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소풍
송경미 수필집
송경미 수필집 [아주 특별한 소풍]. 15세기 중엽 이탈리아 화가 만테냐(Andrea Mantegna)의 작품 '겟세마니의 기도'를 통해 세상의 갈등과 불행을 풀어내었다.
Couldn't load pickup availability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송경미의 수필 읽기 --
1.외면하지 않는 삶
왜 세상은 이토록 갈등과 불행으로 가득할까. 이를 송경미 작가는 15세기 중엽 이탈리아 화가 만테냐(Andrea Mantegna)의 작품 <겟세마니의 기도>를 통해 자상하게 풀어준다. 예수 피체 광경을 그린 이 그림은 가리옷 유다의 안내로 병사들이 접근하고 있는데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모습을 부각시켜준다.
피곤함과 잠의 유혹에 못 이겨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잠들어 있는 세 사람을 가린다면 이 그림의 감동은 반으로 줄어 그저 거룩하고 경건한 성화가 되었을 것이다. 무겁고 어두운 색깔의 예수님 옷과는 달리 주황과 파랑, 빨강, 노랑 등의 강렬한 색상의 옷을 입은 이 사람들은 편안하다 못해 태평하게 늘어진 모습이다. 돌을 베개 삼아 머리를 맞대고 팔을 늘어뜨린 채 자고 있다. 양 쪽으로 엇갈려 누운 두 사람과 오른편 동료의 허벅지를 베고서 입을 벌린 채 누가 떠메고 가도 모르게 자는 이 제자들을 볼 때마다 코고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죽음을 앞두고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스승의 고통을 외면한 채 태평하게 잠든 그들이 꼭 내 모습 같아 멈칫하게 한다.
<외면>
멋진 묘사에다 교묘한 인생살이의 비유이자 촌철살인의 자아 탐구의 투철함을 담아낸 구절이다. 인생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불교식으로 말하면 삼계화택(三界火宅)의 위기가 아닌가. 이게 바로 인생이다. 누구도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모른다.
이 명화를 앞내세운 작가는 바로 "십여 년간 알던 교우가 우울증으로 고층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한 친구 이야기를 거론하면서 "장례기간 내내 나를 괴롭힌 것은 '왜 그토록 몰랐을까?'였다." 그녀는 작가에게 "언제 밥 한 번 먹자"고 했는데 지나쳤던 걸 후회한다. 지나침은 곧 외면이다. 외면이란 무관심이며, 무관심은 애정이 없음이고 애정이 없음은 냉담함이고, 냉담함은 나 자신을 타인과 단절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가혹하게 몰아칠 수 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외면은 세상을 향한 나만의 이기주의의 담벼락임은 부인할 수 없다. 작가 송경미는 결코 세상과 외면하는 작가가 아니다. 그런데도 아무리 세상을 따듯하게 보듬어도 이렇게 예기치 않았던 실책은 거듭되는 게 인생살이다. 외면을 않는 삶이란 이끌림이 많은 삶이다.
아직 이끌리는 곳이 많은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살랑살랑한 가을바람에 이끌리고, 평화를 얼굴에 담은 사람에게 이끌리고, 저음으로 파고드는 첼로 음색에 이끌리고, 스치는 향기에 이끌리고, 달동네 봉천동을 그린 담채화에 이끌리고, 희고 둥근 달 항아리에 이끌리고, 한 땀 한 땀 누군가를 생각하며 기워내는 퀼트에 이끌리고,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이는 사물에 이끌린다.
<이끌림>
그러나 아무 데나 이끌려 다니는 삶을 찬양하진 않는다.
이런 인생살이에서 잘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현대식 행복론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소냐 류보머스키(Sonja Lyubomirsky)는 "행복의 50%는 유전, 10%는 환경의 영향을 받지만 나머지 40%는 '연습'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주장으로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글쎄, 듣기로는 그럴 듯하지만 과연 그럴지 첫눈에도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엄청난 품을 들여 조사해낸 결과이긴 하지만 그걸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응시키려 한다면, 특히 한국 여류수필가의 행복론과 결부시켜 본다면 적잖은 갈등을 일으킬 것이다.
