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위의 여자(황금알 시인선 334)(양장본 Hardcover)
박열아 유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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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언어를 이끌고 상실의 강을 건너가는 존재의 용지(勇志)와 미학
염선옥(문학평론가)
'시밖에'쓸 수 없는 삶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세계에 말을 주고받을, 아니 한때 말을 주고받았던 대상을 잃은 존재가 남을 생을 위한 마지막 통로로 시를 붙들었다는 뜻일 것이다. 박열아 시인의 유고시집 『구름 위의 여자』는 그 길머리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한 사람의 얼굴을 오래 비추는 결실이다. 이 시집의 화자는 죽음과 슬픔의 가두리 안에서 성급히 현실로 복귀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결핍과 상실의 자리에 서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던,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존재들을 향해 이쪽의 시간을 묵묵히 견딜 뿐이다. 그 광경은 삶을 던지는 체념에 가깝기보다 이미 저편으로 건너간 이들과 그 부재가 남긴 실존의 무게를 정면으로 마주 보려는 자의 조용한 용지勇志에 가깝다. 이러한 시인의 삶과 문학은 사랑하는 존재를 잃고 저승으로 내려갔던 그리스 신화의 음유시인 오르페우스를 자연스레 불러낸다. 오르페우스가 자신의 노래를 앞세워 죽음의 강을 건넜듯이, 박열아 시인은 '시밖에' 남지 않은 몸을 이끌고 상실의 강을 건너가려는 존재로 선다. 그의 시집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파스칼이 말한 인간 조건의 추상적인 도식이나 죽음과 슬픔, 공허를 서둘러 벗어나려는 아나바시스Anabasis의 상상력이 아니다. 오히려 상실의 바닥까지 기꺼이 내려가려는 카타바시스Katabasis의 길 위에서, 꺼져가던 말을 다시 일으켜 사랑하는 이들을 향해 나아가는 느리고 낮은 정동이다. 하강과 상승이 한 몸처럼 겹쳐지는 자리에서 독자는 상실과 죽음의 경계에서 시를 감수하는 시인의 삶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과장되지 않은 어조와 거짓 없는 서정의 결로 또렷이 드러내 보이는 용기를 마주하게 된다.
박열아의 시집은 동일 제목의 연작 구조와 두 대상에 수렴하는 서정 화자의 정서적 구성을 통해, 자칫 새로움이 푼푼하지 못하다고 읽힐 위험을 안고 있다. 하지만 '새로움'이라는 코드를 도식적으로 이해하고, 기존의 문법과 권위를 깨뜨리거나 흔드는 몸짓만이 문학적 갱신으로 떠받드는 태도야말로 '낡아빠진' '새로움'에 대한 '상투적 도식'(김춘식, 「시의 새로움이 시대를 관통하는 방식」, 『현대문학』 2014년 7월호)이 아닐까. 현대적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되는 파괴와 갱신의 제스처만을 진정한 기준으로 삼는 태도와 관습이야말로 오히려 기계적인 발상이라는 것은 옳다. 박열아의 시는 이런 시류에 편승해 '새로움'을 위시하는 대신, 자기 현실을 끝까지 감수하면서 주어진 삶의 얼굴을 통해 시의 몸을 서서히 바꾸어나간다. 남은 삶을 진동하는 부재한 존재와의 조우의 여정을, 동일한 듯 매번 다른 계절에 새기며 변주하며 연작시에 애정을 고집스럽게 새기며, 시가 터져 나오는 자리의 실감을 끝까지 밀어 올린다. 이 지점에서 그의 시는 내용적으로 늘 새로운 방식으로 상실을 견디며 애도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박열아의 시 세계는 상실과 애도의 정동이 서정적 언술을 따라 오래도록 번져나가면서, 결여의 중심에 살아가는 한 주체의 내밀한 고뇌를 드러낸다. 『구름 위의 여자』를 관류하는 것은 한 개인에게만 국한된 어떤 사건의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상실 이후에도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 애도의 지속적인 발화이며, 우리 삶 전체를 관통하는 아픔의 감각이다. 「四月」 「낙화」 「봄비」 「辛 씨의 봄날」 연작시 「구름 위의 여자」와 「자하문 밖」 「서녘 하늘」 연작시에 이르기까지 반복되는 "가고 싶어라" "가지 마라" "울고 있느냐" "어디로 가는가"는 그 반복 자체가 곧 결핍의 시간성을 증언하는 리듬이자 메아리로 기능한다. 여기서 자연은 더 이상 충만한 현전의 배경이 아니다. 꽃잎과 흰 새, 구름과 달, 비와 낙엽은 아름다운 장식이기보다 부재한 존재의 흔적을 되비추는 감각의 표지로 되돌아온다.
이 시집의 「서문」은 그 정조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서문」을 쓴 아들 박의연 씨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죽음, 그리고 아버지의 병문안을 지나며 박열아가 "소멸의 마지막 길"을 통과했다고 전하고, 그 길 위에서 시는 삶을 위로하는 말보다 삶의 상처를 정직하게 응시하는 말로 나아간다고 밝힌다. 그래서 박열아의 시에서 "가고 싶어라"는 단순한 도피의 욕망이 아니라, 더는 머물 수 없는 상실의 자리에서 부재한 세계를 향해 몸을 기울이는 절박한 움직임이며, "가지 마라"는 그와 반대로 대상의 소실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는 애틋한 부름이다. 그래서 「구름 위의 여자」 연작시의 딸에 대한 호명과 「서녘 하늘」의 부름은 이미 멀어진 존재를 향해 끝내 가닿지 못하는 목소리로 남는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세계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화자에게 따뜻한 위안으로 도착하지 못하고 오히려 닿을 수 없는 거리만 더 또렷하게 드러낸다. 박열아의 시는 바로 그 거리감 속에서 상실을 지우지 않은 채 오래 응시하며, 사라진 것을 사라진 자리 그대로 불러 세우는 시적 태도를 끝까지 밀고 간다.
1959년 동국대 국문과에 입학하고 1학년인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전표지역戰標地域」으로 등단한 시인 박열아(박영열)의 유고시집 『구름 위의 여자』의 첫 독자를 자처한다는 일은, '애도 이후'의 세계에 조용히 발을 들여놓는 일과도 다르지 않다. 두 번의 상실과 지속한 고통을 통과한 이에게, 어떤 위로나 설명이 더는 닿지 않는 지대가 있다는 사실을 「서문」은 조용히 숨 막히게 알려주지 않았던가. 레비나스가 말하듯 삶의 충만함과 향유가 타자에게서 시작된다면, 타자의 부재는 곧 향유의 붕괴이며 나와 세계를 이어주던 감각의 회로가 한꺼번에 끊겨 나가는 사건일 것이다. 플뤼게가 '아픔'을 단순한 신체 통증이 아니라 살아가며 감당해야 하는 실존 전체의 고통으로 확장해 사유했듯, 아픔은 어느 한 지점을 찌르는 바늘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을 변조시키는 보이지 않는 필터다(헤르베르트 플뤼게, 『아픔에 대하여』, 김희상 역, 돌베개, 2017). 우울과 상실, 애도의 시간을 통과하는 주체에게 세계의 현상은 더 이상 중립적이지 않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그 모든 광경이, '나'의 피부에 닿지 않는 '그림'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세계의 다채로움과 풍요는 여전히 거기에 있지만, 그것은 나와 무관한 것, 나의 감각이 닿지 않는 것, 그리하여 오히려 잔인할 만큼 선명한 타자의 부재가 된다.
