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두리콧두리 넋두리
네 번째 산문집
성낙수 네 번째 산문집 [밑두리 콧두리 넋두리]. 이 산문집은 저자의 삶에서 일어난 일, 생각했던 일 등과 여기저기 발표한 것들을 모아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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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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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어쭙잖게 말한다면, 고단하지만 신나는 삶이었다. 그러나 한 마디로 뭐라고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으로 정리해 보니, '배우며 가르치며 생각하며' 살아온 셈이었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것이 많아, 산문집을 낸 일이 세 번이나 있었다. 그것은 그냥 내 삶에서 일어난 일, 생각했던 일 등을 묶어 놓은 잡동사니였다. 그 뒤로 또 여기저기 발표한 것들을 모아 '네 번째 산문집'이라고 묶어 보았다.
정년을 앞에 두고 보니, 벌써 남들을 가르친 세월이 44년이나 된다. 그중 7년은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나머지 37년은 세 곳의 대학교에서 전임으로 강의를 하였다. 그러고 보면 아주 긴 시간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남을 가르쳤다기보다는 배운 것이 더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배우는 것은 끝도 한도 없기 때문이다.
나를 만났거나 나에게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나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이도 있을 수 있고, 나쁜 사람으로 인식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를 기억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칠 정도로 고마운 일이다.
고마운 분들에게 무엇인가를 드리고 싶다. 그러나 다 만나기도 어렵고, 다 드리기도 어렵다. 글이 좋은 점은, 누구나 쉽게 구해서 읽을 수 있고, 그 글에서 쓴 사람의 인품, 감정, 정서 이런 것들을 알 수 있어서다. 나는 그것을 드리고 싶었다.
고민 끝에 글이 발표된 원전을 밝히지 않기로 했다. 순서도 그렇고 내용의 분류도 어려워서다. 그냥 뒤죽박죽 그렇게 만들어 보았다. 독자들의 해량이 있으시기를 빈다.
이 책이 나올 수 있게 좋은 지면을 만들어 주신 여러 문학지, 학술지 발행인, 편집인들, 그리고 각 신문사 사장님, 칼럼 담당자분들께 감사드리며, 이 책의 출판을 허락해 주신 한국문화사 사장님, 사원들께도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2015. 1.
동암서실에서 성낙수 씀
책속으로 추가
그 뒤로 대학은 군대와 똑같이 되어, 정문에서 군인들이 무장한 채로 지키고 있었고, 출입증이 있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나야 한국어학당 강사 신분으로 출입을 할 수 있었지만, 들고날 때마다 군인들이 검사를 해대니,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 그 군인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연세대는 수도사단에서 점령하고 있었는데, 별 하나짜리가 지휘를 한 것으로 보아, 연대 이상의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셈이다. 다른 부대의 대위가 학교로 들어가려다가, 위병소에서 이 부대의 대위한테 얻어 맞는 것을 보고, 그 센 세력을 알 수 있었다.
뒤에 들으니, 서대문 경찰서에 끌려간 학생들은 경찰서 뒷마당에 앉혀 놓았는데, 신문사 기자들이 와서, "우리같은 선배들이 잘못 해서 너희들이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하며 울부짖더라는 말을 듣고, "그래도 양심있는 이들도 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럴 때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하여, 온갖 비굴하고 비열한 짓을 다 저지르는 게 상례기 때문이다.
