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의론의 남용: 도덕 추론의 역사(비오스총서 3)
생명과 윤리에 관한 성찰을 담은 「비오스총서」 제3권 『결의론의 남용: 도덕 추론의 역사』. ‘결의론’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고대 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 된 방법론으로, 사례를 중심으로 하여 윤리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이다. 이 책은 결의론의 역사를 오늘의 시각에서 꼼꼼하게 되살려 그 등장과 발전, 쇠퇴 및 부활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아울러 윤리문제의 해결에 있어 왜 결의론이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지를 논리적이고 메타윤리학적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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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한때 이미 낡은 방법론으로 치부되었던 "결의론"에 대한 관심이 새삼스럽게 부활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 책에서 잘 보여주듯, 결의론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고대 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 된 방법론으로 중세 가톨릭교회의 고해성사와 속죄 관행을 통해 발전하였고 16-17세기에 그 최전성기를 누리다가 시대의 변화와 함께 완전히 몰락해버린,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래로 특히 의료윤리 분야에서의 요청과 함께 되살아난, 사례를 중심으로 하여 윤리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그러한 결의론의 역사를 오늘의 시각에서 꼼꼼하게 되살려 그 등장과 발전, 쇠퇴 및 부활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 책은 윤리문제의 해결에 있어 왜 결의론이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지를 논리적이고 메타윤리학적으로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두 저자들 중 앨버트 존슨은 예수회원이자 윤리신학자로 예수회가 전통적으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발전시켰던 결의론의 역사와 맥락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또 다른 저자 스티븐 툴민은 저명한 철학자이자 메타윤리학자로서 결의론의 가치를 철학적, 분석적으로 해명해 줄 수 있는 적임자였다. 이 두 사람이 「생의학과 행동과학 연구의 인간 피험자 보호를 위한 국가위원회」에서 함께 일하게 된 것이 이 책을 공동으로 집필하게 된 동기였다.
▲ 저자 서문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이 이 책의 주제를 잘 예시한다. 1975~78년까지 저자들은 1974년 미국 상원이 설치한 '생의학과 행동과학 연구의 인간피험자 보호를 위한 국가위원회 (National Commission for the Protection of Human Subjects of Biomedical and Behavioral Research')에서 함께 일했다. 그 성과들 중 하나가 의학적 혹은 행동과학적 연구 대상에 인간을 포함시키는 수용 가능한 방법과 그렇지 못한 방법을 구별하기 위한 결의론(혹은 도덕분류학 moral taxonomy)이었다. 이 위원회의 임무가 마무리될 무렵 기록을 비교해보다가 우리는, 이 위원회의 방법과 결론에 있어 현대 윤리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어떤 측면들과 각자 마주치게 되었음을 알았다. 우리가 보기에는 고해와 사목신학의 오래된 "사례방법"을 재고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 방법은 『니코마코스 윤리학(Nicomachean Ethics)』에서 도덕 실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에 의존하며,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도덕 실천에서도 유사한 것이 존재한다.
이 논의를 심화하기 위한 역사 연구는 미국 국립 인문학 연구기금의 연구비 #RO79/14660에서 지원을 받았다. 저자 중 한 사람(존슨)은 대부분의 연구를 조지타운 대학교의 우드스탁 도서관과 옥스퍼드 대학교의 보들레이안 도서관에서 수행하였다. 우드스탁 도서관에서는 헨리 베르텔 신부와 토마스 마샬 수사가 큰 도움을 주었는데, 그들은 우리의 의도가 자신들의 예수회 선배를 찬양, 또는 비방하려는 것인지를 전혀 몰랐다. 옥스퍼드에서의 연구는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받은 1년간의 안식년에 의해서 가능했는데, 우연히 크라이스트 처치의 한시적 회원으로 선출되어서 더욱 즐겁고 효율적이었다.
