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금파리빛눈입자(사십편시선 6)
장진기 시집
장진기의 시집 『사금파리빛눈입자』.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대 마음을 바라보네》, 《순수시를 쓴다》, 《허공에 방류하는 치어》, 《어깨뼈도 섬처럼 어둠에 묻힐 그리움》 등 다양한 시를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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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자기 시를 꼭 닮은 얼굴로 시와 결혼한 총각 시인,
늦깍이 시인 장진기의 첫 시집 《사금파리 빛 눈 입자》
전남 영광에 가면 조운 시인(1900-1948월북)의 생가가 있다. 그의 생가 입구에 가면 그의 대표시가 조그만 비석에 새겨진 채 주인 떠난 빈집을 잘린 석류나무가 이름 모를 잡초들과 함께 지키고 있다. 새들도 떠난 빈집을 지키고 있는 시인이 있다. 그가 바로 장진기 시인이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툼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마 보소라
빠개젖힌
이가슴"
(조운, 「석류」 전문).
시조시인으로 우리 민족의 서정과 정감이 잘 배어 있는 작품들을 발표하여 현대시조의 교과서라고 평가받았던 시인. 그러나 1948년 월북 이후 잊혀졌다가 1988년 월북문인 해금조치 이후에 재조명되었으나 고향에서 그는 여전히 달갑지 않은 존재이다. 백석이나 정지용 등이 해금 이후 재조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과서 등을 통해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고 그의 고향에서 하나의 관광상품(?)으로 대접받고 있는 현실과는 자못 대조적인 현상이다. 거기다가 얼마 전에는 조운 시인의 생가를 이백 년째 지키고 있는 석류나무가 잘리어 나간 사건도 있었다. 그 잘려 나간 석류나무를 부여잡고 잡초만 무성한 생가를 수 년째 지키고 있는 장진기 시인. 그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첫 시집을 내서 더욱 화제다.
장진기 시인이 조운 생가를 지키며 사는 이유
영광에서 그는 시인이라기보다는 환경운동가로 통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환경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던 고향 영광에 내려와 현장시, 걸개 시화전, 촛불시위, 벽시 등을 쓰며 활동가로서의 삶을 살았던 그. 2000년에 시인의 이름을 얻은 후 십여 년이 훨씬 지난 후에야 첫 시집을 내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영광에는 원자력발전소가 있다. 영광에서 멀지 않는 부안에 핵폐기장이 들어서려고 했던 적이 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장진기 시인의 환경운동가로서의 삶과 그가 겪었을 삶의 신산함을 짐작하게 한다. 전국의 각지에서 벌어지는 환경생태 운동과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공권력과의 지난한 투쟁 그리고 공권력에 의해 무너지는 대오 그리고 흩어지는 사람들. 그 속에 외롭게 서 있는 한 사람이 바로 장진기 시인이다.
바람 부는 법성포에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외로운 시인 장진기와 이백 년 된 석류나무가 잘려나가 잡초와 바람과 시비만이 지키고 있는 조운의 생가가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조운 선생이 월북하기 전까지 살았고, 탈출기의 작가 최서해가 잠시 머물며 글을 쓰기도 했다는 그 생가의 실질 주인이 바로 장진기인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시와 결혼한 총각 시인의 첫 시집
그는 고등학교와 대학을 서울에서 나왔다. 어느 지방이나 그렇듯 그 지역의 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지역사회에서 사람노릇하며 살기 어렵다. 그도 역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역에서 마이너리티일 수밖에 없는 그가 수십 년 동안 지역에서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가족과 시였을 것이다.
"대학을 늦게 갔어요. 고등학교 졸업한 후에 대학에 안 가고 아버지께 대학 등록금을 달라고 해서 깨 농사를 지었어요. 그해 매우 가물었는데, 다행히 제가 지은 깨가 잘 돼서 대박이 났지요."
그가 대학을 늦게 간 이유는 가족 때문이다. 자신이 대학을 가면 동생들이 학교를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군대를 갔다 온 후에서야 늦깎이로 들어갔고,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다시 고향에 내려와 동생들을 자신의 손으로 다 시집장가 보냈다. 그러느라 본인 정작 때를 놓치고 말았다.
"어머니가 많이 아프셨어요. 그래서 서울 생활을 접고 무작정 고향에 내려왔죠. 그러다가 눌러앉은 거죠."
시인은 어머니를 간호하느라 한 달을 꼬박 중환자실에서 지샜다.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무식하게 효도했다. 그러나 "내가 드러누운 가슴살이 푸석거리며 흙이 되어 / 어머니를 묻고 봄이 왔다 (중략) 그 이듬해 그녀도 갔다."(「눈은 본붕하듯 날리고」 중에서)어머니도 가고 그녀의 사랑도 갔다. 그 후로 그는 계속 혼자다.