꽃이 피는데
바람이 부는데
꽃잎처럼 황홀한 슬픔에
가슴이 타는데
환각에 지쳐
잠드는 오후
꿈인 듯, 꿈인 듯
머언 거울 앞에
당신의 검은 머리칼이 지는데
아, 부질없어
지친 목 그늘에 쓰러져 버리면
어지러워라 나의 사랑은
남모르게 피 흘리는
나의 사랑은 어지러워라
꽃이 지는데
바람이 부는데
꽃잎처럼 황홀한 슬픔에
四月이 가는데
- 「四月」 전문
이 작품은 '색을 잃은 세계'를 가장 강렬한 형식으로 드러낸다. "꽃이 피는데/ 바람이 부는데"는 자연이 저 혼자 리듬을 따라 착실히 흘러가고 있음을 전하는, 건조한 보고의 문장이다. 피고 지는 것은 꽃이고, 불고 지나가는 것은 바람이지만 그 안에서 '나'는 고정불변하고 부재할 뿐이다. 화자는 그저 "피는데" "부는데"라는 말로 세계의 진행을 관조하고 확인할 뿐이다. 이 거리감 속에서 세계는 더 이상 '향유'의 장이 아니라 '나'의 상실을 역설적으로 비추는 배경으로 자리한다. 꽃과 바람은 그 자체로 자족적인 아름다움이라기보다, '나'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발화하기에 숭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아름다움이 더 이상 '나'에게 도달하지 않기에 그것들은 오히려 고통의 징표가 되어버린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세계에의 비참여 앞에서 오히려 과도하게 타오르는 것은 화자의 내면이다. "꽃잎처럼 황홀한 슬픔에/ 가슴이 타는데" 부분에서, '황홀'과 '슬픔'은 기묘하게 포개진다. 보통 황홀은 기쁨의 극점으로 기쁨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넘치는 상태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슬픔이 감각을 끝까지 밀어붙여 화자를 태워버리는 위태로운 국면을 가리킨다. 황홀한 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고, 그 슬픔이야말로 사랑하는 존재를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에, 화자는 그 황홀을 끝까지 포기할 수 없다.
이제 시는 이 슬픔의 감각을 "환각"과 "거울"로 바꿔 증언한다. "환각에 지쳐/ 잠드는 오후/ 꿈인 듯, 꿈인 듯"에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이미 흐려져 있다. 상실의 고통이 너무 클 때, 감각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잃어버린 장면과 잃어버린 얼굴을 계속 재생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보는 것은 현재의 풍경이지만 거기에 겹쳐지는 것은 이미 떠난 사람의 이미지다. 먼 거리에 놓인 거울 앞에 나타나는 것은 자기의 모습이 아니라 "당신의 검은 머리칼"이다. 거울은 원래 자기동일성을 확인하는 장치이지만, 여기서는 사랑하는 타자의 잔상을 비추는 장치이면서 결코 넘어올 수 없는 단절을 의미한다. 거울 앞에서 화자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대신 타자의 결핍과 그 결핍이 남긴 잔향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꿈인 듯"의 반복은 이 잔상이 얼마나 믿기 어렵고, 동시에 얼마나 떨쳐내기 어려운지를 애타게 보여주는 것이다.
「四月」은 계절의 순환과 존재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는 시가 아니라, 세계의 아름다움이 화자에게 도착하지 못할 때 그것이 어떻게 고통으로 바뀌는지를 보여주는 시라 할 수 있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장면은 여전히 눈앞에 있지만, 그 장면은 이제 사랑의 기억을 되살리는 대신 상실의 심연을 더 깊게 드러낸다. 상실은 특정한 날짜와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해서 현재를 물들이는 기억의 방식으로 지속된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시는 상실을 겪은 독자에게 깊이 공명하면서도, 애도와 사랑, 시간과 세계에 대한 사유를 동시에 촉발하는 아름답고도 아픈 사월의 얼굴을 하고 있다.
3.
파스칼은 『팡세』(블레즈 파스칼, 『파스칼의 팡세』, 강현규 엮음, 이선미 역, 메이트북스, 2025)에서 인간의 조건을 슬픔·고독·고통으로 파악하면서, 그 조건들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응시할 때 비로소 존재가 허무를 넘어 어떤 진실에 닿을 수 있다고 말한다. 박열아 시의 화자는 바로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인물이다. '나'는 상실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한 번 닫힌 문 앞에서 오래 서성이며, 끝내 그 비극을 외면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롤랑 바르트가 "애도의 슬픔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그런 것"(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 김진영 역, 걷는나무, 2024, 159쪽)이라고 말한 바로 그 명제를, 마치 실천하듯 살아내는 존재인 셈이다. 이렇게 시인의 화자는 오르페우스처럼 늘 애도하는 자, 애도의 현장을 벗어나지 못한 채 상실을 되풀이해서 마주하는 자로 나타난다. 애도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는 자리에서 그는 우울과 슬픔, 고독 사이를 홀로 떠돌며, 그럼에도 그 자리에 머무는 자로 드러난다. 그 떠돌이 같은 머묾 속에서 시는 인간이 견딜 수밖에 없는 아픔을 조금도 완화하지 않은 채, 다만 그 아픔 곁에 끝까지 머물러 있는 사랑의 얼굴을 비추어 보인다.
시월
서성이는 내 가슴에
하얗게 부서지는
낙엽의 빈 그림자
혜화동 로터리에 해가 저물면
울고 싶어라
그대는 어디로 가고
나 홀로 여기에 남아
빈 가슴으로 서성이는가
가고 싶어라
초록 바다 물결치는 그대 가슴에
이제는
나도 잠들고 싶어라
- 「辛 씨의 봄날 1」 전문
옥색 버선발로 건너가는
바다 저편에
해가 저물면
울고 싶어라
멀리서 바라만 보는
가버린 사람
- 「辛 씨의 봄날 2」 부분
꿈속에 서라도
한 번만 더
보고 싶은 당신의 모습
한세월 다 가도록 오지를 않고
하얗게 저무는 내 가슴에
비가 내리네
- 「辛 씨의 봄날 5」 부분
위에 인용한 세 편의 「辛 씨의 봄날」은, 끝내 귀환하지 못하는 '그대'를 향한 비가悲歌와 연모戀慕를 매개로 박열아 시의 세계를 하나의 불귀의식不歸儀式 속에서 전개되는 애도 서사로 드러낸다. 여기서 화자는 "빈 가슴으로 서성이"고, "멀리서 바라만 보"고, "한세월 다 가도록 오지를 않"는 타자를 향해 무기한으로 대기하는 존재, 곧 귀환 불가능한 타자를 향한 항구적 대기의 주체로 형상화된다. "무너져 내리"는 그의 세계는 실상 기다림과 울음 외에는 다른 어떤 기표로도 충전되지 못한 채 공허와 결핍의 정조 속에 머문다.
「辛 씨의 봄날 1」에서 "시월"과 "혜화동 로터리"는 함께였던 시간이 한 점에 응고된 자리이자, 이제는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관계의 빈 그림자가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상실의 좌표다. "시월/ 서성이는 내 가슴에/ 하얗게 부서지는/ 낙엽의 빈 그림자" 속에서 화자가 붙드는 것은 생생한 낙엽의 촉감이 아니라 그 위에 겹쳐진 허공의 그림자이며, "혜화동 로터리에 해가 저물면/ 울고 싶어라"라는 고백은 하루의 끝이 아니라 함께였던 시간이 기울어 사라져 가는 뼈저린 감각을 불러낸다. 그렇게 "나 홀로 여기에 남아/ 빈 가슴으로 서성이는" 화자는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떠나버리면 사랑과 슬픔까지 함께 지워질까 두려워 같은 자리를 도는 사람, 상실을 잊기보다 기억 속에서 살아 있으려는 사람으로 드러난다.