개별적인 안내를 해준 훌륭한 파스칼 석좌교수 앨번 크라이트샤이머가 그 학교의 일원이었고, 또 성공회 전통에서 두 결의론의 천재들 - 링컨의 주교이자 사례신학 흠정 강좌 교수였던 로버트 샌더슨(Robert Sanderson, 1587~1663)과 옥스퍼드의 주교이자 도덕신학 흠정 강좌 담당 교수인 케네스 커크(Kenneth Kirk, 1886~1954) - 이 "그 집"에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해는 대단히 결실이 좋았다. 이 훌륭한 결의론자들이 이 일을 도와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저자들은 그들의 호의와 지적 자극에 대하여 크라이스트 처치의 학장, 대성당 참사회원, 그리고 학생들에게 감사드린다. 옥스퍼드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앨릭잰더 머레이와 밸리올의 앤소니 케니, 그리고 코퍼스 크리스티 대학의 헤어 R. M. Hare에게 역사와 도덕철학 분야에서의 유용한 조언에 대해 사의를 표한다. 예수회의 존 마호니 신부는 이 원고를 읽었는데 그의 『도덕신학의 발달』(옥스퍼드, 1987)이 그전에 발행되었었다면 우리 책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다른 우연한 사건이 이 책의 집필 과정에서 일어났다. 역사를 다룬 장들의 대부분은 교황 바오로 4세가 예수회의 설립을 승인한 바로 그해인 1540년에 니콜로 스폰드라타 추기경이 지은 빌라 세르벨로니에서 집필되었다. 스폰드라타는 그 교황에 의해 추기경직에 올랐는데, 그 집에서 이루어진 이 책의 집필을 그들이 축복하였다고 생각하면 즐거웠다. 어쨌든 존슨이 그 집에 한 달간 머물도록 허락해준, 이탈리아 벨라지오에 위치한 벨라 세르벨로니의 소유권자 록펠러 재단에게도 감사한다. 옥스퍼드와 벨라지오에서 메리 엘리자베스 존슨은 대치가 불가능한 비서 역할을 해주었다. 끝으로 많은 예수회 스승들의 영향도 인정해야만 한다. 그들은 건전하고 정직한 결의론의 지적·도덕적 장점들을 보여주었다.
다른 저자(툴민)는 이 공동 연구에서 자신의 몫을 완성할 수 있도록 일 년 연구년을 허락해준 구겐하임 재단과 시카고 대학교, 그리고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 있는 예술과 인문 역사를 위한 게티 센터에서 1985~86년을 보낼 수 있도록 해준 게티 재단에 감사한다. 메리 맥베이와 스티브 넬슨은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한 연구에 귀중한 공헌을 하였다. 게티 센터의 커트 포스터와 허버트 하이맨 및 그들의 동료들, UCLA 연구 도서관, 무엇보다도 매킨토시 컴퓨터에 대한 묘기로 최종 원고의 완성에 큰 역할을 한 빅키 조 바너 등에게도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마지막으로 이 프로젝트에서 결정적 순간에 이 책을 기획하는 데 도움과 격려로 특별한 힘을 실어준, 이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출판부에 근무했고, 이제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있는 잭 마일즈에게 우리 모두 감사의 인사를 추가하고 싶다.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A. R. 존슨
에반스톤, 일리노이 S. E. 툴민
▲ 한국어판에 대한 서문
『결의론의 남용』의 한국어판 출간을 보게 되어 기쁘고 영광스럽습니다. 권복규 교수가 처음에 이 책을 번역하겠다고 하였을 때 실은 약간 회의적이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이 책의 내용은 위대한 아시아의 윤리전통과는 매우 다르고, 또 서구 전통의 매우 작은 부분만을 다루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 책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흥미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권교수는 자신의 영문 세례명이 "이보"임을 친절하게 지적해 주었습니다. 그 이름은 위대한 중세 학자인 사르트르의 이보에서 딴 것인데 그는 이 『결의론의 남용』에서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도 권교수는 우리의 책이 유용할지도 모르는 의미 있는 그리스도교-한국의 역사적 맥락을 알려주었습니다.
