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침묵이었을 때(문학의전당 시인선 223)
유경희 시집
『내가 침묵이었을 때』는 2004년 『시와세계』를 통해 등단한 유경희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이다. 유경희의 시를 읽는 일은 ‘개와 늑대의 시간’ 속을 걷는 것이다. 이 황혼의 시간은 빛과 어둠, 이편과 저편, 현실과 꿈, 이승과 저승을 뒤섞으며 익숙하던 세계를 갑자기 낯설게 만들어버린다. 모호하고 불분명한 이 무경계의 순간 속에서 나와 너, 이곳과 저곳, 과거와 미래, 삶과 죽음 등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분법적 개념들은 여지없이 허물어져 내린다. 유경희의 시는 이 ‘낯섦’을 친숙한 것으로 탈바꿈시키면서 무언가를 분리하고 구별하는 목적으로 창조된 일체의 것들이 그 효용성을 상실하는 독특한 시공간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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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문학의전당 시인선》 223. 2004년 『시와세계』를 통해 등단한 유경희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유경희의 시를 읽는 일은 '개와 늑대의 시간' 속을 걷는 것이다. 이 황혼의 시간은 빛과 어둠, 이편과 저편, 현실과 꿈, 이승과 저승을 뒤섞으며 익숙하던 세계를 갑자기 낯설게 만들어버린다. 모호하고 불분명한 이 무경계의 순간 속에서 나와 너, 이곳과 저곳, 과거와 미래, 삶과 죽음 등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분법적 개념들은 여지없이 허물어져 내린다. 유경희의 시는 이 '낯섦'을 친숙한 것으로 탈바꿈시키면서 무언가를 분리하고 구별하는 목적으로 창조된 일체의 것들이 그 효용성을 상실하는 독특한 시공간을 연출한다. 이러한 '무(탈)경계'의 시적 전략을 통해 유경희의 시는 우리가 아무런 의심 없이 내면화하고 있는 온갖 규율과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숱한 규칙들,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고정관념과 위상과 위계 따위의 무상함과 불모성을 이야기한다. 이 시집은 우리를 구속하는 일체의 허위를 전복하며, 세속적 삶의 노예가 되지 않고자 몸부림치는 '자유 영혼'의 노래이다.
[출판사 서평]
『내가 침묵이었을 때』라는 시집의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침묵'은 유경희의 시세계를 지탱하는 핵심어다. 언뜻 생각해보면 '침묵'과 언어로 만들어지는 '시'는 상반되는 것 같지만, 사실 시는 언어를 최소화하여 마침내 침묵에 이르려는 시도다. 때로는 행간이 더 많은 뜻을 품고 있는 것처럼 어쩌면 시를 시로 만드는 것은 침묵이다. 침묵의 사전적 의미는 "아무 말도 없이 잠잠한 상태" 또는 "정적(靜寂)"이지만, 그것은 말과 말 사이의 휴지(休止)이기도 하고, 말을 유예하고 있는 발화 직전의 상태이기도 하다. 침묵은 단지 말이 부재하는 상태라기보다는 모든 발화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는 말의 가능태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아무리 두꺼운 책이라도 페이지가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은 언젠가 반드시 중지되면서 침묵을 불러온다. 말과 침묵은 극명하게 다른 양태로 존재하지만 기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침묵으로 쓴 시는 존재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빈 종이는 시가 될 수 있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말하는 동시에 침묵한다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종이 위에 시어 하나를 부릴 때마다 시인은 침묵을 배반하며, 언어가 태어날 때마다 침묵은 죽임당한다. 말과 침묵은 하나가 가동되는 순간 다른 하나를 완전히 지워버린다. "침묵과 소음의 중간 지대가 나의 영토"(「언어의 여행」)라는 구절이 말해주듯이 유경희는 이 점을 바로 알고 있으며, 그래서 괴로워한다. "한마디 말도 없이 피고 지고/흙으로 돌아가는 들꽃/한 송이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시"(「여백」)라고 여기지만, 결과적으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시"라는 언명 자체가 '시라는 흔적'으로 남는다. 유경희의 시가 작동하는 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침묵을 말하기 위해 시를 쓴다는 역설적 상황에 대한 고민이 배어 있다. 시로서 침묵하고 싶지만 막상 침묵이 도착하면 시는 중지될 것이다. 결국 이런 고민의 와중에 실체를 얻는 것은 침묵이 아니라 시다. 따라서 시가 쓰이는 동안 침묵은 다가오는 침묵, 징후로서의 침묵이다.
