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나비 그리고 거짓말(시인동네 시인선 160)
임상요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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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 그리고 상처와 결핍의 위장술
2017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임상요 시인의 첫 시집 『흐르는 나비 그리고 거짓말』이 시인동네 시인선 160으로 출간되었다. 임상요의 시는 분열증적 발화에 가깝다. 시어들은 기호처럼 다른 것들과 접속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그렇지만 ‘의미’의 층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낯선 표현들을 만들어낸다. 오히려 시인은 그러한 ‘의미’ 중심의 읽기를 조롱하려는 듯 언어를 놀이의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2017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임상요 시인의 첫 시집 『흐르는 나비 그리고 거짓말』이 시인동네 시인선 160으로 출간되었다. 임상요의 시는 분열증적 발화에 가깝다. 시어들은 기호처럼 다른 것들과 접속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그렇지만 ‘의미’의 층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낯선 표현들을 만들어낸다. 오히려 시인은 그러한 ‘의미’ 중심의 읽기를 조롱하려는 듯 언어를 놀이의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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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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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엿보기
시는 종종 건축, 하나의 세계를 건설하는 행위에 비유된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건축함과 거주함의 은유를 통해 '시(언어)'와 '존재(거주)'의 연관성을 '시적 거주'라는 멋진 개념에 담아낸 적이 있다. 하지만 오해와 달리 하이데거가 말하는 '짓다(bauen)', 즉 '짓는다는 것'은 우리가 '건축'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떠올리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땅을 갈고 포도나무를 재배하는 것처럼 보존하려는 태도의 일종이고, 소중하게 여기고 보호하는 것, 즉 염려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시적 거주, 즉 '건축'은 곧 염려함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의 '건축' 개념은 휠덜린과 독일 낭만주의 같은 특수한 경우에만 해당할 뿐이어서 일반화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시'를 건축에 비유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 근거 가운데 하나는 '시(詩)'에 '짓다'라는 동사가 술어로 따라다니기 때문일 것이다. 시는 '쓰다', '짓다', '노래하다' 등의 다양한 동사를 술어로 수반하며, 그때마다 '시'에 대한 관념/이해 또한 달라진다. 우리는 흔히 시를 '쓴다'('시 쓰기')고 표현하지만, 때로는 '짓다'('시 짓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때 '시'와 '건축'은 '짓다'라는 술어를 공유함으로써 유비적 관계를 형성한다.
유비적 관계의 매개 없이도 문학 작품을 쓰는 행위는 하나의 세계를 건축/건설하는 행위로 이해된다. 이때 문학은 무(無)에서 유(有), 즉 없는 상태에서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행위로 간주된다. 또한 이때 작품은 일정한 내적 질서 내지 동일성을 유지한 객관적 대상으로 인식되고, 작가/시인의 의도의 산물, 나아가 독창적인 세계로 간주된다. 이 경우에 문학 작품을 읽는 행위는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일, 그 세계가 어떤 원리에 의해 만들어졌는가를 이해하는 행위와 동일시된다. 특히 이 단독성의 세계를 제대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이 세계에 온전히 들어가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문제는 이 단독성의 세계들이 독자의 진입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경우, '비평'의 임무는 독자들에게 이 세계의 출입문들 가운데 몇 개의 위치를 알려주는 일일 것이다. 임상요의 시세계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시인의 경험적 세계를 투명한 언어로 표현한 일반적인 서정시와 달리 임상요의 시는 난공불락, 요령부득의 세계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들은 응집력이 없어서 이른바 '의미'의 층위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가 즐겨 사용하는 비유 체계들 또한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거리가 상당히 멀어서 개인적 방언에 가깝다. 