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무지개(개정판)(고종석 선집 언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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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을 건설한 인간,
생각하는 인간은
말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작가 고종석의 사유 근간, 언어학!
당대의 탁월한 한국어 문장가 고종석의 선집 둘째 권
생각하는 인간은
말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작가 고종석의 사유 근간, 언어학!
당대의 탁월한 한국어 문장가 고종석의 선집 둘째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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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눈부신 언어학적 성찰들
언어는 사유 세계의 공기와 같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운용하고, 다른 정신과 만나는 까닭이다. 그것은 거의 의식되진 않지만 생각을 담는 그릇이며, 때로는 그 자체가 생각의 방향을 결정짓기도 한다. 하지만 언어 자체를 관조하는 지식인은 그리 많지 않으며, 더구나 그것을 대중의 눈높이에서 풀어내는 이는 한국 사회에서 찾기 힘들다. 작가 고종석이 발표해온 수십 편의 언어학 에세이는 이런 맥락에서 교양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왔다.
이 책은 고종석선집(총5권 기획: 소설, 언어학, 시사, 문학, 에세이)의 둘째 권으로서, 작가 고종석의 사유 세계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언어학 에세이를 엄선해 담았다. 고종석의 단행본 《감염된 언어》《말들의 풍경》《국어의 풍경들》《자유의 무늬》 중에서 선집의 위상에 걸맞은 글 20편을 가려 수록했다. 1998년부터 2007년에 이르는 약 10년의 기간 동안 생산해온 글들이다. 그가 서문 격인 글에서 밝히고 있듯이 "주류 언어학 내부의 좁다란 논점들보다는 언어를 사회적 맥락에서 보는 널따란 논점들과 주로 관련"되어 있으며, "주로 한국어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더러 다른 자연언어들에 대한 탐색도 포함하고 있다." 고종석은 학술적 딱딱함도, 화려한 말잔치도 아닌 적절한 균형의 지점에서 '언어란 무엇인가, 한국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영어와 한자의 위상을 어떻게 정립해야 할지, 이른바 '한국어'의 실체란 무엇인지 등 민감한 문제에 대한 치밀한 논의를 펼친다. 또한 표준어/사투리, 외래어/순우리말 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치열한 투쟁의 양상을 살펴보는가 하면, 모음체계의 변화와 심리형용사ㆍ부정문ㆍ시제 등 한국어의 다양한 풍경들을 세심하게 바라본다. 독자들은 논리적이고 수려한 문장으로 담아낸 눈부신 언어학적 성찰들을 한 권으로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는 한국어'들'이다
좋은 학자는 관찰력이 뛰어나다. 언어학자 고종석은 이런 의미에서 좋은 학자다. 이를테면 그는 한국어와 한글이 서로 다른 범주의 것이라는 점을 관찰하고, 이를 분명히 구별한다. 즉 한국어는 언어이고, 한글은 이를 표기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또 그는 한국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점을 중요하게 지적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15세기 중엽으로 돌아가, 한글을 창제했다고 알려진 음운학자들과 그들을 이끌었던 세종대왕을 만난다고 해도, 우리는 그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다시 말해 15세기 한국어와 21세기 한국어는 서로 '다른' 언어다. (…) 우리는 7~10세기에 한국인들이 쓰던 언어와 15세기 한국인들이 쓰던 언어와 19세기 한국인들이 쓰던 언어를 모두 '한국어'라고 부른다. 그것들이 서로 '다른' 언어인데도 말이다._16쪽
사실 단일한 한국어라는 것은 없다. 실제 존재하는 것은 한국어'들'이다. 그런데 인간 인식의 한계로 인해 이 점을 자주 망각하면서 수많은 담론상의 혼란과 금기가 생겨났다. 즉 지금 여기의 한국어만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이것이 흔들리고 변화하는 것을 '타락'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어를 좁은 테두리에 가두면서 발전적 논의를 가로막는다. 고종석은 한국어가 실은 한국어'들'임을 분명히 강조하며, 민족주의적 색채로 물든 담론의 난마를 헤쳐나갈 강력한 전제를 확보한다.
만일 순수한 한국어, 단일한 한국어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을 지켜야 할 이유도, 회복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외래의 언어를 막을 이유 또한 없다. 고종석이 보기에 언어는 서로 섞이고 스미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그럴 때 지극히 아름답다. 예컨대 18세기 말 이래 시작된 일본 메이지 시대의 번역 열풍이 그렇다.
확실한 것은, 메이지 이래 일본 열도에서 만들어진 무수한 신조어들은 한자라는 매개를 통해 즉각 한국어에 흡수됨으로써 한국어의 어휘를 배가시키고 한국인들의 세계 인식 수준을 크게 높였다는 사실이다. 그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해내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말의 풍부화와 그것을 통한 우리 의식의 획기적 전환이 우리에게 좋은 일이었다는 사실마저 변하는 것은 아니다._61쪽
한자어가 일본제라고 해서 그것이 한국어의 굴욕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영어는 프랑스어에 미칠 듯한 열등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영어의 그 넉넉함은 프랑스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국제적 위상을 오늘날 확립하게끔 했다. 마찬가지로 한국어가 빈곤하고 위축되는 것은 민족주의적 열정 아래 '순수 한국어'를 고집할 때다.
영어공용어화론을 지지한다
언어학자 고종석의 미덕은 민족주의적 열정에서 자유롭다는 점이다. 그는 민족주의적 욕망을 거부하고, 그보다 정확한 관찰과 사실에 무게를 둔다. 그가 1998년 학계의 일대 파란을 일으킨 복거일의 영어공용어화론을 지지하는 까닭이다. 고종석이 보기에 영어와 한국어를 같이 쓰는 상황은 거리낄 게 없다.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굴욕적인 일도 아니다.
우리가 이중언어 사용자가 됐을 때, 더 나아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먼 미래에 민족어가 '박물관언어'가 됐을 때, 궁극적으로 민족이 사라져버렸을 때, 우리는 잠시 정체성 문제에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문제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민족이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가 정체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잃는 것은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일 것이다. 우리는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는 대신에 세계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인류로서의 정체성을 얻을 것이고, 민족주의의 억압이 풀린 여러 단계의 인간관계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들을 얻게 될 것이다._153쪽
21세기 한국어와 21세기 영어의 거리만큼이나 21세기 한국어와 7세기 한국어의 거리가 떨어져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영어공용어화는 그저 좀더 쓸모 있는 언어를 하나 더 쓰는 것일 따름이다. 더구나 기록언어로서의 한국어는 사실상 번역문에서 그 형태를 잡아나갔다. 단적으로, 한글로 쓰인 한국어의 제1성은 "나랏말?미 듕귁에 달아 문?와로 서르 ??디 아니??…"라는 '훈민정음 언해'의 번역문에서 시작했다. 한국어를 한국어로 만드는 내재적인 순수함 따위는 없는 것이다. 고종석은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긴 글에서 이 논쟁이 품고 있는 여러 측면들을 동서양의 사례를 아우르며 세밀히 검토한다. 이로써 한국 사회의 주류 언어관에 민족주의가 깊이 침윤되었음을 밝히는 한편, 한국어에 대한 인식 지평을 확장시킨다.
민족주의 없이 한국어를 존중하다
수천에서 1만여에 이른다는 자연언어들 가운데, 사용자 수를 기준으로 한국어는 12~13위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제2 언어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언어의 위세는 그에 못 미치는 것이다. 고종석은 이러한 현실과 그 이유를 [한국어의 미래]에서 짚어보면서, "교통어로서 한국어의 미래는 밝지 않다"고 냉철하게 진단한다. 이런 현실에 더해 영어공용어화론을 주장하는 고종석은 한국어가 곧 소멸할 것이라고, 소멸해도 된다고 믿는 것일까?
