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벗겨낸 생선비늘 같은 삶은 휘뚤휘뚤하게 난 머다란 길 1: 생명편
문웅 제2시집『갓 벗겨낸 생선비늘 같은 삶은 휘뚤휘뚤하게 난 머다란 길. 1: 생명편』. 생명의 기도, 자선의 마음, 의미의 삶을 통해서, 이때까지 인류의 주체라고 불리어 온 생명과 자연을, 흔적과 흔적의 씨줄과 날줄의 뫼비우스띠처럼 감치기 하여, 이데아(Idea)의 로고스(Logos)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처럼, 하나님(God)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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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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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용(시인. 용인대학교 영문과 교수)
1. 문웅의 시세계
문웅의 시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현상과 체계성에 대한 형이상학으로 벌이는 끝없는 자유놀이(freeism)는, 현존의 부재에 대한 회의에서 벌이는 해체적인 의식의 인식놀이와 같다. 로고스(Logos)의 말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진 형이상학의 존재론을, 이성과 감성의 촉각을 총동원하여 에세이즘화 (essayism)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속성은 자기현존, 의식, 내면성을 가지며, 따라서 안팎의 구별과 "자아와 타자의 객체화"에 이르게 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이분법적 대립을 설정하면서도 신/인간, 인간/자연, 말/문자, 시간/공간, 이성/감성, 삶/죽음 등의 가치서열을 위계질서화하여, 화자의 내면세계를 타자의 의식의 흐름으로 객체화하여 공유하는 대중화(populism)의 시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2. 확신에 찬 구도(求道)의 목소리
1권 생명편에서는 생명의 기도, 자선의 마음, 의미의 삶을 통해서, 이때까지 인류의 주체라고 불리어 온 생명과 자연을, 흔적과 흔적의 씨줄과 날줄의 뫼비우스띠처럼 감치기 하여, 이데아(Idea)의 로고스(Logos)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처럼, 하나님(God)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문웅 시인의 첫 번째 시집 '현실 속의 벽은 높고 존재의 아픔은 희망을 품다'에서는 존재, 그리움, 자연, 신앙, 사랑이 주제가 되어, 작은 몽당연필 같은 자신의 삶을 흰옷 입은 천사가 미래를 예증할 수 있다면 거대한 집의 기둥이 되어 천만년의 세월을 지킬 수 있을 텐데"라는 푸념을 얘기하고 있다면, 이번에 두 번째 시집에서는 하나님(God)에게 확신에 찬 기도를 올린다. 당당한 구도(求道)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 / 보석 가득한 천사의 날개를 주세요 / 천국 소망의 노를 저어보고 싶습니다" (주님 천사의 날개를 주세요), "살아계신 주님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요 / 살아계신 당신의 영적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 배우자 선택의 기회를 더 이상 미루지 마옵시고 /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렸사옵니다. 아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주님! 하나님 나의 손짓이 학이 되어 당신의 나라로 날아갑니다 / 나의 소원을 들으시고 하늘 축복이 내게 임하게 하소서" (나의 손짓이 학이 되어 날다), "하늘에서 빛이 옵니다 / 빛의 조각들이 떨어진 / 그늘에서 진리의 싹이 돋아납니다 / 빛이 씨앗의 도움을 받아 / 싹을 틔우듯 / 나도 그렇게 생의 / 쟁기질을 하고 싶습니다" (하늘에서 빛이 옵니다), "내 마음에 영생의 별이 영원히 빛나게 해주세요 / 생명수 폭포가 흐르고 / 주님의 자리가 보석같이 은혜의 바다에 넘쳐나게 하시어 / 환히 피어오르며 반짝이게 하여 주시며 / 주님 당신이 살아계심이 / 우리의 삶 가운데 현실로 묻어나와 꽃피게 하시고 ? 생의 활기를 되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마음의 별이 빛나게 해주세요)
말중심주의에서 존재해온 언어의 체계를 과거와 지역을 중심으로 해체하여 객체화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오래 전에「관촌수필」을 읽고, 한 시대의, 한 국가의, 한 지역의 언어가, 한 사람의 집요한 노력으로 객체화하여 세상에 전해질 때, 사라지고 사멸될 한 시대의 언어가 후손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문웅 시인의 이러한 시도가 체계적으로 계속되기를 바란다.
