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에 유채(문학동네시인선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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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문학상 수상 작가 이기리 신작 시집
"아주 포근한 적막만이 남을 것이다"
가장 선명한 빛으로 발하는 눈부신 여백의 자리
모두 흩어지고 사라진 빈자리를 응시하는 '단 하나의 눈빛'
문학동네시인선의 252번째 시집으로 이기리 시인의 『캔버스에 유채』를 펴낸다. 비등단 시인 최초로 김수영문학상(제39회)을 수상하며 우리 시단에 자신의 이름을 단숨에 강렬하게 각인시킨 이기리의 세번째 시집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돌이켜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나' 사이의 행간을 벌려놓고, 여전히 '진행중인 진실'을 마주하겠다는 태도"(유계영 시인)로 써내려간 첫 시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민음사, 2020), 아물어가는 상처 위 눅눅하게 들러붙은 복잡다단한 감정의 딱지들을 벗겨내고 소중한 장면들만 선선한 바람결 속으로 내어 말리는 두번째 시집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문학과지성사, 2022) 이후 사 년 만이다. 그간 시인은 "결코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을 시의 의지가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음을"(김언 시인) 몸소 증명하듯, 과거로부터 현재로 연결되고 성장하며 확장하는 입체적인 시세계를 우리에게 선보여왔다. 시간을 한 계단 한 계단 되짚어올라가 말간 얼굴 깊숙이 깃든 슬픔을 끄집어내고, 두고두고 기억에 남기고 싶은 찰나들만 새로이 포착해 구김도 주름도 없이 세심하게 펴내는 특유의 손길. 그리고 어느 때보다 뜨거운 빛이 작열하는 이 여름, 시인은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 긴 시간 간직하고 있던 그 모든 표정과 장면들을 마침내 빛 한가운데로 꺼내놓는다. '캔버스에 유채', 빈 종이 위에 새하얀 빛을 남김없이 그러모아 자신만의 색채로 펼쳐 보이겠다는 듯이. 이제 그는 "태풍이 불어 집이 쓸려가고 나무가 부러져도/ 여전히 여름 한가운데에서 무지개를 찍을 사람"(「시절 전환」)이 되기로 한다.
"아주 포근한 적막만이 남을 것이다"
가장 선명한 빛으로 발하는 눈부신 여백의 자리
모두 흩어지고 사라진 빈자리를 응시하는 '단 하나의 눈빛'
문학동네시인선의 252번째 시집으로 이기리 시인의 『캔버스에 유채』를 펴낸다. 비등단 시인 최초로 김수영문학상(제39회)을 수상하며 우리 시단에 자신의 이름을 단숨에 강렬하게 각인시킨 이기리의 세번째 시집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돌이켜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나' 사이의 행간을 벌려놓고, 여전히 '진행중인 진실'을 마주하겠다는 태도"(유계영 시인)로 써내려간 첫 시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민음사, 2020), 아물어가는 상처 위 눅눅하게 들러붙은 복잡다단한 감정의 딱지들을 벗겨내고 소중한 장면들만 선선한 바람결 속으로 내어 말리는 두번째 시집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문학과지성사, 2022) 이후 사 년 만이다. 그간 시인은 "결코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을 시의 의지가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음을"(김언 시인) 몸소 증명하듯, 과거로부터 현재로 연결되고 성장하며 확장하는 입체적인 시세계를 우리에게 선보여왔다. 시간을 한 계단 한 계단 되짚어올라가 말간 얼굴 깊숙이 깃든 슬픔을 끄집어내고, 두고두고 기억에 남기고 싶은 찰나들만 새로이 포착해 구김도 주름도 없이 세심하게 펴내는 특유의 손길. 그리고 어느 때보다 뜨거운 빛이 작열하는 이 여름, 시인은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 긴 시간 간직하고 있던 그 모든 표정과 장면들을 마침내 빛 한가운데로 꺼내놓는다. '캔버스에 유채', 빈 종이 위에 새하얀 빛을 남김없이 그러모아 자신만의 색채로 펼쳐 보이겠다는 듯이. 이제 그는 "태풍이 불어 집이 쓸려가고 나무가 부러져도/ 여전히 여름 한가운데에서 무지개를 찍을 사람"(「시절 전환」)이 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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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흐린 날이 점점 개면서
