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본능 feat 미소년(온우주 단편선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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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적인 에너지와 열정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꾸는 박애진의 힘 있는 작품들!
박애진의 작품집 『원초적 본능 feat. 미소년』. 독창적인 상상력과 뛰어난 흡입력을 지닌 국내 작가들의 단편만을 모은 작품집 「온우주 단편선」의 아홉 번째 작품집이다. 멀게는 1999년부터 가까이는 2012년까지 쓰인 작가의 단편 가운데 보편적이지 않은 시각으로 남과 여, 사람과 사랑을 다룬 이야기들을 모아 엮었다. 현실과 다른 법칙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어른들만 마시는 커피의 비밀을 알기 위해 오빠의 방을 엿보는 ‘나’의 이야기를 담은 《어른들은 왜 커피를 마시지》, 아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 사람이 함께 관계를 가져야만 하는 세상의 이야기를 그린 《완전한 결합》, 폐허가 된 지구에 남은 것들을 수집하는 일을 맡은 우주선조종사 ‘나’의 생각을 들려주는 《낙원》 등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박애진의 작품집 『원초적 본능 feat. 미소년』. 독창적인 상상력과 뛰어난 흡입력을 지닌 국내 작가들의 단편만을 모은 작품집 「온우주 단편선」의 아홉 번째 작품집이다. 멀게는 1999년부터 가까이는 2012년까지 쓰인 작가의 단편 가운데 보편적이지 않은 시각으로 남과 여, 사람과 사랑을 다룬 이야기들을 모아 엮었다. 현실과 다른 법칙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어른들만 마시는 커피의 비밀을 알기 위해 오빠의 방을 엿보는 ‘나’의 이야기를 담은 《어른들은 왜 커피를 마시지》, 아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 사람이 함께 관계를 가져야만 하는 세상의 이야기를 그린 《완전한 결합》, 폐허가 된 지구에 남은 것들을 수집하는 일을 맡은 우주선조종사 ‘나’의 생각을 들려주는 《낙원》 등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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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사람도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잔인하게 굴 수 있다
사람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전통적인 성 관념을 뒤엎는 발랄한 전복부터
관계의 이면을 섬세히 더듬는 은밀한 손길까지
이미 익숙해진 것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할 감성의 조각들
온우주 출판사에서 독창적인 상상력과 뛰어난 흡입력을 지닌 이야기만 엄선해서 묶은 온우주 단편선의 아홉 번째 작품집으로 박애진의 『원초적 본능 feat. 미소년』이 출간되었다. 한국 장르문학만을 출간하는 온우주 출판사에서는 이미 출간된 곽재식, 정도경, 이서영, 김현중, 김인정, 전혜진의 작품집 이후 2013 온우주 단편선 마지막 작가인 박애진의 작품집 두 권을 준비 중이며, 『원초적 본능 feat. 미소년』이 그중 첫 번째 작품집이다.
박애진의 작품집 『원초적 본능 feat. 미소년』은 멀게는 1999년부터 가까이는 2012년까지 쓰인 작가의 단편 중 보편적이지 않은 시각으로 남과 여, 사람과 사랑을 다룬 이야기들을 엮은 작품집이다. 작품집 초반은 어른들만 마시는 커피의 비밀, 여인들만 살아서 때가 되면 소년들이 차원을 건너 나타나는 마을, 인생의 동반자로 함께 자라는 보석 인형, 둘이 아니라 셋이서 아이를 낳는 사회 등 현실과 다른 법칙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청소년이 어른이 되기 위해 치르는 대가, 아픔과 상실을 다른 세상에 빗대어 끄집어내는 아름답고 보석 같은 작품들이다. 작품집 후반 또한 안드로이드나 외계인이 연인으로 등장하거나 달이 배경인 이야기도 있지만, 외연을 벗기고 보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의 아픈 이면들을 섬세하게 그린 작품들이다.
사람에 지치고 사랑에 아프고 남들과 다르단 느낌에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박애진의 작품집은 어쩌면 가장 아픈 곳을 들추고 드러내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작품집을 읽고 그 안의 인물들과 함께하고 덮는 순간 드러냈기에 치유되는 경험을 할 것이다.
언제고 기회가 온다면, 포근하게 세상을 덮어 햇살에 곱게 반짝이다가도 얼어붙으면 손을 베이는 한겨울 눈밭처럼 예민하고 불안정하고 사납고 발랄하고 덜 여물어 더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많이 그리고 싶다. - 작가의 말 中
'나'로서의 너와 나의 관계, '너'로서의 너와 나의 관계? 우리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실제로 경험하고 또 욕망하는 것은 어느 쪽에 가까울까. 「낙원」을 포함하여 이 작품집의 단편들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주지는 않는다 ? 다만 이 두 가지 종류의 관계가 서로 한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 김지원, 권말해설 中
수록작에 대하여
어른들은 왜 커피를 마시지
16살이 되면, 커피포트를 선물로 받고 어른들만 마실 수 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된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16살 생일날 나는 커피를 끓였지만, 그저 쓰기만 했다. 그런데 커피에는 무언가 다른 비밀이 있는 듯, 모두가 걱정하거나 나를 따돌린다. 나는 그 비밀을 알기 위해 친구에게 물건을 사주고 했어도 도통 알아낼 수가 없어, 어느 날 오빠의 방을 엿보기로 결심한다.
