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자의 눈으로 본 장애 이야기
포용과 공존을 실천한 조선의 뛰어난 사상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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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몸의 한 특징이자 차이일 뿐이다.”
___우리가 실학자의 장애 인식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실학과 장애의 역사가 서로 관련이 있을 것이란 생각은 관련된 연구자들에게도 낯선 시각이었다. 실학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사상으로 기존 성리학의 공리공론에서 벗어나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을 했지만, 역시 근본적으로 양반이었기에 실제 생활방식은 기존 성리학자들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라 짐작해 왔다. 하지만 저자는 장애사 연구를 계속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조선 후기 장애를 가진 인물이 대거 등장하는데, 그들이 자꾸 실학자들과 복잡다단하게 얽히고설켜 있다는 점이었다. 또한 시각 장애나 청각 장애 등 다양한 장애를 가진 실학자들도 많았다. 놀랍게도 이 시기 수많은 실학자들은 신분과 나이, 장애마저 모두 초월한 활발한 교류 관계를 맺고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장애인을 불쌍히 여기며 동정한 것도 아니었다. 각자가 가진 재주와 능력을 중시하며 장애 여부를 떠나 거의 동등한 관계를 맺었다. 당시 장애인 스스로도 장애를 별로 개의치 않고 당당한 태도로 거침없이 살아가며 사회 속에서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당시 실학자들은 장애 복지 정책에 있어서도 기존 성리학자들처럼 단순히 어려운 이를 돕는 차원을 넘어서, 비장애인과 똑같이 배우고 일하며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자립 생활을 강조했다. 특히 장애를 가진 신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역할과 능력을 강조함으로써 장애를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장애인은 신체적 · 정신적 결함이 있기 때문에 타인의 배려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회적 약자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장애인의 삶을 비장애인과 분리된 가정이나 수용시설 등으로 한정되게 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심지어 장애사 관련 연구자들도 장애를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적 틀에서 바라보는 사고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놀랍게도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시대를 앞서가는 선진적인 장애 인식을 바탕으로 장애에 대한 편견 없이 일상을 공유했고,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자세로 그들과 스스럼없이 교유했다. 그리하여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뛰어넘는 진정한 의미의 통합사회를 이루어 나갔다. 이는 오늘날 경제적 지원에 한정된 장애복지 정책이나 상황 등을 반성하게 하고, 장애에 대한 비장애인의 인식 개선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조선 후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을 충분히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장애는 다양한 몸의 한 특징이자 차이에 불과할 뿐, 결코 특별하거나 부족한 것이 아님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몸의 한 특징이자 차이일 뿐이다.”
___우리가 실학자의 장애 인식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실학과 장애의 역사가 서로 관련이 있을 것이란 생각은 관련된 연구자들에게도 낯선 시각이었다. 실학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사상으로 기존 성리학의 공리공론에서 벗어나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을 했지만, 역시 근본적으로 양반이었기에 실제 생활방식은 기존 성리학자들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라 짐작해 왔다. 하지만 저자는 장애사 연구를 계속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조선 후기 장애를 가진 인물이 대거 등장하는데, 그들이 자꾸 실학자들과 복잡다단하게 얽히고설켜 있다는 점이었다. 또한 시각 장애나 청각 장애 등 다양한 장애를 가진 실학자들도 많았다. 놀랍게도 이 시기 수많은 실학자들은 신분과 나이, 장애마저 모두 초월한 활발한 교류 관계를 맺고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장애인을 불쌍히 여기며 동정한 것도 아니었다. 각자가 가진 재주와 능력을 중시하며 장애 여부를 떠나 거의 동등한 관계를 맺었다. 당시 장애인 스스로도 장애를 별로 개의치 않고 당당한 태도로 거침없이 살아가며 사회 속에서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당시 실학자들은 장애 복지 정책에 있어서도 기존 성리학자들처럼 단순히 어려운 이를 돕는 차원을 넘어서, 비장애인과 똑같이 배우고 일하며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자립 생활을 강조했다. 특히 장애를 가진 신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역할과 능력을 강조함으로써 장애를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장애인은 신체적 · 정신적 결함이 있기 때문에 타인의 배려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회적 약자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장애인의 삶을 비장애인과 분리된 가정이나 수용시설 등으로 한정되게 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심지어 장애사 관련 연구자들도 장애를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적 틀에서 바라보는 사고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놀랍게도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시대를 앞서가는 선진적인 장애 인식을 바탕으로 장애에 대한 편견 없이 일상을 공유했고,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자세로 그들과 스스럼없이 교유했다. 그리하여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뛰어넘는 진정한 의미의 통합사회를 이루어 나갔다. 이는 오늘날 경제적 지원에 한정된 장애복지 정책이나 상황 등을 반성하게 하고, 장애에 대한 비장애인의 인식 개선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조선 후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을 충분히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장애는 다양한 몸의 한 특징이자 차이에 불과할 뿐, 결코 특별하거나 부족한 것이 아님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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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___청각 장애 문장가 이덕수
이덕수(1673~1744)는 지금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18세기 전반 대표적인 소론계 문장가이자 관료였다. 그는 8살 때 귓병을 앓은 뒤 청각 장애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독서에 힘써 수많은 책들을 읽었고, 박세당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덕수는 오히려 귀가 들리지 않아 독서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영조실록』 영조 20년(1744) 5월 28일에 의하면, "이덕수는 문장이 넓고 단아하여 일대의 종장으로 일컬었으며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문형(대제학)을 맡았다"고 나와 있다. 이규상의 『병세제언록』에서도 "이덕수의 문장은 기력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당시 이덕수의 집에는 묘도문(돌아가신 조상의 성명, 세계, 행적, 장례, 자손 등을 기록한 글)을 부탁하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덕수의 문집에 남아 있는 묘도문만 해도 모두 176편에 이른다.