「辛 씨의 봄날 2」에서도 화자의 시선은 끝까지 떠난 이를 따라간다. "옥색 버선발로 건너가는/ 바다 저편에/ 해가 저물면/ 울고 싶어라"에서 "옥색 버선발"이라는 감각적 시어는, 한 사람의 전체가 아니라 발끝과 옷자락 같은 작은 조각으로밖에 붙잡지 못하는 상실의 기억 방식을 보여준다. 버선발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이쪽에서 저편으로 '건너가는' 몸의 움직임을 드러내는 표지이고, 그 발이 닿는 "바다 저편"은 이승과 저승, 나와 그대를 가르는 깊은 경계로 느껴진다. 해가 저물어 빛이 스러지는 시간, 그 경계는 더 깊고 멀어지고, 그럴수록 이미 떠난 이의 자취는 오히려 또렷해진다. "멀리서 바라만 보는/ 가버린 사람"이라는 구절은 화자가 상실을 견디는 방식을 담담히 보여준다. 그는 상실을 서둘러 봉합하거나 다른 삶으로 급히 피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멀리서 바라만" 본다. 이 바라봄은 기적 같은 귀환을 기대하는 희망이라기보다 되돌릴 수 없는 아픔을 조용히 되풀이해 확인하는 의식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화자는 "옥색 버선발"이 향해 간 저편에서 눈을 거두지 않는다. 더 아플 것을 알면서도 그 아픔을 끝까지 감당하겠다는 이 머묾 속에서 그는 상실을 지우지 않고 애도 속에 머무는 사람으로서 서 있다.
「辛 씨의 봄날 5」의 "꿈속에서라도/ 한 번만 더/ 보고 싶은 당신의 모습"은, 현실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존재를 이제는 꿈이라는 가장 불확실한 자리에서라도 붙들고 싶어 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한세월 다 가도록 오지를 않고"라는 구절에는 이 부재가 짧은 공백이 아니라 거의 한 생애를 가로지르는 빈자리였다는 체념이 배어 있고, 기다림이 어느새 삶의 형식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조용하게 새겨진다. "하얗게 저무는 내 가슴에/ 비가 내리네"에서, 가슴이 '하얗게 저문다'는 말은 감정의 색과 온기를 서서히 잃어가는 내면의 소진을 가리키고 그 위에 내리는 비는 멈추지 않는 눈물과 슬픔을 겹쳐 놓는다. 짧은 몇 줄 안에서, 오지 않는 사람을 한 세월 기다리며, 그 기다림 속에서 천천히 소멸해가는 한 존재의 애도와 우울이 소리 없이 펼쳐진다.
연작 전체를 놓고 보면, 2부에 놓인 「辛 씨의 봄날」 9편은 '그대'를 둘러싼 애도의 길고 낮은 변주다. "혜화동 로터리"라는 현실의 장소, "시월"이라는 계절의 시간, 옥색 버선발, 낙엽의 빈 그림자, 초록 바다, 가버린 사람, 꿈속의 얼굴 같은 이미지들은 모두, 한 번 끝난 줄 알았던 과거가 자꾸 현재로 스며드는 방식으로 돌아온다. 세계는 제 속도로 흘러 시월은 다시 돌아오고, 해는 매일 저물며, 어디선가 또 다른 봄날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이 화자에게 그 모든 풍경은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배경이라기보다, 상실을 비추어 돌려주는 '거울'에 가깝다. 한때 타자를 통해 열리던 세계의 창이 닫힌 뒤에도, 세계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세계는 이제 부재를 증언하는 광장처럼 느껴진다. 그런 자리에서 시인의 화자는, 오르페우스처럼 상실의 현장을 떠나지 못한 채 되찾을 수 없는 그대를 향해 오래 노래한다.
4.
3부의 시편들은 시제詩題이기도 한 「구름 위의 여자」 19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 연작이 유독 더 가슴을 조여오는 이유는, 그 한 편 한 편이 모두 '딸'을 잃은 자리에서 발화된 노래이기 때문이다. 정지용이 『조선지광』 89호(1930.1, 1쪽)에 발표한 「유리창 1」(정지용, 『정지용 詩』, 권영민 편, 민음사, 2004, 151쪽)과 청마 유치환이 1947년 『생명의 서』에 수록한 「육 년 후」가 자연스레 포개져 떠오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린 딸을 잃은 슬픔을 노래한 정지용의 세계는, "새까만 밤"으로 표상되는 창밖의 무한한 어둠과 그 어둠을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화자의 내면을 하나의 시적 공간 안에서 겹쳐놓는다. 유리창은 차갑게 식은 세계와 뜨거운 가슴을 가르는 투명한 막이자, 더는 닿을 수 없는 아이의 얼굴이 아득히 어른거리는 스크린이다. "向아 오늘에사 비로소 너의 죽음을 읊을 수 있노라"(유치환, 『청마 유치환 전집』, 남송우 엮음, 국학자료원, 2008, 141쪽)라고 고백하는 유치환의 문장은, 죽음을 입에 올리는 일 자체가 얼마나 버거운지, 참척의 슬픔이 언어를 얼마나 오래 막아 세우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박열아의 시집 3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비가悲歌이며, 시인의 슬픔이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만큼 치솟은 국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흰 꽃잎"과 "찬비" "발소리" 외에도 "어디만큼 가고 있느냐"(「구름 위의 여자 1」), "어디쯤 가고 있느냐"(「구름 위의 여자 19」)라고 묻고, "나도 그만 가고 싶어라"(「구름 위의 여자 1, 3, 4, 11, 14」)라고 되뇌며, "가지 마라/ 가지 마라"(「구름 위의 여자 6, 8, 16, 17」)라고 붙들고, 때로는 "떠나 볼거나"(「구름 위의 여자 9, 12」), "달려가리라"(「구름 위의 여자 10」)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롤랑 바르트가 『애도일기』에서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슬프다, 울고 싶다" 외에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 자신을 기록하던 그 침묵의 자리와 맞닿아 있다. 3부에 이르러 박열아의 시가 유난히 간결해지는 까닭은 바로 이 애도의 언어가 마지막까지 남겨 놓은 몇 마디만이 시로 응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름에 가린 달은
어디로 가는가
서창에 흰 그림자
내 가슴에 지면
알 수 없어라
이지러진 달은
하늘에서 울고
너는
내 가슴에서 우는데
어찌하여
저녁 창 너머
가을 잎새만 지는가
- 「구름 위의 여자 18」 전문
우선 「구름 위의 여자 18」과 정지용의 「유리창」을 겹쳐 읽어보자. 정지용의 「유리창 1」에서 유리琉璃는 "새까만 밤"과 "물 먹은 별"이 비치는 투명한 막이자, 이미 떠난 아이의 흔적이 어른거리는 화면이다. 겨울밤 유리창에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는 화자의 몸짓은, 이승과 저승, 여기와 저기를 가르는 그 얇지만, 절대적인 경계를 밀어내보려는 애도의 시도이면서,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끝내 닿지 못하는 실패의 몸짓이기도 하다. 끝내 "아아, 늬는 산ㅅ새처럼 날러 갔구나!"라는 탄식으로 맺히는 이 시는, 보이지만 닿을 수 없는 아이를 유리창 너머에서 응시하는 아버지의 시간을, 대면과 비대면이 동시에 겹친 비극적 순간으로 형상화했다. 「구름 위의 여자 18」에서 "서창에 흰 그림자/ 내 가슴에 지면/ 알 수 없어라"는, 바로 이 장면을 다른 시대의 언어로 변주한 것이다. 여기서 "서창"은 유리창의 다른 이름이고, "흰 그림자"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아이의 실체가 아니라 그 잔영이다. 유리창에 어른거리던 "차고 슬픈 것"이 박열아에게서는 서창의 "흰 그림자"로 옮겨 온 셈이며, 그 그림자가 "내 가슴에 지면"이라는 표현은, 창 바깥에 머물던 슬픔이 이제는 화자의 몸 안, 심장 안으로 스며드는 순간을 붙잡는다. 정지용에게 유리창이 주로 '밖을 향한 응시의 면'이었다면, 박열아에게 창은 '밖'과 '안'을 동시에 받는 평면이다. 그래서 창에 비친 그림자는 곧바로 가슴에 낙인처럼 박히고 남은 말은 "알 수 없어라"라는 한 줄뿐이다.
