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에게 묻는다(문학의전당 시인선 234)
서용기 시집
《문학춘추》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서용기 시인의 시집 『새에게 묻는다』. 우리의 존재를 비롯되게 한 ‘시원적’ 층위와 우리를 둘러싼 ‘현실적’ 세계에 대한 ‘인식’이라는 강력한 시적 동기, 즉 ‘세계와 인생에 대한 이해’에의 간절한 지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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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의 근원根源)은 어디일까? 시인이니까 당연히 언어(모국어)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확실한 사실은 생물학적으로 우리의 근원은 부모라는 것이다. 유전적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면 부모야말로 이름 붙여진 물질로서의 '아무개'인 '나'의 확실한 시원이 된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시간의 표면 위에 '기억'이란 이름으로 저장할 수밖에 없고 그 기억마저도 '언어'로 대체하여 표현할 수밖에 없는 한계적 존재일 뿐이다.
딱딱한 패각을 굽은 등에 짊어지고
물 깊은 낮은 곳을 기어 다니신 어머니
어둔 밤 발을 헛디뎌 물속으로 빠진 이후
양지바른 곳으로 나오시려고 몸부림하셨으나
끝끝내 진흙투성이에서 한 생애 마감하셨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오 남매 키우면서 빌린 사채는
비 온 후 죽순처럼 무성하게 자라고
어머니는 그 빚 모두 갚느라
붉은 고무장갑 벗은 적이 없었다
물속이 제 영토인 연체동물처럼
펄의 관습에 너무 익숙하신 어머니
연체하지 마라 최고하는 지하 대부업자
장기라도 떼서 갚아 달라는 독촉이
저녁 무렵 폭풍처럼 닥쳐오면
낮은 데서 낮은 데로 더는 갈 곳 없어
질퍽한 펄 속으로 몸을 숨기는데
펄 구렁에서도 자꾸만 네 얼굴 떠올라
아무리 서글프게 울어도
파도가 울음소리 삼켜주었단다
너는 오직 북두칠성 힘 받아서
거친 바다 잘 헤쳐 가기 바란다 하시더니
조개처럼 천천히 눈을 감으신 어머니는
연체 없는 저 드넓은 우주에서도
나를 위해 반짝이고 계실까
-「연체동물」 전문
이번 시집에 수록된 서용기 시인의 작품들은 대체로 어떤 구조적 완결성을 특성으로 드러내는데 거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의인화가 아니라 시어의 중의적 사용이다. 이 수법도 몇 가지 갈래로 정리할 수 있는데 우선 어휘 자체가 중의적인 사용이 가능한 경우다. "삶과 죽음의 플랫폼에서는 태어날 때 그 얼굴빛이어야 하므로 화장장에서는 아무도 화장하지 않는다"(「화장장에서는 아무도 화장하지 않는다」)에서처럼 '화장'이 아무런 변형 없이 '시신을 태우는 장례법'과 '얼굴을 꾸미는 일'의 두 개의 의미에 다 걸리는 경우다. 그리고 한 어휘의 앞뒤를 바꿔 전혀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는 경우다. 가령 「늘그막」의 "어느 그늘막 대나무 평상 위에선/마음의 경전을 읽던 노승이 굳어갔다"처럼 '늘그막'을 '그늘막'으로 읽거나 「어죽」에서처럼 "엘리베이터 안 하얀 거울에 누군가/ 손가락 연필로 침을 발라 '죽어'라고 써놓았다"의 '죽어'를 '어죽'으로 읽어 의미를 과장하거나 축소하는 경우다. 또 하나는 일종의 펀(pun)인데 "그는 차이나 출신/아무리 겉과 속을 훑어봐도/차이가 없는데/그는 분명 차이나다니!"(「차이나」)처럼 '차이나(중국)'를 '차이(다름) 나'로 읽는 것이다. 이 펀의 경우에는 일종의 해학을 통한 비판이라는 특징을 갖는데 이번 시집의 경우 빈도(頻度)가 가장 낮다는 점에서 역으로 서용기 시인의 시적 의미가 아직은 무겁고 어둡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끝으로 인용 작품에서처럼 음성적 유사성을 토대로 연상 작용의 활성화에 기여하는 경우다. '연체동물'은 문자 그대로 동물계의 하위 분류의 한 명칭이다. 여기서 "정해진 기한이 지나도록 지체하다"라는 의미의 '연체'를 떼어내 읽게 되면 전혀 새로운 의미가 형성된다. 인용 작품의 경우 이 음성적 유사성에서 나아가 '펄'이라는 어머니와 연체동물의 생활 터전이 중첩함으로써 시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물론 '펄'이 갖는 '헤쳐 나오기 어려움'이라는 의미도 가세한다. 바로 이러한 면들이 이번 시집의 표면적 구조를 단단하게 만들고 있다.
