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그늘(황금알 시인선 324)(양장본 Hardcover)
권숙월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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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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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한 말에 소금 석 되
- 권숙월 시집 『따뜻한 그늘』에 대하여
김 재 홍(시인·문학평론가)
꽃밭 속의 꽃들
시인들이 짧게는 수년, 길게는 십수 년을 적고 모으고 벼려서 내는 게 시집입니다. 시간이 되었다고 시가 거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때가 되었다고 마냥 시집으로 묶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편마다 영혼의 고투가 서리고, 피 흘리는 정신이 스며들고, 손발과 머리와 허파와 심장이 타들어 가는 갈증 끝에 마치 비명처럼 솟구치기를 쉬지 않고 거듭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시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가혹한 것일까요. 대체 시인은 어떤 운명을 타고났기에 혹독한 이 시업詩業을 끝내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요. 시인을 부려 무엇을 낳고자 시는 이토록 야멸찬 것일까요. 미당 서정주의 『화사집』 발문에 "시詩를 사랑하는 것은, 시詩를 생산生産하는 사람보다도 불행不幸한 일이다"(김상원)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이미 1941년에도 '시를 생산하는 사람'을 불행한 존재로 인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기야 어디 그때부터겠습니까. 멀리 최자(1188~1260)의 『보한집』에 "사람이 태어나서 수많은 재앙을 만나니 이러한 재앙을 이겨나가기는 힘든 일"이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평생 눈먼 육신을 이끌고 살다 간 호메로스와 만년의 현실적 고통 속에서 절규했던 핀다로스와 같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전하는 것을 보면 시인의 운명이란 고금동서를 가리지 않고 인간지사의 가장 처연한 국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권숙월 시인은 그 가장 반대편의 극단을 노래합니다. 어디 볼까요. 민들레, 목련, 벌개 미취, 백일홍, 쑥부쟁이, 채송화, 봉숭아, 할미꽃, 벚꽃, 생강나무꽃, 골담초, 풀또기, 박태기, 영산홍, 흰제비꽃, 금낭화, 진달래, 제비꽃, 배롱꽃, 능소화, 등갈퀴나물꽃, 스파티필름, 코스모스, 모란들이 그야말로 넓디넓고 난만하게 피어 있습니다. 극과 극이 소통하는 양상인가요. 50여 년 가까운 시력詩歷을 쉬지 않고 달려온 그의 노경에 울긋불긋 다사로운 꽃밭이 풍성하기만 합니다.
꽃을 떼어내면 할미만 남는다 할미를 떼어내면 꽃만 남는다 할미와 꽃이 만나 온전한 이름 하나 얻었다 그 이름 모르는 이 아직은 드물겠지 꽃 있는 날보다 꽃 없는 날이 훨씬 더 많아도 그 모습 오래 잊히지 않으리 오륙 년 전 우리 집에 온 두 포기 할미꽃, 손길 주지 않아도 해마다 두세 뼘씩 자랐다 너무 일찍 하늘길 떠나신 할머니, 저 꽃을 닮았으리 수수한 옷차림에분粉 내음 나지 않아도 응석 다 받아주었으리 손자 안아보고 싶은 마음 여태 접을 수 없었을까 불볕더위 아랑곳하지 않는 할미꽃, 한 아름 품어놓고 서 있다
- 「할미꽃의 품」 전문
그의 꽃밭에 핀 할미꽃이 보입니다. 시간의 역전도 보입니다. 이제 손주는 할아버지가 되어 응석받이 어릴 적을 떠올립니다. 흔히 시간은 앞에서 앞으로 단방향의 직진성을 띠고 있다 여기지만, 권숙월의 이 작품에서 보듯 그것은 얼마든지 돌아설 수도 있고 뒤죽박죽 섞일 수도 있고 아예 세상을 초월할 수도 있습니다. '꽃'을 떼어내고 사셨던 할머니, 그러나 '할미'를 뗀 꽃과 같았던 할머니는 너무 일찍 하늘길을 떠났지만, 나이 든 손주에게선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것도 하늘하늘 찰랑찰랑 분粉 내음 없는 진짜 향기를 품고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꽃만 본다든가, 역전된 시간만 보아서는 안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늘이 보입니다. 어두움, 서글픔, 한스러움, 외로움, 그리움을 꽉 부둥켜안고 있는 혹독한 삶의 신산
고초가 보입니다. 권숙월이 그것을 인식하고 있음은 "꽃을 떼어내면 할미만 남는다"는 표현을 통해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할머니의 삶에 대한, 즉 타자의 삶에 대한 거룩한 연민이라고만 말해서도 안 됩니다. 그는 할미꽃을 통해 할머니를 얘기하면서 동시에 자신과 자신의 주변인과 자신의 동시대인 모두를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얻은 인간 모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도저합니다. 그가 꽃 천지 꽃밭을 시화했다는 것이 갖는 의미를 간단히 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역시 극과 극이 통하는 것일까요. 꽃과 함께 꽃의 내부에 그토록 많은 이들의 염원과 희망과 갈망과 절망과 쓰라림이 도사리고 있음을 그는 '꽃밭'이라는 거대한 이미지를 조형함으로써 그야말로 실감 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바라보는 이 못난 후학의 마음도 찢어지는 듯합니다.