"갓 벗겨낸 생선비늘 같은 삶은, 휘뚤휘뚤하게 난 머다란 길", 선바람의 모습으로 떠났다가, 짜발량이가 된 해쓱하고 머쓱한 보드기가 되어 되돌아 나오던 날", "성크름하고, 소연하던 날 소소리 바람 타고 떠났습니다.", "주근주근 흘러버린 삶을 마치면 인생은 하늘에 예비된 그림으로 마지막 요단강가에서 너나없이 모꼬지 하지", "올 한 해 달머슴 굴타리 파먹듯 갔다. 하루하루 석경 아래 깊은 사색에 젖어 얼마나 많은 날들을 어빡자빡하게 보냈는가", "인비늘 같은 일상의 고뇌들이 약가심 되는 시각 태양은 저뭇하고 파르께한 얼굴로 산 너머로 앵돌아지는 그때 문득 연부년 다가오는 중추절의 향수가 잃어버린 연심을 자극해 온다."검버섯의 미시랭 노파 / 달보드레한 달빛 / 끄느름한 겨울이 오면 / 방시레 웃는 모습"
시인은 시대의 안테나이다. 어떠한 환경과 재료도 시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소재를 정확히 포착하여, 시적 감흥의 선율을 가슴으로 느끼고, 극도의 감성 후에는 잘 삭힌 젓갈처럼, 정갈히 심원(深苑)의 소반(素飯)에 차려 놓으면 되는 것이다.
3. 어머니의 배꼽에 귀 대어 듣고 싶은, 추억으로 합일(合一)된 자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역사중심주의와 태양중심주의는 하나의 다발에 불과하다.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두 개의 존재인 것처럼 분리되어서 논의될 수가 없다. 다발은 얽힘의 복잡한 구조, 상이한 실의 방향이 서로 겹쳐 짜놓은 천과도 유사하다. 다발에 있는 인간과 자연은 그 자체의 얽힘과 구성화를 존중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흔적의 흔적으로 연쇄적인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있기에, 그 세계는 시작도 끝도 없고 삶/죽음, 존재/무의 반복교차 속에서 가치선택이란 우습기 마련이다. 결국 총체적인 전체성의 울타리 안에 다발로 흩어져 있는 시인의 삶과 자연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합일이 되어, 어머니 뱃속에서 떨어져 나온 탯줄같이 연결고리를 만들고 있다. 이 합일의 세계에서는 저자가 동시에 독자가 되는 주고받음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거울이 자기가 아닌 것을 비추듯이 문웅의 자연은 배꼽에 귀 대어 듣고 싶은 독자의 자연이 되는 것이다.
"하늘에 별은 지고 유성의 / 덧없는 잔재만을 남기지만 / 가슴속에 떠 있는 별은 / 영원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 단지 세월의 시공간에 남아 그 빛을 조금 낼 뿐입니다" (흉금의 공간에 새긴 혼자만의 별), "가을의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있나요 / 깊은 밤 발가벗은 몸으로 / 마음속 깊이 나의 본성을 흔들어 보지만 / 남은 것은 더 많은 생각에 묻힌 허탈의 잔재뿐 / 칠흑같은 밤에 / 그리운 당신을 현실의 거울로 비추어 봅니다" (가을의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있나요), "별이 흐르는 강에 홀로 서서 / 별과 함께 목욕을 한다 / 나의 진정한 면사포 같은 것을 / 풀어 흘려보내리라 / 그것은 서로의 감응이 되어 / 별처럼 흐르는 은하수가 되는 것이다" (별이 흐르는 강에서 목욕하라), "별을 따라 시간은 흘러 갔습니다 / 세월의 텃밭 사이로 /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별을 따라 시간은 흘러 갔습니다), "때가 되면 / 계절을 안고 자연스레 / 다가올 텐데" (때가 되면 자연스레 다가온다), "실낱같은 빛으로 왔다가 / 아롱진 궤적의 잿빛 어린 나이로 / 승화해 버린 생명의 순환체처럼 / 그리운 이면의 대화가 고기 굽듯 / 현재라는 진실 안에 서린 진리의 / 입김처럼 다가오는 / 살가운 밤입니다" (살가운 밤입니다), "자연으로 가고 싶었다 / 아니 그것을 닮고 싶었는지 모른다 / 녹색의 숲을 향해 / 동그란 풍선 안에 / 내 자신을 띄워 보낸다" (자연으로 가고 싶었다),
