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중국 사서로 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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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역사를 새롭게 조망한다!
우리나라는 한사군 설치 이후에 중국 문물의 영향을 받아 문명화가 진행되었고, 신라, 고구려, 백제 순으로 고대국가가 건국되었다는 게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고조선과 부여 문명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을지언정 모든 정치 문화 제도가 중국 문명과 전혀 다르고, 남송시대의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보다 무려 1,000년 이상 앞선 독자적인 천문도를 가진 천자국이었다.(〈천상열차분야지도〉)
고구려는 기원전 217년 건국되었다!
①『삼국사기』는 사론(史論)에서 진(秦, BC 221년 건국) 한(漢, BC 206년 건국) 시대부터 고구려가 존재했었으며, ②『책부원귀』는 한(漢) 건국 초 고구려 추모왕(鄒牟王)이 죽었다고 하고, ③당(唐)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의 말처럼, 당나라는 고구려 역사가 900년이라고 널리 알고 있었다.(④『삼국지』 및 『후한서』에도 확인됨) 그러므로 고구려 건국은 BC 232년에서 BC 107년 사이로 추정되며, 추모왕의 즉위 간지가 갑신년이므로 BC 217년(885년)이 가장 유력하다.
고구려는 최소 5대왕이 누락되었다!
광개토대왕 비문을 보면, 『삼국사기』와 달리 광개토대왕을 12세손이 아닌 17세손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왕 계보를 가장 앞서 기록한 『위서』(魏書)에도 주몽(朱蒙), 여달(閭達), 여율(閭栗), 막래로(莫來) 4대가 이어진다는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고구려 핵심 강역인 요동(遼東)
요동(遼東)과 낙랑(樂浪)은 본래 고조선 강역으로 우리 고대사의 중심 지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역사에서도 핵심 강역이었다. 그 이유는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왕검성(王儉城) 및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이 모두 (현 중국 하북성) 요동과 낙랑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위만조선 멸망 이후 고구려는 한나라에 빼앗긴 요동 지역의 패권을 놓고 남방 농경 세력의 대표 주자인 한족(漢族)뿐만 아니라 북방 유목 세력의 대표 주자인 선비족과 수없이 전쟁을 벌이게 된다. 마침내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이후 요동은 고구려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였다.
우리나라는 한사군 설치 이후에 중국 문물의 영향을 받아 문명화가 진행되었고, 신라, 고구려, 백제 순으로 고대국가가 건국되었다는 게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고조선과 부여 문명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을지언정 모든 정치 문화 제도가 중국 문명과 전혀 다르고, 남송시대의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보다 무려 1,000년 이상 앞선 독자적인 천문도를 가진 천자국이었다.(〈천상열차분야지도〉)
고구려는 기원전 217년 건국되었다!
①『삼국사기』는 사론(史論)에서 진(秦, BC 221년 건국) 한(漢, BC 206년 건국) 시대부터 고구려가 존재했었으며, ②『책부원귀』는 한(漢) 건국 초 고구려 추모왕(鄒牟王)이 죽었다고 하고, ③당(唐)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의 말처럼, 당나라는 고구려 역사가 900년이라고 널리 알고 있었다.(④『삼국지』 및 『후한서』에도 확인됨) 그러므로 고구려 건국은 BC 232년에서 BC 107년 사이로 추정되며, 추모왕의 즉위 간지가 갑신년이므로 BC 217년(885년)이 가장 유력하다.
고구려는 최소 5대왕이 누락되었다!
광개토대왕 비문을 보면, 『삼국사기』와 달리 광개토대왕을 12세손이 아닌 17세손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왕 계보를 가장 앞서 기록한 『위서』(魏書)에도 주몽(朱蒙), 여달(閭達), 여율(閭栗), 막래로(莫來) 4대가 이어진다는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고구려 핵심 강역인 요동(遼東)
요동(遼東)과 낙랑(樂浪)은 본래 고조선 강역으로 우리 고대사의 중심 지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역사에서도 핵심 강역이었다. 그 이유는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왕검성(王儉城) 및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이 모두 (현 중국 하북성) 요동과 낙랑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위만조선 멸망 이후 고구려는 한나라에 빼앗긴 요동 지역의 패권을 놓고 남방 농경 세력의 대표 주자인 한족(漢族)뿐만 아니라 북방 유목 세력의 대표 주자인 선비족과 수없이 전쟁을 벌이게 된다. 마침내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이후 요동은 고구려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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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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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 시기는 조작되었다
고구려 건국 시기에 대한 사료는 『삼국사기』,『삼국유사』, 중국 사서로 『삼국지』,『후한서』,『책부원귀』(冊府元龜),『북사』(北史),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등이 있다.
① 김부식의 『삼국사기』 본기 사론(史論)에서, 몇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는데, 고구려는 기원전 221년 건국했던 진(秦)나라, 기원전 206년 건국했던 한(漢)나라 시대 즉 진한(秦漢) 시대부터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국경을 마주했던 큰 나라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② 『책부원귀』 외신부(外臣部)를 보면, 한나라 건국(기원전 206년) 초기 고구려 추모왕(鄒牟王)이 죽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고구려는 한나라 초에 왕인 고주몽이 죽고 아들 여율(如栗)이 즉위했다. 여율이 죽고 아들 막래(莫來)가 즉위했다. (高句麗 漢初其王高朱蒙死 子如栗立 如栗死 子莫來立)
③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 보장왕(寶臧王) 27년(668년) 2월 당(唐)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당 고종에게 한 보고에서 보듯, 당시 당나라 사람들은 고구려가 900년 역사의 나라라고 인식했으며, 이런 내용이 『당회요』(唐會要)와 『신당서』(新唐書) 고려전에도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매우 광범위하게 유포된 것이 분명하다.
