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소실되는 풍경(문학동네시인선 250)
장석원 시집
Regular price
$13.48
Sale price
Regular price
✈️
Estimated delivery date 예상 배송일
Standard Shipping
불러오는 중...
주문일로부터 8-12 영업일
Express Shipping
불러오는 중...
주문일로부터 6-8 영업일
"내 안의 너 살아났다가 죽어버린 너
명멸하는 너와 나"
모든 정념이 불타 사라진 뒤에도 완수되지 않는 이별,
결정체처럼 남겨지는 불연성의 존재
첫 시집 『아나키스트』(문학과지성사, 2005)를 통해 격렬한 투쟁의 언어, 혁명으로서의 사랑을 선보이며 평단의 뜨거운 주목을 받은 장석원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 『우리가 소실되는 풍경』이 문학동네시인선 250번으로 출간되었다. 그간 여섯 권의 시집을 거치며 세계의 비정함을 부단히 폭로하고 사랑이 끝난 뒤의 폐허를 비통하게 직시해온 시인은 이제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간 뒤 우리가 소실되는 풍경에 다다랐다. 통절한 감정을 리드미컬하고 능숙하게 구사하는 시인의 문장은 왈칵 쏟아질 듯 넘실거리는 그리움의 정서를 동반한다. 이때의 그리움이란 헤어진 연인에게로 한정되는 평면적인 감정이 아니다. 시인이 그려내는 이별의 감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소멸하는 우리의 현재에 대한 애틋함과, 다가올 일을 모른 채 '너'와 같은 시간선에 머물렀던 '나'에 대한 회한까지를 포함한다. 이를 도착적으로 파헤치고 영영 기억하고자 할 때, '너'와 '나'가 사라지지 않고 명멸하는 "무한 천공"(「플랑크 타임」)의 영원이 가능해진다.
명멸하는 너와 나"
모든 정념이 불타 사라진 뒤에도 완수되지 않는 이별,
결정체처럼 남겨지는 불연성의 존재
첫 시집 『아나키스트』(문학과지성사, 2005)를 통해 격렬한 투쟁의 언어, 혁명으로서의 사랑을 선보이며 평단의 뜨거운 주목을 받은 장석원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 『우리가 소실되는 풍경』이 문학동네시인선 250번으로 출간되었다. 그간 여섯 권의 시집을 거치며 세계의 비정함을 부단히 폭로하고 사랑이 끝난 뒤의 폐허를 비통하게 직시해온 시인은 이제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간 뒤 우리가 소실되는 풍경에 다다랐다. 통절한 감정을 리드미컬하고 능숙하게 구사하는 시인의 문장은 왈칵 쏟아질 듯 넘실거리는 그리움의 정서를 동반한다. 이때의 그리움이란 헤어진 연인에게로 한정되는 평면적인 감정이 아니다. 시인이 그려내는 이별의 감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소멸하는 우리의 현재에 대한 애틋함과, 다가올 일을 모른 채 '너'와 같은 시간선에 머물렀던 '나'에 대한 회한까지를 포함한다. 이를 도착적으로 파헤치고 영영 기억하고자 할 때, '너'와 '나'가 사라지지 않고 명멸하는 "무한 천공"(「플랑크 타임」)의 영원이 가능해진다.
Couldn't load pickup availability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허공이 벌어진다
경탄에 젖어 열리고 있다
안면이 생긴다
사랑에 빠진 육체 흐드러진다
요확에서
네가 나타난다 그때 나는
베어지고 비탄과 신음
구멍마다 새어나오고
(……)
너와 나는 하나였는데 존재한 적이 없었고
맞붙었던 입술 떨어질 때 우리가 헤어질 때
너는 활상하는 그림자가 되고…… 영원한 ●
_「플랑크 타임」 부분
시집을 여는 첫 시의 제목 '플랑크 타임'은 물리학에서 유의미하다고 판단하는 최소의 시간 단위를 뜻한다. 이를 시적으로 해석하면 "저곳과 이곳, 없음과 있음, 알 수 없음과 앎,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경계"(문학평론가 양순모, 해설)라고 이해해볼 수 있겠다. 공간감을 지닌 것처럼 묘사되는 그 찰나의 시간 속에서, "내가 나타나면 네가 사라지고/네가 다가오면 내가 멀어"지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영원히 반복되는 1초" 안에서 그렇게 두 사람은 "연속적이고 연쇄적"인 스침을 지속하는 중이다. 시공간이 점(●)으로 수렴하는, "너와 나"가 "동시에 탄생"(「플랑크 타임」)하고 폐기되기를 반복하는 무한한 세계에서 과거와 미래는 하나로 중첩된다.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관계를 암시하듯 "불붙"고 "몽그라진"(「절곡(折曲)」) 모습의 '너'는 복구가 불가능할 만큼 변질된 뒤지만, 도리어 "발광체"처럼 "뚜렷해"(「나를 불태워줘」)진 형체로 '나'를 찾아온다. "누군가 사랑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상황을 두고 화자는 "너무 지겨워 나를 지져줘 나를 묻어줘"(「충무로역 1번 출구에서」)라고 한탄하다가도, "너의 잘린 토막으로"나마 "포만"을 느끼고 "살"을 빚어내며 "네 옆에 살아남아서 창궐"(「힘 힘 너머로」)할 힘을 얻는다. 그렇게 연결되는 '나'와 '너'는 그런데 피안의 세계로 넘어가버린 듯, "절개된 채 썩는" "속 다 내어준 채/문드러지고 있"(「Nothingness」)는 모양새다.