나로서는 민족어가 사라지는 상황이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나는 민족어들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어가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민족이, 민족국가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국가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것의 소멸을 추구했던 70여 년의 사회주의 실험을 거치고도 살아남았다._142쪽
역시나 현실적인 진단이다. 그는 민족어인 한국어가 긴 시간을 두고 살아남을 것이라고 본다. 이런 인식 아래 그는 한국어의 다양한 현상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관찰한다. 즉 민족주의 없이 한국어를 존중하는 하나의 모범을 보여준다. 그는 무조건적인 예찬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사실들을 흥미롭게 짚어낸다. 예컨대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문자체계인 한글을 상찬하면서도, 중국 한자의 영향으로 글자를 퇴행적으로 네모 형태로 모아쓰게 된 점을 지적한다. 또한 우리가 무심히 쓰는 말들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한국어의 다층적인 겹과 복잡한 논리를 드러낸다. 가령 '이 국은 짜지 못하다'는 가능하지만 '이 국은 못 짜다'는 불가능한 이유, '신은 내일 죽어요'는 되지만 '어머니는 내일 아프셔요'는 안 되는 까닭을 언어학적으로 규명한다. 독자들은 투명한 눈으로 한국어를 가감 없이 바라보는 것과 더불어, 언어와 삶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책속으로 이어서]
03 말
문명을 건설한 인간, 생각하는 인간은 말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생각의 뭉치를 형태소로 나누고 소리의 뭉치를 음소로 나눈 뒤 이들을 이리저리 배열하고 결합하고 대응시키며 표현과 소통의 길을 뚫는 언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문명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_190쪽
한국어 사용자는 메시지 수신자와 자신의 위계를 설정하기 전에는 단 한 마디도 입 밖에 낼 수 없다. 언어로 표현되는 그 위계 질서를 우리는 다시 그 언어를 통해 내면화한다. 경어를 썼느냐 반말을 썼느냐가 흔히 사람들 사이의 다툼의 원인이 되는 것이 그 증거다. 경어법은 연령의 위계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신분적 위계를 드러내고, 그 신분적 위계는 그것을 드러내는 경어법에 의해 다시 강화된다. _194쪽
문자의 발명은 분명히 인류의 지식 축적 방식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그 덕분에 인류의 집단적 기억의 용량은 무한대로 늘어났다. 그러나, 애달파라, 바로 그 집단적 기억의 폭증은 개인적 기억의 왜소화를 가져왔다. 기억의 전승을 문자가 떠맡게 되자마자, 인간은 자기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굳이 머릿속에 담아둘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인쇄술의 보급은 이야기꾼과 음유 시인들을 퇴출시켰다. 기계류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발명품들이 그렇듯, 문자의 발명도 인간 육체의 완전성을 위해서는 불행한 일이었다. _195쪽
04 표준어의 폭력: 국민국가 내부의 식민주의
표준어가 다른 방언들보다 위세를 떨치게 된 것이 그 내재적 매력 때문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다시 말해 서울말의 위세는 이 말이 예컨대 강원도방언이나 전라도방언보다 본질적으로 더 섬세하다거나 명료하다거나 아름다워서 생긴 것이 아니다. 언어학의 지평에서는 서울말 역시 한국어의 한 방언일 뿐이고, 서울말과 다른 방언 사이에 위계를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울말의 위세가 큰 것은 그러니까 언어 바깥 사정, 구체적으로 이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힘 때문이다. 한국어방언 가운데 영남방언이 비교적 패기 있게 서울말에 맞서고 있는 사정 역시 이로써 설명할 수 있다._199쪽
코크니 영어 사용자들 다수는, 그 언어에 들씌워진 상징적 의미를 잘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그 '천한' 언어를 사용한다. 호남 출신의 서울 거주자들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주류 언어에 동화하는 것을 제 정체성의 굴욕적 포기로 여기는 방어 본능 때문일 것이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표준 프랑스어에 동화하려는 프랑스인들의 욕망이 주로 중간계급에서 두드러지고, 상층계급과 하층계급은 유년기 언어에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_201쪽
05 외래어와의 성전: 매혹적인 그러나 불길한 순혈주의
언어민족주의의 칼날이 무슨 이유로든 칼집을 벗어났을 때, 그 칼끝은 직접 외국어를 향하기보다 민족어 안의 '불순물' 곧 외래어를 향하는 것이 예사다. 외국어 자체는 언어민족주의자들로서도 맞서 싸우기가 너무 버거운 상대다. 반면에 외래어는 사뭇 만만한, 그러나 가증스러운 내부의 적으로 비친다._205쪽
민족주의는 이념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감정 상태이므로 언어순화운동은 어떤 언어공동체에서도 적잖은 지지자들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반면에 언어순화운동이 어느 정도 효과를 내려면 권력이 고도로 집중된 전체주의 사회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엄연하다. 북한에서 이 운동이 그나마 효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 사회체제의 경직성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불길한 함축은 고귀한 민족애의 실천 형식으로서 언어순화에 매력을 느끼는 선남선녀들이 특히 곱씹어보아야 할 생각거리다._209쪽
이런 순화운동의 방식이 대체로 번역차용(외국어 표현의 구조를 그대로 둔 채 형태소를 일대일로 번역하는 것) 형식의 베끼기calque여서, 거기서 어떤 정신의 확장이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자동사'와 '제움직씨', '사물'과 '일몬', '총론'과 '모도풀이'는 똑같은 구조를 지닌 말이다. 다시 말해 앞말을 뒷말로 베껴낸다고 해서, 거기서 새로운 지적 지평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매우 하찮은 지적 작업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쉽게 억누를 수 없는 에너지다. 말하자면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하찮은 지적 작업은 앞으로도 운동량을 쉬 잃지 않을 것이다. _210~211쪽
06 여자의 말, 남자의 말: 젠더의 사회언어학
한국어의 성적 방언으로 흔히 거론되는 예는 일부 친족명칭이다. 여성화자는 같은 성의 손위 동기同氣나 선배를 '언니'라 부르고, 다른 성의 손위 동기나 선배를 '오빠'라 부른다. 반면에 남성화자는 같은 성의 손위 동기나 선배를 '형'이라 부르고, 다른 성의 손위 동기나 선배를 '누나'라 부른다. 물론 이 규범이 돌처럼 단단한 것은 아니다. 20세기 전반기까지만 해도 일부 지역에 선 남성화자가 같은 성의 손위 동기를 '언니'라 부르기도 했고, 1970?1980년대에는 여학생들이 남자 선배를 '형'이라 부르는 일이 예사였다._213~214쪽
현실은 언어 이전에 있는 것이어서 언어를 바꾸려는 노력이 고스란히 현실을 바꾸는 힘이 될 수는 없겠지만, 언어의 비틀림을 응시하는 일은 현실의 비틀림을 살피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_220쪽
07 거짓말이게 참말이게?: 역설의 풍경
한 무리의 논리학자들과 언어철학자들은 거짓말쟁이 역설을 의미론의 문제가 아니라 화용론의 문제로 보아, 진리의 개념 대신에 진술의 속성에 주목했다. 말하자면 "내 명령은 어느 것도 따르지 마시오" 같은 문장에서 드러나는 명령의 역설, "나는 어떤 약속도 지키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같은 문장에서 드러나는 약속의 역설, "나는 내가 어떤 내기에서고 지리라는 쪽에 걸겠다" 같은 문장이 드러내는 내기의 역설 따위가 명령, 약속, 내기 라는 언어 '행위'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해 발생하듯, 거짓말쟁이 역설도 '참이다'라는 낱말에 담긴 '동의'라는 행위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해 생겨난다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참이다'라는 진리 술어도, '명령하다' '약속하다' '내기 걸다' 같은 전형적 수행동사들처럼, (어떤 진술을 주장하거나 동의한다는) 수행기능을 지닌다는 것이다. _225쪽
