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헤아리다(오늘의 시선집 30)
배종숙 시집
인생 전체가 사랑의 길이며 사랑은 마음속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한 배종숙 시인의 시집 『그리움 헤아리다』. 200여편의 작품들을 쏟아낸 창작열정을 가진 시인의 첫 시집이다. 시인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시 창작에 대한 열정과 이를 떠받쳐 주는 성실성으로 시집을 완성했다. 시인은 시는 정선된 시어로 짜여진 절제미가 돋보이며 평이한 시어들인데도, 낯설게 하기의 기법을 통해 매번 다채로운 시 소재를 깔아 놓고 그 위에 이미지 구현과 상장의 고리를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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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향기 없는 사랑은 가치 없는 사랑일 테니까. 또한 사랑의 길은 먼 길이다. 그러니 돌고 돌아 느긋이 가야 한다. 서둘러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절벽에 난 외길처럼 천천히 돌고 돌아 차근차근 걸어가야 한다.
사랑의 길은 좁다란 길, 협곡의 길, 외진 길이라서, 서둘러 간다고 해서 사랑의 완성을 빨리 만나지 못한다. 인생 전체가 사랑의 길이다. 그러니, 되도록 천천히 음미하면서 가야 한다. 이 깊은 세계관을 배종숙 시인은 시를 통해 강조하고자 한건 아닐까.
〈배종숙시인의 제1시집 출간을 축하하며〉 中에서
- 한실 문예창작 지도 교수 박덕은
■평론
배종숙 시인의 시집 '그리움 헤아리다'에 대하여
배종숙 시인의 닉네임은 '꿈곱하기백'이다. 닉네임처럼 그녀에게는 꿈이 많다. 아침부터 밤까지 꿈을 찾으러 다닌다. 아침 파트, 오후 파트, 저녁 파트를 나눠 뛴다. 지칠 줄 모르는 활화산 같은 발걸음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내내 달린다. 그만큼 활기차게 진취적이고 밝다. 게다가 마음이 따스하여 타인을 배려해 주고 감싸 주고 키워 주는 어머니 같은 심성이 많은 감동을 안겨 준다.
한 번 시작한 일은 완성할 때까지 쭉 밀어붙이는 의지력, 틈만 나면 뛰어가 일손을 돕는 봉사 정신, 늘 밝고 환한 얼굴로 주위 사람들을 보듬어 주는 넉넉한 마음 등이 어여쁘기 그지없다. 멋스런 시인, 배종숙!
배종숙 시인과 필자가 처음 만난 것은 '카카오스토리' 속에서였다. 자주 찾아오는 마음이 벌써 시와 그림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 마음은 시 창작의 꿈들을 모아 모아 설렘의 곳간에 진열하고 있었다. 그 진열품들에 대해 몇 마디 조언해 주다가, 결국에는 본격적인 시 창작 지도를 맡게 되었다. 얼마 후에는 월간지 시 부문 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문단 데뷔를 하게 되었고, 그 후로 시조 부문 신인문학상, [그루비] 문학상까지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
그녀의 창작 열정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져, 아프리카tv "낭만대통령의 문학토크"의 주요 멤버로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200여 편의 작품들을 쏟아냈다. 시의 봇물, 이 환상적인 창작 열정이 드디어 첫 시집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행복한 성과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시 창작의 열정, 이를 떠받쳐 주는 성실성의 선물, 참 귀하고 멋지다.
자, 그러면 배종숙 시인의 시 세계는 어떠한 모습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있을까. 작품 속으로 직접 들어가 음미해 보기로 하자.
얼어 버린 그리움
녹이면
개구리 울음소리
들리려나.
- [경칩]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그리움을 안고 살고 있다. 게다가 그 그리움이 얼어 버려 빛을 잃어가고 있다. 만날 수 없는 세월이 이 그리움을 외롭게 하고 또 시들게 하고 있다. 어떻게든 그리움의 봄을 맞이하고 싶다.
어떻게 할까. 혹시 녹일 수는 없을까. 이미 얼어 버린 이 그리움, 얼어 버려 싹이 나지 않는 이 그리움, 다시 살려내어 아름다운 사랑의 불꽃으로 키워낼 수는 없을까.