오빠와 엄마는 커피포트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른들은 항상 방에서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마실 때는 절대로 방에 누구도 들이지 않는다. 날 그렇게 귀여워하고 언제든 들어오라고 방을 열어놓는 오빠도 그때만은 문을 잠근다.
어른들이 커피를 마실 땐 난 방에 들어가지 못한다.
왜 어른들은 커피를 마실까? - 9~10쪽
"왜 어른들은 커피를 마시지?"
오빠는 잠시 밤하늘을 보다가 말했다.
"고독하기 때문이야."
"고독?"
"넌…… 그래, 넌 아직 외롭다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를 거야. 사람은 누구나 혼자란다. 혼자인 것을 견딜 수 없는 밤, 누구도 내 옆에 있어주지 않는 밤, 고독을 달래기 위해 커피를 마시지."
"커피는 쓰기만 한걸."
"너도 좀 지나면 알게 될 거야."- 25~26쪽
짝짓기
여자들만 사는 이 마을에는 아이들이 성인이 되는 해부터 남자들이 어딘가에서 나타난다. 이때를 배란기라 하며 발견한 소년과 짝을 짓고 나면 소년들은 왔던 곳으로 사라지고 여자들은 아이를 낳아 기른다. 라스는 주위 아이들이 다 여기저기서 미소년을 찾아내서 짝을 짓는 와중에 계속 소년을 찾지 못하자, 자신만 후손 없이 소멸할 것 같은 두려움에 산을 올라간다. 그곳에는 우연히 알게 된, 소년들이 오는 세상의 문을 여는 방앗간이 있다.
타미안의 눈이 양동이에 닿았다.
"아, 이거? 하늘에서 소년이 떨어지면 받으려구."
라스는 타미안이 뭐라 묻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들고 다니기 귀찮지 않겠어?"
"그래도 눈앞에서 떨어질 때 아무것도 없어봐. 미리미리 준비해야 하는 거라고."
라스는 뭐가 즐거운지 양동이를 앞뒤로 흔들며 말했다. 양동이가 움직일 때마다 길게 땋은 양 머리도 같이 달랑거렸다.
"언제 올지 모르잖아."
"곧 때가 될 거야."
라스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라스가 가장 친한 타미안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녀는 며칠 전 밤에 어른들이 아이들 모르게 버려진 물레방앗간으로 가는 걸 보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 35~36쪽
그것이 시작이었다. 곳곳에서 소년을 찾은 소녀가 늘어갔다. 누구는 밤에 돌아오다가 발길에 뭔가 채여 보니 소년이었다더라, 누구는 나무 열매를 따다가 나무에 걸린 걸 보고 따왔다더라, 누구는 자러 방에 들어가 보니 이불 안에서 나왔다고 하기까지 했다. - 42쪽
완전한 결합
아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 사람이 함께 관계를 가져야만 하는 세상의 이야기이다. 그중 여자는 난자를 주는 사람과 실제로 태에 아이를 갖는 사람으로 나뉘는데, 해인은 태에 아이를 갖는 사람, 이연은 난자를 주는 사람이다. 이연은 어렸을 때 첫 교감을 가진 이후로 항상 해인과 평생을 함께할 거라 믿으며, 만남의 과정에서나 생활에서나 언제나 해인에게 맞춰주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연을 독점하려고 하면서 남자관계도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해인에게 이연은 점점 지쳐간다. 사소한 일로 다투고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다가, 호감 있는 남자의 도움으로 해인에게 연락한 이연은 화해하기 위해 공들여 준비하고 나가지만, 해인은 그 자리에 다른 짝과 함께 나온다.
"전 하지윤의 이론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진 않아요."
어쩌다보니 다시 하지윤과 김민호 이야기가 나왔다.
"세상에 완벽한 건 없어요. 조금 모자라더라도 부족한 서로를 감싸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너무 완벽한 짝을 찾으려고 하다가 시기를 놓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요."
준수는 내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그리고 전 아이를 원하거든요."
나는 덧붙였다.
"물론 저도 아이를 원해요. 누구나 그렇듯이요."
준수가 말했다.
"음, 제 말은, 그러니까 해인이가 아이를 낳은 다음에도 우린 함께할 거라는 말이에요. 물론 해인이는 아메니까 정부에서 지원금이 나오죠. 하지만 해인이는 그다지 건강한 편이 아니잖아요. 옆에서 돌봐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리고 저도 아이를 같이 키우고 싶고요. 이상한가요?"
"아니요.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군요."
이 이야기를 들은 다른 주트와 마찬가지로 준수는 한 발 물러서는 태도로 말했다. 이게 문제였다. 해인은 아이의 다른 생산자들이 계속 자신과 아이 옆에 남기 바랐다. -75쪽
나의 사랑스러웠던 인형 네므
아이가 한 살이 되면 누구나 보석에서 태어나 식물처럼 기르는 인형을 사러 간다. 인형은 일생에 단 한 번만 가질 수 있는 어린 시절의 친구이자 인생의 동반자이다. 보통 사람들은 대체로 사춘기쯤에 버리거나 죽이면서 어른이 되는데 은지는 대학생이 되도록 아직 인형을 가지고 있다. 항상 자라지 못한 괴짜로 취급받는 은지는 인형에 대한 레포트를 발표한 후 아직 인형을 가지고 있다는 윤아를 만나게 된다.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서 항상 붙어 다니고 집에도 부르지만, 윤아는 은지의 인형을 너무 좋아하면서 점점 더 많은 것을 은지의 인형 네므에게 주려고 든다.