예를 들면 송경미 작가는 <개똥 철학>에서 "화단에 심겨진 나무 한 그루, 화병에 꽂힌 꽃 한 송이도 내 것이 아니요, 그저 바라보며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이 순간의 소중함을 즐길 수 있다면 존재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사랑스러운가?"라고 반어법으로 행복의 의미를 추적하고 있다. 이 말은 곧 하찮은 것에서의 행복 찾기라는 너무나 흔해빠진 '개똥철학'적인 행복론인 셈인데, 중요한 것은 이런 깨달음에 이르게 된 계기를 작가는 "지천명(知天命)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연륜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찾으면 찾아진다는 말도 일리가 있겠지만 찾지 않아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동양적인 사유의 보편적인 우주 삼라만상의 철칙을 흔히들 '개똥철학'이라 희화화 하지 않았던가.
남에게 뒤지지 않게 열심히 살아 온 이 작가가 지천명의 경지에서 삶의 아픔과 즐거움을 새롭게 조명하는 글들로 채워진 이 수필집은 한마디로 송경미식 행복론의 지름길 찾기에 다름 아니다.
2. 행복 찾기의 세 갈레 길
여러 작품을 통해서 이 작가가 추구하는 행복론의 지름길은 세 갈레로 이뤄진다. 첫 갈레는 가족이고, 둘째는 신앙이며, 셋째는 자아실현이라 하겠다.
첫 갈레인 가족의 집단적인 행복의 동시 추구 양식은 대가족제도에서 소가족제도로 변화해 가는 중간 세대에 걸쳐 살았던 송경미 작가인지라 가족이란 도저히 개체로 분리 해체될 수 없는 집단적인 단위로 인간존재의 모든 가치 척도의 기본이 된다. 가족의 집단적인 행복 추구 양상은 비단 송경미만이 아닌 인류의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구태여 말한다면 한국인이 그런 의식이 서구에 비해 더 강함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한국 여류수필의 압도적인 다수가 가족에서 출발하여 가족으로 회귀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송경미의 작품은 오히려 그 집착에서 중간 정도라 하겠다. 이것은 가족에 대한 관심과 집착과 애정이 엷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원숙하게 가족적인 행복을 성취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두 번째 송경미 작가의 행복의 지름길은 신앙문제인데, 이건 가족의 행복론과 세번째의 자아실현의 사상적인 기초가 된다. 형식적인 믿음이 아닌 인간 존재론의 원천을 이룬 신앙심은 송경미 작가에게 진정한 행복론이 무엇인지를 형성시켜 주는 원동력이다.
세 번째의 자아실현은 이 작가의 예술적 재능의 실현으로 획득할 수 있는 취미 생활이나 재능 개발 등등의 행복론으로 풀이할 수 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비록 세 갈레일지 모르나 결국 가다보면 한 곳에서 만나게 된다는 점에서는 삼위일체일 수밖에 없는데, 그걸 송경순 작가는 지천명이란 술어로 축약해준다.
세상에 내 것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질적인 소유로 성공을 가늠하는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의 변명이 아닌 진정한 '마음의 가난'을 배운 것은 나이 50이 준 커다란 선물이다. 좋은 것은 다 내 것으로 하고 싶은 욕심과 세상의 집요한 유혹에 휘둘려 죽솥마냥 펄펄 끓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진 것이다.
<개똥철학>
지천명에 이르러 터득했다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었던 어리석음", "극히 일부분을 전체라고 믿었던 지난 날 많은 일들에 속고 실망"해 왔던 일들, "좋기만 한 사람도 어쩐지 싫은 사람도 빙산 아래 감춰진 얼굴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 것, "좁쌀만한 지식과 소견으로 판단하고 비판하는 일" 등등이 다 착오였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대체 이런 깨달음은 그냥 나이 들면서 얻어진 것일까. 작가는 이를 신앙의 힘으로 돌린다.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이끄심을 따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한 가닥 실을 붙잡고 예정된 길로 나아가는 것", "쓸모없이 태어난 것 같은 결점 투성이의 보잘 것 없는 피조물도 소중한 존재로서 나름의 할 일이 있고 빛나는 것들을 떠받치는 것도 중요한 일임을 기꺼이 인정할 수 있게 된 것"이 곧 가톨릭 신앙으로 다져진 지천명의 행복론이다. 이런 깨달음을 작가는 스스로 '개똥철학'으로 비칭 시키므로 써 오히려 그 소중함을 돋보이게 장치한다.