생각다 못해 시적 화자는 얼어 버린 그리움을 녹일 생각을 한다. 그러면 개구리 울음소리 들리려나. 그리움이 봄이 되어 녹게 되면, 개구리 울음소리도 들리고 님의 발걸음 소리도 들리려나. 그렇게 된다면, 다시 봄동산처럼 사랑의 동산에도 꽃이 피고 새가 울고 개구리도 울어댈 텐데, 다시 님과 함께 생동감 넘치는 계절을 보낼 수 있을 텐데, 다시는 헤어짐이 없는 따스한 봄날 같은 여생을 보낼 수 있을 텐데.
시적 화자의 애틋한 심경이 이 짧은 시 속에 융융한 감성의 물줄기로 흐르고 있다. 이 시처럼, 분명 배종숙 시인은 시의 특질, 시의 맛과 멋을 피부 깊숙이 터득하여 시의 들녘에 신비롭게 펼쳐 가고 있는 듯하다.
일찍이
낮은 목소리여야 했다.
현실은
무신의 약속처럼 시들어 가고
스스로 돌아와 앉은
빈 들녘에
억새는
강물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풀다 만
생각의 엉킨 실타래처럼
낙엽 되어 내리던
아련한 추억처럼
서럽도록 맑은 눈물도
더러는 한 생애
목 타는 그리움으로 남았다. .
- [가을날의 순화]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스스로 돌아앉은 빈 들녘의 억새가 되어 강물처럼 출렁이고 있다. 현실은 시들어 가고 있고, 생각의 실타래는 엉켜 있고, 아련한 추억은 낙엽처럼 부숴져 내리고 있다.
그때도 그랬다. 헤어질 때도 왜 낮은 목소리여야 했을까. 그때 큰소리라도 쳐볼 것을. 과거가 아스라이 멀어져 가고 있다. 서럽도록 맑은 눈물만 흘리고 있다. 그래도 어찌할 것인가. 더러는 한 생애라 말할 수 있는 것을. 이제 모든 걸 가라앉히고 체념의 세월 위에 한가로이 앉아 있다.
그런데도 목 타는 그리움이 남는 건 왜일까. 왜 아직도 시적 화자는 그리움에 매달리고 있을까. 아직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그 지루한 기다림의 싸움을 놓아 버리지 못할까. 사랑일까. 퇴색된 그리움에도 사랑은 남아 있는 걸까. 그 약속은 아직도 유효한 것일까. 잊어 버린 것일까. 세상을 떠난 것일까. 왜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것일까.
이러한 복잡 미묘한 정서를 이 시는 함축하고 있다. 긴 사연을 아주 짧게 이미지 시로 담아내는 솜씨, 배종숙 시인의 손끝에서 이 아름다운 기법이 자리잡고 있다.
봄바람에
자목련 속살 내밀면
연분홍 꽃이파리
덩달아 바람났네
그 사이 못 참고 뛰쳐나와
떠나려 해도 떠날 수 없어
온 천지 살랑살랑 바람났네
화사한 개나리 방글방글
개천가 오리 궁둥이 뒤뚱뒤뚱
손에 손 잡고
오색찬란한 물결로 바람났네.
- [바람났네]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온 천지를 바람났다고 해석하고 있다. 자목련 속살 내밀도록 봄바람이 유혹하자, 연분홍 꽃이파리가 덩달아 바람났다. 그뿐만 아니라 온 천지가 살랑살랑 바람났다. 화사한 개나리도 방글방글 바람났고, 개천가 오리도 궁둥이 뒤뚱뒤뚱 바람났다. 그러고 보니 모두가 손에 손 잡고 오색찬란한 물결로 바람났다.
다 바람났는데, 왜 시적 화자는 바람나지 못하고 저리 서 있기만 할까. 그 사이 못 참고 뛰쳐나왔건만, 떠나려 해도 떠날 수 없는 신세, 왜 이런 답답한 인생을 살아왔을까. 봄 식구들은 다 바람났는데, 마땅히 바람난 계절이건만, 왜 아직도 시적 화자는 바람난 세상만 바라볼 뿐, 내면을 다시 경건히 단속해야 하는가. 같이 바람나고 싶은데, 왜 다시 가슴을 움츠려야만 하는가.
사랑하는 님은 왜 이 풋풋한 가슴이 이토록 막아서는가. 떠나려면 온전히 버리든가. 온전히 버렸으면 그리움을 깡그리 데려가든가, 그러지도 못했으면서 왜 바람나지도 못하게 하는가. 이 환장할 봄날에 왜 움츠리고 있게만 하는가.