두 시는 달과 밤,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 떠난 딸을 "하늘 쪽 어딘가에 있는 존재"로 구조화한다는 점에서도 서로를 마주 본다. 정지용에게 "물먹은 별"과 "새까만 밤"은 아이가 흩어진 저편의 우주를, 박열아 시인에게 "구름에 가린 달" "이지러진 달"은 온전히 차지 못하는 상실된 온전함을 상징한다. "이지러진 달은/ 하늘에서 울고/ 너는/ 내 가슴에서 우는데"에서 달과 '너'는 서로 다른 두 자리에서 울음의 기점을 이루고, 아이는 하늘과 가슴이라는 두 차원을 동시에 점유하는 존재가 된다. 정지용의 화자가 유리창에 붙어 선 아버지의 얼굴이라면, 시인의 화자는 "구름 위의 여자"를 향해 말을 건네는 남겨진 사람의 얼굴이다. 그 남겨진 이는 딸을 "하늘과 가슴 사이의 존재"로 떠나보내고도 창 앞을 떠나지 못한 채, 끝내 애도의 자리에서 밤과 창을 응시하는 자로 남는다. 그래서 두 시와 두 시집이 우리들에게 비슷한 감성으로 다가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유리창이라는 장치를 통해 "떠난 딸과 남겨진 자가 서로를 바라보지만 닿지 못하는 밤"이라는 동일한 장면을 나란히 응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멀리 있는 산이
더 가깝게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저 푸른 가슴에
내 가슴 묻어놓고
딸아
너는 지금 어디만큼 가고 있느냐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서역 만리 길
밤 무지개 등에 지고
우는 네 모습
하얀 꽃잎 되어 내 가슴에 지면
지는 해 저편으로 나도 그만 가고 싶어라
빈손 마주 잡고
먼 하늘 너머로 가고 싶어라
- 「구름 위의 여자 3」 전문
여기서는 시인의 화자와 '딸'의 자리가 오히려 뒤집혀 있는 듯한 인상이 강하게 드러난다. 생명이 멈춘 존재는 딸이 아니라, 오히려 박열아 시인의 화자 쪽에 가깝다. "멀리 있는 산이/더 가깝게 보이는 것은" "저 푸른 가슴에/ 내 가슴"을 묻어 두었기 때문이라는 고백은, 딸이 묻힌 산이 곧 자신의 가슴을 묻어 둔 자리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멀리 있는 산은 지리적 거리와 무관하게 가장 가까운 장소, 곧 '내 생의 중심이 이미 옮겨져 버린 곳'으로 경험된다.
반대로 움직이는 존재는 딸이다. 화자는 "어디만큼 가고 있느냐"라고 묻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서역 만리길"을 떠나는 딸의 길에 동행하고자 한다. "밤 무지개 등에 지고/ 우는 네 모습"은 이승에서의 고통을 끝내고자 떠난 아이의 뒷모습이면서, 동시에 "하얀 꽃잎 되어" '나'의 "가슴에 지"고 "빈손 마주 잡고" 함께 걷고자 하는 소망의 형상이다. 여기서 느껴지는 정서는, 애도의 미완未完과 멜랑콜리의 기운 속에서도 자아가 자신을 향해 붕괴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실의 고통이 시어를 극도로 간결하게 다듬어내지만, 그 간결함은 자기 파괴의 언어가 아니라, 먼 길 떠나는 딸의 곁을 지키고자 하는 절제된 동행의 언어로 남는다. 다시 말해, 화자가 품은 의지는 삶을 포기하고 딸을 따라가겠다는 충동이 아니라, "딸과 함께 살아 보겠다"는 또 다른 형태의 삶의 결단으로 읽힌다.
박열아 시인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획득한 '야누스'의 얼굴을 지닌 존재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의 자리에서 그의 시가 "죽음을 사는 방식으로 존재"(유성호, 「우리 시대의 '시적인 것'과 윤리성」, 『오늘의 문예비평』, 2006.3, 21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폐허의 땅에서 '나'의 언어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그 물음에 스스로 답하며 완성된 『구름 위의 여자』는 자의식의 회복을 통해 상실을 상쇄하고, 시적 윤리성에 대한 자각을 한층 심화시킨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두 존재의 좌표를 확인하고 반성하면서 그 자체로 자신의 존재 방식을 근원적으로 성찰한다. 박열아 시인은 '왜 시를 쓰는가'라는 본질적 물음 앞에서 이미 스스로의 대답을 품고 있다. "언젠가 해가 저물어 딸이 사는 그 마을로 가는 그날까지 이 작업은 계속될 것이다."(「후기」)라는 고백은, 아무 의미도 성립하지 않는 세계 속에서 시야말로 유일하게 삶의 자리를 열어주는 행위임을 웅변한다. "손을 마주 잡"기 위해 미세한 흔적 하나를 다시 불러내는 동안, 시인의 삶과 시는 상실의 자리에서 다시 태어난다. 『구름 위의 여자』는 파괴와 갱신의 몸짓으로 치장된 관습적 '새로움' 대신, 상실을 기꺼이 감수하고 탄식하는 인간의 얼굴을 통해 우리 시대 서정시의 또 다른 현대성을 증언한다. 그것은 상실의 부재가 아니라, 상실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의 윤리를 향한 고요한 응시이며, 그 상실의 강을 건너기 위해 언어를 이끌고 나아가는 시인의 용지勇志와 그로부터 피어나는 미학의 형상화이기도 하다.
염선옥(문학평론가)
'시밖에'쓸 수 없는 삶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세계에 말을 주고받을, 아니 한때 말을 주고받았던 대상을 잃은 존재가 남을 생을 위한 마지막 통로로 시를 붙들었다는 뜻일 것이다. 박열아 시인의 유고시집 『구름 위의 여자』는 그 길머리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한 사람의 얼굴을 오래 비추는 결실이다. 이 시집의 화자는 죽음과 슬픔의 가두리 안에서 성급히 현실로 복귀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결핍과 상실의 자리에 서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던,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존재들을 향해 이쪽의 시간을 묵묵히 견딜 뿐이다. 그 광경은 삶을 던지는 체념에 가깝기보다 이미 저편으로 건너간 이들과 그 부재가 남긴 실존의 무게를 정면으로 마주 보려는 자의 조용한 용지勇志에 가깝다. 이러한 시인의 삶과 문학은 사랑하는 존재를 잃고 저승으로 내려갔던 그리스 신화의 음유시인 오르페우스를 자연스레 불러낸다. 오르페우스가 자신의 노래를 앞세워 죽음의 강을 건넜듯이, 박열아 시인은 '시밖에' 남지 않은 몸을 이끌고 상실의 강을 건너가려는 존재로 선다. 그의 시집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파스칼이 말한 인간 조건의 추상적인 도식이나 죽음과 슬픔, 공허를 서둘러 벗어나려는 아나바시스Anabasis의 상상력이 아니다. 오히려 상실의 바닥까지 기꺼이 내려가려는 카타바시스Katabasis의 길 위에서, 꺼져가던 말을 다시 일으켜 사랑하는 이들을 향해 나아가는 느리고 낮은 정동이다. 하강과 상승이 한 몸처럼 겹쳐지는 자리에서 독자는 상실과 죽음의 경계에서 시를 감수하는 시인의 삶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과장되지 않은 어조와 거짓 없는 서정의 결로 또렷이 드러내 보이는 용기를 마주하게 된다.