마을 어귀 정자나무 아래 채송화 꽃밭, 백 년 가까이 밟힌 맨땅에 베트남 이주 여성이 만든 것이다 극심한 가뭄에도 곱디고운 꽃 피우는 채송화 그 여성을 상징하는 듯 끈끈하다 사료공장에서 만난 남성과 보금자리 마련하고 마을 사람이 된 지 이태째다 찾는 발길 줄고 그늘까지 줄어든 늙은 정자나무 둘레에 채송화 심을 생각 어떻게 했을까 자식 없고 친척 없어 마을 사람 모두 가족처럼 여겨졌을까 나는 왜 보는 눈 많지 않은 우리 꽃밭밖에 몰랐을까 터놓고 얘기한 적 없는 이국 여성이 채송화꽃을 통해 속사정을 털어놓는다
- 「채송화 꽃밭」 전문
보이십니까. 권숙월의 꽃밭이 얼마나 드넓은지 말입니다. 또한 그 밭의 시간이 보이십니까. 가로로, 즉 공간의 수평축이 좌우로 한이 없습니다. 또한 세로로, 즉 시간의 수직축이 위아래로 끝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에 보이는 '베트남'은 고유명사라기보다 보통명사라고 할 것이며, '백 년'도 고정된 시간이 아니라 위아래로 한없이 확장되는 무한의 시간이라고 할 것입니다. 꽃을 심고 가꾸면서 "속사정을 털어놓는"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한결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적시한 꽃들이 한 편의 시에 모두 들어가 있는 게 아닙니다. 제각각 자신의 시편에 터를 잡고 피어 있습니다. 한 꽃이 여러 시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목록화하기도 했습니다 (「꽃의 목록」). 이 또한 노련하고 예민한 권숙월의 시적 경영이라 생각합니다. 사람 하나하나가 온 우주를 품고 있듯 꽃들도 저마다 한 세계를 이룩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하지 않고 말하는, 드러내지 않고 드러내는 시적 기율이 꽃처럼 빛납니다.
"화려한 수사를 멀리하고 인간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녹진하게 우러나오는 원형질의 언어를 구사하는" 시인으로 평가한 김종태 시인(「작품해설」, 『하늘은 참 좋겠다』, 2003)의 생각을 지지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는 괜히 수사를 붙여 실질을 살찌우려 하지 않고, 반대로 인위적으로 뼈만 남기려 하지도 않습니다. 일상어라 오해받을 정도로 자연스러움의 극대치를 보여줍니다. 진정한 자연스러움은 과장도 과소도 아니라는 듯 작위성이 완전히 제거된 일종의 진경산수眞景山)를 보는 듯합니다.
따뜻한 그늘
과연 이런 시가 보입니다.