아무도 타지 않은 버스가 정류장을 지나치고
너는 그 건너편 거리에 서서
햇살 속 적막한 행간의 부드러운 꼬리를 쓰다듬는 장면
순식간에 도로 위를 달리던 자동차들 멈추고
정류장 옆에 서서 고개를 바짝 들고
두 팔 들어 사진을 찍는 한 사람과
바구니에서 쏟아진 표정들이 언덕을 구르는 장면
너는 뒤에 무슨 좋은 풍경이 있나 궁금해한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 풍경은 좋을 수 있을까
_「시절 전환」 부분
빛은 빈 공간에 깃드는 것. 시인의 눈-빛이 가닿는 곳도 비어 있음으로써 태어나는 부재의 자리다. 본래는 존재했던 무언가가 사라진 자리, 시인은 그 빈 공간을 응시하는 사람이다. 누군가-무언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자국이 말끔히 지워질 때까지, 때로는 그 자리에서 없음이 솟아나는 순간까지 시인은 기다린다. 그런데 이미 "세상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접합되어 있"(「물뭍에서」)어서일까. "거의 다 지울 수는 있"(「생몰년」)지만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지우고 닦아내도, 자꾸만 "무언가 물컹한 기운이 뒤꿈치에"(「보호막-풀베기」) 올라오는 기분. 밟고 지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리움은 곁이 마음대로 휘갈긴 필체"(「아순시온」)일 뿐이라고 거듭 되새겨도 작별 앞에 다글다글 들러붙는 "이 지긋지긋한 미련"(「보호막」)은 결코 떨쳐내지지 않는다.
한쪽 팔이 문틈에 끼어
혼자 대롱대롱 공중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
팔이 뽑혔는데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무엇이 또 걸렸는지 모르겠는데
무엇이든 버려야만 할 텐데
_「보호막」 부분
한편 없어(져)서가 아니라 함께여서 생겨나는 부재의 자리도 눈에 들어온다. 이 틈은 '나'와 '당신', 즉 우리 '사이'에 발생하는 기껍고도 안타까운 실존적 틈이다. 차라리 함께하기에 생겨나는 여백. 이곳에 자리한 것들은 화자에게 다양한 크기와 질감으로, 나아가 무한히 변화하는 투명한 감각들의 총체로 다가든다. 침묵과 적막, 울림, 여운…… 눈에 보이거나 소리로 들리지는 않지만 우리 몸속의 신경 다발처럼 무수한 결을 이루는 것들. 가장 안쪽에서부터 주변으로 끝없이 뻗어나가다 마침내 존재 전체를 휘감아버리고 마는. 그러니 꼼짝없이 붙들릴 수밖에.
목소리가 들러붙은 곁은 물컹해서
포옹이 돌아서면
안을 가득 헤매던 호흡들이 터지면서
벽에서 눅진하게 흐르는구나
(……)
빈자리를 조금 더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다고
이야기를 끝내도 될까요
_「섭동」 부분
빈자리에 빛이 머물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바로 온기다. 시인의 눈빛이 가닿는 자리마다 "불을 눈앞에서 잠깐 붙였다가 꺼뜨리면서 남는 온기"(「신변 보호 요청」) 같은 잔열이 번진다. 헤어지는 이들, 상처받은 이들, 상실한 이들의 연약한 마음을 속속들이 덥히고 슬픔을 말리는 온기. 이는 "사라진 존재에게 또다른 삶의 리듬을 주는 것. 근사한 인사를 건네주는 것"('미니 인터뷰'에서)이나 다름없다. 『캔버스에 유채』는 여름 한복판, 가장 따사롭고 환한 빛을 발하며 우리 곁에 와 있다.
화창한 초여름 날씨에 나무는 빛 보관소입니다. 저마다 가지 끝에 틔운 초록 이파리에 밝음을 모아두었다가 오늘 가장 고개가 무거운 사람에게 몽땅 다 줍니다. 길을 걷던 사람이 문득 나무를 쳐다봅니다. (……) 나는 필사적으로 빛을 붙잡아두는 모임에게 인사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우리의 풍성한 공중을 봐. 언젠가 여백 따위는 잃어버려도 좋겠지?