박열아의 시집은 동일 제목의 연작 구조와 두 대상에 수렴하는 서정 화자의 정서적 구성을 통해, 자칫 새로움이 푼푼하지 못하다고 읽힐 위험을 안고 있다. 하지만 '새로움'이라는 코드를 도식적으로 이해하고, 기존의 문법과 권위를 깨뜨리거나 흔드는 몸짓만이 문학적 갱신으로 떠받드는 태도야말로 '낡아빠진' '새로움'에 대한 '상투적 도식'(김춘식, 「시의 새로움이 시대를 관통하는 방식」, 『현대문학』 2014년 7월호)이 아닐까. 현대적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되는 파괴와 갱신의 제스처만을 진정한 기준으로 삼는 태도와 관습이야말로 오히려 기계적인 발상이라는 것은 옳다. 박열아의 시는 이런 시류에 편승해 '새로움'을 위시하는 대신, 자기 현실을 끝까지 감수하면서 주어진 삶의 얼굴을 통해 시의 몸을 서서히 바꾸어나간다. 남은 삶을 진동하는 부재한 존재와의 조우의 여정을, 동일한 듯 매번 다른 계절에 새기며 변주하며 연작시에 애정을 고집스럽게 새기며, 시가 터져 나오는 자리의 실감을 끝까지 밀어 올린다. 이 지점에서 그의 시는 내용적으로 늘 새로운 방식으로 상실을 견디며 애도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박열아의 시 세계는 상실과 애도의 정동이 서정적 언술을 따라 오래도록 번져나가면서, 결여의 중심에 살아가는 한 주체의 내밀한 고뇌를 드러낸다. 『구름 위의 여자』를 관류하는 것은 한 개인에게만 국한된 어떤 사건의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상실 이후에도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 애도의 지속적인 발화이며, 우리 삶 전체를 관통하는 아픔의 감각이다. 「四月」 「낙화」 「봄비」 「辛 씨의 봄날」 연작시 「구름 위의 여자」와 「자하문 밖」 「서녘 하늘」 연작시에 이르기까지 반복되는 "가고 싶어라" "가지 마라" "울고 있느냐" "어디로 가는가"는 그 반복 자체가 곧 결핍의 시간성을 증언하는 리듬이자 메아리로 기능한다. 여기서 자연은 더 이상 충만한 현전의 배경이 아니다. 꽃잎과 흰 새, 구름과 달, 비와 낙엽은 아름다운 장식이기보다 부재한 존재의 흔적을 되비추는 감각의 표지로 되돌아온다.
이 시집의 「서문」은 그 정조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서문」을 쓴 아들 박의연 씨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죽음, 그리고 아버지의 병문안을 지나며 박열아가 "소멸의 마지막 길"을 통과했다고 전하고, 그 길 위에서 시는 삶을 위로하는 말보다 삶의 상처를 정직하게 응시하는 말로 나아간다고 밝힌다. 그래서 박열아의 시에서 "가고 싶어라"는 단순한 도피의 욕망이 아니라, 더는 머물 수 없는 상실의 자리에서 부재한 세계를 향해 몸을 기울이는 절박한 움직임이며, "가지 마라"는 그와 반대로 대상의 소실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는 애틋한 부름이다. 그래서 「구름 위의 여자」 연작시의 딸에 대한 호명과 「서녘 하늘」의 부름은 이미 멀어진 존재를 향해 끝내 가닿지 못하는 목소리로 남는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세계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화자에게 따뜻한 위안으로 도착하지 못하고 오히려 닿을 수 없는 거리만 더 또렷하게 드러낸다. 박열아의 시는 바로 그 거리감 속에서 상실을 지우지 않은 채 오래 응시하며, 사라진 것을 사라진 자리 그대로 불러 세우는 시적 태도를 끝까지 밀고 간다.
1959년 동국대 국문과에 입학하고 1학년인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전표지역戰標地域」으로 등단한 시인 박열아(박영열)의 유고시집 『구름 위의 여자』의 첫 독자를 자처한다는 일은, '애도 이후'의 세계에 조용히 발을 들여놓는 일과도 다르지 않다. 두 번의 상실과 지속한 고통을 통과한 이에게, 어떤 위로나 설명이 더는 닿지 않는 지대가 있다는 사실을 「서문」은 조용히 숨 막히게 알려주지 않았던가. 레비나스가 말하듯 삶의 충만함과 향유가 타자에게서 시작된다면, 타자의 부재는 곧 향유의 붕괴이며 나와 세계를 이어주던 감각의 회로가 한꺼번에 끊겨 나가는 사건일 것이다. 플뤼게가 '아픔'을 단순한 신체 통증이 아니라 살아가며 감당해야 하는 실존 전체의 고통으로 확장해 사유했듯, 아픔은 어느 한 지점을 찌르는 바늘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을 변조시키는 보이지 않는 필터다(헤르베르트 플뤼게, 『아픔에 대하여』, 김희상 역, 돌베개, 2017). 우울과 상실, 애도의 시간을 통과하는 주체에게 세계의 현상은 더 이상 중립적이지 않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그 모든 광경이, '나'의 피부에 닿지 않는 '그림'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세계의 다채로움과 풍요는 여전히 거기에 있지만, 그것은 나와 무관한 것, 나의 감각이 닿지 않는 것, 그리하여 오히려 잔인할 만큼 선명한 타자의 부재가 된다.
꽃이 피는데
바람이 부는데
꽃잎처럼 황홀한 슬픔에
가슴이 타는데
환각에 지쳐
잠드는 오후
꿈인 듯, 꿈인 듯
머언 거울 앞에
당신의 검은 머리칼이 지는데
아, 부질없어
지친 목 그늘에 쓰러져 버리면
어지러워라 나의 사랑은
남모르게 피 흘리는
나의 사랑은 어지러워라
꽃이 지는데
바람이 부는데
꽃잎처럼 황홀한 슬픔에
四月이 가는데
- 「四月」 전문
이 작품은 '색을 잃은 세계'를 가장 강렬한 형식으로 드러낸다. "꽃이 피는데/ 바람이 부는데"는 자연이 저 혼자 리듬을 따라 착실히 흘러가고 있음을 전하는, 건조한 보고의 문장이다. 피고 지는 것은 꽃이고, 불고 지나가는 것은 바람이지만 그 안에서 '나'는 고정불변하고 부재할 뿐이다. 화자는 그저 "피는데" "부는데"라는 말로 세계의 진행을 관조하고 확인할 뿐이다. 이 거리감 속에서 세계는 더 이상 '향유'의 장이 아니라 '나'의 상실을 역설적으로 비추는 배경으로 자리한다. 꽃과 바람은 그 자체로 자족적인 아름다움이라기보다, '나'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발화하기에 숭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아름다움이 더 이상 '나'에게 도달하지 않기에 그것들은 오히려 고통의 징표가 되어버린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세계에의 비참여 앞에서 오히려 과도하게 타오르는 것은 화자의 내면이다. "꽃잎처럼 황홀한 슬픔에/ 가슴이 타는데" 부분에서, '황홀'과 '슬픔'은 기묘하게 포개진다. 보통 황홀은 기쁨의 극점으로 기쁨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넘치는 상태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슬픔이 감각을 끝까지 밀어붙여 화자를 태워버리는 위태로운 국면을 가리킨다. 황홀한 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고, 그 슬픔이야말로 사랑하는 존재를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에, 화자는 그 황홀을 끝까지 포기할 수 없다.
이제 시는 이 슬픔의 감각을 "환각"과 "거울"로 바꿔 증언한다. "환각에 지쳐/ 잠드는 오후/ 꿈인 듯, 꿈인 듯"에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이미 흐려져 있다. 상실의 고통이 너무 클 때, 감각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잃어버린 장면과 잃어버린 얼굴을 계속 재생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보는 것은 현재의 풍경이지만 거기에 겹쳐지는 것은 이미 떠난 사람의 이미지다. 먼 거리에 놓인 거울 앞에 나타나는 것은 자기의 모습이 아니라 "당신의 검은 머리칼"이다. 거울은 원래 자기동일성을 확인하는 장치이지만, 여기서는 사랑하는 타자의 잔상을 비추는 장치이면서 결코 넘어올 수 없는 단절을 의미한다. 거울 앞에서 화자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대신 타자의 결핍과 그 결핍이 남긴 잔향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꿈인 듯"의 반복은 이 잔상이 얼마나 믿기 어렵고, 동시에 얼마나 떨쳐내기 어려운지를 애타게 보여주는 것이다.