이제 시인은 자연과의 수동적인 합일을 떠나 능동적인 합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 폭의 동양화에 등장하는 안개는 신선이 약초 캐러 간 깊은 산과 마을을 갈라놓는 간격이요 여백이다. 그 여백은 하나의 구름과 같다. 신선세계와 세속세계를 차이 나게 하지만, 동시에 그 구름과 안개는 두 세계의 연관 관계를 동시에 알려주고 있다. 시인이 자연의 모습으로 보충대리를 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경험도 꿰뚫을 수 있는 감수성의 도구를 가지고, 자연의 이미지즘을 일상의 목소리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왜가리 한 마리 무엇을 그리도 / 응시하고 있는지 무심코 서 있다 / 나는 자연의 세심한 배려에 / 벅차오른 감동과 격동으로 / 그 정경을 바라보고 있다" (자연의 배려), 뜨거운 녹차의 입김이 / 입술에 스쳐간다" (녹차의 입김이 내 입술에 스쳐간다), "자연이 살아서 / 생명과도 같은 / 에너지를 분출하고 있다 / 어머니 젖줄 같은 / 신선함을 뿌려주고 / 새 생명을 잉태한다" (녹색의 아가미 속으로), "배꼽은 세상 최고의 선물이다 / 배꼽 모양의 흉측하게 토라진 것이라도 좋고 / 뒤집혀 반쯤 뒤틀려도 좋다" (사랑하는 사람의 배꼽이 보고 싶다), "새벽이 오는 소리 끝에 십자매 울고 / 해장국 집 찾는 남자는 / 눈이 토끼 눈이네 /밥 짓다 설익은 밥을 태운 / 구수한 진한 그 냄새처럼 들린다" ( 새벽이 오는 소리), "세월은 빛바랜 그늘 속에서 / 짓눌린 봉숭아처럼 / 희뿌연 안개 속에 / 이별 그것은 지구를 / 심적 항아리 안에 품고 다니는 육중한 무게의 /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추억의 강가에서), "소리 없이 잊혀진 추억이 쌓이고 있습니다 / 밤에 내리는 / 흰 눈처럼 말입니다" (추억이 쌓이고 있습니다), "낙엽이 비가 되어 내리던 날 / 한 줌의 재가 된 그리움의 초상이 / 홀로 외로이 마른 밥에 / 물을 말아 / 젓갈 놓고 한 수저 떠 넣듯이" (낙엽이 비 되어 내리던 날), "하늘 빛 고운 노을 비 내리고 / 고요함이 한낮의 / 모든 시름을 안고 자는 곳 / 시골 향수의 보리 내음이 있는 / 평안의 보고 / 행선지는 몰라도 그곳에 가면 알 수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알 수 있습니다)
문웅 시인이 살아온 환경을 보면, 도시였지만 전원이 있는 깊은 시골의 촌락과 같은 곳이었고, 자연과 접하는 자연인의 삶이었다. 인간의 본성 속에 살아 숨 쉬는 사랑과 존재, 자연과 신앙, 추억과 그리움이, 시인의 예술가적 감성과 결합하여 합일(合一)된 영혼의 울림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4. 자아(自我)의 타자(他者), 타자(他者)의 자아(自我)를 객관화(客觀化)시킨 한 폭의 수채화
문웅 시인은 현대의 삭막함과 고독 속에서 무기력하게 딜레마에 빠진 현대인의 의식의 목소리를, "자아의 타자"의 관계를 객관화하여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그는 주관과 객관, 정신과 물질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전체라는 인식에 도달함으로써,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구분을 일원화하고 있다. 주관과 객관의 구분은 항상 자의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디에 선을 긋는가는 항상 관점 여하에 따라 결정될 문제이다. 감정을 주관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든지, 감정을 주관의 단순한 감정의 부속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편견에 지나지 않으므로, 주관적인 "자아"도 객관적인 "타자"도 독립된 실체를 지니지 못한다. 시인은 마치 "표본실의 청개구리"처럼 자아를 객관화시킴으로서, 자기초월적 경험을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로 보편화하여 현대인의 인식론을 대변하고 있다.
