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 경전이 되기까지(지혜사랑 시인선 238)
강우현 시집
몸과 마음과 말이 분리될 수 없듯 자연과 사람이, 물질과 정신이, 삶과 죽음이 서로 한 몸일 수밖에 없음을 시인은 역설한다. 효율성과 생산성의 테제에서 한 걸음도 비켜서지 못하는 톱니바퀴 같은 사회의 병폐를 진단하고 그 징후들을 복기하는 것이 시작의 동기라면, 근원적인 삶의 의미를 사유함으로써 죽음을 초월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시의 지향점이다. 시인에게 시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미학적 수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핍진한 삶에 대한 부름이고 응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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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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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똑,
하늘의 문자가 찍힌다
누구에겐 웃음이나
누구에겐 기다림, 눈물로 읽히는 내용들
손을 내밀어 닳아버린 지문으로
당신이 내게 보내는 부호를 해독하고
나는 눈시울이 붉어진다
-「비를 해독하다」 전문
비가 오는 일상적인 장면은 똑, 똑, 똑, '나'의 닫힌 문을 두드리는 하늘의 메시지로 화한다. 뜻밖의 방문을 받은 '나'는 "손을 내밀어 닳아버린 지문으로" 당신의 부호를 해독한다. 자아와 세계는 이토록 깊고 내밀하게 연루되어 있다. 단 몇 번의 빗방울 소리로도 '나'는 웃음, 기다림, 눈물을 경유하는 외부와 내부의 공유지대를 확보하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해와 교감을 타전한다. 그런 차원에서 이 시는 본 시집의 서시로 읽힌다. 서시는 시집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열쇠이자 시집 전체를 통찰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시인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통에 붓자
꽃 이울며 자란 열매는 때글때글 여무는 것이라며
잠언이 쏟아진다
봄이 노트에 써가던 푸른 문장과
연보랏빛 행들은 모두 한 가지
바람과 볕과 비를 정독해서 쭉정이 되지 말자는
푸른 각오였다
-「서리태의 꿈」 부분
이 시는 평범한 생활 속 사물을 시적인 순간으로 고양시키는 착상 능력이 돋보인다. 예컨대 마트에서 산 "서리태"는 "단단한 말씀 한 봉지"가 되어 화자의 삶을 지지하고 고무한다. 손질하려고 쏟아둔 콩에서 "꽃 이울며 자란 열매"가 "여무는 것"이라는 잠언을 듣고는 시 쓰기를 통해 생에 임하며 "쭉정이"가 되지는 않겠다는 "푸른 각오"를 하는 것이 이 시에서 꾸는 꿈이다.
여기에는 "바람과 볕과 비"와 같은 우주적 지각변동뿐 아니라 그야말로 콩 한 쪽에서도 계시를 듣는 물활론적 세계관이 충만하다. 또한 친환경적인 자연의 요소들 특히 식물적 상상력이 충만하게 동원됨으로써 때 묻지 않은 시의 정신을 보다 더 맑고 청량하게 구축하는데 기여한다. 무엇보다 모든 것이 숫자로 환산되는 소유의 시대에 가난한 문학의 길에 존재하겠다는 미련한 고집과 정직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인이 지향하는 미래를 짐작해볼 수 있게 한다.
약 삼천 년 전 황하강 유역의 노래를 편찬한 공자의 ?시경(詩經)?은 가장 오래된 중국의 시집으로서 선비들이 등용을 위해 필히 읽어야 했던 유학의 교과서다. 300여 편에 달하는 이 고전 시문학에는 민중의 생활과 사상 뿐 아니라 지배층의 착취와 전쟁 같은 사회적 모순이 있다. 시경은 고대 중국의 역사·문화·철학의 결정체로서 시학 계보의 전범이요 원형이다.
?논어(論語)? '양화(陽貨)'편에서 공자는 말한다. "너희들은 어찌 시를 공부하지 않느냐? 시를 배우면 뜻을 일으키고,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풍속의 성쇠를 살필 수 있으며, 정사의 득실을 비판할 수 있다. 또한 가까이로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군주를 섬기며, 새와 짐승과 초목에 관해서도 알게 된다." 한편 시경을 '사무사(思無邪)'로 정의한 저 유명한 '위정(爲政)'편에서는 "시경 삼백 편을 한마디로 개괄하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음이다"라고 했다.