"시와 결혼했다고 해야 마음이 편하죠."라며 그는 허허 웃는다. 그러나 그의 웃음이 울음이 되어 가슴에 꽂히는 것은 왜일까?
그에게는 지체 장애를 가진 아우가 한 명이 있다. 동생들 걱정에 첫사랑을 보낸 후 본인의 몸을 돌보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은 지체 장애인 아우 때문에 어디도 맘 편하게 다니지 못한다. 결혼은 더구나 생각하지 못한다고 했다. 동생을 혼자 살게 할 수 없으므로..... 더구나 지체 장애인 동생을 데리고 함께 살자고 할 여인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므로 그는 시와 결혼한 것이다.
늦깎이 시인의 미래-우리가 잊고 사는 진정성의 회복을 꿈꾸며
윤동주 시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나온 것은 윤동주 시인의 뜻이 아니었다. 그가 일본의 형무소에서 죽은 후 친구였던 정병욱이 발견하여 묶어낸 것이다. 이와 똑같지는 않지만 장진기 시인의 시집 역시 이규배 시인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시집을 내고자 하는 것 또한 장진기 시인의 뜻은 아니었다. 이규배 시인 이전에 천승세 선생님의 눈에 걸린 것이다. 천승세 선생님과 이규배 시인의 안목과 장진기 시인의 진정성이 이 시집 『사금파리 빛 눈 입자』의 탄생 배경이다.
장진기 시인이 써놓은 시가 무려 1000여 편이 넘는다고 하니 첫 시집 이후의 다음 시집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다. 물론 그 중에서 첫 시집에 적합한 시 50편을 뽑기는 하였으나 그의 삶과 진정성이 묻어나는 시 또한 그의 방구석 어디엔가 잠자고 있을 것이다. 벌써부터 숨겨져 있는 그의 다른 시들을 엿보고 싶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욕심이다.
외로움과 그리움이 조탁하고 걸러 낸 시어들이 법성포 햇살 아래 늘어선 굴비들처럼 말려진 시집. 그렇게 하루종일 시를 말리고 시와 대화하고 봄꽃잎과 함께 시를 날리고 시와 함께 살아가는 늦깎이 시인, 장진기의 삶이 이젠 더 이상 외롭지 않았으면 한다. 그의 시가 세상 사람들에게 좀 더 알려져 우리가 잊어가는 시의 진정성과 "시는 사는 것만큼 쓰는 것이여."라는 김남주 시인의 말이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날이 하루빨리 오길 바랄 뿐이다.
출판사 리뷰-우리가 잊었던 시인의 얼굴, 장진기 시인
학창 시절에 일찍이 등단하여 선후배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던 이규배 시인이 어느 날, 이십여 년만에 한 뭉치의 시집 원고를 보내왔다. 무조건 내야 한다고 했다. 읽어보고 좋으면, 돈이 될 것 같으면 내라고 하였지만 무조건 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이십여 년만에 나타난 것 자체게 아미 내겐 압력 그 이상이었다. 더구나 한때 시인을 꿈꾸지 않았던 국문학도가 없었을 만큼 시가 인기였던 시대를 온몸으로 살았던 세대였기에.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눈가에 눈물도 비쳤다. "명절이 보름쯤 지나 엄니 국맛을 못 잊어 두부를 사다 파를 썰어 넣고 끓이는데 / 왈칵, 눈이 붓는다 / 엄니도 저 뼛국을 끓이다가 눈물을 빠트렸을까"라는 대목에서 정말 '왈칵' 하고 말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시인을 영광에서 만났다. 시의 구절구절에서 만났던 시인의 마음이 얼굴 곳곳에, 그의 입에서 잔잔히 터져나오던 지난 삶의 회한에 진하게 묻어나왔다. 이규배 시인이 발문에 인용한 김남주 시인의 "시는 사는 것만큼 쓰는 것이여."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장진기 시인. 그의 시는 그의 삶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객기 넘치는 화장빨에다가 조명빨도 모자라 온갖 빨이라는 빨은 다 붙어다니는 요즘 시들에 대해 통탄을 금하지 못하던 어느 노시인도 "오래만에 만나는 참 좋은 시"라는 평을 부쳐주었다. '시가 넘쳐나는 시대, 알짬시'를 모으겠다는 취지로 시작한 작은숲출판사의 '사십편시선'에 딱 맞는 시라는 부추김도 있었다.