님이여, 오라, 이제라도 와라. 와서, 식지 않는 이 가슴에 열정의 불을 일으켜 봄바람에 바람나게 좀 해다오. 시적 화자의 외침이, 그 하소연이 봄바람 타고 너울너울 흘러가고 있다. 이러한 시 세계를 함축하고 있는 배종숙 시인의 시, 그 시적 형상화 솜씨에 감탄을 내보내지 않을 수 없다.
오고 있나
가고 있나
그때
그 자리
그리움에 맴돌다
봄향기 가득 물던 자리
살랑 살랑
옷자락 휘날리던 그 자리.
- [첫사랑]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그때 그 자리가 그립다. 사랑하는 사람과 오순도순 속엣말 얘기하고 다정다감하게 대화 나누던 그때 그 자리가 정겹다. 다시 그때 그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 그 자리는 사랑하는 이의 따스한 미소와 목소리가 있었고, 온화한 품이 있었다. 그래서 삶의 의미가 모아지고 행복했다. 살랑살랑 옷자락 휘날리던 그 자리가 오늘따라 몹시 그립다. 그 후로 매번 그때 그 자리에 가 보곤 하지만, 여전히 그리움만 맴돌 뿐, 그리움이 맴돌다 사라질 뿐, 그 빈자리에 봄향기만 가득 물고 있을 뿐.
같은 봄향기이지만, 예전의 그 봄향기와는 사뭇 다르다. 사랑하는 님이랑 함께할 때의 봄향기는 평온하고도 고요하고 싱그러웠지만, 님과 헤어져 있어 그리움만 나부끼는 그 자리의 봄향기는 왠지 서글프고 힘이 없고 쓸쓸하기만 하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가고 있는지, 오고 있는지. 그리움의 거리가 가까워 오는지 멀어져 가는지. 아직까지 소식은 없고, 깜깜한 미래만 다가서 있을 뿐.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예전의 그리움이 함께하는 그때 그 자리에 섰으면 좋겠다.
아, 그리운 님이여, 이 간절한 외침이 들리는가. 대답해 주오.
이러한 시적 화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이 시를 쓴 배종숙 시인이 참 대견하다. 시인으로서의 길을 차근차근 걸어가는 모습이 매우 귀하고 소중해 보인다.
안개 속 발걸음으로
가슴에 담아둔 추억 쌓아
봄단장 꽃무덤 위에
그리움 심는다
가까이 다가왔다
멀어지는 상흔
진한 향수에 아픔만
그렁그렁 삼키자
그 모습 되살아나
동백꽃보다 더 붉은
오열 쏟아낸다
돌고 도는 바람결
바위 같은 수심에 놓여
꽃핀 그날
처량한 이별 앞에
온몸 바스러진다.
- [슬픈 이야기]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꽃무덤 앞에 이른다. 안개 속으로 걸어가 가슴에 그동안 담아둔 추억들을 꺼내어 쌓아놓은 그 꽃무덤은 봄이 왔건만 님이 없고 그리움만 남아 있다. 그래서 그리움을 홀로 심을 수밖에 없다.
가까이 다가왔다 멀어지는 상흔, 진한 향수에 아픔만 남아 있어 아무리 둘러봐도 혼자다. 아무리 원망해 봐도 역시 혼자다. 아픔만 그렁그렁 삼켜야 하는 홀로 된 슬픔만 짓누른다. 이 모습이 되살아날수록 동백꽃보다 더 붉은 오열을 쏟아낸다. 왜 이리 아플까. 얼마나 짙은 사랑을 했기에 이토록 아픈 걸까. 돌고 도는 바람결에도, 바위 같은 수심에도 결코 놓을 수 없었던 사랑이었는데, 그 어려운 고비에도 꽃핀 사랑이었는데, 결국에는 처절한 이별을 맞이하더니,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온몸 바스라지는 이 아픔, 이 슬픔, 이 운명, 어떻게 추스린단 말인가. 왜 인생이 이다지도 슬프단 말인가. 평생 이 슬픈 이야기를 가슴에 묻고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누구든 말 좀 해다오. 왜 침묵뿐인가.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단 말인가. 가슴 답답하게, 마음 짓눌려 숨 한 번 제대로 쉴 수 없는 이 인생의 공간에서 여생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한단 말인가.