이덕수는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갔지만, 빠르게 높은 벼슬에 올랐다. 특히 그의 나이 51세가 되던 해 영조의 총애를 입어 경종실록 당상과 성균관 대사성, 좌참찬, 우참찬 등 수많은 관직을 역임했다. 이덕수는 귀가 들리지 않는 청각 장애인이었으나 영조는 개의치 않고 오직 능력만 중시하며 항상 그를 총애했다. 심지어 이덕수가 귀가 들리지 않는 병세 때문에 사직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임금이 말할 때마다 옆의 사람이 큰소리로 대신 전해주니 이덕수는 미안하여 사진을 요청했던 것인데, 임금이 상관없다며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영조는 이덕수에게 질문할 것이 있으면 사관에게 글로 써서 보여주게 하는 등 후의가 두터웠다.
___목민심서에 나타난 정약용의 장애 복지론
정약용(1762~1836)은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특히 장애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다양한 장애인 복지론을 펼치는 한편 장애인의 현실에 대해서도 생생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다산은 장애인은 노역, 군역, 잡역 등 모든 국역을 면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귀머거리나 고자는 자신의 노력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으며, 장님은 점을 치고, 절름발이는 그물을 엮어서 살아갈 수 있지만, 기타 폐질자는 구휼해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장애 복지에 있어서 자립 생활의 원칙과 구제 정책을 적절히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람은 각기 맡은 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장애인의 경우도 소경은 음악, 절름발이는 대궐문 지키기, 심지어 곱사등이나 중증 장애인까지도 적당한 임무를 맡겨 스스로 먹고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의지할 데가 없는 장애인에게는 시정(활동지원사)을 제공하고, 의지할 곳이 없어 떠도는 사람에겐 동서대비원 같은 보호시설을 지어 머물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기본적으로 장애인도 직업을 갖고 제힘으로 먹고살도록 하되, 중증 장애의 경우 국가에서 직접 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___홍대용의 자립적 장애 복지론
이용후생파는 18세기 후반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호수와 서유구를 비롯한 달성서씨 집안 사람들을 중심으로 성립된 실학파를 말한다. 이들은 백성들이 빈곤을 극복하고 잘살기 위해선 상업을 진흥시키고, 수레나 배 등의 기술을 개발하며,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도 경세치용파처럼 시대를 앞서가는 선진적인 장애 복지론과 장애관을 갖고 있었으며, 장애 인물들과 신분 및 나이를 초월한 폭넓은 교유 관계를 맺었다.
홍대용(1731~1783)은 18세기 중반 이용후생파 실학자이자 과학사상가였다. 그는 당시의 사회적 허위의식을 비판하고 백성의 실생활에 쓸모 있는 이용후생학을 주장했다. 특히 중국의 선진문물과 서양의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다. 홍대용은 장애 복지, 특히 직업과 노동에 대해서도 획기적인 주장을 펼쳤다. 즉 장애인도 모두 일자리를 갖고 스스로 먹고살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홍대용은 "사람의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쓴다면 천하에 못쓸 재주가 없다"고 하면서, 시각 장애나 언어 장애, 지체 장애 등 장애인 모두 일자리를 갖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만 장애인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고, 남들도 그들을 무시하지 않고 정당하게 대우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장애 복지의 가장 현실적이고 핵심적인 방안이라고 볼 수 있다.