시 자체였던 시인. 지체 장애를 앓고 있는 동생 때문에 결혼을 못한 총각 시인. 영광이 나은 최고의 시조시인이라는 조운 시인(월북)의 생가를 지역의 반대와 홀대 속에서도 묵묵히 지키고 있는 뚝심의 시인. 그러면서도 휴대폰에서 시집에 실을 사진을 골라 이왕이면 잘 나온 사진을 실어달라던 아이 같던 시인. 그를 무어라 소개할까. 환갑이 멀지 않은 나이에 첫 시집이 나온다면 설레던 그 시인을 세상사람들에게 무엇이라 알려줄까.
우리가 잊고 지냈던 시인의 얼굴로 시처럼 사는 늦깍이 총각 시인. 그런 이름보다 그의 시 한 편 한 편보다 그를 더 잘 소개할 도구는 없다.
자서
어머니는 나에게 시를 쓰게 하시고 가셨다.
바다와 하늘과 나무와 새들,
어머니는 내 살아 바라보는 것들을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셨고
그들을 통해서 내가 어머니께 전하는 말이 시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어머니의 전령이어서
나는 숨을 쉬는 이 땅의 모든 생명과
생명을 이끄는 현상들과 대화를 하였다.
함께 하지 않아도 잊지 않고 생각함으로
늘 곁에 있는 거라는 나의 믿음이 내가 존재하는,
내가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요체가 되었다.
나는 외로움이 좋았고
외로울 때 세상의 것들은 따뜻한 음성으로 다가서 주었으므로,
행복했다.
오랜 시간 망설이다 엮어낸 첫 시집을 어머니께 드린다.
밤하늘을 바라본다.
슬프게 살더라도
낙엽처럼 삭은 세상
손톱자국 같은 꽃은 피우지 않아야지
잎을 지나는
손가락 붓끝은 미리 필
설움에 흔들리고
- 「손가락으로 난을 친다」 일부
시집을 내도록 도와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시집을 기다려 주신 분들에게도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2013년 사월
장 진 기
후기
느지막이 시를 썼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시는 나에게 당위였다. 어머니 추모제에 조사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심신이 무너져 있는 상태였는데 어머니 영전에 조시를 바치고 싶었다. 자정이 넘어 펜을 잡았다. 다 쓰고 행을 세어 보았다. 76행이었다. 어머니가 다니시던 종교의 기원 76년과 같은 행수였다. 우연이라지만 예사롭지 않았다. 소법당이 좁아 대법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시 중간에 모두 울었다. 그 후로 이 십 년이 흘렀다. 어머니는 나에게 시를 쓰게 하시고 떠나셨다.
그 때가 30대 중반이었으니까 문학에 몸을 담기에는 군살이 많이 붙어 있었다. 이듬 해 우리 지역에서는 환경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나는 현장에서 시를 썼다. 시는 무기였다. 시는 고발이었고 투쟁이었다. 참여시에 실존이 주사된 현장시였다. 그런 시는 반예술적이란 비난을 받기도 했다. 허나 서 있는 자리에서 나부끼는 깃발의 흔들림은 생동하였다. 풍자와 해학은 내가 쓰는 시의 요소였다. 상황에 따라 토해내는 뜨거운 입김은 나의 실존의 자각이었다. 시가 되던 되지 않던 내 문학이 그런 당위를 붙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많이 외로웠다. 시가 그런 것만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면의 음성으로 다가서는 서정은 내 살갗에 떨림으로 다가섰다. 무딘 몸의 각피를 뚫고 습윤이 돋기 시작했다. 길고 짧은 시들이 내 주위를 맴돌았다. 시와 얘기하고 시와 연애하고 시와 동거했다. 내 시들은 허기 질 때는 사냥을 하듯 들을 헤매고 세상이 시끄러울 땐 의병처럼 전투를 나가지만 돌아와서는 서정시가 되었다. 그렇게 써진 시들이 세월의 때처럼 쌓여버렸다. 내놓아야 했다.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이규배 시인을 포구 마을에서 만났다. 내 시를 몇 편 쯤 봐주셨던 천승세 선생께서 한 권 분량의 원고를 추려오라는 분부가 있었다. 이규배 시인은 서울에서 내려온 작가라고 보기에는 투박했다. 방금 어판장에 잡어를 내려놓고 오는 뱃사람 같았다. 모처럼 맡는 사람 냄새가 났다. 그렇지 않아도 뒤죽박죽 쌓여있는 글들을 정리할 겸 급하게 추려간 시를 천승세 선생이 넘기셨다. 원래 입담이 좋으신 분이신데 평이 걸걸했다. 이런 서정은 근래에보지 못했다고 하신다. 나는 선생보다도 서울에서 내려온 이 시인의 눈빛을 살피고 있었다. 문단으로서는 외진 곳에 살면서 소통을 하였던 분들이 정종선생과 천승세 선생이다. 정종 선생은 할아버지 연세시다. 내가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모신 것이 몇 해 전 노무현 묘소를 다녀왔을 때다. 선생은 내 글의 출판을 나보다 더 서두셨다. 선생은 눈이 어두워 귀로 듣는 이독을 하셨는데 내 시를 읽어 드리곤 했다.