요즘 1980년대 초반에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쳤던, 전직 경찰관의 이야기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그의 악행을 받은 이가 돌아가시거나, 고발적인 글을 써서 급기야 목사안수까지 취소되었다고 한다. 그가 목사를 받은 이유나 과정은 잘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교화시키는 종교 지도자가 되었다는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그의 그러한 기술은 아마도 유신시절에 갈고 닦았을 것임이 분명한데, 유신 시절에 당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지금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대학교에서 학생회 간부로 있었던 사람이 나중에 모교에 와서 정보원 노릇을 한 이도 많았는데, 그들이 어떤 경로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다 모르겠지만, 그들이 학교 사정을 잘 알고, 정보도 많아서 그런 것이라 해도, 참 부끄러운 행태라 할 것이다. 내가 들은 바로는 학생회 간부들이 시위 등의 문제로 잡혀가면, 물론 협박과 폭력이 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저녁에는 일급 호텔에 넣어주고는 아주 예쁜 여인들이 들어오기도 했다는데, 그렇게 해서 한 번 약점을 잡히면, 아마도 다음에 정보 기관의 회유를 받아들이지 않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것은 '이열치열(以熱治熱)', 혹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법이라 할 만하다.
이렇게 학생들을 잡아놓고는 독재자는 유신헌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긴급조친가 뭔가 하는 것을 연달아 선포하였다. 우리들은 말만 대학원생이지, 학기마다 조기 방학, 휴업령, 휴교령을 내려, 별로 공부할 일은 없고, 밤에는 술을 마시는 게 주요한 일과였다. 다행히 강사료라는 것이 있어, 몇 달 치를 가불해다가 마셔도, 항상 돈이 모자랐다.
1973년에 석사를 마치고, 취업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데, 힘없고 백없는 나같은 사람은 좀처럼 교수가 될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 전에 모교에서 교양강의라도 맡아야 경력을 쌓을 텐데, 그런 기회를 갖는 것도 어려웠다. 물론 그런 이면에는 학교 내의 내분도 작용했지만, 해마다 정책이 바뀌는 등 사회?국가적 상황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석사를 갓 받고 교수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게 관례였다. 어떤 이들은 백으로 쉽게 석사학위를 가지고도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대학들이 많지 않고, 교수 정원도 적어서, 취업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그래도 1973년에는 지도교수님이 있는 모 대학의 설립자에게 전임교수를 부탁해서 갈 뻔도 했으나, 선배 한 분이 이미 학과의 절차를 밟고 있어서 양보하였다.
1974년에는 모 대학에서 사람까지 보내서 전임으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경력이 모자라므로 유급조교를 하면서 강의를 맡으라고 했다. 당시 국립대학에는 유급조교도 강의를 할 수 있었다. 나는 그 해에 박사과정을 들어가서 공부를 계속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강의 내용이 이상해서 불평을 했더니, 그 말이 어떻게 힘있는 분에게 들어가서 일이 무산되고, 나는 다시 한국어학당으로 돌아왔다. 나는 가정사정이 어려워져서 돈을 벌어야 할 입장이었으므로, 빨리 교수가 되어야 했지만,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우리 지도교수님은 같은 직장의 학감이셔서 수업이 없는 오후에는 나를 불러다가 바둑을 두시고는, 저녁에는 술을 사주셨다. 그때의 그분의 심중을 꿰뚫어 보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1976년에 유신정권에 의하여 강행된 '제1차 교수 재임용 제도'로 쫓겨난 5인방 중에 우리 지도교수님이 끼어있었다. 그분이 미국에 망명하셔서 정보부원한테 들은 바로는 문제 학생들을 도와 주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분은 신념이 있어서, 정부에 의하여 제적 당한 학생들을 외국어학당(한국어학당 부설 기관)에 입학하도록 했는데, 사정기관에서는 "왜 제적 당한 학생들을 교내에 있게 하느냐? 나가게 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이 기관의 입학?졸업에 관한 사항은 나의 소관이니 간섭하지 말라."고 하는 등 말을 듣지 않았는데, 그런 일들이 반정부 인사로 찍히게 된 요인이었더라는 것이다.