아무도 아닌
내 안에서
아무는 누구
다무는 입
나를 닫아걸고
너를 묻는다
(……)
우리는 서로를
찢어버렸네
비명과 울음 없이
피 없이 애도 없이
절개된 채 썩는
아무와 아무
나 아닌 나와 너
속 다 내어준 채
문드러지고 있다
割, 愛
_「Nothingness」 부분
이렇듯 손상되고 부서지는 몸의 이미지를 지닌 채로, '너'는 "망각과 회억의 상관관계 속에서" "살아나는 밤의 불빛"(「문산」)처럼 가물거리며 슬픔과 그리움의 대상으로 그려지는데 이때 화자가 '너'를 회상하고 추억하는 일은 보통의 이별에 수반되는 과정과는 사뭇 다른 결을 취한다. 그것은 때로 "가슴속 긁어대는" "쇳소리"로, "회전하는 총알"(「조준 사격」)로, "기묘하고 차갑게" 다가오는 "시반"(「착한 에세이」)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서늘한 이미지는 '부음' '국화' '화장장'과 같은 시어들과 더불어 사별을 암시하기도 한다. 다만 마치 "터미널을 빠져나"(「영현(英顯) 처리」)오듯 누군가와 함께했던 한 시절로부터 탈각되어 나오는 과정 역시 이별이라고 할 수 있다면, 시인에게 있어서 이별이란 어떤 사정으로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그 상대를 '영현'으로 처리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는 한 시절 전체를 애도하는 일이기도 하다. "끝없음을 거듭해 환기하며 보다 근본적인 애도 작업을 작동"(해설)시키는 방식으로.
투명하고 깊은 X의 흰 손이
내게 사랑을 불러왔지
X를 안고서 미끄러져 내려간다
어둠 안으로 들어가서 재생한다
기쁨과 두려움 그리고 가려움
나는 X의 체온을 잊지 못해
기억해 그것을, X의 것을
불덩어리의 아름다운 활강을
(……)
폭우가 쏟아진다. 바위가 굳는다. 빗물 혓바닥 땅을 핥는다. 새로운 X가 태어난다. 방혈하면 나는 깨끗해질까. 나와 공동(空洞) 사이에, 나와 너 사이에, 비가 있다. 비가 나를 다스린다. 나는 녹는다, 흘러간다. 용암. 종말. 사랑은 망각 후에 발굴될 것이다.
_「폼페이, (그)라(디)바」 부분
그러나 기억을 "보존 처리"해둔다면, '너'와 누렸던 시간은 언제든 "재생"할 수 있는 영원한 역사가 된다. 위 시의 'X'는 이미 "불덩어리"로 타올라 사라진 뒤지만, '나'는 "떠난 지 오래되었는데" "붙들린 것 같다"고 토로하며 'X'와의 대담을 이어간다. 시 속 'X'는 화자를 사랑해주는 타인처럼도, 화자 자신처럼도("내가 너야. 너를 사랑해") 보인다. "X는 누구일까"라고 자문하던 '나'는 이내 "바위가 녹아내"릴 듯 뜨겁고 "살 타는 냄새 가득"한 살풍경 속에서 "새로운 X"의 탄생을 예감한다.
편집자와의 사전 인터뷰에 따르면, 장석원의 시 속 '너'는 타인이기도 하지만 오래전 그때 그 시절에 존재했던 '나'이기도 하다. 수많은 '나'가 '너' 혹은 또다른 '나'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며, 오늘에 이르러 '우리'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현재의 우리가 소멸한 뒤 다음 세상에는 어떤 새로운 존재가 탄생할까. 이별과 만남이, 죽음과 탄생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세계에서 장석원은 타자와 타자화된 나를 '너(X)'라고 총칭하며 삶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이별을 아우르고 있다.
