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몸짓에도 눈길을 사로잡던(시인동네 시인선 272)
이연숙 시집
시인이 사물을 떠날 수 없는 이유
2022년 《시와소금》으로 등단한 이연숙 시인의 첫 시집 『사소한 몸짓에도 눈길을 사로잡던』이 시인동네 시인선 272로 출간되었다. 이연숙은 근본적으로 관계 지향적인 시인이다. 이연숙은 항상 바깥을 쳐다보며 사유한다. 바깥의 표정과 소리를 읽는다. 사물들의 잠든 소리를 듣고, 사물들의 지워진 얼굴을 복원한다. 사물들의 눈과 귀가 되어 대신 듣고 대신 보고 대신 운다. 자아와 세계 사이의 이런 수평적 관계 속에서 이연숙의 내면과 세계와 포개진다. 그렇게 세계와의 열린 관계를 지향한다. 낮고 높은 것들이 서로 몸을 숙여 물처럼 수평을 이루는 공간에서 존재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가 열린다. 대화적 관계 안에서 존재들은 상대를 전유하거나 구속하지 않는다. 주체와 대상, 시인과 세계가 서로의 음계를 존중하며 스미고 섞일 때, 아름다운 화음이 생겨난다. 이 시집은 그렇게 열린 정신이 만든 다성적 사유의 결과물이다.
[시인의 말]
눈 오는 새벽
아무도 없는 마을 길을 걸었다.
뒤돌아보니 비뚤 삐둘한 발자국
그 또한 아름다웠다.
2026년 3월
이연숙
Couldn't load pickup availability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이 시집을 읽어나가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딱 걸리는 부분이 있다. 이 문턱 같은 것, 혹은 여는 문고리 같은 시들이야말로 이연숙 시의 특별한 세계를 보여준다. 이런 시들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사물시? 굳이 그런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도 『기본적인 송가(Odas Elementales)』(1954)라는 시집에서 일상의 사물들을 집중적으로 건드려 명품 송가들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양말, 포도주, 토마토, 양파, 빵처럼 너무 흔해 특별해 보이지 않는 사물들을 끌어들여 그 안에 녹아 있는 삶과 세계의 특별한 흔적들을 기렸다. 네루다가 볼 때 말 그대로 '순수한', 의미 부재의 사물이란 없다. 사물엔 그것이 만난 자연과 인간의 기록이 있고, 그런 기록들은 시간과 공간과 주체에 따라 매우 다양한 문양을 가지고 있다. 이연숙 시인은 사물을 상징이나 은유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의 사물들은 상징이나 은유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 의미의 발원지이다.
화장실 작은 창문으로 검은 가죽나무가 살고 있었지 태풍이 몹시 사나운 날에는 휘어진 가지들이 비닐하우스 위로 비닐을 찢을 듯 위태로웠어 사나흘 내리 비가 퍼부으면 흙물이 도로를 다 덮고 산은 품고 있던 모래알들을 토해내곤 했어 모래알들은 스크럼을 짜며 아래로 아래로 전진하고 검은 가죽나무 가지들은 휘청이며 땅으로 쏟아졌다가는 튕겨 올라 하늘로 솟구쳤어 누군가 환호성을 질렀지 저것 좀 보아 나무들이 하늘의 뺨따구를 힘껏 치고 있어 화장실 작은 창문으로 구름도 지나고 사나운 바람도 지나가고 폭풍우도 지나갔어
잠깐 그렇게
세상이 곧 뒤바뀔 거 같은 순간이 지나갔지 폭우가 몰려오면 나는 뭔지 모를 기대에 차서 오래도록 화장실 작은 창문 곁을 지키게 되었어
- 「내가 화장실을 떠날 수 없는 이유」 전문