앞에서 시원을 양친(부모)이라 했지만, 이는 단순히 생물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발언에 가깝다. 굳이 정신분석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대개의 경우 '날것(raw)'으로서의 기억과 이미지, 언어를 어머니에게서 찾는다. 그 어머니에 대한 회고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오 남매 키우면서 빌린 사채는/비 온 후 죽순처럼 무성하게 자라고/어머니는 그 빚 모두 갚느라/붉은 고무장갑 벗은 적이 없었다"는 신산(辛酸)의 원인은 「어죽」에서도 짧게 그려진다. 아버지의 실직과 "초록빛 상표가 붙은 초콜릿색 작은 병"의 위협은 시인의 유년을 어둡게 했을 것이고 그 어둠의 농도만큼이나 어머니에 대한 애련(哀憐)을 짙게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이 짊어진 불운 속에서도 "너는 오직 북두칠성 힘 받아서/거친 바다 잘 헤쳐 가기 바란다"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다. 이 당부는 다음과 같은 실천적 가르침으로 연결된다. 시인이 이를 잘 헤아리고 있다는 데서 그 울림의 파장이 더욱 더 커진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자식 낳고 살아보니 알겠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맛이 아니라 간이라는 것을
가난 때문에 온갖 양념 넣지 못하고
소금과 고춧가루가 전부였던 김치
어머니는 나에게 일찍 겉멋이 아니라
속맛을 알아야 한다는 것 알려준 것이다
아무리 양념 범벅되어도
간이 맞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는 것
간을 보는 것으로 세상을 읽게 해준 것이다
-「간」 부분
일반적으로 부정적 뉘앙스가 강한 '간을 보다'를 시인은 새롭게 읽고 있다. 물론 그 자신도 "혀로 간을 보는 것보다도 눈으로 간을 보는 것이 여간 어렵다는 것"을 '어머니의 유산'이라고 단언하고 있지만 이는 엄밀하게 정의하자면 '반어(irony)'라 해야 할 것이다. 일종의 언어적 반어인데 "자식 낳고 살아보니 알겠다"라는 전제가 어쩌면 간도 쓸개도 다 빼놓을 처지였을 어머니를 상기하면서 시적 발화를 엄정하게 구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도 세상살이에서는 "눈물 글썽이며 은퇴할 때 비로소 은테 안경 하나 장만해 쓰고 저 푸른 하늘을 바라보자"(「은테가 은퇴에게」)고 다짐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진정한 전언은 누가 뭐래도 "겉멋이 아니라 속맛을 알아야 한다"는 시적 명제로 귀결된다.
이번 시집을 다른 방향에서 읽는다면 깊은 정서의 사모곡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평생의 질곡 속에서도 마지막 소원이 "나 죽더라도 울지 마라/너희들 잘살 생각이나 궁리해라/죽으면 육신은 한 줌 재에 지나지 않는 것/얘야, 그래도 능력이 되면 꼭 꽃상여 한번 타고 싶구나"(「꽃상여」) 하시던 어머니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시 곳곳에서 배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 애잔한 정조(情調)를 자기 삶의 중심으로 끌어와 정조(情操)로 바꿔 보여준다. 이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궁색하나마 "시신 냉동고 앞에 밥상"(「사잣밥」)을 차렸을 때, "사자 한 명이 밥 잘 먹었다고/상주인 내 손 덥석 잡는 것 아닌가"라는 섬뜩한 상상, 어머니가 없는 세상에서 다음 차례는 맏이인 자신일 거라는 비극적 숙명에의 눈뜸이 있었기 때문이다.
3.
주지의 사실이지만, '세계와 인생에 대한 이해'는 칼로 두부 자르듯 일도양단(一刀兩斷) 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관 + 인생관 → 가치관"처럼 결합하여 등치 너머의 현실을 지향한다. 살고 싶은 세계와 인생을 꿈꾸고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유리는 스스로 깨지면서/거대한 혁명을 꿈꾸고 있었던 것"(「금」)이라는 시적 명제의 전후 작용을 통해 제 속의 '조선의 반월검'을 드러내고 싶었던 사물(유리)의 꿈이 "마음속에 새겨진 금"을 깨끗하게 지워내고 싶은 인간(시인)의 꿈으로 전환되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번 시집에 서용기 시인이 담고 있는(이는 물론 '어머니'로부터, 아니 그 전생이 비춰준 어떤 진실로부터 유추된 것이지만) 또 하나의 시적 의미는 '혁명'이란 시어에 함축된 새로운 세계, 엄밀하게 말하면 새롭게 인식된 세계를 지상에 구축하려는 의지의 표명이다.