시인은 '~처럼'과 '~같이'를 사용한 비유체계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시에서 비유는 관념적인 것의 구체화를 위해 활용된다. 그런데 "못 박힌 관처럼 치이고"(「스프링」), "이상한 숙제처럼 주먹을 기다리고"(「망치」), "도시는 떡시루처럼 손을 뽑아 올리고"(「벙어리장갑처럼」), "심장은 천둥처럼 비를 맞고"(「칸칸 얼음」), "끓어오르는 석류처럼 알맹이를 보여줄 수 있겠다"(「변경」) 등처럼 임상요의 시에서 비유는 관념을 구체화하는 방향과는 정반대, 즉 맥락을 포착하기 어려운 단어들을 비유체계로 연결함으로써 사태를 한층 낯설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그리하여 "몸 밖으로 돌려놓은 슬리퍼처럼 할 말이 많아집니다//조문객의 악수 같이/뒤통수를 기다리는 대기 번호 같이//물질이 모이면 도마만큼 위험하고 괜찮니?"(「기여」)나 "나는 피카소 그림 같았고 방정식처럼 뾰족하게 웃었다"(「큐브의 두개골」) 같은 진술과 맞닥뜨릴 때 우리는 임상요의 시세계가 어쩌면 출구 없는 '함정' 같은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게 된다. '암호'가 자기입법적인 기호로 만들어지듯이 임상요의 시편들 또한 사회적 맥락과는 동떨어진 기호의 놀이가 아닐까. 그렇다면 언어 기호, 또는 기표가 동일하다고 해서 그것을 종래의 방식대로 읽으면 결국 해독불가능한 지점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연극연출가 앙토냉 아르토는 일정한 틀에 갇힌 패턴을 무비판적으로 반복하는 고전주의 연극을 비판하면서 신체를 관통하는 낯선 감각에 기초한 새로운 연극을 '잔혹극'이라고 명명한 적이 있다. 여기서의 잔혹성은 '피'가 난무하는 잔인함이 아니라 관객들로 하여금 신체를 통한 낯선 감각을 경험하게 하는 연극의 특징을 가리킨다. 동일한 맥락에서 말하자면 임상요의 시편들 또한 잔혹성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일찍이 경험한 적 없는 낯선 감각, 새로운 문법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것들로 건축된 언어적 세계는, 따라서 우리의 손쉬운 진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과가 싫어 액자보다 싫어
사과를 원했다 증거를 원했다 사과가 되기 위해 사과의 혀가 매뉴얼 없는 휴일을 원했다 사과는 오지 않고는 사과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탁자 아래 엎드린 똥개마냥 사과는 얼굴로 해야 하나
꽉 끼는 의족같이 사라지지 않는 사과는 불편했다 경전 없는 사과를 위해 우산을 쓰고
머릿속이 쾌적했다 패턴을 뒤집어도 같은 패턴이었다 사과가 되는 사과는 식별되지 않는 물질이었다 거품자석처럼 모래에 박혔다 허공이 훔친 사과를 돌려줄게
새는 순서대로 익사할 것 같았다 농담은 중독성에 가깝다 사과는 밥이었다 사과는 콩콩 뛰었다
이상한 서열의 감옥이었다
사과의 구역으로 침엽수는 등이 따갑고 등이 부끄럽고 사과의 장벽이 여기 있었다 눈 마주칠 때마다 사과는 계속 사과는 남아돌았다
사랑 따위 뭐라고 사랑을 고백한 손을 번쩍 들고
묻지 않고 다그쳤다 먹은 것 다 토해내라 고문도 없이 사과를 주기적으로 요구했다 사과를 모조리 불러냈다
사과에 갇혀 사과는 범죄 소굴 같았다
- 「아노미 상태」 전문
한 시인의 시를 읽을 때, 우리가 반복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스타일, 즉 왜 이러한 방식으로 썼을까 하는 물음이다. 특히 임상요의 시처럼 경험에 대한 사실적 진술이 아니라 표현 형식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한, 이른바 유희적·실험적 성격이 강한 작품일 경우 이 물음의 가치는 한층 높아진다. 그것은 현대 회화에서 작품의 물성(物性)만큼이나 아이디어가 중요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위의 인용에서 확인되듯이 임상요의 시는 분열증적 발화에 가깝다. 시어들은 기호처럼 다른 것들과 접속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그렇지만 '의미'의 층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낯선 표현들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표현에서 의미의 중심이나 주도적인 이미지 같은 견고한 요소들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시인은 그러한 '의미' 중심의 읽기를 조롱하려는 듯 언어를 놀이의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 고봉준(문학평론가)
■ 시인의 산문
나는 자꾸 관여하는 사람. 액체로 꾸물대는 사람. 별과 트럭이 어떻게 섞이는지, 간혹 해줄 수 있는 언어가 들릴 때가 있었다. 사람 하나를 만들었다. 참 쉬운 선택이었다. 탄생이었다. 나는 말갛게 누워서 우는 척을 했다. 이런 내 성격이 염려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타깃이 된다는 것, 애써 헤아려보는 것, 가령 목 없는 영혼이 베개를 들고 옮겨 다니는 것. 어떤 영혼은 젖은 머리를 꾹 짜면서 흐림을 식별했다. 다른 코로 떠들썩했다. 놀이와 노력이란 걸 많이 해서 창문은 지문들로 넘쳐났다. 멀미에 빠졌다. 탄산처럼 선이 넘쳤다. 사람을 거두는 일이 반김을 되풀이했다. 창문이 눕기를 결심하고서 나는 아팠다.