_「칭찬 나무」 부분
여백, 침묵, 적막…… 이것들은 무(無)의 세계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다가 사라졌음을 뜻하는 흔적의 세계이다. (……) 언어가 아니라 침묵을 통한 소통, 의미가 아니라 억양을 통한 정념적 소통, 더하여 침묵의 억양을 향해 화자는 나아간다. (……) '부재'는 없음, 즉 무(無)가 아니라 어떤 존재의 사라짐으로 인해 발생한 존재론적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시인은 그 부재의 자리를 반복적으로 응시함으로써 그것이 무(無)가 아님을 밝히고 나아가 부재에 일종의 '윤곽'을 제공하고자 한다. _고봉준, '해설'에서
◎ 이기리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
1. 2022년 출간한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 이후 사 년 만에 선보이는 시집입니다. 세번째 시집을 출간하시는 소회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 두번째 시집에서 세번째 시집으로 건너오는 이 속도가 참 마음에 들었는데 벌써 사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속절없는 세월 같으니라고, 중얼거리면서 저도 많은 일을 해내고 다양한 내면의 변화를 겪으며 지냈습니다. 이번 시집에 그 마음들이 고스란히 담겼을 테고요. 무사히 시집을 낼 수 있어서 기분은 내내 좋습니다. 크게 우울하진 않고 적당히 가라앉은 기분으로 지내고 있어요. 처음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드디어 시작하는 것 같아요. '빛'을 쓰기 싫은 마음에서 출발했던 것 같은데, 결국 제가 바랐던 여름 한복판에 이 시집을 건넬 수 있어 기쁩니다.
2. 이번 시집에서는 '보호'와 그 변주로 볼 수 있는 표현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이는 작가님께 어떤 감각을 품고 있는 말들인가요?
→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떠나보내는 경험을 했어요. 사후적으로 떠나보낸 적은 있어도 눈앞에서 소위 누군가의 임종을 지키는 일은 아직 겪지 못했던지라 그 시간이 저한테는 너무 어려웠어요. 육체와 영혼의 위치가 뒤바뀌는 느낌. '보호'를 변주하겠다는 구체적 결심은 이때부터 가졌던 듯싶은데, 실은 제 안에서는 오래전부터 '보호'에 대한 정동적 감각이 촉발되고 있었어요. 메모장을 살펴보니 2018년에 이런 말을 썼더라고요. "나는 당신이 누군가에게 보호받을 수 있는 몸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당신이 어느 날 누군가에게로부터 절실히 사랑받고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들 때, 비로소 당신도 누군가를 지켜줄 수 있는 몸이 되었으면 한다." 거창한 생각을 품었네요. 얼마 뒤, 겨울이 찾아오고 입술이 갈라졌는데요. 이때 무턱대고 입술을 뜯으면 감염의 위험이 있고요. 혀로 핥으면 입술에 있는 자연적인 유분을 씻어내 더 건조하게 만들어요. 갈라진 입술을 가장 잘 보호하는 방법은 마치 갈라진 입술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인데요. 저는 불안형이어서 립밤을 마구 발랐더랬죠.
3. 적막과 침묵, 여운, 울림, 온기…… 무언가가 흩어지고 사라진 뒤의 흔적들을 오래 바라보고 매만지게 하는 시편들이 인상적입니다. 이처럼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잔여들, 그리고 그것을 응시하는 일이 작가님께 어떤 의미인지 들려주세요.
→ 무얼 지키려는 욕심이 강해질수록 그것이 서서히 멀어지거나 급격히 사라지는 나날이 이어졌어요. 이 삶은 대체 왜 이럴까, 당최 내 마음에 들지가 않아, 그런 말들을 늘어놓으면서 이 세계를 '부재'를 직격탄으로 맞은 공간으로 간주했어요. 부재가 창궐하는 세계 속에서도 매 순간 다양한 방식으로 태어나고 사라지는 존재들에 대해 생각했죠. 인류사만 생각해봐도 그렇죠. 산 자들보다 죽은 자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더 많잖아요. 세계는 부재를 품기에는 너무 명징하고 실존을 품기에는 다소 흐릿해 보여요. 사라지는 순간부터 더 정확한 느낌이 남기 시작한다는 것을 언제나 숙제처럼 품고 있었는데요. 그것은 비단 이번 시집뿐만 아니라 사실 제가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한 유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본 질문이었던 것 같아요. 시를 쓸 때는 이 느낌을 자기 방식대로 잘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사라진 존재에게 또다른 삶의 리듬을 주는 것. 근사한 인사를 건네주는 것. 이제는 다 지나가 없는 자리에 관광객의 마음으로 돌아가보는 것. 기꺼이 나의 시간과 돈을 들여 사라진 자리의 온기를 여행하는 것. 그런 것이 시 아닐까, 여기는 요즘이에요.