현실은 이렇다. "큰 태풍 한번 불어 닥칠 때마다/그물의 집은 찢어지고 멀리 흩어지고 조피볼락 떼는 대해로 사라졌지만 없어져야 할 수협 대출금은 오히려 불어나고/나는 조피볼락 대신 그물에 갇혀/약전이 발품 팔아 쓴 자산어보를 새벽까지 읽"(「新자산어보」)거나 "내 그리움도 오래전 파산되었으나/아무도 나를 거들떠보지 않았다/불완전한 나의 경제를/죽은 햇병아리처럼 묻고 싶"(「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은 날들의 연속이다. 자연재해나 인위적 재앙이나 이 모두를 개인의 불운으로 치부(致賻)하기 바쁜 세상은 생생한 현실이지만 병든 현실이고 마땅히 격렬하게 지양되어야 할 세상이다. 그러나 시인의 측은지심은 아직도 "우리들의 삶, 고고한 척하지만/직립보행과 이성을 빼면 돼지나 개나 소나 사는 게 뭐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등뼈」)라는 직설적 비난과 "나무에게 상처가 있다는 것을 날카로운 대팻날이 가장 먼저 안다/나무의 상처를 읽는 동안 대팻날도 제 몸에 상처를 남긴다/아픔은 가슴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대패의 독서법」)과 같은 잠언(箴言)적 정의에서 멈추고 만다. 하지만 이것이 진면목은 아닐 것이다. 사물을 의인화하는 가장 큰 목적은 물론 인간 세계에서 그만한 전범(典範)을 찾을 수 없다는 비관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 비관을 드러냄으로써 하나의 교훈을 그 지향점을 향해 세우고자 함이 아니던가?
서용기 시인은 아직도 그의 '검법'을 수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이제 만인에게 전수(傳受)하고자 겨우 몇 초식을 시연(試演)했을지도 모른다. 전후 사정은 차치하고 그는 자신의 검법의 진수를 '오픈 소스(open source)'했다. 그 미덕에 갈채를 보낸다.
저마다 하늘을 찌르는 칼을 키운다
바람으로 제 칼날을 세우고
눈비로 제 몸을 단련한다
발을 움직이지 않는 검법을 익혔으나
적은 절대 찾아 나서지 않는다
먼저 적을 향하여 칼을 뽑지도 않는다
칼끝이 지나가면 상처는 아물어도
마음의 상흔은 영원히 남는 것이니
자, 다시 한번 장고할 것
제 영역의 드넓은 푸름을 위하여
저희들끼리 서로 칼을 겨누기도 한다
그러나 동족끼리 피를 흘리는 경우는 없다
칼로 세상을 빼앗지 않는다
오직 어둡고 찬 땅에게 은밀히 손을 내민다
초록의 새싹이 출렁이는 들판을 이룰 때까지
눈을 감아 바람으로 날만 다듬고
발을 고정한 채 달빛 아래 수도한다
이윽고 새벽녘 제 스스로 터득한 비법
스윽, 스윽 동녘 허공의 급소를 찌른다
밤새 바람과의 결투는 끝나고
이슬에 젖은 푸른 도량 가득
어둠을 뚫고 붉게 솟아오르는
아, 저 눈부신 햇살
-「풀의 검법」 전문
보이지않는, 일종의 '바람'과 같은 온갖 이념과 체제와 욕망의 이미지들과 싸우는 검법은 아무리 자연(풀)에 기댄다 할지라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어둠을 뚫고 붉게 솟아오르는/아, 저 눈부신 햇살"을 지향하는 내내 그 검법은 세련되고, 노련해지고, 낯설고, 익숙해져 끝내는 무화(無化)되어 독자들 가슴마다의 검법으로 싹틔우게 되리라 믿는다.
목차
목차
제1부
금 13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14
은테가 은퇴에게 16
늘그막 18
흰 똥 20
사라진 유물 21
어죽 22
사잣밥 24
가창오리 26
풀의 검법 28
간 30
대패 삼겹살 32
新자산어보 34
구름농도 측정사 36
즐거운 재단사 38
제2부
새의 친구 41
연체동물 42
바람의 DNA 44
화장장에서는 아무도 화장하지 않는다 46
물속의 궁전 48
차이나 50
나비너트 51
물의 거처 52
산정의 독서 54
겨울 입주 56
허밍 58
제주역에서 59
대패의 독서법 60
전기톱 62
로또 64
제3부
웃는 김밥 67
군 달걀 68
무료급식소 69
애벌레 떼의 식사법 70
무쇠가위 72
대봉 73
냉동 송편 74
붉은 새우 76
겨울무 77
그릇 78
등뼈 80
나무주걱 82
혀 84
비화 86
제4부
늙은 대장장이의 노래 89
새에게 묻는다 90
명태 92
코르크참나무 94
버드스트라이크 96
나무 눈발 98
자작나무숲 100
숯 화분 101
사자 102
구름 결혼식 104
꽃상여 106
유달산은 섬이다 108
스티로폼 상자 110
청둥오리떼 112
해설
탈각을 읊다; 시원적 정조(情操)의 재해석 113
| 백인덕(시인)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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