통증 없이 나를 기재한다
후회 없이 나를 벗겨낸다
조금 더 멀어졌던가
나는 어디에서 어떻게 부패했던가
부르튼 얼굴 들여다보면
느리게 달라질까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
발생된 것
기억된 것
서술된 것
일까
_「훈증」 부분
대체로 절망적이고 비통한 정서가 시집 전체에 배어 있는 가운데, 집념을 내려놓은 자의 초연함이 느껴지는 구절들이 눈길을 붙잡는다. "이별은 흘러가는 것 땀이나 눈물 같은 것이지 사랑처럼 쉽게 탈색되지"(「착한 에세이」), "기다려보자 견뎌보자 달라질 것이다"(「단자의 리스페리돈」)와 같은 문장이 그렇다. 위 시 역시 마찬가지다. 화자인 '나'는 이제 "통증 없이" "후회 없이" 자신을 직시할 수 있게 된 사람으로, 초탈한 태도로 "부패"된 '나'와 "우리"의 기원을 되짚어간다. 그로써 '나'는 너무도 밀접했던 이별의 통증으로부터 스스로를 떼어낸 뒤 '우리'가 하나가 아닌 둘로 "쪼개진" 상태임을 자각하고, "너를 기다리다가 생매장된 나를 꺼내"볼 용기를, "헤어진 몸, 사출한 그 몸"은 "소각하"(「회회(蛔蛔)」)겠다는 결심을 품게 된다. "전쟁과 전염" "미망의 광기" 속에서도 "어떻게든/일상"은 "지속"될 것이므로 "너를 붙잡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오랫동안/널 머금을 수 있"도록 오히려 "조금 더 멀어져"(「단자의 리스페리돈」)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로써 "영구히 떠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하는 이들은, 결단코 만나지 않는다"(「대속(代贖)과 구령(救靈)」)는 아이로니컬한 깨달음이 도출된다. 이는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게 될까" 기대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자꾸 사라"지는, "감지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나를 끌고 가"(「조운트조(soundso)」)는 위협적인 세계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는 길일 수도 있겠다.
몸이 불타 소실되는 고통을 느낄 만큼 뜨거웠던 한 세월을 지나고 난 뒤, 시인은 마침내 우리는 함께 "경험하는 자"이며 "광장의 굉음에 절삭되며 신음하는 몸들"이자 공통적으로 "사라지는" 신체를 가진, "세계의 전부를 소실"(「●」)한 후 다음으로 건너갈 존재들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듯하다. 시집의 마지막 시편, 모든 것이 허물어진 생의 끝에 이르러 몸을 태우고 남은 재를 바람에 날리는 「폭장」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너'를 기린다. "봄바람"이 실어다 주는 "꽃씨"처럼 나를 스쳐간, 한때는 내 "살 속의 뼈"와도 같았던 '너'가 "나에게 들어왔다가 빠져나갔"음을 느낀다.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이별의 폐허에 매몰되는 대신 그 피폐한 풍경 속 남겨진 '나'와 '너를 고요하게 응시한다. 그렇게 '우리'는 영원히 이별하고 영원히 애도하는 자로 거듭난다.
우리가 소실되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 '나', 결코 반성될 수 없는 '나'. 누구보다 현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착 속에서, 이미지 속에서 현실을 초월하며 풍경을 그려내는 '나'. 그런데 우리 저 '나'를 바라보며 외려 '나'를 압도하는 '이별'을, '죽음'을 어느 때보다 슬프게 예감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진정 마주한 것은 무엇인가. (……) 우리의 삶이 진정 삶다운 것이 되기 위해, 그 앞과 뒤에서 묵묵히 문학을 하고 있는 시인과 눈이 마주쳤다면,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기에 끝없는 패배를 수행하는 시인과 눈을 마주쳤다면, 우리는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인 너머, '나' 너머의 그것들을 참으로 슬프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_양순모, 해설에서
◎장석원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
1. 2023년에 출간한 『이별 후의 이별』 이후 일곱번째 시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소회가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시집 출간은 언제나 기쁘고 설레는 일입니다. 비로소 '나'가 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어떤 것이 마무리되었는데 곧이어 다른 어떤 것이 새로 시작되는 느낌. 어딘가에서 유실했던 것을 마침내 되찾은 느낌. 약간의 두려움과 조금 모자란 만족감과 어김없이 밀려드는 부족함의 화환 같은 느낌. 시집을 준비할 때, 시집 꼴을 막 갖춘 원고를 들고 비오는 카페 창가에서 처음으로 정독했을 때가 떠오르네요. 「이별 후의 이별」 그 너머에 무엇이 있나. 그곳에 내가 도착했다면, 나는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떤 언어를 지니고 있나. 이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면서, 시집 원고를 손에 들고, 원고와 겨룰 때 필요한 염결성을 짊어지면서, 마치 결승전에 나서는 선수 같은 마음을 가져보았습니다. 그럴 때 제가 시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느끼기에, 시집을 낸다는 일은 아주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본질 같다고 여기기에, 지금, 기쁩니다.
2. 제목처럼 '우리'가 소멸하고 소실되는 이미지들이 강렬합니다. 제목을 어떻게 고르시게 되었는지, 또 선생님께 '이별'이란 어떤 의미인지 들려주세요.