___조선 최고의 장애사상가, 박지원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이용후생파 실학자이자 조선 후기 최고의 문장가였다. 연암의 삶에서 가장 큰 특징은 폭넓은 교유 관계를 꼽을 수 있다. 연암은 한양 한복판 탑골에 살면서 신분과 나이, 빈부, 당파를 초월한 폭넓은 교유 관계를 맺었다. 특히 연암은 노론 명문가인 홍대용, 정철조 등은 물론 서얼 출신인 박제가, 유득공 등과 어울려 지냈다. 나아가 분뇨장수, 이야기꾼 등 하층만과도 격의 없이 지냈다. 이러한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인간관은 그의 장애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연암은 장애란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장애는 고정불변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이나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연암이 한밤중에 말을 타고 강을 건너가게 되니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에 통역관이 "옛날에 위험한 것을 말할 때 맹인이 애꾸눈의 말을 타고 한밤중에 깊은 연못가를 가는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오늘밤 우리를 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연암은 "그게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면 위험할 수도 있겠으나, 정말 위험을 잘 알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맹인을 보는 사람은 멀쩡하게 눈이 있는 사람들이다. 맹인을 보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마음속으로 위태롭다고 느끼는 것일 뿐, 맹인 스스로는 위험을 아는 것이 아니다. 맹인의 눈은 위험한 것을 볼 수 없는데, 무슨 위험이 있단 말인가"라고 답했다. 즉, 장애 당사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장애란 절대적인 것이 아닌 사람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또한 연암은 겉모습보단 내면, 즉 본질을 보라고 했다. 또한 장애를 에둘러 표현하지 말고 직설적으로 말하라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를 중시해 뭐든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완곡하게 말한다는 것이다. 장애가 있어도 내면에는 해가 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둘러대어 표현하는데, 이는 본질의 왜곡이자 과도한 친절이라고 보았다. 동시에 연암은 장애인 당사자도 장애에 구애받지 말고 살아가라고 했다.
이덕수(1673~1744)는 지금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18세기 전반 대표적인 소론계 문장가이자 관료였다. 그는 8살 때 귓병을 앓은 뒤 청각 장애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독서에 힘써 수많은 책들을 읽었고, 박세당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덕수는 오히려 귀가 들리지 않아 독서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영조실록』 영조 20년(1744) 5월 28일에 의하면, "이덕수는 문장이 넓고 단아하여 일대의 종장으로 일컬었으며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문형(대제학)을 맡았다"고 나와 있다. 이규상의 『병세제언록』에서도 "이덕수의 문장은 기력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당시 이덕수의 집에는 묘도문(돌아가신 조상의 성명, 세계, 행적, 장례, 자손 등을 기록한 글)을 부탁하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덕수의 문집에 남아 있는 묘도문만 해도 모두 176편에 이른다.
이덕수는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갔지만, 빠르게 높은 벼슬에 올랐다. 특히 그의 나이 51세가 되던 해 영조의 총애를 입어 경종실록 당상과 성균관 대사성, 좌참찬, 우참찬 등 수많은 관직을 역임했다. 이덕수는 귀가 들리지 않는 청각 장애인이었으나 영조는 개의치 않고 오직 능력만 중시하며 항상 그를 총애했다. 심지어 이덕수가 귀가 들리지 않는 병세 때문에 사직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임금이 말할 때마다 옆의 사람이 큰소리로 대신 전해주니 이덕수는 미안하여 사진을 요청했던 것인데, 임금이 상관없다며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영조는 이덕수에게 질문할 것이 있으면 사관에게 글로 써서 보여주게 하는 등 후의가 두터웠다.
___목민심서에 나타난 정약용의 장애 복지론
정약용(1762~1836)은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특히 장애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다양한 장애인 복지론을 펼치는 한편 장애인의 현실에 대해서도 생생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다산은 장애인은 노역, 군역, 잡역 등 모든 국역을 면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귀머거리나 고자는 자신의 노력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으며, 장님은 점을 치고, 절름발이는 그물을 엮어서 살아갈 수 있지만, 기타 폐질자는 구휼해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장애 복지에 있어서 자립 생활의 원칙과 구제 정책을 적절히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람은 각기 맡은 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장애인의 경우도 소경은 음악, 절름발이는 대궐문 지키기, 심지어 곱사등이나 중증 장애인까지도 적당한 임무를 맡겨 스스로 먹고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의지할 데가 없는 장애인에게는 시정(활동지원사)을 제공하고, 의지할 곳이 없어 떠도는 사람에겐 동서대비원 같은 보호시설을 지어 머물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기본적으로 장애인도 직업을 갖고 제힘으로 먹고살도록 하되, 중증 장애의 경우 국가에서 직접 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___홍대용의 자립적 장애 복지론
이용후생파는 18세기 후반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호수와 서유구를 비롯한 달성서씨 집안 사람들을 중심으로 성립된 실학파를 말한다. 이들은 백성들이 빈곤을 극복하고 잘살기 위해선 상업을 진흥시키고, 수레나 배 등의 기술을 개발하며,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도 경세치용파처럼 시대를 앞서가는 선진적인 장애 복지론과 장애관을 갖고 있었으며, 장애 인물들과 신분 및 나이를 초월한 폭넓은 교유 관계를 맺었다.