4. 수록작 가운데 가장 마음이 가는 시 한 편을 꼽아주신다면 무엇인가요? 그 이유도 궁금합니다.
→ 지금은 「칭찬 나무」에 마음이 가요. 8월처럼 무방비한 어느 한여름에 쓴 초여름 배경의 시예요. 고개를 떨구고 터덜터덜 그늘을 걷는 이들에게 한 번만 위를 쳐다보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거기에는 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곧게 뻗고 있어요. 또 거기에는 "빛을 필사적으로 붙잡아두는 모임"이 있어요. 그 빛들이 당신을 칭찬해줄 거예요. 나의 주눅이 고마울 거예요.
5. 독자분들에게 『캔버스에 유채』가 어떤 시집으로 가닿기를 바라시나요? 이 시집을 펼쳐들 독자분들에게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 '캔버스에 유채'는 근대 이후 서양화에서 주류를 이룬 기법이에요. 우리가 보통 전시에서 그림 캡션을 볼 때 주로 만나는 설명이기도 해요. 저는 작품보다 캡션 보는 걸 더 좋아해요. 때때로 실존보다 설명이 앞설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도 해보고요. 유채는 빛과 색채를 강조하려는 인상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어요. 캔버스는 꼭 우리 앞에 놓인 여백 같아요. 관계의 형성에 반드시 놓여야 하는 것이지만 아직 그 무엇이라 부르기도 어려운. 그저 당분간 흰빛으로 서 있을 뿐이에요. 어떤 잘못과 용서든 받을 준비가 됐어, 그렇게 말해주는 시집이었으면 해요. 지키려는 노력으로 지키지 못한 시절과 지키지 못했기에 지키게 된 약속이 겹쳐지는 시집이었으면 좋겠어요. 보호는 지키고(保) 지킨다(護)는 뜻인데요. 삶은 최소 두 번 이상 지키는 거라 믿고 싶어요. 그게 무엇일지는 여러분께 되레 묻는 시집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제 언어가 여전히 부끄럽고 믿음직스러워요. 좋은 여름이기를 바랄게요.
아무도 타지 않은 버스가 정류장을 지나치고
너는 그 건너편 거리에 서서
햇살 속 적막한 행간의 부드러운 꼬리를 쓰다듬는 장면
순식간에 도로 위를 달리던 자동차들 멈추고
정류장 옆에 서서 고개를 바짝 들고
두 팔 들어 사진을 찍는 한 사람과
바구니에서 쏟아진 표정들이 언덕을 구르는 장면
너는 뒤에 무슨 좋은 풍경이 있나 궁금해한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 풍경은 좋을 수 있을까
_「시절 전환」 부분
빛은 빈 공간에 깃드는 것. 시인의 눈-빛이 가닿는 곳도 비어 있음으로써 태어나는 부재의 자리다. 본래는 존재했던 무언가가 사라진 자리, 시인은 그 빈 공간을 응시하는 사람이다. 누군가-무언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자국이 말끔히 지워질 때까지, 때로는 그 자리에서 없음이 솟아나는 순간까지 시인은 기다린다. 그런데 이미 "세상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접합되어 있"(「물뭍에서」)어서일까. "거의 다 지울 수는 있"(「생몰년」)지만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지우고 닦아내도, 자꾸만 "무언가 물컹한 기운이 뒤꿈치에"(「보호막-풀베기」) 올라오는 기분. 밟고 지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리움은 곁이 마음대로 휘갈긴 필체"(「아순시온」)일 뿐이라고 거듭 되새겨도 작별 앞에 다글다글 들러붙는 "이 지긋지긋한 미련"(「보호막」)은 결코 떨쳐내지지 않는다.