이연숙 시인의 사물시에는 서사가 존재한다. 화장실의 작은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은 마치 커다란 일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는 듯, 서사성(narrativity)으로 충만하다. "검은 가죽나무"라는 무거운 이름, 태풍이 몰려와 비닐하우스를 찢을 듯 위태하게 바람이 불고, 흙물이 도로를 뒤엎는 풍경, 그리고 마침내 그 검은 가죽나무 가지들이 하늘로 솟구치는 풍경은 절정을 향해 달리는 계시록의 이야기 같다. 화자는 화장실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거대 서사가 폭풍처럼 일어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뭔지 모를 기대에 차" 있다. 화자는 이 세계의 거대한 변화를 꿈꾼다. "세상이 곧 뒤바뀔 것 같은 순간"은 화자로 하여금 화장실을 떠날 수 없게 만든다. 이 시는 어떤 변화의 징후만을 보여줄 뿐, 그것도 풍경의 위태로운 상황만을 보여줄 뿐, 그 이상의 서사로 나가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중-종의 완결된 서사를 가진 것만을 '이야기(story)'라 불렀는데, 그렇다면 이 시에는 이야기의 시작인지 중간인지 아니면 마지막인지 알 수 없는 어떤 순간만 나와 있다. 그러므로 이 시의 '시적인 것(the poetic)'은 완결되지 않은 서사에서 텍스트가 말하지 않은 것, 침묵하고 있는 부분에서 발생한다. 시인에게 화장실의 창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모든 세계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생리의 프레임으로 읽어야 한다는 뜻인가. 세계는 급변과 반전의 순간에 가장 '볼 만하다'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종결이 아니라 과정 자체라는 뜻인가. "나무들이 하늘의 뺨따귀를 힘껏 치"는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밑바닥에 있는 복수의 하찮은 것들이 모여 절대 단수 하늘의 뺨을 갈기는 일은 얼마나 많은 의미의 상징-행위인가. 이연숙은 단순한 사물을 기계적 은유로 바로 끌고 가지 않고, 그것 자체에서, 그것의 몸에서, 수많은 귀결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서사를 읽어낸다.
- 오민석(문학평론가, 단국대 명예교수)
목차
목차
낙하ㆍ13/폼페이ㆍ14/검은 크레파스ㆍ16/이웃사촌ㆍ17/사랑의 방식ㆍ18/녹색다방ㆍ20/새 몰이ㆍ21/21세기 놀부전ㆍ22/잠이 오는 길ㆍ24/어땠을까ㆍ25/마지막 눈ㆍ26/지금 308호ㆍ28/내가 화장실을 떠날 수 없는 이유ㆍ29/아카시나무ㆍ30/유구무언ㆍ32
제2부
바늘꽂이ㆍ35/우물 이야기ㆍ36/멈추지 않는 페달ㆍ38/스위트 홈ㆍ39/애초에 그들은 만나지 않았다ㆍ40/달려라 은바퀴ㆍ42/꽃무덤ㆍ43/잠든 강ㆍ44/할머니의 툇마루ㆍ46/봄ㆍ47/빈폴 리조트ㆍ48/풍경ㆍ50/책의 노후일기ㆍ51/청주가 뜨는 시간ㆍ52/유령ㆍ54
제3부
일곱 번째 별ㆍ57/당근은 맛있어ㆍ58/어떤 편지ㆍ60/눈사람ㆍ61/독한 것ㆍ62/에어포켓ㆍ64/5초 전ㆍ65/적당한 눈의 색깔ㆍ66/아름다운 일미집ㆍ68/눈물은 왜 눈에서 날까ㆍ70/물의 말씀ㆍ71/외딴집ㆍ72/마음의 문고리ㆍ74/여섯 걸음ㆍ75/노랑붓꽃의 속력ㆍ76/달마사 일현 스님ㆍ78
제4부
큰오빠ㆍ81/나무가 되어ㆍ82/마른장마ㆍ84/수평ㆍ86/만월ㆍ87/교동 향교ㆍ88/미루나무 각시ㆍ90/눈물이 나오려는 날엔ㆍ92/시와 변의 상관관계ㆍ94/아버지의 소원ㆍ95/겨울 벚나무ㆍ96/낡은 양말ㆍ98/외양간 옆 작은방ㆍ100/수레국화를 위한 기도ㆍ102/11월의 장미ㆍ104
해설 오민석(문학평론가, 단국대 명예교수)ㆍ105
저자
저자
Your payment information is processed securely. We do not store credit card details nor have access to your credit card informat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