④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시봉(始封)에서 1124년 북송(北宋) 서긍(徐兢, 1091~1153년)이 한 말의 문맥을 보면, 위만이 나라를 차지하여 80여 년을 지나는 기간에 앞서는 때에 고구려 건국이 이루어졌다고 서술하여, 위만조선 건국연대인 기원전 194년 이전에 이미 고구려 건국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⑤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할 때 이미 고구려가 있었다는 것은 『삼국지』 및 『후한서』에도 확인되고 있다.
위에서 건국 시기를 추산해 보면, 고구려는 기원전 232년 이전에는 없었고, 기원전 107년 이전에는 있었으므로 추모왕 즉위의 간지인 갑신년이 바로 고구려 건국 시기이다. 따라서 갑신년에 해당하는 기원전 217년(885년), 기원전 157년(825년), 기원전 97년(765년), 기원전 37년(705년) 중에서 기원전 217년이 가장 유력하다 하겠다.
고구려의 핵심강역 요동(遼東)
중국 고대 문헌에 나오는 요동은 본래 구주(九州, 중국 전역을 총칭하는 말)에서 동쪽으로 멀리 있는 지역을 의미했다. 그런데 기원전 300년경 전국시대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開)가 동호(東胡)를 급습하여 1천여 리의 땅에 요동군(遼東郡) 등 5군(郡)을 설치하면서 요동은 요수(遼水) 동쪽 지역을 의미했다. (『전국책』(戰國策), 『사기』, 『한서』(漢書) 등) 이때 요수는 일관되게 하북성 보정시(保定市) 역현(易縣)의 남역수(南易水)를 가리키고, 『사기』 소진열전(蘇秦列傳)에는 역수(易水) 유역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다고 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전국책』에는 연(燕)나라 동쪽에 조선(朝鮮), 요동이 있다 하였고, 『염철론』에는 연나라가 요동을 넘어 조선을 공격했다는 설명이 있으며, 『산해경』을 주석한 4세기 초의 곽박(郭璞)은 조선이 요동에 있던 낙랑과 동의어라고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부터 문자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등에 이르기까지 중국으로부터 받은 관작명은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이다(『삼국사기』). 고구려가 요동군에서 나라를 열었다는 뜻이다. 또 연개소문 장남인 연남생(淵男生) 묘지명에 요동군 평양성(平壤城) 사람이라고 나온다. 이는 고구려 최후의 수도인 평양성이 요동군에 있었다는 근거다.
『삼국지』는 구려(九麗)에서 갈라져 나간 종족이 소수(小水)에 의지해 나라를 세웠으므로 소수맥(小水貊)이라 했는데 바로 고구려를 말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사론에서 "고구려가 진한(秦漢) 동북쪽에 있었다"고 했듯, 고조선도 진한 동북쪽 요동(遼東)에서 진한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이후 고구려가 강역을 확장하면서 고구려 영토는 요산(遼山)을 중심으로 사방 2,000리였다고 전한다.(『주서』(周書) 이역(異域) 열전과 『양서』(梁書) 동이열전. 여기서 요산은 바로 갈석산(碣石山)을 말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 『회남자』(淮南子) 추형훈(墜形訓) 고유(高誘) 주(註)에 따르면, 요수는 갈석산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에서 요동의 서부를 흘러 해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또 수양제(隋煬帝)가 제1차 고구려 정벌에 나서면서 내린 〈벌고구려조서〉(伐高句麗詔書)에서도 "고구려 사람들이 발해(渤海)와 갈석산 사이에 살고 있다"고 했다. 이처럼 모본왕과 태조대왕 때부터 요동을 놓고 다투던 고구려는 다시 선비족의 전연(前燕), 후연(後燕) 등과 요동을 놓고 혈전을 벌였다. 391년 광개토태왕이 즉위하여 요동 지역을 모두 회복하게 되었고, 마침내 장수왕 시절 수도를 요동 가까이에 있는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기면서 고구려는 본격적으로 대륙 경영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통전』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동서 6,000리의 대제국이 되었다.
고구려 역사를 가공한 주체는 누구인가?
『책부원귀』(冊府元龜)를 보면, 한나라 건국(기원전 206년) 초기에 고구려 추모왕이 죽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고구려가 한나라 건국 이전에 이미 건국되었으며, 기원전 3세기에 건국되었다는 900년 설이 당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또한 각종 고대 사서를 모아 1,000권의 책으로 집약하던 『책부원귀』 편찬자들이 고구려 역사 700년 설을 모르고 기술하였을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광개토태왕은 혈통의 부자지간으로 계산하면 추모왕의 12세손에 불과하다. 그러나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비문에는 시조 추모왕 이후 고명 세자인 유류왕(儒留王), 대주류왕 (大朱留王) 등 호태왕이 추모왕의 17세손이라 했다. 따라서 추모왕 17세손으로 나오는 광개토태왕 때까지 고구려 역사는 최소 5대 이상의 왕이 누락 되었다.
고구려 건국 시기를 끌어내리려는 첫 시도는 신라 중기 문무왕(文武王) 때에 확인된다. 곧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고구려 건국이 한무제(漢武帝)의 고조선 침략 이후라는 고구려 건국 800년 설을 취했다. 이후 8세기에 오면 신라의 역사 편찬자들은 고구려 건국 시기를 추가로 100년 이상 끌어내려, 기원전 37년 세워졌다는 705년 설을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해동고기』는 추모왕의 고구려 건국 연도가 한나라 효원제 건소 2년(기원전 37년)이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신라 정통설을 확보하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인 것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김부식은 『통전』에 따르면 고구려 건국이 한나라 건소(建昭) 2년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통전』에 그런 원문은 보이지 않는다. 가필한 것이다.