러셀의 역설이란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 맞닥뜨리는 역설이다. 이 집합은 자신을 원소로 갖는가 그렇지 않은가? 갖는다고 가정하면 갖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고, 갖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갖는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러셀은 이런 예를 들었다. 어느 마을에 제 머리를 스스로 깎지 않는 사람의 머리만 깎아주는 이발사가 살고 있다. 그는 제 머리를 깎게 될까 그러지 않게 될까? 그가 제 머리를 깎는다면, 스스로 머리를 깎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제 머리를 깎아서는 안 된다. 한편 그가 제 머리를 깎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이 머리를 깎아주어야 할 사람들에 속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제 머리를 깎을 수도 없고, 안 깎을 수도 없다. _227쪽
08 한글, 견줄 데 없는 문자학적 호사
훈민정음에는 고도의 음성학과 음운론 지식이 응축돼 있다. 훈민정음 연구로 학위를 받은 미국인 동아시아학자 게리 레드야드는 제 학위논문에 이렇게 썼다. "글자꼴에 그 기능을 관련시킨다는 착상과 그 착상을 실현한 방식에 정녕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오래고 다양한 문자사에서 그 같은 일은 있어본 적이 없다. 소리 종류에 맞춰 글자꼴을 체계화한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다. 그런데 그 글자꼴 자체가 그 소리와 관련된 조음 기관을 본 뜬 것이라니. 이것은 견줄 데 없는 문자학적 호사다."_231쪽
한글은 소리를 드러내는 데 체계적이고 섬세하다. 그렇다면 한글은 보탤 것이 전혀 없는, 완벽한 문자체계인가? 그렇지는 않다. 로마문자나 그리스문자와 한글을 순수하게 '미적으로' 견줘보자.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가? 보는 이에 따라 판단이 다르겠지만, 로마문자나 그리스문자 쪽을 편드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아직 한글 자체字體가 충분히 개발되지 않은 탓도 있을 게다. 그러나 근본적 문제는 한글이, 로마문자나 그리스문자와 달리, 음절 단위로 모아쓰게 돼 있다는 데 있는 듯하다. 이렇게 음절 단위로 네모나게 모아쓰는 이상, 아무리 자체를 다양화 해봐야 미적 세련의 정도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_233쪽
훈민정음 창제자들이 일껏 고생해서 음소문자를 만들어놓고도 그것을 음절 단위로 네모나게 모아쓰도록 한 데는 한자의 영향이 컸을 테다. 뜻글자인 한자 역시 그 한 글자 한 글자가 네모난 형상 속에 한 음절씩을 담아놓고 있는 음절문자 성격을 겸하고 있다. '훈민정음'의 첫 음절 '훈'을 굳이 네모나게 모아쓸 게 아 니라 소리의 선조성線條性에 따라 'ㅎㅜㄴ'처럼 한 줄로 벌여놓을 수도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기엔 한자의 그림자가 너무 짙었으리라._234쪽
09 구별짓기와 차이 지우기: 방언의 사회정치학
여타 방언 화자들의 표준어 사용이 차이 지우기의 실천이라면, 서울내기들의 표준어 일탈은 구별짓기의 실천이다. 표준어 사용이 보편화하면 거기서 위세의 상징이 제거돼버리겠지만, 서울내기들은 이것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경우에도, 표준어에 포섭되지 못한 서울말을 꿋꿋이 쓰며 다른 지방 출신 화자들과 자신들을 구별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문어에서야 표준어 바깥으로 나갈 수 없으니, 이 실천은 주로 구어에서 이뤄진다. 예컨대 "그 기집애두 아프겠지만, 나두 아퍼. 그러길래 내가 이 혼사 안 된댔잖어"는, 표준어로라면, "그 계집애도 아프겠지만, 나도 아파. 그러기에 내가 이 혼사 안 된댔잖아"가 돼야겠지만, 제 입에 익숙한 말투를 굳이 표준어로 바꾸는 서울 사람은 없을 테다. _240~241쪽
'깜둥이'처럼 정치적?사회적으로 민감한 금기어들을 다른 말로 에둘러 표현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의 시도는 1990년대 들어 미국에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본디 PC는 보수주의자들이 비아냥거림의 맥락에서 만 든 말이지만, 자유주의자들은 이내 이 말을 긍정적 의미로 받아들여 제 정체성의 일부로 삼았다. PC의 지지자들은 '깜둥이'나 '흑인'이라는 말 대신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정신박약'이라는 말을 대체하기 위해 '학습곤란'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한국어에서 '식모'가 '가정부'로, '파출부'가 '가사도 우미'로, '운전사'가 '기사'로, '차장'이 '안내양'으로, '보험외판원'이 '보험설계사'나 '생활설계사'로, '청소부'가 '환경미화원'으로, '때밀이'가 '피부청결사'로, '간호원'이 '간호사'로, '광부'가 '광원'으로 바뀐 것도 PC의 정치언어학에 따른 것이랄 수 있다._243쪽
10 부르는 말과 가리키는 말: 친족명칭의 풍경
현대 한국어의 친족명칭에서 지칭어와 호칭어의 구별은 거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 많은 경우에, 전통적 지칭어가 호칭어를 대치해 상대를 부를 때 사용된다. "당숙모!" "형수님!"이라는 말은 흔히 들을 수 있어도, 그런 뜻의 "아주머니!"는 이제 들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삼촌!"이나 "당숙!"은 흔히 들을 수 있어도, 그런 뜻의 "아저씨!"는 이제 들을 수 없다. 삼촌이나 형수를 "아저씨!"나 "아주머니!"라고 부르면 당사자가 서운해하거나 화를 낼 게다. '아주머니' '아저씨'는 친족명칭 기능을 잃고 새로운 의미를 얻었기 때문이다._248~249쪽
친족호칭어가 은유적으로 확대된 최근의 예로서 주목할 만한 것이 '오빠'다. 최근 10여 년 사이에,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 여성들이 남자 선배를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그 이전 세대 여성은 남자 선배를 '형'이라 불렀다. (…) 그러니까 저보다 나이 많은 남편을 부르는 말로서 "형!"과 "오빠!"는 하나의 세대 징표이기도 하다. "여보!"는 그 앞 세대의 징표일 것이다._251쪽
11 합치고 뭉개고: 흔들리는 모음체계
언어 변화는 어휘 수준에서만, 더구나 문법의 다른 층위와 단절된 어휘 수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현대 한국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오히려 음운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다. 근년에 백낙청 씨는 '흔들리는 분단체제'를 거듭 거론한 바 있지만, 목하 분단체제보다 훨씬 더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 한국어 모음체계다. 구체적으로, 현실 한국어(또는 새 세대 한국어)는 규범한국어(또는 옛 세대 한국어)에 비해 모음이 한결 단출해지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_255쪽
단모음 [ㅚ]가 중모음 [ㅞ]에 합쳐지고 두 단모음 [ㅐ]와 [ㅔ]가 중화하고 있다는 것은 [ㅚ]와 [ㅙ]가 구별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 역사를 슬프게 만들었던 '왜적'과 '외적'도 소리로는 구분되지 않는다. 역사 시간에 교사나 학생이 "[웨적]의 침입"을 거론했을 때, 그 적이 일본에서 건너왔다는 것인지 아니면 막연히 나라 바깥에서 왔다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_256쪽
젊은 세대가 주도하는 한국어 모음체계의 변화 물결은 이제 언어교육으로 되돌릴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듯하다. 말의 전문가라 할 방송 아나운서들조차 한국어사전이나 '표준 발음법'에 명시된 규범적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21세기 한국어가 20세기 한국어와 사뭇 다른 모음체계를 지니게 되리라는 사실을 무심히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중세 한국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성조가 사라진 것을 지금의 우리가 무심히 받아들이듯._258쪽
12 '한글소설'이라는 허깨비
한문소설(고전 중국어로 쓴 소설)은 성립될 수 있는 개념이지만, '한글소설(한글이라는 문자로 표기한 소설)'은 아예 성립될 수 없거나 성립될 수 있더라도 거의 쓸모없는 개념이다. '한글소설'이 성립될 수 없거나 거의 쓸모없는 개념인 것은, '로마문자소설'이나 '키릴문자소설'이 성립될 수 없거나 거의 쓸모없는 개념인 것과 마찬가지다. '로마문자소설(로마문자로 표기한 소설)'은 통상 로마자로 표기되는 이탈리아어소설, 영어소설, 스페인어소설, 프랑스어소설, 포르투갈어소설, 독일어소설, 터키어소설, 베트남어 소설, 이 밖의 수많은 언어로 쓴 소설을 다 아우를 것이다. 더 나아가, '로마문자소설'은 통상적으론 로마문자로 표기되지 않는 한국어소설, 일본어소설, 중국어소설, 아랍어소설 따위를 로마문자로 전사轉寫한 텍스트까지 포함하게 될 테다. 이렇게 잡다하고 들쭉날쭉한 대상들을 한꺼번에 끌어안는 개념이 쓸모 있을 수는 없다._263쪽
'한국어소설' '한국어문학'이라 불러야 할 대상을 '한글소설' '한글문학'이라 이르는 관행에 이해할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향찰로 쓰인 향가나 부분적으로 이두를 사용했던 공문서들을 제외하면, 한국어는 한글이 만들어진 뒤에야 본격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국어가 서기언어로서 살아온 역사는 한글의 역사와 거의 포개진다. 한글이 반포되기 전까지 한국어는, 예외적인 경우를 빼곤, 회화언어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이 한국어라는 언어와 한글이라는 문자의 차이를 흐릴 수는 없다. 문자는 언어의 그림일 뿐이다. 그리고 이 화단畵壇에선 너무나 다양한 유파들이 제 개성을 뽐내고 있어서, 어떤 자연언어와 어떤 문자체계의 결합이 필연적인 경우는 (거의) 없다._264~265쪽
