걸 몰랐을까. 이제라도 알았으니, 감사할 뿐이다. 하지만 과거는 다 사라져 갔다. 까만 밤이 되어 버렸다. 오늘밤도 뜬눈으로 불태웠지만, 과거 속에서 추억 몇 점만 건졌을 뿐이다. 그래도 이제 마음을 여는 여명의 빛이 앞에 놓여 있어서 다행이다. 이 모든 게 새벽녘 문틈으로 비춰진다. 시적 화자의 현실이 다시 주어진다. 그때서야 시적 화자는 비로소 숨을 내쉰다.
과거와 추억은 갔고, 현실은 남아 있지만, 미래의 인생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를 사는 게 아니다, 미래를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바로 오늘 바로 지금을 살아가는 것, 시적 화자는 밝아 온 오늘이 미치도록 고마울 뿐이다. 이제는 과거를 벗고, 추억에서 벗어나, 현재의 삶에 충실하기로 한 것일까. 시적 화자의 얼굴에 스치는 의지가 심상치 않다.
이수진 시인은 바로 이러한 시의 세계를, 자신의 내면을 이미지 구현으로 시적 형상화를 해내고 있는 노련한 솜씨를 보여 주고 있다. 놀랍고 정교한 솜씨가 아닐 수 없다.
유년의 꿈
추억 뒤편에 묻어 두고
굽이 굽이 돌아온 길
민들레 홀씨 흩날려
가슴밭 두드리던 그리움
두근두근 토닥이며
똑 똑 똑 문 열었더니
정답게 마중나온 뭇별
미소 머금고
떨리는 손끝에서 뚝 떨어지며
포근히 감싸 안은 은빛 시심
날갯짓 펼치네.
- [시 창작]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시 창작의 길로 들어선 시인의 분신으로서 생각의 터를 넓혀 가고 있다.
그녀는 유년의 꿈을 추억의 뒤편에 묻어 두고 굽이 굽이 삶의 길을 돌아서 먼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감성까지 묻어둔 건 아니었다. 민들레 홀씨 흩날려 가슴밭 두드리던 그리움은 그대로 가지고 왔다. 그 그리움을 두근두근 토닥이며 데려왔다. 어느 날 똑똑똑 소리에 문 열었더니, 뭇별이 정답게 마중나와 줘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아, 이제야 만난 은빛 시심, 떨리는 손끝에서 뚝 떨어지며 포근히 감싸 안아 준다. 그러더니, 서서히 날갯짓을 펼치며 날아오른다.
시적 화자는 이수진 시인을 대변하여, 오래도록 접어 두고 살아온 시 창작의 길을 다시 만나, 꿈의 나래를 펼치는 기쁨을 은은히 표현해 놓고 있다. 아름다운 시심의 모습을 잔잔한 감동의 물결로 펼쳐놓고 있다.
이수진 시인은 시의 특질, 시의 효용성이 무엇인지 벌써부터 터득해 버린 것일까. 서두르지 않으면서 조근조근 다가가는 시적 형상화, 그녀는 이미 시의 기법 중 가장 정교한 세계를 확보해 놓고 이를 잘 활용하고 있는 듯하다.
커튼 걷어내니
밤은 사라지고
촉촉한 봄비 창문 두드린다
헛헛한 마음의 곁눈질은
빈자리 바라보고
아려오는 가슴에 구르는 연서는
눈물방울 같은 한마디 남기고
사알짝 나간다
잔물지는 애틋함
먼 길 나서며
바람결에 그리움 고이 보낸다.
- [외출]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드디어 커튼을 걷어낸다. 그랬더니 밤이 사라지고, 촉촉한 봄비가 창문을 두드리고 있다. 시적 화자의 인생에 마침내 봄이 왔다. 게다가 보슬비까지 몰고 왔다. 새 생명이 움트고 세상은 활기 가득차게 되었다. 헛헛한 마음의 곁눈질은 나가기 싫어 빈자리를 엿보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밀려가는 과거, 밀려가는 어둠, 밀려가는 부정의 세계, 어쩔 수 없다. 시적 화자가 막아줄 수 없다. 아려오는 가슴에 구르곤 하던 연서도 예외는 아니다. 눈물방울 같은 한마디 남기고 사알짝 나가는 연서를 잡을 수도 없고, 또 붙잡고 싶지도 않다. 떠나보낼 것은 다 떠나보내야 한다. 잔물지는 애틋함마저 내보낸다. 먼 길 떠나는 애틋함과 더불어 이번에는 그리움마저 바람결에 고이 날려 보낸다.
이제, 시적 화자는 혼자가 된다. 완전한 혼자, 그동안 괴롭혔던 감성들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자립 의지를 가진 성숙된 자아가 된다. 이제 어쩌리. 과거에서 벗어나, 추억에서 벗어나, 애틋함과 그리움과 연정에서 벗어나, 온전히 홀로 선 시적 화자에게 남은 길은 꿋꿋이 걸어나가는 미래밖에 없다. 누가 뭐래도 이후에는 어둠 속에서 미련 속에서 그리움 속에서 주저앉아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결코 후회하지 않는 삶을 꾸려 나갈 것이다.