선생께서 두 번을 눈물을 훔치는 것을 봤다. 선생이 계실 때 꼭 책을 내고 싶었다. 이번 시집이 나오면 맨 먼저 선생이 요양 중인 대전에 올라갈 계획이다. 나는 문학과 학문의 일가를 이룬 선생들의 무소유의 행려를 귀히 보게 된다. 버리고자 해서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끝내 가지고 가셔서 세상의 욕심에 해탈한 진정한 예술인들이시다.
첫 시집을 낳게 한데는 시를 쓰게 하시고 시 쓰는 나를 책망치 않으신 부모님과 정종 선생님과 천승세 선생님, 장다리의 화두를 숙제로 남기시고 내 문학을 지켜보시는 오세영 시인님, 아우처럼 허물없이 글을 봐주시던 김준태 시인님 그리고 경이 형, 같이 문학을 했던 지역 문인들의 힘이 크다. 누구보다도 출판에 도움을 주고 발문을 써준 이규배 시인께 감사하다.
발문
장진기 시인이 "길고 짧은 시들이 내 주위를 맴돌았다. 시와 얘기하고 시와 연애하고 시와 동거했다. 내 시들은 허기질 때는 사냥을 하듯 들을 헤매고 세상이 시끄러울 땐 의병처럼 전투를 나가지만 돌아와서는 서정시가 되었다."(「시집 후기」 부분)라고 고하듯, 그는 천상 서정시인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두들겼으나 열리지 않는 / 문 앞에서 / 깃발을 내려놓고 숨을 돌린다 / 사람 물결은 도도히 흘러가는데 / 물가에서 물장구를 쳤던 구호나 함성들" 속에서, "이제는 시를 쓸 때 / 시대를 건드려 보지 않은 자가 / 거리에서 시민의 발자국 소리를 받아 적지 않은 자가 / 순수시를 쓰겠는가"하며, 그는 "바람을 품어보며 / 사람 냄새를 호흡하며 / 문을 닫고 / 순수시를 쓴다"(「순수시를 쓴다」 부분)고 한다. 시인에게 '가(家, 재주가 정통한 사람)'를 쓰지 않는 것은 시여기인(詩如其人)의 오랜 시학의 전통 때문인 바, 고 김남주金南柱, 1946~1994의 "어이, 규배. 시는 사는 만큼 쓰는 것이여."라고 들려주었던 말이, 혜환 이용휴의 "기시사기인(其詩似其人, 시는 곧 그 사람이니) 진극시로기(眞極時露奇, 사람의 진정이 극하여 진기가 드러난다)"의 시에 섞여 마음 울린다. - 이규배 시인(발문 중에서)
목차
목차
초승달 아래에서 우화羽化하고 있다
타래난초
일출
사금파리 빛 눈 입자
뼛국
살을 태운다
자갈금을 지나가다 갈대에게 하는 언약
남해열차
사의재四宜齋에서 다산 초당으로 들다
손가락으로 난蘭을 친다
눈은 분봉分蜂하듯 날리고
겨울 밤 커피 한 잔
기러기 비창悲愴
장독에 호박꽃 피다
빙어氷魚
신발 끄는 소리 담으며 별은 떴다
갈대 곱사춤
망초꽃길
유월
작두 샘 등물
제 2 부
그대 마을을 바라보네
봄앓이 그리움
들길을 걷다
송이도松耳島 에서 초분草墳을 보다
병실에서 바라보는 첫눈 풍경
겨울 텃밭에 양파를 심다
움
빙어氷魚 2
동진강東津江에 떨어진 별 가락지
나 그대 곁에 오래 머물러 있다
2013년 1월 20일 새벽
새벽길
물잠자리
쥐 발자국 그리기
그리움 갈이
손 씻기
제 3 부
새가 앉았다 날아간 나무만이 숲을 얘기할 수 있네
제 4 부
첫눈
깨꽃
언덕 밭
허공에 방류하는 치어穉魚
순수시를 쓴다
휴가
가을 졸음
허수아비 처세
어떤 봄날
겨울 강
여름 마루에서의 낮잠
화엄華嚴
어깨뼈도 섬처럼 어둠에 묻힐 그리움
발문(이규배 시인) 진정眞情의 박실樸實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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