"인생이란 꽃과 같은 것 / 삶의 고귀한 품격은 / 우리의 속사람이 날로 / 새로워지는 것일 게다 / 한낮의 태양은 / 녹음 짙은 숲을 지배하지 못한다 / 다만 점점이 햇빛 조각을 / 한 쪽 한 쪽 투과시킬 뿐이다" (삶의 그루터기가 되고 싶다), "가을의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있나요 / 깊은 밤 벌거벗은 몸으로 / 마음속 깊이 나의 본성을 흔들어 보지만 / 남은 것은 더 많은 생각에 묻힌 / 허탈의 존재뿐 / 칠흑같은 밤에 그리운 당신 / 현실의 거울에 비추어 봅니다" (가을의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있나요)", "너는 그 탓 한 번 안 하고 / 언제나 지나는 사람들의 / 밤길을 지켜 주잖니 / 너를 거리의 폴리스맨으로 임명한다 / 너에게 거리의 대사 직함을 줄까 한다" (가로등), "무풍지대 같은 삶은 없을까 / 그것은 회색지대에 있는 / 모호한 삶의 방식 속에 / 진정한 실체란 없는 것일까 / 진리란 그러한 오류의 무풍지대에 있을 수 없으며 / 오직 구분된 굵고 각이 진 틀을 형성하는 / 투명하고 이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풍지대 같은 삶은 없을까), "여름 속살이 드러나 보이는 / 소리는 역시 매미 소리다 / 수박 / 여름의 후끈한 열기 / 석양 / 호수의 주름살 / 맞은편 찻집 / 비엔나 커피를 마신다 / 봄에 떠난 그 여인" (저녁노을이 가슴에 사무칠 때)
시인은 화가이며 일러스트레이터이다. 마음만 먹으면 자연을 객관화해 자아의 내면세계로 이미지화할 수 있다. 봄에 떠난 그 여인도 다시 시인의 맞은편 찻집에서 비엔나 커피를 마시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정통성을 부여받은 적자(嫡子)로서의 목소리보다는 서자(庶子)의 보이지 않는 비개성적 목소리들(impersonal voices)의 상관관계를 통하여, 다성적인 형태의 목소리를 창조하고 있다.
"호수 위에 투영된 본인의 심성 어린 그림자를 찾아 보아라 / 노니는 오리 한 쌍의 여유로운 / 서정적 그림에 저녁노을의 / 여운이 가슴에 사무칠 때 / 슬며시 당신이 감춰두었던 / 팬티를 꺼내서 노천화장실에서 / 갈아입어라 / 화장실에서 / 치약으로 이를 빡빡 닦고 나온 사람처럼 / 상쾌하고 깔끔한 /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당신의 눈시울을 적실 것이다" (저녁노을이 가슴에 사무칠 때), "밤은 어둠의 커튼 속으로 / 모든 빛의 열기를 / 빨아드리고 있습니다 / 까만색보다 훨씬 까만 것 위에 / 모든 이들의 마음을 그리고 / 말 못할 사연을 풀어 놓습니다 / 겹겹이 쌓인 마른 빨간 고추 같은 / 밤에는 묵은 때를 씻기 위해 / 옷을 벗어야만 합니다 / 그리고 자아의 거울 앞에서 /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고 / 웃어대기도 하는 / 자유로운 일탈의 시간인 것입니다"( 밤은 빛의 열기를 빨아 