"천천히 고르게 놔두세요. 평생 딱 한 번 가질 수 있는 보석인걸요."
가게 주인이 대답했다.
"가지고 있던 걸 잃어버린 후 또 사는 사람도 있다던데요."
"그렇긴 합니다만, 드물어요. 어릴 때야 보석과 궁합을 맞추기 쉽지만, 커서는 영 힘듭니다. 그래서 만 한 살이 되는 날 고르는 거죠. 아직 아무것도 모를 때, 무의식 속에서 고르는 보석이 가장 상성이 잘 맞으니까요."
가게 주인과 아빠가 대화하는 동안 엄마는 날 안고 처음부터 다시 벽을 돌았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찬찬히 볼 수 있었다. 몇몇 보석이 눈을 끌었고, 그중 뭘 고를까 고민했다. 진열대로 왔다. 진열대에 있는 보석은 반짝이지 않아 눈이 가지 않았다.
"저 보석은 곧 버려지겠군요."
엄마가 진열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곧 치워야 할 겁니다. 애들은 보통 반짝이는 걸 좋아해서요. 괜찮은 보석인데……."
다들 알다시피 임자를 찾지 못한 보석은 노화해서 죽는다. 난 엄마와 가게 주인이 말하는 보석으로 눈을 돌렸다. 일장석이었다. 본디 윤기 흐르던 적갈색의 보석이 퇴락해 색은 탁해지고, 겉은 거칠어졌다.
품고 있던 생명 역시 곧 사그라질 것이다. 나는 그 보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 보석은 그렇게 버려질 보석이 아니었다. 분명 다른 어떤 보석보다 아름다운 인형을 품은 보석이었다. - 110쪽
이 세상 어딘가에는 정말로 날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래 친구들이 인형을 잃어버리고,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리고, 죽이기 시작할 때도 난 인형을 소중히 간직했다. 점점 인형을 가진 사람들이 없어지고,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네므를 사랑했다. 어딘가에 나처럼 인형을 사랑하고, 내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한순간도 그걸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어딘가에는, 반드시 있을 거라고…….
눈을 감으면 윤아와 나누었던 인형에 대한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그 앤 언제나 어떻게 인형에게 잘해줄지, 나나 인형이 먼저 죽는 것이 아닌, 함께 생을 마감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윤아는 인형이야말로 유일하게 죽음을 함께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해왔다. 나도 그랬다.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인형만이 서로를 계산하며 만나지 않는 관계이며, 인형만이 유일하게 모든 애정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존재라고. - 135쪽
나만의 연인
맞춤형 애인 안드로이드를 만들어주는 회사가 있다. 나는 외로워서 그곳에 가서 안드로이드를 만들었다. 만드는 과정에서 성기 모양까지 디테일하게 보여주는 것에 포복절도하며 만들어왔고,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며 자신의 성향에 딱 맞게 언제나 화내지 않고 모든 것을 보듬어주는 연인 안드로이드에게 만족했다. 그러나 친구 집에 놀러가 친구의 연인 안드로이드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외모는 다르지만 너무나 느낌이 비슷한 다른 안드로이드를 본 순간, 나의 연인은 그저 안드로이드로 추락했다.
안드로이드는 환상 속의 연인이다. 나는 테인이 안드로이드라는 걸, 1년에 한 번 정기 검사를 받는 게 안전하다는 걸 안다. 걷는 게 이상해서 A/S를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진 테인을 안드로이드가 아닌 연인이라는 환상으로 대할 수 있었다. 지희의 안드로이드와 지희나 다른 사람들이 안드로이드를 대하는 방식, 그로 인해 드러난 안드로이드의 본질은 내 환상을 깨뜨렸다. 테인은 진짜 애인이 아니다. 기계에서 나온 공산품일 따름이다. 그저 비싼 장난감 취급하는 지희나 카페 사람들이 정상이었다.
진짜 연인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매순간 누군가와 친해질 때마다, 아주 깊은 사이가 될 때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내 진짜 모습을 알게 되면 저 사람은 틀림없이 실망해서 날 떠날 거야.'라는 근원적인 공포와 싸워 이겨야 했다. 테인을 손에 넣었을 때, 테인이 내가 바라던 바로 그런 연인이라는 걸 안 순간, 더 이상 그런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기댈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만 있어도 충분했다. 쉴 수 있는 곳은 한 곳이면 되었다. 그럼 견딜 수 있는데……. - 183~184쪽
조화
현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집을 탈출해 독립했다. 혼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존에 버거운 나날을 보내던 중 고등학교 동창 경숙이를 메신저로 만나, 게임을 하게 된다. 게임하는 사람들끼리 실제로 얼굴을 맞대고 보기로 한 날 현수는 희수를 만나고, 두 사람은 서로 원하면서도 각기 다른 이유로 좌절하고 절망한다.
"울 언니가 뭐 하느냐 그러더라. 뭔데 만날 붙들고 있느냐고. 그래서 캐릭터 키워서 인던 가고, 인던 가서 아이템 장비해서 더 레벨 높은 인던 가고, 뭐 그런 게임이라고 했지. 그러니까 그런 걸 뭐하러 하느냐고 하는 거야. 완전 시간낭비 쳇바퀴 아니냐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경숙은 몸을 앞으로 내밀며 대단한 통찰력이라도 뽐내듯 말했다.