무엇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짐과 태자 대신 과인과 세자란 호칭을 쓰는 등 중국에 대해 사대주의적 관점에서 쓰였다. 또 삼국시대를 신라 중심으로 바라보고 삼국시대 이전 역사와 고구려, 백제, 발해 역사의 상당 부분을 누락시켰다.
결국 고구려 역사를 가공한 주체는 후대의 신라와 고려 시대 김부식의 『삼국사기』이다.
길림성 환인현과 집안현 일대가 고구려 평양성이 아닌 이유
중국 길림성 환인현과 집안현 일대는 고조선은 물론 부여, 고구려의 도읍지가 아니다. 왜냐면 고구려 도읍지였음을 증명할 수 있는 고고학적 유물이 출토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 북위로부터 요동군개국공으로 책봉된 장수왕이, 요동을 개척했던 부왕의 업적을 기록한 광개토대왕비를 왕릉도 없는 수천 리 떨어진 한반도 압록강의 외딴곳에 세워놓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이는 일제가 조작한 고구려 수도를 기존 역사학계가 그대로 추종한 것일 뿐이다.
요동은 대륙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요충지이다. 때문에 장수왕(長壽王)은 광개토태왕이 수복한 요동 근처 평양성(平壤城)으로 천도했다. 중국 사서들은 고구려 도읍지가 당나라 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 구체적으로 요수(遼水)와 패수(浿水) 동쪽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대 요수는 하북성 보정시에 있는 남역수(南易水)이고, 패수는 보정시 정흥현의 계조하(鷄爪河)이다.
따라서 고조선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은 남역수와 계조하의 동북쪽 하북성 보정시(保定市) 정흥현(定興縣) 고성진(固城鎭) 지역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평양성은 어디인가?
패수에 인접했던 고조선 왕검성(王儉城), 고구려 평양성, 발해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는 고대 요동 혹은 낙랑에 속했던 우리 민족의 핵심 강역으로 오늘날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 일대다.
장수왕은 15년(427년) 평양(平壤)으로 왕도를 옮겼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고 했는데, 남조 송(宋)나라 효무제 때에 편찬된 『송서』(宋書)는 "이때 고구려가 한나라 때의 요동군을 지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연개소문 아들 연남생과 연남산(淵男?) 묘지명에는 "연남생은 요동군 평양성 사람, 연남산은 요동 조선인이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평양성이 당시 요동군(遼東郡)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평양성은 한나라 시대 낙랑군(樂浪郡) 옛 땅이다"(『구당서』와 『신당서』)는 지적처럼, 결정적으로 『통전』(通典)은 "진(晉)나라가 한나라 낙랑군 땅에 평주를 설치하였고, 후위(後魏) 즉 북위 때 고구려가 평주를 점령하고 도읍(평양성)으로 정했다"고 쓰고 있다.
또한 남송(宋) 시대 왕응린(王應麟, 1223~1296년)이 편찬한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에는 "후위 시대에 고구려가 평주에 도읍을 정했고,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당나라가 평주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고 했다.
그러면 장수왕 평양성이 있었던 평주 노룡현은 구체적으로 어디일까?
『통전』에 의하면, 당나라 평주 치소인 평주성은 노룡성으로 불렀고, 노룡현(盧龍縣)에 있었다. 평주 위치는 『구당서』와 『여지광기』(輿地廣記)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는 당나라 번진(藩鎭) 가운데 하나인 노룡군 치소가 평주성에 있었고, 평주 치소와 더불어 노룡군 치소도 겸했다고 했으며, 『여지광기』는 당나라 천보(天?, 742~756년) 연간 유주 범양군(范陽郡)이 노룡군으로 승격되었다고 하였다. 노룡군은 본래 범양군이었으므로 평주와 더불어 노룡군 치소였던 평주성 역시 범양에 있었다는 의미다. 결정적인 것은 송나라 나필(羅泌)의 『로사』(路史)인데, 노룡에 조선성(朝鮮城)이 있다 하였다. 여기서 노룡의 조선성은 당연히 고조선 왕성, 왕검성(王儉城)을 가리킨다. 『태평환우기』(太平?宇記)도 "평주 노룡현에 조선성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장수왕 평양성은 바로 평주성, 노룡성, 조선성, 왕검성이고, 당나라 평주 노룡현에 있었다.
천문학으로 확인하는 고구려 초기 왕도 평양성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별자리와 『삼국사기』 일식 기록을 연구한 박창범 교수는 당시 별자리와 일식을 관찰했던 최적지를 밝혀내 고구려 초기 왕도 위치를 비정했다.
먼저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중앙부 별들의 최척의 관측지는 한반도 서울이었으나 바깥 지역 별들은 기원 전후 고구려 초기 별자리로 관측되었다. 그러므로 고구려 초기 왕도는 위도 39°~40° 범위에서 찾아야한다.
둘째 『삼국사기』 일식 기록은 일식을 볼 수 있는 지역이 늘 같은 지역으로 나왔으므로, 삼국이 각각의 왕도에서 꾸준하게 관측한 실측자료임을 뜻한다. 그런데 관측의 정확성을 위해 일식의 실현율을 연구한 결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일식 기록은 모두 평균 80%의 높은 실현율을 보인 반면 중국 사서는 가장 높을 때가 78%이고 낮을 때는 63~75%로 나왔으며, 일본 사서는 950년 이전 기록은 33%?35.2%이고 950년에서 1550년 사이에는 실현율이 72.5%였다.