드립니다), "소주 한잔에 잘 익은 꼼장어를 / 소금기 있는 참기름에 살짝 발라 / 입속에 넣는 군침 도는 순간처럼 / 내게 묻지 마시오 / 그것은 당신의 몫이요 / 그것은 그 순간의 본질이 / 시시때때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오 / 마치 꼼장어를 / 숯불에 구울 때 / 냄새가 주위 환경을 점차로 / 자극하는 것처럼 말이오" (생의 가시가 도시의 야경 속에 뿌려지고)
이제 시인의 자아의식의 흐름은 순간의 본질까지도 객관화하고, 그것마저도 여의치 못할 때에는 자연 속으로 훌쩍 떠나 스스로 한 폭의 수채화의 점이 되고 선이 된다. 타자들의 취향에 따라 냄새를 맡게 할 수도 있고, 수채화의 화폭에 덧칠을 하게 할 수도 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습니다 / 끝까지 이르러 발디딘 곳은 / 한적한 시골마을 초등학교 앞이었습니다 / 어둠이 짙게 덧칠된 다음 산등성 위로 오른 달이 / 도시에 서식하는 가로등이나 네온사인과는 다른 / 자연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고 반겨주었습니다 / 눈가에 맺힌 눈물처럼 달이 산 아래 논가 물속에 비추일 때까지 셔터를 눌러 저장했습니다 / 멀리서 두 눈만 크게 뜬 버스가 헉헉거리며 다가왔을 때 / 카메라 렌즈를 닫고 급히 뛰었습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습니다) "소리 없이 왔다가 얇은 책장 넘기듯 / 미련의 속절없이 / 사연만을 남기고 떠나는 계절 / 가을비까지 소슬바람에 날리니 / 붉디붉은 석류 속같은 / 애닮음이 차오르는구나 / 차라리 오지 말고 / 그냥 개울로 같으면 좋겠다" (볼 수 없을 때 다시 떠올리고 싶다)
양파껍질 같은 자신의 허물을 송두리째 뽑아 주고 나서, 자유인이 되어 한 마리 새와 같이 하늘을 훨훨 날기도 한다. 발뒤꿈치 밑에 굳어 있는 각질을 까짓것 까칠한 각질제거용 도구로, 쓱싹하면 깨끗해질 것을 스스로 자각하며 자아를 객체화하여 즐기고 있다. 이별까지도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숙명의 고리로 연결하고 있다.
"이별이 반드시 슬픈 것은 아니다 / 언젠가 갈라져 개화(開花)할 꽃잎처럼 운명에서 발원한 개울이 흐름을 찾아 떠날 뿐이니 / 스스로 다가오는 삶에 숙명의 고리를 달아보아라 / 만나고 부딪치고 주고받고 알아가는 마음은 / 잃어버린 보속을 찾는 것만큼이나 기쁘다" (삶에 숙명의 고리를 달아보라)
자아가 객체가 되고 타자가 자아가 되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시인은 이제 구름을 베고 자다, 꿈속에서 구르다 새벽을 맞고, 기온이 뚝 떨어지니 옷 채비에 바쁘다. "자아의 타자"의 정점(still point)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역기능이 순기능을 바꿀 수 있는 사회일지라도, 세상을 고추 세울 수 있는 것은 진리라고 엄숙한 목소리를 내놓는다.