한쪽 팔이 문틈에 끼어
혼자 대롱대롱 공중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
팔이 뽑혔는데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무엇이 또 걸렸는지 모르겠는데
무엇이든 버려야만 할 텐데
_「보호막」 부분
한편 없어(져)서가 아니라 함께여서 생겨나는 부재의 자리도 눈에 들어온다. 이 틈은 '나'와 '당신', 즉 우리 '사이'에 발생하는 기껍고도 안타까운 실존적 틈이다. 차라리 함께하기에 생겨나는 여백. 이곳에 자리한 것들은 화자에게 다양한 크기와 질감으로, 나아가 무한히 변화하는 투명한 감각들의 총체로 다가든다. 침묵과 적막, 울림, 여운…… 눈에 보이거나 소리로 들리지는 않지만 우리 몸속의 신경 다발처럼 무수한 결을 이루는 것들. 가장 안쪽에서부터 주변으로 끝없이 뻗어나가다 마침내 존재 전체를 휘감아버리고 마는. 그러니 꼼짝없이 붙들릴 수밖에.
목소리가 들러붙은 곁은 물컹해서
포옹이 돌아서면
안을 가득 헤매던 호흡들이 터지면서
벽에서 눅진하게 흐르는구나
(……)
빈자리를 조금 더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다고
이야기를 끝내도 될까요
_「섭동」 부분
빈자리에 빛이 머물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바로 온기다. 시인의 눈빛이 가닿는 자리마다 "불을 눈앞에서 잠깐 붙였다가 꺼뜨리면서 남는 온기"(「신변 보호 요청」) 같은 잔열이 번진다. 헤어지는 이들, 상처받은 이들, 상실한 이들의 연약한 마음을 속속들이 덥히고 슬픔을 말리는 온기. 이는 "사라진 존재에게 또다른 삶의 리듬을 주는 것. 근사한 인사를 건네주는 것"('미니 인터뷰'에서)이나 다름없다. 『캔버스에 유채』는 여름 한복판, 가장 따사롭고 환한 빛을 발하며 우리 곁에 와 있다.
화창한 초여름 날씨에 나무는 빛 보관소입니다. 저마다 가지 끝에 틔운 초록 이파리에 밝음을 모아두었다가 오늘 가장 고개가 무거운 사람에게 몽땅 다 줍니다. 길을 걷던 사람이 문득 나무를 쳐다봅니다. (……) 나는 필사적으로 빛을 붙잡아두는 모임에게 인사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우리의 풍성한 공중을 봐. 언젠가 여백 따위는 잃어버려도 좋겠지?
_「칭찬 나무」 부분
여백, 침묵, 적막…… 이것들은 무(無)의 세계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다가 사라졌음을 뜻하는 흔적의 세계이다. (……) 언어가 아니라 침묵을 통한 소통, 의미가 아니라 억양을 통한 정념적 소통, 더하여 침묵의 억양을 향해 화자는 나아간다. (……) '부재'는 없음, 즉 무(無)가 아니라 어떤 존재의 사라짐으로 인해 발생한 존재론적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시인은 그 부재의 자리를 반복적으로 응시함으로써 그것이 무(無)가 아님을 밝히고 나아가 부재에 일종의 '윤곽'을 제공하고자 한다. _고봉준, '해설'에서
◎ 이기리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
1. 2022년 출간한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 이후 사 년 만에 선보이는 시집입니다. 세번째 시집을 출간하시는 소회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 두번째 시집에서 세번째 시집으로 건너오는 이 속도가 참 마음에 들었는데 벌써 사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속절없는 세월 같으니라고, 중얼거리면서 저도 많은 일을 해내고 다양한 내면의 변화를 겪으며 지냈습니다. 이번 시집에 그 마음들이 고스란히 담겼을 테고요. 무사히 시집을 낼 수 있어서 기분은 내내 좋습니다. 크게 우울하진 않고 적당히 가라앉은 기분으로 지내고 있어요. 처음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드디어 시작하는 것 같아요. '빛'을 쓰기 싫은 마음에서 출발했던 것 같은데, 결국 제가 바랐던 여름 한복판에 이 시집을 건넬 수 있어 기쁩니다.