번역문학은 출발언어의 문학에 속하는가 아니면 도착언어의 문학에 속하는가? 예컨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프랑스어문학에 속 하는가 아니면 한국어문학에 속하는가? 말할 나위 없이 그 둘 다에 속한다. 번역문학자는 프랑스어로 읽고 한국어로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역된 텍스트만을 놓고 보면, 그것은 한국어문학 쪽에 훨씬 더 가깝다. 문학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거기 사용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번역이냐 창작이냐는 본질적 문제가 아니다. 실상 근대 독일어는 루터의 번역성경으로 시동을 걸었고, 유럽의 다른 많은 언어들도 고대 그리스어나 라틴어 같은 고전언어의 번역문들로 초창기 규범을 확립했다. 한국어도 예외는 아니니, 한글로 적힌 첫 번째 한국어 문장은 《훈민정음 언해》라는 이름의 번역문이다._266쪽
13 눈에 거슬려도 따라야 할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로마문자는 세계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문자체계다. 영어를 흔히 국제어라 이르지만, 세계 언어생태계에서 영어가 차지하는 몫은 세계 문자생태계에서 로마문자가 차지하는 몫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로마문자야말로 진정한 국제문자다. (…) 문자체계를 갖추지 못한 언어를 새로 찾아냈을 때, 그것을 적는 것도 일차적으로 로마문자를 통해서다. 그러니, 로마문자를 쓰지 않는 사회에서도 제 언어의 로마자 표기법 문제를 피할 수 없다._269쪽
14 언어는 생각의 감옥인가?: 사피어 워프 가설에 대하여
오늘날 언어학자나 인지과학자의 주류는 이런 언어 결정론을 부정한다. 사람의 생각은 그가 쓰는 자연언어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라고까지 판단하는 이론가도 있다. 캐나다 출신의 미국인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가 그 예다. 핑커에 따르면, 사람은 영어나 중국어나 아파치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언어language of thought'로 생각한다. 그 '사고의 언어'는 모든 자연언어들에 선행하는 메타언어다. 핑커는 자연언어들로부터 독립적인 이 추상언어를 '멘털리즈mentalese'라 불렀다._280~281쪽
사람의 사고와 인식이 모국어와 어느 정도 상호작용을 하는 듯 보이긴 하지만, 더 큰 결정력을 행사하는 것은 사고와 인식 쪽이지 언어 쪽은 아니다. 이를테면 한국어는 그 고유어에 빛깔의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는 어휘들이 '징그러울 정도로' 많다. '빨갛다' 계통의 형용사만 해도 한국어사전에 올라 있는 것이 예순 개 가까이 된다. 그런데 자음이나 모음을 교체하고 이런저런 접사를 붙여가며 한국어가 제 어휘장 안에 마련한 이 섬세한 색채어휘 덕분에 한국인들의 색채감각은 다른 자연언어 사용자보다 훨씬 더 섬세해졌는가? 조형예술사 책에서 한국인들의 이름을 찾기 어려운 걸 보면 그건 아닌 듯하다 _281?282쪽
15 두 혀로 말하기: 다이글로시아의 풍경
코드스위칭이란 이언어 사용자가 한 문장 또는 한 담화 안에서 자신의 모어와 외국어(외래어가 아니라)를 섞어 쓰는 현상을 가리킨다. 예컨대 캘리포니아의 한국계 미국인이 술집에서 누군가와 싸우다가 "You filthy scum이야! Get out of here! 당장!"(이런 쓰레기 같은 자식! 꺼져! 당장!)이라 말했다 치자. 여기서 한국어 '이야!'는 필요 없는 군더더기이거나 영어 be 동사의 대치어라 볼 수 있고, '당장!'은 'right now!'를 한국어로 대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코드스위칭은 외국어에 서툰 화자만이 아니라 그 외국어를 모어처럼 익숙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된다. _291쪽
코드스위칭은 다이글로시아를 전제로 한 언어 실천이면서, 그와 동시에 다이글로시아 내부의 언어 위계를 교란하는 언어 실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규범을 깨뜨리고 불순함을 옹호함으로써 언어민주주의에 기여한다. 코드스위칭은 영어를 비롯한 주류 언어에 비주류 언어를 섞음으로써 주류 언어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표준어에 방언을 섞음으로써 표준어의 순수성을 훼손한다. 다시 말해 주류 언어와 표준어의 식민주의적 위세와 욕망을 조롱한다. 그 광경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은 슬프기 십상이나, 이 광경의 아름다움은 유쾌하기까지 하다. _292쪽
16 한국어의 미래
그 사용자 수로 볼 때 한국어의 순위는 12?13위 정도 된다. 1억 가까운 사람이 쓰는 독일어보다는 작은 언어지만, 7200만 남짓 되는 사람이 쓰는 프랑스어보다는 큰 언어다. 수천이 훨씬 넘는 언어들 가운데 12?13번째로 사용자가 많다는 것은 한국어가 매우 큰 언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12?13위라는 순위만큼 한국어가 위풍당당하지는 않다. (…) 한국어는 모국어 사용자 수를 기준으로 매긴 순위보다 교통어로서의 순위가 사뭇 떨어지는 언어다. 그것은 한국어공동체 바깥에서 한국어가 그리 매력적인 언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_294~295쪽
정부가 한국어를 보급하기 위해 세계 여러 곳에 세울 예정이라는 세종학당도 다양하고 효율적인 한국어 학습교재가 마련된 바탕 위에서야 제 구실을 할 것이다. 한국어는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조붓한 길이다. 시원하게 뚫린 한길이 아니다. 그러나 정성스레 닦아놓으면 그 길을 산책로로 골라 거닐 사람이 왜 없으랴. _300쪽
17 경어
우리말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복잡하고 엄격하고 정교한 경어체계를 지닌 언어다. 우리말의 2인칭 대명사는 연령이나 신분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또는 연령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나 사용될 뿐, 존칭을 사용해야 할 자리엔 아예 사용되지 않는다. 그 경우 한국인들은 그 자리를 비워두거나 연령적·가족적·직업적·신분적 위계를 표시하는 명사(선배님, 아버님, 국장님, 선생님, 숙자 씨 등)를 사용한다._303쪽
한국어는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과 자신의 위계를 설정하기 전에는 단 한 마디도 입 밖에 낼 수 없는 언어다. 언어로 표현되는 그 위계 질서를 우리는 다시 그 언어를 통해 내면화한다. 경어를 썼느냐 반말을 썼느냐가 흔히 사람들 사이의 다툼의 원인이 되는 것이 그 증거다. 경어법은 연령의 위계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신분적 위계를 드러내고, 그 신분적 위계는 그것을 드러내는 경어법에 의해 다시 강화된다. 한국어가 민주주의적인 언어가 아니라는 것, 그것은 국어에 대한 내 애정에 주름을 만든다. _303~304쪽
18 기쁘다와 기뻐하다
심리형용사들에 '어하다'가 첨가되면 행동성을 나타내는 동사처럼 사용된다. 예컨대 '기쁘다'는 마음속으로 느끼는 심리 상태를 서술하지만 '기뻐하다'가 되면 그런 심리 상태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행위를 서술한다. 즐겁다와 즐거워하다, 반갑다와 반가워하다, 슬프다와 슬퍼하다, 분하다와 분해하다, 외롭다와 외로워하다, 싫다와 싫어하다, 두렵다와 두려워하다, 쓸쓸하다와 쓸쓸해하다, 아깝다와 아까워하다, 섭섭하다와 섭섭해하다, 귀찮다와 귀찮아하다, 그립다와 그리워하다도 마찬가지다. _307쪽
19 부정문에 대하여
일부 심리동사를 상위문에 포함한 복문에서 이 부정 요소는 상위문과 하위문 사이를 오르내릴 수 있다. 예컨대 "나는 경숙이가 나쁜 애가 아니라고 생각한다"와 "나는 경숙이가 나쁜 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같은 의미다. 또 "나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와 "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앞의 경우에는 하위문의 부정 요소가 상위문으로 옮아갔고, 뒤의 경우는 상위문의 부정 요소가 하위문으로 옮아갔다. 이렇게 부정 요소의 오르내림을 가능케 하는 상위문의 동사로는 생각하다와 믿다 외에 바라다, 여기다, 기대하다, 짐작하다, 상상하다 따위가 있다. _312쪽
20 우리말의 시제
"신은 내일 죽어요"에서 보았듯, 우리말의 현재 시제(비과거 시제)는 현재만이 아니라 시간 부사어의 도움을 받아 미래도 표시한다. "모레 떠납니다" "두 시간 후에 가요" "그이는 다음달에나 돌아와요" "내년에 정년퇴직합니다"에서처럼. 그러나 이것은 서술어가 비상태성 용언일 경우에만 그렇다. 서술어가 형용사나 상태성 동사(알다, 믿다, 기억하다 따위) 같은 상태성 용언일 경우엔 이 형태가 미래의 시간을 나타내는 데 사용될 수 없다. "어머니가 내일 아프셔요" "나는 모레 그 사람을 압니다" 같은 문장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_316쪽
언어는 사유 세계의 공기와 같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운용하고, 다른 정신과 만나는 까닭이다. 그것은 거의 의식되진 않지만 생각을 담는 그릇이며, 때로는 그 자체가 생각의 방향을 결정짓기도 한다. 하지만 언어 자체를 관조하는 지식인은 그리 많지 않으며, 더구나 그것을 대중의 눈높이에서 풀어내는 이는 한국 사회에서 찾기 힘들다. 작가 고종석이 발표해온 수십 편의 언어학 에세이는 이런 맥락에서 교양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왔다.
