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리(지혜사랑 218)
안지순 시집
안지순 시집 『어우리』는 크게 4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의총리 가는 길〉, 〈동동주〉, 〈강江〉, 〈열꽃〉, 〈흥부의 외출〉 등 주옥같은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Couldn't load pickup availability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봇짐 이고 걸어가는 할머니 뒤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철쭉이 따라가고/ 펄렁이는 옷깃에/ 청보리 물결치는 의총리//그만큼 떨어져서/조팝꽃 조르르 몰려들고/ 그만큼 떨어져서/ 진달래 꽃무덤 묻어가고// 십리장등 빛 따라/ 바람 같은 걸음 따라/묻어놓은 서러움도/ 몸 풀고 쉬어 가는 길// 그리움도 무더기 꽃무더기/ 양팔 벌려 모여드는 의총리/ 사람도 그만큼만 그리워해라/ 가만가만 꽃처럼 피고 지어라
- 「의총리 가는 길」전문
안지순 시인의 시가 거의 그렇듯이 첫 1부도 '어머니, 큰어머니, 고모, 당숙, 식구들' 등의 인정이 넘치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구수한 인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객관적 거리를 두어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 「의총리 가는 길」이다. 의총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싸우다 산화한 칠백여명의 커다한 무덤이다. 보통의 경우는 격앙된 어조로 웅변이 나올 법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속의 깊은 정을 '봇짐 이고 걸어가는 할머니'의 정경으로 풀어가고 있는 것이다. 고단하게 사는 서민의 삶을 압축하는 '봇짐 진 할머니'는 우리 '조선'의 상징이다. 그 '할머니'의 뒤를 '앞서거니 뒤서거니'에 '철쭉'이 따라간다. 철쭉은 살아남은 민초의 상관물이다. 펄렁이는 옷깃은 그런 접근을 뒷받침 한다. 그 다음에 오는 '청보리', 곧 백성의 물결과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그 다음 연의 '조팝꽃'이 '조르르 몰려들고' '진달래'의 '꽃무덤'이 더불어 묻어가는 심상을 통해 '의총'의 처절한 정신을 은근히 드러내 준다. 되풀이 되는 '그만큼 떨어져서'의 간헐적 반복은 예사롭지 않다. 높은 뜻을 받들어 이어가지만 감히 저기 묻힌 선열은 따를 수 없어 마음만으로 변치 않고 따른다는 뜻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셋째 연의 '십리장등'은 시인의 각주에 따르면 의총이 있는 마을의 산등성이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마을에서 십리쯤 가는 산등성이로 생각되는데, 장수를 비는 장명등의 그것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뒤에 붙은 '빛 따라'가 그런 생각을 뒷받침 해 준다. 그 의로운 '빛'을 따라 바람 같은 걸음으로 가노라면 무덤 속의 서러움도 잠시 몸을 풀고 쉰다. 이것은 봇짐 머리에 인 우리 조국의 운명에 닿아 있다.
끝 연은 영탄조로 그러나 그것을 감추고 가만히 기원한다. '꽃무더기'의 칠백 애국지사-'꽃무더기'(꽃무덤), 생전의 힘찬 만세 부르듯 두 팔 높이 들고 모여든다. '가만가만' 꽃처럼 피고지라는 염원에 이 시는 머문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지만 그만큼 감동을 주는 시다. 이 시인의 건강한 시정신과 그것을 형상화 하는 시적 기량의 성숙을 보여준다.
큰 나무 아래 허공에 떠 있는 벌레가 있다/ 보일 듯 말 듯 가는 줄에 매달려/ 온 몸으로 발버둥 쳐도/ 한 뼘도 오르지 못하는 벌레 한 마리/ 장난기 돋친 손가락으로/ 가느다란 줄을 흔들어 본다/ 끊어질 듯 힘없이 흔들리는 줄// 밥줄을 흔드는 손이 있다/ 높은 곳에 앉아/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그들이/ 자본이라는 마법을 걸어/ 손가락 하나로 가볍게 흔드는 줄/
그 줄에 온몸으로 매달려/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다/ 손가락 하나만 가볍게 누르면/ 툭 끊어지는 줄에 내가 매달려 있다.
- 「줄 1」전문
2부는 주로 기계화 되고 자본화가 된 빈부의 양극을 형상화한 시편이 주종을 이룬다. 구두수선공, 수몰 지역 주민, 종이 줍는 할머니, 혼자 사는 아저씨, 치매 앓은 할머니, 청소부 아줌마, 맞벌이 부부 등등이 그렇다. 시인의 의롭고 따듯한 시선이 잘 드러난다.