「四月」은 계절의 순환과 존재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는 시가 아니라, 세계의 아름다움이 화자에게 도착하지 못할 때 그것이 어떻게 고통으로 바뀌는지를 보여주는 시라 할 수 있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장면은 여전히 눈앞에 있지만, 그 장면은 이제 사랑의 기억을 되살리는 대신 상실의 심연을 더 깊게 드러낸다. 상실은 특정한 날짜와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해서 현재를 물들이는 기억의 방식으로 지속된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시는 상실을 겪은 독자에게 깊이 공명하면서도, 애도와 사랑, 시간과 세계에 대한 사유를 동시에 촉발하는 아름답고도 아픈 사월의 얼굴을 하고 있다.
3.
파스칼은 『팡세』(블레즈 파스칼, 『파스칼의 팡세』, 강현규 엮음, 이선미 역, 메이트북스, 2025)에서 인간의 조건을 슬픔·고독·고통으로 파악하면서, 그 조건들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응시할 때 비로소 존재가 허무를 넘어 어떤 진실에 닿을 수 있다고 말한다. 박열아 시의 화자는 바로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인물이다. '나'는 상실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한 번 닫힌 문 앞에서 오래 서성이며, 끝내 그 비극을 외면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롤랑 바르트가 "애도의 슬픔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그런 것"(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 김진영 역, 걷는나무, 2024, 159쪽)이라고 말한 바로 그 명제를, 마치 실천하듯 살아내는 존재인 셈이다. 이렇게 시인의 화자는 오르페우스처럼 늘 애도하는 자, 애도의 현장을 벗어나지 못한 채 상실을 되풀이해서 마주하는 자로 나타난다. 애도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는 자리에서 그는 우울과 슬픔, 고독 사이를 홀로 떠돌며, 그럼에도 그 자리에 머무는 자로 드러난다. 그 떠돌이 같은 머묾 속에서 시는 인간이 견딜 수밖에 없는 아픔을 조금도 완화하지 않은 채, 다만 그 아픔 곁에 끝까지 머물러 있는 사랑의 얼굴을 비추어 보인다.
시월
서성이는 내 가슴에
하얗게 부서지는
낙엽의 빈 그림자
혜화동 로터리에 해가 저물면
울고 싶어라
그대는 어디로 가고
나 홀로 여기에 남아
빈 가슴으로 서성이는가
가고 싶어라
초록 바다 물결치는 그대 가슴에
이제는
나도 잠들고 싶어라
- 「辛 씨의 봄날 1」 전문
옥색 버선발로 건너가는
바다 저편에
해가 저물면
울고 싶어라
멀리서 바라만 보는
가버린 사람
- 「辛 씨의 봄날 2」 부분
꿈속에 서라도
한 번만 더
보고 싶은 당신의 모습
한세월 다 가도록 오지를 않고
하얗게 저무는 내 가슴에
비가 내리네
- 「辛 씨의 봄날 5」 부분
위에 인용한 세 편의 「辛 씨의 봄날」은, 끝내 귀환하지 못하는 '그대'를 향한 비가悲歌와 연모戀慕를 매개로 박열아 시의 세계를 하나의 불귀의식不歸儀式 속에서 전개되는 애도 서사로 드러낸다. 여기서 화자는 "빈 가슴으로 서성이"고, "멀리서 바라만 보"고, "한세월 다 가도록 오지를 않"는 타자를 향해 무기한으로 대기하는 존재, 곧 귀환 불가능한 타자를 향한 항구적 대기의 주체로 형상화된다. "무너져 내리"는 그의 세계는 실상 기다림과 울음 외에는 다른 어떤 기표로도 충전되지 못한 채 공허와 결핍의 정조 속에 머문다.
「辛 씨의 봄날 1」에서 "시월"과 "혜화동 로터리"는 함께였던 시간이 한 점에 응고된 자리이자, 이제는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관계의 빈 그림자가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상실의 좌표다. "시월/ 서성이는 내 가슴에/ 하얗게 부서지는/ 낙엽의 빈 그림자" 속에서 화자가 붙드는 것은 생생한 낙엽의 촉감이 아니라 그 위에 겹쳐진 허공의 그림자이며, "혜화동 로터리에 해가 저물면/ 울고 싶어라"라는 고백은 하루의 끝이 아니라 함께였던 시간이 기울어 사라져 가는 뼈저린 감각을 불러낸다. 그렇게 "나 홀로 여기에 남아/ 빈 가슴으로 서성이는" 화자는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떠나버리면 사랑과 슬픔까지 함께 지워질까 두려워 같은 자리를 도는 사람, 상실을 잊기보다 기억 속에서 살아 있으려는 사람으로 드러난다.
「辛 씨의 봄날 2」에서도 화자의 시선은 끝까지 떠난 이를 따라간다. "옥색 버선발로 건너가는/ 바다 저편에/ 해가 저물면/ 울고 싶어라"에서 "옥색 버선발"이라는 감각적 시어는, 한 사람의 전체가 아니라 발끝과 옷자락 같은 작은 조각으로밖에 붙잡지 못하는 상실의 기억 방식을 보여준다. 버선발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이쪽에서 저편으로 '건너가는' 몸의 움직임을 드러내는 표지이고, 그 발이 닿는 "바다 저편"은 이승과 저승, 나와 그대를 가르는 깊은 경계로 느껴진다. 해가 저물어 빛이 스러지는 시간, 그 경계는 더 깊고 멀어지고, 그럴수록 이미 떠난 이의 자취는 오히려 또렷해진다. "멀리서 바라만 보는/ 가버린 사람"이라는 구절은 화자가 상실을 견디는 방식을 담담히 보여준다. 그는 상실을 서둘러 봉합하거나 다른 삶으로 급히 피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멀리서 바라만" 본다. 이 바라봄은 기적 같은 귀환을 기대하는 희망이라기보다 되돌릴 수 없는 아픔을 조용히 되풀이해 확인하는 의식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화자는 "옥색 버선발"이 향해 간 저편에서 눈을 거두지 않는다. 더 아플 것을 알면서도 그 아픔을 끝까지 감당하겠다는 이 머묾 속에서 그는 상실을 지우지 않고 애도 속에 머무는 사람으로서 서 있다.
「辛 씨의 봄날 5」의 "꿈속에서라도/ 한 번만 더/ 보고 싶은 당신의 모습"은, 현실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존재를 이제는 꿈이라는 가장 불확실한 자리에서라도 붙들고 싶어 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한세월 다 가도록 오지를 않고"라는 구절에는 이 부재가 짧은 공백이 아니라 거의 한 생애를 가로지르는 빈자리였다는 체념이 배어 있고, 기다림이 어느새 삶의 형식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조용하게 새겨진다. "하얗게 저무는 내 가슴에/ 비가 내리네"에서, 가슴이 '하얗게 저문다'는 말은 감정의 색과 온기를 서서히 잃어가는 내면의 소진을 가리키고 그 위에 내리는 비는 멈추지 않는 눈물과 슬픔을 겹쳐 놓는다. 짧은 몇 줄 안에서, 오지 않는 사람을 한 세월 기다리며, 그 기다림 속에서 천천히 소멸해가는 한 존재의 애도와 우울이 소리 없이 펼쳐진다.