'나'가 '너'를 발견합니다. '너'는 타인 '너'이기도 하고, 오래전 그곳에 존재했던 '나'이기도 합니다. 그 '나'와 '너'가 겹쳐지고 뭉개지고 분리되고 다시 합장하듯 만나는 오늘의 이곳에서 '우리'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또한 개인적으로 '우리'가 소실된 후에 누가 또는 무엇이 새로 태어나고 나타날까. 이런 질문 속에서, 알 수 없고 가볼 수 없는 미래를 단념하고, 현재의 우리가 또 헤어지고 더 많이 부서지고 마침내 불꽃에 먹혀버리는 경과와 풍경을, 묵묵하게 먹먹하게 체험한 나와 너와 우리의 "이 미 지"를 집약할 수 있는 구절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별은 힘들고 아픕니다. 문득 "이별은 싫어 추억의 그림자가 너무 많아"라는 노랫말이 떠오르네요. 저에게 이별은 살면서 건너갈 수 없는, 닿을 수 없는 피안의 그 무엇 같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어제까지 만났던 친구가 결석했는데,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연탄가스를 마셨다고, 이제 못 볼 것이라고. 그 덤덤함. 그땐 어려서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는데요. 그후로 정말로 다시 보지 못했는데, 그 친구 얼굴이 여전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떠나간 사람들이 많아요. 이별의 주체와 대상은 언제나 동시적입니다. 나를 떠났거나 내가 떠난 경우. 사랑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사람,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거짓말한 사람, 영원 속으로 떠난 후에야 사랑을 발견하고 주저앉아 우는 사람. 모두가 제 안에 살면서 떠나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언어로 이미지로 남아서 저에게 시로 나타날 때가 있어요. 다시 만나려고 떠나지 않았나봅니다. 이별하지 않으려고 여태 머물고 있었나봅니다. 시가 별사(別辭)가 된다면, 시가 지방(紙榜)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3. 특이한 행 배치와 기호들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특히 시집을 열어주는 첫 시 「플랑크 타임」에는 점(●)들이 등장하는데요. 이와 같은 설정에 의도하신 바가 궁금합니다.
가까운 시인과 평론가들이 모여서 특강을 듣는 모임이 있었는데요. 어느 대학의 총장인 소설가께서 이상의 시를 주제로 삼아 「선에 관한 각서 3」에 나오는 '●'을 보여주셨어요. 시간을 응집하는 어떤 것, 이미지를 응결하는 어떤 것이 그때 제게 절실하게 필요했는데, 그 특강에서 '●'이 단자(單子)로서의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구절에서는 그냥 점으로, 다른 구절에서는 '점'이라는 주어나 목적어로, 또 어떤 구절에서는 '나'로 지시되는 시각 이미지로 쓰였습니다. 검은 동그라미의 변주라고 할까요. 또한 저의 네번째 시집 「리듬」에 실린 장시 「black」 속 구절 "spin my black circle"과도 연결되고요. 「플랑크 타임」에서는 계량될 수 있는 최소 시간 단위의 결정(結晶)으로, 분절된 시간의 상태로, 그리고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영원한 시간의 구멍-블랙홀이기도 한-으로 인식했는데, 그러한 의도가 시에 적절히 드러났는지, 독자분들께서 충분히 알아주실지 궁금합니다.
4. 수록작 중 가장 아끼는 한 편을 꼽는다면 무엇인지, 이유와 함께 소개해주세요.
아무래도 「수색역에서, 1988」이 아닐까 싶어요. 첫 시집에도 '수색'이라는 지명이 들어가는 노래 같은 서정시가 수록되어 있는데요. 수색역 앞을 지나가던 어느 날, 1988년의 수색역 앞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수색(水色) 또는 수색역과 연관된 작품 하나를 더 쓰고 싶다는 욕구가 솟았습니다. 지금의 경의선 전철이 아니라 교외선 역, 통일호가 다니던 역. 이 작품에서 그날의 '나'를 만났습니다. '너'는 그곳의 '나'였습니다. 물론 그때 강의를 땡땡이치고 친구와 함께 있기는 했지만요. 어쩌면 가장 '나'답지 않은 시 또는 어깨에 힘주지 않고 노래처럼 흘러나오는 시에 언제나 애정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5. 시 속 화자는 '너'를 끊임없이 호명하는데, 그로써 단절되어 있는 상황이 더욱 강조되는 듯합니다. 화자가 겪는 슬픔과 고통은 몸을 "짓찢는" 정도로 묘사되고 있고요. 