셋째 2~3세기 고구려는 하북성 북쪽과 내몽골지역이었고, 백제의 관측 위치는 발해만 유역이었다. 반면 201년 이전 상대(上代) 신라의 일식 최적 관측지는 장강(長江) 유역이었으나 787년 이후 하대(下代) 신라는 한반도 남부였다.
넷째 이는 삼국 모두 일식의 최적 관측지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이었음을 시사하며, 삼국의 왕도 또한 마찬가지로 중국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삼국사기』 일식 기록은 삼국이 각각 독자적으로 관측하여 나온 자료이며, 우리 사서 기록이 중국과 일본보다 더 과학적임을 알 수 있다.
사서(史書)에 기록된 평양성 위치를 구글 지도로 검증한다.
1. 패수 하구부터 평양성까지 거리가 약 60리였다는 사서 기록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패수 하구에서 평양성(왕검성)까지 거리가 60리였다는 수나라 수군 장수 내호아 기록이 있고, 『수서』는 패수 하구부터 평양성이 60리 거리였다고 했다.
이를 구글 지도에서 확인해보면, 계조하(패수) 하류인 보정시 용성현(容城縣) 흑룡구촌(黑龍口村)에서 정흥현 고성(固城)까지 거리는 26Km이다. 이는 당나라 시대의 대척을 적용하면 흑룡구촌에서 고성(평양성)까지 거리는 58.7리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사서의 60리와 일치한다.(1리 443.5m)
2. 노룡성(盧龍城)에서 서남쪽으로 양평, 더 멀리 토은현 옛 성이 있다는 『후한서』 기록
① 『후한서』 이현(李賢, 654~684년)의 주석에 따르면, 노룡성이 있던 당나라 평주 노룡현 서남쪽에 연(燕) 장성의 동단(『사기』)으로 기록된 한나라 요동군 양평현(襄平縣)이 있었다.
② 또 평주 서남쪽에 한나라 우북평군(右北平郡) 토은현(土垠縣)에 옛 성이 있었다(『후한서』 이현 주석). 그런데 평주 노룡현에서 양평현까지 거리는, 현재 고성(노룡현)에서 서수구 수성진(양평)까지 서남쪽으로 16km다. 이는 ① 이현의 기록에 부합된다.
또 한나라 우북평군 토은현은 오늘날 만성(滿城)으로 정확히 보정시 정흥현 고성에서 서남쪽으로 38km 지점에 있다. 이도 ② 이현의 기록에 부합된다.
③ 노룡새는 노룡성으로부터 서북쪽 200리 거리에 있다는 『통전』(通典) 기록
노룡새는 보정시 래원현(?源縣) 남쪽의 백석구(白石口) 주변을 지나는 내장성(內長城)으로 비정되고, 백석구는 노룡구(盧龍口)로 불리는데, 노룡성인 평주성으로부터 서북쪽 200리 거리에 있다(『통전』(通典). 백석구는 노룡성으로 비정한 정흥현 고성으로부터 직선거리로 서북쪽 87km 지점에 있다. 이는 ③ 『통전』에 기록된 서북 200리와 일치한다.(1리 443.5m)
결론 고대 패수는 보정시 정흥현 및 서수구 일대 계조하이고, 고구려 평양성은 정흥현 고성 즉 노룡성에 있었다.
고구려 요동성은 어디인가?
요동성은 한나라의 양평성이고 낙랑군 수성현이며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 수성진이다.
『자치통감』에서 고구려 요동성은 한나라 때 양평성이었는데, 전국시대 연(燕)나라 때는 무수현(武遂縣)이었다. 『사기』 흉노열전에서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를 물리치고 장성을 쌓을 때는 양평이라 했는데, 진(秦)나라 몽염(蒙恬) 장군이 다시 장성을 이어 쌓을 때는 장성이 일어난 곳이란 뜻으로 수성현이라 불리었다.
이후 한무제는 요동군 양평성을 낙랑군 수성현으로 귀속시켰으며, 『후한서』 군국지에서는 요동군 양평현이라 했다. 고구려가 요동을 수복한 후에는 양평현은 요동성이 되었으며 고구려 최대의 성이 되었다. 곧 양평현 즉 수성현은 지금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鎭)이다.
고구려 건국 시기에 대한 사료는 『삼국사기』,『삼국유사』, 중국 사서로 『삼국지』,『후한서』,『책부원귀』(冊府元龜),『북사』(北史),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등이 있다.
① 김부식의 『삼국사기』 본기 사론(史論)에서, 몇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는데, 고구려는 기원전 221년 건국했던 진(秦)나라, 기원전 206년 건국했던 한(漢)나라 시대 즉 진한(秦漢) 시대부터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국경을 마주했던 큰 나라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② 『책부원귀』 외신부(外臣部)를 보면, 한나라 건국(기원전 206년) 초기 고구려 추모왕(鄒牟王)이 죽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고구려는 한나라 초에 왕인 고주몽이 죽고 아들 여율(如栗)이 즉위했다. 여율이 죽고 아들 막래(莫來)가 즉위했다. (高句麗 漢初其王高朱蒙死 子如栗立 如栗死 子莫來立)
③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 보장왕(寶臧王) 27년(668년) 2월 당(唐)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당 고종에게 한 보고에서 보듯, 당시 당나라 사람들은 고구려가 900년 역사의 나라라고 인식했으며, 이런 내용이 『당회요』(唐會要)와 『신당서』(新唐書) 고려전에도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매우 광범위하게 유포된 것이 분명하다.