시는 종종 건축, 하나의 세계를 건설하는 행위에 비유된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건축함과 거주함의 은유를 통해 '시(언어)'와 '존재(거주)'의 연관성을 '시적 거주'라는 멋진 개념에 담아낸 적이 있다. 하지만 오해와 달리 하이데거가 말하는 '짓다(bauen)', 즉 '짓는다는 것'은 우리가 '건축'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떠올리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땅을 갈고 포도나무를 재배하는 것처럼 보존하려는 태도의 일종이고, 소중하게 여기고 보호하는 것, 즉 염려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시적 거주, 즉 '건축'은 곧 염려함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의 '건축' 개념은 휠덜린과 독일 낭만주의 같은 특수한 경우에만 해당할 뿐이어서 일반화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시'를 건축에 비유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 근거 가운데 하나는 '시(詩)'에 '짓다'라는 동사가 술어로 따라다니기 때문일 것이다. 시는 '쓰다', '짓다', '노래하다' 등의 다양한 동사를 술어로 수반하며, 그때마다 '시'에 대한 관념/이해 또한 달라진다. 우리는 흔히 시를 '쓴다'('시 쓰기')고 표현하지만, 때로는 '짓다'('시 짓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때 '시'와 '건축'은 '짓다'라는 술어를 공유함으로써 유비적 관계를 형성한다.
유비적 관계의 매개 없이도 문학 작품을 쓰는 행위는 하나의 세계를 건축/건설하는 행위로 이해된다. 이때 문학은 무(無)에서 유(有), 즉 없는 상태에서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행위로 간주된다. 또한 이때 작품은 일정한 내적 질서 내지 동일성을 유지한 객관적 대상으로 인식되고, 작가/시인의 의도의 산물, 나아가 독창적인 세계로 간주된다. 이 경우에 문학 작품을 읽는 행위는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일, 그 세계가 어떤 원리에 의해 만들어졌는가를 이해하는 행위와 동일시된다. 특히 이 단독성의 세계를 제대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이 세계에 온전히 들어가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문제는 이 단독성의 세계들이 독자의 진입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경우, '비평'의 임무는 독자들에게 이 세계의 출입문들 가운데 몇 개의 위치를 알려주는 일일 것이다. 임상요의 시세계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시인의 경험적 세계를 투명한 언어로 표현한 일반적인 서정시와 달리 임상요의 시는 난공불락, 요령부득의 세계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들은 응집력이 없어서 이른바 '의미'의 층위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가 즐겨 사용하는 비유 체계들 또한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거리가 상당히 멀어서 개인적 방언에 가깝다. 시인은 '~처럼'과 '~같이'를 사용한 비유체계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시에서 비유는 관념적인 것의 구체화를 위해 활용된다. 그런데 "못 박힌 관처럼 치이고"(「스프링」), "이상한 숙제처럼 주먹을 기다리고"(「망치」), "도시는 떡시루처럼 손을 뽑아 올리고"(「벙어리장갑처럼」), "심장은 천둥처럼 비를 맞고"(「칸칸 얼음」), "끓어오르는 석류처럼 알맹이를 보여줄 수 있겠다"(「변경」) 등처럼 임상요의 시에서 비유는 관념을 구체화하는 방향과는 정반대, 즉 맥락을 포착하기 어려운 단어들을 비유체계로 연결함으로써 사태를 한층 낯설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그리하여 "몸 밖으로 돌려놓은 슬리퍼처럼 할 말이 많아집니다//조문객의 악수 같이/뒤통수를 기다리는 대기 번호 같이//물질이 모이면 도마만큼 위험하고 괜찮니?"