스티븐 툴민과 내가 1980년대에 쓴 이 책은 결의론의 성장과 발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도덕 문제를 해결하는 일종의 추론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예수회와 관련이 있는데 그들은 도덕신학에 대한 많은 저작들에서 이를 활용하였습니다. 놀랍게도 나는 예전 한국의 외교사절 이수광이 북경에서 마테오 리치의 책을 접했을 때 그리스도교가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 황실에서 환대를 받았던 위대한 예수회 학자입니다. 리치와 그의 동료 선교사들은 동아시아 문화 특유의 언어와 개념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설명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바 있습니다. 한국의 학자들은 1603년에 출간된 리치의 걸작인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잘 알고 있었고 또 그에 대해 많은 토론을 하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인 이승훈도 북경의 예수회 선교사들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의 많은 저작들을 한국에 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결의론의 남용』에서 다룬 결의론의 이야기는 이 예수회-한국이라는 원래의 연계를 통해 한국의 학자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이는 그렇게 직접적이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도덕 문제들보다는 신학 문제들에 더욱 많은 학문적 관심을 쏟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회의 사유가 전개되는 한, 도덕추론의 방법으로서 결의론도 따라가는 법입니다.
17세기의 "제사논쟁"은 아시아에 대한 이 초기의 예수회의 영향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 당국은 아시아 문화에서 매우 중요했던 조상 제사에 대한 예수회의 관용을 단죄하였습니다. 로마 가톨릭 선교집단들 모두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문화적 적응이라는 예수회의 이론에 공감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19세기의 가혹한 박해 기간 동안 한국에서 용감하게 선교하였던 파리외방선교회는 결의론적 도덕신학에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향 아래 가톨릭 성직자 교육이 재개되었을 때 결의론은 교육과정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역사로 볼 때 권교수의 『결의론의 남용』 번역은 한국에 들어온 초기의, 그러나 이제는 유실된 로마 가톨릭 사상의 일부분으로 돌아가는 이정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이 아주 적절한 때입니다. 사실 스티븐 툴민과 나는 우리의 책이 결의론 방법의 일종의 재생, 혹은 부활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우리는, 그리고 분명히 권 교수도 이 방법이 어떤 문화적 환경에서든 도덕 추론을 강화하고 명료하게 해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앨버트 R. 존슨
워싱턴 대학교, 의학과 명예교수
▲ 역자 서문
- 개정판 서문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의료법연구소에서 2011년 발행했던 『결의론의 남용』을 로도스출판사와 함께 하는 비오스총서에서 새로 수정하여 간행한다. 그동안 지적되었던 몇몇 오류들을 교정하고, 뜻을 분명히 하였으며 보다 읽기 좋은 판형을 채택했다. 초판에서 따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결의론의 남용』은 동시에 『결의론에 대한 학대』로도 읽힐 수 있다. 이 제목은 학대와 남용을 동시에 의미하는 중의적 표현이다. 결의론이 남용됨으로써 결국 학대를 당하게 되었다는 저자의 주장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제목이다.
또한 본문의 볼드체는 원문의 이탤릭체를 표기한 것이다. 강조를 위한 이탤릭체는 볼드체로만 표기하였으며, 그리스어 등 고전어의 표기를 위한 이탤릭체는 볼드체 옆에 해당 고전어를 병기하였다. 그러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된 곳에서는 원문을 병기하기도 했다. 본문의 이중따옴표는 필요한 경우 원문을 병기하여 그대로 표기했다.
그간 여러 독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오류를 많이 수정했지만, 역시 불만족스러운 부분들이 많이 남아 있다. 만약 새로운 판본을 발간할 수 있다면 - 역자들로서는 그러기를 바라지만 - 독자 제현의 현명한 충고와 질책을 달게 받아들일 것을 약속드린다.
