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지혜사랑 시인선 239)
이충기 시집
이충기 시집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오늘’이라는 세계에 던지는 질문은 결코 일인칭의 “나”에게 한정된 값이 아니라 세상 모든 ‘나’에게 던지는 화두인 것이다. ‘나’는 ‘나’에게 어떤 답을 해야 할까? 이 시집은 그 답을 스스로 찾아보라 말하고 있다. “내가 그릴 그림의 바탕이란 흰색도 아닌 무색이다”(「술래잡기를 싫어할 수밖에」)라는 진술이나 “바깥에도 은은한 향이 나야 되니까”(「라벤더의 끝」)라는 이유는 시인이 심어놓은 투명한 힌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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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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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전문
파란 물감을 쥐어짜놓은 병이 탁자 위에 있고 그 앞에 너를 앉혀놓은 내가 파란색으로 너의 등을 칠해놓을 때
쨍그랑
병이 깨졌다
어쩌면 우리는
같은 사람일 수도 있겠구나
갑자기 외롭다고 전화를 한 어느 누군가의 목소리처럼
활짝 열어놓은 창가에 내가 가면
네가
커튼 사이에서 나타날 때
밤은 검은 게 아니라 파랗다고,
파란 새가 너의 등에 둥지를 트고 짹짹 울고 있을 때
나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새를 뒤에서 받쳐 주는 구름 떼고
노란빛이 의외로 서글퍼지는 보름달이고
선뜻 떼어갈 상황이 아니라서
오락가락하는 별들 중 하나인 것
슬프다는 걸 알면서도
묵묵히 지나쳐야 하는 슬픔을 느끼는 순간은 죽지 못하고
파란 멍이 들었다
-「Blue」 전문
몸의 언어는 아프다.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혼자 울음을 터트리고 바닥으로 온몸을 날려" 보내는 고드름처럼 "하루가 다 가도 녹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슬픔이다"(「고드름」).
"멍"은 그런 순간에 드러난다. "파란색으로 너의 등을 칠해놓을 때"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나"의 가슴도 따라 파랗게 된다. 이런 동질의 통증이야말로 시인이 사물과 교감하는 방법이다. 타자를 통해 자아를 들여다보는 것은 "같은 사람"임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런 떨림은 "슬프다는 걸 알면서도/ 묵묵히 지나쳐야 하는 슬픔"처럼 지독한 통증이다. '나'와 같다는 것, 다시 말해서, 세상과 나 자신에게 통증으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분명 지워지지 않는 "멍"을 그리는 일과 다르지 않다. '바깥'에 나가면 "우산을 쓰지 않고 그대로 흠뻑 젖"(「온몸으로 사랑하기」)은 채로 서 있는 또 하나의 '나'를 만날 것만 같은 순간을 "교감"이라고 말하는 건 어떨까.
"나"는 "우산을 펼쳐놓고 길가에 놓고 가면 그곳은 영원히 비가 오지 않는 도시"(「방울과 방울이 만나면, 그건 관심을 달라는 소리」)의 사람들 속에서 "가짜로 사랑하는 자세가 무엇인지/ 배우고 또 배"(「팡파르」)운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진짜 모습이 아니다. 가짜를 가려내 진짜를 찾아내듯이 반대를 빗대 반대를 알아가는 일은 정형화된 세계의 이면에 다가가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잔디밭에 눕자마자 잔디가 되는 꿈을 꿨다
너는 조금 더 생각을 해보겠다고
말하기가 무섭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입원해있는 병동을 떠올렸다 한 번도 아파본 적이 없는 내가 산소 호흡기를 끼는 꿈에서도 너는
조금만 시간을 더 달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파릇파릇한 풀밭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미소 같은 미끄럼틀을 타며
놀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의 열의에 불과했다
열이 쉽게 오르는 몸
너와 함께 누웠던 잔디밭은 어느새 흙으로 무장되고 모래로 뒤덮인 먼지 속에서 아픔을 얘기하던 너는 조금 더 참아보겠다고
나를 설득했다
나는 너의 품이 그토록 거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누가 한 번쯤은 짓밟고 갔을 너의 몸을 보니
너는 조금 더 밟혀보겠다고
말하기가 무섭게
열이 올랐다 우리는 하나의 몸이 된 것처럼 같은 꿈에서 나오질 못했다
누가 우릴 밟고 갔다
말하기가 무섭게
또 다른 잔디가 보였다
그것은
우리를 뒤따라온 제3자의 아픔이었다
-「고열」 전문
「고열」은 세상과 소통하려는 화자의 몸짓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때 꿈속의 "너"는 무의식의 세계에 있는 "나"의 모습이다. "열"은 저항의 흔적이다. 누군가 "짓밟고 갔을" 꿈은 지나간 오늘이면서 동시에 다가올 오늘이다. 그러므로 "고열"은 순응과 복종으로 무너지지 않고 시대를 건너려는 현상이다. "잔디"가 있는 바닥에 누워 "잔디"가 된다는 건 타자와 함께 호흡하겠다는 것이며 아울러 바닥의 언어를 몸으로 익히겠다는 시도이다. 이런 몸짓은 이충기 시집 곳곳에 파편처럼 흩어져있는 이미지들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아버지"에게서 "누나"에게서 그리고 드러나지 않은 "당신"과 "너"에게서, 부서지고 찢기고 무너진 감정 안쪽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본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벗어남의 의미로서의 "탈출"은 처음부터 불가능했고, 밟아도 다시 돋는 잔디처럼 통증의 자리를 시로 채우려는 몸짓이 새롭게 의미를 부여한 "탈출"이 아니었을까?
