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을 추억하다
고현내 사람들과 최치원 영정이야기
『최치원을 추억하다』는 최치원이라는 씨앗이 어떻게 꽃 피우고 향기를 펼쳤는지, 그리고 그가 남기고 간 향기에 이끌려 오랜 세월 그를 그리워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롯이 담겼다. 최치원과 인연이 깊었던 쌍계사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쌍계사는 하동의 유림들에게 두 차례나 영정을 빼앗기고도 계속해서 최치원의 영정을 그려 봉안해온 사찰. 최치원과 맺었던 인연을 소중하게 여겼던 심지 깊은 쌍계사의 이야기가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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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최치원은 신라의 대문장가이자 학자로 당대 최고의 천재였다. 그는 열두 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열여덟 살에 당나라의 진사시에 급제했다.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토황소격문'을 지어 중국사회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당나라의 관리로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고국 신라에 돌아와 크게 쓰이지 못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배운 지식과 관리생활을 하며 겪은 견문을 바탕으로 신라사회를 개혁하려 했으나 진골 귀족들의 반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외직을 자청해 처음으로 부임해왔던 곳이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일대인 태산군이다. 그는 태산의 태수로 있으면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고,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유교의 정신을 이곳에 심었다. 그가 꿈꾸던 세상은 백성들이 간절히 바라던 세상이었다. 이러한 그였기에 그는 우리 역사상 백성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가 스쳐지나간 곳마다 전설이 서렸고, 그의 이야기는 존경을 넘어 신이한 존재로까지 회자되었다. 현재 그를 향사하는 서원과 사당만 해도 전국에 스무 곳이 넘는다.
저자는 방송사 PD로 일하면서 칠보의 무성서원에서 1960년대에 사라진 최치원 구본영정에 대한 사연을 접하고 본격적인 취재를 시작했다.
무성서원에서는 사당으로는 최초로 1784년(정조 8)에 최치원의 영정을 봉안했다. 이 영정은 본래 지리산 쌍계사에 있었는데 하동의 유림들이 "동방 유학의 종장을 불가에서 모시는 것은 불가하다"하여 강제로 빼앗아서 최씨 후손가에 맡겼다가 무성서원으로 오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영정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이 영정뿐만이 아니라 1831년에 모사했던 영정도 함께 사라졌다. 그 이후 이 영정들을 되찾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 그 노력의 결과 사라진 두 축의 영정 중 1831년 본이 정읍시립박물관에 내려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쌍계사본 원본 영정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 책 속에는 무성서원에서 최치원의 영정이 사라지게 된 과정과 잃어버린 영정을 찾기 위한 노력이 소상히 적혀있다.
최치원과 인연이 깊었던 쌍계사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쌍계사는 하동의 유림들에게 두 차례나 영정을 빼앗기고도 계속해서 최치원의 영정을 그려 봉안해온 사찰. 최치원과 맺었던 인연을 소중하게 여겼던 심지 깊은 쌍계사의 이야기가 감동적이다.
해인사본 최치원 영정에 대해 새롭게 조명한 내용도 관심을 끈다. 최치원 영정을 이야기 할 때 흔히 쌍계사본과 해인사본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고 저자는 적고 있다.
이 책은 최치원 영정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왜 그토록 그를 그리워하며 존경해왔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우리 선조들은 최치원이 이루고자 했던 세상을 함께 꿈꾸며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최치원을 추억하다』를 펼치면 최치원과 관련된 풍부한 사진과 해설이 수록 되었으며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쓴 간결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재미있는 소설을 읽듯이 술술 읽혀진다.
출판사 서평
최치원을 모신 서원과 사우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지역이 전라북도이다. 그 수는 무려 8곳에 이른다. 그 중 군산시 옥구향교 인근에 4개의 사당이 밀집되어 있다.
역사 기록으로 본다면 최치원이 전라북도와 맺은 인연은 태산군 태수로 왔던 것이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지역에 이렇게 많은 사당이 분포해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또 군산 지역에 서려있는 최치원 탄생설화는 무엇인가. 이러한 것들이 몹시 궁금했지만 아직 그 궁금증을 다 풀지는 못하고 있다.