이러한 삶을 바로 외출로 해석한 이수진 시인, 주제를 가능한 한 숨긴 채 시적 형상화를 해내는 시의 기법이 이제 제법 이 시인의 손에 익은 듯하다.
초승달이 빛을 더하면
빈 뜨락에 홀로 서네
뚜렷한 듯 흐려지는 추억
끄집어내지만
흘러내리는 아릿함
촉촉이 젖어들고
속속들이 토해내는 시름은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진 어깨 끌어안고 흐느끼네
미소 머금고 토닥이는 온기는
가슴밭에 사르르 안기네.
- [사랑]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밤 깊어 초승달이 빛을 더하면 빈 뜨락에 홀로 선다. 잠이 안 오는 불면의 밤, 뚜렷한 듯 흐려지는 추억을 끄집어내지만, 흘러내리는 아릿함만 촉촉이 젖어든다. 속속들이 토해내는 시름은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고,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진 어깨를 끌어안고 흐느끼고 있다. 마음속이 편하지 않다. 다 포기해 버리고 싶은 짙은 절망감이 점차 스며들 뿐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미소 머금고 다가와 토닥여 주는 온기가 있다. 그 온기는 가슴밭에 사르르 안겨 위로를 준다.
시적 화자는 그게 사랑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갈증이나 절망감이나 시름을 달래 주고 해소해 줄 수 없지만, 유일하게 사랑은 우호적이다. 미소를 머금고 다가와 토닥이는 위로를 주고 감싸 주는 온기를 준다. 이해력으로 포옹해 준다. 그리고 안긴다. 그것도 감성의 호수인 가슴밭에 안겨 속삭인다. 사랑만이 해결사라고. 우주의 본질은 사랑이고, 사랑만이 우주의 본질과 소통되고, 하나될 수 있다고 속삭인다. 인생은 결국 사랑으로 귀결되고, 사랑으로 완성된다고 강조하는 듯하다.
사랑의 소중함, 사랑의 가치를 시적 화자는 은은히 강조하면서 시를 마무리 짓고 있다. 차분하면서도 강렬한 속삭임이 아닐 수 없다.
찻잔에
노을 지면
바람은
언덕길 나뭇가지 흔들고
담장 휘감는
달그림자 비추면
낯설음에 살랑대는
애틋함의 깃발들
풍경소리 되어
파고드는 보고픔
가슴속 비집고
피었네.
- [길]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찻잔 앞에 앉아 있다. 그 찻잔에 노을이 깔린다. 그때 바람이 언덕길 나뭇가지를 흔든다. 가야 할 길이 순탄할 것 같지 않다. 담장 휘감은 달그림자가 비추자, 낯설음에 살랑대는 애틋함의 깃발들이 나부낀다. 여정에서 만난 잠깐 동안의 휴식, 낯선 곳에 잠시 몸을 뉘였지만 애틋함은 여전하다.
왜 이리 긴긴 여정에 애틋함은 따라다니며 그 깃발을 살랑대고 있을까. 왜 떨어지지 못하고 곁에 딱 붙어다니는 걸까. 게다가 풍경소리 되어 파고드는 보고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가슴속까지 비집고 들어와 피어난 보고픔, 어찌하란 말인가. 떠난 뒤에도, 여정 중에도 따라붙는 이 보고픔, 그 실체,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드는 이 보고픔, 이 숙명적인 존재, 어떻게 해야 시적 화자는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시각 이미지(찻잔, 노을, 언덕길, 나뭇가지, 담장 휘감는, 달그림자 비추면, 피었네)와 청각 이미지(바람은, 흔들고, 살랑대는, 깃발들, 풍경소리)의 조화로움, 구상(찻잔의 노을, 언덕길의 바람, 담장의 달그림자, 깃발들, 풍경소리)과 추상(낯설음, 애틋함, 보고픔)의 어우러짐 등도 이 시의 애잔함과 감칠맛을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다.
가슴 열어 놓고
언제나 만나고픈
등돌리지 않고도
얼굴 찡그리지 않는
오랜 시간 동안
함께 걸어가는
작은 비밀이 되어
마음에 묻는
가끔은 마주하는 듯
보고픔이 되는
먼 훗날 생각하면
그리움으로 모락 모락 피어나는.
- [인연]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인연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펼치고 있다. 인연은 가슴 열어 놓고 언제나 만나고 싶은 존재라 한다. 등돌리지 않고도 얼굴 찡그리지 않는 존재, 오랜 시간 함께 걸어가길 원하는 존재, 작은 비밀도 나누고 서로에게 작은 비밀이 되어 마음에 묻는 존재, 가끔은 마주하는 듯 보고픔이 되는 그리운 존재, 먼 훗날 뒤돌아보며 생각할 때마다 그리움으로 모락모락 피어나는 존재, 그가 바로 시적 화자의 인연이라는 해석, 그럴 듯하다. 과연 그럴까. 꼭 인연이 이렇게 입맛 당기는 존재로만 구성되어 있을까. 의문이 간다.