이 책은 고종석선집(총5권 기획: 소설, 언어학, 시사, 문학, 에세이)의 둘째 권으로서, 작가 고종석의 사유 세계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언어학 에세이를 엄선해 담았다. 고종석의 단행본 《감염된 언어》《말들의 풍경》《국어의 풍경들》《자유의 무늬》 중에서 선집의 위상에 걸맞은 글 20편을 가려 수록했다. 1998년부터 2007년에 이르는 약 10년의 기간 동안 생산해온 글들이다. 그가 서문 격인 글에서 밝히고 있듯이 "주류 언어학 내부의 좁다란 논점들보다는 언어를 사회적 맥락에서 보는 널따란 논점들과 주로 관련"되어 있으며, "주로 한국어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더러 다른 자연언어들에 대한 탐색도 포함하고 있다." 고종석은 학술적 딱딱함도, 화려한 말잔치도 아닌 적절한 균형의 지점에서 '언어란 무엇인가, 한국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영어와 한자의 위상을 어떻게 정립해야 할지, 이른바 '한국어'의 실체란 무엇인지 등 민감한 문제에 대한 치밀한 논의를 펼친다. 또한 표준어/사투리, 외래어/순우리말 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치열한 투쟁의 양상을 살펴보는가 하면, 모음체계의 변화와 심리형용사ㆍ부정문ㆍ시제 등 한국어의 다양한 풍경들을 세심하게 바라본다. 독자들은 논리적이고 수려한 문장으로 담아낸 눈부신 언어학적 성찰들을 한 권으로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는 한국어'들'이다
좋은 학자는 관찰력이 뛰어나다. 언어학자 고종석은 이런 의미에서 좋은 학자다. 이를테면 그는 한국어와 한글이 서로 다른 범주의 것이라는 점을 관찰하고, 이를 분명히 구별한다. 즉 한국어는 언어이고, 한글은 이를 표기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또 그는 한국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점을 중요하게 지적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15세기 중엽으로 돌아가, 한글을 창제했다고 알려진 음운학자들과 그들을 이끌었던 세종대왕을 만난다고 해도, 우리는 그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다시 말해 15세기 한국어와 21세기 한국어는 서로 '다른' 언어다. (…) 우리는 7~10세기에 한국인들이 쓰던 언어와 15세기 한국인들이 쓰던 언어와 19세기 한국인들이 쓰던 언어를 모두 '한국어'라고 부른다. 그것들이 서로 '다른' 언어인데도 말이다._16쪽
사실 단일한 한국어라는 것은 없다. 실제 존재하는 것은 한국어'들'이다. 그런데 인간 인식의 한계로 인해 이 점을 자주 망각하면서 수많은 담론상의 혼란과 금기가 생겨났다. 즉 지금 여기의 한국어만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이것이 흔들리고 변화하는 것을 '타락'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어를 좁은 테두리에 가두면서 발전적 논의를 가로막는다. 고종석은 한국어가 실은 한국어'들'임을 분명히 강조하며, 민족주의적 색채로 물든 담론의 난마를 헤쳐나갈 강력한 전제를 확보한다.
만일 순수한 한국어, 단일한 한국어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을 지켜야 할 이유도, 회복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외래의 언어를 막을 이유 또한 없다. 고종석이 보기에 언어는 서로 섞이고 스미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그럴 때 지극히 아름답다. 예컨대 18세기 말 이래 시작된 일본 메이지 시대의 번역 열풍이 그렇다.
확실한 것은, 메이지 이래 일본 열도에서 만들어진 무수한 신조어들은 한자라는 매개를 통해 즉각 한국어에 흡수됨으로써 한국어의 어휘를 배가시키고 한국인들의 세계 인식 수준을 크게 높였다는 사실이다. 그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해내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말의 풍부화와 그것을 통한 우리 의식의 획기적 전환이 우리에게 좋은 일이었다는 사실마저 변하는 것은 아니다._61쪽
한자어가 일본제라고 해서 그것이 한국어의 굴욕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영어는 프랑스어에 미칠 듯한 열등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영어의 그 넉넉함은 프랑스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국제적 위상을 오늘날 확립하게끔 했다. 마찬가지로 한국어가 빈곤하고 위축되는 것은 민족주의적 열정 아래 '순수 한국어'를 고집할 때다.
영어공용어화론을 지지한다
언어학자 고종석의 미덕은 민족주의적 열정에서 자유롭다는 점이다. 그는 민족주의적 욕망을 거부하고, 그보다 정확한 관찰과 사실에 무게를 둔다. 그가 1998년 학계의 일대 파란을 일으킨 복거일의 영어공용어화론을 지지하는 까닭이다. 고종석이 보기에 영어와 한국어를 같이 쓰는 상황은 거리낄 게 없다.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굴욕적인 일도 아니다.
우리가 이중언어 사용자가 됐을 때, 더 나아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먼 미래에 민족어가 '박물관언어'가 됐을 때, 궁극적으로 민족이 사라져버렸을 때, 우리는 잠시 정체성 문제에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문제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민족이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가 정체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잃는 것은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일 것이다. 우리는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는 대신에 세계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인류로서의 정체성을 얻을 것이고, 민족주의의 억압이 풀린 여러 단계의 인간관계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들을 얻게 될 것이다._153쪽
21세기 한국어와 21세기 영어의 거리만큼이나 21세기 한국어와 7세기 한국어의 거리가 떨어져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영어공용어화는 그저 좀더 쓸모 있는 언어를 하나 더 쓰는 것일 따름이다. 더구나 기록언어로서의 한국어는 사실상 번역문에서 그 형태를 잡아나갔다. 단적으로, 한글로 쓰인 한국어의 제1성은 "나랏말?미 듕귁에 달아 문?와로 서르 ??디 아니??…"라는 '훈민정음 언해'의 번역문에서 시작했다. 한국어를 한국어로 만드는 내재적인 순수함 따위는 없는 것이다. 고종석은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긴 글에서 이 논쟁이 품고 있는 여러 측면들을 동서양의 사례를 아우르며 세밀히 검토한다. 이로써 한국 사회의 주류 언어관에 민족주의가 깊이 침윤되었음을 밝히는 한편, 한국어에 대한 인식 지평을 확장시킨다.
민족주의 없이 한국어를 존중하다
수천에서 1만여에 이른다는 자연언어들 가운데, 사용자 수를 기준으로 한국어는 12~13위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제2 언어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언어의 위세는 그에 못 미치는 것이다. 고종석은 이러한 현실과 그 이유를 [한국어의 미래]에서 짚어보면서, "교통어로서 한국어의 미래는 밝지 않다"고 냉철하게 진단한다. 이런 현실에 더해 영어공용어화론을 주장하는 고종석은 한국어가 곧 소멸할 것이라고, 소멸해도 된다고 믿는 것일까?
나로서는 민족어가 사라지는 상황이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나는 민족어들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어가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민족이, 민족국가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국가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것의 소멸을 추구했던 70여 년의 사회주의 실험을 거치고도 살아남았다._142쪽
역시나 현실적인 진단이다. 그는 민족어인 한국어가 긴 시간을 두고 살아남을 것이라고 본다. 이런 인식 아래 그는 한국어의 다양한 현상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관찰한다. 즉 민족주의 없이 한국어를 존중하는 하나의 모범을 보여준다. 그는 무조건적인 예찬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사실들을 흥미롭게 짚어낸다. 예컨대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문자체계인 한글을 상찬하면서도, 중국 한자의 영향으로 글자를 퇴행적으로 네모 형태로 모아쓰게 된 점을 지적한다. 또한 우리가 무심히 쓰는 말들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한국어의 다층적인 겹과 복잡한 논리를 드러낸다. 가령 '이 국은 짜지 못하다'는 가능하지만 '이 국은 못 짜다'는 불가능한 이유, '신은 내일 죽어요'는 되지만 '어머니는 내일 아프셔요'는 안 되는 까닭을 언어학적으로 규명한다. 독자들은 투명한 눈으로 한국어를 가감 없이 바라보는 것과 더불어, 언어와 삶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책속으로 이어서]
03 말
문명을 건설한 인간, 생각하는 인간은 말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생각의 뭉치를 형태소로 나누고 소리의 뭉치를 음소로 나눈 뒤 이들을 이리저리 배열하고 결합하고 대응시키며 표현과 소통의 길을 뚫는 언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문명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_190쪽