④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시봉(始封)에서 1124년 북송(北宋) 서긍(徐兢, 1091~1153년)이 한 말의 문맥을 보면, 위만이 나라를 차지하여 80여 년을 지나는 기간에 앞서는 때에 고구려 건국이 이루어졌다고 서술하여, 위만조선 건국연대인 기원전 194년 이전에 이미 고구려 건국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⑤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할 때 이미 고구려가 있었다는 것은 『삼국지』 및 『후한서』에도 확인되고 있다.
위에서 건국 시기를 추산해 보면, 고구려는 기원전 232년 이전에는 없었고, 기원전 107년 이전에는 있었으므로 추모왕 즉위의 간지인 갑신년이 바로 고구려 건국 시기이다. 따라서 갑신년에 해당하는 기원전 217년(885년), 기원전 157년(825년), 기원전 97년(765년), 기원전 37년(705년) 중에서 기원전 217년이 가장 유력하다 하겠다.
고구려의 핵심강역 요동(遼東)
중국 고대 문헌에 나오는 요동은 본래 구주(九州, 중국 전역을 총칭하는 말)에서 동쪽으로 멀리 있는 지역을 의미했다. 그런데 기원전 300년경 전국시대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開)가 동호(東胡)를 급습하여 1천여 리의 땅에 요동군(遼東郡) 등 5군(郡)을 설치하면서 요동은 요수(遼水) 동쪽 지역을 의미했다. (『전국책』(戰國策), 『사기』, 『한서』(漢書) 등) 이때 요수는 일관되게 하북성 보정시(保定市) 역현(易縣)의 남역수(南易水)를 가리키고, 『사기』 소진열전(蘇秦列傳)에는 역수(易水) 유역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다고 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전국책』에는 연(燕)나라 동쪽에 조선(朝鮮), 요동이 있다 하였고, 『염철론』에는 연나라가 요동을 넘어 조선을 공격했다는 설명이 있으며, 『산해경』을 주석한 4세기 초의 곽박(郭璞)은 조선이 요동에 있던 낙랑과 동의어라고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부터 문자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등에 이르기까지 중국으로부터 받은 관작명은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이다(『삼국사기』). 고구려가 요동군에서 나라를 열었다는 뜻이다. 또 연개소문 장남인 연남생(淵男生) 묘지명에 요동군 평양성(平壤城) 사람이라고 나온다. 이는 고구려 최후의 수도인 평양성이 요동군에 있었다는 근거다.
『삼국지』는 구려(九麗)에서 갈라져 나간 종족이 소수(小水)에 의지해 나라를 세웠으므로 소수맥(小水貊)이라 했는데 바로 고구려를 말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사론에서 "고구려가 진한(秦漢) 동북쪽에 있었다"고 했듯, 고조선도 진한 동북쪽 요동(遼東)에서 진한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이후 고구려가 강역을 확장하면서 고구려 영토는 요산(遼山)을 중심으로 사방 2,000리였다고 전한다.(『주서』(周書) 이역(異域) 열전과 『양서』(梁書) 동이열전. 여기서 요산은 바로 갈석산(碣石山)을 말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 『회남자』(淮南子) 추형훈(墜形訓) 고유(高誘) 주(註)에 따르면, 요수는 갈석산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에서 요동의 서부를 흘러 해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또 수양제(隋煬帝)가 제1차 고구려 정벌에 나서면서 내린 〈벌고구려조서〉(伐高句麗詔書)에서도 "고구려 사람들이 발해(渤海)와 갈석산 사이에 살고 있다"고 했다. 이처럼 모본왕과 태조대왕 때부터 요동을 놓고 다투던 고구려는 다시 선비족의 전연(前燕), 후연(後燕) 등과 요동을 놓고 혈전을 벌였다. 391년 광개토태왕이 즉위하여 요동 지역을 모두 회복하게 되었고, 마침내 장수왕 시절 수도를 요동 가까이에 있는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기면서 고구려는 본격적으로 대륙 경영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통전』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동서 6,000리의 대제국이 되었다.
고구려 역사를 가공한 주체는 누구인가?
『책부원귀』(冊府元龜)를 보면, 한나라 건국(기원전 206년) 초기에 고구려 추모왕이 죽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고구려가 한나라 건국 이전에 이미 건국되었으며, 기원전 3세기에 건국되었다는 900년 설이 당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또한 각종 고대 사서를 모아 1,000권의 책으로 집약하던 『책부원귀』 편찬자들이 고구려 역사 700년 설을 모르고 기술하였을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광개토태왕은 혈통의 부자지간으로 계산하면 추모왕의 12세손에 불과하다. 그러나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비문에는 시조 추모왕 이후 고명 세자인 유류왕(儒留王), 대주류왕 (大朱留王) 등 호태왕이 추모왕의 17세손이라 했다. 따라서 추모왕 17세손으로 나오는 광개토태왕 때까지 고구려 역사는 최소 5대 이상의 왕이 누락 되었다.
고구려 건국 시기를 끌어내리려는 첫 시도는 신라 중기 문무왕(文武王) 때에 확인된다. 곧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고구려 건국이 한무제(漢武帝)의 고조선 침략 이후라는 고구려 건국 800년 설을 취했다. 이후 8세기에 오면 신라의 역사 편찬자들은 고구려 건국 시기를 추가로 100년 이상 끌어내려, 기원전 37년 세워졌다는 705년 설을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해동고기』는 추모왕의 고구려 건국 연도가 한나라 효원제 건소 2년(기원전 37년)이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신라 정통설을 확보하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인 것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김부식은 『통전』에 따르면 고구려 건국이 한나라 건소(建昭) 2년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통전』에 그런 원문은 보이지 않는다. 가필한 것이다.
무엇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짐과 태자 대신 과인과 세자란 호칭을 쓰는 등 중국에 대해 사대주의적 관점에서 쓰였다. 또 삼국시대를 신라 중심으로 바라보고 삼국시대 이전 역사와 고구려, 백제, 발해 역사의 상당 부분을 누락시켰다.
