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일기
1829년 심양에 문안사로 가다
『심사일기』는 1829년 4월 20일 심양문안사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때부터 동년 10월 24일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기록이다. 여기에는 98일간 심양문안사로 갔던 견문들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Couldn't load pickup availability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조선 후기 대청 사행은 정례적인 일이었다. 때로는 사행에 나섰다가 죽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낯선 사행의 행로는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박래겸의 기록에도 1829년에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파견되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유관참楡關站에서 객사한 여동식呂東植(1774∼1829)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든 고행의 길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큼 흥미로운 볼거리와 체험들이 가득 했다.
《심사일기》는 1829년 4월 20일 심양문안사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때부터 동년 10월 24일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여정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98일간 심양문안사로 갔던 견문들이 매우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심양瀋陽은 북경 못지않게 중요한 공간이다. 연행사燕行使 간에는 심양에 가는 것을 북경으로 가는 것보다 폄하했던 심리가 있기는 했지만 심양은 삼학사와 소현세자, 봉림대군으로 상징되는 병자호란의 상흔을 간직한 곳이며, 청나라의 유서 깊은 많은 건물들이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심양의 이국적인 풍경이나 풍속은 그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를테면 태평거太平車, 창녀, 바둑, 전족纏足, 상례喪禮, 원숭이 재주 등은 외지인外地人에게는 낯선 풍속들이었다. 그뿐 아니라 삼의사三義祠, 광자사廣慈寺 삼의묘三義廟, 심양황궁瀋陽皇宮, 태학太學 등의 장소들을 꼼꼼히 탐방한 후 기록을 남겼다.
연행사와 일기, 그리고 박래겸과 《심사일기》
중국에 파견되는 사절使節은 크게 정기적인 경우와 비정기적인 경우로 나뉜다. 동지사冬至使, 정조사正朝使, 성절사聖節使, 천추사千秋使 등이 전자에 해당되며, 사은사謝恩使, 주청사奏請使, 진하사進賀使, 진위사陳慰使, 진향사進香使, 문안사問安使, 변무사辯誣使, 진헌사進獻使, 고부사告訃使 등은 후자에 해당한다.
그중 심양문안사瀋陽問安使는 청淸나라 황제가 심양에 왔을 때 황제의 안부를 알기 위해 보냈다. 1829년 4월 29일에 이상황李相璜이 정사正使에, 박래겸이 서장관에 각각 임명되어 7월 16일에 출발했다. 사행 인원은 모두 181명, 말은 124필이었으며, 출발한 날로부터 98일, 압록강을 넘어 도로 강을 건너오기까지 46일이 걸렸으며, 여정은 모두 3370리였다.
이 글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7월 16일 출발하여 8월 29일 심양에 도착하기까지의 상행上行 과정, 8월 30일부터 9월 30일까지의 공식적인 체류 일정, 10월 1일 심양을 출발하여 10월 24일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하행下行 과정이다.
박래겸은 1829년 영의정 이상황李相璜이 심양정사審陽正使로 갈 때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수행했고, 1833년 조봉진曺鳳振이 북경에 동지정사冬至正使로 갈 때 부사로 임명되어 수행했다. 이후 그는 43살에 평안남도 암행어사의 체험을 담은 《서수일기西繡日記》, 48살에 함경도 북평사北評使 때의 공무를 기록한 《북막일기北幕日記》, 50살에 서장관으로 심양瀋陽을 다녀온 견문을 담은 《심사일기瀋使日記》 등 3권의 일기를 남겼다.
심사일기에는 다양한 연행사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먼저 심양의 이국적인 풍경이나 풍속은 그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또, 앞서 다녀온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현지인을 추천하기도 하고, 현지인들이 자신의 지인을 소개하기도 했다. 끝으로 황제와의 접견과 대면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다양한 볼거리,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다
이국의 풍속과 풍물은 그들의 이목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태평거太平車라는 수레의 제작과 운용 방식에 대한 칭찬(8월 23일), 장사꾼에게 몸을 파는 창녀들의 모습(8월 27일), 원숭이의 재주(8월 28일), 바둑 두는 방식(9월 5일)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 호환虎患의 피해가 적지 않았던지 8월 19일과 8월 25일 두 차례에 걸쳐 그것에 대한 방비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심양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삼학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에 대해서는 간략한 사실 확인만을 했고(8월 29일), 삼학사의 순절한 장소를 보고는 비분강개한 마음을 표현했다(9월 10일). 심양은 이렇게 병자호란의 상흔을 그대로 담은 장소일 뿐만 아니라 청나라의 유서 깊은 장소들이 많았다. 삼의사三義祠, 광자사廣慈寺 삼의묘三義廟, 심양황궁瀋陽皇宮, 태학太學, 심양서원瀋陽書院, 실승사實勝寺, 만수사萬壽寺, 영안교永安橋, 마도교摩刀橋 등인데, 박래겸은 이 장소들을 찾아 적지 않은 기록을 남겼다.