원뿔을 올리면
설계가 끝난 것,
그들의 계획이 진행되는 신호다
대물림한 유전자에
온도나 습도가 맞아떨어지고
비바람에도 끄떡없는 기초공사가 마무리된 것
눈부신 지상을 뚫는 일이
어디 만만한가
정확한 위치와 문의 크기를 표시해
스케치한 몸을 대보고
바람의 속도까지 계산한 도면대로
눈을 질끈 감고 한판 붙는 일이다
그늘이 마음 놓고 지경을 넓히는 곳이면
휑한 허공은 모두 길이 되어
하룻밤 키에도 물이 오른다
어디서 정점을 찍을지 밤새도록 별은 깜박거리고
바람을 껴입는 댓잎은 초록으로 흔들린다
뿌리를 뻗는 것들은 흙의 자식,
단단한 집을 짓고 나온 기억으로
치솟으며 마디마디 바람의 경을 필사한다
-「竹, 경전이 되기까지」 전문
?시경? '위풍(衛風)'편에 나오는 「기욱(淇奧)」은 이러하다. "기수라 저 물굽이 바라보니 푸른 대나무 무성하네. 고아한 군자가 바로 거기 있도다. 깎고 갈아낸 듯 쪼고 다듬은 듯 장중하고 위엄있는 모습이여. 아름다운 우리 님을 끝내 잊지 못하겠네." 대나무가 우거진 충만한 풍경을 군자의 공과 덕으로 비유하여 칭송하는 시다. 대나무는 이렇게 고금의 문학에서 인격화된 모델로 추앙되고 정형화되어 왔다.
대나무를 경전으로 삼고 있는 시인은 시집에서 대나무를 비롯해 이 땅의 꽃과 나무들을 통해 물활론적 세계관과 식물적 상상력을 부려놓는다. 다양한 종과 이름을 지닌 식물들은 자연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세속을 비판하고 인품을 본받으며 삶을 통찰하도록 하는 대상이다. 옛 성현들이 대나무를 특별히 사랑했던 것은 외형적 아름다움 뿐 아니라 그것의 생래적 특징에서 기인한 상징성 때문이다. 속이 빈 내부는 사리사욕을 용납하지 않는 결벽과 청렴을, 눈 속에서도 홀로 푸른 위용은 절개와 지조를, 곧고 바른 수직 상향의 자태는 이상과 실천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대나무의 구조와 속성은 유교의 윤리 규범에 완벽히 부합하는 기표였던 것이다.
시인은 대나무의 외연이 정신을 반영하는 설계와 구축이라고 여긴다. 그렇게 구축한 대나무의 육체는 "눈부신 지상을 뚫"기 위해 온몸으로 육박해오는 승부에 "눈을 질끈 감고" 제 모든 것을 건다. 한 그루의 대나무는 제 몸의 마디 마디를 갱신하며 기도하는 사제처럼 없는 사다리를 딛고 하늘로 오른다. 그때 "허공은 모두 길이 되"고 "어디서 정점을 찍을지 밤새도록 별은 깜박거"린다. "바람의 경을 필사"하는 대나무의 정진은 그렇게 투신을 통해 거듭난다. 광야의 전개도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의의는 무한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망설임 없이 벼랑 끝으로 다시 향하는 그 활공의 결의에 있다. 물러섬 없는 건곤일척의 정신이야말로 시의 배후이며 내적 근거임을 시집은 일관되게 증거한다.
몸과 마음과 말이 분리될 수 없듯 자연과 사람이, 물질과 정신이, 삶과 죽음이 서로 한 몸일 수밖에 없음을 시인은 역설한다. 효율성과 생산성의 테제에서 한 걸음도 비켜서지 못하는 톱니바퀴 같은 사회의 병폐를 진단하고 그 징후들을 복기하는 것이 시작의 동기라면, 근원적인 삶의 의미를 사유함으로써 죽음을 초월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시의 지향점이다. 시인에게 시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미학적 수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핍진한 삶에 대한 부름이고 응답인 것이다.
목차
목차
1부
그녀와의 내통 12
봄의 급훈 14
도마의 일기 15
1+1을 사랑한 게 16
꽃눈이 자라는 골목 18
소파 노파 파파 20
꽃들의 중독 22
꽃패 23
모네의 비둘기 24
메쉬펜스의 방식 26
몰래몰래 28
그리움의 무게 30
로만칼라 31
칼에 대한 자세 32
딱! 34
이팝나무 식당 35
생각이 혼자 36
물탑 37
2부
소 울음 값
당신 한 삽
들깨밭
꽃무늬 양산을 접고
봉선사 가고 싶다
비를 해독하다
竹, 경전이 되기까지
지칭개의 본능
복숭아 통장
호박꽃
불청객이 오셨다
능소화, 그 오르는 것은
부레옥잠
궁금한 안부
다시 매미로 회화나무에
경포대에서
장수 커피
3부
모래
웃음 블록
그럴 테니까
낙엽의 생각
오카방고 삼각주 그리고
서리태의 꿈
화살나무
푸른 모과
붉은 화산석
벚나무 강의
수세미 어미
풀벌레 기도원
호수 위의 밥상
마디
도장
덕담
꽃무릇
4부
어느 가장
초리가 흔들리다 멈출 동안
12월
조화의 계절
원판 변형의 법칙
폐허의 경고
다시라는 도시
안개 보고서
시간을 허물다
가로등
쓸쓸한 수다
모래의 나라
바람 바람 바람
꿈뜰
종이컵
탁탁
밑불
염소를 기르는 여자
해설ㆍ닳아버린 지문으로 타전하는 바람의 경ㆍ신수진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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