여기에 쓴 글은 최치원에 대해 그 동안 궁금증을 갖고 있었던 것 중의 하나, 최치원의 초상화를 중심으로 쓴 글이다.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알게 된 초상화에 얽힌 사연들을 보완해서 글로 썼다. 나름 열심히 자료를 찾아 충실히 기록하려 노력했지만 부족한 부분이 많다.
특히 최치원의 해인사본 초상화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크다. 우리가 최치원의 초상화를 말할 때 일반적으로 쌍계사본과 해인사본이 있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사실과는 꽤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부분에 대해 명쾌하게 밝혀내지 못해 무척 아쉽다.
최치원의 초상화에 대해 글을 쓰면서 새삼 무성서원에서 사라진 쌍계사본 영정 원본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전국의 사당에 봉안되어 있는 최치원 영정의 얼굴 모습이 각기 다르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표준으로 정할 영정이 없어서 생긴 현상들이다.
쌍계사본 영정 원본을 찾는다면 이 영정이 현존하는 최치원 초상화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초상화가 될 것이고, 이 초상화가 표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초상화는 쌍계사에서 계속 봉안해 오면서 이모해 왔기 때문에 다른 초상화에 비해 최치원의 실제 모습에 가장 가깝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현재의 무성서원본에서 느낄 수 있듯 무성서원에 봉안했던 최치원 초상화는 다른 곳의 초상화와 비교해 볼 때 그림의 품격이 다르다. 현재의 영정은 1831년본을 이모했고, 1831년본은 쌍계사본 원본을 개모했기 때문에 원본도 품격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본다.
아무튼 이 영정을 찾게 된다면 귀중한 우리 문화재가 하나 더 느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최치원은 천 년 전의 인물이지만 시대의 선각자였다. 그가 꿈꾸던 세상은 자신이 살던 시대에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고려와 조선에서 많은 부분이 실행에 옮겨졌다. 고려시대에는 골품제가 폐지되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등용하는 과거제도가 실시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한 국가적 노력이 경주되었다.
오늘날에도 최치원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그는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융합의 정신에서 찾았다. 그는 우리 고유의 사상 속에는 다른 사상이나 종교를 수용하는 융합의 정신이 있다고 보았다. 최치원은 종교나 사상을 갈등의 대상이 아니라 융합의 대상으로 보았고, 이렇게 융합하는 힘이 우리 문화의 원동력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시각은 종교 간의 갈등이 세계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현 시점에 커다란 해결점을 시사해준다.
이렇게 큰 인물을 태산의 백성들이 목민관으로 맞이했던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이는 우도할계, 곧 닭을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쓴 격이었지만 백성들 입장에서 이런 행운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태산의 이름 없는 백성들을 칭찬해주고 싶다. 태산의 백성들은 최치원이라는 위인이 주고 간 가르침을 잊지 않고, 천 년 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그 가르침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면서 태산의 후예들, 고현내에 살았던 분들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최치원과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계속해서 최치원의 초상화를 그려 봉안해온 쌍계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서 무성서원에서 잃어버렸던 1831년 개모본 최치원 영정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찾았다고 했는데,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언급하지 하지 못했다. 이 영정은 현재 정읍시립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장기대여 방식을 해법으로 제시한 국립중앙박물관의 제안을 정읍시가 수용한 결과이다. 이렇게나마 초상화의 소유권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아울러 이번 기회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아니었다면 1831년 개모본 영정을 완벽하게 보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영정을 다시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국립중앙박물관이 몹시 고맙다.
출판사 서평
최치원을 모신 서원과 사우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지역이 전라북도이다. 그 수는 무려 8곳에 이른다. 그 중 군산시 옥구향교 인근에 4개의 사당이 밀집되어 있다.
역사 기록으로 본다면 최치원이 전라북도와 맺은 인연은 태산군 태수로 왔던 것이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지역에 이렇게 많은 사당이 분포해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또 군산 지역에 서려있는 최치원 탄생설화는 무엇인가. 이러한 것들이 몹시 궁금했지만 아직 그 궁금증을 다 풀지는 못하고 있다.
여기에 쓴 글은 최치원에 대해 그 동안 궁금증을 갖고 있었던 것 중의 하나, 최치원의 초상화를 중심으로 쓴 글이다.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알게 된 초상화에 얽힌 사연들을 보완해서 글로 썼다. 나름 열심히 자료를 찾아 충실히 기록하려 노력했지만 부족한 부분이 많다.