조카 구하龜夏가 뒤떨어져 있다가 쫓아와서 말하기를 "모퉁이 하나를 돌자, 음악 소리가 들려서 그 집에 들어가니 곧 상갓집이었습니다"라고 했다. 지금 조문을 받고 있는데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니 매우 놀라웠다. 잠시 동안 우두커니 서 있자니, 호상護喪 하는 사람이 나와서 글을 써서 보이기를 "여기에서 무엇을 보고 있으시오?"라고 하기에, 글로 써서 "나는 외국 사람인데 마침 성시城市를 유람하다가 문 앞에서 음악 연주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소. 여기 와서 머물러서 잠시 귀한 집의 고취 소리를 들으니 무슨 까닭인지 알 수가 없소"라고 대답하니, 호상하는 사람이 글을 써서 "이곳은 상사喪事가 있게 되면 다들 이처럼 처리합니다"라고 답했으며, 또 써서 "이것은 무슨 예禮와 관계가 됩니까?"라고 하니, 글로 "이것은 상사를 당했을 때의 음악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음악을 연주하여 시신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송宋나라 때부터 이미 더러 있었으니 지금 사람을 책망할 것이 무엇인가. 부모의 상을 당한 사람을 길에서 만났는데 윗도리는 소복素服을 입었으나 모자와 바지와 신발은 모두 평소대로 하였으며 여자는 다만 꽃 비녀를 꽂지 않았을 따름이었는데 한 달로 한 해를 대신하여 석 달 만에 복을 벗는다고 했다.
9월 3일의 기록이다. 이색적인 상갓집의 풍경을 목도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곡이 울려야 할 상갓집에 음악이 울리는 것에 매우 놀란다. 게다가 윗도리만 소복을 입고 모자와 바지는 평소 복장대로 하며, 여자들은 꽃 비녀를 꽂는 것을 피할 정도이니 격식의 엄숙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 간략한 상복도 석 달만을 입는다 하니 상례喪禮가 엄정한 조선 사인士人이 쉽게 수긍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10월 2일에도 일반 서민의 상여가 나가는 장면을 기록하면서 역시 악기가 연주되는 모습을 빼놓지 않았다. 또, 관 위에 수탉을 놓아 혼을 부르는 등의 상세한 과정을 제시한다.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관내정사關內程史〉에도 상가喪家에서 풍악도 잡히고 투전판도 벌어지는 이색적인 상례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예송禮訟 논쟁으로 당쟁에 휘말리기도 했던 조선 사람에게 다른 어떠한 관혼상제의 풍습보다 개방적인 상례喪禮는 무엇보다 큰 문화적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현지인과 국적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다
연행燕行에서 가장 기대되는 것 중에 하나는 역시 현지인들과의 만남이다. 공적인 만남에서 가질 수 없는 예기치 않는 사건들이 그들을 흥분시키고 고양시켰다. 체류 일정 내내 상대방의 처소나 집을 방문하면서 지인들을 연이어 소개하기도 하고, 또 앞서 연행을 했던 사람들이 특정 중국인을 만나 보라는 조언을 했을 경우 실행에 옮기기도 한다. 그들은 필담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고 시와 선물을 끊임없이 주고받았다.
그러한 만남의 중심에는 무공은이 있었다. 무공은繆公恩은 자는 입장立莊이고 호는 매해??이며, 별호는 난고蘭皐이다. 글씨와 시문에 재능이 있었고, 전각 솜씨가 뛰어났으며 난초 그림이 훌륭했다. 무공은은 조선 사람들과 상당한 친교가 있던 인물이었다.