지도교수님까지 미국으로 망명하시고, 물론 다른 선생님이 지도교수를 맡아주셨지만, 의기소침하게 살아가는 내가 안 되었던지, 몇 분이 노력해서 1977년 3월부터 두, 세 대학의 강의를 맡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1977년 3월에 덜컥 영장이 나오고 말았다. 나는 2대 독자라는 특이한 신분으로 군대의 면제 대상자였으므로, 학부 동안에도 선친께서 노력하셔서 계속 신체검사를 미루다가, 나중에 마지못해 했는데, 더 이상 입영연기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척 억울하였다. 차라리 현역 입영대상자라면, 아예 군대를 갔다 오는 게 순리인데, 면제 대상자여서 맨날 미필자였으므로, 항상 민방위 대상자로 정기 훈련, 비상 훈련을 받으면서, 온갖 굴욕과 고통을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직장이 있다면, 직장 단위로 편입되는데, 나는 학생신분이었으므로, 지역 민방위에 소속되었다. 게다가 비상 훈련은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아, 몇 배의 훈련을 더 받아야 하고, 어떤 때에는 근로 작업에 동원되어, 피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방위병으로 입대하지 않으려고, 또 연기를 거듭하다가, 급기야는 병역부에 더 기입할 난이 없어 영장을 낸 것이라 한다. 나는 본적지로 해서 조치원에 있는 32사단의 훈련소에 입영했는데, 1,000여 명의 훈련병 중 2번째 연장자였으며, 학력도 제일 높았다.
덕분에 조금 고문관 대우를 받았고, 고학력이라는 신분 때문에 장교들의 방송대학 레포트를 써주기도 하고, 서류를 작성하기도 하는 등 열외를 많이 받았다. 나는 들은 바가 있어, 영외 훈련에 나갈 때 편지를 써가지고, 길에서 장에 가는 아저씨에게 부쳐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내용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나를 서울로 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강의를 모처럼 맡았는데 이것을 잇지 못하면, 교수가 되려던 나의 꿈은 물거품이 되겠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3주의 훈련이 끝나고 자대배치를 하는데, 나만 서울로 발령이 났다. 나중에 들으니, 우리 선친이 그 편지를 보고, 면사무소 병사계에게 도움을 받고, 어찌어찌 연결이 되어, 32사단의 방위병 인사과장에게 부탁을 해서, 서울로 올라가게 해주신 것이었다.
서울에 오기는 했으나, 수색에 있는 60사단이라는 곳에는 아는 이도 없고, 잘해 보아야 동사무소에 배치가 될 텐데, 전혀 대책이 서지 않았다. 어쨌거나 2~3일 후 사단에 부임 보고를 하러 들어갔다. 사단 인사과에다가 서류를 넣으니, 방위병들이 "000님의 선배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는 연세대의 상경대학 졸업생으로 나보다 5년인가 후배로서, 그 사단 방위병들의 인사를 담당하고 있는 최고참병이었다. 그는 아주 친절한 표정으로 나의 신상에 대하여 묻고, 가고 싶은 곳을 말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강의를 하다가 왔으므로, 야간 근무를 하면 좋겠다고 했더니, 마침 휘하 부대에 '한강 안전 관리대'라는 곳이 있는데, 한 자리가 비었다는 것이었다. 인사과장에게 약간의 사례비를 주면, 갈 수 있다고 하니 구세주를 만난 격이었다. 그 사람은 후에 한 번 더 만났는데, 아동들을 위한 사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틀림없이 어떤 사업을 했든 성공을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발령장을 받고 서대문에 있는 지단을 가니, 어떻게 이런 특과에 배치되었는가 놀라움을 금치들 못하고, 사단에서 배치했다니, 대우가 달라졌다. 그로써 나는 제2한강교, 지금의 양화대교에 있던 '한강안전관리대'에서 경비병으로 근무하였다. 이곳은 서울시에서 관할하는 곳으로 유사시에 물자를 나르고, 피난민을 수송하는 의무를 지닌 곳이며, 동작동과 뚝섬 이렇게 세 곳이 있었는데, 훈련할 때는 국무총리가 와서 참관하는 것을 보면, 아주 중요한 부대였다. 그곳에는 바지선이 몇 척 있었고, 평시에는 일반병들이 낮에 그 배들을 관리, 청소 등을 하고, 밤에만 경비를 맞는 역을 하는 사람들이 네, 댓 명 정도 있었다. 하루 근무를 하면 1.5일로 계산하고, 낮에는 자기 볼일을 볼 수 있어 그래서 특과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보다 늦게 온 이는 다른 부대에 있다가, 별 2개짜리 백으로 왔다고 하는 것을 보니, 보통 자리는 아니었다.