이 속에서 고른 「줄ㆍ1」은 뭐 뛰어난 시라 하기에는 좀 그렇다. 그러나 거미줄에 매달린 벌레에서 자아를 발견하는 그 성찰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 시는 딱 두 연으로 되어 있다. 앞 연은 거미줄에 매달린 벌레, 뒤 연은 밥줄을 흔드는 줄로 바뀐다.
'큰 나무 아래 허공에 떠 있는 벌레', 단순하다면 단순한 이 시의 출발을 보여주는 대목은 범상하지 않다. '큰 나무'는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그 나무 아래 왜 '허공'이 있는 걸까? 어쩌면 '큰 나무'는 우주의 크낙한 질서일까 아니면 힘을 가진 존재일까 그 위에 있어야 할 '허공'이 그 아래에 있는 걸 보면 뒤의 것 같기도 하다. '허공'은 글자 그대로 빈 하늘이다. 무슨 도교의 세계나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지레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그와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나약한 벌레가 누군가의 밥이 되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 시인이 궁극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줄'에 있다. 그 줄에 벌레도 사람도 매어 있다는 것이다. 끊어질 듯 힘없이 흔들리는 줄이지만 약자 중의 약자 '벌레'의 생사를 쥐고 있다.
뒤 연은 선언경 후언지先言景 後言志의 후언지에 해당한다. 앞에 것이 '벌레'라면 그 연장선상에 사람이 있다. 밥줄을 쥐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 그것은 '높은 곳'(실은 허공일지도 모른다)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다. 그것은 복수複數인 '자본'이다. '마법'을 가진 현대의 기계이며 물질의 신이다. 하찮은 '손가락 하나만 가볍게 누르면' 그 줄은 툭 끊어진다.
밥줄이 그렇게 끊어지면 매달린 노동의 가족들은 숨을 거둔다. 잔인한 자본의 메커니즘을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대와 마주 앉아/ 만면 웃음 너머로 실려 오는 잔잔한 이야기 같은 것이다//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칼 위로 소소한 바람이 불어와/ 코끝으로 비누냄새 스치는 날숨 같은 것이다/ 가벼운 일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갈 때/ 문득 이 시간들을 잡고 싶은 것이다/ 그대 머리 위로 이팝꽃이 하늘거린다/ 긴 겨울을 달려와/ 온몸을 다해 피워내는/ 저 봄꽃 같은 것이다/ 그대가 잠시 내게 온 것이다.
- 「내게 순간이란」전문
3부의 시 가운데 하나다. 여기에는 가난하지만 따뜻한 시편들이 많다. '봄똥, 하행, 맷돌, 쉼표, 엘리베이터 꽃' 등등이 그런 것들이다.
「이명ㆍ耳鳴」을 고를까 망설이다가 그 고요하고 깨끗한 '밤새, 그대의 울음소리'와 잠시 작별하고 그와 가까운 「내게 순간이란」을 골랐다.
이런저런 삶의 고비를 넘겨,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시인의 담담한 자아 성찰이 돋보인다. 좀 진술이란 느낌이 들지만, 쓸쓸한 지혜가 적절한 비유로 드러나 있어 세련된 느낌을 준다. 첫 시작이 '그대'다. 생사고락을 함께 한 생의 반려자일 수도 있고 자아의 다른 호칭일 수도 있다. 그 어느 면의 접근도 이 시는 허용한다.
소리 없는 웃음으로 가득한 '잔잔한 이야기' 그것은 시적 화자(여기서는 시인)가 갖는 영원한 순간의 모순형용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촉감과 미각을 통한 신선한 이미지들이다.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칼' '그 위로 소소한 바람이 불어와' '코끝으로 비누냄새 스치는 날숨' 등이 그것이다, '
소소'는 쓸쓸하다는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하찮은, 작은' 등의 의미이며 그 다음 다음 행의 '가벼운 일상'과 연결된다. 그리하여 '문득' 지나칠 수 있는 그 일상의 의미를 소중하다고 깨닫는 것이다. 그때 '그대 머리 위'로 이팝꽃이 하늘거린다.