무공은은 가장 처음 그리고 가장 빈번히 만난 인물이다. 무공은 부자 모두 관직이 조교助敎였기에 조선 사신의 관반이 되어 사신들을 접대 하느라 매일같이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만남은 그가 중국 땅을 떠나는 날까지 지속된다. 무공은은 아들인 무도기繆圖箕와 손자인 무경문繆景文, 무경창繆景昌 조카 무연규繆聯奎, 사위 유서신劉書紳 등을 소개했다.
사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예부에 소속된 관리들과 만나고 있다. 문안사를 상대하는 주무부서가 예부이기 때문이다. 그의 기록에 나오는 예부시랑 개음포凱音布, 예부낭중 복극정아福克精阿 등도 그러하다.
무공은 다음으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진량陳亮인데, 호남湖南 장사長沙 사람으로 호는 유루庾樓이다. 진량은 무공은, 팽조체彭兆? 등과 서로 친분이 있던 사이였다. 9월 5일에는 진량이 아들 진홍경陳洪京과 진홍관陳洪寬을 데리고 함께 내방하기도 했다. 9월 9일에는 박래겸이 무료함을 견디지 못해 진량을 찾아 나섰다가 마침 외출 중인 탓에 허탕을 치고 돌아오기도 했다.
장다사환張多賜歡이 나에게 한번 그 집을 방문해 주기를 간청하기에 수행하는 사람들 여러 명을 데리고 찾아 갔다. 이중문과 겹벽이었는데 수를 놓은 문과 조각을 한 담장은 아주 호사스러웠고, 방안으로 들어가자 서화書畵와 궤안?案이 모두 눈을 어지럽게 할 만하였으니, 부잣집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장다사환의 아버지가 나와서 보았는데 그 사람됨이 꽤나 뛰어났다. "무과武科로 진출해서 일찍이 한군협령漢軍協領과 팔문제독八門提督이라는 삼품직三品職을 지냈으며, 금년에 회갑回甲의 나이로 은퇴하여 쉬고 있다"고 이르렀다. 차를 다 마시고 나서 일어났다.
진경선陳敬宣(진삼덕)이 한번 방문해 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기 때문에 수행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갔다. 집이 웅장하고 화려하였으며, 물건이 호사스러워 사람의 눈을 아찔하게 하였으니 또 장생(여기서는 장다사환을 가리킴)에게 빗댈 정도가 아니었다. 잠시 뒤에 술을 내왔는데, 좋은 안주와 맛난 음식이 앞에 펼쳐져서, 점심 식사 때까지 이어졌는데, 모두 우리나라에서는 못 보던 것들이었으며, 뒤이어 집안을 두루 구경하였는데, 후원後園에 이르자 진생陳生이 글로 써서 보이기를 "내실內室은 외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들도 중국 사람이니 이제 선생에게 친척에게 보이듯이 합니다"라고 하였다. 대개 진생陳生의 선조先祖는 명明나라 조정에서 현달하였고, 청淸나라 조정이 들어선 뒤에도 여러 대 동안 벼슬이 끊어지지 않았다. "진생은 문직文職으로 진출하여 곧 빈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데, 아직 벼슬을 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 사람됨이 꽤나 뛰어나서, 술이 취한 뒤에 고담高談하기를 마치 옆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했다. 우리나라 사람의 의관衣冠을 보고서 매우 선망하는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문장에 대한 지식이 조금 짧은 것이 애석했다.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진금陳錦이었고 꽤나 준수해서 사랑스러웠다.
첫 번째 글은 9월 6일의 기록이다. 9월 1일의 기록을 참고하면 박래겸은 장다사환張多賜歡이란 사람을 문장이나 글씨가 모두 뛰어났던 인물로 평가한 바 있다. 장다사환의 방문해 달라는 거듭된 요청에 자신의 일행 몇 명과 함께 방문하여 은퇴한 장다사환의 아버지까지 만나고 돌아온다. 두 번째 글은 9월 8일의 기록이다. 이날 역시 일행들과 함께 진삼덕陳三德의 집을 내방했는데, 장다사환의 집보다 오히려 더 부유했다. 술과 진귀한 음식들을 대접하고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는 내실內室까지 보여주는 후의厚意를 보인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문장에 대한 식견이 짧은 것이 애석하다고 박한 평가를 내린다. 박래겸은 특별히 한인漢人과 만주인의 구분을 두지 않고서 교유를 했다.