지독한 아픔, 처절한 슬픔, 견고한 고독의 세계를 시적 형상화 속에 잘 담아 놓고 있는 이 시, 시의 효용성을 독자의 가슴에 잘 전달하고 있는 이 시, 멋스럽다.
밥상머리에
지그시 눈감고
몸뚱이 올려놓으면
한 점 한 점
사뿐히
밥숟갈로 올라탄다
머리는 지애비에게
가슴살은 자식들에게
꼬리는 흔들 흔들 아낙에게
각각 바람 잡고 있다
청초한 꿈 아로새기며
소주 한 잔의 향에
그리움이 젖는다.
- [고등어]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고등어가 되어 추억 속으로 빨려든다. 잘 익은 고등어는 밥상머리에 지그시 눈감고 몸뚱이를 올려놓고 있다. 한 점 한 점 뜯긴 고등어 살점은 사람들의 밥숟갈로 올라탄다. 할 일이 있다는 듯이. 경건한 희생 재물이 되려는 듯이. 머리는 지애비의 숟갈 위로, 가슴살은 자식들의 숟갈 위로, 꼬리는 아낙네의 숟갈 위로 각각 올라탄다. 청초한 꿈을 아로새기며 소주 한 잔의 향에 그리움에 젖으며, 마지막 삶을 마감한다.
제 몸 송두리째 인간에게 바쳐지면서도 여유로움을 잃지 않는 고등어, 마치 희생을 통해 승화되는 깨달음 같다. 무엇이 이처럼 숭고한 죽음으로 이끌었을까. 초월일까. 자포자기일까. 변신일까. 아니면 반항일까. 그 어떤 이유로도 고등어 죽음은 정당화될 수 없다. 희생은 희생이니까.
왜 한 동물이 다른 동물의 먹거리가 되어야 할까. 동물이 동물을 먹는 지구상의 오랜 관행을 깨뜨릴 수는 없을까. 동물의 먹거리를 식물로만 대체할 수는 없을까. 아무튼 고등어는 인간의 밥상 먹거리로 최후를 마친다. 왜 이토록 기꺼이 희생이 되었을까.
어쩌면 시적 화자의 희생적 삶이 고등어라는 객관적 상관물로 투영되지는 않았을까. 식구들을 위해 온몸을 다 바쳐 헌신해야 하는 여성으로서의 삶, 한 어머니로서의 삶을 되돌아보는 공간을 마련하고자 한 건 아닐까. 이처럼 배종숙 시인의 시 소재는 무한한 듯하다.
쉰 밤 없이 돌아라
쉰 낮 없이 돌아라
옭아매는 날실에
사뿐 사뿐 날아든 시 한 송이
꼭지마리 친친 휘감아
입김에 순결 싣고
비단옷이 그립거들랑
하얀 밤을 돌아라.
- [물레야]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밤낮 없이 돌고 있다. 물레가 되어 밤도 낮도 구분하지 않고 돌고 있다. 옭아매는 날실에 사뿐 사뿐 시 한 송이 날아든다. 꼭지마리 친친 휘감아 입김에 순결 싣고서 돈다. 비단옷 그리울 때마다 하얀 밤을 돈다.
물레를 통해 시적 화자의 내면을 그림으로 그려내고 있다. 시적 화자는 아직까지 순결을 지키고 있는 듯하다. 간혹 시를 쓰며 그리움을 토해내고 있다. 님을 만나기 위해서 시적 화자는 물레처럼 쉴 새 없이 돌고 또 돈다. 비단옷을 짜야 한다. 그래야 님을 만날 수 있다. 하루라도 더 빨리 보기 위해, 하루라도 더 빨리 님의 품에 안기려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비단을 짜야 한다.
시를 쓰듯, 물레를 돌리듯, 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순결하게 간직하며, 님을 위해, 님만을 위한 물레를 돌리고 있다. 그 모습이 참 애틋하고 애절하다. 지독한 사랑, 헌신적인 사랑, 지순한 사랑이 느껴진다. 시인의 평소 시 쓰기에 대한 열정이 이 시 속에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품안에 소롯이 맺힌 사랑가
갓 태어난 연둣빛 길 잃을까
허리춤에 매달고 써 내려간 연서
시린 코끝에 머무는
그리움의 애틋한 길목에서
겨우내 아픔을 참고 참아
춘풍에 입맞춤하며
수놓는다
된서리에 떨림 있는 날에도
보일 듯 말 듯 설렘의 가슴밭은
여전히 타오른다
움트는 속살 여닫고 있는 날에도.