특히 최치원의 해인사본 초상화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크다. 우리가 최치원의 초상화를 말할 때 일반적으로 쌍계사본과 해인사본이 있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사실과는 꽤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부분에 대해 명쾌하게 밝혀내지 못해 무척 아쉽다.
최치원의 초상화에 대해 글을 쓰면서 새삼 무성서원에서 사라진 쌍계사본 영정 원본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전국의 사당에 봉안되어 있는 최치원 영정의 얼굴 모습이 각기 다르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표준으로 정할 영정이 없어서 생긴 현상들이다.
쌍계사본 영정 원본을 찾는다면 이 영정이 현존하는 최치원 초상화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초상화가 될 것이고, 이 초상화가 표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초상화는 쌍계사에서 계속 봉안해 오면서 이모해 왔기 때문에 다른 초상화에 비해 최치원의 실제 모습에 가장 가깝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현재의 무성서원본에서 느낄 수 있듯 무성서원에 봉안했던 최치원 초상화는 다른 곳의 초상화와 비교해 볼 때 그림의 품격이 다르다. 현재의 영정은 1831년본을 이모했고, 1831년본은 쌍계사본 원본을 개모했기 때문에 원본도 품격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본다.
아무튼 이 영정을 찾게 된다면 귀중한 우리 문화재가 하나 더 느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최치원은 천 년 전의 인물이지만 시대의 선각자였다. 그가 꿈꾸던 세상은 자신이 살던 시대에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고려와 조선에서 많은 부분이 실행에 옮겨졌다. 고려시대에는 골품제가 폐지되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등용하는 과거제도가 실시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한 국가적 노력이 경주되었다.
오늘날에도 최치원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그는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융합의 정신에서 찾았다. 그는 우리 고유의 사상 속에는 다른 사상이나 종교를 수용하는 융합의 정신이 있다고 보았다. 최치원은 종교나 사상을 갈등의 대상이 아니라 융합의 대상으로 보았고, 이렇게 융합하는 힘이 우리 문화의 원동력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시각은 종교 간의 갈등이 세계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현 시점에 커다란 해결점을 시사해준다.
이렇게 큰 인물을 태산의 백성들이 목민관으로 맞이했던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이는 우도할계, 곧 닭을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쓴 격이었지만 백성들 입장에서 이런 행운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태산의 이름 없는 백성들을 칭찬해주고 싶다. 태산의 백성들은 최치원이라는 위인이 주고 간 가르침을 잊지 않고, 천 년 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그 가르침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면서 태산의 후예들, 고현내에 살았던 분들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최치원과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계속해서 최치원의 초상화를 그려 봉안해온 쌍계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서 무성서원에서 잃어버렸던 1831년 개모본 최치원 영정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찾았다고 했는데,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언급하지 하지 못했다. 이 영정은 현재 정읍시립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장기대여 방식을 해법으로 제시한 국립중앙박물관의 제안을 정읍시가 수용한 결과이다. 이렇게나마 초상화의 소유권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아울러 이번 기회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아니었다면 1831년 개모본 영정을 완벽하게 보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영정을 다시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국립중앙박물관이 몹시 고맙다.
책속으로 추가
고운 최치원
최치원은 신라의 대문장가이자 학자로 자를 고운또는 해운이라 했다. 《삼국사기》에는 최치원이 857년(헌안왕 1)에 경주에서 출생했다고 적혀 있다. 그의 가문은 진골 바로 아래 신분인 육두품이었다.
최치원은 12살에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신라사회에서 관리로 출세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이국 땅 멀리 떠나는 아들을 앞에 앉혀놓고, 최치원의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신신당부했다.
"앞으로 10년 안에 진사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고 하지 말아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부지런히 공부에 힘써라."
아버지의 훈계를 가슴 깊이 새긴 최치원은 남이 백을 할 때 자신은 천을 하는 노력 끝에 당나라에 온 지 6년 만에 진사시험에 합격한다. 그의 나이 18세 때였다.
당나라의 진사시는 3년에 한 번 치르는 식년시가 원칙으로 선발 인원은 30명에 불과했다.