나는 거기에 8개월을 근무하여, 청주여자사범대학, 적십자 간호전문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머리를 박박 깎고 빵모자를 쓰고 강의를 했지만, 덕분에 다음 해에 무난히 교수가 될 수 있었으니, 역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다 한 후에야 길이 열린다는 것을 알았다.
한 마디로 1970년대는 젊은이로서 겪어야 될 갖은 영욕의 경험을 하였다. 대학원 석사?박사 과정을 다녔고, 그러다 보니 시골의 가산은 다 고리채의 이자로 탕진되었다. 선친은 어떻게 내가 대학만 나오고 취직이 되면, 빚을 갚아 주리라고 믿으셔서, 땅을 팔지 않고 여기저기서 빚을 얻어 쓰셨다. 그때는 은행에서 돈을 빌려주지도 않고, 장리쌀이라는 옛방식이 있었는데, 봄에 쌀 한 가마를 차입하면, 가을에 1.5배를 갚는 것이니, 거의 일 년에 곱배기 이자를 갚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돈을 빌리니 빚은 기하급수식으로 불어났다. 선친은 돈이 있는 사람에게는 별별 아쉬운 소리를 다해서 빌리고 본금과 이자를 갚았지만, 나중에는 돈을 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빌려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급기야 선친은 종중일로 조금씩 모아둔 공금을 빌려쓰고, 나중에 계산을 하여 땅으로 내놓으셨다. 그 땅들은 나중에 땅값이 올라 종중에 큰돈을 만들어 주었다.
선친은 내가 교수가 된 뒤에도 아무런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나를 결혼시키시고, 청주에 조그만 아파트를 사주어 살게 해주셨다. 그리고 10년 후 이제 빚에서 해방되어 편하게 사실만 하니 몹쓸 병에 걸리시어, 63세의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 하셨다. 그래도 선친이 남겨주신 재산으로 나중에 고속도로가 날 때 적지 않은 보상을 받을 수 있었고, 지금도 어머니께서 사시는 집과 뒷산을 남기게 되었으니, 정말 선친의 은혜는 하해와 같다. 선친의 친구들은 지금도 "그 사람은 고생만 하고 아들 자랑도 못한 채 가서 안타깝다."고들 하신다.
술이나 마시고 세월을 보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자문해 보기도 하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 당시 직장에 다녔다면 평범한 한 소시민으로서 살아갈 수는 있었겠지만, 항상 불만족스런 인생을 보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당시 내 그런 생활은 저 중국의 강태공이 그랬듯이 먼 훗날을 기약하기 위한 준비기간이나 아니었을까 한다.