연행사, 황제를 친견하다
박래겸은 8월 30일부터 9월 30일 까지 공식적인 체류 일정을 가졌다. 예부禮部와 긴밀히 협조하면서 황제와의 접견을 준비하고,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예부의 전갈을 통해 전달했다. 황제의 모습, 행차 모습, 다양한 공식 행사 등의 상세한 기록은 한중 문화 교류사에 있어서 상당히 의미 있는 내용임에 틀림없다.
9월 11일에 처음 황제의 행렬을 목격했는데 의외로 소박한 행렬과 경호 모습에 놀랐다. 깃발이나 북, 무기가 없어서 긴급한 상황이 발생할 때에 대처 능력이 떨어질까 의심스러워했다. 예부시랑이 황제에게 조선 사신을 소개했으나 특별한 말을 전하지는 않고 고개만 끄덕이고 지나갔다. 황제가 지나는 곳에 묵을 만한 곳이 있더라도 거기에서 유숙하지 않고 영반營盤이란 이름의 천막에서 거처했다. 오시午時에 시작하여 신시申時가 되어야 끝이 났는데 관례적으로 황제가 낙차絡茶를 하사했으나 이번에는 하사하지 않아서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9월 13일에는 예부의 전갈로 어가가 23일에 심양에 당도하게 되니, 실승사實勝寺 앞에서 지영祗迎하라고 알려준다. 9월 17일에 정사와 여러 정관正官들과 함께 연예演禮에 참가하였다. 연예는 황제를 알현하기 전에 예법을 익히는 것을 말한다. 보통 한 차례 하기도 하지만 여러 차례 하는 경우도 있다.
9월 23일에는 두 번째 지영祗迎이 있었다. 이날에는 마침 비가 내렸다. 그럼에도 지영하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이 많이 나왔다. 첫 번째 있었던 황제의 행렬보다 더 화려하였다. 황제가 앉아 있는 곳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지나갔는데,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9월 24일에는 황제가 경우궁景祐宮과 문묘文廟에 배알을 하고, 극근친왕克勤親王의 묘소에 제사를 올리고 환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9월 25일에는 황제가 오운제烏雲祭를 지냈단 소식을 들었다. 오운제라는 이름의 제사를 올리는 절차에 대해서 상세히 적고 있다. 이 부분은 다른 문헌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으니 매우 소중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황제가 올리는 제사로 신에게 올리는 제사(9월 25일), 환원제還願祭(9월 28일) 등도 소개했다. 9월 27일에는 황제가 태평사太平寺, 법륜사法輪寺, 지단地壇, 비영동蜚英東의 사당을 참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황제가 대정전大政殿에 납시어서 연회를 행한다 들었는데 이어서 예부의 통고로 오고五鼓에 상사上使와 함께 여러 정관正官을 거느리고 가서, 동화문東華門 밖에서 기다렸다가 날이 밝은 뒤에 통역관[通官]이 사신使臣 과 세 명의 통역관을 이끌고 궁궐의 뜰로 들어갔다. 여러 정관正官들은 모두 들어갈 수가 없었으며, 저 나라의 사람들도 관직이 있는 사람 밖에는 또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왕공王公 이하 문무백관이 각각 반열班列에 따라 늘어서 있었다. 긴 탁자는 전에 이미 차려 놓았는데 두 사람이 하나의 탁자를 함께 하였고 매 탁자마다 40개의 그릇이 있었으나, 사신들에게는 각자 탁자를 주었다. 조금 뒤에 문밖에서 음악 소리가 나더니 황제가 해와 달을 수놓은 옷차림으로, 가마를 타고 들어왔는데, 앞에는 여러 쌍의 의장대와 5∼6쌍의 배위하는 자가 있었고, 뒤에 배위한 자는 수십 명뿐이었다. 전殿으로 올라간 뒤에 문밖에서 음악이 그쳤고, 음식이 나오자 음악이 시작되었으며, 모두 9잔을 마시고 나서 그쳤다. 예부시랑이 상사와 나를 이끌고서 단지丹?의 아래에 서 있다가 조금 뒤에 전殿 위로 데리고 들어가서 곧바로 어탑御榻 앞의 약간 동쪽에 앉게 했는데 황제가 친히 두 잔의 술을 따라서 나누어 먹였으므로 상사와 내가 꿇어앉아 술을 다 마시고나서 고두叩頭를 하고 물러나서 보니 전 안에 왕공과 탁자를 마주하고 있는 자들이 30~40명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다른 위엄 있는 행동은 없었고, 황제가 앉는 자리에도 다만 의자 하나뿐이었다. 등 뒤에는 하나의 해서楷書로 쓴 병풍이 펼쳐져 있었으며, 전 안에 있는 두 기둥에는 각각 금빛 글씨로 된 주련을 붙여 놓고 있었다. 우리들이 반차班次에서 물러나 앉았다가, 조금 뒤에 여러 신하들이 차례대로 일어나 춤을 추었다. 음악 소리는 현악기나 관악기 소리는 아니었으니 유기柳器를 긁는 소리와 같았다. 춤이 다 끝나자 씨름 놀이를 했는데, 두 사람이 씨름을 하다가 마치면, 두 사람이 또 나오기를 십여 번이나 했다. 이긴 자가 물러나서 뜰아래에 엎드리면 술을 먹여 주었고 놀이가 다 끝나자 몽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현악기와 관악기였는데 악장樂章은 글을 읽는 소리와 같았다. 잠시 뒤에 음식상이 물러나고 가마가 나오니 황제가 뜰에서 내려와 가마를 탔는데 오르고 내릴 때에는 한 사람도 부축해서 껴안은 사람이 없었다. 문밖에서는 또 음악을 연주하였으며 황제가 환궁還宮한 뒤에는 음악이 그쳤다.