독자들의 마음에 이 감정이 어떻게 전해지면 좋을지 말씀해주세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고통이어야 하는데 고통이 아닌 것이 되고, 고통일 수 없는데 반드시 고통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이별'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단순히 사랑하는 두 사람 '나'와 '너'의 이별이 아닌, 불교 용어를 빌리자면 회자정리(會者定離) 정도로 넓혀서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별 후에 이별이 또 찾아오더라도, 이별의 주체이자 대상인 우리가 소실되더라도, '나'와 '너'는 살아야 하고 살다보면 살아가게 하는 또는 살아지게 하는 '사람/사랑'을 만나지 않을까요. 저 너머에서, 반드시, 다시 만나지 않을까요. 우리가 겪은 이별은 언젠가 어느 날 폼페이의 '그라디바'처럼 발굴되지 않을까요. 이별은 폼페이를 덮쳤던 '라바'처럼 여전히 생생하겠지만, 살아 있는 우리를 통과해서 우리보다 빠르게 소멸하지 않을까요. 고통이지만 살아 있음의 표징…… 아픈 우리를 시가 손잡아주고 안아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경탄에 젖어 열리고 있다
안면이 생긴다
사랑에 빠진 육체 흐드러진다
요확에서
네가 나타난다 그때 나는
베어지고 비탄과 신음
구멍마다 새어나오고
(……)
너와 나는 하나였는데 존재한 적이 없었고
맞붙었던 입술 떨어질 때 우리가 헤어질 때
너는 활상하는 그림자가 되고…… 영원한 ●
_「플랑크 타임」 부분
시집을 여는 첫 시의 제목 '플랑크 타임'은 물리학에서 유의미하다고 판단하는 최소의 시간 단위를 뜻한다. 이를 시적으로 해석하면 "저곳과 이곳, 없음과 있음, 알 수 없음과 앎,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경계"(문학평론가 양순모, 해설)라고 이해해볼 수 있겠다. 공간감을 지닌 것처럼 묘사되는 그 찰나의 시간 속에서, "내가 나타나면 네가 사라지고/네가 다가오면 내가 멀어"지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영원히 반복되는 1초" 안에서 그렇게 두 사람은 "연속적이고 연쇄적"인 스침을 지속하는 중이다. 시공간이 점(●)으로 수렴하는, "너와 나"가 "동시에 탄생"(「플랑크 타임」)하고 폐기되기를 반복하는 무한한 세계에서 과거와 미래는 하나로 중첩된다.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관계를 암시하듯 "불붙"고 "몽그라진"(「절곡(折曲)」) 모습의 '너'는 복구가 불가능할 만큼 변질된 뒤지만, 도리어 "발광체"처럼 "뚜렷해"(「나를 불태워줘」)진 형체로 '나'를 찾아온다. "누군가 사랑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상황을 두고 화자는 "너무 지겨워 나를 지져줘 나를 묻어줘"(「충무로역 1번 출구에서」)라고 한탄하다가도, "너의 잘린 토막으로"나마 "포만"을 느끼고 "살"을 빚어내며 "네 옆에 살아남아서 창궐"(「힘 힘 너머로」)할 힘을 얻는다. 그렇게 연결되는 '나'와 '너'는 그런데 피안의 세계로 넘어가버린 듯, "절개된 채 썩는" "속 다 내어준 채/문드러지고 있"(「Nothingness」)는 모양새다.
아무도 아닌
내 안에서
아무는 누구
다무는 입
나를 닫아걸고
너를 묻는다
(……)
우리는 서로를
찢어버렸네
비명과 울음 없이
피 없이 애도 없이
절개된 채 썩는
아무와 아무
나 아닌 나와 너
속 다 내어준 채
문드러지고 있다
割, 愛
_「Nothingness」 부분
이렇듯 손상되고 부서지는 몸의 이미지를 지닌 채로, '너'는 "망각과 회억의 상관관계 속에서" "살아나는 밤의 불빛"(「문산」)처럼 가물거리며 슬픔과 그리움의 대상으로 그려지는데 이때 화자가 '너'를 회상하고 추억하는 일은 보통의 이별에 수반되는 과정과는 사뭇 다른 결을 취한다. 그것은 때로 "가슴속 긁어대는" "쇳소리"로, "회전하는 총알"(「조준 사격」)로, "기묘하고 차갑게" 다가오는 "시반"(「착한 에세이」)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서늘한 이미지는 '부음' '국화' '화장장'과 같은 시어들과 더불어 사별을 암시하기도 한다. 다만 마치 "터미널을 빠져나"(「영현(英顯) 처리」)오듯 누군가와 함께했던 한 시절로부터 탈각되어 나오는 과정 역시 이별이라고 할 수 있다면, 시인에게 있어서 이별이란 어떤 사정으로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그 상대를 '영현'으로 처리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는 한 시절 전체를 애도하는 일이기도 하다. "끝없음을 거듭해 환기하며 보다 근본적인 애도 작업을 작동"(해설)시키는 방식으로.
투명하고 깊은 X의 흰 손이
내게 사랑을 불러왔지
X를 안고서 미끄러져 내려간다
어둠 안으로 들어가서 재생한다
기쁨과 두려움 그리고 가려움
나는 X의 체온을 잊지 못해
기억해 그것을, X의 것을
불덩어리의 아름다운 활강을
(……)
폭우가 쏟아진다. 바위가 굳는다. 빗물 혓바닥 땅을 핥는다. 새로운 X가 태어난다. 방혈하면 나는 깨끗해질까. 나와 공동(空洞) 사이에, 나와 너 사이에, 비가 있다. 비가 나를 다스린다. 나는 녹는다, 흘러간다. 용암. 종말. 사랑은 망각 후에 발굴될 것이다.