홍대용(1731~1783)은 18세기 중반 이용후생파 실학자이자 과학사상가였다. 그는 당시의 사회적 허위의식을 비판하고 백성의 실생활에 쓸모 있는 이용후생학을 주장했다. 특히 중국의 선진문물과 서양의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다. 홍대용은 장애 복지, 특히 직업과 노동에 대해서도 획기적인 주장을 펼쳤다. 즉 장애인도 모두 일자리를 갖고 스스로 먹고살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홍대용은 "사람의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쓴다면 천하에 못쓸 재주가 없다"고 하면서, 시각 장애나 언어 장애, 지체 장애 등 장애인 모두 일자리를 갖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만 장애인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고, 남들도 그들을 무시하지 않고 정당하게 대우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장애 복지의 가장 현실적이고 핵심적인 방안이라고 볼 수 있다.
___조선 최고의 장애사상가, 박지원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이용후생파 실학자이자 조선 후기 최고의 문장가였다. 연암의 삶에서 가장 큰 특징은 폭넓은 교유 관계를 꼽을 수 있다. 연암은 한양 한복판 탑골에 살면서 신분과 나이, 빈부, 당파를 초월한 폭넓은 교유 관계를 맺었다. 특히 연암은 노론 명문가인 홍대용, 정철조 등은 물론 서얼 출신인 박제가, 유득공 등과 어울려 지냈다. 나아가 분뇨장수, 이야기꾼 등 하층만과도 격의 없이 지냈다. 이러한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인간관은 그의 장애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연암은 장애란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장애는 고정불변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이나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연암이 한밤중에 말을 타고 강을 건너가게 되니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에 통역관이 "옛날에 위험한 것을 말할 때 맹인이 애꾸눈의 말을 타고 한밤중에 깊은 연못가를 가는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오늘밤 우리를 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연암은 "그게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면 위험할 수도 있겠으나, 정말 위험을 잘 알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맹인을 보는 사람은 멀쩡하게 눈이 있는 사람들이다. 맹인을 보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마음속으로 위태롭다고 느끼는 것일 뿐, 맹인 스스로는 위험을 아는 것이 아니다. 맹인의 눈은 위험한 것을 볼 수 없는데, 무슨 위험이 있단 말인가"라고 답했다. 즉, 장애 당사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장애란 절대적인 것이 아닌 사람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또한 연암은 겉모습보단 내면, 즉 본질을 보라고 했다. 또한 장애를 에둘러 표현하지 말고 직설적으로 말하라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를 중시해 뭐든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완곡하게 말한다는 것이다. 장애가 있어도 내면에는 해가 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둘러대어 표현하는데, 이는 본질의 왜곡이자 과도한 친절이라고 보았다. 동시에 연암은 장애인 당사자도 장애에 구애받지 말고 살아가라고 했다.
목차
목차
서문: 실학자의 장애 인식
1. 프롤로그: 실학자의 장애 인식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2. 초기 실학자의 장애교육과 정치활동
3. 경세치용파의 수준 높은 장애관
4. 이용후생파의 선진적인 장애사상
5. 달성서씨 가와 장애 과학자 김영
6. 19세기 실학자들의 획기적인 장애관
7. 에필로그: 실학, 장애를 뛰어넘다
참고문헌
1. 프롤로그: 실학자의 장애 인식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2. 초기 실학자의 장애교육과 정치활동
3. 경세치용파의 수준 높은 장애관
4. 이용후생파의 선진적인 장애사상
5. 달성서씨 가와 장애 과학자 김영
6. 19세기 실학자들의 획기적인 장애관
7. 에필로그: 실학, 장애를 뛰어넘다
참고문헌
저자
저자
정창권
인권과 통섭(학문융합)의 관점에서 고전을 연구하고 책을 쓰는 인문학자다. 장애, 여성, 성과 인구, 건강, 노년 등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대구대학교대학원 장애학과에 출강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 『성의 한국사』,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 『천리 밖에서 나는 죽고 그대는 살아서』, 『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근대 장애인사』, 『정조처럼 소통하라』,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거리의 이야기꾼 전기수』, 『한쪽 눈의 괴짜 화가 최북』, 『조선의 양생법』 등 다수가 있다.
펴낸 책으로는 『성의 한국사』,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 『천리 밖에서 나는 죽고 그대는 살아서』, 『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근대 장애인사』, 『정조처럼 소통하라』,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거리의 이야기꾼 전기수』, 『한쪽 눈의 괴짜 화가 최북』, 『조선의 양생법』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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