- [꽃잎]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연서를 쓰고 있다. 품안에 오래도록 담겨 오다 소롯이 맺힌 사랑가, 갓 태어난 연둣빛 길 잃을까 봐 조심조심 허리춤에 매달고서 사랑의 편지를 써 내려가고 있다.
쉽게 만날 수 없어 아린 가슴은 시린 코끝에 머무는 그리움과 함께 애틋한 길목에 서 있다. 겨우내 아픔을 참고 참으면서. 그 아픔이 지독할 만큼 깊숙이 밀려온다. 그럴 때마다 두 손발이 시리고 마음과 가슴이 아리고 허리가 시큰거린다. 그런데도 굴하지 않고 춘풍에 입맞춤하며 수놓는다. 된서리에 떨림이 있는 날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현실은 어둡지만, 시련은 지속되고 있지만, 만남의 기회는 막연하기만 하지만, 보일 듯 말 듯 설렘의 가슴밭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움트는 속살 여닫고 있는 날에도 포기는 없다. 죽는 날까지 손놓고 절망에 잠겨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게 사랑이니까. 이게 그리움의 본질이니까. 좌절 속에는 사랑의 향기가 남아 있질 않으니까.
진정한 사랑의 길을 가는 시적 화자의 내면을 관찰하고 해석하여 이처럼 시적 형상화를 함으로써 시의 특질에 대해 보다 선명히 입증해 주고 있다. 구상(품안, 연둣빛, 허리춤, 시린 코끝, 아픔, 춘풍, 된서리, 움트는 속살)과 추상(사랑가, 연서, 그리움의 애틋한 길목, 설렘의 가슴밭)의 적절한 조화로움도 이에 기여하고 있다.
눈 오는 밤길 위
아롱진 여울목에서
빛바라기 휘날리며
발자국 소리 남긴다
뒤안길 돌고 돌아
눈물 속에서 하염없이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나를 끌어안고
무엇이 떠밀어 버리는가
봄밤에
눈시울 쥐어짠다
쏟아지는 눈물 머금고
까아만 하늘을 바라보며
들릴락 말락
눈송이들이 마음속에 끼어든다
겉돌지 말고
바른길로 돌아서 가라고
꿋꿋이 나아가라고
용기 잃지 말고 살아가라고.
- [늦은 귀갓길에]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눈 오는 밤길을 돌아오고 있다. 빛바라기 휘날리고 발자국 소리 남기며 뒤안길을 돌고 돌아 걸어가고 있다.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수없이 물어 보며, 무엇이 자신을 끌어안고 무엇이 떠밀어 버리는가를 물어 보며. 봄밤인데도 눈시울이 젖고 눈물이 쏟아진다. 까만 하늘을 바라보지만 허허로운 마음은 달랠 수 없고, 오히려 눈송이들만 마음속에 들릴락 말락 끼어들 뿐이다. 겉돌고 있는 인생, 그래서 헛길로 발 디딜지도 모르는 시적 화자에게 바른길로 돌아서 가라고 눈송이들은 소리친다. 꿋꿋이 나아가라고, 용기 잃지 말고 살아가라고 충고한다.
이 귀한 충고를 들으면서도 시적 화자는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 늦을 귀갓길인데도 반겨줄 이가 없는 거처는 여전히 삭막할 뿐이다.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고 싶다. 사랑의 소중함, 사랑과의 동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이 시는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이 길이냐
저 길이냐
길에게 물었다
뒤돌아보지 말고 가란다
하늘거리는
이파리에게 물었다
이마 다독이며 마음속의
길을 걸어가란다
길가에 아롱다롱 유혹하는 꽃들에게 물었다
벌어진 꽃잎 사이에서
향주머니 내밀며
메마르지 말고 향기 따라 가란다
갈 길이 바쁜 바람이
나를 힐끗 쳐다본다
바람 등을 잡고
바람 소리 듣고 싶다고 하자
내 가슴의 두 귀를 잡고
속삭이듯 살랑살랑 말한다
굳이 가야 할 먼 길이 있다면
돌고 돌아 느긋이 가란다.
