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강가에서 예언서를 태우다(울력의 시 1)
박현수 시집 『겨울 강가에서 예언서를 태우다』. 단호하면서도 질박한 저자의 시적 언어가 돋보이는 시집이다. 크게 4부로 나뉘어 있으며 책 속에 담긴 작품들을 통해 독자들은 어눌한 생활 정서와 차가운 깨우침의 결기를 동시에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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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199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세한도]가 당선되어 등단한 박현수 시인이 이번에 세 번째 시집 『겨울 강가에서 예언서를 태우다』를 간행하였다. 문학평론가 홍용희는 박현수의 이번 시집에 대해 "박현수의 시적 어조는 질박하면서도 단호하다. 질박한 것은 주로 체험적 삶의 감각과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이고 단호한 것은 깨달음을 포착하는 역동성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그의 시 세계에서는 어눌한 생활 정서와 차가운 깨우침의 결기를 동시에 만날 수 있다. … 박현수는 자신만의 질박하고 어눌한 삶의 언어를 통해 '우리 바깥에 있는 미래를 불태'운 이후의 현재적 존재성의 실재를 직시하고 향유해 내고 있"다고 했다.
이제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든 시인의 시선은 현실 삶의 다양한 부분을 응시한다. 우리 현실 속의 삶의 모습은 항상 유쾌한 것만은 아니어서 오랜만에 만난 형제들은 "말 한 마디 때문에/말도 안 되는 싸움을 시작"해 감정이 상하기도 하고, "중학교 동창"의 부고 소식을 전하는 문자가 잘못 전송되어 몇 번 정정되지만, 죽음만은 끝내 정정되지 않기도 한다. 그리고 선짓국을 먹으면서 구제역으로 살처분된 소들의 눈망울을 떠올리며 "무력한 죄스러움"을 느끼고, 또 "한때 어느 숲의 부드러운 가지였을지도 모를,/아침햇살 받으며 이슬에 촉촉이 젖던/푸른 잎사귀였을지도 모를,/저 가냘픈 종이"에서 "숲의 원혼"을 보기도 한다. 그리고 "등에 가위표를 하고 흔들리는 돼지들"의 운명이 된 그 단순한 기호를 보며 인간의 "등에 쓰인 기호"를 궁금해 한다. 또 삶에는 기쁨도 있어 늦둥이를 "인류가 지나온/그 아득한 길을 걸어" 온 "귀한 손님"으로 반기면서 "환생이라는 환한 말"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만물의 희로애락이 모두 공존하는 치열한 삶터인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삶이 따뜻했느냐/그대 물었던가/내 뜨거운 발바닥을 만져 보라"([다리미, 저 뜨거운 발바닥] 일부)고 하면서 이 현실에 발 딛고 사는 것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예언서를 끼고 아이들과 나는 강가로 간다/강물은 멈추어 서서 겨울을 견디기로 하였나 보다/지금 물결은 기억에 불과하다/강가에 무성하던 풀도 마른 생애를 남기고 사라졌다/예언서를 태우기 좋은 계절이다/비결(秘訣)도 도참(圖讖)도 마른 풀처럼 타들어간다/아빠, 왜 이 책들을 태우는 거야?/모처럼의 불장난에 신이 난 아이가 물었다/우리 바깥에 있는 미래를 불태우는 거야/이것 봐, 이제부터는 지금이 우리의 미래야/대답엔 관심도 없이 아이는 불 꼬챙이로 책을 뒤적인다/잠깐 열린 책 사이로 불길이 달려든다/한때 불처럼 타오르던 구절들이 사라진다/오리라던 미래는 연기되었고 이제 더 이상 연기될 시간은 없다/저 구절에 매달린 사람들의 표정이 사라진다/예언서를 쓴 사람은 예언자가 아니라/마른 풀처럼 부서지기 쉬운 사람들의 마음이었다/부서지기 쉬운 마음이 저 책을 내 서가로 끌어들였다/그 마음이 불타지 않는다면/세상의 모든 예언서는 한 권도 불타지 않을 것이다/한 줄이 불타면/그대로 마음속에 한 줄이 다시 쓰이리라/불은 맹렬히 타오르고/내 마음은 흩날리는 재처럼 소란스럽다/이제 타버린 그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더 태울 예언서도 없는데
생각은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난다/아이들은 사제처럼 불가에 앉아/불 꼬챙이를 흔들며 남은 한 페이지까지 태우고 있다/마지막 예언이 사그라지자 삶이 모처럼 시시해졌다/겨울 강가를 떠나다 우리는 동시에 돌아다 보았다//예언이 성취한 것은 한 줌 재일 뿐이다
― [겨울 강가에서 예언서를 태우다] 전문