연작 전체를 놓고 보면, 2부에 놓인 「辛 씨의 봄날」 9편은 '그대'를 둘러싼 애도의 길고 낮은 변주다. "혜화동 로터리"라는 현실의 장소, "시월"이라는 계절의 시간, 옥색 버선발, 낙엽의 빈 그림자, 초록 바다, 가버린 사람, 꿈속의 얼굴 같은 이미지들은 모두, 한 번 끝난 줄 알았던 과거가 자꾸 현재로 스며드는 방식으로 돌아온다. 세계는 제 속도로 흘러 시월은 다시 돌아오고, 해는 매일 저물며, 어디선가 또 다른 봄날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이 화자에게 그 모든 풍경은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배경이라기보다, 상실을 비추어 돌려주는 '거울'에 가깝다. 한때 타자를 통해 열리던 세계의 창이 닫힌 뒤에도, 세계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세계는 이제 부재를 증언하는 광장처럼 느껴진다. 그런 자리에서 시인의 화자는, 오르페우스처럼 상실의 현장을 떠나지 못한 채 되찾을 수 없는 그대를 향해 오래 노래한다.
4.
3부의 시편들은 시제詩題이기도 한 「구름 위의 여자」 19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 연작이 유독 더 가슴을 조여오는 이유는, 그 한 편 한 편이 모두 '딸'을 잃은 자리에서 발화된 노래이기 때문이다. 정지용이 『조선지광』 89호(1930.1, 1쪽)에 발표한 「유리창 1」(정지용, 『정지용 詩』, 권영민 편, 민음사, 2004, 151쪽)과 청마 유치환이 1947년 『생명의 서』에 수록한 「육 년 후」가 자연스레 포개져 떠오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린 딸을 잃은 슬픔을 노래한 정지용의 세계는, "새까만 밤"으로 표상되는 창밖의 무한한 어둠과 그 어둠을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화자의 내면을 하나의 시적 공간 안에서 겹쳐놓는다. 유리창은 차갑게 식은 세계와 뜨거운 가슴을 가르는 투명한 막이자, 더는 닿을 수 없는 아이의 얼굴이 아득히 어른거리는 스크린이다. "向아 오늘에사 비로소 너의 죽음을 읊을 수 있노라"(유치환, 『청마 유치환 전집』, 남송우 엮음, 국학자료원, 2008, 141쪽)라고 고백하는 유치환의 문장은, 죽음을 입에 올리는 일 자체가 얼마나 버거운지, 참척의 슬픔이 언어를 얼마나 오래 막아 세우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박열아의 시집 3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비가悲歌이며, 시인의 슬픔이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만큼 치솟은 국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흰 꽃잎"과 "찬비" "발소리" 외에도 "어디만큼 가고 있느냐"(「구름 위의 여자 1」), "어디쯤 가고 있느냐"(「구름 위의 여자 19」)라고 묻고, "나도 그만 가고 싶어라"(「구름 위의 여자 1, 3, 4, 11, 14」)라고 되뇌며, "가지 마라/ 가지 마라"(「구름 위의 여자 6, 8, 16, 17」)라고 붙들고, 때로는 "떠나 볼거나"(「구름 위의 여자 9, 12」), "달려가리라"(「구름 위의 여자 10」)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롤랑 바르트가 『애도일기』에서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슬프다, 울고 싶다" 외에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 자신을 기록하던 그 침묵의 자리와 맞닿아 있다. 3부에 이르러 박열아의 시가 유난히 간결해지는 까닭은 바로 이 애도의 언어가 마지막까지 남겨 놓은 몇 마디만이 시로 응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름에 가린 달은
어디로 가는가
서창에 흰 그림자
내 가슴에 지면
알 수 없어라
이지러진 달은
하늘에서 울고
너는
내 가슴에서 우는데
어찌하여
저녁 창 너머
가을 잎새만 지는가
- 「구름 위의 여자 18」 전문
우선 「구름 위의 여자 18」과 정지용의 「유리창」을 겹쳐 읽어보자. 정지용의 「유리창 1」에서 유리琉璃는 "새까만 밤"과 "물 먹은 별"이 비치는 투명한 막이자, 이미 떠난 아이의 흔적이 어른거리는 화면이다. 겨울밤 유리창에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는 화자의 몸짓은, 이승과 저승, 여기와 저기를 가르는 그 얇지만, 절대적인 경계를 밀어내보려는 애도의 시도이면서,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끝내 닿지 못하는 실패의 몸짓이기도 하다. 끝내 "아아, 늬는 산ㅅ새처럼 날러 갔구나!"라는 탄식으로 맺히는 이 시는, 보이지만 닿을 수 없는 아이를 유리창 너머에서 응시하는 아버지의 시간을, 대면과 비대면이 동시에 겹친 비극적 순간으로 형상화했다. 「구름 위의 여자 18」에서 "서창에 흰 그림자/ 내 가슴에 지면/ 알 수 없어라"는, 바로 이 장면을 다른 시대의 언어로 변주한 것이다. 여기서 "서창"은 유리창의 다른 이름이고, "흰 그림자"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아이의 실체가 아니라 그 잔영이다. 유리창에 어른거리던 "차고 슬픈 것"이 박열아에게서는 서창의 "흰 그림자"로 옮겨 온 셈이며, 그 그림자가 "내 가슴에 지면"이라는 표현은, 창 바깥에 머물던 슬픔이 이제는 화자의 몸 안, 심장 안으로 스며드는 순간을 붙잡는다. 정지용에게 유리창이 주로 '밖을 향한 응시의 면'이었다면, 박열아에게 창은 '밖'과 '안'을 동시에 받는 평면이다. 그래서 창에 비친 그림자는 곧바로 가슴에 낙인처럼 박히고 남은 말은 "알 수 없어라"라는 한 줄뿐이다.
두 시는 달과 밤,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 떠난 딸을 "하늘 쪽 어딘가에 있는 존재"로 구조화한다는 점에서도 서로를 마주 본다. 정지용에게 "물먹은 별"과 "새까만 밤"은 아이가 흩어진 저편의 우주를, 박열아 시인에게 "구름에 가린 달" "이지러진 달"은 온전히 차지 못하는 상실된 온전함을 상징한다. "이지러진 달은/ 하늘에서 울고/ 너는/ 내 가슴에서 우는데"에서 달과 '너'는 서로 다른 두 자리에서 울음의 기점을 이루고, 아이는 하늘과 가슴이라는 두 차원을 동시에 점유하는 존재가 된다. 정지용의 화자가 유리창에 붙어 선 아버지의 얼굴이라면, 시인의 화자는 "구름 위의 여자"를 향해 말을 건네는 남겨진 사람의 얼굴이다. 그 남겨진 이는 딸을 "하늘과 가슴 사이의 존재"로 떠나보내고도 창 앞을 떠나지 못한 채, 끝내 애도의 자리에서 밤과 창을 응시하는 자로 남는다. 그래서 두 시와 두 시집이 우리들에게 비슷한 감성으로 다가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유리창이라는 장치를 통해 "떠난 딸과 남겨진 자가 서로를 바라보지만 닿지 못하는 밤"이라는 동일한 장면을 나란히 응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멀리 있는 산이
더 가깝게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저 푸른 가슴에
내 가슴 묻어놓고
딸아
너는 지금 어디만큼 가고 있느냐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서역 만리 길
밤 무지개 등에 지고
우는 네 모습
하얀 꽃잎 되어 내 가슴에 지면
지는 해 저편으로 나도 그만 가고 싶어라
빈손 마주 잡고
먼 하늘 너머로 가고 싶어라
- 「구름 위의 여자 3」 전문
여기서는 시인의 화자와 '딸'의 자리가 오히려 뒤집혀 있는 듯한 인상이 강하게 드러난다. 생명이 멈춘 존재는 딸이 아니라, 오히려 박열아 시인의 화자 쪽에 가깝다. "멀리 있는 산이/더 가깝게 보이는 것은" "저 푸른 가슴에/ 내 가슴"을 묻어 두었기 때문이라는 고백은, 딸이 묻힌 산이 곧 자신의 가슴을 묻어 둔 자리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멀리 있는 산은 지리적 거리와 무관하게 가장 가까운 장소, 곧 '내 생의 중심이 이미 옮겨져 버린 곳'으로 경험된다.
