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발췌 대동운부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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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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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운부군옥》의 간행은 편자의 7, 8대손에 의해 비로소 준비가 되어 7대손인 진한(進漢), 진락(進洛)은 간행을 준비했고, 8대손 현상이 간행했다. 즉 1812년(순조 12)부터 시작해 1836년(헌종 2)에 간행이 마무리되었다. 그 후 장판실(藏板室)인 백승각을 지어 목판을 보관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판목(板木)이 보관된 백승각은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금곡리에 있으며, 여기에는 또 필사본 낙질이 몇 본 소장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것을 바탕으로 판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백승각에 있는 것은 각각 다른 필사본이 겨우 몇 본 남아 있지만, 연세대 소장 필사본은 권2만 낙질인 거의 완본이다.
《대동운부군옥》의 체재와 구성을 살펴보면, 체재는 중국 음시부(陰時夫)의 《운부군옥》과 같이 운에 따라 총 20권으로 분류되어 있고, 권1의 권두는 정범조의 서(序), 김응조의 발문, 홍여하(洪汝河)의 부해동잡록발(附海東雜錄跋), 목록(目錄)·유목(類目)·범례(凡例)·찬집서적목록(纂輯書籍目錄) 등으로 되어 있다. 전체의 구성은 평성(平聲) 30운, 상성(上聲) 29운, 거성(去聲) 30운, 입성(入聲) 17운의 총 106운으로 나누어져 있다.
내용의 구성은 제1운인 동운(東韻)에서부터 시작해, '동(東)'의 뜻을 2행 협주(夾註)로 달고, 이 '동(東)' 자를 끝 자로 한 숙어(熟語)를 나열하면서 각기 협주와 그 협주의 출전을 밝혔다. 그다음은 같은 방법으로 이 한자가 들어가는 지리·인명 등의 유목을 음각(陰刻)해 쉽게 눈에 띄도록 표시하고, 역시 2행 협주를 달았다. 각 면은 1면 10행으로 되어 있고, 운자와 숙어를 제외한 협주는 모두 잔글씨로 1행에 20자씩 두 줄로 되어 있다. 매 숙어의 끝 자로 쓰인 한자의 수는 총 6100여 자이며, 그 한자의 국어 음을 나누어 보면, 약 500종이나 된다.
〈대동운부군옥 유목〉이 있는데, 이는 〈지리(地理)〉, 〈국호(國號)〉, 〈성씨(姓氏)〉, 〈인명 부 종실(人名附宗室)〉, 〈효자 부 효녀(孝子附孝女)〉, 〈열녀(烈女)〉, 〈수령(守令)〉, 〈선명(仙名)〉, 〈목명(木名)〉, 〈화명(花名)〉, 〈금명(禽名)〉의 11목으로 나뉘었다.
≪대동운부군옥≫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백과사전으로, 모든 분야에 관한 종합적인 내용을 담은 책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저자의 역사 인식과 민족의식이 짙게 배어 있다.
특히 <동국제서(東國諸書)>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지금은 이미 없어져 찾아볼 수 없는 문헌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신라 수이전≫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 알려졌던 책이다. 이 밖에도 이 인용 서목에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중요한 문헌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으며, 원전을 인용할 때 임의로 가감을 하지 않고 원전에 충실했다는 점도 이 책의 가치를 높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정순우(丁淳佑)와 권경렬(權敬烈)도 ≪초간일기(草澗日記)≫ 해제에서 "그가 ≪대동운부군옥≫ 범례에서도 밝혔듯이 원전의 인용에 있어서 추호의 가감도 하지 않으려고 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이들 자료들을 통해서 충분히 산일된 원전의 면모를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고대 지명이나 고유의 동식물명 등도 역시 이 책을 통해 살펴볼 수가 있어서 국어학적으로나 사학적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라고 해서 ≪대동운부군옥≫이 국어학적으로나 사학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는 책임을 밝힌 바 있다.
《대동운부군옥》의 체재와 구성을 살펴보면, 체재는 중국 음시부(陰時夫)의 《운부군옥》과 같이 운에 따라 총 20권으로 분류되어 있고, 권1의 권두는 정범조의 서(序), 김응조의 발문, 홍여하(洪汝河)의 부해동잡록발(附海東雜錄跋), 목록(目錄)·유목(類目)·범례(凡例)·찬집서적목록(纂輯書籍目錄) 등으로 되어 있다. 전체의 구성은 평성(平聲) 30운, 상성(上聲) 29운, 거성(去聲) 30운, 입성(入聲) 17운의 총 106운으로 나누어져 있다.