(「기여」)나 "나는 피카소 그림 같았고 방정식처럼 뾰족하게 웃었다"(「큐브의 두개골」) 같은 진술과 맞닥뜨릴 때 우리는 임상요의 시세계가 어쩌면 출구 없는 '함정' 같은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게 된다. '암호'가 자기입법적인 기호로 만들어지듯이 임상요의 시편들 또한 사회적 맥락과는 동떨어진 기호의 놀이가 아닐까. 그렇다면 언어 기호, 또는 기표가 동일하다고 해서 그것을 종래의 방식대로 읽으면 결국 해독불가능한 지점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연극연출가 앙토냉 아르토는 일정한 틀에 갇힌 패턴을 무비판적으로 반복하는 고전주의 연극을 비판하면서 신체를 관통하는 낯선 감각에 기초한 새로운 연극을 '잔혹극'이라고 명명한 적이 있다. 여기서의 잔혹성은 '피'가 난무하는 잔인함이 아니라 관객들로 하여금 신체를 통한 낯선 감각을 경험하게 하는 연극의 특징을 가리킨다. 동일한 맥락에서 말하자면 임상요의 시편들 또한 잔혹성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일찍이 경험한 적 없는 낯선 감각, 새로운 문법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것들로 건축된 언어적 세계는, 따라서 우리의 손쉬운 진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과가 싫어 액자보다 싫어
사과를 원했다 증거를 원했다 사과가 되기 위해 사과의 혀가 매뉴얼 없는 휴일을 원했다 사과는 오지 않고는 사과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탁자 아래 엎드린 똥개마냥 사과는 얼굴로 해야 하나
꽉 끼는 의족같이 사라지지 않는 사과는 불편했다 경전 없는 사과를 위해 우산을 쓰고
머릿속이 쾌적했다 패턴을 뒤집어도 같은 패턴이었다 사과가 되는 사과는 식별되지 않는 물질이었다 거품자석처럼 모래에 박혔다 허공이 훔친 사과를 돌려줄게
새는 순서대로 익사할 것 같았다 농담은 중독성에 가깝다 사과는 밥이었다 사과는 콩콩 뛰었다
이상한 서열의 감옥이었다
사과의 구역으로 침엽수는 등이 따갑고 등이 부끄럽고 사과의 장벽이 여기 있었다 눈 마주칠 때마다 사과는 계속 사과는 남아돌았다
사랑 따위 뭐라고 사랑을 고백한 손을 번쩍 들고
묻지 않고 다그쳤다 먹은 것 다 토해내라 고문도 없이 사과를 주기적으로 요구했다 사과를 모조리 불러냈다
사과에 갇혀 사과는 범죄 소굴 같았다
- 「아노미 상태」 전문
한 시인의 시를 읽을 때, 우리가 반복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스타일, 즉 왜 이러한 방식으로 썼을까 하는 물음이다. 특히 임상요의 시처럼 경험에 대한 사실적 진술이 아니라 표현 형식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한, 이른바 유희적·실험적 성격이 강한 작품일 경우 이 물음의 가치는 한층 높아진다. 그것은 현대 회화에서 작품의 물성(物性)만큼이나 아이디어가 중요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위의 인용에서 확인되듯이 임상요의 시는 분열증적 발화에 가깝다. 시어들은 기호처럼 다른 것들과 접속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그렇지만 '의미'의 층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낯선 표현들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표현에서 의미의 중심이나 주도적인 이미지 같은 견고한 요소들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시인은 그러한 '의미' 중심의 읽기를 조롱하려는 듯 언어를 놀이의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 고봉준(문학평론가)
■ 시인의 산문
나는 자꾸 관여하는 사람. 액체로 꾸물대는 사람. 별과 트럭이 어떻게 섞이는지, 간혹 해줄 수 있는 언어가 들릴 때가 있었다. 사람 하나를 만들었다. 참 쉬운 선택이었다. 탄생이었다. 나는 말갛게 누워서 우는 척을 했다. 이런 내 성격이 염려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타깃이 된다는 것, 애써 헤아려보는 것, 가령 목 없는 영혼이 베개를 들고 옮겨 다니는 것. 어떤 영혼은 젖은 머리를 꾹 짜면서 흐림을 식별했다. 다른 코로 떠들썩했다. 놀이와 노력이란 걸 많이 해서 창문은 지문들로 넘쳐났다. 멀미에 빠졌다. 탄산처럼 선이 넘쳤다. 사람을 거두는 일이 반김을 되풀이했다. 창문이 눕기를 결심하고서 나는 아팠다.