"세상을 곧추세울 수 있는 / 유일한 것은 진리이다 / 진정한 삶의 원동력은 / 살아 있는 현실세계를 / 움직이는 인간들이고 / 그 세인들 속에 있는 모순덩어리를 / 다듬고 치유해 나가는 것은 / 진정한 진리 속에 숨은 참뜻이다"(세상을 곧추세울 수 있는 것은 진리이다), "생각의 올곧은 피를 목구멍으로 / 토해내려 해도 쉽지 않은 일 / 밤마다 가슴팍에 하늘의 별을 따다 심는다 해도 / 별이 비추이며 가득 번적이는 것은 / 쉽지 않은 일이야 / 명상의 공간 속에 형용할 수 없는 / 감동의 사랑으로 빚은 그런 것이 있다면 / 가능할지도 모르지" (별이 반짝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야)
까만 안경을 쓰면 까맣고, 노란 안경을 쓰면 노랗고, 붉은 안경을 쓰면 붉게 보이고, 붕어빵 속에 콩나물이 있다 하여도 우연이라는 뜻밖의 결과를 얻는 세상 속에서, 지나온 것은 무(無)의 형상 같은 것이며, 사무침이 기왓장같이 겹겹이 쌓여 말이 없고, 남은 것은 현재 그대로의 현상일 뿐, 구부러진 길을 뒤로하고 슬픈 사연일랑 인생길에 뿌리지 말고, 세월의 책받침이 되고자 했던 시인은, 생의 바다에 인생의 시계를 던져버린다. 생각은 사상이 되어 흐르고, 사랑은 미소가 되어 평안해지며, 흰색의 모눈종이 위에 빨간 동백꽃을 심고, 이쯤 하면 멋들어진 세상을 그린 것과 같으니, 아쉽지만 둘둘 말아서 다가오는 시간 속에 넣어두기로 한다. (모눈종이 위에 생을 스케치하다)
생은 한 줄기 바람처럼 왔다가 피고 지는 허무한 꽃송이 같은 것이지만, 하지만 그 순간 그때가 행복한 삶의 무지갯빛이고, 영원의 길을 떠나는 인생의 나루터에서 점점이 이어지는 삶이었지만 "나의 기록이 있는 그 시절이 아름다웠다"고, 묘비명 같은 시인의 삶 전체의 수채화에, 수자직의 언어로 덧칠을 하고 있다.
5. 사랑, 50대 중년의 처절한 몸짓 언어
책 속에는 종이 위에 검은 글씨가 있고, 문자화된 활자 옆에는 자간이나 행간, 그리고 각주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 언뜻 보기에 백지 위에는 글씨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심축으로 으쓱대는 검은 활자보다 기죽어 숨어 있는 가장자리가 더 중요하다. 이 가장자리의 여백이 고향 집의 뒷동산과 앞마을에 흐르는 실개천처럼, 나이가 먹을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현존의 질서일 수 있다. 그러나 고향은 뒷동산과 실개천은 언제나 있어 온 그 자체대로 있어 온 현존은 아니다. 그것들은 이곳저곳 움직이는 동안에 다른 것들과 무수한 접목을 시도하였거나, 또 다른 것이 그것들에게 보충대리 되어 왔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뒷산의 소나무 언덕이나 앞개울에서 유영하고 있는 물고기는 언제나 무의식적으로 순수한 흔적으로 남아있다. 마찬가지로 시인에게 불변의 진리처럼 남아 흰 여백을 아름답게 채우고 있는 것은 처절한 몸짓 언어로 쓰고 있는 사랑이다.
"진실로 예쁜 솜사탕 같은 것을 / 끝내 표현하지 못한 채 / 나는 진실로 속살 고운 / 사랑으로 살고 싶네 / 나는 배추속 같은 진실덩어리만 / 말하려 하지만 / 당신이 나를 마음속 깊이 심긴 / 뿌리 깊은 나무로 인식할 때 / 나의 사실 속의 알갱이 땅콩 같은 / 속내를 알아주시오 / 딸기 아이스크림 / 맛이 기가 막힙니다." (당신이 나를 나무로 인식할 때)
젊어서 사랑할 땐 물 만난 시인처럼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는데, 이제는 그런 감정의 우산을 펼쳐 보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이제 시인은 50대 중반, 자아의식의 이상주의에 사로잡혀 선뜻 연가(戀歌)를 얘기하지 못한다. 에로틱한 욕망과 아가페적 욕망이 각각 상대편 욕망에 대한 이미지가 되어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승화된다.
"사랑이란 선으로 그을 수 없는 것 / 차디찬 감정으로 대응할 수 없는 / 온기류와 난기류 같은 / 불연속성의 완충지대 같은 것 / 사랑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 그것은 오로지 신뿐이다" (사랑이란 선으로 그을 수 없는 것), "사랑은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 가슴을 적시어 주고 / 사라지는 존재 같은 것 / 사랑은 사라져 흩어지지만 / 영원히 있어야만 될 / 빛과 같이 소중하고 / 보배로운 것" (사랑이란)
딱딱한 자의식에 폐쇄되어 관조하는 현상적 자아는, 막연히 본능적인 타자 속의 자아를 인식할 뿐이다. 본능적으로 혈기왕성했던 젊은 시절의 사랑을 찾아 떠나려 할 때, 무의식적으로 타자 속의 자아가 속삭인다. 풀섶에 피는 야생화가 가지 말라고 주저앉으며, 사랑은 이미 우리 안에 와 있다고 속삭인다. 자폐의 늪에 빠져있는, 현대인이 처한 50대 중반의 전형적인 무기력한 타자 속의 자아이다.