당시 당나라는 대외적으로 개방정책을 펴서 신라와 발해를 비롯해 멀리 사라센제국과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의 인재들을 받아들였다. 외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은 당나라의 국립교육기관인 국자감에 입학해 공부했다. 여기에서 일정 기간 수업을 받으면 중국인과 동등하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이러한 자격을 획득한 외국 유학생을 일러 빈공이라 했다.
최치원은 바로 이 빈공 자격으로 진사시에 응시해 단번에 합격하게 된다.
당나라의 과거에 합격하면 외국인이라도 당의 관리로 임용될 수 있었다. 최치원은 20세에 남경 근처에 있는 율수현위로 임명되어 당나라의 관리생활을 시작했다. 관리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글도 짓고, 이 고장의 명사들과 교류했다.
1년간 말단 관리로 근무한 최치원은 관직을 사임하고 대과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장안 근처의 종남산에 들어갔다. 그런데 당나라 전역에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대과가 그만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그는 양주에 있는 회남절도사 고변의 막부에서 다시 관리생활을 해야 했다.
당나라 정국은 날이 갈수록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대규모 농민군을 결집한 반란군 지도자 황소는 황제를 자칭하며 장안까지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당나라 황제 희종은 서촉 지역으로 피난을 떠났고, 회남절도사 고변을 병마도통에 임명했다. 병마도통은 병권을 손에 쥐고, 반란군을 진압하는 총사령관이다. 이렇게 막강한 자리에 오른 고변은 조정에 표문을 올리고, 자신을 대신해 백성들을 안심시키면서 적의 사기를 꺾는 글을 작성하는 문사가 필요했다.
그 적임자로 최치원이 선택되었다. 최치원은 문장력으로 이미 문인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했고, 높은 신망을 받고 있었다. 고변은 최치원을 도통순관에 임명했다. 도통순관은 도통을 보좌하는 최측근으로 종6품에 해당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881년 7월, 최치원은 후세에 길이 남을 명문장을 작성했다. 그 글은 황소의 투항을 권유하는 격문 〈격황소서〉이다.
황소가 이 글을 읽다가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질만큼 〈격황소서〉는 당시 파란을 일으켰다. 이 글로 인해 최치원의 명성은 당나라 전역에 울려 퍼졌다.
최치원은 고변 막부에 있으면서 자신이 썼던 만여 편의 글 중에서 정화만을 골라 《계원필경집》을 엮었다. 전쟁터의 막사에 거주하며 문장가들이 모인 계원에서 글 쓰는 일로 먹고 살았다고 하여 책의 이름을 《계원필경집》이라 했다.
한편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신라의 헌강왕은 최치원의 귀국을 강력히 원하고 있었다.
최치원의 귀국을 종용하기 위해 신라에서 사신이 왔다. 사촌 동생 최서원도 함께 와서 집안 소식을 전했다. 최치원은 그 동안 잊고 지냈던 고향의 부모님 생각에 신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렇지만 신라로 돌아갔을 때 자신의 포부를 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고심을 거듭한 최치원은 결국 신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도교에 빠진 고변이 병마도통에서 해임되어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당나라 황제에게 사직원을 올렸다. 당나라 희종은 그의 사직을 허락하고, 황제의 사신자격으로 신라에 귀국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885년 3월, 최치원은 드디어 신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29세 때로 신라를 떠난 지 16년 만이었다.
최치원이 귀국하자 헌강왕은 그에게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 직을 제수했다. 외교문서와 왕의 조서를 작성하고, 왕명을 받아 글을 짓는 일과 군사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직책이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공부하며 배운 지식과 관리생활을 하며 겪은 견문을 바탕으로 신라에서 자신의 포부를 펴고자 했다. 헌강왕은 이런 그를 높이 평가하여 중용했지만 그가 귀국한 지 1년 만에 세상을 뜨고 만다.
헌강왕이 세상을 떠나자 최치원이 하고자 하는 일은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쳐 번번이 좌절되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왕명을 받아 글을 짓는 일이 전부였다.
중앙에서 자신의 포부를 펼 수 없다고 생각한 최치원은 외직을 자청했다. 조정에서는 사사건건 귀족들이 반대해 어떤 일도 할 수 없었지만, 지방관으로 나가면 자신의 뜻대로 백성을 다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첫 외직으로 서울인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태산에까지 오게 되었다.