목차
목차
제1부
우정ㆍ13/ 흐르는 것들의 중폭된 거짓말ㆍ14/ 만두를 생각합니다ㆍ16/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ㆍ18/
거울을 팔아요ㆍ20 /스프링ㆍ22/망치ㆍ23/ 벙어리장갑처럼ㆍ24/ 안부는 왜 소란스러울까ㆍ26/
농담처럼ㆍ28/ 칸칸 얼음ㆍ30/ 변경ㆍ32/ 피아노 계단ㆍ34
제2부
소원은 어디까지입니까ㆍ37/ 잡아라 콩ㆍ38/ 기여ㆍ40/ 큐브의 두개골ㆍ42/ 별 이름 B612ㆍ44/
피그말리온 효과ㆍ46/ 얼음주머니ㆍ48/ 원피스ㆍ49/ 도를 넘네ㆍ50/ 종소리는 삐딱했다ㆍ52/
누가 운동장을 퍼뜨렸을까ㆍ54/ 콜라를 주세요ㆍ56
제3부
열매는 질척거렸다ㆍ59/ 아노미 상태ㆍ60/ 이익을 보셨습니까ㆍ62/ 나무 침대ㆍ64/
그런 유전이 내게 있었다ㆍ66/ 왜 녹색이 되나ㆍ68/ 일요일의 맛ㆍ70/ 설탕의 절규ㆍ72/
커튼에서 이모 냄새가 났다ㆍ74/ 페르조나ㆍ76/ 빛ㆍ78/ 뭘 할까요 영순위ㆍ80
제4부
손톱 밑에 눈이 내리고ㆍ85/ 내추럴은 어디 있습니까ㆍ86/ 본드의 시간ㆍ88/ 도서관을 휴관합니다ㆍ90/
소수자들ㆍ92/ 헬로우 키티ㆍ94/ 레인 바코드ㆍ96/ 비잔티움ㆍ98/ 울타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ㆍ100/
스무 살ㆍ102/ 고무줄ㆍ104/ 플랫폼의 계절ㆍ106/ 나는 완벽했다ㆍ108
해설 놀이, 그리고 상처와 결핍의 위장술/고봉준(문학평론가)ㆍ109
우정ㆍ13/ 흐르는 것들의 중폭된 거짓말ㆍ14/ 만두를 생각합니다ㆍ16/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ㆍ18/
거울을 팔아요ㆍ20 /스프링ㆍ22/망치ㆍ23/ 벙어리장갑처럼ㆍ24/ 안부는 왜 소란스러울까ㆍ26/
농담처럼ㆍ28/ 칸칸 얼음ㆍ30/ 변경ㆍ32/ 피아노 계단ㆍ34
제2부
소원은 어디까지입니까ㆍ37/ 잡아라 콩ㆍ38/ 기여ㆍ40/ 큐브의 두개골ㆍ42/ 별 이름 B612ㆍ44/
피그말리온 효과ㆍ46/ 얼음주머니ㆍ48/ 원피스ㆍ49/ 도를 넘네ㆍ50/ 종소리는 삐딱했다ㆍ52/
누가 운동장을 퍼뜨렸을까ㆍ54/ 콜라를 주세요ㆍ56
제3부
열매는 질척거렸다ㆍ59/ 아노미 상태ㆍ60/ 이익을 보셨습니까ㆍ62/ 나무 침대ㆍ64/
그런 유전이 내게 있었다ㆍ66/ 왜 녹색이 되나ㆍ68/ 일요일의 맛ㆍ70/ 설탕의 절규ㆍ72/
커튼에서 이모 냄새가 났다ㆍ74/ 페르조나ㆍ76/ 빛ㆍ78/ 뭘 할까요 영순위ㆍ80
제4부
손톱 밑에 눈이 내리고ㆍ85/ 내추럴은 어디 있습니까ㆍ86/ 본드의 시간ㆍ88/ 도서관을 휴관합니다ㆍ90/
소수자들ㆍ92/ 헬로우 키티ㆍ94/ 레인 바코드ㆍ96/ 비잔티움ㆍ98/ 울타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ㆍ100/
스무 살ㆍ102/ 고무줄ㆍ104/ 플랫폼의 계절ㆍ106/ 나는 완벽했다ㆍ108
해설 놀이, 그리고 상처와 결핍의 위장술/고봉준(문학평론가)ㆍ109
저자
저자
임상요
강원 삼척에서 태어나 2017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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