이제 그렇게 느꼈으니 현실적인 삶에서는 무엇이 달라질까. 작가는 널리 알려진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파레토(Pareto)의 2080법칙을 들어 세상 이치를 서술한다. 실제로 능력과 실속을 향유하는 20%의 중요성을 역설한 이 법칙을 거론한 작가는 곧바로 성경 <레위기>의 50년째 되는 해를 뜻하는 희년(禧年)을 거론한다.
이 해에는 노예들을 해방시켜 가족에게 돌려보냈으며 빚도 탕감해 주었다. 땅을 가졌던 사람들도 경작권을 내놓고 그 해에는 농사도 짓지 않았다. 이는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이 계속되지 않게 하려는 안전장치였기에 '50'은 힘들고 어려워도 참자는 희망을 주는 숫자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한 자유의지를 박탈당해 억눌린 사람들에게 희년은 새로운 탄생의 해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50'은 참으로 의미 있고 중요한 숫자임이 분명하다.
<개똥철학>
이 부분이 무슨 뜻인지 몰라 혹 독자들이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다. 파레토의 법칙이 세상을 능력자가 지배하는 것(전 인구의 20%가 전체 부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부의 불균형현상)으로 수렴된다면 이 성서의 인용은 80%에 대한 배려를 작가는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롱테일의 법칙(The theory of the Long Tail)인 하위 80%가 도리어 상위 20%의 수익보다 더 크게 나타난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갈려 있다는 것이다. 즉 전 상품의 20%가 모든 매출의 80%라는 파레토 법칙과는 반대로 매출이 저조한 나머지 80%의 총매출이 오히려 20%의 상품을 능가한다는 주장이다.
작가의 의도와 딱 맞아떨어지는 설명은 아니지만 지천명으로 얻은 행복론이 특정인에게 쏠림 현상이 아닌 골고루 퍼지기를 바란다는 뜻은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바로 작가의 신앙심에서 비롯된 세상 인식으로 마음이 가난한 보통 사람들의 행복 찾기인 셈이다.
3. 신앙과 행복, 그리고 수필
송경미 작가에게 신앙이란 존재론적인 근원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감성만이 아닌 이성까지도 수렴하는 삶의 전체상에 다름 아님을 <지각(知覺)없는 사람>에서 밝혀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작가는 "기름기 많은 튀김을 배가 부르게 먹었으니 여린 속이 온전"할 리가 없어 설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럴 경우 할머니는 배를 문질러 주며 염려스런 애정의 눈길을 보내기 마련인데, "아버지는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며 싸늘하게 한 마디" 던진다.
"사람이 어째 그리 지각이 없느냐."
그 말뜻은 몰랐으나 "아버지의 눈빛이나 목소리 느낌으로 봐서 아주 안 좋은 것이고 너무 많이 먹어 설사를 하는 것도 지각없는 일이라는 것만은 느꼈다." 영리했던 작가는 이로 써 "지각없는 사람은 사람도 아니고 지각없이 행동하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나쁜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기에 "이후 그 말을 듣지는 않았지만 나는 어디서든지 지각없다는 말을 듣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철이 들면서 송경미 작가는 지각이란 술어의 풀이를 이렇게 해준다.
지극히 높으시고 영광스러운 하느님이시여
내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주소서
주여, 당신의 거룩하고 진실한 뜻을 실행하도록
올바른 신앙과 확고한 희망과 완전한 사랑을 주시며
지각과 인식을 주소서. 아멘.