2014년 1월
권복규 · 박인숙
▲ 역자 서문
- 초판 서문
우리나라에서 생명의료윤리(Biomedical Ethics)는 1980년대 초반 일부 의과대학에서 관심을 가지고 교육을 한 것이 효시이지만, 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논의는 199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부 선구적인 의료계 지도자들에게 국한되었던 이에 대한 논의는 2005년 줄기세포 논문조작사건을 거치며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고, 지금은 이 분야가 의료와 의생명과학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게 되었다. 한때 "생명과학의 발목이나 잡는 광신"으로 매도되었던 생명의료윤리가 본래의 정당한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현장에서 겪는 수많은 윤리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문제를 깊이 있게 천착하는 전문가들의 수와 역량이 크게 부족한 것이 그 하나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뷔첨과 칠드리스의 유명한 『Principles of Bioethics』에서 제시한 생명의료윤리의 네 가지 원칙, 즉 자율성 존중의 원칙, 해악 금지의 원칙,선행의 원칙,정의의 원칙을 해당 사례에 균형 있게 적용하여 결론을 이끌어내는 도덕추론 방식과, 어떤 근본 원리 및 도그마로부터 해당 사례에 대한 답을 구하는 추론 방식이 - 특히 종교적 생명윤리에서 -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의료 현장의 실제 사례를 접하면서 늘 느끼는 바이지만, 현실의 사례들은 너무나 복잡하고, 근본 쟁점들은 서로 충돌하며, 그것을 윤리적 문제로 만드는 상황들은 매우 다양하다. 이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해 달라는 어려운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 생명의료윤리 전문가, 특히 의료 현장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 실무 전문가들에게는 꼭 필요하며, 또한 그것이 이들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한때 이미 낡은 방법론으로 치부되었던 "결의론"에 대한 관심이 새삼스럽게 부활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 책에서 잘 보여주듯, 결의론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고대 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 된 방법론으로 중세 가톨릭교회의 고해성사와 속죄 관행을 통해 발전하였고 16~17세기에 그 최전성기를 누리다가 시대의 변화와 함께 완전히 몰락해버린,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래로 윤리에 대한 새로운 요청, 특히 의료 분야에서의 요청과 함께 되살아난, 사례를 중심으로 하여 윤리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그러한 결의론의 역사를 오늘의 시각에서 꼼꼼하게 되살려 그 등장과 발전과 쇠퇴의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 책은 윤리 문제의 해결에 있어 왜 결의론이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지를 논리적이고 메타윤리학적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두 저자들 중 앨버트 존슨은 예수회원이자 윤리신학자로서 예수회가 전통적으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발전시켰던 결의론의 역사와 맥락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또 다른 저자 스티븐 툴민은 저명한 철학자이자 메타윤리학자로서 결의론의 가치를 철학적, 분석적으로 해명해 줄 수 있는 적임자였다. 저자의 서문에도 나와 있듯 이 두 사람이 「생의학과 행동과학 연구의 인간 피험자 보호를 위한 국가위원회」에서 함께 일하게 된 것이 이 책을 공동으로 집필하게 된 동기였다. 그전까지는 각자의 영역에서 따로 작업하던 사람들이 이러한 긴급한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해 머리를 맞대게 되면서 나오게 된 생산적인 결과가 바로 결의론의 부활에 대한 요청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 「국가위원회」의 산물이 인간피험자에 대한 연구의 윤리 원칙을 제시했던 유명한 『벨몬트 보고서』이고, 이 보고서는 이후 미국의 인간피험자 보호를 위한 법규들의 근본 원리가 되었으며, 나아가 뷔첨과 칠드리스의 『Principles of Bioethics』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사실은 두 가지를 새삼 상기하게 해 준다. 