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발췌 삶의 형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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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에두아르트 슈프랑거의 가장 의미 있는 작품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철학자, 심리학자, 그리고 교육학자인 에두아르트 슈프랑거는 평생 777편의 논문을 썼으며, 네 권의 단행본을 펴냈다. 이 책은 슈프랑거의 세 번째 단행본으로 1914년 첫 번째 판이 발간되었으며 7년 후인 1921년 제2판이 개정판으로 완성되었다. 이 작품은 슈프랑거가 자신의 독특한 철학적 사고를 처음으로 체계화한 초고 수준이었지만, 오늘날 정신과학 및 문화철학 분야에서는 상당히 비중 있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울러 이 작품은 이상적(理想的) '삶의 유형'에 대한 인간형을 제시하는 '개성심리학' 또는 '이해심리학'으로서 당시 심리학 논쟁에서 '이해 방법'에 기준으로 작용할 정도로 정교하게 설계되었다고 평가된다.
의미 있는 삶은 역사로부터 오며, 역사는 곧 문화다
1920년대 당시 독일 철학은 헤겔의 관념주의 이상론에 염증을 느끼고 쇠렌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적 입장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슈프랑거는 모든 철학적-사상적 결정과 판단은 오로지 '역사 인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역사 인식은 '역사 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당시 슈프랑거가 가장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은 인류가 점점 삶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딜타이와 마찬가지로 슈프랑거에게도 '삶은 역사'다. 따라서 삶의 위기는 역사의 위기다. 그런데 슈프랑거는 의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선 초개인적-역사적 내용을 의식해야 했다. 왜냐하면 삶에서 의미 있는 내용들은 항상 역사로부터 의식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의 현실 의식은 예외 없이 의미 있는 내용을 토대로 해서만 스스로 구축된다. 슈프랑거는 이러한 내용들을 '문화(文化)'라고 규정했다. 달리 말하면, 문화는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정신의 객관물이다. 따라서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 속에서 정신의 객관으로 현현하는 문화를 해석해 내는 일이 필연적이다. 더 나아가 그는 역사적으로 발생하는 문화를 객관적 정신 내지 객관화정신으로 간주하고 그것의 영원한 법칙을 찾아내는 데 주력했다. 슈프랑거에게 삶은 역사고 동시에 문화라는 객관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에게 삶의 위기는 역사의 위기이며 동시에 문화의 위기다. 또한 삶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은 곧 문화적 의미의 상실을 뜻한다.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철학자, 심리학자, 그리고 교육학자인 에두아르트 슈프랑거는 평생 777편의 논문을 썼으며, 네 권의 단행본을 펴냈다. 이 책은 슈프랑거의 세 번째 단행본으로 1914년 첫 번째 판이 발간되었으며 7년 후인 1921년 제2판이 개정판으로 완성되었다. 이 작품은 슈프랑거가 자신의 독특한 철학적 사고를 처음으로 체계화한 초고 수준이었지만, 오늘날 정신과학 및 문화철학 분야에서는 상당히 비중 있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울러 이 작품은 이상적(理想的) '삶의 유형'에 대한 인간형을 제시하는 '개성심리학' 또는 '이해심리학'으로서 당시 심리학 논쟁에서 '이해 방법'에 기준으로 작용할 정도로 정교하게 설계되었다고 평가된다.
의미 있는 삶은 역사로부터 오며, 역사는 곧 문화다
1920년대 당시 독일 철학은 헤겔의 관념주의 이상론에 염증을 느끼고 쇠렌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적 입장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슈프랑거는 모든 철학적-사상적 결정과 판단은 오로지 '역사 인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역사 인식은 '역사 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당시 슈프랑거가 가장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은 인류가 점점 삶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딜타이와 마찬가지로 슈프랑거에게도 '삶은 역사'다. 따라서 삶의 위기는 역사의 위기다. 그런데 슈프랑거는 의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선 초개인적-역사적 내용을 의식해야 했다. 왜냐하면 삶에서 의미 있는 내용들은 항상 역사로부터 의식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의 현실 의식은 예외 없이 의미 있는 내용을 토대로 해서만 스스로 구축된다. 슈프랑거는 이러한 내용들을 '문화(文化)'라고 규정했다. 달리 말하면, 문화는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정신의 객관물이다. 따라서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 속에서 정신의 객관으로 현현하는 문화를 해석해 내는 일이 필연적이다. 더 나아가 그는 역사적으로 발생하는 문화를 객관적 정신 내지 객관화정신으로 간주하고 그것의 영원한 법칙을 찾아내는 데 주력했다. 슈프랑거에게 삶은 역사고 동시에 문화라는 객관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에게 삶의 위기는 역사의 위기이며 동시에 문화의 위기다. 또한 삶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은 곧 문화적 의미의 상실을 뜻한다.
