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감기몸살처럼(오늘의 시선집 36)
박봉은 시화집
이미지와 상징과 이야기를 동반한 대구 형식, 의인화의 적절한 활용, 추상과 구상의 절묘한 배치, 자연스런 시상의 흐름, 튼실한 시적 형상화 등이 박봉은 시인의 시들을 한층 격상시켜 주고 있다. 시는 찰나의 예술이지만, 감성의 파노라마를 만나게 해주는 장르이다. 그래서 가슴의 예술이다. 이성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곳을 이미지화된 감성으로 뚫고 들어가 감동과 전율을 이끌어내는 장르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이미지 구현을 필요로 하고, 낯설게 하기를 통한 새로운 해석, 싱그러운 착상, 시상의 흐름을 도와주는 리듬 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박봉은 시인의 시들은 이러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어, 오래도록 읽히는 시들로 남으리라 여겨진다(한실 문예창작 지도 교수 박덕은, 박봉은 시인의 제7시집 출간을 축하하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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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화가이자 사업가인 박봉은 시인은 지금까지 6권의 시집을 펴낸 바 있다.
박봉은 제1시집 [당신만 행복하다면]에서는 우리 주위의 사물과 추억과 상념에 대해 다채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미지로 시적 형상화를 해놓아 독자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사물을 바라보는 신선한 감각과 그 새로운 해석을 통해 활기찬 삶의 에너지를 이끌어 내는 솜씨를 보여 주었다. 그 어떠한 세파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은 삶을 예찬하고, 다정함과 따스함과 애틋함으로 타인의 아픔을 감싸고 공감하며, 삶의 의미와 방향을 밝게 이끌어 나가고 있다.
박봉은 제2시집 [아시나요]에서 시인은 자기 자신을 키워 준 모든 것들에 깊이 감사하고 고마워하고 있다. 당신을 설정해 놓고, 그 당신을 주축으로 시상을 끌어가고 있다. 시 속의 당신은 그의 이상향일 수도 있고, 연인일 수도 있고, 스승일 수도 있고, 또 자신의 인생 길잡이일 수도 있다. 그 당신을 향해 줄기찬 감사와 존경과 애정을 바치고 있다. 더불어 그 안에서 기쁨을 느끼고 희망을 품고 보람을 느끼며 행복해 하고 있다. 그는 가슴으로 시를 쓰고 있다. 이미지 구현보다는 사랑의 향기를 서술의 물줄기 위에 실어 구구절절 호소하고 있다. 그리하여 읽은 이들의 가슴에 자리잡고 있는 보편성에 감동의 전율을 선물하고 있다. 더불어 아이러니를 적절히 기저에 깔아 놓아 더욱 진하고 감동적인 호소력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박봉은 제3시집 [당신에게/하나]에서는 아주 단순한 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저 하고픈 내면의 웅얼거림을 아주 듣기 편하게 자연의 소리처럼 마구 쏟아내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그 어떤 가식이나 억지나 수다스런 포장도 하지 않는다. 가슴속에 흐르고 있는 감성의 소리에 소박한 이미지의 옷을 입혀 봄나들이를 내보내고 있을 뿐이다. 시에게 순수한 가슴이 있다면, 그곳을 향해 돌진하여 한아름 시심을 들고 나와 너울너울 나비처럼 날아가고 있을 뿐이다. 이 기법을 통하여 독자의 가슴을 울리고 웃기고 함께 눈물짓고 감동하고 함께 미소 지으며 기뻐하고 있다.
박봉은 제4시집 [비밀 일기]에서는 다시 제1집으로 회귀한 듯한 시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는 휘몰아가는 듯한 시상의 흐름을 약간 멈추고 좀 더 여유롭게 관조적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 사물 하나하나 섬세히 관찰하거나 내려다보면서 새로운 각도로 해석하고, 되도록 이미지 구현으로 시적 형상화를 이루면서 시의 맛과 멋을 한층 강화시켜 놓고 있다. 그러면서 내면의 아픔과 응어리를 미적 가치의 그릇에 담아 반성하고 나아가 치유라도 하려는 듯 진솔히 토로하고 있다. 그 모습이 멋스럽다.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들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시를 통해 치유하고 시를 통해 부정을 긍정으로 끌어올리는 에너지와 힘과 기, 그게 그의 시에서 느껴지기에 그만큼 소중하다.