꽃그늘 눈부시게 따뜻하다는 것 직지천 벚꽃길 걸으며 알았다 꽃 보는 눈 많아도 그늘 찾는 발길 드물다 그러나 가만, 벚꽃에서 어두운 그늘 본 적 있는가 벚꽃이 그늘 만드는 것 본 적 있는가 그늘은 해가 만드는 것, 따뜻하게 빛나는 그늘을 만드는 것이다 화려한 시간도 오래가지는 건 안 된다는 뜻일까 더 이상 행복한 모습 보여줄 수 없을 때면 고운 꿈 접는다 낮은 곳 찾아 날아가는 것이다
- 「따뜻한 그늘」 전문
진경산수는 실경實景이 아닙니다. 완전히 관념적인 풍경도 아니며, 교범을 따른 복제 풍경도 아닙니다. 진경은 화가의 '마음'을 거쳐 나온 풍경입니다. 권숙월의 시어를 "인간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녹진하게 우러나오는 원형질의 언어"라고 한다거나, '자연스러움의 극대치'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진경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그늘이 따뜻하지 않습니까. 어둠이 빛을 품고 있다는 것, 기쁨 속에 슬픔이 있다는 것, 고통 속의 환희와 열락 속의 참담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직지천 벚꽃길'을 걷는 시인은 얼마든지 그늘 속에서 따뜻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늘은 해가 만드는 것, 따뜻하게 빛나는 그늘을 만드는 것"이라는 통찰은 미만한 세계의 모순을 간파하는 시적 사유라 할것입니다.
이런 모순적 심상과 관련해 '흰 그늘'의 미학을 펼친 김지하(1941~2022)의 그것과 견줄 수 있지 않나 합니다. 마침, 두 시인은 일제 말기에 태어난 동시대의 인물들입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알 수 없다는 역설이 흰 그늘의 미학에 들어 있습니다. 생은 고귀하지도 빛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비천하고 어둡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따뜻한 그늘」은 바로 이러한 삶의 비의秘意를 날카롭게 인식한 시편이라고 하겠습니다.
장 담그는 법을 정월 초사흗날 아내에게 배웠다 막내와 함께 메주 여덟 장 품은 단지에 소금 녹인 물 네 말을 부었다 물 한 말에 소금 석 되, 고봉 열두 되의 소금이 들어갔다 설 대엿새 앞두고는 떡쌀 건지는 것까지 배웠다 가래떡 뽑으러 갈 때 서너 시간 불린 쌀을 물 따르기 바쁘게 비닐 포대에 담아 방앗간에 가면 되는 것이었다 아내 수술로 밥 짓는 일도 배웠다 국 끓이고 반찬 만드는 것은 어림없지만 설거지는 쉬웠다 마트에서 쇼핑카트도 끌지 않던 사람이세탁기 사용법까지 배운 것이다
- 「아내의 일」 전문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권숙월의 이번 시집에 보이는 많은 작품들과 더불어 득의의 시편이라고 할 만하지 않습니까. '물 한 말에 소금 석 되'가 무엇입니까. 아내의 일입니다. 이제 나이 들어 기운이 쇠하고 병까지 얻은 아내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 자신은 뒤늦게 그것을 배웁니다. 배우면서 느낍니다. 아내가 살아온 삶의 무게와 의미를 말입니다. 소나무의 죽음에서 삶-죽음의 의미를 역전시키고, 아내의 일을 배우면서 생의 그윽한 깊이를 통찰합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따뜻한 그늘』에는 노경에도 긴장을 잃지 않은 시편들이 상당합니다. 「꽃밭의 독무대」 「싱거운 처방전」 「진달래 살던 자리」 「스무 살에 초 하나」 「아버님」 「향기로운 생각」 「이렇게 큰 선물을 주시다니요」 「수강생 이금희」 「시인의 선물」 「영
심이 꽃밭」 「한 사람」 「첫눈」 「운동의 힘」 「옛날식 집 한 채」 등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봅니다. '물 한 말에 소금 석 되'가 황금비율이 되는 게 우리의 생이 아닌가 하는 것 말입니다. 권숙월의 시를 통해 우리는 그가 통찰한 생의 의미를 깨닫고 공감합니다. 그리고 그의 시가 삼백 년 너머, 저 먼 우주로 이어지는 순간을 기다립니다.