<지각(知覺)없는 사람>
성 프란치스코가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 아래에서 올렸던 기도문인 이 구절로 작가는 지각이라는 술어가 자신의 삶과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가를 풀이해 준다. 지각이란 술어조차 이처럼 신앙적으로 접근하는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가에게 삶이란 어떤 분야든 신앙생활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그러면서도 "오랫동안 지각없는 짓을 하지 말자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아직도 내가 지각 있는 사람은 못 되는 것 같다. 나이에 걸맞은 깨우침과 분별력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도 늘 망설임과 두려움 속에서 소심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죽는 날까지 지각 있는 삶을 살고 있느냐는 물음에 자신 있는 대답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지각없는 사람'이라는 말만은 면하고 싶을 뿐"이라는 겸허함으로 마무리 지은 이 작품은 송경미 작가의 이지적인 신앙의 자세를 엿보게 해준다.
신앙생활은 이 작가에게 일상적인 삶부터 이상의 추구까지 모든 영역에 걸쳐 뿌리 내리고 있기에 창작활동 분야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예를 들면 <아주 특별한 소풍>은 "일 년에 한 번 있는 강남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 소풍"을 다룬 글이다. "환자 한사람에 서너 명의 봉사자가 배정되어 만반의 준비"를 해야 되기에 소풍이라기보다는 작전에 가가운 법석인데 거기에다 빗발까지 굵어지자 "오늘 같은 날 꼭 소풍을 가야 하나? 이런 중환자들을 어떻게 모시고 간담? 상태가 더 나빠지면 어쩌나?"하는 우려를 안고 "수액 통이 서너 개씩이나 달린 휠체어에 앉은 환자들은 온몸을 담요로 둘러싸고 모자와 목도리까지" 감고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소풍이기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조심조심 병실 문을 나섰다."
바로 신앙인이 아니면 행하기 어려운 경지의 봉사활동을 통해 작가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한다.
그래. 너무 늦지 않게 바로 지금, 내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봄비에 살아나고 햇살에 반짝이는 새잎처럼 싱그럽게 그렇게 세상과 사람들을 사랑하리라. 그리고 사랑한다고 끊임없이 말해주리라.
<아주 특별한 소풍>
이런 가운데서 행복과 충만함을 느낄 수 있는 작가의 영혼은 실로 풍요롭다. 그 풍요로움을 넉넉하게 그린 작품의 한 예가 <가난한 마음>이다. 자다가 얼굴에 기어오른 "송충이를 닮은 2cm 남짓한 털북숭이 녀석" 때문에 잠에서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난 직후의 심리적인 변모를 찬찬히 그린 이 소품은 심리묘사가 잘 배합된 깔끔한 글이다.
바닥에 나가떨어진 녀석을 발견하고는 "단박에 황천길로 보내고 싶지만 깊은 밤이니 목숨만은 살려 준다"고 맘을 고친 뒤 면밀히 관찰한다.
'지금 날 노려보니? 나랑 눈싸움이라도 하자는 거야?'
'그래요. 공중에 솟구쳤다가 내동댕이쳐져 정신을 못 차리겠단 말예요. 앞길 가로막지 말고 그 태산 같은 얼굴 비키세요!'
장애물의 정체가 위협적이지는 않다고 판단했나? 벌레는 슬슬 방향을 틀어 움직인다. 이제 제 갈 길을 가려는가 보다. 부지런히, 정말 부지런히 기어간다. 어디로 얼마나 가야 하는지, 찾는 것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기어가는 모습이 꼭 나 같다. 쉼 없이 가고는 있지만 끝은 알 수 없는 삶이 아닌가? 쉴 수도 없고 후퇴할 수도 없으니 그저 흘러가는 시간에 맡기고 나아가야 한다.
<가난한 마음>
"한 시간이 지났지만 이 녀석은 아직 2미터도 못 갔다. 휴식도 없이 머리부터 꼬리까지 온 몸으로 오체투지 했으니 얼마나 힘들고 배가 고플까. 안쓰러운 생각에 밥을 주기로 했다." 그래서 녀석 앞에다 꿀을 선사했더니 그는 "꿀 무덤에 고개를 처박고 먹어대는 녀석은 돈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덤비는 우리 인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결국은 "점점 꿀 속에 파묻히고 얼굴의 털은 꿀범벅이 되어버렸다. 복권 당첨으로 돈벼락을 맞은 사람들이 달콤하고 안락한 생활에 빠져 허우적대는 꼴하고 뭐가 다른가?"