즉 윤리학은 현실과 동떨어진 공허한 담론이 되는 경우 그 가치를 크게 상실한다는 것, 그리고 현실 윤리 문제의 바람직한 해결을 위해서는 여러 학문 분야의 사람들이 머리를 맞댄 허심탄회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현대 생명의료윤리에서 "결의론"의 가치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생명의료윤리학의 고전이 되었으며, 역자들이 이 책을 번역하게 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윤리 문제에 있어 "선"아니면 "악"이라는 식의 흑백논리가 너무나 유행한다. 그것이 삼강오륜의 "윤리적 사안"으로서 매사를 규정하고 국가를 통치했던 지난 600년간의 유교 문화의 영향인지, 아니면 초등학교 때부터 네 개의 답지 중 하나를 "정답"으로 골라야 했던 후진적 교육의 영향인지, 혹은 윤리 문제와 종교적 신앙의 거리가 매우 가깝고, 종교 문제에서는 너무나 기꺼이 배타적이고 광신적인 믿음으로 빠지는 한국인의 성향의 문제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이런 식의 흑백논리로는 우리가 의료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진실로 다양한 윤리 문제들에는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 자명하다. 이 책의 저술 동기 중 하나는 서문에 나온 대로 1984년 미국 대통령선거를 통해 터져 나온 낙태를 둘러싼 종교를 배경으로 하는 양대 정치집단 사이의 갈등이었지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2010년 시대에 뒤떨어진 "모자보건법"상의 낙태 관련 조항을 현실에 맞게 개정하려는 정부의 노력이 일부 종교계와 사회단체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어버린 경험이 있다. 이렇듯 예민한 쟁점에 대한 근원적인 입장차, 혹은 그 입장차의 사회적 표현 등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음미할 여지가 많지만, 현장 의료윤리전문가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복잡한 윤리적, 법적 맥락과 차원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특정 환자, 또는 피험자가 언제나 존재하고, 그로 인해 관련 의료진들과 그 가족들 역시 윤리적 갈등을 겪고 있으며 따라서 그에 대한 해결책이 늘 요청된다는 사실이다. 의료기술의 발전과 다원화된 사회에서의 가치충돌은 그러한 갈등들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어서 더 이상 예전의 평범한 상식으로는 해결이 쉽지 않다. 우리는 더욱 포괄적인 지식과, 관련된 윤리적 가치에 대한 민감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통을 겪고 있는 그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이러한 갈등에 맞설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바로 실천적 학문으로서의 의학의 목적이자 존재 이유, 그리고 광범위한 견지에서 보면 좋은 의술의 일부로서의 생명의료윤리(물론 다른 차원의 생명의료윤리도 존재한다)의 목적이자 존재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결의론은 우리가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상당히 괜찮은 장비를 제공해준다.
생명의료윤리의 역사 자체가 길지 않고, 그 맥락에서 결의론에 대한 관심이 촉발된 기간은 더욱 짧기 때문에 앞으로 이 방법론이 어떤 식으로 발전해 나갈지는 현 시점에서 예단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는 의료윤리 문제의 실천적 해결에 있어 대단히 중요하고 핵심적인 방법론 중 하나이며 그 가치에 대한 인식은 앞으로도 더욱 확산될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에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게다가 서양 윤리학의 일반적인 역사적 발전과 전개, 그 이면에 있는 역사적 사회적 배경, 그리고 특히 그 과정에서 중요했던 그리스도교의 역할에 대해 대단히 포괄적이고 신뢰할만한 정보를 주고 있다는 점도 이 책의 중요한 미덕 중 하나이다.