한국어 사용자는 메시지 수신자와 자신의 위계를 설정하기 전에는 단 한 마디도 입 밖에 낼 수 없다. 언어로 표현되는 그 위계 질서를 우리는 다시 그 언어를 통해 내면화한다. 경어를 썼느냐 반말을 썼느냐가 흔히 사람들 사이의 다툼의 원인이 되는 것이 그 증거다. 경어법은 연령의 위계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신분적 위계를 드러내고, 그 신분적 위계는 그것을 드러내는 경어법에 의해 다시 강화된다. _194쪽
문자의 발명은 분명히 인류의 지식 축적 방식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그 덕분에 인류의 집단적 기억의 용량은 무한대로 늘어났다. 그러나, 애달파라, 바로 그 집단적 기억의 폭증은 개인적 기억의 왜소화를 가져왔다. 기억의 전승을 문자가 떠맡게 되자마자, 인간은 자기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굳이 머릿속에 담아둘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인쇄술의 보급은 이야기꾼과 음유 시인들을 퇴출시켰다. 기계류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발명품들이 그렇듯, 문자의 발명도 인간 육체의 완전성을 위해서는 불행한 일이었다. _195쪽
04 표준어의 폭력: 국민국가 내부의 식민주의
표준어가 다른 방언들보다 위세를 떨치게 된 것이 그 내재적 매력 때문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다시 말해 서울말의 위세는 이 말이 예컨대 강원도방언이나 전라도방언보다 본질적으로 더 섬세하다거나 명료하다거나 아름다워서 생긴 것이 아니다. 언어학의 지평에서는 서울말 역시 한국어의 한 방언일 뿐이고, 서울말과 다른 방언 사이에 위계를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울말의 위세가 큰 것은 그러니까 언어 바깥 사정, 구체적으로 이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힘 때문이다. 한국어방언 가운데 영남방언이 비교적 패기 있게 서울말에 맞서고 있는 사정 역시 이로써 설명할 수 있다._199쪽
코크니 영어 사용자들 다수는, 그 언어에 들씌워진 상징적 의미를 잘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그 '천한' 언어를 사용한다. 호남 출신의 서울 거주자들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주류 언어에 동화하는 것을 제 정체성의 굴욕적 포기로 여기는 방어 본능 때문일 것이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표준 프랑스어에 동화하려는 프랑스인들의 욕망이 주로 중간계급에서 두드러지고, 상층계급과 하층계급은 유년기 언어에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_201쪽
05 외래어와의 성전: 매혹적인 그러나 불길한 순혈주의
언어민족주의의 칼날이 무슨 이유로든 칼집을 벗어났을 때, 그 칼끝은 직접 외국어를 향하기보다 민족어 안의 '불순물' 곧 외래어를 향하는 것이 예사다. 외국어 자체는 언어민족주의자들로서도 맞서 싸우기가 너무 버거운 상대다. 반면에 외래어는 사뭇 만만한, 그러나 가증스러운 내부의 적으로 비친다._205쪽
민족주의는 이념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감정 상태이므로 언어순화운동은 어떤 언어공동체에서도 적잖은 지지자들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반면에 언어순화운동이 어느 정도 효과를 내려면 권력이 고도로 집중된 전체주의 사회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엄연하다. 북한에서 이 운동이 그나마 효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 사회체제의 경직성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불길한 함축은 고귀한 민족애의 실천 형식으로서 언어순화에 매력을 느끼는 선남선녀들이 특히 곱씹어보아야 할 생각거리다._209쪽
이런 순화운동의 방식이 대체로 번역차용(외국어 표현의 구조를 그대로 둔 채 형태소를 일대일로 번역하는 것) 형식의 베끼기calque여서, 거기서 어떤 정신의 확장이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자동사'와 '제움직씨', '사물'과 '일몬', '총론'과 '모도풀이'는 똑같은 구조를 지닌 말이다. 다시 말해 앞말을 뒷말로 베껴낸다고 해서, 거기서 새로운 지적 지평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매우 하찮은 지적 작업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쉽게 억누를 수 없는 에너지다. 말하자면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하찮은 지적 작업은 앞으로도 운동량을 쉬 잃지 않을 것이다. _210~211쪽
06 여자의 말, 남자의 말: 젠더의 사회언어학
한국어의 성적 방언으로 흔히 거론되는 예는 일부 친족명칭이다. 여성화자는 같은 성의 손위 동기同氣나 선배를 '언니'라 부르고, 다른 성의 손위 동기나 선배를 '오빠'라 부른다. 반면에 남성화자는 같은 성의 손위 동기나 선배를 '형'이라 부르고, 다른 성의 손위 동기나 선배를 '누나'라 부른다. 물론 이 규범이 돌처럼 단단한 것은 아니다. 20세기 전반기까지만 해도 일부 지역에 선 남성화자가 같은 성의 손위 동기를 '언니'라 부르기도 했고, 1970?1980년대에는 여학생들이 남자 선배를 '형'이라 부르는 일이 예사였다._213~214쪽
현실은 언어 이전에 있는 것이어서 언어를 바꾸려는 노력이 고스란히 현실을 바꾸는 힘이 될 수는 없겠지만, 언어의 비틀림을 응시하는 일은 현실의 비틀림을 살피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_220쪽
07 거짓말이게 참말이게?: 역설의 풍경
한 무리의 논리학자들과 언어철학자들은 거짓말쟁이 역설을 의미론의 문제가 아니라 화용론의 문제로 보아, 진리의 개념 대신에 진술의 속성에 주목했다. 말하자면 "내 명령은 어느 것도 따르지 마시오" 같은 문장에서 드러나는 명령의 역설, "나는 어떤 약속도 지키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같은 문장에서 드러나는 약속의 역설, "나는 내가 어떤 내기에서고 지리라는 쪽에 걸겠다" 같은 문장이 드러내는 내기의 역설 따위가 명령, 약속, 내기 라는 언어 '행위'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해 발생하듯, 거짓말쟁이 역설도 '참이다'라는 낱말에 담긴 '동의'라는 행위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해 생겨난다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참이다'라는 진리 술어도, '명령하다' '약속하다' '내기 걸다' 같은 전형적 수행동사들처럼, (어떤 진술을 주장하거나 동의한다는) 수행기능을 지닌다는 것이다. _225쪽
러셀의 역설이란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 맞닥뜨리는 역설이다. 이 집합은 자신을 원소로 갖는가 그렇지 않은가? 갖는다고 가정하면 갖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고, 갖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갖는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러셀은 이런 예를 들었다. 어느 마을에 제 머리를 스스로 깎지 않는 사람의 머리만 깎아주는 이발사가 살고 있다. 그는 제 머리를 깎게 될까 그러지 않게 될까? 그가 제 머리를 깎는다면, 스스로 머리를 깎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제 머리를 깎아서는 안 된다. 한편 그가 제 머리를 깎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이 머리를 깎아주어야 할 사람들에 속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제 머리를 깎을 수도 없고, 안 깎을 수도 없다. _227쪽
08 한글, 견줄 데 없는 문자학적 호사
훈민정음에는 고도의 음성학과 음운론 지식이 응축돼 있다. 훈민정음 연구로 학위를 받은 미국인 동아시아학자 게리 레드야드는 제 학위논문에 이렇게 썼다. "글자꼴에 그 기능을 관련시킨다는 착상과 그 착상을 실현한 방식에 정녕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오래고 다양한 문자사에서 그 같은 일은 있어본 적이 없다. 소리 종류에 맞춰 글자꼴을 체계화한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다. 그런데 그 글자꼴 자체가 그 소리와 관련된 조음 기관을 본 뜬 것이라니. 이것은 견줄 데 없는 문자학적 호사다."_231쪽
한글은 소리를 드러내는 데 체계적이고 섬세하다. 그렇다면 한글은 보탤 것이 전혀 없는, 완벽한 문자체계인가? 그렇지는 않다. 로마문자나 그리스문자와 한글을 순수하게 '미적으로' 견줘보자.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가? 보는 이에 따라 판단이 다르겠지만, 로마문자나 그리스문자 쪽을 편드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아직 한글 자체字體가 충분히 개발되지 않은 탓도 있을 게다. 그러나 근본적 문제는 한글이, 로마문자나 그리스문자와 달리, 음절 단위로 모아쓰게 돼 있다는 데 있는 듯하다. 이렇게 음절 단위로 네모나게 모아쓰는 이상, 아무리 자체를 다양화 해봐야 미적 세련의 정도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_233쪽
훈민정음 창제자들이 일껏 고생해서 음소문자를 만들어놓고도 그것을 음절 단위로 네모나게 모아쓰도록 한 데는 한자의 영향이 컸을 테다. 뜻글자인 한자 역시 그 한 글자 한 글자가 네모난 형상 속에 한 음절씩을 담아놓고 있는 음절문자 성격을 겸하고 있다. '훈민정음'의 첫 음절 '훈'을 굳이 네모나게 모아쓸 게 아 니라 소리의 선조성線條性에 따라 'ㅎㅜㄴ'처럼 한 줄로 벌여놓을 수도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기엔 한자의 그림자가 너무 짙었으리라._234쪽
09 구별짓기와 차이 지우기: 방언의 사회정치학