9월 28일 기록이다. 황제가 대정전에서 연회를 한다는 전갈을 받고 상사上使와 여러 정관正官들과 갔으나, 정관들은 들어갈 수 없었다. 음악이 울리자 여러 명의 호위를 받고 들어섰다. 예부시랑이 상사와 박래겸을 황제에게 데려가자 직접 두 잔의 술을 따라주었다.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씨름 놀이를 연거푸 하고 음악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실제 황제와의 친견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9월 30일 황제가 환궁還宮했다가 다음달 24일에 환도還都한다는 소식을 듣고 황제를 보려고 나갔다. 황제는 사신 일행이 앉아 있는 곳에 도착해서 한참을 살펴보다가 지나갔다. 이것이 황제와 만나는 마지막 장면이다. 10월 1일 조칙을 받으며 모든 공식 일정이 종료된다.
이처럼 《심사일기》에는 사신들의 공식 행사와 황제와의 친견 모습이 자세히 나온다. 황제를 호위하는 사람들이 진을 치는 모습, 황제가 영반에 드는 모습, 밤에 횃불을 절대로 켜지 않고 이동하는 모습, 황제와 황후의 거둥 모습 등이 그것이다. 또, 사신들이 참여하는 연예演禮, 참연연예參宴演禮 등 공식적인 행사와, 청나라 황제의 제천의식 즉, 오운제와 환원제 등이 상세하게 그려졌다. 그러나 황제와 친견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하고 의례적으로 끝났다. 수많은 인원과 물품이 소모되며 힘겹게 치러지는 행사지만 특별한 접견조차 허락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목차
목차
박래겸
1829년 기축년 4월 20일 비변사에서 심양 문안사의 차출을 건의하다
5월 06일 겸집의에 임명되다
7월 13일 의정부에서 방물을 봉과할 때 나아가다
7월 16일 상감께 하직 인사를 올리다
7월 17일 죽은 아내의 무덤에 들르다
7월 18일 심상규沈象奎의 집을 방문하다
7월 19일 유수와 함께 꽃을 감상하다
7월 20일 첫 번째 편지를 부치다
7월 21일 첫 번째 답신을 받다
7월 22일 봉산에 도착하다
7월 23일 황강에 도착하다
7월 24일 유람선을 타고 놀다
7월 25일 중화에 도착하다
7월 26일 첩에게 낳은 아이를 만나다
7월 27일 여러 사람들과 사대를 행하다
7월 28일 인현서원에 배알하다
7월 29일 비바람 때문에 부벽루에 가지 못하다
8월 01일 여러 사람에게 노자를 받다
8월 02일 숙천에서 묵다
8월 03일 부사 여동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다
8월 04일 향일헌에 올라갔다
8월 05일 백상루에서 잔치를 열다
8월 06일 정주에서 묵었다
8월 07일 상사 어른과 함께 모이다
8월 08일 상사와 의검정에서 놀았다
8월 09일 여러 고을 수령에게서 노자를 받았다
8월 10일 부사 여동식의 관棺과 만나다
8월 11일 표류객과 만나다
8월 12일 통군정에 오르다
8월 13일 취승정에 올랐다
8월 14일 시험 문제를 내고 채점하다
8월 15일 청지기를 집으로 돌려보내다
8월 16일 아홉 번째 편지를 부쳤다
8월 17일 고을수령과 함께 복물을 검사하였다
8월 18일 기녀들의 기예를 보다
8월 19일 압록강을 건너다
8월 20일 책문의 여러 가지 풍경
8월 21일 관제묘에 가다
8월 22일 산동의 큰 장사치 이야기
8월 23일 봉황성 구경
8월 24일 진흙길에 고생하다
8월 25일 청심환을 구하는 사람을 만나다
8월 26일 낭자산에서 묵다
8월 27일 요동성을 두루 보다