그런 꼬락서니를 보고서 작가는 그를 구해주고자 나선다. "하늘에서 튼튼한 동아줄이 내려오길 바라며 로또복권을 긁은 것도 아니고 배고프니 밥 달라고 보챈 것도 아니잖아? 성실하게 앞만 보고 기어가는 녀석의 앞길을 내가 막았으니 구해주리라." 위기에 처한 벌레를 구해주면서 작가는 독백한다.
그래, 그냥 맑고 가볍게 가는 거야.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도 있잖아. 너는 그러겠지? 세상이 확 뒤집히는 천재지변을 만나서 공중제비를 돌다가 내동댕이쳐지고 평생 편히 앉아 먹을 꿀 독에도 빠져봤고 몸을 빼내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 옭아매는 밧줄에도 묶여봤다고. 종일 기어봐야 별 볼일 없는 벌레의 삶이지만 그래도 온몸으로 기어가는 것이 제일 좋은 법이라고.
그래, 너를 다시 만날 때는 네 의지대로 기어가도록 내버려 두고 그저 지켜만 봐 줄게.
<가난한 마음>
이 정도로 깔끔한 산문을 만나기는 그리 쉽지 않다. 하찮은 실화를 알레고리 형식으로 희화화 시킨 글인데, 여기서 작가는 인간이자 창조주의 위치임을 느끼게도 만든다. 그러면 벌레는 벌레가 아니라 바로 인간 자체로 둔갑하게 되며, 그것은 곧 작가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한 각성이기도 하다.
이 신앙심의 연장선에서 6.25 전쟁 전후에 함경도에서 사목하던 베네딕도회 수사 신부의 순교를 다룬 <백작 아들의 최후>나, 사제 서품을 앞두고 인스부르크의 노르 케테(Nord Kette)산 등반 후 하산 길에 사고로 희생된 인권 판사 김홍섭의 장남의 비극을 다룬 <인스부르크에서 만난 사람> 등은 해박한 정보와 신앙심이 조화를 이뤄 빚어낸 기행문으로서의 격조를 느끼게 한다. 이 두 작품의 연장선에서<쉘 위 댄스(Shall we dance?)>는 자신의 성지순례 기록에 얽힌 사연을 그려주고 있다.
이 일련의 작품들을 읽노라면 송경미에게 삶과 행복이란 파스칼의 아래와 같은 논평이 지극히 잘 어울릴 듯하다.
신을 모르고는 행복할 수 없으며, 신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사람은 보다 행복하게 되며, 궁극의 행복은 신을 확실히 아는데 잇다는 것이다. 신을 멀리 하면 할수록 인간은 더 불행하게 되고, 가장 큰 불행은 신을 모르는 데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파스칼 <팡세>, 제3장 <노름의 필요성에 대하여>
행복은 우리들의 외부에도 없으며, 내부에도 없다. 행복은 신 속에 있다. 즉, 우리들의 외부이고, 내부인 곳에 있다.
위와 같은 책, 제7장 <도덕과 교훈>
4. 맺는 말
바람직한 신앙심으로 다져진 삶이란 사회의 밑바닥을 보살피는 낮은 데로 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세이기도 하다. <콘트라베이스 주자(奏者)에게 - (쥐스킨트의 희곡 《콘트라베이스》를 읽고>는 이런 작의 의식세계를 읽을 수 있는 잘 다듬어진 글이다. 혼자로서는 주목을 못 받지만 반드시 함께 어울려야만 오케스트라가 형성되는 악기 콘트라베이스에게 보내는 서간체 형식으로 구성한 이 작품은 이렇게 사회적인 쟁점을 부각시켜 준다.
일반 직장에서는 언젠가는 꼭대기에 올라갈 수도 있다는 꿈을 꿀 수 있지만 오케스트라에서 콘트라베이스 주자는 절대 지휘자나 독주의 꿈조차 꿀 수 없다고 했죠? 음의 빛깔에 의해 고정된 계급이 사형선고나 다름없으니 생활이 단조롭고 진력난다고 했지요? 갈채를 받는 지휘자와 독주자를 올려다보며 서글플 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꼭 혼자 돋보여야 맛은 아니고 홀대받는다고 삐져있으면 누가 알아주나요? 누군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베이스 주자가 되고 싶었겠어요?