여타 방언 화자들의 표준어 사용이 차이 지우기의 실천이라면, 서울내기들의 표준어 일탈은 구별짓기의 실천이다. 표준어 사용이 보편화하면 거기서 위세의 상징이 제거돼버리겠지만, 서울내기들은 이것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경우에도, 표준어에 포섭되지 못한 서울말을 꿋꿋이 쓰며 다른 지방 출신 화자들과 자신들을 구별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문어에서야 표준어 바깥으로 나갈 수 없으니, 이 실천은 주로 구어에서 이뤄진다. 예컨대 "그 기집애두 아프겠지만, 나두 아퍼. 그러길래 내가 이 혼사 안 된댔잖어"는, 표준어로라면, "그 계집애도 아프겠지만, 나도 아파. 그러기에 내가 이 혼사 안 된댔잖아"가 돼야겠지만, 제 입에 익숙한 말투를 굳이 표준어로 바꾸는 서울 사람은 없을 테다. _240~241쪽
'깜둥이'처럼 정치적?사회적으로 민감한 금기어들을 다른 말로 에둘러 표현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의 시도는 1990년대 들어 미국에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본디 PC는 보수주의자들이 비아냥거림의 맥락에서 만 든 말이지만, 자유주의자들은 이내 이 말을 긍정적 의미로 받아들여 제 정체성의 일부로 삼았다. PC의 지지자들은 '깜둥이'나 '흑인'이라는 말 대신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정신박약'이라는 말을 대체하기 위해 '학습곤란'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한국어에서 '식모'가 '가정부'로, '파출부'가 '가사도 우미'로, '운전사'가 '기사'로, '차장'이 '안내양'으로, '보험외판원'이 '보험설계사'나 '생활설계사'로, '청소부'가 '환경미화원'으로, '때밀이'가 '피부청결사'로, '간호원'이 '간호사'로, '광부'가 '광원'으로 바뀐 것도 PC의 정치언어학에 따른 것이랄 수 있다._243쪽
10 부르는 말과 가리키는 말: 친족명칭의 풍경
현대 한국어의 친족명칭에서 지칭어와 호칭어의 구별은 거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 많은 경우에, 전통적 지칭어가 호칭어를 대치해 상대를 부를 때 사용된다. "당숙모!" "형수님!"이라는 말은 흔히 들을 수 있어도, 그런 뜻의 "아주머니!"는 이제 들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삼촌!"이나 "당숙!"은 흔히 들을 수 있어도, 그런 뜻의 "아저씨!"는 이제 들을 수 없다. 삼촌이나 형수를 "아저씨!"나 "아주머니!"라고 부르면 당사자가 서운해하거나 화를 낼 게다. '아주머니' '아저씨'는 친족명칭 기능을 잃고 새로운 의미를 얻었기 때문이다._248~249쪽
친족호칭어가 은유적으로 확대된 최근의 예로서 주목할 만한 것이 '오빠'다. 최근 10여 년 사이에,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 여성들이 남자 선배를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그 이전 세대 여성은 남자 선배를 '형'이라 불렀다. (…) 그러니까 저보다 나이 많은 남편을 부르는 말로서 "형!"과 "오빠!"는 하나의 세대 징표이기도 하다. "여보!"는 그 앞 세대의 징표일 것이다._251쪽
11 합치고 뭉개고: 흔들리는 모음체계
언어 변화는 어휘 수준에서만, 더구나 문법의 다른 층위와 단절된 어휘 수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현대 한국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오히려 음운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다. 근년에 백낙청 씨는 '흔들리는 분단체제'를 거듭 거론한 바 있지만, 목하 분단체제보다 훨씬 더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 한국어 모음체계다. 구체적으로, 현실 한국어(또는 새 세대 한국어)는 규범한국어(또는 옛 세대 한국어)에 비해 모음이 한결 단출해지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_255쪽
단모음 [ㅚ]가 중모음 [ㅞ]에 합쳐지고 두 단모음 [ㅐ]와 [ㅔ]가 중화하고 있다는 것은 [ㅚ]와 [ㅙ]가 구별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 역사를 슬프게 만들었던 '왜적'과 '외적'도 소리로는 구분되지 않는다. 역사 시간에 교사나 학생이 "[웨적]의 침입"을 거론했을 때, 그 적이 일본에서 건너왔다는 것인지 아니면 막연히 나라 바깥에서 왔다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_256쪽
젊은 세대가 주도하는 한국어 모음체계의 변화 물결은 이제 언어교육으로 되돌릴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듯하다. 말의 전문가라 할 방송 아나운서들조차 한국어사전이나 '표준 발음법'에 명시된 규범적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21세기 한국어가 20세기 한국어와 사뭇 다른 모음체계를 지니게 되리라는 사실을 무심히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중세 한국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성조가 사라진 것을 지금의 우리가 무심히 받아들이듯._258쪽
12 '한글소설'이라는 허깨비
한문소설(고전 중국어로 쓴 소설)은 성립될 수 있는 개념이지만, '한글소설(한글이라는 문자로 표기한 소설)'은 아예 성립될 수 없거나 성립될 수 있더라도 거의 쓸모없는 개념이다. '한글소설'이 성립될 수 없거나 거의 쓸모없는 개념인 것은, '로마문자소설'이나 '키릴문자소설'이 성립될 수 없거나 거의 쓸모없는 개념인 것과 마찬가지다. '로마문자소설(로마문자로 표기한 소설)'은 통상 로마자로 표기되는 이탈리아어소설, 영어소설, 스페인어소설, 프랑스어소설, 포르투갈어소설, 독일어소설, 터키어소설, 베트남어 소설, 이 밖의 수많은 언어로 쓴 소설을 다 아우를 것이다. 더 나아가, '로마문자소설'은 통상적으론 로마문자로 표기되지 않는 한국어소설, 일본어소설, 중국어소설, 아랍어소설 따위를 로마문자로 전사轉寫한 텍스트까지 포함하게 될 테다. 이렇게 잡다하고 들쭉날쭉한 대상들을 한꺼번에 끌어안는 개념이 쓸모 있을 수는 없다._263쪽
'한국어소설' '한국어문학'이라 불러야 할 대상을 '한글소설' '한글문학'이라 이르는 관행에 이해할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향찰로 쓰인 향가나 부분적으로 이두를 사용했던 공문서들을 제외하면, 한국어는 한글이 만들어진 뒤에야 본격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국어가 서기언어로서 살아온 역사는 한글의 역사와 거의 포개진다. 한글이 반포되기 전까지 한국어는, 예외적인 경우를 빼곤, 회화언어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이 한국어라는 언어와 한글이라는 문자의 차이를 흐릴 수는 없다. 문자는 언어의 그림일 뿐이다. 그리고 이 화단畵壇에선 너무나 다양한 유파들이 제 개성을 뽐내고 있어서, 어떤 자연언어와 어떤 문자체계의 결합이 필연적인 경우는 (거의) 없다._264~265쪽
번역문학은 출발언어의 문학에 속하는가 아니면 도착언어의 문학에 속하는가? 예컨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프랑스어문학에 속 하는가 아니면 한국어문학에 속하는가? 말할 나위 없이 그 둘 다에 속한다. 번역문학자는 프랑스어로 읽고 한국어로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역된 텍스트만을 놓고 보면, 그것은 한국어문학 쪽에 훨씬 더 가깝다. 문학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거기 사용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번역이냐 창작이냐는 본질적 문제가 아니다. 실상 근대 독일어는 루터의 번역성경으로 시동을 걸었고, 유럽의 다른 많은 언어들도 고대 그리스어나 라틴어 같은 고전언어의 번역문들로 초창기 규범을 확립했다. 한국어도 예외는 아니니, 한글로 적힌 첫 번째 한국어 문장은 《훈민정음 언해》라는 이름의 번역문이다._266쪽
13 눈에 거슬려도 따라야 할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로마문자는 세계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문자체계다. 영어를 흔히 국제어라 이르지만, 세계 언어생태계에서 영어가 차지하는 몫은 세계 문자생태계에서 로마문자가 차지하는 몫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로마문자야말로 진정한 국제문자다. (…) 문자체계를 갖추지 못한 언어를 새로 찾아냈을 때, 그것을 적는 것도 일차적으로 로마문자를 통해서다. 그러니, 로마문자를 쓰지 않는 사회에서도 제 언어의 로마자 표기법 문제를 피할 수 없다._269쪽
14 언어는 생각의 감옥인가?: 사피어 워프 가설에 대하여
오늘날 언어학자나 인지과학자의 주류는 이런 언어 결정론을 부정한다. 사람의 생각은 그가 쓰는 자연언어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라고까지 판단하는 이론가도 있다. 캐나다 출신의 미국인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가 그 예다. 핑커에 따르면, 사람은 영어나 중국어나 아파치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언어language of thought'로 생각한다. 그 '사고의 언어'는 모든 자연언어들에 선행하는 메타언어다. 핑커는 자연언어들로부터 독립적인 이 추상언어를 '멘털리즈mentalese'라 불렀다._280~281쪽
사람의 사고와 인식이 모국어와 어느 정도 상호작용을 하는 듯 보이긴 하지만, 더 큰 결정력을 행사하는 것은 사고와 인식 쪽이지 언어 쪽은 아니다. 이를테면 한국어는 그 고유어에 빛깔의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는 어휘들이 '징그러울 정도로' 많다. '빨갛다' 계통의 형용사만 해도 한국어사전에 올라 있는 것이 예순 개 가까이 된다. 그런데 자음이나 모음을 교체하고 이런저런 접사를 붙여가며 한국어가 제 어휘장 안에 마련한 이 섬세한 색채어휘 덕분에 한국인들의 색채감각은 다른 자연언어 사용자보다 훨씬 더 섬세해졌는가? 조형예술사 책에서 한국인들의 이름을 찾기 어려운 걸 보면 그건 아닌 듯하다 _281?282쪽