박봉은 제5시집 [유리인형]에서 보여지는 특징은 대구법을 잘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1연부터 마지막 연까지 통일시켜 놓고 있는 대구법. 우리 주변에 평이하면서도 꼭 하고픈 말들을 배치해 놓되, 출발은 서술이지만 이를 이어받은 것들은 대부분 이미지로 처리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 흐름이 박봉은 시인의 독특한 시 기법이기도 하다. 평이한 일상에서 소재를 택하고 이를 서술로 출발시켜 놓고, 대구를 이루며 마무리는 이미지로 처리하는 표현 기법, 얼른 보아 시가 아닌 듯하면서도 시의 맛을 갖게 하는 기법이다. 현대인들이 시를 어렵게 여겨 읽기를 피하기 쉬운데, 그런 면에서 박봉은 시들은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가 가슴을 열게 한 뒤 잽싸게 파고들어가 이미지를 심어 놓는 기법을 잘 활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들을 독자들이 한결같이 좋아하나 보다.
박봉은 제6시집 [당신에게/둘]은 제3시집 [당신에게/하나]의 후반부이다. 연작시 "당신에게" 시리즈가 여전히 불을 토하듯 열정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수록된 시들은 무수한 사랑의 질문들을 쏟아내고 있다. 어떤 사랑이 진실된 것일까.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 사랑의 가치는 어디에 두어야 하는 것일까. 진실된 사랑의 공간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랑은 함께해야만 완성되는 것일까. 그냥 그리움만으로도 사랑을 완성시킬 수는 없을까. 사랑은 그리움 속에서 성장하고 완성되는 건 아닐까.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랑의 보상을 받은 건 아닐까. 무수한 질문에 질문을 쏟아내게 만드는 박봉은 시인의 제6시집,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시심들, 만나고 또 만나도 질리지 않는다. 그 이 점이 늘 독자들의 가슴을 흡족하게 해주는 건 아닐까.
자, 그러면 지금부터 박봉은 제7시집 [지금부터] 속으로 들어가 감상해 보도록 하자.
동화 속 설레임이 넘실대는
투명함 속에
주인공은 이미
자리를 비운 지 오래
세월의 빈껍데기만
덕지덕지 매단 채
들풀처럼 많은 이야기 잔뜩 눌러쓴
아버지 닮은 한 노인이
초점 잃은 두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무언가 할 말이 많은 듯
노랗게 빛바랜 입술이
파르르 떨고 있고
전등 불빛 타고
끝없이 흘러내리는 회한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망각의 늪으로
무작정 달려가고 있다
가끔씩 솟아오르는
뭔가를
잔인하게 짓밟아 버리며.
- [거울 속에 비친 나]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중년을 넘어진 노인이다. 그는 세월의 빈껍데기만 매달고서 수많은 얘기 잔뜩 눌러쓴 아버지를 닮아 있다. 그 노인이 시적 화자를 초점 잃은 두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할 말을 잃은 듯 파르르 입술이 떨고 있다. 그나마 회한들은 망각의 늪으로 달려가고 있다. 가끔씩 솟아오르는 뭔가를 짓밟아 버리며 달리고 있다.
그 뭔가가 뭘까? 어쩌면 인생을 다시 시작하려는 열정은 아닐까? 회한을 일으키지 않은 진정한 삶, 사랑도 열정도 순수히 받아들이는 삶,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굳게 일어서려는 굳은 의지의 삶, 사랑의 전선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의지의 삶, 그건 아닐까? 늙어 가는 노인이 되어 버린 시적 화자가 늙음도 인생이요 과거도 인생임을 깨닫고, 이제라도 주어진 삶을 최대한 즐기며 가치 있게 보내기를 기원해 본다.
일그러진 욕망은
투명한 접시 위에
얹어 놓고
뻣뻣한 자존심은
침묵의 땅에
깊게 묻어 놓고
오염된 피는
정맥 잘라
미련 없이 다 쏟아 버리고
염치고 체면이고 다
흔적도 없이
뭉개 버리고
더 작게 더 낮게
있는 듯 없는 듯
살련다.
- [지금부터]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일그러진 욕망을 접시 위에 얹어 놓고 자존심은 침묵 속에 묻어 놓고 오염된 정맥의 피를 다 쏟아 버린다. 염치, 체면까지 다 뭉개 버리고, 더 작게 더 낮게 낮아져 있는 듯 없는 듯 살겠다고 신경질적으로 말한다.