내용의 구성은 제1운인 동운(東韻)에서부터 시작해, '동(東)'의 뜻을 2행 협주(夾註)로 달고, 이 '동(東)' 자를 끝 자로 한 숙어(熟語)를 나열하면서 각기 협주와 그 협주의 출전을 밝혔다. 그다음은 같은 방법으로 이 한자가 들어가는 지리·인명 등의 유목을 음각(陰刻)해 쉽게 눈에 띄도록 표시하고, 역시 2행 협주를 달았다. 각 면은 1면 10행으로 되어 있고, 운자와 숙어를 제외한 협주는 모두 잔글씨로 1행에 20자씩 두 줄로 되어 있다. 매 숙어의 끝 자로 쓰인 한자의 수는 총 6100여 자이며, 그 한자의 국어 음을 나누어 보면, 약 500종이나 된다.
〈대동운부군옥 유목〉이 있는데, 이는 〈지리(地理)〉, 〈국호(國號)〉, 〈성씨(姓氏)〉, 〈인명 부 종실(人名附宗室)〉, 〈효자 부 효녀(孝子附孝女)〉, 〈열녀(烈女)〉, 〈수령(守令)〉, 〈선명(仙名)〉, 〈목명(木名)〉, 〈화명(花名)〉, 〈금명(禽名)〉의 11목으로 나뉘었다.
≪대동운부군옥≫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백과사전으로, 모든 분야에 관한 종합적인 내용을 담은 책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저자의 역사 인식과 민족의식이 짙게 배어 있다.
특히 <동국제서(東國諸書)>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지금은 이미 없어져 찾아볼 수 없는 문헌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신라 수이전≫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 알려졌던 책이다. 이 밖에도 이 인용 서목에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중요한 문헌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으며, 원전을 인용할 때 임의로 가감을 하지 않고 원전에 충실했다는 점도 이 책의 가치를 높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정순우(丁淳佑)와 권경렬(權敬烈)도 ≪초간일기(草澗日記)≫ 해제에서 "그가 ≪대동운부군옥≫ 범례에서도 밝혔듯이 원전의 인용에 있어서 추호의 가감도 하지 않으려고 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이들 자료들을 통해서 충분히 산일된 원전의 면모를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고대 지명이나 고유의 동식물명 등도 역시 이 책을 통해 살펴볼 수가 있어서 국어학적으로나 사학적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라고 해서 ≪대동운부군옥≫이 국어학적으로나 사학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는 책임을 밝힌 바 있다.
목차
목차
1. 신화와 인물
신이담의 세계
인물의 탄생
2. 선악의 대립
악인의 패망
절개를 지킴
3. 풍류가화
풍자와 해학
풍류한담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신이담의 세계
인물의 탄생
2. 선악의 대립
악인의 패망
절개를 지킴
3. 풍류가화
풍자와 해학
풍류한담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저자
저자
권문해 권문해(權文海)
권문해의 자는 호원(灝元), 호는 초간(草澗)이다. 1534년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태어났다.
19세 되던 해 가을에 진사시에서 일등을 차지했다. 20세 되던 해에 부인 곽씨를 맞았다. 23세 되던 해 봄에 퇴계 이황을 한서암(寒棲庵)에서 뵙고, 그곳에 머물며 배우기를 청했다. 퇴계와의 만남은 생애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오랫동안 직접 가르침을 받으며 학문을 하는 큰 방도에 대해 들었고, 여러 군자들과 함께 절차탁마했다. 29세 때도 우계 가에 있는 서재로 가서 퇴계를 뵙고 학문을 배우며 한 달간 머물렀다. 37세 되던 해 9월에 김부륜(金富倫)·김부필(金富弼) 등과 함께 도산으로 가서 퇴계를 배알했다. 10월에 퇴계 선생이 돌아가자 곡했다.
40세 되던 해 정월에 안동 부사에 제수되었다. ≪연보≫에 따르면 그가 부모님을 모시기에 편하도록 외직을 구했다고 했으나, 퇴계의 제자로서 퇴계의 선양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연보≫에 따르면 몽재(蒙齋) 이안도(李安道)가 와서 퇴계 선생의 묘비에 관한 일을 의론했고, 3월에 여강(廬江)으로 가서 퇴계 선생의 사원을 지었다. 이 일은 비교적 빨리 진행되어 1년 뒤에는 묘우(廟宇)와 재당(齋堂)이 거의 이루어졌다. 이후 9월에는 도산에 모여서 여러 벗들과 서원을 짓는 제반에 대해 의논했다고 했다.