- [두 갈래길에서]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길에게 묻는다. 이 길이냐, 저 길이냐. 이때 길은 뒤돌아보지 말고 가라고 한다. 이번에는 이파리에게 묻는다. 그랬더니, 이마 다독이며 마음속의 길을 걸어가라고 한다. 이번에는 길가에 아롱다롱 유혹하는 꽃들에게 묻는다. 꽃들은 벌어진 꽃잎 사이로 향주머니니 내밀며 한마디한다. 메마르지 말고 향기 따라 가라고. 그때 갈 길이 바쁜 바람이 힐끗 쳐다본다. 시적 화자는 소리친다. 바람의 등을 잡고 바람 소리 듣고 싶다고. 이때 바람은 가슴의 두 귀를 잡고 속삭이듯 살랑살랑 말해 준다. 굳이 가야 할 먼 길이 있다면 돌고 돌아 느긋이 가라고.
깊은 철학이 느껴지는 말들이 시 속에 자리잡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마음속의 길은 무얼까. 메마르지 말고 향기 따라 가라는 건 또 무얼 의미하는 걸까. 굳이 가야 할 먼 길이 있다면 돌고 돌아 느긋이 가라는 뜻은 또 무얼까. 어쩌면 이 모든 게 다 사랑의 길일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사랑은 마음속의 길을 가는 것, 세파가 아무리 거세고 험난해도, 그것들은 그냥 장식일 뿐. 사랑이 가는 길은 마음속의 길이다. 그 길은 향기 따라 가야 한다. 향기 없는 사랑은 가치 없는 사랑일 테니까. 또한 사랑의 길은 먼 길이다. 그러니 돌고 돌아 느긋이 가야 한다. 서둘러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절벽에 난 외길처럼 천천히 돌고 돌아 차근차근 걸어가야 한다.
사랑의 길은 좁다란 길, 협곡의 길, 외진 길이라서, 서둘러 간다고 해서 사랑의 완성을 빨리 만나지 못한다. 인생 전체가 사랑의 길이다. 그러니, 되도록 천천히 음미하면서 가야 한다. 이 깊은 세계관을 배종숙 시인은 시를 통해 강조하고자 한 건 아닐까.
지금까지 우리는 배종숙 시인의 시 세계를 탐색해 보았다. 우선 정선된 시어로 짜여진 절제미가 단연 돋보이는 시들을 만날 수 있었다. 평이한 시어들인데도, 낯설게 하기의 기법을 통해 매번 다채로운 시 소재를 깔아 놓고 그 위에 이미지 구현과 상징의 고리를 구축해 놓고 있다. 그리하여 시적 화자의 내면을 시적 형상화의 터널로 장식해 놓고 있다.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시의 특질을 구비해 나가는 솜씨가 일품이다.
이제 배종숙 시인은 그 어떤 일상의 소재도 자유로이 시적 형상화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듯하다. 이런 흐름으로 나아간다면, 제2, 제3시집뿐만 아니라 제11시집, 나아가 시선집에도 무난히 도전하리라 여겨진다. 그때가 되면, 이 첫 시집이 나오던 때를 뒤돌아보며 새삼 감회에 촉촉이 젖을 것이리라.
몇 번을 다시 읽어 봐도, 배종숙 시인의 시들은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 싱그럽고 아름다운 봄날에 이런 향기로운 시들을 만날 수 있어 행복하다. 부디 오래도록 시의 멋스런 동산에서 사랑받는 시인으로 남아 주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후회하지 않는 인생의 탑을 구축하기를 소망해 본다.
- 박덕은 문학관의 화단에 꽃씨들을 뿌려 놓고 높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한실 문예창작 지도 교수 박덕은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시인, 소설가, 동화작가, 희곡작가, 수필가, 화가, 사진작가)
목차
목차
작가의 말
祝詩_박덕은
1장 - 바람났네
2장 - 얼음새꽃
3장 - 그리움이었나 봐
저자
저자
〈문학공간〉 신인문학상 시 당선
〈문학공간〉 신인문학상 시조 당선
용아 박용철 전국 백일장 수상
그루비 문학상 수상
한실 문예창작 회원
한꿈 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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