한편으로는 자포자기인 듯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설로 보인다. 지금부터 어쩌겠다는 것인가. 욕망을 접시 위에 올려놓은 걸 보면, 아직 인생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나 보다. 하지만 자존심을 내세우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있는 듯하다. 문제는 오염된 정맥이다. 그 때문에 실패한 인생일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지금부터 오염된 세계, 오염된 마음, 오염된 생각 등을 버리겠다는 것인가. 그런데도 염치와 체면까지 뭉개 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염치와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간 그 오염의 세계에서 벗어나겠다는 뜻인가. 결국 도달한 깨달음의 언덕은 바로 더 낮게 더 작게라는 세계다. 있는 듯 없는 듯 살겠다는 건 어디든 선뜻 나서지 않겠다는 뜻인 듯.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의지와 결심을 갖는다고 인생이 변화될까? 의문이 간다. 거기에는 사랑과 헌신이 없기 때문이다. 긴 인생을 산 뒤에 후회없는 삶, 그건 역시 헌신 위에 세워진 사랑이 아닐까. 이 시를 통해 독자들은 여러 생각과 사고 속으로 휩쓸려 들게 된다. 박봉은 시인의 시 세계의 매력이 바로 이게 아닐까. 시를 읽으며 여러 생각과 사고를 하게 된다는 것, 놓칠 수 없는 매력이라 여겨진다.
투명한 비구슬을
입안 가득 머금고
휘돌아다니며
세차게 여기 저기
마구 뿜어댄다
까칠해진 비바람
가슴 주머니에 몰아 담고
하늘로 땅으로 휘젓고 다니며
거칠게 사방천지를
마구 흔들어댄다
회색빛 구름덩어리
바구니에 담아 옆구리에 낀 채
휘감아 올라타고
잽싸게 어둠 쪼가리들을
마구 주워 담는다
천방지축 천둥과 번개
손에 쥐고 휘두르며
산야를 휩쓸고 다니며
빠르게 수없이
마구 때려댄다.
- [증오]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증오이다. 그는 비를 입안 가득 머금고 휘돌아다니며 세차게 뿜어낸다. 때로는 가슴에 비바람 담고 사방천지를 휘젓고 다니며 마구 흔들어댄다. 때로는 구름을 옆구리에 바구니를 낀 채 어둠 쪼가리들을 주워 담기도 한다. 때로는 천둥과 번개까지 손에 쥐고 휘두르며 산야를 마구 때려대기도 한다. 증오가 참 무서운 존재임을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시인 듯 웅변인 듯, 묘사인 듯 서술인 듯, 동시인 듯 아닌 듯 마구 질주하는 현란한 언어 예술을 보여 주고 있는 박봉은 시인의 시들은 나름의 재미와 특이성을 보유하고 있다. 이미지 구현이 약한 듯 보이는 자리엔 어김없이 이미지가 등장하고, 너무 서술에 치우친 듯한 곳에는 슬그머니 상징과 역설과 아이러니가 등장하여 약점을 보완한다. 시와 일기와 독백과 칼럼과 수필이 동시에 존재한 듯한 시 형태, 이게 바로 박봉은 시인의 문체인 듯하다.
안개 가득 서린
가슴 깊은 곳에서
새하얀 꽃 한 송이로
부스스 눈을 뜨며
해맑게 피어나
기억 속에 잠겨 있다
끝없이 솟아나는
맑디맑은 영혼 따라
소리 없이 녹아들더니
아련한 시간의 계곡 속에서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거대한 추억의 불길로
솟구쳐 오르다
파래처럼 하늘 보고
그냥 납작하게 누워
온몸을 바싹 말려대더니
어스름처럼 느릿느릿
나무 타고 내려와
응어리진 가슴속 허전함으로
자리잡는다.
- [그리움.1]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그리움에 푹 젖어 있다. 몸과 맘이 온통 그리움에 파묻혀 있다. 가슴속에선 흰 꽃송이로 피어나 있는 그리움으로, 기억 속에선 끝없이 솟아나는 영혼 따라 소리 없이 녹아드는 그리움으로, 세월 속에선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추억의 불길로 솟구쳐 오르는 그리움으로, 때론 파래처럼 납작하게 누워 온몸 바짝 말려대는 그리움으로, 때론 어스름처럼 다가와 허전함으로 자리잡는 그리움으로 각자 시적 화자의 삶을 온통 지배하고 있다.