_「폼페이, (그)라(디)바」 부분
그러나 기억을 "보존 처리"해둔다면, '너'와 누렸던 시간은 언제든 "재생"할 수 있는 영원한 역사가 된다. 위 시의 'X'는 이미 "불덩어리"로 타올라 사라진 뒤지만, '나'는 "떠난 지 오래되었는데" "붙들린 것 같다"고 토로하며 'X'와의 대담을 이어간다. 시 속 'X'는 화자를 사랑해주는 타인처럼도, 화자 자신처럼도("내가 너야. 너를 사랑해") 보인다. "X는 누구일까"라고 자문하던 '나'는 이내 "바위가 녹아내"릴 듯 뜨겁고 "살 타는 냄새 가득"한 살풍경 속에서 "새로운 X"의 탄생을 예감한다.
편집자와의 사전 인터뷰에 따르면, 장석원의 시 속 '너'는 타인이기도 하지만 오래전 그때 그 시절에 존재했던 '나'이기도 하다. 수많은 '나'가 '너' 혹은 또다른 '나'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며, 오늘에 이르러 '우리'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현재의 우리가 소멸한 뒤 다음 세상에는 어떤 새로운 존재가 탄생할까. 이별과 만남이, 죽음과 탄생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세계에서 장석원은 타자와 타자화된 나를 '너(X)'라고 총칭하며 삶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이별을 아우르고 있다.
통증 없이 나를 기재한다
후회 없이 나를 벗겨낸다
조금 더 멀어졌던가
나는 어디에서 어떻게 부패했던가
부르튼 얼굴 들여다보면
느리게 달라질까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
발생된 것
기억된 것
서술된 것
일까
_「훈증」 부분
대체로 절망적이고 비통한 정서가 시집 전체에 배어 있는 가운데, 집념을 내려놓은 자의 초연함이 느껴지는 구절들이 눈길을 붙잡는다. "이별은 흘러가는 것 땀이나 눈물 같은 것이지 사랑처럼 쉽게 탈색되지"(「착한 에세이」), "기다려보자 견뎌보자 달라질 것이다"(「단자의 리스페리돈」)와 같은 문장이 그렇다. 위 시 역시 마찬가지다. 화자인 '나'는 이제 "통증 없이" "후회 없이" 자신을 직시할 수 있게 된 사람으로, 초탈한 태도로 "부패"된 '나'와 "우리"의 기원을 되짚어간다. 그로써 '나'는 너무도 밀접했던 이별의 통증으로부터 스스로를 떼어낸 뒤 '우리'가 하나가 아닌 둘로 "쪼개진" 상태임을 자각하고, "너를 기다리다가 생매장된 나를 꺼내"볼 용기를, "헤어진 몸, 사출한 그 몸"은 "소각하"(「회회(蛔蛔)」)겠다는 결심을 품게 된다. "전쟁과 전염" "미망의 광기" 속에서도 "어떻게든/일상"은 "지속"될 것이므로 "너를 붙잡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오랫동안/널 머금을 수 있"도록 오히려 "조금 더 멀어져"(「단자의 리스페리돈」)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로써 "영구히 떠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하는 이들은, 결단코 만나지 않는다"(「대속(代贖)과 구령(救靈)」)는 아이로니컬한 깨달음이 도출된다. 이는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게 될까" 기대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자꾸 사라"지는, "감지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나를 끌고 가"(「조운트조(soundso)」)는 위협적인 세계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는 길일 수도 있겠다.
몸이 불타 소실되는 고통을 느낄 만큼 뜨거웠던 한 세월을 지나고 난 뒤, 시인은 마침내 우리는 함께 "경험하는 자"이며 "광장의 굉음에 절삭되며 신음하는 몸들"이자 공통적으로 "사라지는" 신체를 가진, "세계의 전부를 소실"(「●」)한 후 다음으로 건너갈 존재들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듯하다. 시집의 마지막 시편, 모든 것이 허물어진 생의 끝에 이르러 몸을 태우고 남은 재를 바람에 날리는 「폭장」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너'를 기린다. "봄바람"이 실어다 주는 "꽃씨"처럼 나를 스쳐간, 한때는 내 "살 속의 뼈"와도 같았던 '너'가 "나에게 들어왔다가 빠져나갔"음을 느낀다.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이별의 폐허에 매몰되는 대신 그 피폐한 풍경 속 남겨진 '나'와 '너를 고요하게 응시한다. 그렇게 '우리'는 영원히 이별하고 영원히 애도하는 자로 거듭난다.