결국 고구려 역사를 가공한 주체는 후대의 신라와 고려 시대 김부식의 『삼국사기』이다.
길림성 환인현과 집안현 일대가 고구려 평양성이 아닌 이유
중국 길림성 환인현과 집안현 일대는 고조선은 물론 부여, 고구려의 도읍지가 아니다. 왜냐면 고구려 도읍지였음을 증명할 수 있는 고고학적 유물이 출토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 북위로부터 요동군개국공으로 책봉된 장수왕이, 요동을 개척했던 부왕의 업적을 기록한 광개토대왕비를 왕릉도 없는 수천 리 떨어진 한반도 압록강의 외딴곳에 세워놓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이는 일제가 조작한 고구려 수도를 기존 역사학계가 그대로 추종한 것일 뿐이다.
요동은 대륙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요충지이다. 때문에 장수왕(長壽王)은 광개토태왕이 수복한 요동 근처 평양성(平壤城)으로 천도했다. 중국 사서들은 고구려 도읍지가 당나라 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 구체적으로 요수(遼水)와 패수(浿水) 동쪽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대 요수는 하북성 보정시에 있는 남역수(南易水)이고, 패수는 보정시 정흥현의 계조하(鷄爪河)이다.
따라서 고조선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은 남역수와 계조하의 동북쪽 하북성 보정시(保定市) 정흥현(定興縣) 고성진(固城鎭) 지역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평양성은 어디인가?
패수에 인접했던 고조선 왕검성(王儉城), 고구려 평양성, 발해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는 고대 요동 혹은 낙랑에 속했던 우리 민족의 핵심 강역으로 오늘날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 일대다.
장수왕은 15년(427년) 평양(平壤)으로 왕도를 옮겼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고 했는데, 남조 송(宋)나라 효무제 때에 편찬된 『송서』(宋書)는 "이때 고구려가 한나라 때의 요동군을 지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연개소문 아들 연남생과 연남산(淵男?) 묘지명에는 "연남생은 요동군 평양성 사람, 연남산은 요동 조선인이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평양성이 당시 요동군(遼東郡)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평양성은 한나라 시대 낙랑군(樂浪郡) 옛 땅이다"(『구당서』와 『신당서』)는 지적처럼, 결정적으로 『통전』(通典)은 "진(晉)나라가 한나라 낙랑군 땅에 평주를 설치하였고, 후위(後魏) 즉 북위 때 고구려가 평주를 점령하고 도읍(평양성)으로 정했다"고 쓰고 있다.
또한 남송(宋) 시대 왕응린(王應麟, 1223~1296년)이 편찬한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에는 "후위 시대에 고구려가 평주에 도읍을 정했고,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당나라가 평주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고 했다.
그러면 장수왕 평양성이 있었던 평주 노룡현은 구체적으로 어디일까?
『통전』에 의하면, 당나라 평주 치소인 평주성은 노룡성으로 불렀고, 노룡현(盧龍縣)에 있었다. 평주 위치는 『구당서』와 『여지광기』(輿地廣記)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는 당나라 번진(藩鎭) 가운데 하나인 노룡군 치소가 평주성에 있었고, 평주 치소와 더불어 노룡군 치소도 겸했다고 했으며, 『여지광기』는 당나라 천보(天?, 742~756년) 연간 유주 범양군(范陽郡)이 노룡군으로 승격되었다고 하였다. 노룡군은 본래 범양군이었으므로 평주와 더불어 노룡군 치소였던 평주성 역시 범양에 있었다는 의미다. 결정적인 것은 송나라 나필(羅泌)의 『로사』(路史)인데, 노룡에 조선성(朝鮮城)이 있다 하였다. 여기서 노룡의 조선성은 당연히 고조선 왕성, 왕검성(王儉城)을 가리킨다. 『태평환우기』(太平?宇記)도 "평주 노룡현에 조선성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장수왕 평양성은 바로 평주성, 노룡성, 조선성, 왕검성이고, 당나라 평주 노룡현에 있었다.
천문학으로 확인하는 고구려 초기 왕도 평양성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별자리와 『삼국사기』 일식 기록을 연구한 박창범 교수는 당시 별자리와 일식을 관찰했던 최적지를 밝혀내 고구려 초기 왕도 위치를 비정했다.
먼저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중앙부 별들의 최척의 관측지는 한반도 서울이었으나 바깥 지역 별들은 기원 전후 고구려 초기 별자리로 관측되었다. 그러므로 고구려 초기 왕도는 위도 39°~40° 범위에서 찾아야한다.
둘째 『삼국사기』 일식 기록은 일식을 볼 수 있는 지역이 늘 같은 지역으로 나왔으므로, 삼국이 각각의 왕도에서 꾸준하게 관측한 실측자료임을 뜻한다. 그런데 관측의 정확성을 위해 일식의 실현율을 연구한 결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일식 기록은 모두 평균 80%의 높은 실현율을 보인 반면 중국 사서는 가장 높을 때가 78%이고 낮을 때는 63~75%로 나왔으며, 일본 사서는 950년 이전 기록은 33%?35.2%이고 950년에서 1550년 사이에는 실현율이 72.5%였다.
셋째 2~3세기 고구려는 하북성 북쪽과 내몽골지역이었고, 백제의 관측 위치는 발해만 유역이었다. 반면 201년 이전 상대(上代) 신라의 일식 최적 관측지는 장강(長江) 유역이었으나 787년 이후 하대(下代) 신라는 한반도 남부였다.