그 그리움을 놓아 버리면 되는 것을, 왜 아직도 못 버리는 것일까. 왜 그리움이 인생 자체를 뒤흔들도록 그냥 지켜보고만 있는 걸까. 그리움의 끈이 사랑이라는 걸 터득한 것일까. 그리움이 끊어지면 사랑도 끝난다는 걸 시심은 이미 알아 버린 것일까.
텅 빈 가슴에 하얀 종이 한 장
작은 손 안에 가는 붓 하나 든
수줍은 설레임이 산을 올랐다
물안개 사이로 서서히 드러나는
도도한 자태들과
봉우리를 넘나드는 바람만이
넋 나간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 끝자락에 서서
하늘과 땅을 바라보며
수만 년을 견뎌온 기암괴석들이
외치고 있었다
입은 있으나 할 말이 없고
눈은 있으나 다 담을 수 없고
귀는 있으나 다 들을 수 없고
가슴은 있어도 다 품을 수 없어라
수천 년을 살아온 검은 노송이
솔잎 하나 떨어뜨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덧붙였다
지금까지 그토록 애지중지 부둥켜안고
살아왔던 절망도 아물지 않은 상처도
별것 아니니라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산자락을
수없이 밟고 또 밟고
오르고 또 올라도
그저 말없이 바라다보기만 하는
침묵의 눈길
높이를 알 수 없었던
아버지의 고뇌처럼
등허리를 말없이 다독이며
어루만지고 있을 뿐.
- [황산을 오르며]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중국 황산을 오르고 있다. 가는 붓 하나 든 설렘으로 걸어간다. 물안개, 도도한 자태, 봉우리, 바람 등을 온몸에 느끼며 산을 오르고 있다. 절벽 끝자락에는 하늘과 땅을 바라보며, 기암괴석의 외침도 들으며 걷는다. 그러다 깨닫는다. 입은 있으나 할 말이 없음을, 눈은 있으나 다 담을 수 없음을, 귀는 있으나 다 들을 수 없음을, 가슴은 있으나 다 품을 수 없음을. 왜 이제 와서야, 왜 황산에 와서야 이 깨달음에 이른 것일까. 늙은 노송이 솔잎 하나 떨어뜨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깨달음의 깊이를 더해 준다. 오래도록 부둥켜안고 살아온 절망도 아물지 않는 상처도 별것 아니라고 한다. 그때도 산은 말이 없다. 그저 침묵의 눈길로 지켜볼 뿐. 높이를 알 수 없었던 아버지의 고뇌처럼 산은 여전히 말이 없다. 그저 산행하는 시적 화자의 등허리를 말없이 다독이며 어루만져 줄 뿐이다.
신기하다. 특별한 표현 기법을 동원하지 않고도 시가 될 수 있다니, 놀랍다. 시가 아닌 듯하면서 시상의 흐름을 이끌어 갈 수 있다는 게 마냥 흥미롭다. 이게 만약 박봉은 시인의 문체가 된다면 좋겠다. 그만의 시 기법으로 정리될 수 있을 테니까.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사람들이
사무실 여기저기에
하나 둘 나타나 자리잡기 시작한다
보이지 않는
유리벽과 두려움과 연민과 시름을
온몸에 두른 채
구석에 놓여져 있는 소파는
고달픔처럼 갈갈이 찢기고 닳고 닳아
속살이 훤히 드러나 있다
일그러진 침묵과
전화 벨소리가 뒤엉켜
사무실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어깨 위에 걸쳐진 초조는
담배꽁초를 내려다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허공을 떠다니던 꿈의 그림자는
한 줄기 긴 한숨 소리에 놀라
작업복 위로 굴러 떨어지고
우르르 쏟아지던 두려움의 화살은
끈적끈적한 시련의 계단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고
되새김질 당한 질긴 고뇌가
슬며시 빠져나와
벽 위로 떼 지어 기어다니고 있다.