- 권숙월 시집 『따뜻한 그늘』에 대하여
김 재 홍(시인·문학평론가)
꽃밭 속의 꽃들
시인들이 짧게는 수년, 길게는 십수 년을 적고 모으고 벼려서 내는 게 시집입니다. 시간이 되었다고 시가 거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때가 되었다고 마냥 시집으로 묶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편마다 영혼의 고투가 서리고, 피 흘리는 정신이 스며들고, 손발과 머리와 허파와 심장이 타들어 가는 갈증 끝에 마치 비명처럼 솟구치기를 쉬지 않고 거듭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시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가혹한 것일까요. 대체 시인은 어떤 운명을 타고났기에 혹독한 이 시업詩業을 끝내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요. 시인을 부려 무엇을 낳고자 시는 이토록 야멸찬 것일까요. 미당 서정주의 『화사집』 발문에 "시詩를 사랑하는 것은, 시詩를 생산生産하는 사람보다도 불행不幸한 일이다"(김상원)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이미 1941년에도 '시를 생산하는 사람'을 불행한 존재로 인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기야 어디 그때부터겠습니까. 멀리 최자(1188~1260)의 『보한집』에 "사람이 태어나서 수많은 재앙을 만나니 이러한 재앙을 이겨나가기는 힘든 일"이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평생 눈먼 육신을 이끌고 살다 간 호메로스와 만년의 현실적 고통 속에서 절규했던 핀다로스와 같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전하는 것을 보면 시인의 운명이란 고금동서를 가리지 않고 인간지사의 가장 처연한 국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권숙월 시인은 그 가장 반대편의 극단을 노래합니다. 어디 볼까요. 민들레, 목련, 벌개 미취, 백일홍, 쑥부쟁이, 채송화, 봉숭아, 할미꽃, 벚꽃, 생강나무꽃, 골담초, 풀또기, 박태기, 영산홍, 흰제비꽃, 금낭화, 진달래, 제비꽃, 배롱꽃, 능소화, 등갈퀴나물꽃, 스파티필름, 코스모스, 모란들이 그야말로 넓디넓고 난만하게 피어 있습니다. 극과 극이 소통하는 양상인가요. 50여 년 가까운 시력詩歷을 쉬지 않고 달려온 그의 노경에 울긋불긋 다사로운 꽃밭이 풍성하기만 합니다.
꽃을 떼어내면 할미만 남는다 할미를 떼어내면 꽃만 남는다 할미와 꽃이 만나 온전한 이름 하나 얻었다 그 이름 모르는 이 아직은 드물겠지 꽃 있는 날보다 꽃 없는 날이 훨씬 더 많아도 그 모습 오래 잊히지 않으리 오륙 년 전 우리 집에 온 두 포기 할미꽃, 손길 주지 않아도 해마다 두세 뼘씩 자랐다 너무 일찍 하늘길 떠나신 할머니, 저 꽃을 닮았으리 수수한 옷차림에분粉 내음 나지 않아도 응석 다 받아주었으리 손자 안아보고 싶은 마음 여태 접을 수 없었을까 불볕더위 아랑곳하지 않는 할미꽃, 한 아름 품어놓고 서 있다
- 「할미꽃의 품」 전문
그의 꽃밭에 핀 할미꽃이 보입니다. 시간의 역전도 보입니다. 이제 손주는 할아버지가 되어 응석받이 어릴 적을 떠올립니다. 흔히 시간은 앞에서 앞으로 단방향의 직진성을 띠고 있다 여기지만, 권숙월의 이 작품에서 보듯 그것은 얼마든지 돌아설 수도 있고 뒤죽박죽 섞일 수도 있고 아예 세상을 초월할 수도 있습니다. '꽃'을 떼어내고 사셨던 할머니, 그러나 '할미'를 뗀 꽃과 같았던 할머니는 너무 일찍 하늘길을 떠났지만, 나이 든 손주에게선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것도 하늘하늘 찰랑찰랑 분粉 내음 없는 진짜 향기를 품고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꽃만 본다든가, 역전된 시간만 보아서는 안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늘이 보입니다. 어두움, 서글픔, 한스러움, 외로움, 그리움을 꽉 부둥켜안고 있는 혹독한 삶의 신산
고초가 보입니다. 권숙월이 그것을 인식하고 있음은 "꽃을 떼어내면 할미만 남는다"는 표현을 통해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할머니의 삶에 대한, 즉 타자의 삶에 대한 거룩한 연민이라고만 말해서도 안 됩니다. 그는 할미꽃을 통해 할머니를 얘기하면서 동시에 자신과 자신의 주변인과 자신의 동시대인 모두를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얻은 인간 모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도저합니다. 그가 꽃 천지 꽃밭을 시화했다는 것이 갖는 의미를 간단히 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역시 극과 극이 통하는 것일까요. 꽃과 함께 꽃의 내부에 그토록 많은 이들의 염원과 희망과 갈망과 절망과 쓰라림이 도사리고 있음을 그는 '꽃밭'이라는 거대한 이미지를 조형함으로써 그야말로 실감 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바라보는 이 못난 후학의 마음도 찢어지는 듯합니다.