목차
목차
제1편
교직 생활 44년 -배우며, 가르치며, 생각하며-
1. 대학입학부터 교수가 되기까지
2. 청주여자사범대학 전임강사로 취업
3. 동덕여자대학 교수 시절
4. 한국교원대학교 설립요원으로 발탁
5. 신문사 창립
6. 전 대통령의 내교
7. 첫 외유
8. 국어교육과 학술답사 정착
9. 답사의 명암
10. 박종철 사망 사건
11. 총장 취임 거부 사태
12. 파리 7대학 객원교수 시절
13. 국립 사대 우선 임용 위헌 판결
14. 수정아파트 사건
15. 학생 정원 축소 사건
16. 도서관장 시절
17. 교수들의 문제
18. 교무처장 시절
19. 학장과 총장 출마
20. 북경 중앙민족대학 객원교수
21. 다양한 동료 교수들
22. 사은회의 변화
23. 청람어문교육학회
24. 여러 학회와의 인연
25. 외솔회 회장
26. 각 대학의 강사 경험
27. 교수가 되어서 이룬 세 가지 일
28. 맺는 말
제2편
살 만한 세상
새해의 소망
'교양국어'가 그립다
'상'에 관한 소회
'아지'와의 이별
6월의 추억
개성 유감
골프 입문기
골프 타령
막장 드라마 그 후
붕어의 추억
사라진 고향, 그리고 남은 것
사람이 늙어간다는 것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죽음에 대하여
설을 쇠며
소의 수난
스산한 봄
신의 소리.사람의 말
한여름을 보내며
한 해를 마감하며
제3편
우리말.우리겨레
또다시 한글날을 맞으며
한글날을 맞으며
한글날에 부쳐
566돌 <한글날>에 부쳐
몽골에서의 한국어
세모꼴과 삼각형
왜 우리말.우리글을 홀대하는가
우리말.글에 대한 생각
우리 문화를 누가 지키랴
우리말.우리글을 지키자
'한글 공정'-소가 웃을 일
'한글 전용 정책'이 위헌이라니
'광화문' 현판을 다시 만들자
우리 민족은 위대하다
우리말.우리겨레
현대시와 수필의 만남
농경민족의 단합
청소년들의 말글살이
제4편
시간.공간
6월의 단상
교권의 위기
국민들의 현명한 판단
독도와 대마도
다시 찾아온 대학입시철
배신의 세월
어쩌다가 이런 일이 또
연평도 피격을 보고
불신의 사회
선거 유감
성숙한 사회를 꿈꾸며
소들의 죽음
스승의 날에 부쳐
시간강사
또다시 몽골을 다녀와서
호치민시를 다녀와서
또다시 호치민을 다녀와서
그들의 명복을 빌면서
기막힌 일
논문 표절에 대한 소고
대중매체의 역할
도덕 불감증
마로니에 생각
공포와 위안
아! 또 이런 일이
예절의 달에 부쳐
올림픽이 열렸다
우리 땅은 우리가 지킨다
웅녀(熊女)의 후예들
이 시대의 한 스승상
이상한 나라
운석 단상
정의로운 사회
'짜가'의 세상
캄보디아의 얼굴
편안한 나라를 꿈꾸며
누구가 우리를 지켜주랴?
대나무의 덕목
성악설이 맞는가?
새해 원단의 단상
내 고향과 교황
교황의 가르침
제5편
만남.추억
내 어머니
나의 스승님
내가 아는 만우 선생님
청하 선생과의 백두산 등정기
성 선생님의 선행
성기조 박사님과의 추억
외솔을 기리며
최 교수님의 사랑
이종국 형과의 인연
최석규 선생님과의 추억
나에게 감명을 준 정완호 총장님
제6편
대학.지성
개교기념일, 대학의 설립특성 반영한 것
창간 12주년을 축하하며
독서 위주의 교육
질적으로 우수한 대학
85년 다락리, 15년 전의 회상
특별한 날이 많은 달
교육 환경 문제
대학신문, 여론의 불씨가 되어야
급변하는 시대의 대학 신문
한국교원대학교신문 182호를 읽고
성폭력 문제
복수전공에 관한 문제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데
저자
저자
1947. 2. 13.: 충남 당진에서 출생
1954~1966.:성당초등학교, 당진중학교, 공주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졸업
1971~1983.:연세대학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 받음
1978~1985.:청주(여자)사범대학, 동덕여자대학 교수 역임.
1985~현재: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파리 제7대학, 북경 중앙민족대학 객원교수 역임
청람어문교육학학회 회장, 한국문법교육학회 회장 역임.
현재: (재)외솔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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