- [어느 인력시장에서]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인력 시장의 정경을 관찰하고 있다. 허름한 작업복 차림들이 자리잡기 시작한 사무실 안,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유리벽, 연민, 시름 등을 온몸에 두른 채 앉아 있다. 눈길은 구석 소파로 간다. 고달픔처럼 갈갈이 찢기고 닳아 있다. 속살까지 드러나 있는 소파, 가난이 저절로 떠올라 서글프게 하고 있다. 일그러진 침묵, 전화 벨소리 등이 사무실 바닥에 나뒹굴고 있고, 어깨 위에 걸쳐진 초조는 내려다보며 가쁘게 숨쉬고 있고, 허공을 떠돌아다니던 꿈의 그림자는 긴 한숨 소리에 놀라 작업복 위로 굴러 떨어지고, 두려움은 시련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고, 되새김질 당한 고뇌는 떼 지어 벽 위로 기어다니고 있다.
읽을수록 재미나는 시이다. 추상(두려움, 연민, 사름, 고달픔, 침묵, 꿈, 시련, 고뇌)과 구상(온몸에 두른 채, 갈갈이 찢기고 닳고 닳아, 속살 훤히 드러나 있다, 바닥에 뒹굴고 있다, 가쁜 숨 몰아쉬고, 굴러 떨어지고, 끈적끈적한, 계단 앞에서, 되새김질 당한, 슬며시 빠져나와, 벽 위로 떼 지어 기어다니고 있다)의 교묘하고도 절묘한 조화로움이 돋보이는 시이다. 그 덕택에 시상의 흐름이 지루하지 않고 감칠맛을 유지하고 있다.
전철을 타고 혜화역에 내려
계단을 올라가니
즐비하게 늘어선 노점상들이
저마다 상품들을 진열해 놓고
진득 진득한 시선을 굴리고 있었다
나뭇잎들이 다 떨어져 버린
겨울나무처럼
모시바람에 하루 종일
온몸을 내맡긴 채
소리 없이 몸부림치는
시간의 목덜미를 깔고 앉아
하루 종일 꼼짝도 않고 서서
깊디깊은 침묵을 퍼 올리고 있었다.
= [어떤 정경] 전문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전철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간다. 노점상들의 상품에 눈길을 주며 걷는다. 나뭇잎들은 모시바람에 온몸을 내맡긴 채 서 있고, 소리없이 몸부림치는 시간의 목덜미를 깔고 앉아 하루 종일 깊디깊은 침묵을 퍼 올리고 있는 정경을 바라본다.
의인화의 활용이 두드러지는 시이다. 노점상들이 진득진득한 시선을 굴린다는 표현, 나뭇잎들이 진종일 모시바람에 온몸을 내맡긴다는 표현, 나뭇잎들이 몸부림치는 시간의 목덜미를 깔고 앉아라는 표현, 나뭇잎들이 깊디깊은 침묵을 퍼 올린다는 표현 등이 그렇다. 뭐든 사물을 의인화하면 시적 형상화의 초석을 깔 수 있어 좋은 듯하다. 서술을 위주로 하는 박봉은 시인의 시에선 꼭 필요한 기법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표현 기법의 하나로 보충해 나가는 솜씨가 남다르다.
백사장 모래알처럼
많은 역사의 시간들이
부르터진 영혼들을 위해
피를 토하고 있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 [명자나무꽃]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명자나무꽃에 대해 아주 간단명료한 시적 형상화를 해놓고 있다.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많은 역사의 시간들, 이게 부르터진 영혼을 위해 피를 토하고 있었다, 바로 이 사실을 명자나무꽃은 미처 알지 못했다고 함으로써 이미지 구현을 완결시키고 있다.
피를 토하는 주체는 역사의 시간들이다. 의인화를 통해 시적 형상화의 통로를 열고 있다. 영혼은 부르터져 있고, 그 영혼을 위해 피를 토하고 있는 건 역사의 시간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한 것은 명자나무꽃이다. 모든 걸 뒤집어쓰고 있지만, 그래도 명자나무꽃은 자기 임무를 완수하고 있다. 독자에게 부르터진 영혼을 위해 피를 토하고 있는 존재가 명자나무꽃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기에 충분했으니까.