그의 나이 58세 때인 1591년 윤2월 사간원 사간에 제배되었다. 그는 사간에 제배된 뒤에 가장 먼저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과 정철(鄭澈)이 천단(擅斷)하는 죄를 탄핵했다. 양사에서는 이를 계기로 잇따라 논의를 일으켜, 마침내 그는 갑산에 귀양 가게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성균관 사예로 바뀌었고, 3월에 사복시정에 제수되었으며, 6월에 사헌부 집의에 제배되었다.
7월에 통정대부에 오르고,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배되었다가 우부승지로 승진했고, 8월에 좌부승지로 승진했다. 사표를 올리고 예천으로 부모를 뵈러 갔더니, 용천위 상호군이 더해졌다. 초간정사에 있었다. 9월에 조정으로 돌아와 우부승지에 제배되었다. 19일에 또 좌부승지로 승진했다. 11월에 다시 부제학 물망에 올랐다. 그때 어머니를 모시기에 편하다는 점을 들어 여러 차례 외직을 구했으나 이부에서 다시 부제학 의망(擬望)에 올렸다. 한음 이덕형도 "이 사람을 외직에 보임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끝내 더 이상의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1591년년 12월 9일 부호군(副護軍)으로 생을 마감했다.
권문해의 자는 호원(灝元), 호는 초간(草澗)이다. 1534년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태어났다.
19세 되던 해 가을에 진사시에서 일등을 차지했다. 20세 되던 해에 부인 곽씨를 맞았다. 23세 되던 해 봄에 퇴계 이황을 한서암(寒棲庵)에서 뵙고, 그곳에 머물며 배우기를 청했다. 퇴계와의 만남은 생애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오랫동안 직접 가르침을 받으며 학문을 하는 큰 방도에 대해 들었고, 여러 군자들과 함께 절차탁마했다. 29세 때도 우계 가에 있는 서재로 가서 퇴계를 뵙고 학문을 배우며 한 달간 머물렀다. 37세 되던 해 9월에 김부륜(金富倫)·김부필(金富弼) 등과 함께 도산으로 가서 퇴계를 배알했다. 10월에 퇴계 선생이 돌아가자 곡했다.
40세 되던 해 정월에 안동 부사에 제수되었다. ≪연보≫에 따르면 그가 부모님을 모시기에 편하도록 외직을 구했다고 했으나, 퇴계의 제자로서 퇴계의 선양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연보≫에 따르면 몽재(蒙齋) 이안도(李安道)가 와서 퇴계 선생의 묘비에 관한 일을 의론했고, 3월에 여강(廬江)으로 가서 퇴계 선생의 사원을 지었다. 이 일은 비교적 빨리 진행되어 1년 뒤에는 묘우(廟宇)와 재당(齋堂)이 거의 이루어졌다. 이후 9월에는 도산에 모여서 여러 벗들과 서원을 짓는 제반에 대해 의논했다고 했다.
그의 나이 58세 때인 1591년 윤2월 사간원 사간에 제배되었다. 그는 사간에 제배된 뒤에 가장 먼저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과 정철(鄭澈)이 천단(擅斷)하는 죄를 탄핵했다. 양사에서는 이를 계기로 잇따라 논의를 일으켜, 마침내 그는 갑산에 귀양 가게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성균관 사예로 바뀌었고, 3월에 사복시정에 제수되었으며, 6월에 사헌부 집의에 제배되었다.
7월에 통정대부에 오르고,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배되었다가 우부승지로 승진했고, 8월에 좌부승지로 승진했다. 사표를 올리고 예천으로 부모를 뵈러 갔더니, 용천위 상호군이 더해졌다. 초간정사에 있었다. 9월에 조정으로 돌아와 우부승지에 제배되었다. 19일에 또 좌부승지로 승진했다. 11월에 다시 부제학 물망에 올랐다. 그때 어머니를 모시기에 편하다는 점을 들어 여러 차례 외직을 구했으나 이부에서 다시 부제학 의망(擬望)에 올렸다. 한음 이덕형도 "이 사람을 외직에 보임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끝내 더 이상의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1591년년 12월 9일 부호군(副護軍)으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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