넷째 이는 삼국 모두 일식의 최적 관측지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이었음을 시사하며, 삼국의 왕도 또한 마찬가지로 중국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삼국사기』 일식 기록은 삼국이 각각 독자적으로 관측하여 나온 자료이며, 우리 사서 기록이 중국과 일본보다 더 과학적임을 알 수 있다.
사서(史書)에 기록된 평양성 위치를 구글 지도로 검증한다.
1. 패수 하구부터 평양성까지 거리가 약 60리였다는 사서 기록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패수 하구에서 평양성(왕검성)까지 거리가 60리였다는 수나라 수군 장수 내호아 기록이 있고, 『수서』는 패수 하구부터 평양성이 60리 거리였다고 했다.
이를 구글 지도에서 확인해보면, 계조하(패수) 하류인 보정시 용성현(容城縣) 흑룡구촌(黑龍口村)에서 정흥현 고성(固城)까지 거리는 26Km이다. 이는 당나라 시대의 대척을 적용하면 흑룡구촌에서 고성(평양성)까지 거리는 58.7리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사서의 60리와 일치한다.(1리 443.5m)
2. 노룡성(盧龍城)에서 서남쪽으로 양평, 더 멀리 토은현 옛 성이 있다는 『후한서』 기록
① 『후한서』 이현(李賢, 654~684년)의 주석에 따르면, 노룡성이 있던 당나라 평주 노룡현 서남쪽에 연(燕) 장성의 동단(『사기』)으로 기록된 한나라 요동군 양평현(襄平縣)이 있었다.
② 또 평주 서남쪽에 한나라 우북평군(右北平郡) 토은현(土垠縣)에 옛 성이 있었다(『후한서』 이현 주석). 그런데 평주 노룡현에서 양평현까지 거리는, 현재 고성(노룡현)에서 서수구 수성진(양평)까지 서남쪽으로 16km다. 이는 ① 이현의 기록에 부합된다.
또 한나라 우북평군 토은현은 오늘날 만성(滿城)으로 정확히 보정시 정흥현 고성에서 서남쪽으로 38km 지점에 있다. 이도 ② 이현의 기록에 부합된다.
③ 노룡새는 노룡성으로부터 서북쪽 200리 거리에 있다는 『통전』(通典) 기록
노룡새는 보정시 래원현(?源縣) 남쪽의 백석구(白石口) 주변을 지나는 내장성(內長城)으로 비정되고, 백석구는 노룡구(盧龍口)로 불리는데, 노룡성인 평주성으로부터 서북쪽 200리 거리에 있다(『통전』(通典). 백석구는 노룡성으로 비정한 정흥현 고성으로부터 직선거리로 서북쪽 87km 지점에 있다. 이는 ③ 『통전』에 기록된 서북 200리와 일치한다.(1리 443.5m)
결론 고대 패수는 보정시 정흥현 및 서수구 일대 계조하이고, 고구려 평양성은 정흥현 고성 즉 노룡성에 있었다.
고구려 요동성은 어디인가?
요동성은 한나라의 양평성이고 낙랑군 수성현이며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 수성진이다.
『자치통감』에서 고구려 요동성은 한나라 때 양평성이었는데, 전국시대 연(燕)나라 때는 무수현(武遂縣)이었다. 『사기』 흉노열전에서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를 물리치고 장성을 쌓을 때는 양평이라 했는데, 진(秦)나라 몽염(蒙恬) 장군이 다시 장성을 이어 쌓을 때는 장성이 일어난 곳이란 뜻으로 수성현이라 불리었다.
이후 한무제는 요동군 양평성을 낙랑군 수성현으로 귀속시켰으며, 『후한서』 군국지에서는 요동군 양평현이라 했다. 고구려가 요동을 수복한 후에는 양평현은 요동성이 되었으며 고구려 최대의 성이 되었다. 곧 양평현 즉 수성현은 지금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鎭)이다.
목차
목차
서문
1장 고당(高唐) 전쟁(戰爭)의 격전지는 어디인가?
-요동성과 안시성 등 격전지를 새롭게 검증한다
1. 기존 학계의 통설
2. 당태종(唐太宗) 이세민의 진군 경로 분석
1) 당나라군의 전방 기지: 정주(定州)와 유주(幽州) / 2) 이세적(李世勣) 선발대의 진로
3) 이적 선발대의 개모성(蓋牟城) 공격과 장량 수군의 비사성(卑沙城) 공격
4) 당태종 이세민이 건넜던 요택(遼澤)과 요수(遼水)
5) 당태종 주둔지였던 마수산(馬首山)은 현재 상산(象山)
6) 요동성(遼東城) 함락 / 7) 백암성(白巖城) 함락과 그 위치
3. 안시성(安市城) 대첩
1) 주필산(駐?山) 전투 / 2) 안시성(安市城) 전투
4. 당태종(唐太宗)의 회군 경로 분석
1) 요택 습지를 지나 발착수(渤錯水)를 죽음으로 건너다
2) 유성(柳城)와 요수의 지명 이동 / 3) 임유관(臨?關)과 유수(?水)
2장 고구려 건국의 이전 왕조
1. 고구려 기원인 맥족(貊族)의 구려(句麗), 고이(高夷)
1) 고죽국 위치에 근거한 구려(句麗) 위치 비정
2. 맥족(貊族)의 나부(那部) 집단과 연맹체
3. 고구려 이전 왕조
1) 비류국(沸流國)을 고구려 전 왕조로 보는 주장/2) 졸본부여(卒本夫餘)를 고구려 전 왕조로 보는 주장
3장 고구려 건국
1. 고구려 건국 시조
1) 중국과 우리 사서에 나오는 추모왕(鄒牟王)의 건국 신화
2) 부여 시조 동명왕과 추모왕의 연관성 / 3) 고구려 왕실의 제사
2. 고구려 건국 시기는 언제인가?