인연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좀더 복잡하고 오묘하다. 좀더 다양하고 다채롭다. 하지만, 그런 수많은 인연 중에서도 의미 있는 인연은 바로 이 시적 화자가 마음 정리를 한 듯한 이 인연의 상자 안으로 들어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스쳐지나가는 것들을 어찌 다 인연이라 하겠는가. 가슴 열어 놓고 오래도록 함께 동행하고 늘 보고픔이 되고 그리움으로 피어나는 존재만이 진정한 인연이 아닐까. 다시 한 번 숙고하게 만드는 이 새로운 해석 앞에 잠시 인생을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껴안아 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토록 시는 우리의 마음에 길을 새로 뚫고 걷게 한다. 그래서 좋다. 시가 있어서 행복한 세상, 그 안에서 시인은 행복하다.
밤새 하늘문
순백 꽃잎 흩날리면
잔물지는 푸른 절개
동백꽃 위에 내려앉고
그리운 뭍 소식 끊어지고
포구에 갇힌 배 한 척
깃대만 빼꼼히
기다리다 잠든 바닷가
갈매기들 물낯 가르며
파도 끝에서 갸륵갸륵
저녁놀 은빛 가슴에 담아
바람결에 실어 보낸다.
- [겨울 바닷가]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저녁놀 짙게 깔리는 바닷가에 서 있다. 밤새 하늘문이 순백의 꽃잎 흩날리고 있다. 그때 잔물지는 푸른 절개는 동백꽃 위에 내려앉는다. 그런데도 아직 소식이 없다. 사랑하는 이의 소식은 아직도 끊겨 있다.
포구에 갇힌 배 한 척은 오지 않는 그리운 뭍 소식만 기다리고 있다. 다 잠들고 깃대만 빼꼼히 기다리다가, 그나마 잠들어 버린 바닷가, 고요가 짙게 깔리고 있다. 간혹 파도 끝에서 갈매기들이 물낯 가르며 갸륵갸륵 소리를 내지른다. 또 다시 하루가 길다. 허무 가득한 하루 끝, 저녁놀 은빛 가슴에 담아 바람결에 실어 보내고 있는 시적 화자의 가슴은 쓸쓸하기만 하다. 겨울 바닷가의 정경이 그대로 독자의 가슴에 스며들고, 그 안에서 갈매기 소리만 갸륵대고 있다.
시상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외로움의 시적 형상화가 잘 이뤄져 있다. 또한 색채의 대비, 하양(순백 꽃잎, 동백꽃)과 파랑(푸른 절개)과 빨강(저녁놀)과 은빛(은빛 가슴)의 입체화, 시각 이미지(하늘문, 순백 꽃잎, 흩날리면, 잔물지는, 동백꽃, 포구, 배 한 척, 잠든 바닷가, 저녁놀, 은빛 가슴)와 청각 이미지(갈매기들, 파도 끝, 갸륵갸륵, 바람결)의 입체화 등이 시의 선명한 이미지 구현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수진 시집 속에 펼쳐지고 있는 시의 이미지, 시의 리듬, 시상의 흐름, 시적 형상화 등을 살펴보았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상의 시어들을 통해, 자연스레 이끌어 나가는 시어의 배치, 되도록 선명한 이미지 구현을 위해 여러 지각적 이미지들의 입체화, 낯설게 하기를 통해 새로운 해석, 구상과 추상의 적절한 배합 등을 통한 다채로운 사색의 길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놓고 있다.
이를 통해 시의 특질을 만나 대화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독자들이 시를 만나 친숙해지고, 시 속으로 빨려들어 와 함께 즐길 수 있도록 길을 터주고 안내하는 역할, 이를 이수진 시인은 잘 감당하고 있다.
앞으로 나올 이수진 제2시집은 사찰을 소재로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제12시집은 아마도 이수진 시선집이 되지 않을까 예측이 된다. 그날까지 이수진 시인의 시 창작은 그치지 않을 것 같다. 그녀의 의지와 심성, 집안의 분위기, 성실성과 의지, 그리고 다부진 성격 등을 고려할 때 충분히 가능한 세계, 충분히 다다를 수 있는 고지라 여겨진다.
아무리 낮게 평가한다 해도, 시 쓰기와 시집 발간을 소중히 여기는 인생은 멋져 보인다. 주위의 모든 분들에게 이 길을 추천해 주고 싶다. 이수진 시인이 이 멋스런 길로 들어선 것을 다시 한 번 축하한다.
- 여기저기 온통 감동적인 꽃시 쓰고 있는 이 찬란한 초여름에 한실 문예창작 지도 교수 박덕은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시인, 소설가, 희곡작가, 수필가, 동화작가, 화가)
목차
목차
작가의 말
祝詩_박덕은
사랑하는 아내 수진에게_장만수
나의 사랑 엄마_장아름
아들바라기 엄마_장영근
祝詩_강순옥
1장 - 앙탈
2장 - 비 내리는 산사에서
3장 - 어화둥둥 내 사랑
저자
저자
경북 안동 태생
〈문학공간〉 신인문학상 시 당선
〈충주문학관〉 문학상 장원 수상
상지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한실 문예창작 회원
한꿈 문학회 회원
포시런 문학회 회원
꽃스런 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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