「고열」 속에서 화자의 시선은 "너"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고정된 시선을 중심으로 "꿈"은 수시로 변주한다. 이렇게 패턴이 일정하지 않은 변주가 "열"이라는 물리적 현상으로 구체화될 때 그것은 어떤 소리를 지닌다. 짓밟는 이와 짓밟히는 이의 소리가 뒤섞인 공간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소리는 무엇일까? 바닥을 구르는 소리는 제자리에서 흔들리는 소리보다 훨씬 입체적이다. 이충기 시인은 그런 소리를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온몸에 "파란 멍"을 새기려 한다.
이제 우리는 시인이 몸으로 쓰는 언어를 듣기로 하자. "비문으로 가득한" 삶이 뱉어내는 소리야말로 사람 냄새 짙은 소리일 것이다. 그러니 이충기 시집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오늘'이라는 세계에 던지는 질문은 결코 일인칭의 "나"에게 한정된 값이 아니라 세상 모든 '나'에게 던지는 화두인 것이다.
'나'는 '나'에게 어떤 답을 해야 할까?
이 시집은 그 답을 스스로 찾아보라 말하고 있다.
"내가 그릴 그림의 바탕이란 흰색도 아닌 무색이다"(「술래잡기를 싫어할 수밖에」)라는 진술이나 "바깥에도 은은한 향이 나야 되니까"(「라벤더의 끝」)라는 이유는 시인이 심어놓은 투명한 힌트일지도 모른다.
목차
목차
1부
탈출을 위한 돌림노래 12
투명인간 14
고약한 골목 16
방울과 방울이 만나면, 그건 관심을 달라는 소리 17
폐가廢家 19
치매에 걸린 새 21
외진 곳 23
사슴이 울고 있어요 24
심장이 달려 있는 것들은 마음도 있다 26
거미가 꿰어놓은 시인 28
누나의 개 30
2부
없어져 가는 오늘 34
이것이 순환입니까? 35
술래잡기를 싫어할 수밖에 37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편의점 39
미완성 41
꼬부랑 43
옥에 티 44
I 46
갓 태어난 호랑이였을 때 48
묵언수행 50
극소형 비상구 52
3부
천년의 흉터 자국 56
심장이 아픈 사람 57
구름이라는 달콤한 케이지 60
운명이라는 벽 63
넓이 64
차가운 마음 66
논산 성삼문 묘길 68
팡파르 70
우리에게 바람일 뿐 71
딜레마 73
굴러가는 운명 74
4부
온몸으로 사랑하기 78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79
언덕 80
바다라는 단어를 기억해 82
고통이라는 허락 84
또 다른 이름 85
마이 러브, 아이스 87
러닝 89
통통함을 드립니다 90
Blue 92
라벤더의 끝 94
5부
고드름 96
불청객 98
포르투나가 살고 있는 소행성 99
휠체어, 폭포 100
편안한 물길 102
앞으로 104
고열 106
수습 108
생선처럼 109
0-0 111
눈곱을 빼지 못하는 날들 113
해설파란 고열, 무색의 탈출최은묵 116
저자
저자
이충기 시인의 첫 시집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수많은 나와 당신들 사이에서, 혹은 짓밟는 이와 짓밟히는 이의 소리가 뒤섞인 공간에서, 온몸에 '파란 멍'이 들도록 '우리'를 찾아가는 시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온몸으로 고열을 앓으면서, 온몸으로 시를 쓰면서,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중얼거리면서----. 파란 고열, 무색의 탈출을 통해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고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질문을 하는 '우리'의 몸짓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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