유별난 최치원 사랑
옥구에는 최치원을 배향한 서원과 사당이 유난히 많다. 이는 최치원이 이곳 출생이라는 이 지역 사람들의 믿음과 관련이 깊다.
특이한 것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 훼철되었던 삼현사를 1900년에 단을 쌓고 위패를 봉안했다는 점이다. 이때는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나고 없었지만 엄연히 고종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훼철된 사당의 복설은 생각하기 힘든 시기였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는 염의서원을 다시 세웠고, 1929년에 옥구향교 바로 옆에 옥산원을 창건했다.
세 곳 모두 최치원을 주벽으로 향사하는 곳이다. 이처럼 국난의 시대에 최치원의 사당을 세운 것은 옥구에서 최치원은 이곳 사람들의 힘을 한 곳으로 모으는 옥구의 영원한 레전드이자 꿈과 희망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다.
1969년에는 문창서원을 건립했다. 이 서원은 옥구에서 출생한 최치원의 단독 사당이 없는 것을 수치로 여긴 이 고장의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창건했다. 서원 안에는 최치원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서원 앞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쓴 친필 현판이 걸려 있다.
그런데 옥구사람들은 왜 최치원이 이곳 출신이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믿음의 중심에 이곳에 전해 오는 최치원의 탄생설화와 최치원이 어릴 때 책을 읽던 유적 자천대가 있다.
최치원의 탄생설화는 옥구 앞바다에 있는 선유도와 내초도에 전해온다.
이러한 설화가 내려오는 내초도에는 최치원이 태어났다는 금돈시굴이 있었다. 금돈시굴은 금돼지가 시작된 굴이라는 뜻이다.
설화는 신이한 이야기를 빌어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금돼지로 비유된 최치원의 어머니는 아마도 이 지역 옥구 출신의 여성이 아닌가싶다. 그것도 그냥 돼지가 아니라 금돼지이기에 호족의 딸일 가능성이 크다.
자천대에 얽힌 이야기도 금돈시굴의 설화와 일맥상통한다.
《동국여지승람》은 1481년(성종 12)에 관에서 편찬한 지리지이다. 여기에 자천대에 서려있는 최치원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고장에 전해 내려오는 최치원 설화는 어제 오늘 생긴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천대는 풍광이 수려하기도 했지만 예로부터 최치원을 그리워하는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들이 왔을 때 쉴 수 있는 그늘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에 자천대 바위 위에 정자를 건립했다. 그리고 이 정자의 이름을 바위의 이름과 같이 자천대라 했다.
이 정자는 현재 옥구향교 안에 있다. 자천대에 군사비행장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중국 본토 공격을 위한 전초기지로 자천대가 있는 선연리 일대 바닷가를 군사기지로 강제 수용해 일본 육군의 전투기비행장을 건설했다. 아름다운 자천대 바위는 깨어져 비행기 활주로가 되었다. 그 옆에 서 있던 정자는 어쩔 수 없이 옥구향교 안으로 이전했고, 지금까지 자천대란 현판을 쓸쓸히 달고 서 있다.
목차
목차
1.난새가 날아들다 013
고현내/ 성황산/
고운 최치원/ 태산에 온 뜻/
생사당/ 불우헌 정극인/ 옛사람 풍류
2.태산에 깃들다 057
태산사/ 송세림/ 왕도정치를 꿈꾸며/
무성서원/ 낙안향교의 통문/
영정을 뫼시다/ 타령지소/
무성서원의 위기/ 병오창의/
꼿꼿한 선비정신/ 석지 채용신
3.잃어버린 영정을 찾아서 109
시산 김환재/ 옛 영정을 보존한 것은/
사라진 영정에 대한 기록/ 한 장의 신문 스크랩/
1831년 개모본 영정/ 사라진 쌍계사본 영정
4.쌍계사의 기적 137
진감선사비/ 최치원과 쌍계사/
인연의 끈/ 다시 인연의 끈을 잇다/
영정을 덧칠하다/ 인연이 이어져온 것은
5.최치원을 그리워하다 165
해인사/ 해인사의 최치원 초상/
해인사본 최치원 초상화/ 최치원 영정의 뿌리/
사당을 뫼신 것은/ 유별난 최치원 사랑
맺는 글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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