15 두 혀로 말하기: 다이글로시아의 풍경
코드스위칭이란 이언어 사용자가 한 문장 또는 한 담화 안에서 자신의 모어와 외국어(외래어가 아니라)를 섞어 쓰는 현상을 가리킨다. 예컨대 캘리포니아의 한국계 미국인이 술집에서 누군가와 싸우다가 "You filthy scum이야! Get out of here! 당장!"(이런 쓰레기 같은 자식! 꺼져! 당장!)이라 말했다 치자. 여기서 한국어 '이야!'는 필요 없는 군더더기이거나 영어 be 동사의 대치어라 볼 수 있고, '당장!'은 'right now!'를 한국어로 대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코드스위칭은 외국어에 서툰 화자만이 아니라 그 외국어를 모어처럼 익숙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된다. _291쪽
코드스위칭은 다이글로시아를 전제로 한 언어 실천이면서, 그와 동시에 다이글로시아 내부의 언어 위계를 교란하는 언어 실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규범을 깨뜨리고 불순함을 옹호함으로써 언어민주주의에 기여한다. 코드스위칭은 영어를 비롯한 주류 언어에 비주류 언어를 섞음으로써 주류 언어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표준어에 방언을 섞음으로써 표준어의 순수성을 훼손한다. 다시 말해 주류 언어와 표준어의 식민주의적 위세와 욕망을 조롱한다. 그 광경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은 슬프기 십상이나, 이 광경의 아름다움은 유쾌하기까지 하다. _292쪽
16 한국어의 미래
그 사용자 수로 볼 때 한국어의 순위는 12?13위 정도 된다. 1억 가까운 사람이 쓰는 독일어보다는 작은 언어지만, 7200만 남짓 되는 사람이 쓰는 프랑스어보다는 큰 언어다. 수천이 훨씬 넘는 언어들 가운데 12?13번째로 사용자가 많다는 것은 한국어가 매우 큰 언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12?13위라는 순위만큼 한국어가 위풍당당하지는 않다. (…) 한국어는 모국어 사용자 수를 기준으로 매긴 순위보다 교통어로서의 순위가 사뭇 떨어지는 언어다. 그것은 한국어공동체 바깥에서 한국어가 그리 매력적인 언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_294~295쪽
정부가 한국어를 보급하기 위해 세계 여러 곳에 세울 예정이라는 세종학당도 다양하고 효율적인 한국어 학습교재가 마련된 바탕 위에서야 제 구실을 할 것이다. 한국어는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조붓한 길이다. 시원하게 뚫린 한길이 아니다. 그러나 정성스레 닦아놓으면 그 길을 산책로로 골라 거닐 사람이 왜 없으랴. _300쪽
17 경어
우리말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복잡하고 엄격하고 정교한 경어체계를 지닌 언어다. 우리말의 2인칭 대명사는 연령이나 신분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또는 연령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나 사용될 뿐, 존칭을 사용해야 할 자리엔 아예 사용되지 않는다. 그 경우 한국인들은 그 자리를 비워두거나 연령적·가족적·직업적·신분적 위계를 표시하는 명사(선배님, 아버님, 국장님, 선생님, 숙자 씨 등)를 사용한다._303쪽
한국어는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과 자신의 위계를 설정하기 전에는 단 한 마디도 입 밖에 낼 수 없는 언어다. 언어로 표현되는 그 위계 질서를 우리는 다시 그 언어를 통해 내면화한다. 경어를 썼느냐 반말을 썼느냐가 흔히 사람들 사이의 다툼의 원인이 되는 것이 그 증거다. 경어법은 연령의 위계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신분적 위계를 드러내고, 그 신분적 위계는 그것을 드러내는 경어법에 의해 다시 강화된다. 한국어가 민주주의적인 언어가 아니라는 것, 그것은 국어에 대한 내 애정에 주름을 만든다. _303~304쪽
18 기쁘다와 기뻐하다
심리형용사들에 '어하다'가 첨가되면 행동성을 나타내는 동사처럼 사용된다. 예컨대 '기쁘다'는 마음속으로 느끼는 심리 상태를 서술하지만 '기뻐하다'가 되면 그런 심리 상태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행위를 서술한다. 즐겁다와 즐거워하다, 반갑다와 반가워하다, 슬프다와 슬퍼하다, 분하다와 분해하다, 외롭다와 외로워하다, 싫다와 싫어하다, 두렵다와 두려워하다, 쓸쓸하다와 쓸쓸해하다, 아깝다와 아까워하다, 섭섭하다와 섭섭해하다, 귀찮다와 귀찮아하다, 그립다와 그리워하다도 마찬가지다. _307쪽
19 부정문에 대하여
일부 심리동사를 상위문에 포함한 복문에서 이 부정 요소는 상위문과 하위문 사이를 오르내릴 수 있다. 예컨대 "나는 경숙이가 나쁜 애가 아니라고 생각한다"와 "나는 경숙이가 나쁜 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같은 의미다. 또 "나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와 "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앞의 경우에는 하위문의 부정 요소가 상위문으로 옮아갔고, 뒤의 경우는 상위문의 부정 요소가 하위문으로 옮아갔다. 이렇게 부정 요소의 오르내림을 가능케 하는 상위문의 동사로는 생각하다와 믿다 외에 바라다, 여기다, 기대하다, 짐작하다, 상상하다 따위가 있다. _312쪽
20 우리말의 시제
"신은 내일 죽어요"에서 보았듯, 우리말의 현재 시제(비과거 시제)는 현재만이 아니라 시간 부사어의 도움을 받아 미래도 표시한다. "모레 떠납니다" "두 시간 후에 가요" "그이는 다음달에나 돌아와요" "내년에 정년퇴직합니다"에서처럼. 그러나 이것은 서술어가 비상태성 용언일 경우에만 그렇다. 서술어가 형용사나 상태성 동사(알다, 믿다, 기억하다 따위) 같은 상태성 용언일 경우엔 이 형태가 미래의 시간을 나타내는 데 사용될 수 없다. "어머니가 내일 아프셔요" "나는 모레 그 사람을 압니다" 같은 문장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_316쪽
목차
목차
언어의 무지개_서문을 대신하여
01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_영어공용어화 논쟁에 대하여 / 02 버리고 싶은 유산, 버릴 수 없는 유산_한자에 대한 단상 / 03 말 /
04 표준어의 폭력_국민국가 내부의 식민주의 / 05 외래어와의 성전_매혹적인 그러나 불길한 순혈주의 /
06 여자의 말, 남자의 말_젠더의 사회언어학 / 07 거짓말이게 참말이게_역설의 풍경 / 08 한글, 견줄 데 없는 문자학적 호사 /
09 구별짓기와 차이 지우기_방언의 사회정치학 / 10 부르는 말과 가리키는 말_친족명칭의 풍경 / 11 합치고 뭉개고_흔들리는 모음체계 /
12 '한글소설'이라는 허깨비 / 13 눈에 거슬려도 따라야 할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 14 언어는 생각의 감옥인가_사피어-워프 가설에 대하여 /
15 두 혀로 말하기_다이글로시아의 풍경 / 16 한국어의 미래 / 17 경어 / 18 기쁘다와 기뻐하다_심리형용사에 대하여 / 19 부정문에 대하여 /
20 한국어의 시제
01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_영어공용어화 논쟁에 대하여 / 02 버리고 싶은 유산, 버릴 수 없는 유산_한자에 대한 단상 / 03 말 /
04 표준어의 폭력_국민국가 내부의 식민주의 / 05 외래어와의 성전_매혹적인 그러나 불길한 순혈주의 /
06 여자의 말, 남자의 말_젠더의 사회언어학 / 07 거짓말이게 참말이게_역설의 풍경 / 08 한글, 견줄 데 없는 문자학적 호사 /
09 구별짓기와 차이 지우기_방언의 사회정치학 / 10 부르는 말과 가리키는 말_친족명칭의 풍경 / 11 합치고 뭉개고_흔들리는 모음체계 /
12 '한글소설'이라는 허깨비 / 13 눈에 거슬려도 따라야 할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 14 언어는 생각의 감옥인가_사피어-워프 가설에 대하여 /
15 두 혀로 말하기_다이글로시아의 풍경 / 16 한국어의 미래 / 17 경어 / 18 기쁘다와 기뻐하다_심리형용사에 대하여 / 19 부정문에 대하여 /
20 한국어의 시제
저자
저자
고종석
저자 고종석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와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법학과 언어학을 전공하고, 서른 해 가까이 신문기자로 일했다. 지은 책으로는 글쓰기 강의록 《고종석의 문장》(전2권), 사회비평집《서얼단상》《바리에떼》《자유의 무늬》《신성동맹과 함께 살기》《경계긋기의 어려움》, 문화비평집 《감염된 언어》《코드 훔치기》《말들의 풍경》, 한국어 크로키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어루만지다》《언문세설》《국어의 풍경들》, 역사인물 크로키《여자들》《히스토리아》《발자국》, 영어 크로키《고종석의 영어 이야기》, 시 평론집 《모국어의 속살》, 장편소설《기자들》《독고준》《해피 패밀리》, 소설집《제망매》《엘리아의 제야》, 여행기《도시의 기억》, 서간집《고종석의 유럽통신》, 독서일기《책읽기, 책일기》, 인터뷰 《고종석의 낭만 미래》, 언어학 강의록 《불순한 언어가 아름답다》 들이 있다.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와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법학과 언어학을 전공하고, 서른 해 가까이 신문기자로 일했다. 지은 책으로는 글쓰기 강의록 《고종석의 문장》(전2권), 사회비평집《서얼단상》《바리에떼》《자유의 무늬》《신성동맹과 함께 살기》《경계긋기의 어려움》, 문화비평집 《감염된 언어》《코드 훔치기》《말들의 풍경》, 한국어 크로키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어루만지다》《언문세설》《국어의 풍경들》, 역사인물 크로키《여자들》《히스토리아》《발자국》, 영어 크로키《고종석의 영어 이야기》, 시 평론집 《모국어의 속살》, 장편소설《기자들》《독고준》《해피 패밀리》, 소설집《제망매》《엘리아의 제야》, 여행기《도시의 기억》, 서간집《고종석의 유럽통신》, 독서일기《책읽기, 책일기》, 인터뷰 《고종석의 낭만 미래》, 언어학 강의록 《불순한 언어가 아름답다》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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