마을 어귀 정자나무 아래 채송화 꽃밭, 백 년 가까이 밟힌 맨땅에 베트남 이주 여성이 만든 것이다 극심한 가뭄에도 곱디고운 꽃 피우는 채송화 그 여성을 상징하는 듯 끈끈하다 사료공장에서 만난 남성과 보금자리 마련하고 마을 사람이 된 지 이태째다 찾는 발길 줄고 그늘까지 줄어든 늙은 정자나무 둘레에 채송화 심을 생각 어떻게 했을까 자식 없고 친척 없어 마을 사람 모두 가족처럼 여겨졌을까 나는 왜 보는 눈 많지 않은 우리 꽃밭밖에 몰랐을까 터놓고 얘기한 적 없는 이국 여성이 채송화꽃을 통해 속사정을 털어놓는다
- 「채송화 꽃밭」 전문
보이십니까. 권숙월의 꽃밭이 얼마나 드넓은지 말입니다. 또한 그 밭의 시간이 보이십니까. 가로로, 즉 공간의 수평축이 좌우로 한이 없습니다. 또한 세로로, 즉 시간의 수직축이 위아래로 끝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에 보이는 '베트남'은 고유명사라기보다 보통명사라고 할 것이며, '백 년'도 고정된 시간이 아니라 위아래로 한없이 확장되는 무한의 시간이라고 할 것입니다. 꽃을 심고 가꾸면서 "속사정을 털어놓는"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한결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적시한 꽃들이 한 편의 시에 모두 들어가 있는 게 아닙니다. 제각각 자신의 시편에 터를 잡고 피어 있습니다. 한 꽃이 여러 시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목록화하기도 했습니다 (「꽃의 목록」). 이 또한 노련하고 예민한 권숙월의 시적 경영이라 생각합니다. 사람 하나하나가 온 우주를 품고 있듯 꽃들도 저마다 한 세계를 이룩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하지 않고 말하는, 드러내지 않고 드러내는 시적 기율이 꽃처럼 빛납니다.
"화려한 수사를 멀리하고 인간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녹진하게 우러나오는 원형질의 언어를 구사하는" 시인으로 평가한 김종태 시인(「작품해설」, 『하늘은 참 좋겠다』, 2003)의 생각을 지지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는 괜히 수사를 붙여 실질을 살찌우려 하지 않고, 반대로 인위적으로 뼈만 남기려 하지도 않습니다. 일상어라 오해받을 정도로 자연스러움의 극대치를 보여줍니다. 진정한 자연스러움은 과장도 과소도 아니라는 듯 작위성이 완전히 제거된 일종의 진경산수眞景山)를 보는 듯합니다.
따뜻한 그늘
과연 이런 시가 보입니다.
꽃그늘 눈부시게 따뜻하다는 것 직지천 벚꽃길 걸으며 알았다 꽃 보는 눈 많아도 그늘 찾는 발길 드물다 그러나 가만, 벚꽃에서 어두운 그늘 본 적 있는가 벚꽃이 그늘 만드는 것 본 적 있는가 그늘은 해가 만드는 것, 따뜻하게 빛나는 그늘을 만드는 것이다 화려한 시간도 오래가지는 건 안 된다는 뜻일까 더 이상 행복한 모습 보여줄 수 없을 때면 고운 꿈 접는다 낮은 곳 찾아 날아가는 것이다
- 「따뜻한 그늘」 전문
진경산수는 실경實景이 아닙니다. 완전히 관념적인 풍경도 아니며, 교범을 따른 복제 풍경도 아닙니다. 진경은 화가의 '마음'을 거쳐 나온 풍경입니다. 권숙월의 시어를 "인간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녹진하게 우러나오는 원형질의 언어"라고 한다거나, '자연스러움의 극대치'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진경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그늘이 따뜻하지 않습니까. 어둠이 빛을 품고 있다는 것, 기쁨 속에 슬픔이 있다는 것, 고통 속의 환희와 열락 속의 참담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직지천 벚꽃길'을 걷는 시인은 얼마든지 그늘 속에서 따뜻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늘은 해가 만드는 것, 따뜻하게 빛나는 그늘을 만드는 것"이라는 통찰은 미만한 세계의 모순을 간파하는 시적 사유라 할것입니다.