내가 침묵이었을 때, 툰드라의 이끼, 나무 장미 울타리, 사슴의 눈망울, 아기의 첫 호흡, 찔레나무의 첫 번째 잎사귀, 깊은 우물의 두레박, 14세기 편지의 한 구절이었을 때 내가 숲의 그늘, 지나가는 계절, 코요테의 울음소리, 마야의 실, 메타세쿼이아 가지의 종달새였을 때, 일 분마다 우주가 사라질 때 내가 침묵으로 돌아갈 때
?「야생 보호구역」 전문
인용시에는 앞서 말한 징후로서의 침묵이 잘 드러나 있다. 시에 표현된 사물들은 모두 언어를 구사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유경희는 의도적으로 목적어와 서술어를 배제한 채 그것들을 나열함으로써 침묵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야생 보호구역」에서 이미지들은 어떤 의미를 창출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의미가 된다. 별다른 내적 필연성 없이 열거되는 사물들은 시적 전언을 위해 한길로만 흐르는 방향성에서 도망쳐 나와 각기 다른 모습의 침묵을 그려 보인다. 그렇게 다양하게 발화된 침묵의 이미지들은 하나의 쉼표를 건널 때마다 포개지면서 마침내 '침묵'이라는 비언어적 실체를 언어로써 우리 마음속에 그려낸다. 그렇게 유경희는 시를 통해 우리를 "언어는 지워지고 색채도 내려놓은/침묵의 사유지"(「바둑」)로 데려간다. 「안식휴가 2」 역시 소연하고 아름다운 한 편의 '침묵의 시'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노트 같은/평화로운 하루가 흘러간다/가만히 침대에 누워/하늘에 동그라미를 하나 그려본다/무지개도 하나 그려본다/색들을 하나하나 칠해본다/나뭇잎 한 장 바람 한 올 햇빛 한 점을 넣어서/열매를 하나 빚는다/자, 이제 백악기의 석탄층쯤에 들어가/영원히 잠을 자는 거다/아무것도 적히지 않는 노트에서는 수평선이/유목민의 지평선 속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안식휴가 2」 전문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노트"는 '침묵의 시'에 대한 비유다. 시의 화자는 허공중에 동그라미와 무지개와 나뭇잎과 바람과 햇빛을 그려보는 것으로 "아무것도 적히지 않는 노트"를 채운다. 그 노트에 빚어진 '열매 하나'는 아마도 "소음과 침묵 사이 낙서와 백지 사이/지평선과 나무 사이/엄마의 사랑과 상형문자 사이에/신과 사람 사이 사람과 고양이 사이에/탄생과 소멸 사이에/백지와 양피지 사이에/밤과 아침 사이/새와 오리 사이"(「중간지대?특수학급」)에 있는 시(詩)일 것이다.
오늘도 나는 아이들에게 빨리 걸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한다/천천히 걸으면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오늘도 나는 씨름 잘하는 아이에게 왜 달리기는 하지 못하느냐고 화를 낸다/오늘도 나는 푸른 세쿼이아 나무 한 그루에게/큰 숲에 가야만 큰 나무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한다/잡목림에서는 들꽃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오늘도 난 아이들에게 거대한 행복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한다/작은 아이들의 작은 행복은 모른 체한다/오늘도 난 높이 오르면 멀리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그렇지만 높이 오르려면 많은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교실」 전문
『내가 침묵이었을 때』의 첫 번째 시 「교실」이 환기하는, 우리가 지금 발 딛고 선 불우한 현실에서 그 시는 어쩌면 "지상이 원하지 않는 것"(「시 쓰는 밤」)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경희는 수다한 말들에 맞서 침묵으로, 우리를 재단하려는 세속의 온갖'경계 지음'에 대해서는 안주하지 않는 정신과 거기서 비롯한 품이 넓은 상상력으로 응전하고 있다. 유경희는 「시 쓰는 밤」을 "지독한 난산"이라고 고백하며, "인디언 여자처럼 혼자 낳은 이 아이를/무한과 영원을 알도록 길러야겠다"고 말한다. 앞으로도 그의 시를 지켜봐야 할 이유이다.
목차
목차
제1부
교실 13
언어의 여행 14
칭기즈칸 Airport 15
안개비 내리는 날 16
여름캠프 17
자유 18
장안 성벽에서 쓰는 편지 19
지상을 산책하는 법 20
개와 늑대의 시간 21
라다크 식으로 살기 22
사막과 초원 사이 23
설산 24
태평양 26
설악 27
아픈 날 28
바둑 29
비 오는 밤 30
제2부
신의 밑줄 33
Silk Road 34
야생 보호구역 35
India 36
사랑한다고 말하는 대신에 37
고요 38
노마드 39
의류 수거함 40
Ending credit 41
안식휴가 42
독서 44
일기 45
묘비 46
이스탄불 47
산채 나물 정식 48
Silk Road 2 49
인도로 가는 길 50
제3부
북한강 53
Last caravan 54
꿀벌은 배우지 않아도 55
검은 책 56
아랍식 정원이 있는 집 57
Caravan Saray 58
아야 소피아 59
히말라야에서 쓰는 편지 60
Pethiye 64
여백 65
하리칸다 66
클레오파트라 하맘 67
아나톨리아 68
지중해 69
사랑이 시작된다는 건 70
Apple Tea 71
백년 된 학교의 도서관 72
제4부
눈 내리는 밤 75
전쟁터 76
형이상학적인 대화 1 77
형이상학적인 대화 2 78
미안해요 79
내 삶을 해석하느라 80
중간 지대 81
아무도 모를 거야 82
안식휴가 2 84
안식휴가 3 85
상처 86
전생 87
시 쓰는 밤 88
빵과 장미 89
나무 난로 90
마을 묘지 91
환상통 92
해설|'개와 늑대의 시간'속을 떠도는 침묵의 시 / 이현호(시인)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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