"사는 건 안 그러냐. 돈 들여서 대학 가고, 대학 가서 공부하고 학원 다니면서 돈 쓰고, 그래서 돈 벌러 회사 들어가고, 집 마련하고, 진급하고, 진급해서 돈 더 벌어서 더 큰 집 가고, 더 좋은 차 사고. 뭐가 다르냐. 그랬더니 그래도 그건 생산성 있는 일이라나. 나 원 참, 어이가 없어서."
"사는 데 별 도움 안 되는 것 같은 거, 생산성 없는 거, 사는 데 정말 필요한 건 그런 것들일지도 몰라."
현수가 중얼거렸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침묵 후 다들 "오오" 하는 소리를 냈다.
- 211~212쪽
키스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단지 입술과 입술이 닿는 게 아니다. 육체적인 친밀함은 정신적인 친밀함을 동반한다. 친밀함이라는 건 서로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알게 된다. - 246쪽
낙원
그 사람과 헤어진 후 우주선조종사 나는 폐허가 된 지구에서 남은 것들을 수집하는 일을 맡았다. 지구의 모습과 반복된 작업 위로 상념이, 그에 대한 기억이 뒤덮인다.
답을 안다고 생각하며 묻는 질문들. 확인하기 위한 질문들. 참, 멀리까지도 간다. 말 속에 숨은 말들. 책망하는 어깻짓. 인사를 가장한 위로 섞인 다독거림.
내가 그런 걸 바랐던가? 내가 그래서 떠났던가? 나는 지구로 떠난 걸까, 지구로 온 게 아니라?
아마, 모두 사실일 거라고, 나는 기계손들이 건물을 해체하는 것보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가식을 부린다고 생각하지. 진짜 본 모습은 감추고 보여주지 않는다고, 진짜 나는 다르다고 말하곤 해. 아니, 사람들의 눈에 비친 내가 진짜 나다. 그래서 이곳에 왔다. 나는 나를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게 아니야.
몸을 웅크렸다. 히터가 작동되었다. 추운 게 아닌데. 아니, 추운가?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기란 얼마나 힘든가. 아무도 날 보지도 듣지도 못할 곳에서조차. - 276~277쪽
가끔 지구환경보존협회에서 초기에 조종사를 구하기 어려웠다는 이유로 그렇게 높은 연봉을 부르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 어렵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모험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일이 돈을 위한 일이 되었다. 우주선조종사는 엄격하게 선발된 사람이 길고 지난한 훈련과정을 거친 뒤에 받을 수 있는 명칭이다. 조종사는 돈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협약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인류는 필연적으로 예술을 필요로 하며, 예술가가 없는 달에서 조종사를 예술가로 승화시켰다고 말한다.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우주가 좋아서 조종사가 되었을 뿐……. 그래, 그뿐이다.
문득 내가 조종사가 된 걸 진심으로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 때가 다음 지시를 기다리며 조종실의 불을 모두 끄고 우주를 바라보던 순간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그건 조종기술과도, 먹고사는 것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삶에서 중요한 건, 사는 데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 288쪽
이번엔 외계인이냐
쉽게 사랑에 빠지고 그 마음이 식으면 돌아서서 바람둥이라 욕 먹는 나는, 이번에는 지구로 온 외계인 사절을 통역해주다가 그녀에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뱀파이어나 인어에 이어서 이번엔 외계인이냐며 사람들은 놀리고, 나는 억울하다. 내게는 언제나 진심과 이유가 있었고, 상대가 누구냐보다 어떻냐가 중요했을 뿐이었다.
?은 3개월 전 학술 교류를 목표로 온 우딧이든의 사절 중 한 명으로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 회사가 선택되었다. 우리 회사는 작으니까. 그리고 일전에 인어를 서울 관광 시켜 준 적도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 회사고, 그래서 나였다. 제길, 제길, 제길!
외계인이랑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고! 취향을 짐작이나 할 수 있어야 말이지! 그뿐이야? 경호원 줄줄 끌고 다녀야지, 너무 높은 소리로 웃지 마라, 몸을 만지려 들지 마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지 마라, 통역기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선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야 한다, 등등 수십 개는 될 법한 규칙도 외워야 하지. 외계인 가이드 한다고 월급 더 줄 것도 아니면서.
"오십니다."
경호원 1이 말했다. 오십니다? 웃기지도 않아, 정말. 경호원이 해일처럼 갈라지고 ?이 모습을 나타냈다. 제기랄.
나는 마치 지구인처럼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정말 싫다.
또! 젠장할, 또!