<콘트라베이스 주자(奏者)에게
"한 번 공연에 땀을 2리터나 흘려야 할 정도로 연주가 힘이 드는데도 남들에게는 쉬워 보이는 것도 억울하다"든가, "덩치도 커서 이동하려면 자동차 앞자리의 보조의자를 떼어내야만 실을 수" 있다는 등등의 풍부한 정보도 보너스로 주어진다.
이처럼 홀대당하는 인간, 외면당할 수도 있는 세상에서 더불어 살아가기란 사람 사는 세상을 공감하는 것으로 가능한 것인데, 이런 훈훈한 세상인심을 그린 글이 <꽃보다 사람>이다. 너무 유행을 따른 제목이지만 내용은 자못 진지하고 흥미 있다. 영국체험을 소재로 삼은 이 글은 이웃끼리 호단의 꽃 기르는 양태까지 서로가 관심을 보인다는 프라이버시의 차원을 넘나들 정도의 깊은 인정세태를 보여준다. 그런데 정작 감동적인 장면은 인적 드문 길에서 펑크가 나서 당황하고 있는데 지나가는 차들의 9할이 멈춰서 도와줄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는 대목이다.
이런 체험은 이 작가로 하여금 한국에서 그대로 실현토록 작용한다. 올림픽대로로 출퇴근하던 어느 초겨울 날, "두 명의 외국인을 포함한 세 남자가 길가에서 떨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차를 세워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오던 중에 타이어가 펑크 났고 택시기사가 교체중이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퇴근 시간이라 차가 밀릴 정도로 많았지만 택시는 아예 다니지도 않는 길이라서 난감하던 그들을 태워주며 "유학시절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마음의 빚을 갚은 것이고 내게 이런 기회를 준 당신들이 오히려 고맙다고 했다"는 이 글의 끝마무리는 한결 재치가 넘친다.
그 날 저녁 잔뜩 흥분해서 남편에게 말했더니 무덤덤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가 "잘 했네. 다음부턴 아무 남자나 태우지 마."한다. "당신 정말?" 함께 사는 세상에서 당연한 일이 바보 같은 짓으로 전락되는데 말문이 막혔지만 남편의 걱정을 부정할 수만도 없었다.
<꽃보다 사람>
이처럼 살맛나는 세상은 인간관계가 온당하게 형성될 때라야 가능한데 이를 작가는 <남자가 무릎을 꿇을 때>를 통하여 멋지게 형상화시켜 주고 있다. 이 작품은 전반부보다 후반부가 더 감동적이다.
스페인 마드리드 출신의 플라시도 도밍고(Placido Domingo)와 바르셀로나 출신의 호세 카레라스(Jose Carreras)는 테너가수로 그 지역감정까지 겹쳐 가히 숙적의 수준으로 "상대방이 초청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출연 약속을 하는 등 불편한 관계였다. 카탈루냐가 카스티야로부터 독립투쟁을 하고 있던 1984년 이래 이 둘은 앙숙이 되었다."
그런 중 "성공의 절정에 있던 1987년 카레라스는 급성 백혈병"에 걸려 "마드리드에 있는 백혈병 환자만을 돕는 에르모사(Hermosa) 재단의 도움으로 완치하여 재기"하게 되었다. 그 고마움으로 "재단에 가입하고자 정관을 읽던 그는 재단 이사장이 도밍고이며 에르사가 오직 한 사람 카레라스를 위해 설립되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익명으로 지원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크게 감동한 카레라스는 마드리드에서 열린 도밍고의 연주회장을 찾아 가서 청중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감사의 마음을 절절히 표현했다. 도밍고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일으켜 세워 꼭 껴안았다. 그는 "카레라스의 목소리를 잃고 싶지 않아서, 나의 경쟁자인 다른 예술가를 도우려고 한 것."이라는 말로 마음을 전했다.