살며시
당신 손을 맞잡고 있노라면
마치 한몸이 된 듯
당신의 온몸에 흐르는 피가
몽땅 다 내 몸속으로
밀물처럼 스며들어 오는 것 같아요
지그시
당신의 웃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당신의 미소가
아지랑이 꽃밭으로 쏟아지는
금빛 햇살처럼
나의 까칠한 마음 위로
우르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아요
가만히
귀를 기울여서
당신의 재잘거리는 소리 듣고 있노라면
마치 창호지에 물이 스며들 듯
내 마음속으로
소리 없이 번져 들어오는 것 같아요
- [가을]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가을을 당신에 비유하고 있다. 가을의 손을 맞잡고 있으면 마치 한몸이 된 듯하다. 가을의 온몸에 흐르는 피가 몽땅 시적 화자의 몸속으로 스며들어온 것 같다. 가을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당신의 미소가 아지랑이 꽃밭으로 쏟아지는 것 같다. 그리고 까칠한 마음 위로 쏟아지는 것 같다. 가을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소리 없이 마음속으로 번져 들어오는 것 같다.
시의 흐름이 전개될수록 가을이 곧 당신이요, 당신이 곧 가을이라는 의미가 어우러져 살과 피처럼 하나되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절절한 하소연이 스며들고 있다. 이토록 절실한 당신인데, 어찌 곁에 없는가. 이미 가을처럼 다가왔는데, 어찌 이리 그리움만 남아 있단 말인가. 시적 형상화와 이미지 구현은 감성의 그릇을 만들어내고, 그 그릇 안에 의미 방울을 하나씩 모아 감동을 자아내도록 도와준다. 박봉은 시인의 시들은 거의 모두 이 기법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 하겠다.
그리움에 그을린
먼 산자락은
지평선 위에 맥없이 길게 드러누워 있고
아쉬움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몸부림치던 외로움은
강렬한 분노를 토해내고 있고
쓸쓸함에 바싹 말라 버린 추억은
포근한 달빛 머금은 채
가슴속으로 소리 없이 번져 가고
별빛 타고 흘러내린 어스름은
상처 난 기억 속 허전함을
연신 핥아대고 있다.
- [해질녘]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산야를 관찰하고 있다. 그리움에 그을린 산자락은 지평선 위에 길게 드러누워 있고, 아쉬움 속에서 몸부림치던 외로움은 분노를 토해내고 있고, 쓸쓸함 때문에 바싹 말라 버린 추억은 포근한 달빛 머금은 채 가슴속으로 번져 가고 있고, 어스름은 허전함을 연신 핥아대고 있다.
이 시에서도 추상과 구상은 찰떡궁합으로 만나고 있다. 그리움에 그을린 산자락, 지평선 위에 누워 있고, 아쉬움의 늪 속, 몸부림치던 외로움, 토해내는 분노 등이 그것이다. 그러는 중에 이미지 구현이 자연스레 이뤄져 있어, 시적인 맛이 살아 있어 좋다.
다만, 너무 평이한 듯한 이미지 구현, 대구 형식의 단조로운 반복, 새로운 해석이 가미 되지 않은 낯설게 하기, 감동의 전율이 흐르게 하는 신선한 착상 등이 보완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와 상징과 이야기를 동반한 대구 형식, 의인화의 적절한 활용, 추상과 구상의 절묘한 배치, 자연스런 시상의 흐름, 튼실한 시적 형상화 등이 박봉은 시인의 시들을 한층 격상시켜 주고 있다.
시는 찰나의 예술이지만, 감성의 파노라마를 만나게 해주는 장르이다. 그래서 가슴의 예술이다. 이성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곳을 이미지화된 감성으로 뚫고 들어가 감동과 전율을 이끌어내는 장르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이미지 구현을 필요로 하고, 낯설게 하기를 통한 새로운 해석, 싱그러운 착상, 시상의 흐름을 도와주는 리듬 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박봉은 시인의 시들은 이러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어, 오래도록 읽히는 시들로 남으리라 여겨진다.
여기에 몇 가지 더 보탰으면 한다. 시집 한 권에 배치되는 시어들이 중복되지 않도록 노력했으면 한다. 반복적으로 배치되는 시어들은 독자들의 시선을 식상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긴 시뿐만 아니라 짧은 낙엽시도 도전해 보기를 바란다. 나아가 좀 더 다채로운 표현기법을 동원하여 시의 탑을 쌓아 가고, 나아가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상상력을 함축하는 시들도 많이 창작하길 기원해 본다.