나는, 사랑에 빠졌다. - 321쪽
어떤 이들은 여자들은 모성본능이 있어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남자에게 반한다고 한다. 그건 사실과 다르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상대에게 끌리는 건 그 사람의 진짜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드러내지 않는 내밀한 본모습, 깊은 상처 같은 것. 그 모습을 본 사람과 그 모습을 보인 사람은 더 이상 표면적인 관계에 머무를 수 없다. - 364쪽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잔인하게 굴 수 있다
사람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전통적인 성 관념을 뒤엎는 발랄한 전복부터
관계의 이면을 섬세히 더듬는 은밀한 손길까지
이미 익숙해진 것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할 감성의 조각들
온우주 출판사에서 독창적인 상상력과 뛰어난 흡입력을 지닌 이야기만 엄선해서 묶은 온우주 단편선의 아홉 번째 작품집으로 박애진의 『원초적 본능 feat. 미소년』이 출간되었다. 한국 장르문학만을 출간하는 온우주 출판사에서는 이미 출간된 곽재식, 정도경, 이서영, 김현중, 김인정, 전혜진의 작품집 이후 2013 온우주 단편선 마지막 작가인 박애진의 작품집 두 권을 준비 중이며, 『원초적 본능 feat. 미소년』이 그중 첫 번째 작품집이다.
박애진의 작품집 『원초적 본능 feat. 미소년』은 멀게는 1999년부터 가까이는 2012년까지 쓰인 작가의 단편 중 보편적이지 않은 시각으로 남과 여, 사람과 사랑을 다룬 이야기들을 엮은 작품집이다. 작품집 초반은 어른들만 마시는 커피의 비밀, 여인들만 살아서 때가 되면 소년들이 차원을 건너 나타나는 마을, 인생의 동반자로 함께 자라는 보석 인형, 둘이 아니라 셋이서 아이를 낳는 사회 등 현실과 다른 법칙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청소년이 어른이 되기 위해 치르는 대가, 아픔과 상실을 다른 세상에 빗대어 끄집어내는 아름답고 보석 같은 작품들이다. 작품집 후반 또한 안드로이드나 외계인이 연인으로 등장하거나 달이 배경인 이야기도 있지만, 외연을 벗기고 보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의 아픈 이면들을 섬세하게 그린 작품들이다.
사람에 지치고 사랑에 아프고 남들과 다르단 느낌에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박애진의 작품집은 어쩌면 가장 아픈 곳을 들추고 드러내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작품집을 읽고 그 안의 인물들과 함께하고 덮는 순간 드러냈기에 치유되는 경험을 할 것이다.
언제고 기회가 온다면, 포근하게 세상을 덮어 햇살에 곱게 반짝이다가도 얼어붙으면 손을 베이는 한겨울 눈밭처럼 예민하고 불안정하고 사납고 발랄하고 덜 여물어 더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많이 그리고 싶다. - 작가의 말 中
'나'로서의 너와 나의 관계, '너'로서의 너와 나의 관계? 우리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실제로 경험하고 또 욕망하는 것은 어느 쪽에 가까울까. 「낙원」을 포함하여 이 작품집의 단편들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주지는 않는다 ? 다만 이 두 가지 종류의 관계가 서로 한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 김지원, 권말해설 中
수록작에 대하여
어른들은 왜 커피를 마시지
16살이 되면, 커피포트를 선물로 받고 어른들만 마실 수 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된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16살 생일날 나는 커피를 끓였지만, 그저 쓰기만 했다. 그런데 커피에는 무언가 다른 비밀이 있는 듯, 모두가 걱정하거나 나를 따돌린다. 나는 그 비밀을 알기 위해 친구에게 물건을 사주고 했어도 도통 알아낼 수가 없어, 어느 날 오빠의 방을 엿보기로 결심한다.
오빠와 엄마는 커피포트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른들은 항상 방에서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마실 때는 절대로 방에 누구도 들이지 않는다. 날 그렇게 귀여워하고 언제든 들어오라고 방을 열어놓는 오빠도 그때만은 문을 잠근다.
어른들이 커피를 마실 땐 난 방에 들어가지 못한다.
왜 어른들은 커피를 마실까? - 9~10쪽
"왜 어른들은 커피를 마시지?"
오빠는 잠시 밤하늘을 보다가 말했다.
"고독하기 때문이야."
"고독?"
"넌…… 그래, 넌 아직 외롭다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를 거야. 사람은 누구나 혼자란다. 혼자인 것을 견딜 수 없는 밤, 누구도 내 옆에 있어주지 않는 밤, 고독을 달래기 위해 커피를 마시지."
"커피는 쓰기만 한걸."
"너도 좀 지나면 알게 될 거야."- 25~26쪽
짝짓기
여자들만 사는 이 마을에는 아이들이 성인이 되는 해부터 남자들이 어딘가에서 나타난다. 이때를 배란기라 하며 발견한 소년과 짝을 짓고 나면 소년들은 왔던 곳으로 사라지고 여자들은 아이를 낳아 기른다. 라스는 주위 아이들이 다 여기저기서 미소년을 찾아내서 짝을 짓는 와중에 계속 소년을 찾지 못하자, 자신만 후손 없이 소멸할 것 같은 두려움에 산을 올라간다. 그곳에는 우연히 알게 된, 소년들이 오는 세상의 문을 여는 방앗간이 있다.
타미안의 눈이 양동이에 닿았다.
"아, 이거? 하늘에서 소년이 떨어지면 받으려구."
라스는 타미안이 뭐라 묻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들고 다니기 귀찮지 않겠어?"
"그래도 눈앞에서 떨어질 때 아무것도 없어봐. 미리미리 준비해야 하는 거라고."
라스는 뭐가 즐거운지 양동이를 앞뒤로 흔들며 말했다. 양동이가 움직일 때마다 길게 땋은 양 머리도 같이 달랑거렸다.