목차
목차
제1부 정신의 철학적 이해 방법론
1. 정신과학의 방법적 문제
2. 방법으로서의 정신과학적 심리학
제2부 삶의 해석 이론
1. 정신행위의 이해
2. 정신의 법칙적 성격
3. 개성의 이상적 유형론
제3부 삶의 복잡성
1. 삶의 윤리적 차원
2. 삶의 본질 이해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1. 정신과학의 방법적 문제
2. 방법으로서의 정신과학적 심리학
제2부 삶의 해석 이론
1. 정신행위의 이해
2. 정신의 법칙적 성격
3. 개성의 이상적 유형론
제3부 삶의 복잡성
1. 삶의 윤리적 차원
2. 삶의 본질 이해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저자
저자
에두아르트 슈프랑거 에두아르트 슈프랑거(Eduard Spranger)
에두아르트 슈프랑거(Eduard Spranger)는 1882년 6월 27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1888년 도로텐 레알 김나지움에 진학하기 위해 예비학교(Vorschule)에 입학했고, 레알 김나지움의 과정을 마친 1894년 프란체스코 교단에서 운영하는 그라우 수도원 인문 김나지움으로 진학했다. 1900년에 베를린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05년 철학자 프리드리히 파울젠과 심리학자 카를 슈툼프에게 '역사과학의 토대'라는 인식론적 연구 주제를 가지고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함으로써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09년 교수 자격 논문으로 저서 《빌헬름 폰 훔볼트와 인본주의 이상》을 출간했으며, 1년 후 이 연구의 보강판으로서 두 번째 저서인 《빌헬름 폰 훔볼트와 교육제도의 개혁》을 출간했다. 이후 슈프랑거의 연구와 학문은 그가 학자로서 처음 시작한 역사주의 논쟁과 늘 관련을 맺게 되었다. 또한 정부의 정책 자문관이자 학자로서 슈프랑거는 평생 동안 정치, 국가, 행정과 교육제도의 관련성에 대하여 부단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으며, 국가 정책의 결정에서도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울러 그는 교수 자격시험을 거쳐 베를린 대학교에서 강사로 철학과 교육학 강의를 시작했다. 1911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철학 및 교육학 교수 직위를 얻게 되는데, 이것이 생애 첫 번째 교수직이다. 이 밖에도 독일 땅 세 곳의 대학교에서 교육학과 교수직을 취득했다.
1912년 당시 교육계와 철학계에서 거목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게오르크 케르셴슈타이너와 인간적·학문적인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이러한 개인적 친분 관계는 케르셴슈타이너가 죽은 1932년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직업학교 제도의 구축을 위한 케르셴슈타이너의 업적은 후에 슈프랑거에게 학문적 전범으로 작용했으며, 슈프랑거의 교육 이론 및 직업교육 이론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919년 자신의 모교인 베를린 대학교의 철학과 정교수로 채용된다. 그는 교사 교육 및 교사 재교육 문제를 계속해서 교육부에 건의했으며, 드디어 1926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문화부 장관이었던 하인리히 베커(Heinrich Becker)로부터 '독립학교로서의 교육학 아카데미'의 설립 허가를 받아낸다. 이것은 후에 초등학교 교원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교육대학교(Pa?dagogische Hochschule)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바이마르 시절에 공공교육 정책 문제와 학문적 논쟁 영역에서 슈프랑거가 주력했던 테마들은 직업학교, 통합학교, 향토학, 학교의 종교적 형상화, 그리고 의무교육제도의 연장 등이었다. 또한 오랫동안 자신이 구상하는 교육학의 핵심 요소를 중심으로 이론 작업을 한 결과, 〈청년기의 심리학〉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게 된다. 1924년 저서로 출간된 이 논문은 슈프랑거의 네 번째 대작으로서 1979년까지 11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192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슈프랑거의 저작들은 사회과학적 논쟁을 위해 범위와 폭을 달리하게 된다. 그는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 및 교육 사상의 틀을 가지고 변증신학, 셸러, 슈펭글러, 베버류(流)의 철학과 사회학, 심리학, 심리 분석 등 새로운 학문 그리고 파시즘, 마르크시즘, 민주주의 이론으로 대표되는 당시 정치학 영역과 지상 논쟁을 시작한다. 당시 이렇게 시작된 슈프랑거의 사회과학적 논쟁은 1950년대에 들면서 그가 '문화 비판'이라는 삶의 전체적 주제에 몰입할 수밖에 없도록 했으며, 이는 슈프랑거 만년의 사상 체계 정립에 중심 관점으로 부각되었다. 나치스 시절에는 나치스에 동조했느니 반대로 반(反)나치스 암살 사건에 가담했느니 하는 애매모호한 논쟁에 휩쓸리기도 했지만, 종전 후 튀빙겐 대학교의 총장으로 부임했다. 1951년부터 1954년까지 독일 연구 공동체의 부회장을 지냈고, 독일 정부의 교육 관계 법·제도 정책에 대해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1963년 9월 17일 튀빙겐에서 서거했다.