미래란 현재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없는 미래를 꿈꾸는 것은 현실이 그만큼 병든 것이거나 가혹한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고, 그렇게 막연히 꿈꾸는 미래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연기될 시간"뿐이다. 시인은 그런 미래를 담은 예언서를 태우면서 "지금이 우리의 미래"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시인이 바라보는 현실은 "선진 조국이든 일류 국가이든/미래의 이불을/너무 많이 끌어 당겨/저기, 다음 시대의 발목이 껑충 드러"([망명정부 공무원] 일부)나 있는 것이다. 권력자들이 선진 조국이나 일류 국가를 표 나게 내걸며 했던 것들은 국민들에게 현재의 고통을 참고 견디라는 것이며,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들을 억압하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제 미래로부터 망명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겨울 강가에서 예언서를 태우면서 미래로부터 망명하는 시인이 지금 여기의 삶에서 지향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보이지 않는 것의 진정성과 구도자의 음성
슴베라는 말,/슴베찌르개를 볼 때마다 궁금해지는 말,/사전을 찾으려다 금세 잊어버리는 말,/큰맘 먹고 사전을 뒤지면/칼, 호미, 낫 따위의 자루 속에 들어박히는 뾰족하고/긴 부분이라 나오는 말,/찬란하게 드러난 칼몸이 아니라/자루 속에 숨어/칼끝의 궤적을 제어하는 뭉툭한 말,/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보이는 세계/그 뒤엉킨 힘의 방향을 좌우하는 말,/감싸 쥔 신의 손아귀를 얼핏 느끼게 하는 말,/하지만, 보이지 않은 차원이/그리 대수롭지/않은 세계라는 걸 일러주는 말,/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세계가/화려하고도 정교한/칼몸을 춤추게 한다는 걸 가르치는 말,/거칠고 투박한/여기가 오히려 숨은 힘이라고/눈에 빤한 이 세계와/숨은 차원을 일순간에 바꿔치기 하는 말,/주눅 들지 말고/이제 지상에서 살아가라고/슴베찌르개처럼 가슴에 거칠게 박히는 말.
― [슴베라는 말을 배우다] 전문
슴베라는 것은 칼, 호미, 낫 등의 자루 속에 박혀 있는 뾰족하고 긴 부분이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보이는 세계/그 뒤엉킨 힘의 방향을 좌우하는" 것이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이것이 "숨은 힘"인 것이다. 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힘들이 바로 이 슴베 같은 존재들이고, 그들은 "엄청난 고생 되어도/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일부)과 같은 존재이다. 슴베 같은 존재는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이나 화려함 같은 것과 거리가 멀다. 그런 존재들에게 시인은 "주눅 들지 말고/이제 지상에서 살아가라고" 위무한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슴베 같은 존재를 드러내고 노래하는 것이 그의 지향 중의 하나일 것이다.
유리컵엔/투명한 공기가 가득 차 있다/한 모금 마실 때마다/어느새/한 모금 채워진다//빈 유리컵을 오래 명상한 사람만이//유리컵처럼/맑은 갈릴리 호숫가로 가서/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로/바닥이 보이지 않는 삶을 가득 채운/가난한 마음이 된다
― [유리컵] 전문
갓 구운 빵 냄새 나는/구름 몇 덩이,/잠시 머물다 떠나는 대평원처럼/정갈하게 비어 있는
접시에는/허공이 배부르게 쌓여 있다//향기 있거나 없는 것들/마른 것이나/젖은 것들, 뜨겁거나 찬 것들/금방 머물다 스러지는 혓바닥처럼/흔적의 흔적,/그 흔적의 흔적도 스쳐갈 뿐//물소 떼의/발굽소리도 지나가고/건기의 바람도 떠나간 대평원처럼/마침내 접시는/허공을 받치는 그릇일 뿐이니/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성자가 죽으면 접시로 다시 태어나리라
― [접시에 관한 명상] 전문