"언제 올지 모르잖아."
"곧 때가 될 거야."
라스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라스가 가장 친한 타미안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녀는 며칠 전 밤에 어른들이 아이들 모르게 버려진 물레방앗간으로 가는 걸 보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 35~36쪽
그것이 시작이었다. 곳곳에서 소년을 찾은 소녀가 늘어갔다. 누구는 밤에 돌아오다가 발길에 뭔가 채여 보니 소년이었다더라, 누구는 나무 열매를 따다가 나무에 걸린 걸 보고 따왔다더라, 누구는 자러 방에 들어가 보니 이불 안에서 나왔다고 하기까지 했다. - 42쪽
완전한 결합
아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 사람이 함께 관계를 가져야만 하는 세상의 이야기이다. 그중 여자는 난자를 주는 사람과 실제로 태에 아이를 갖는 사람으로 나뉘는데, 해인은 태에 아이를 갖는 사람, 이연은 난자를 주는 사람이다. 이연은 어렸을 때 첫 교감을 가진 이후로 항상 해인과 평생을 함께할 거라 믿으며, 만남의 과정에서나 생활에서나 언제나 해인에게 맞춰주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연을 독점하려고 하면서 남자관계도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해인에게 이연은 점점 지쳐간다. 사소한 일로 다투고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다가, 호감 있는 남자의 도움으로 해인에게 연락한 이연은 화해하기 위해 공들여 준비하고 나가지만, 해인은 그 자리에 다른 짝과 함께 나온다.
"전 하지윤의 이론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진 않아요."
어쩌다보니 다시 하지윤과 김민호 이야기가 나왔다.
"세상에 완벽한 건 없어요. 조금 모자라더라도 부족한 서로를 감싸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너무 완벽한 짝을 찾으려고 하다가 시기를 놓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요."
준수는 내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그리고 전 아이를 원하거든요."
나는 덧붙였다.
"물론 저도 아이를 원해요. 누구나 그렇듯이요."
준수가 말했다.
"음, 제 말은, 그러니까 해인이가 아이를 낳은 다음에도 우린 함께할 거라는 말이에요. 물론 해인이는 아메니까 정부에서 지원금이 나오죠. 하지만 해인이는 그다지 건강한 편이 아니잖아요. 옆에서 돌봐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리고 저도 아이를 같이 키우고 싶고요. 이상한가요?"
"아니요.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군요."
이 이야기를 들은 다른 주트와 마찬가지로 준수는 한 발 물러서는 태도로 말했다. 이게 문제였다. 해인은 아이의 다른 생산자들이 계속 자신과 아이 옆에 남기 바랐다. -75쪽
나의 사랑스러웠던 인형 네므
아이가 한 살이 되면 누구나 보석에서 태어나 식물처럼 기르는 인형을 사러 간다. 인형은 일생에 단 한 번만 가질 수 있는 어린 시절의 친구이자 인생의 동반자이다. 보통 사람들은 대체로 사춘기쯤에 버리거나 죽이면서 어른이 되는데 은지는 대학생이 되도록 아직 인형을 가지고 있다. 항상 자라지 못한 괴짜로 취급받는 은지는 인형에 대한 레포트를 발표한 후 아직 인형을 가지고 있다는 윤아를 만나게 된다.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서 항상 붙어 다니고 집에도 부르지만, 윤아는 은지의 인형을 너무 좋아하면서 점점 더 많은 것을 은지의 인형 네므에게 주려고 든다.
"천천히 고르게 놔두세요. 평생 딱 한 번 가질 수 있는 보석인걸요."
가게 주인이 대답했다.
"가지고 있던 걸 잃어버린 후 또 사는 사람도 있다던데요."
"그렇긴 합니다만, 드물어요. 어릴 때야 보석과 궁합을 맞추기 쉽지만, 커서는 영 힘듭니다. 그래서 만 한 살이 되는 날 고르는 거죠. 아직 아무것도 모를 때, 무의식 속에서 고르는 보석이 가장 상성이 잘 맞으니까요."
가게 주인과 아빠가 대화하는 동안 엄마는 날 안고 처음부터 다시 벽을 돌았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찬찬히 볼 수 있었다. 몇몇 보석이 눈을 끌었고, 그중 뭘 고를까 고민했다. 진열대로 왔다. 진열대에 있는 보석은 반짝이지 않아 눈이 가지 않았다.
"저 보석은 곧 버려지겠군요."
엄마가 진열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곧 치워야 할 겁니다. 애들은 보통 반짝이는 걸 좋아해서요. 괜찮은 보석인데……."
다들 알다시피 임자를 찾지 못한 보석은 노화해서 죽는다. 난 엄마와 가게 주인이 말하는 보석으로 눈을 돌렸다. 일장석이었다. 본디 윤기 흐르던 적갈색의 보석이 퇴락해 색은 탁해지고, 겉은 거칠어졌다.
품고 있던 생명 역시 곧 사그라질 것이다. 나는 그 보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 보석은 그렇게 버려질 보석이 아니었다. 분명 다른 어떤 보석보다 아름다운 인형을 품은 보석이었다. - 110쪽
이 세상 어딘가에는 정말로 날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래 친구들이 인형을 잃어버리고,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리고, 죽이기 시작할 때도 난 인형을 소중히 간직했다. 점점 인형을 가진 사람들이 없어지고,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네므를 사랑했다. 어딘가에 나처럼 인형을 사랑하고, 내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한순간도 그걸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어딘가에는, 반드시 있을 거라고…….