에두아르트 슈프랑거(Eduard Spranger)는 1882년 6월 27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1888년 도로텐 레알 김나지움에 진학하기 위해 예비학교(Vorschule)에 입학했고, 레알 김나지움의 과정을 마친 1894년 프란체스코 교단에서 운영하는 그라우 수도원 인문 김나지움으로 진학했다. 1900년에 베를린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05년 철학자 프리드리히 파울젠과 심리학자 카를 슈툼프에게 '역사과학의 토대'라는 인식론적 연구 주제를 가지고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함으로써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09년 교수 자격 논문으로 저서 《빌헬름 폰 훔볼트와 인본주의 이상》을 출간했으며, 1년 후 이 연구의 보강판으로서 두 번째 저서인 《빌헬름 폰 훔볼트와 교육제도의 개혁》을 출간했다. 이후 슈프랑거의 연구와 학문은 그가 학자로서 처음 시작한 역사주의 논쟁과 늘 관련을 맺게 되었다. 또한 정부의 정책 자문관이자 학자로서 슈프랑거는 평생 동안 정치, 국가, 행정과 교육제도의 관련성에 대하여 부단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으며, 국가 정책의 결정에서도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울러 그는 교수 자격시험을 거쳐 베를린 대학교에서 강사로 철학과 교육학 강의를 시작했다. 1911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철학 및 교육학 교수 직위를 얻게 되는데, 이것이 생애 첫 번째 교수직이다. 이 밖에도 독일 땅 세 곳의 대학교에서 교육학과 교수직을 취득했다.
1912년 당시 교육계와 철학계에서 거목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게오르크 케르셴슈타이너와 인간적·학문적인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이러한 개인적 친분 관계는 케르셴슈타이너가 죽은 1932년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직업학교 제도의 구축을 위한 케르셴슈타이너의 업적은 후에 슈프랑거에게 학문적 전범으로 작용했으며, 슈프랑거의 교육 이론 및 직업교육 이론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919년 자신의 모교인 베를린 대학교의 철학과 정교수로 채용된다. 그는 교사 교육 및 교사 재교육 문제를 계속해서 교육부에 건의했으며, 드디어 1926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문화부 장관이었던 하인리히 베커(Heinrich Becker)로부터 '독립학교로서의 교육학 아카데미'의 설립 허가를 받아낸다. 이것은 후에 초등학교 교원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교육대학교(Pa?dagogische Hochschule)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바이마르 시절에 공공교육 정책 문제와 학문적 논쟁 영역에서 슈프랑거가 주력했던 테마들은 직업학교, 통합학교, 향토학, 학교의 종교적 형상화, 그리고 의무교육제도의 연장 등이었다. 또한 오랫동안 자신이 구상하는 교육학의 핵심 요소를 중심으로 이론 작업을 한 결과, 〈청년기의 심리학〉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게 된다. 1924년 저서로 출간된 이 논문은 슈프랑거의 네 번째 대작으로서 1979년까지 11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192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슈프랑거의 저작들은 사회과학적 논쟁을 위해 범위와 폭을 달리하게 된다. 그는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 및 교육 사상의 틀을 가지고 변증신학, 셸러, 슈펭글러, 베버류(流)의 철학과 사회학, 심리학, 심리 분석 등 새로운 학문 그리고 파시즘, 마르크시즘, 민주주의 이론으로 대표되는 당시 정치학 영역과 지상 논쟁을 시작한다. 당시 이렇게 시작된 슈프랑거의 사회과학적 논쟁은 1950년대에 들면서 그가 '문화 비판'이라는 삶의 전체적 주제에 몰입할 수밖에 없도록 했으며, 이는 슈프랑거 만년의 사상 체계 정립에 중심 관점으로 부각되었다. 나치스 시절에는 나치스에 동조했느니 반대로 반(反)나치스 암살 사건에 가담했느니 하는 애매모호한 논쟁에 휩쓸리기도 했지만, 종전 후 튀빙겐 대학교의 총장으로 부임했다. 1951년부터 1954년까지 독일 연구 공동체의 부회장을 지냈고, 독일 정부의 교육 관계 법·제도 정책에 대해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1963년 9월 17일 튀빙겐에서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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