<남자가 무릎을 꿇을 때>
그 뒷이야기는 차라리 생략해도 좋을 것이다. 세상의 묘미란 이런 것이다. 이것은 오래 전에 사라진 봉건적인 윤리관인 기사도 정신이나 영국적인 신사도 따위로는 미처 해명이 안 되는 인간다운 존재의 빛나는 공존의식의 극치가 아닐까. 경쟁과 갈등과 적대감이 팽배한 가운데서도 공존을 위해서는 원칙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 인간세상을 꿈꾸는 것이야말로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닐까.
이 작품집으로 송경미 작가는 그간 축적해왔던 작품세계의 전모를 드러냈다. 이제 다음 단계로 도전을 앞둔 이 작가에게 더 한층 성숙된 작가정신으로 빚어질 인간적인 향기가 풍기는 휴먼 드라마를 기대하고 싶다.
송경미 첫 수필집 '아주 특별한 소풍'
인간 존재론의 원천을 다룬 휴먼에세이
2009년 에세이 플러스로 문단데뷔 후 2012년 '젊은 수필'로 선정되기도 했던 송경미 씨의 첫 번째 수필집이 '아주 특별한 소풍'이다.
송경미 씨가 이 작품집에서 추구하는 행복론의 지름길은 세 갈래다. 첫째가 가족이고, 둘째는 신앙이며, 셋째는 자아실현이다.
첫 갈래인 가족이란 도저히 개체로 분리 해체될 수 없는 집단적 단위로 인간 존재의 모든 가치적도의 기본이 된다. 특히 한국여류수필의 압도적인 다수가 가족에서 출발하여 가족으로 회귀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송경미의 그것은 오히려 그 집착에서 중간 정도라 하겠다. 그만큼 원숙하게 가족적 행복을 성취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두 번째 신앙문제는 가족적 행복론과 자아실현의 사상적 기초를 이루고 있다. 형식적인 믿음이 아닌, 인간 존재론의 원천을 이룬 신앙심은 작가에게 진정한 행복론이 무엇인지를 형성시켜주는 원동력이다.
세 번째 자아실현은 이 작가의 예술적 재능의 실현으로 획득할 수 있는 취미생활이나 재능개발 등등의 행복론으로 풀이할 수 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비록 세 갈래 일지 모르나 결국 가다보면 한 곳에 만나게 된다는 점에서 삼위일체 일 수밖에 없는데, 송경미 작가는 이것은 지천명이란 술어로 축약해 준다.
어쨌든 '아주 특별한 소풍'으로 송경미 작가는 그간 축적해왔던 작품 세계의 전모를 들어내는데, 일단 성공을 거둔 셈이다.
이제 다음 단계로 도전을 앞둔 이 작가에게 더 한층 성숙된 작가정신으로 빚어질 인간적인 향기가 풍기는 휴먼 드라마를 꿈꿔본다.
목차
목차
콘트라베이스 주자에게
지각없는 사람
회덕분기점을 지나며
대박의 꿈
아주 특별한 소풍
눈사람
개똥철학
프란체스카와의 동거
소나무에게 듣다
2. 남자가 무릎을 끓을 때
남자가 무릎을 꿇을 때
신고식
밥
헌서방 당신에게
나의 엑스칼리버
더위, 겁나지 않아요
비빔밥
마로니에가 건네는 말
감잎 단풍이 물들 때
3. 사자새끼 길들이기
사자새끼 길들이기
G세대 군인
골동품 유감
편지
담
꽃보다 사람
커피와 첼로
스도쿠
간절한 이별
4. 인스부르크에서 만난 사람
인스부르크에서 만난 사람
백작 아들의 최후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녀
무사히 건너가기
묵주
외면
쉘 위 댄스
가난한 마음
이끌림
5. 호미 두 자루
호미 두 자루
엄마의 등
오래된 친구
육쪽 마늘
강릉과의 사랑
어명정 가는 길
바르비종, 밀레의 들판에서
페타니, 레핀의 집을 다녀와서
천지
저자
저자
2009년 <<에세이플러스>> (현<<한국산문>>)로 등단
2012년 <<젊은수필>>선정
한국산문작가협회회원
한국문인협회회원
Your payment information is processed securely. We do not store credit card details nor have access to your credit card informat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