눈을 감으면 윤아와 나누었던 인형에 대한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그 앤 언제나 어떻게 인형에게 잘해줄지, 나나 인형이 먼저 죽는 것이 아닌, 함께 생을 마감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윤아는 인형이야말로 유일하게 죽음을 함께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해왔다. 나도 그랬다.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인형만이 서로를 계산하며 만나지 않는 관계이며, 인형만이 유일하게 모든 애정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존재라고. - 135쪽
나만의 연인
맞춤형 애인 안드로이드를 만들어주는 회사가 있다. 나는 외로워서 그곳에 가서 안드로이드를 만들었다. 만드는 과정에서 성기 모양까지 디테일하게 보여주는 것에 포복절도하며 만들어왔고,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며 자신의 성향에 딱 맞게 언제나 화내지 않고 모든 것을 보듬어주는 연인 안드로이드에게 만족했다. 그러나 친구 집에 놀러가 친구의 연인 안드로이드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외모는 다르지만 너무나 느낌이 비슷한 다른 안드로이드를 본 순간, 나의 연인은 그저 안드로이드로 추락했다.
안드로이드는 환상 속의 연인이다. 나는 테인이 안드로이드라는 걸, 1년에 한 번 정기 검사를 받는 게 안전하다는 걸 안다. 걷는 게 이상해서 A/S를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진 테인을 안드로이드가 아닌 연인이라는 환상으로 대할 수 있었다. 지희의 안드로이드와 지희나 다른 사람들이 안드로이드를 대하는 방식, 그로 인해 드러난 안드로이드의 본질은 내 환상을 깨뜨렸다. 테인은 진짜 애인이 아니다. 기계에서 나온 공산품일 따름이다. 그저 비싼 장난감 취급하는 지희나 카페 사람들이 정상이었다.
진짜 연인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매순간 누군가와 친해질 때마다, 아주 깊은 사이가 될 때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내 진짜 모습을 알게 되면 저 사람은 틀림없이 실망해서 날 떠날 거야.'라는 근원적인 공포와 싸워 이겨야 했다. 테인을 손에 넣었을 때, 테인이 내가 바라던 바로 그런 연인이라는 걸 안 순간, 더 이상 그런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기댈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만 있어도 충분했다. 쉴 수 있는 곳은 한 곳이면 되었다. 그럼 견딜 수 있는데……. - 183~184쪽
조화
현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집을 탈출해 독립했다. 혼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존에 버거운 나날을 보내던 중 고등학교 동창 경숙이를 메신저로 만나, 게임을 하게 된다. 게임하는 사람들끼리 실제로 얼굴을 맞대고 보기로 한 날 현수는 희수를 만나고, 두 사람은 서로 원하면서도 각기 다른 이유로 좌절하고 절망한다.
"울 언니가 뭐 하느냐 그러더라. 뭔데 만날 붙들고 있느냐고. 그래서 캐릭터 키워서 인던 가고, 인던 가서 아이템 장비해서 더 레벨 높은 인던 가고, 뭐 그런 게임이라고 했지. 그러니까 그런 걸 뭐하러 하느냐고 하는 거야. 완전 시간낭비 쳇바퀴 아니냐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경숙은 몸을 앞으로 내밀며 대단한 통찰력이라도 뽐내듯 말했다.
"사는 건 안 그러냐. 돈 들여서 대학 가고, 대학 가서 공부하고 학원 다니면서 돈 쓰고, 그래서 돈 벌러 회사 들어가고, 집 마련하고, 진급하고, 진급해서 돈 더 벌어서 더 큰 집 가고, 더 좋은 차 사고. 뭐가 다르냐. 그랬더니 그래도 그건 생산성 있는 일이라나. 나 원 참, 어이가 없어서."
"사는 데 별 도움 안 되는 것 같은 거, 생산성 없는 거, 사는 데 정말 필요한 건 그런 것들일지도 몰라."
현수가 중얼거렸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침묵 후 다들 "오오" 하는 소리를 냈다.
- 211~212쪽
키스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단지 입술과 입술이 닿는 게 아니다. 육체적인 친밀함은 정신적인 친밀함을 동반한다. 친밀함이라는 건 서로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알게 된다. - 246쪽
낙원
그 사람과 헤어진 후 우주선조종사 나는 폐허가 된 지구에서 남은 것들을 수집하는 일을 맡았다. 지구의 모습과 반복된 작업 위로 상념이, 그에 대한 기억이 뒤덮인다.
답을 안다고 생각하며 묻는 질문들. 확인하기 위한 질문들. 참, 멀리까지도 간다. 말 속에 숨은 말들. 책망하는 어깻짓. 인사를 가장한 위로 섞인 다독거림.
내가 그런 걸 바랐던가? 내가 그래서 떠났던가? 나는 지구로 떠난 걸까, 지구로 온 게 아니라?
아마, 모두 사실일 거라고, 나는 기계손들이 건물을 해체하는 것보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가식을 부린다고 생각하지. 진짜 본 모습은 감추고 보여주지 않는다고, 진짜 나는 다르다고 말하곤 해. 아니, 사람들의 눈에 비친 내가 진짜 나다. 그래서 이곳에 왔다. 나는 나를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게 아니야.