2. 이번 시집에서는 '보호'와 그 변주로 볼 수 있는 표현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이는 작가님께 어떤 감각을 품고 있는 말들인가요?
→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떠나보내는 경험을 했어요. 사후적으로 떠나보낸 적은 있어도 눈앞에서 소위 누군가의 임종을 지키는 일은 아직 겪지 못했던지라 그 시간이 저한테는 너무 어려웠어요. 육체와 영혼의 위치가 뒤바뀌는 느낌. '보호'를 변주하겠다는 구체적 결심은 이때부터 가졌던 듯싶은데, 실은 제 안에서는 오래전부터 '보호'에 대한 정동적 감각이 촉발되고 있었어요. 메모장을 살펴보니 2018년에 이런 말을 썼더라고요. "나는 당신이 누군가에게 보호받을 수 있는 몸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당신이 어느 날 누군가에게로부터 절실히 사랑받고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들 때, 비로소 당신도 누군가를 지켜줄 수 있는 몸이 되었으면 한다." 거창한 생각을 품었네요. 얼마 뒤, 겨울이 찾아오고 입술이 갈라졌는데요. 이때 무턱대고 입술을 뜯으면 감염의 위험이 있고요. 혀로 핥으면 입술에 있는 자연적인 유분을 씻어내 더 건조하게 만들어요. 갈라진 입술을 가장 잘 보호하는 방법은 마치 갈라진 입술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인데요. 저는 불안형이어서 립밤을 마구 발랐더랬죠.
3. 적막과 침묵, 여운, 울림, 온기…… 무언가가 흩어지고 사라진 뒤의 흔적들을 오래 바라보고 매만지게 하는 시편들이 인상적입니다. 이처럼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잔여들, 그리고 그것을 응시하는 일이 작가님께 어떤 의미인지 들려주세요.
→ 무얼 지키려는 욕심이 강해질수록 그것이 서서히 멀어지거나 급격히 사라지는 나날이 이어졌어요. 이 삶은 대체 왜 이럴까, 당최 내 마음에 들지가 않아, 그런 말들을 늘어놓으면서 이 세계를 '부재'를 직격탄으로 맞은 공간으로 간주했어요. 부재가 창궐하는 세계 속에서도 매 순간 다양한 방식으로 태어나고 사라지는 존재들에 대해 생각했죠. 인류사만 생각해봐도 그렇죠. 산 자들보다 죽은 자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더 많잖아요. 세계는 부재를 품기에는 너무 명징하고 실존을 품기에는 다소 흐릿해 보여요. 사라지는 순간부터 더 정확한 느낌이 남기 시작한다는 것을 언제나 숙제처럼 품고 있었는데요. 그것은 비단 이번 시집뿐만 아니라 사실 제가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한 유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본 질문이었던 것 같아요. 시를 쓸 때는 이 느낌을 자기 방식대로 잘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사라진 존재에게 또다른 삶의 리듬을 주는 것. 근사한 인사를 건네주는 것. 이제는 다 지나가 없는 자리에 관광객의 마음으로 돌아가보는 것. 기꺼이 나의 시간과 돈을 들여 사라진 자리의 온기를 여행하는 것. 그런 것이 시 아닐까, 여기는 요즘이에요.
4. 수록작 가운데 가장 마음이 가는 시 한 편을 꼽아주신다면 무엇인가요? 그 이유도 궁금합니다.
→ 지금은 「칭찬 나무」에 마음이 가요. 8월처럼 무방비한 어느 한여름에 쓴 초여름 배경의 시예요. 고개를 떨구고 터덜터덜 그늘을 걷는 이들에게 한 번만 위를 쳐다보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거기에는 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곧게 뻗고 있어요. 또 거기에는 "빛을 필사적으로 붙잡아두는 모임"이 있어요. 그 빛들이 당신을 칭찬해줄 거예요. 나의 주눅이 고마울 거예요.