"헤라클레스의 인대처럼 드러난 핏줄이 / 그녀를 향해 / 소리치며 끓어오를 때 / 숨 막혀 말 못하고 헛기침만 하네" (사랑은 돌과 같이), "사랑을 찾아 떠나려 할 때 / 풀섶에 피는 콩알만한 야생화가 가지 마라 한다 / 사랑은 이미 우리 안에 와 있다는 것을 / 나는 알지 못하였다" (사랑은 생명같은 것), "아카시아 흰 꽃보다 고운 당신은 / 동백꽃 찾아 떠났지 / 동백꽃 붉디붉은 속살이 / 바로 떠나간 당신이었다는 것을 / 나는 알지 못하였다" (동백꽃 당신), "너의 생각을 내가 모르고 / 나의 생각을 네가 모르니 /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나는 / 많은 이들의 고결한 생각을 / 존중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너의 생각을 내가 모르니)
하지만 시인의 회색빛 얼룩진 시간 속에서도, 사랑은 고향의 뒷동산과 앞마을의 실개천처럼 변하지 않는, 시공을 초월한 하얀 여백 위에 드리워져 있는 새벽안개와 같이 끝없이 유혹한다. 내적 자아의 끈이 하늘거리며 이채롭게 다가오는 밤이면 어김없이 서정의 목도리를 두르고, 갓 벗겨낸 생선비늘 같은 까칠한 거리에서, 필연적으로 감각적 대상을 찾아 욕망의 불을 지피고, 다시 한 번 열정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현존적 자기향유나 자기의 분열은 하나의 환상이며, 사랑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심적 생명의 현존적 징검다리이다. 요동치는 서로의 눈빛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초인적 우주의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에 몰두하는 / 자가증상 중의 하나는 / 몰입하는 것이다 / 두부 네모 같은 사랑이라도 / 분명 사랑은 사랑이다 / 그 사랑을 위해서는 나는 / 오늘도 기도한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당신이 나를 어떻게 / 생각하시는지 / 서로의 오차범위는 / 얼마나 되려는지 / 오뉴월 수박 속같이 / 안타깝기만 합니다 / 당신의 생각을 / 정리해 보내주세요 / 당신의 당차고 용기 있는 /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그리움이 내 마음에 도사리고), "동행의 그림자만 밟아도 / 좋을 텐데요 / 혼자 지내는 여름밤이 / 너무 길게만 느껴집니다 / 하늘의 뜻을 기다리겠어요" (언제나 혼자였습니다)
시인은 사랑의 눈을 뜨면 시가 쓰인다고 했다. 애타게 그리는 심정이 생선 젓갈같이 삭혀지고, 사랑의 감정이 오면 절망이 희망이 되는 개안수술 같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생은 한편의 위대한 사랑의 연가(戀歌)이다. 사랑 노래는 생명의 흔적이고 타자를 통한 자아의 소우주를 창조하는 지고(至高)한 정점이다. 앞으로도 인생의 가장자리의 여백을 처절한 몸짓언어로 아름답게 채워주길 고대한다.
6. 맺으며
문웅 시인의 시는 일러스트레이터답게 잘 짜인 화폭에 질서정연하게 놓인 언어와 이미지의 결합이 특징이다. 또한 철학이나 문학을 전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씨줄과 날줄로 연결되어 있고, 텍스트의 여백에는 순백의 감성으로 가득 찬 낭만주의의 다발들이, 타자들의 의식의 흐름을 집요하게 유혹하고 있다.