우리가 소실되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 '나', 결코 반성될 수 없는 '나'. 누구보다 현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착 속에서, 이미지 속에서 현실을 초월하며 풍경을 그려내는 '나'. 그런데 우리 저 '나'를 바라보며 외려 '나'를 압도하는 '이별'을, '죽음'을 어느 때보다 슬프게 예감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진정 마주한 것은 무엇인가. (……) 우리의 삶이 진정 삶다운 것이 되기 위해, 그 앞과 뒤에서 묵묵히 문학을 하고 있는 시인과 눈이 마주쳤다면,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기에 끝없는 패배를 수행하는 시인과 눈을 마주쳤다면, 우리는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인 너머, '나' 너머의 그것들을 참으로 슬프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_양순모, 해설에서
◎장석원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
1. 2023년에 출간한 『이별 후의 이별』 이후 일곱번째 시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소회가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시집 출간은 언제나 기쁘고 설레는 일입니다. 비로소 '나'가 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어떤 것이 마무리되었는데 곧이어 다른 어떤 것이 새로 시작되는 느낌. 어딘가에서 유실했던 것을 마침내 되찾은 느낌. 약간의 두려움과 조금 모자란 만족감과 어김없이 밀려드는 부족함의 화환 같은 느낌. 시집을 준비할 때, 시집 꼴을 막 갖춘 원고를 들고 비오는 카페 창가에서 처음으로 정독했을 때가 떠오르네요. 「이별 후의 이별」 그 너머에 무엇이 있나. 그곳에 내가 도착했다면, 나는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떤 언어를 지니고 있나. 이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면서, 시집 원고를 손에 들고, 원고와 겨룰 때 필요한 염결성을 짊어지면서, 마치 결승전에 나서는 선수 같은 마음을 가져보았습니다. 그럴 때 제가 시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느끼기에, 시집을 낸다는 일은 아주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본질 같다고 여기기에, 지금, 기쁩니다.
2. 제목처럼 '우리'가 소멸하고 소실되는 이미지들이 강렬합니다. 제목을 어떻게 고르시게 되었는지, 또 선생님께 '이별'이란 어떤 의미인지 들려주세요.
'나'가 '너'를 발견합니다. '너'는 타인 '너'이기도 하고, 오래전 그곳에 존재했던 '나'이기도 합니다. 그 '나'와 '너'가 겹쳐지고 뭉개지고 분리되고 다시 합장하듯 만나는 오늘의 이곳에서 '우리'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또한 개인적으로 '우리'가 소실된 후에 누가 또는 무엇이 새로 태어나고 나타날까. 이런 질문 속에서, 알 수 없고 가볼 수 없는 미래를 단념하고, 현재의 우리가 또 헤어지고 더 많이 부서지고 마침내 불꽃에 먹혀버리는 경과와 풍경을, 묵묵하게 먹먹하게 체험한 나와 너와 우리의 "이 미 지"를 집약할 수 있는 구절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별은 힘들고 아픕니다. 문득 "이별은 싫어 추억의 그림자가 너무 많아"라는 노랫말이 떠오르네요. 저에게 이별은 살면서 건너갈 수 없는, 닿을 수 없는 피안의 그 무엇 같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어제까지 만났던 친구가 결석했는데,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연탄가스를 마셨다고, 이제 못 볼 것이라고. 그 덤덤함. 그땐 어려서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는데요. 그후로 정말로 다시 보지 못했는데, 그 친구 얼굴이 여전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떠나간 사람들이 많아요. 이별의 주체와 대상은 언제나 동시적입니다. 나를 떠났거나 내가 떠난 경우. 사랑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사람,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거짓말한 사람, 영원 속으로 떠난 후에야 사랑을 발견하고 주저앉아 우는 사람. 모두가 제 안에 살면서 떠나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언어로 이미지로 남아서 저에게 시로 나타날 때가 있어요. 다시 만나려고 떠나지 않았나봅니다. 이별하지 않으려고 여태 머물고 있었나봅니다. 시가 별사(別辭)가 된다면, 시가 지방(紙榜)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3. 특이한 행 배치와 기호들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특히 시집을 열어주는 첫 시 「플랑크 타임」에는 점(●)들이 등장하는데요. 이와 같은 설정에 의도하신 바가 궁금합니다.
가까운 시인과 평론가들이 모여서 특강을 듣는 모임이 있었는데요. 어느 대학의 총장인 소설가께서 이상의 시를 주제로 삼아 「선에 관한 각서 3」에 나오는 '●'을 보여주셨어요. 시간을 응집하는 어떤 것, 이미지를 응결하는 어떤 것이 그때 제게 절실하게 필요했는데, 그 특강에서 '●'이 단자(單子)로서의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구절에서는 그냥 점으로, 다른 구절에서는 '점'이라는 주어나 목적어로, 또 어떤 구절에서는 '나'로 지시되는 시각 이미지로 쓰였습니다. 검은 동그라미의 변주라고 할까요. 또한 저의 네번째 시집 「리듬」에 실린 장시 「black」 속 구절 "spin my black circle"과도 연결되고요. 「플랑크 타임」에서는 계량될 수 있는 최소 시간 단위의 결정(結晶)으로, 분절된 시간의 상태로, 그리고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영원한 시간의 구멍-블랙홀이기도 한-으로 인식했는데, 그러한 의도가 시에 적절히 드러났는지, 독자분들께서 충분히 알아주실지 궁금합니다.
4. 수록작 중 가장 아끼는 한 편을 꼽는다면 무엇인지, 이유와 함께 소개해주세요.