이 책의 번역은 2008년부터 2년간 매주 한 번씩 진행했던 박사과정 세미나의 결실이다. 박인숙이 초역을 하고 권복규가 원문과 함께 같이 읽으면서 문장의 진의를 파악하려 노력하였다. 한국인에게는 낯선 중세 그리스도교의 인명과 서명, 관련 사항들이 너무 많고, 또한 원문 자체가 매우 방대하여 참으로 쉽지 않은 작업이었고 시간도 매우 많이 소요되었다. 박인숙의 초역 원고를 받아 권복규가 2010년부터 원문 대조 및 오류 수정과 표현 교정, 주석 작업을 하였으며 이 작업을 끝내는 데도 1년 남짓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미국 국립보건원 생명윤리과(Department of Bioethics, NIH)에서 보낸 1년 연구년은 이 작업을 하는 데 필요한 귀중한 시간과, 또 잘 모르는 사항에 대해 그곳 전문가들에게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주었다. 초역 과정에서는 한국연구재단의 교육인적자원부 학술연구조성 사업비(KRF-2008-321-A- 00024)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윤리정책 협동과정의 김시형, 의과대학 김정아 선생은 주석 입력과 편집 작업을 도와주었다. 또한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김현철, 최경석, 배현아 교수, 그리고 연세대학교 의료법윤리학과의 강명신, 이일학 교수님들은 번역 원고를 읽고 여러 조언을 주셨다.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물론 발견될 수 있는 오역과 오류는 전적으로 역자들의 책임이며, 역자들로서는 최선을 다하였지만 이 책의 방대함으로 인해 혹시 독자들로부터 그러한 지적을 피할 수 없다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 수정할 것을 약속드린다. 마지막으로 한국어판 서문을 기꺼이 써 주신 저자 앨버트 존슨 박사님께 진심으로부터 우러난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2011년 9월
권복규·박인숙
▲ 비오스총서를 발간하는 이화여대 생명의료법연구소 소개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의료법연구소는 의·생명과학 기술의 눈부신 발달과 더불어 관련 연구의 성과가 가시화 되어 감에 따라 생명윤리 관련 법령 및 정책을 연구하기 위해 2005년 8월 1일 '생명윤리법정책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2007년 9월 1일에는 보건·의료 정책 및 의료법 분야 연구도 포괄하여, 생명의료법 분야의 국내 법·정책 수립에 기여하고, 학문적 연구와 사회적 논의를 선도하고자 '생명의료법연구소'로 개명하였다. 본 연구소에는 법학, 행정학, 의학, 생명과학, 과학교육학, 윤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교내·외 전문가들이 연구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의ㆍ생명과학, 보건의료 및 생명윤리에 관한 법령과 정책을 연구하고 관련 정책 및 사회적 아젠다와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본 연구소는 2006년 7월부터 2011년 12월까지 보건복지부 지정 "생명윤리정책연구센터"로 선정되었고 2012년 9월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분야 대학중점연구소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생명윤리적 타당성과 법적 타당성을 확보한 생명의료법제 및 거버넌스 연구"를 수행 중이며 이외에도 수많은 관련 연구 과제를 수행한 바 있다.
본 연구소는 영문저널 Biomedical Law & Ethics(매년 6월, 12월)와 국문저널 『생명윤리정책연구』(매년 6월, 12월, 등재후보)를 발간하고 있으며,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의 쟁점과 이해(최경석, 김현철, 2007)』 등의 단행본과 『시민을 위한 생명윤리학(대릴 메이서 저, 권복규 역)』등의 역서, 그리고 『각국의 생명윤리관련 법제와 법규(2008)』, 『각국의 줄기세포연구 가이드라인(2008)』, 『기관생명윤리심의위원회 구성, 운영 표준지침서(제3판, 2009)』 등의 지침서 등을 출간한 바 있다. 이와 같은 활발한 학술 및 출판 활동을 통하여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의료법연구소는 생명의료윤리 및 생명의료법 분야에서 국내의 독보적인 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하며 헤이스팅스센터, 케네디 윤리연구소, 미국국립보건연구원 생명윤리과 등 해외 유수 연구기관과의 교류 협력을 통해 지속적인 발전을 기약하고 있다.
▲ "비오스총서"를 펴내며
비오스총서는 생명과 윤리에 관한 성찰을 담은 책의 모음이다. 우리 문화에서 '생명'은 종교적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편 '윤리'는 인간의 삶의 도리로서 체득되는 것으로 여겨져 왔으며, 윤리적 요구 사이의 충돌이나 갈등과 같은 문제에 대한 성찰은 일상적 삶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 이렇게 보면 양자 모두 보통 사람들이 상식적인 시각을 가지고 따질 수 있는 주제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생명과 윤리에 대한 담론은 주로 종교인의 몫이었으며, 각 종교에서는 자신들의 이념과 신앙을 가지고 생명과 윤리에 대한 담론을 전개하여 왔다.