1권 생명편에서는, 첫 번째 시집에서는 희미하게 존재하던 구원의 목소리가 확신에 찬, 구도(求道)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확실한 구심점인 하나님(God)이 서양철학의 중심축인 이데아(Idea)처럼 존재하고 있다. 밀턴(Milton)이 실낙원(Paradise Lost)을, 엘리어트(T. S. Eliot)가 성경을 해체하여 성회 수요일(Ash Wednesday)을 구축한 것처럼, 언젠가는 문웅 시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가 주인공인 불후의 명작을 기대해 본다.
또한 언어의 새로운 발견을 통한 옛것과 새것의 합일(合一)을 위한 시도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물론 억지로 짜 맞춘다는 느낌이 들 수 있으나, 한 시대의, 한 지역의, 언어를 끊임없이 연구하여 시어로 엮는다는 것은 중요한 시도라고 여겨진다.
두 번째로 문웅 시에는 자연과 인간이 자연스럽게 다발로 합일이 되어 나란히 존재하고 있다. 다발 속에 있는 인간과 자연은 그 자체의 얽힘과 구성화를 존중한다. 전체성의 울타리 안에 다발로 흩어져 있는 시인의 삶과 자연의 모습을 보며, 독자들은 별이 흐르는 강가에서 별과 함께 목욕하는 의식의 흐름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세 번째로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객관화하여, 자기초월적 경험을 객관적 상관물로 보편화하고 있다. 마치 표본실의 청개구리처럼 자아의 인식까지도 철저히 해부하여, 인생을 마치 햇빛 조각을 한 쪽 두 쪽 투과하는 것처럼 객관화하고 있다. 자아의 본성을 흔들어 허탈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리운 당신을 객관화하여 현실의 거울에 비추어 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자아와 타자의 객관화를 통하여, 현대인의 복잡한 의식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네 번째로 젊은 시절에는 텍스트에는 종이 위에 검은 글씨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백지 위에는 중심축에 서 있는 활자 외에도 여백이 있다는 것을 터득했다. 이 가장자리의 여백이 고향집의 뒷동산과 실개천처럼, 문웅 시에는 50대 중년의 애잔한 사랑의 언어로 채워져 있다. 어찌 보면 자의식에 사로잡혀 관조적인 사랑만을 노래할 수 있으나, 사랑의 감정이 있는 한, 갓 벗겨낸 생선비늘같이 까칠한 거리에 서서, 서정의 목도리를 두르고, 그 사랑을 위하여 시인은 오늘도 기도를 한다. 인생은 한편의 위대한 사랑 노래이다. 앞으로도 문웅 시인의 끊임없는 노력과 인고의 세월 속에 엮은, 수자직 일곱 빛깔의 언어들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엮어줄 그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목차
목차
축사 _ 원팔연 (전주 바울교회 담임목사)
축사 _ 문웅 교수님의 두 번째 시집 발간을 축하합니다 _ 이호인 (전주대학교 총장)
축사 _ 조영철 (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축사 _ 생명의 기도에 바쳐진 자아성찰의 간절한 사랑노래 _ 이명용 (시인. 용인대학교 영문과 교수)
프롤로그 _ 나의 시, 창작에 대하여
1. 나의 시 탄생의 배경
2. 나의 시 세계
3. 시 쓰기와 나의 삶
제1권 [생명편]
1부 의미의 삶
2부 생명의 기도
3부 자아의 속성
에필로그 _ 생명의 의미와 자아의 삶에 대한 숙고 _ 이상옥 (전주대학교 교수)
갤러리 _ 이미지 없는 세계의 내면
저자
저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대학 시각디자인학과 졸업
한양대학교 대학원 응용미술학과 졸업(시각디자인 전공)
전북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수학)
개인전 6회, 단체전 및 국내외 초대전 120여 회
2013 soki 초대작가상 수상
한국일러스트아트학회 상임위원, soki 국제 일러스트전 운영위원, 국제디자인트랜드대전 심사위원
(현) 한국일러스트아트협회 감사, 한국 디자인트랜드협회 이사, 한국 디자이너협회 이사
전주 바울교회 집사, 전주대학교 디자인학부 시각디자인전공 교수
첫 번째 시집 [현실 속의 벽은 높고 존재의 아픔은 희망을 품다] 2008년에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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