이런 모순적 심상과 관련해 '흰 그늘'의 미학을 펼친 김지하(1941~2022)의 그것과 견줄 수 있지 않나 합니다. 마침, 두 시인은 일제 말기에 태어난 동시대의 인물들입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알 수 없다는 역설이 흰 그늘의 미학에 들어 있습니다. 생은 고귀하지도 빛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비천하고 어둡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따뜻한 그늘」은 바로 이러한 삶의 비의秘意를 날카롭게 인식한 시편이라고 하겠습니다.
장 담그는 법을 정월 초사흗날 아내에게 배웠다 막내와 함께 메주 여덟 장 품은 단지에 소금 녹인 물 네 말을 부었다 물 한 말에 소금 석 되, 고봉 열두 되의 소금이 들어갔다 설 대엿새 앞두고는 떡쌀 건지는 것까지 배웠다 가래떡 뽑으러 갈 때 서너 시간 불린 쌀을 물 따르기 바쁘게 비닐 포대에 담아 방앗간에 가면 되는 것이었다 아내 수술로 밥 짓는 일도 배웠다 국 끓이고 반찬 만드는 것은 어림없지만 설거지는 쉬웠다 마트에서 쇼핑카트도 끌지 않던 사람이세탁기 사용법까지 배운 것이다
- 「아내의 일」 전문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권숙월의 이번 시집에 보이는 많은 작품들과 더불어 득의의 시편이라고 할 만하지 않습니까. '물 한 말에 소금 석 되'가 무엇입니까. 아내의 일입니다. 이제 나이 들어 기운이 쇠하고 병까지 얻은 아내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 자신은 뒤늦게 그것을 배웁니다. 배우면서 느낍니다. 아내가 살아온 삶의 무게와 의미를 말입니다. 소나무의 죽음에서 삶-죽음의 의미를 역전시키고, 아내의 일을 배우면서 생의 그윽한 깊이를 통찰합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따뜻한 그늘』에는 노경에도 긴장을 잃지 않은 시편들이 상당합니다. 「꽃밭의 독무대」 「싱거운 처방전」 「진달래 살던 자리」 「스무 살에 초 하나」 「아버님」 「향기로운 생각」 「이렇게 큰 선물을 주시다니요」 「수강생 이금희」 「시인의 선물」 「영
심이 꽃밭」 「한 사람」 「첫눈」 「운동의 힘」 「옛날식 집 한 채」 등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봅니다. '물 한 말에 소금 석 되'가 황금비율이 되는 게 우리의 생이 아닌가 하는 것 말입니다. 권숙월의 시를 통해 우리는 그가 통찰한 생의 의미를 깨닫고 공감합니다. 그리고 그의 시가 삼백 년 너머, 저 먼 우주로 이어지는 순간을 기다립니다.