반대로 움직이는 존재는 딸이다. 화자는 "어디만큼 가고 있느냐"라고 묻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서역 만리길"을 떠나는 딸의 길에 동행하고자 한다. "밤 무지개 등에 지고/ 우는 네 모습"은 이승에서의 고통을 끝내고자 떠난 아이의 뒷모습이면서, 동시에 "하얀 꽃잎 되어" '나'의 "가슴에 지"고 "빈손 마주 잡고" 함께 걷고자 하는 소망의 형상이다. 여기서 느껴지는 정서는, 애도의 미완未完과 멜랑콜리의 기운 속에서도 자아가 자신을 향해 붕괴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실의 고통이 시어를 극도로 간결하게 다듬어내지만, 그 간결함은 자기 파괴의 언어가 아니라, 먼 길 떠나는 딸의 곁을 지키고자 하는 절제된 동행의 언어로 남는다. 다시 말해, 화자가 품은 의지는 삶을 포기하고 딸을 따라가겠다는 충동이 아니라, "딸과 함께 살아 보겠다"는 또 다른 형태의 삶의 결단으로 읽힌다.
박열아 시인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획득한 '야누스'의 얼굴을 지닌 존재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의 자리에서 그의 시가 "죽음을 사는 방식으로 존재"(유성호, 「우리 시대의 '시적인 것'과 윤리성」, 『오늘의 문예비평』, 2006.3, 21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폐허의 땅에서 '나'의 언어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그 물음에 스스로 답하며 완성된 『구름 위의 여자』는 자의식의 회복을 통해 상실을 상쇄하고, 시적 윤리성에 대한 자각을 한층 심화시킨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두 존재의 좌표를 확인하고 반성하면서 그 자체로 자신의 존재 방식을 근원적으로 성찰한다. 박열아 시인은 '왜 시를 쓰는가'라는 본질적 물음 앞에서 이미 스스로의 대답을 품고 있다. "언젠가 해가 저물어 딸이 사는 그 마을로 가는 그날까지 이 작업은 계속될 것이다."(「후기」)라는 고백은, 아무 의미도 성립하지 않는 세계 속에서 시야말로 유일하게 삶의 자리를 열어주는 행위임을 웅변한다. "손을 마주 잡"기 위해 미세한 흔적 하나를 다시 불러내는 동안, 시인의 삶과 시는 상실의 자리에서 다시 태어난다. 『구름 위의 여자』는 파괴와 갱신의 몸짓으로 치장된 관습적 '새로움' 대신, 상실을 기꺼이 감수하고 탄식하는 인간의 얼굴을 통해 우리 시대 서정시의 또 다른 현대성을 증언한다. 그것은 상실의 부재가 아니라, 상실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의 윤리를 향한 고요한 응시이며, 그 상실의 강을 건너기 위해 언어를 이끌고 나아가는 시인의 용지勇志와 그로부터 피어나는 미학의 형상화이기도 하다.
목차
목차
1부 사월의 꽃잎 아래서
四月·12
다시 四月에·14
낙화·16
봄비 1·17
봄비 2·18
봄비 3·19
봄 1·20
봄 2·21
늦봄·22
봄날의 꿈 1·23
봄날의 꿈 2·24
수요일 오후·25
아카시아·26
입맞춤·27
2부 辛 씨의 봄날
辛 씨의 봄날 1·30
辛 씨의 봄날 2·31
辛 씨의 봄날 3·33
辛 씨의 봄날 4·34
辛 씨의 봄날 5·35
辛 씨의 봄날 6·36
辛 씨의 봄날 7·37
辛 씨의 봄날 8·38
辛 씨의 봄날 9·39
3부 구름 위의 여자
구름 위의 여자 1·42
구름 위의 여자 2·43
구름 위의 여자 3·44
구름 위의 여자 4·45
구름 위의 여자 5·46
구름 위의 여자 6·47
구름 위의 여자 7·48
구름 위의 여자 8·49
구름 위의 여자 9·50
구름 위의 여자 10·51
구름 위의 여자 11·52
구름 위의 여자 12·53
구름 위의 여자 13·54
구름 위의 여자 14·55
구름 위의 여자 15·56
구름 위의 여자 16·57
구름 위의 여자 17·58
구름 위의 여자 18·59
구름 위의 여자 19·60
4부 자하문 밖, 서녘 하늘
자하문 밖 1·62
자하문 밖 2·64
자하문 밖 3·65
자하문 밖 4·66
서녘 하늘 1·67
서녘 하늘 2·68
서녘 하늘 3·69
서녘 하늘 4·70
辛 씨의 가을·71
가을밤·72
노을 1·73
노을 2·74
늦가을 1·75
늦가을 2·76
5부 그리운 마을로 가는 길
새벽꿈 1·78
새벽꿈 2·79
새벽꿈 3·80
새벽꿈 4·81
꿈속의 하늘·82
아미산·83
하늘길 1·84
하늘길 2·85
겨울밤 1·86
겨울밤 2·87
첫눈·88
해거름·89
에세이·91
후기·96
해설 | 염선옥_언어를 이끌고 상실의 강을 건너가는 존재의 용지勇志와 미학·98
四月·12
다시 四月에·14
낙화·16
봄비 1·17
봄비 2·18
봄비 3·19
봄 1·20
봄 2·21
늦봄·22
봄날의 꿈 1·23
봄날의 꿈 2·24
수요일 오후·25
아카시아·26
입맞춤·27
2부 辛 씨의 봄날
辛 씨의 봄날 1·30
辛 씨의 봄날 2·31
辛 씨의 봄날 3·33
辛 씨의 봄날 4·34
辛 씨의 봄날 5·35
辛 씨의 봄날 6·36
辛 씨의 봄날 7·37
辛 씨의 봄날 8·38
辛 씨의 봄날 9·39
3부 구름 위의 여자
구름 위의 여자 1·42
구름 위의 여자 2·43
구름 위의 여자 3·44
구름 위의 여자 4·45
구름 위의 여자 5·46
구름 위의 여자 6·47
구름 위의 여자 7·48
구름 위의 여자 8·49
구름 위의 여자 9·50
구름 위의 여자 10·51
구름 위의 여자 11·52
구름 위의 여자 12·53
구름 위의 여자 13·54
구름 위의 여자 14·55
구름 위의 여자 15·56
구름 위의 여자 16·57
구름 위의 여자 17·58
구름 위의 여자 18·59
구름 위의 여자 19·60
4부 자하문 밖, 서녘 하늘
자하문 밖 1·62
자하문 밖 2·64
자하문 밖 3·65
자하문 밖 4·66
서녘 하늘 1·67
서녘 하늘 2·68
서녘 하늘 3·69
서녘 하늘 4·70
辛 씨의 가을·71
가을밤·72
노을 1·73
노을 2·74
늦가을 1·75
늦가을 2·76
5부 그리운 마을로 가는 길
새벽꿈 1·78
새벽꿈 2·79
새벽꿈 3·80
새벽꿈 4·81
꿈속의 하늘·82
아미산·83
하늘길 1·84
하늘길 2·85
겨울밤 1·86
겨울밤 2·87
첫눈·88
해거름·89
에세이·91
후기·96
해설 | 염선옥_언어를 이끌고 상실의 강을 건너가는 존재의 용지勇志와 미학·98
저자
저자
박열아 (본명: 박영열)
1938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1959년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여,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전표지역」이 당선되었다.
2025년 6월 4일 별세했다.
1938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1959년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여,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전표지역」이 당선되었다.
2025년 6월 4일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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