이팝은 이른 봄에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하얀 쌀밥 같은 꽃이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은은한 '거울 앞'의 모습이다. '긴 겨울'의 고난을 헤치고 '온몸을 다해' 피워 내는 저 '봄꽃' 같은 감사의 깨달음이 아름답다. 비록 시장기를 채울 수는 없지만 그것은 '내'게로 온 '잠시', '순간'을 둘러싼 삶의 고단함이 승화된 모습이다. 이러한 순간이 영원이 되는 슬기를 이 시인은 세상의 파도를 넘어 만나고 있다.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132번지 김판순씨 오이로 냉채를 하고/ 전남 순천시 추암면 백록길 46번지 오성길씨 호박잎으로 쌈을 만들고/ 충북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 27번지 이정자씨 가지로 찜을 한다/ 팔도가 모인 식탁에는 흙냄새가 난다//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132번지 김판순씨 오이는 봄에/전남 순천시 추암면 백록길 46번지 오성길씨 호박잎은 늦봄에/ 충북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 27번지 이정자씨 가지는 이른 여름에/ 약속하여 같이 심고 거둔 너와 나의 살림이다
-「어우리」전문
4부 중 한 편이다. 4부 시에는 서로 어울러 사는 따뜻한 모습은 담은 시편들이 많다. '그 밥에 대한 설, 풀을 먹다, 현암사, 상좌불, 은골, 그녀네 집' 등이 그렇다. 읽다 보면 감동을 주는 싯귀가 자주 나타나곤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너무 소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시이지만 묘미를 발견한다는 생각으로 골라 보았다.
시의 구조는 단순하고 소박하다. 무슨 메시지를 내세우지도 않는다. 단순한 두 연의 시, 그러나 여러 번 소리 내어 읽어보라. 비록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서 살지만 서로 얽혀 상부상조 하는 상생의 삶이 흥겹게 숨어 있다.
주소, 그것도 번지수가 세세하게 드러난 김판순, 오성길, 이정자 씨는 실재하는 사람들이다. 고관대작도 하다못해 티브이에 자주 나오는 탤런트도 아니다. 평범한 장삼이사요,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이웃들이다. 흙을 바탕으로 사는 가장 깨끗한 백성의 모습을 그 이름과 오이, 호박잎, 가지 등의 채소와 함께 떠올리게 된다.
봄, 늦봄, 여름에 그들이 농사지은 것들을 음식으로 먹는 도시 소시민의 삶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호텔의 휘황한 배경에 고관대작의 진수성찬을 비교해 보라, 이 시를 모두 한번 크게 소리 내어 읽고 외우다 보면 이 땅에 민주주의가 봄처럼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목차
목차
1부
의총리 가는 길 12
동동주 13
강江 14
열꽃 16
흥부의 외출 18
뒤란 20
식사 21
바지락 -고모에게 22
반딧불이 23
설우雪宇 24
나무의자 26
고로쇠 물 27
사진 28
상엿집 30
둥구나무 이야기 32
열쇠 34
2부
우리 동네 구두 수선집 36
민달팽이 37
줄 1 38
줄 2 39
대청호 40
말言 41
들장미 42
신호등 43
교차로에서 44
옳은 발 46
뒷주머니를 더듬다 47
석류 48
사슬 50
뫼비우스의 띠 52
그 여름의 일기 54
투명인간 56
3부
궁남지에서 58
내게 순간이란 59
봄똥 60
묘목 62
이명耳鳴 64
공동주택 65
인큐베이터 호박 66
맷돌 68
하행 69
진악산 이야기 -임희재와 극본 '아씨'에 대하여 70
쉼표 72
경배 73
재활용 74
집 75
엘리베이터꽃 76
현수막 77
2014년 밤 10시 78
4부
설원을 향하여 80
그 밥에 대한 설說 82
어우리 84
풀을 먹다 85
현암사 86
화사花死 87
포도가 열릴 때 88
참나무 90
수묵水墨 91
상좌불相座佛 92
은행나무 93
은골 그녀네 집 94
명랑 핫도그 96
저잣거리 예수 98
비둘기 집 100
자동차 모터쇼 102
은밀한 오후 103
해설연민 또는 연대의 서정조재훈 106
저자
저자
안지순 시인의 첫시집 {어우리}의 주제는 조화이며,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개성과 독창성을 통해 이'조화'의 주체자가 된다. 강원도의 김판순씨는 오이를, 전라도의 오성길씨는 호박잎을, 충청도의 이정자씨는 가지를 가져와 음식을 만들고, 그 산물들을 팔아 그 이익금을 공평하게 나눈다. 그 고장의 기후와 풍토와 말씨와 삶의 결은 다르지만, 서로가 서로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 이심전심의 마음이 조화를 이룬다. {어우리}의 세계는 최선의 세계이며, 모든 것이 약속되어 있다.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더없이 친숙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묘사하면서도, 우리가 곧잘 놓치고 있는'반전의 드라마'를 연출해냄으로써 더없이 사실적이고 진한 감동을 이끌어 낸다.
Your payment information is processed securely. We do not store credit card details nor have access to your credit card informat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