비오스총서는 이러한 생명과 윤리에 대한 담론이 교차하는 '생명윤리'를 대상으로 하여, 이를 성찰적 사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자 기획되었다. 생명윤리(bioethics)라는 말은 1970년대 초반 미국에서 탄생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이 말이 의미 있게 쓰이기 시작한 것은 줄기세포 논문조작 사건이 일어났던 때부터이다. 생명과 윤리가 높은 관념의 영역에서 유희하고 있는 동안, 현실의 세계에서는 의학과 생명과학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의학과 생명과학의 놀라운 '발전'이, 인간 생명의 존엄성, 인권과 정의라는 우리 사회의 핵심 가치에 대하여 어떤 도전이 되며 그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관한 진지한 숙고는 충분히 전개되지 못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의학과 생명과학이라는 전문적인 영역에서 벌어지는 기술적 발전의 현황과 그 함의에 대하여 민감하지 못하였으며, 의사와 생명과학자들 역시 자신들의 일을 수행하기에 필요한 법제도를 인지하는 것 이외에 그 배후에 존재하는 가치와 의미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꽁뜨가 말한 인지의 신학적, 형이상학적 단계에 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어느 사이에 실증적 단계도 넘어선, 다원화된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진리에 대한 인식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회에서 생명과학과 의학이 초래한 가치의 위기는 어떻게 극복되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다원적 민주사회의 진리관 하에서, 즉 실천적 사유와 담론의 장에서 민주적인 소통과 토론을 통하여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비오스총서의 목적은 바로 한국의 지식사회에 그러한 소통과 토론을 촉진하기 위한 사유의 씨앗을 뿌리려는 데 있다. 지금 의학과 생명과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장차 한국 사회 나아가 세계의 변화에 거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문제들은 특정 분야의 몇몇 전문가의 힘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며, 과학기술의 힘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현대의 일상적 삶 속에서 생명과학과 의학에 의해서 형성되고 영향받는 영역은 개인의 삶의 모든 영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생명과학과 의학의 성취의 함의가 아직 충분히 규명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에 관해 선택하고 결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한 선택과 결정을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깊이 있는 지적 탐색은 무엇보다도 긴요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의료법연구소는 2005년 설립된 이후 이 생명윤리를 연구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관으로서, 생명윤리 및 생명윤리 정책에 관한 연구를 위하여 그리고 이에 관한 담론의 확산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제 어언 십년이 흐른 지금, 우리 사회에 생명윤리 담론의 착근과 확산, 그리고 더욱 수준 높은 연구 성과의 창출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동안 거둔 결실의 일부를 이 비오스총서로 내놓는다.
여러 가지 부족함과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총서가 우리 지식사회의 생명윤리 관련 담론을 더욱 풍부하게 하고, 관련 서적과 자료가 부족한 현실에서 젊은 연구자들의 길잡이가 되며, 나아가 이러한 담론을 전개하는 가운데 성찰적 민주주의의 훈련이 이루어져서 우리 사회를 한층 더 성숙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이상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2014년 2월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의료법연구소 연구진 일동
목차
목차
한국어판에 대한 서문 8
역자 서문 11
프롤로그: 문제 21
1부 배경
1장 이론과 실천 51
2장 고대 결의론의 근원 84
3장 키케로: 철학자, 변론가, 입법가 123
2부 선구자들
4장 그리스도교적 기원 146
5장 교회법학자와 고해 사제 161
6장 신학자들 190
3부 고등결의론
고등결의론의 배경 212
7장 대전 저술가와 예수회 213
8장 저서, 저자, 방법 232
4부 결의론의 세 가지 예
9장 이자: 고리대금의 사례 272
10장 위증: 다의적인 표현의 사례 291
11장 자존심: 모욕당한 신사의 사례 322
5부 위기
12장 논파된 결의론: 파스칼의 비판 342
13장 결의론의 성과 369
6부 결의론의 미래
14장 『프로뱅시알』 이후 392
15장 철학, 그리고 도덕성의 원천 406
16장 결의론의 부활 442
17장 에필로그: 양심과 형평성의 주장 482
결의론자들의 목록 496
미주 505
찾아보기 555
비오스총서를 펴내며 571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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