몸을 웅크렸다. 히터가 작동되었다. 추운 게 아닌데. 아니, 추운가?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기란 얼마나 힘든가. 아무도 날 보지도 듣지도 못할 곳에서조차. - 276~277쪽
가끔 지구환경보존협회에서 초기에 조종사를 구하기 어려웠다는 이유로 그렇게 높은 연봉을 부르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 어렵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모험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일이 돈을 위한 일이 되었다. 우주선조종사는 엄격하게 선발된 사람이 길고 지난한 훈련과정을 거친 뒤에 받을 수 있는 명칭이다. 조종사는 돈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협약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인류는 필연적으로 예술을 필요로 하며, 예술가가 없는 달에서 조종사를 예술가로 승화시켰다고 말한다.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우주가 좋아서 조종사가 되었을 뿐……. 그래, 그뿐이다.
문득 내가 조종사가 된 걸 진심으로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 때가 다음 지시를 기다리며 조종실의 불을 모두 끄고 우주를 바라보던 순간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그건 조종기술과도, 먹고사는 것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삶에서 중요한 건, 사는 데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 288쪽
이번엔 외계인이냐
쉽게 사랑에 빠지고 그 마음이 식으면 돌아서서 바람둥이라 욕 먹는 나는, 이번에는 지구로 온 외계인 사절을 통역해주다가 그녀에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뱀파이어나 인어에 이어서 이번엔 외계인이냐며 사람들은 놀리고, 나는 억울하다. 내게는 언제나 진심과 이유가 있었고, 상대가 누구냐보다 어떻냐가 중요했을 뿐이었다.
?은 3개월 전 학술 교류를 목표로 온 우딧이든의 사절 중 한 명으로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 회사가 선택되었다. 우리 회사는 작으니까. 그리고 일전에 인어를 서울 관광 시켜 준 적도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 회사고, 그래서 나였다. 제길, 제길, 제길!
외계인이랑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고! 취향을 짐작이나 할 수 있어야 말이지! 그뿐이야? 경호원 줄줄 끌고 다녀야지, 너무 높은 소리로 웃지 마라, 몸을 만지려 들지 마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지 마라, 통역기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선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야 한다, 등등 수십 개는 될 법한 규칙도 외워야 하지. 외계인 가이드 한다고 월급 더 줄 것도 아니면서.
"오십니다."
경호원 1이 말했다. 오십니다? 웃기지도 않아, 정말. 경호원이 해일처럼 갈라지고 ?이 모습을 나타냈다. 제기랄.
나는 마치 지구인처럼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정말 싫다.
또! 젠장할, 또!
나는, 사랑에 빠졌다. - 321쪽
어떤 이들은 여자들은 모성본능이 있어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남자에게 반한다고 한다. 그건 사실과 다르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상대에게 끌리는 건 그 사람의 진짜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드러내지 않는 내밀한 본모습, 깊은 상처 같은 것. 그 모습을 본 사람과 그 모습을 보인 사람은 더 이상 표면적인 관계에 머무를 수 없다. - 364쪽
목차
목차
어른들은 왜 커피를 마시지? 007
짝짓기 033
완전한 결합 167
나의 사랑스러웠던 인형 네므 105
나만의 연인 141
조화造化 195
낙원 271
이번엔 외계인이냐 317
해설 네 그림으로 너를 감췄지 384
작가의 말 398
짝짓기 033
완전한 결합 167
나의 사랑스러웠던 인형 네므 105
나만의 연인 141
조화造化 195
낙원 271
이번엔 외계인이냐 317
해설 네 그림으로 너를 감췄지 384
작가의 말 398
저자
저자
박애진
저자 박애진은 이 작품집에 실린 가장 오래된 단편을 쓸 때만 해도, 출간만 하면 베스트셀러에 올라, 밀리언셀러를 찍고, 스테디셀러로 남을 줄 알았다. 당시 내 예상보다 훨씬 늦은 2007년에 『누군가를 만났어』에 「선물」외 4편 수록하며 이후 몇 단편선에 글을 싣고 장편 『지우전; 모두 나를 칼이라 했다』와 『부엉이 소녀 욜란드』를 썼다. 공동단편선 6권과 장편 2권에 이어, 지난 십 수 년간 써 거울에 발표하거나 하드에 봉인해뒀던 단편 중 달콤쌉싸름한 연애담에 가까운 단편으로 오롯이 내 단편선을 내는 지금, 베스트셀러는커녕 초판을 소화하기도 힘들지만, 그래도 꾸준히 책은 나온다고 위안하며 집이라 쓰고 책창고라 읽는 곳에 작은 잠자리와 글 쓰고 그림 그릴 책상 둘 곳은 마련해 산다. 화장실에 가느라 책 사이를 게걸음으로 뚫을 때마다 정규 교육을 16년이나 받는 동안 누구도 책상은 화장실 앞에 두라고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 슬프다. 그래도 나는 나 좋다고 이렇게 산다지만, 얼결에 내 인생에 엮인 고양이 두 마리는 무슨 죄인가. 인터넷 어디선가 본 글에 따르면, 작가/화가/음악가 통칭해서 예술가는 팬 1000명만 있으면 먹고는 산다니 부디 1000명만 이 책을 보아주길……. 고양이들에게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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