8월 28일 진흙탕 때문에 곤욕을 치르다
8월 29일 광자사를 구경하다
8월 30일 궁궐을 구경하다
9월 01일 일식日食을 보다
9월 02일 비바람 때문에 머물러 있다
9월 03일 이상한 장례 행렬을 보다
9월 04일 무공은의 아들들을 만나다
9월 05일 여러 중국 인사들과 만나다
9월 06일 당자堂子를 구경하다
9월 07일 여러 사람들을 만나다
9월 08일 진삼덕의 집에 방문하다
9월 09일 명절을 맞아 마음이 무거웠다
9월 10일 실승사와 만수사를 구경하다
9월 11일 황제의 일행을 만나다
9월 12일 적벽부 이야기를 나누다
9월 13일 무공은 부자와 온종일 필담하다
9월 15일 무공은과 그의 사위와 온종일 필담하다
9월 16일 진삼덕陳三德이 아들을 데리고 오다
9월 17일 진귀한 선물을 받다
9월 18일 중국의 풍속에 대해 이야기하다
9월 19일 온종일 정신없이 자다
9월 20일 중국 사람들과 술자리를 갖다
9월 21일 무공은 책을 나누어 보다
9월 22일 무료한 하루를 보내다
9월 23일 황제 일행과 마주치다
9월 24일 편지를 받지 못해 울적해하다
9월 25일 황제를 친견하다
9월 26일 대정전 뜰에 나가다
9월 27일 유승겸, 무공은, 유서신을 만나다
9월 28일 황제가 연회를 열다
9월 29일 유서신에게 선물을 받다
9월 30일 황제 일행과 마주치다
10월 01일 드디어 조칙을 받아 길을 떠나다
10월 02일 장례 행렬을 만나다
10월 03일 낭자산娘子山에서 자다
10월 04일 청석령과 회령령을 넘다
10월 05일 황가장黃家庄에서 유숙하다
10월 06일 책문柵門에 도착하다
10월 07일 탕자성湯子城의 석회를 가져오다
10월 08일 드디어 의주에 도착하다
10월 09일 양책良策에 도착하다
10월 10일 순제旬題에서 합격한 사람들과 만나다
10월 11일 정주定州에 도착하다
10월 11일 청천강淸川江을 건너다
10월 11일 비가 내려서 머물러 있다
10월 11일 순안順安에 도착하다
10월 11일 평양平壤에 도착하다
10월 11일 좌의정의 별세 소식을 듣다
10월 11일 연광정練光亭에 오르다
10월 11일 봉산鳳山에서 자다
10월 11일 서흥부瑞興府에 도착하다
10월 11일 평산平山에 도착하다
10월 11일 개성開城에 도착하다
10월 11일 파주坡州에서 자다
10월 11일 고양高陽에서 자다
10월 11일 상감을 뵙다
계본啓本
듣고 본 일들[聞見事件]
조서를 반포한다[頒詔]
부록
해제_심래겸의 《심사일기瀋使日記》
찾아보기
저자
저자
그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43살에 평안남도 암행어사의 체험을 담은 《서수일기西繡日記》, 48살에 함경도 북평사北評使 때의 공무를 기록한 《북막일기北幕日記》, 50살에 서장관으로 심양瀋陽을 다녀온 견문을 담은 《심사일기瀋使日記》 등 3권의 일기를 남겼다.
1833년 예조참판參判參判으로 있을 때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임명되어 두 번째 연행燕行을 다녀왔다. 1837년부터 1840년까지 여러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신병身病을 핑계로 사직辭職했다.
저서로는 《탑서유고초塔西遺稿抄》, 《만오유고晩悟遺稿》 등이 있다.
Your payment information is processed securely. We do not store credit card details nor have access to your credit card informat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