벌써, 박봉은 제7시집 발간이라니, 참 멋스럽다. 바쁜 회사일에도 불구하고 지칠 줄 모르는 그 창착 열기, 그 성실성, 그 인내, 그 열매들에 아낌없는 칭찬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시들이 번역이 되어 전 세계로 뻗어나가 세계 독자들도 함께 감명 받는 때가 곧 왔으면 좋겠다. 늘 건투를 빈다.
- 무더위 속에서도 나팔꽃이 피고 오이가 익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실문예창작 지도 교수
(전 전남대 교수,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시인, 수필가, 화가, 아프리카tv B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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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1
친구2
유학 떠나는 아들을 바라보며
딸 결혼하는 날
나의 손자
거울 속에 비친 나
사랑은 감기몸살처럼
부부
2장 추억에게
죽음
지금부터
고뇌의 말
추억에게
이별 앞에서
행복
회한1
회한2
회한3
회한4
추억들에게
넋두리1
넋두리2
깨달음
증오
추억의 향기
기도1
기도2
기도3
회상1
회상2
식별1
식별2
식별3
詩창작
나의 친구1
나의 친구2
나의 친구3
해후
그리움1
그리움2
늪
기다림
3장 어떤 정경
어떤 정경
섬진강가
뚝섬에서
새벽 고속버스터미널
황산을 오르며
새벽 남대문 시장에서
한밤 서울역에는
새벽 노량진 수상시장
어느 인력시작에서
꽃샘추위
명자나무꽃
봄날
심장
철쭉꽃1
철쭉꽃2
아카시아 꽃
산 정상
열대야
인터넷
코스모스1
코스모스2
어느 늦가을1
어느 늦가을2
어느 늦가을3
어느 늦가을4
어느 늦가을5
토함산을 오르며
가을
첫눈
설경
꽃샘추위
어느 늦가을
해질녘
벚꽃
어느 봄날에
5월에는
봄꽃에게
억새
해질 무렵
저자
저자
1955년 전남 화순 출생
[문학공간] 신인문학상 詩 당선 (2010년)
한실문예창작 회원
(주)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무역대리점협회 정밀과학기기 분과위원 역임
재경 전남고등학교 총동창회장 역임
상공자원부 장관 감사장 수상(1994년)
통상산업부 장관 표창장 수상(1997년)
경기대학교 총장 공로상 수상(2011년)
경기대학교 서비스경영대학원 경영대상 수상(2011년)
경기대학교 서비스경영대학원 총동창회장 공로상 수상(2012년)
국제라이온스협회 무궁화사자대상(금장) 수상(2012년)
제15회 세계평화미술대전 입선(2012년)
제11회 한국수채화 아카데미 입선(2012년)
경기대학교 서비스경영대학원장 공로상 수상(2013년)
국제라이온스협회 무궁화사자대상(금장) 수상(2013년)
경기대학교 총장 공로상 수상(2013년)
제16회 세계평화미술대전 특선(2013년)
서울특별시 구로구청장 표창장 수상(2013년)
제50회 목우공모미술대전 특선(2013년)
제51회 목우공모미술대전 특선(2014년)
국제라이온스협회 무궁화사자대상(금장) 2회 수상(2014년)
21세기를 빛낸 자랑스런 한국인물 대상 수상(2014년)
국제라이온스협회 무궁화사자대상(금장) 4회 수상(2015년)
354-D지구 제 10지역 부총재 역임
국제라이온스협회 무궁화사자대상(금장) 3회 수상(2016년)
국제라이온스협회 국제회장 감사장 수상(2016년)
스포츠서울 2016 Best Innovation 기업 & 브랜드상 수상(2016년)
스포츠조선 2016 대한민국 문화예술대상 수상(2016년)
354-D지구 의전분과위원장 역임
국제라이온스협회 무궁화사자대상(금장) 2회 수상(2017년)
국제라이온스협회 국제회장 감사장 수상(2017년)
354-D지구 문화예술봉사분과위원장(현)
포시런문학회 회장
한꿈문학회 회원
바로문학회 회원
* 저서
제1시집 : 당신만 행복하다면
제2시집 : 아시나요
제3시집 : 당신에게·하나
제4시집 : 비밀일기
제5시집 : 유리인형
제6시집 : 당신에게·둘
제7시집 : 사랑은 감기몸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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