5. 독자분들에게 『캔버스에 유채』가 어떤 시집으로 가닿기를 바라시나요? 이 시집을 펼쳐들 독자분들에게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 '캔버스에 유채'는 근대 이후 서양화에서 주류를 이룬 기법이에요. 우리가 보통 전시에서 그림 캡션을 볼 때 주로 만나는 설명이기도 해요. 저는 작품보다 캡션 보는 걸 더 좋아해요. 때때로 실존보다 설명이 앞설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도 해보고요. 유채는 빛과 색채를 강조하려는 인상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어요. 캔버스는 꼭 우리 앞에 놓인 여백 같아요. 관계의 형성에 반드시 놓여야 하는 것이지만 아직 그 무엇이라 부르기도 어려운. 그저 당분간 흰빛으로 서 있을 뿐이에요. 어떤 잘못과 용서든 받을 준비가 됐어, 그렇게 말해주는 시집이었으면 해요. 지키려는 노력으로 지키지 못한 시절과 지키지 못했기에 지키게 된 약속이 겹쳐지는 시집이었으면 좋겠어요. 보호는 지키고(保) 지킨다(護)는 뜻인데요. 삶은 최소 두 번 이상 지키는 거라 믿고 싶어요. 그게 무엇일지는 여러분께 되레 묻는 시집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제 언어가 여전히 부끄럽고 믿음직스러워요. 좋은 여름이기를 바랄게요.
목차
목차
시인의 말
1부 이건 모두 한때 내가 사랑해서 썼던 것
순항고도에 들어선 음가/ 기요틴/ 수동적인 긍정/ 보호자/ 오늘은 아무것도 안 했어/ 풀베기 연습/ 석화/ 채석장에 떨어진 순서/ 물뭍에서/ 기대와는 다르게/ 보호하는 자 보호받을 자/ 캔버스에 유채/ 시간을 가지자는 말을 할 때 오는 변성기
2부 언젠가 여백 따위는 잃어버려도 좋겠지?
피보호 장치/ 생몰년/ 모허 절벽/ 아순시온/ 보호막/ 엑기스/ 조용한 직업/ 액운/ 잔머리 굴리기/ 기능 없는 화성/ 신변 보호 요청/ 견본/ 시인/ 칭찬 나무
3부 침묵만이 우리가 돌 수 있는 유일한 궤도
섭동/ XXX/ 보호하는 사람의 자세 같은 것/ 히키코모리가 묻은 여름/ 보호 앞에서 주저앉은 사람/ 한 세기 만의 종료/ 재생 걷기/ 땅끝 무덤-풀베기/ 밀맡에서 우리는/ 보호수/ 빈 액자 관람
4부 웃다가 흘린 옹알이들
시절 전환/ 우리의 사랑은 간성/ 설득/ 전성기/ 머무르는 동안/ 보호를 보호하라/ 들/ 꽃다발/ 보호와 조호/ 묵독/ 귀류법/ 긴 소식/ 파양
해설 | 보호하는 마음
| 고봉준(문학평론가)
1부 이건 모두 한때 내가 사랑해서 썼던 것
순항고도에 들어선 음가/ 기요틴/ 수동적인 긍정/ 보호자/ 오늘은 아무것도 안 했어/ 풀베기 연습/ 석화/ 채석장에 떨어진 순서/ 물뭍에서/ 기대와는 다르게/ 보호하는 자 보호받을 자/ 캔버스에 유채/ 시간을 가지자는 말을 할 때 오는 변성기
2부 언젠가 여백 따위는 잃어버려도 좋겠지?
피보호 장치/ 생몰년/ 모허 절벽/ 아순시온/ 보호막/ 엑기스/ 조용한 직업/ 액운/ 잔머리 굴리기/ 기능 없는 화성/ 신변 보호 요청/ 견본/ 시인/ 칭찬 나무
3부 침묵만이 우리가 돌 수 있는 유일한 궤도
섭동/ XXX/ 보호하는 사람의 자세 같은 것/ 히키코모리가 묻은 여름/ 보호 앞에서 주저앉은 사람/ 한 세기 만의 종료/ 재생 걷기/ 땅끝 무덤-풀베기/ 밀맡에서 우리는/ 보호수/ 빈 액자 관람
4부 웃다가 흘린 옹알이들
시절 전환/ 우리의 사랑은 간성/ 설득/ 전성기/ 머무르는 동안/ 보호를 보호하라/ 들/ 꽃다발/ 보호와 조호/ 묵독/ 귀류법/ 긴 소식/ 파양
해설 | 보호하는 마음
| 고봉준(문학평론가)
저자
저자
이기리 2020년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 『캔버스에 유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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