목차
목차
1부
웃음의 힘·12
목련의 꽃 농사·13
할미꽃의 품·14
꽃샘추위·15
따뜻한 그늘·16
진달래 살던 자리·17
꽃의 목록·18
꽃밭은 누가 가꾸는가·19
채송화 꽃밭·20
속삭임·21
시골집 여름꽃·22
보랏빛 웃음·23
닮은꼴·24
꽃무릇 하직 인사·25
꽃밭의 독무대·26
2부
삼월삼짇날·28
꽃구경 약속·29
희미한 점 하나·30
아내의 일·31
교과서 두 권·32
근황·33
꽃 마음 축하금·34
손녀에게 배우다·35
윤슬이의 선거 공약·36
그 시절 다시 오면·37
싱거운 처방전·38
혼자 듣는 소리·39
내 몸의 곰팡이·40
신뢰도 99%·41
내시경 효과·42
3부
찬란한 마음·44
분홍 미소·45
분홍빛 속말·46
꽃의 말·47
마음의 초록 새싹·48
스무 살에 초 하나·49
과장법의 효과·50
아직도·51
아버님·52
본이름·53
빛나는 말·54
향기로운 생각·55
햇살 품은 꽃·56
겨울 갈대·57
특별한 효과·58
4부
하늘 면사포·60
맑은 시심·61
이렇게 큰 선물을 주시다니요·62
오래된 엽서·64
기합받아 마땅하다·65
굳은 결심·66
산의 품·67
해맑은 웃음·68
수강생 이금희·69
시인의 선물·70
기후의 위력·71
아직·72
가짜 책·73
한 사람·74
첫눈·75
5부
산의 사랑법·78
육필시집·79
너무 많은 은행잎·80
운동의 힘·81
하루 한 번·82
소나무의 죽음·83
문청 시절 습작 시처럼·84
가뭄의 끝은 언제인가·85
물의 길·86
영심이 꽃밭·87
제비의 봄·88
옛날식 집 한 채·89
제비의 사랑법·90
단칸방 신혼집·91
내리사랑·92
해설 | 김재홍_물 한 말에 소금 석 되·93
웃음의 힘·12
목련의 꽃 농사·13
할미꽃의 품·14
꽃샘추위·15
따뜻한 그늘·16
진달래 살던 자리·17
꽃의 목록·18
꽃밭은 누가 가꾸는가·19
채송화 꽃밭·20
속삭임·21
시골집 여름꽃·22
보랏빛 웃음·23
닮은꼴·24
꽃무릇 하직 인사·25
꽃밭의 독무대·26
2부
삼월삼짇날·28
꽃구경 약속·29
희미한 점 하나·30
아내의 일·31
교과서 두 권·32
근황·33
꽃 마음 축하금·34
손녀에게 배우다·35
윤슬이의 선거 공약·36
그 시절 다시 오면·37
싱거운 처방전·38
혼자 듣는 소리·39
내 몸의 곰팡이·40
신뢰도 99%·41
내시경 효과·42
3부
찬란한 마음·44
분홍 미소·45
분홍빛 속말·46
꽃의 말·47
마음의 초록 새싹·48
스무 살에 초 하나·49
과장법의 효과·50
아직도·51
아버님·52
본이름·53
빛나는 말·54
향기로운 생각·55
햇살 품은 꽃·56
겨울 갈대·57
특별한 효과·58
4부
하늘 면사포·60
맑은 시심·61
이렇게 큰 선물을 주시다니요·62
오래된 엽서·64
기합받아 마땅하다·65
굳은 결심·66
산의 품·67
해맑은 웃음·68
수강생 이금희·69
시인의 선물·70
기후의 위력·71
아직·72
가짜 책·73
한 사람·74
첫눈·75
5부
산의 사랑법·78
육필시집·79
너무 많은 은행잎·80
운동의 힘·81
하루 한 번·82
소나무의 죽음·83
문청 시절 습작 시처럼·84
가뭄의 끝은 언제인가·85
물의 길·86
영심이 꽃밭·87
제비의 봄·88
옛날식 집 한 채·89
제비의 사랑법·90
단칸방 신혼집·91
내리사랑·92
해설 | 김재홍_물 한 말에 소금 석 되·93
저자
저자
권숙월
1945년 김천시 감문면에서 출생. 1979년 『시문학』 통해 등단. 한국문인협회 김천지부장, 한국문인협회 경상북도지회장 역임. 김천문화원과 백수문학관에서 시 창작 강의. 새김천신문 편집국장. 시집 『동네북』 『예수님은 나귀 타고』 『무슨 할 말이 저리도 많아…』 『젖은 잎은 소리가 없다』 『왜 나무는 서 있기만 하는가』 『이미지 변신』 『그의 마음속으로』 『하늘은 참 좋겠다』『옷고름 푼 복숭아나무』 『하늘 입』 『가둔 말』 『새로 읽은 달』 『민들레 방점』 『금빛 웃음』 『오래 가까운 사이』 발간.
시문학상, 매계문학상, 한국시학상, 경북예술상, 경상북도문화상, 김천시문화상 등 수상.
시문학상, 매계문학상, 한국시학상, 경북예술상, 경상북도문화상, 김천시문화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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