빈 유리컵에는 투명한 공기가 가득 차 있다. 그래서 한 모금 마셔도 어느새 한 모금 채워지는 것이다. 비어 있는 것이 가득 차 있는 것이고, 가득 차 있어서 비울 수 있고, 비워서 또 가득 차는 것이다. 또 이것을 오래 명상한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바닥이 보이지 않는 삶을 가득 채울 수 있다. 이러한 유리컵의 정신은 접시의 정신과도 통하는 것이다. 접시는 정갈하게 비어 있기 때문에 허공이 배부르게 쌓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있는 것도 비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성자 같은 존재만이 그러한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접시나 유리컵이 상징하는 높은 정신성의 존재가 바로 그의 지향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렇듯, 이번 시집에서 박현수 시인은 지금 여기의 삶의 다양한 모습에 시선을 던지면서, 이 세상의 근본이 되는 보이지 않는 것과 더 높은 정신성을 추구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시에 대한 시 쓰기
그리고 이 시집에는 시에 대한 시, 또는 시 쓰기에 대한 시가 여러 편 눈에 띈다. 이것은 그가 대학에서 시 창작과 시론을 가르치는 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백석 없이 갈매나무 보기], [안개는,], [밤나무 열매 문답], [불과 꽃의 시간], [행간의 그늘] 등이 그런 작품으로 볼 수 있는데, 시 창작의 과정, 시적인 것의 의미, 좋은 시란 무엇인가 등 일종의 시로 쓰는 시 창작론 또는 시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들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생각하는 진정한 시인이란 어떤 것일까. '올곧은 알몸의 시 정신'을 꿈꾸는 박현수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숲 속의 가객 한 분이 돌아가셨다 오장육부에 감겨 있던 노래 다 풀어내자 육신이 훨씬 가벼워졌다 노래 빠져 나간 가객의 몸이란 이렇듯 텅 빈 관(棺)일세 염을 하던 바람이 한 마디 하자 풀잎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소리 하나로 뼛속까지 탕진한 삶이니 제 누운 곳이 곧 양명(亮明)한 자리다 십년 독공으로 얻은 수리성 거두어 버리자 숲도 바스락거리는 꺼풀에 지나지 않았다 호상이라고 단풍잎 붉게 속삭인다 기나긴 행렬을 이끌고 운구는 개미가 맡았다
― [매미] 전문
목차
목차
1부
매미
의자
가방에 손을 넣을 때
하지
동네 마담과 시 읽기
탄생
망명정부 공무원
겨울산
적멸보궁
명절날, 형제를 잃다
선짓국
다리미, 저 뜨거운 발바닥
블루길을 위한 변명
숲의 적의가 가득하다
옷걸이론
화살표의 무게
한국현대사(초)
2부
겨울 강가에서 예언서를 태우다
유리컵
사랑이 너무 일찍 무릎 꿇었다
호두나무 한 그루를 베더라도
1만 5천 마리의 하루살이
천하도를 읽다 1
천하도를 읽다 2
백석 없이 갈매나무 보기
슴베라는 말을 배우다
망치
얼핏 본다는 것
등에 가위표를 한 돼지
보쉬 드릴의 신에게
콘센트를 위한 노래
이 책을 다시 숲으로 되돌린다면
풍수에 대한 각주 다섯
3부
수건의 혓바닥
알코올램프의 근황
참새에 대하여
햇빛사원
'응'이란 말
안개는,
어느 저물녘
루트, 푸르른 기호
밤나무 열매 문답
부고
주전자
불과 꽃의 시간
인공누액을 넣는 그녀
시는 길을 닮는다
만항재
무섬마을에 가다
4부
깨달음에 대하여
스무살
세상에서 가장 먼 길
단풍
곡옥처럼 잠들다
환생이라는 환한 말을 들었다
덤
두루마리 휴지의 가계도
우리들의 등
봄날
접시에 대한 명상
숲 속의 곰이 방으로 들어오기까지
어머니의 악기
병뚜껑
행간의 그늘
젊은 시인의 행방
해설: 질박한 결기 혹은 현존재성의 언어_ 홍용희
저자
저자
시집으로 『우울한 시대의 사랑에게』, 『위험한 독서』 등이 있으며, 평론집으로 『황금책갈피』, 『서정성과 정치적 상상력』이 있다. 주요 문학 관련 학술서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사학 ― 이상문학연구』, 『한국 모더니즘 시학』, 『시론』, 『전통시학의 새로운 탄생』, 『시 창작을 위한 레시피』 등이 있다.
2007년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대상 시집 『위험한 독서』)을 수상하였으며, 2013년에는 제11회 유심작품상(학술부문)을 수상하였다. 200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선정한 우수문학도서에 시집 『위험한 독서』가, 2007년도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에 시비평집 『황금책갈피』가 선정되었으며, 2008년도에는 『한국 모더니즘 시학』이, 2014년도에는 『전통시학의 새로운 탄생』이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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