1) 고구려 건국 시기에 대한 근거 사료/ 2) 고구려 건국은 기원전 37년(705년설)인가 아니면 기원전 217년(900년설)인가?
3. 고구려 역사를 가공한 주체는 누구인가?
1) 역사 가공의 주체가 고구려 왕실이라는 주장/ 2) 역사 가공의 주체가 후대 신라라는 주장
3) 역사 가공의 주체가 『삼국사기』 편찬자라는 주장
4장 고구려의 이상한 왕통 교체
1. 고구려 초기 왕계 출발점인 유리왕(瑠璃王)
1) 대무신왕(大武神王)의 모순적인 왕위 승계 / 2) 인위적인 왕계 가공의 주체
2. 태조왕(太祖王)
3. 태조왕 이후 수상한 왕권교체
5장 고구려 핵심 강역인 요동(遼東)은 어디인가?- 핵심 강역인 요동(遼東)
1. 중국 사서에 나오는 고대 요동(遼東)의 의미
2. 고구려의 요동(遼東) 점령과 상실
3. 고구려의 요동(遼東)과 요서(遼西) 지역의 수복
4. 요동군(遼東郡)과 우북평군(右北平郡)의 위치 비정
1) 무종현(無終縣) /2) 백랑현(白狼縣) /3) 석성현(石城縣)과 임유관(臨?關)
6장 고구려 평양성은 어디인가?- 고구려 왕도의 변천사
1. 동천왕의 평양성(平壤城)과 고국원왕의 평양 동황성(東黃城)
2. 장수왕의 평양성(平壤城)과 평원왕의 장안성(長安城)
1) 장수왕 평양성(平壤城)의 위치 / 2) 장수왕 평양성의 추정 위치에 대한 교차 검증
3) 평원왕 장안성(長安城)의 위치 추정
1장 고당(高唐) 전쟁(戰爭)의 격전지는 어디인가?
-요동성과 안시성 등 격전지를 새롭게 검증한다
1. 기존 학계의 통설
2. 당태종(唐太宗) 이세민의 진군 경로 분석
1) 당나라군의 전방 기지: 정주(定州)와 유주(幽州) / 2) 이세적(李世勣) 선발대의 진로
3) 이적 선발대의 개모성(蓋牟城) 공격과 장량 수군의 비사성(卑沙城) 공격
4) 당태종 이세민이 건넜던 요택(遼澤)과 요수(遼水)
5) 당태종 주둔지였던 마수산(馬首山)은 현재 상산(象山)
6) 요동성(遼東城) 함락 / 7) 백암성(白巖城) 함락과 그 위치
3. 안시성(安市城) 대첩
1) 주필산(駐?山) 전투 / 2) 안시성(安市城) 전투
4. 당태종(唐太宗)의 회군 경로 분석
1) 요택 습지를 지나 발착수(渤錯水)를 죽음으로 건너다
2) 유성(柳城)와 요수의 지명 이동 / 3) 임유관(臨?關)과 유수(?水)
2장 고구려 건국의 이전 왕조
1. 고구려 기원인 맥족(貊族)의 구려(句麗), 고이(高夷)
1) 고죽국 위치에 근거한 구려(句麗) 위치 비정
2. 맥족(貊族)의 나부(那部) 집단과 연맹체
3. 고구려 이전 왕조
1) 비류국(沸流國)을 고구려 전 왕조로 보는 주장/2) 졸본부여(卒本夫餘)를 고구려 전 왕조로 보는 주장
3장 고구려 건국
1. 고구려 건국 시조
1) 중국과 우리 사서에 나오는 추모왕(鄒牟王)의 건국 신화
2) 부여 시조 동명왕과 추모왕의 연관성 / 3) 고구려 왕실의 제사
2. 고구려 건국 시기는 언제인가?
1) 고구려 건국 시기에 대한 근거 사료/ 2) 고구려 건국은 기원전 37년(705년설)인가 아니면 기원전 217년(900년설)인가?
3. 고구려 역사를 가공한 주체는 누구인가?
1) 역사 가공의 주체가 고구려 왕실이라는 주장/ 2) 역사 가공의 주체가 후대 신라라는 주장
3) 역사 가공의 주체가 『삼국사기』 편찬자라는 주장
4장 고구려의 이상한 왕통 교체
1. 고구려 초기 왕계 출발점인 유리왕(瑠璃王)
1) 대무신왕(大武神王)의 모순적인 왕위 승계 / 2) 인위적인 왕계 가공의 주체
2. 태조왕(太祖王)
3. 태조왕 이후 수상한 왕권교체
5장 고구려 핵심 강역인 요동(遼東)은 어디인가?- 핵심 강역인 요동(遼東)
1. 중국 사서에 나오는 고대 요동(遼東)의 의미
2. 고구려의 요동(遼東) 점령과 상실
3. 고구려의 요동(遼東)과 요서(遼西) 지역의 수복
4. 요동군(遼東郡)과 우북평군(右北平郡)의 위치 비정
1) 무종현(無終縣) /2) 백랑현(白狼縣) /3) 석성현(石城縣)과 임유관(臨?關)
6장 고구려 평양성은 어디인가?- 고구려 왕도의 변천사
1. 동천왕의 평양성(平壤城)과 고국원왕의 평양 동황성(東黃城)
2. 장수왕의 평양성(平壤城)과 평원왕의 장안성(長安城)
1) 장수왕 평양성(平壤城)의 위치 / 2) 장수왕 평양성의 추정 위치에 대한 교차 검증
3) 평원왕 장안성(長安城)의 위치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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