아무래도 「수색역에서, 1988」이 아닐까 싶어요. 첫 시집에도 '수색'이라는 지명이 들어가는 노래 같은 서정시가 수록되어 있는데요. 수색역 앞을 지나가던 어느 날, 1988년의 수색역 앞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수색(水色) 또는 수색역과 연관된 작품 하나를 더 쓰고 싶다는 욕구가 솟았습니다. 지금의 경의선 전철이 아니라 교외선 역, 통일호가 다니던 역. 이 작품에서 그날의 '나'를 만났습니다. '너'는 그곳의 '나'였습니다. 물론 그때 강의를 땡땡이치고 친구와 함께 있기는 했지만요. 어쩌면 가장 '나'답지 않은 시 또는 어깨에 힘주지 않고 노래처럼 흘러나오는 시에 언제나 애정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5. 시 속 화자는 '너'를 끊임없이 호명하는데, 그로써 단절되어 있는 상황이 더욱 강조되는 듯합니다. 화자가 겪는 슬픔과 고통은 몸을 "짓찢는" 정도로 묘사되고 있고요. 독자들의 마음에 이 감정이 어떻게 전해지면 좋을지 말씀해주세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고통이어야 하는데 고통이 아닌 것이 되고, 고통일 수 없는데 반드시 고통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이별'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단순히 사랑하는 두 사람 '나'와 '너'의 이별이 아닌, 불교 용어를 빌리자면 회자정리(會者定離) 정도로 넓혀서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별 후에 이별이 또 찾아오더라도, 이별의 주체이자 대상인 우리가 소실되더라도, '나'와 '너'는 살아야 하고 살다보면 살아가게 하는 또는 살아지게 하는 '사람/사랑'을 만나지 않을까요. 저 너머에서, 반드시, 다시 만나지 않을까요. 우리가 겪은 이별은 언젠가 어느 날 폼페이의 '그라디바'처럼 발굴되지 않을까요. 이별은 폼페이를 덮쳤던 '라바'처럼 여전히 생생하겠지만, 살아 있는 우리를 통과해서 우리보다 빠르게 소멸하지 않을까요. 고통이지만 살아 있음의 표징…… 아픈 우리를 시가 손잡아주고 안아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목차
목차
시인의 말
1부 배타 원리
플랑크 타임
2부 절명의 피막
묘혈/ 절곡(折曲)/ 충무로역 1번 출구에서/ 나를 불태워줘/ 절곡(絶穀)/ 견고한 대지와 늪/ 힘 힘 너머로/ Nothingness/ 파주/ 환면(幻面)/ 문산/ 조준 사격/ 착한 에세이/ 영현(英顯) 처리/ 기체 인간/ 혼유석(魂遊石) 앞에서-Contaminate me/ 쌍분(雙墳)/ 꽃 무덤
3부 보존 처리
폼페이, (그)라(디)바
4부 별사
적열(赤熱)/ 맥주를 들고 집으로/ 단자(單子)의 플롯/ 회회(蛔蛔)/ 가소성/ 훈증/ 화장장에서/ 단자의 리스페리돈/ 메틸렌 블루/ 대속(代贖)과 구령(救靈)/ 출장길, 뒤돌아보니 인중과 아미(蛾眉)가/ 조운트조(soundso)/ 수색역에서, 1988/ 더 멀리, 우리의 색신/ 두 눈으로 우는 우리는 사후(死後)에/ ●/ 폭장(曝葬)
해설| 눈물이 쉬루르_양순모(문학평론가)
1부 배타 원리
플랑크 타임
2부 절명의 피막
묘혈/ 절곡(折曲)/ 충무로역 1번 출구에서/ 나를 불태워줘/ 절곡(絶穀)/ 견고한 대지와 늪/ 힘 힘 너머로/ Nothingness/ 파주/ 환면(幻面)/ 문산/ 조준 사격/ 착한 에세이/ 영현(英顯) 처리/ 기체 인간/ 혼유석(魂遊石) 앞에서-Contaminate me/ 쌍분(雙墳)/ 꽃 무덤
3부 보존 처리
폼페이, (그)라(디)바
4부 별사
적열(赤熱)/ 맥주를 들고 집으로/ 단자(單子)의 플롯/ 회회(蛔蛔)/ 가소성/ 훈증/ 화장장에서/ 단자의 리스페리돈/ 메틸렌 블루/ 대속(代贖)과 구령(救靈)/ 출장길, 뒤돌아보니 인중과 아미(蛾眉)가/ 조운트조(soundso)/ 수색역에서, 1988/ 더 멀리, 우리의 색신/ 두 눈으로 우는 우리는 사후(死後)에/ ●/ 폭장(曝葬)
해설| 눈물이 쉬루르_양순모(문학평론가)
저자
저자
장석원 2002년 대한매일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아나키스트』 『태양의 연대기』 『역진화의 시작』 『리듬』 『유루 무루』 『이별 후의 이별』, 산문집 『우리 결코, 음악이 되자』 『미스틱』 등이 있다.
Payment & Security
Payment methods
Your payment information is processed securely. We do not store credit card details nor have access to your credit card informat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