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
히틀러에 대한 유일한 내부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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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은 자기 반성인가, 그저 변명인가?
히틀러의 건축가이자 군수장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가 쓴 히틀러에 관한 내밀한 묘사인 동시에 자기변명인 회고록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 알베르트 슈페어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나치 각료 중 유일하게 교수형을 면한 히틀러의 핵심세력인물이다. 나치 전범 중 유일하게 '정상적 인물'이면서 동시에 몇 안되는 지식인이었던 저자는 히틀러의 건축적 욕망을 채워주는 건축가였고 과대망상에 가까운 규모와 연출을 실현해주는 기술자 역할을 했다. 이처럼 슈페어는 수감자들의 인권을 짓밟은 사람이었지만 전쟁 막바지에는 히틀러에 맞서 문화유산과 산업 시설을 보호하는 데 앞장 서기도 했다.
다른 1급 전범들과 함께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의 법정에 선 슈페어는 제3제국의 지도부 공동의 책임을 주장했다. 이처럼 자기반성과 자기변호를 하는 태도로 검사와 판사들로부터 '선량한 나치'라고까지 불렸고 마침내 나치 각료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물이 되었다. 재판에서 살아남은 슈페어는 회고록의 원고를 1953년부터 작성하기 시작해 1966년 10월 슈판다우 형무소에서 출소한 후 마무리졌다. 완성된 회고록인 《기억 》은 매 쪽마다 그동안 아무도 알 수 없었던 에피소드와 사건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 책을 통해 회고록이 지식인으로서 과오를 반성하는 것인지 변명인지 살펴볼 기회는 독자의 몫으로 남았다.
▶이 책은 2007년 출간된 『기억: 제3제국의 중심에서』의 개정판입니다.
히틀러의 건축가이자 군수장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가 쓴 히틀러에 관한 내밀한 묘사인 동시에 자기변명인 회고록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 알베르트 슈페어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나치 각료 중 유일하게 교수형을 면한 히틀러의 핵심세력인물이다. 나치 전범 중 유일하게 '정상적 인물'이면서 동시에 몇 안되는 지식인이었던 저자는 히틀러의 건축적 욕망을 채워주는 건축가였고 과대망상에 가까운 규모와 연출을 실현해주는 기술자 역할을 했다. 이처럼 슈페어는 수감자들의 인권을 짓밟은 사람이었지만 전쟁 막바지에는 히틀러에 맞서 문화유산과 산업 시설을 보호하는 데 앞장 서기도 했다.
다른 1급 전범들과 함께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의 법정에 선 슈페어는 제3제국의 지도부 공동의 책임을 주장했다. 이처럼 자기반성과 자기변호를 하는 태도로 검사와 판사들로부터 '선량한 나치'라고까지 불렸고 마침내 나치 각료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물이 되었다. 재판에서 살아남은 슈페어는 회고록의 원고를 1953년부터 작성하기 시작해 1966년 10월 슈판다우 형무소에서 출소한 후 마무리졌다. 완성된 회고록인 《기억 》은 매 쪽마다 그동안 아무도 알 수 없었던 에피소드와 사건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 책을 통해 회고록이 지식인으로서 과오를 반성하는 것인지 변명인지 살펴볼 기회는 독자의 몫으로 남았다.
▶이 책은 2007년 출간된 『기억: 제3제국의 중심에서』의 개정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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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저자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의 건축가이자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 전쟁 물자 생산을 총괄한 군수장관이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나치 각료 중 유일하게 교수형을 면해 20년 형을 선고받은 슈페어는 2만 2,000여 건의 문서를 바탕으로 회고록 『기억』을 완성했다. 이 책은 "히틀러에 관한 가장 내밀한 묘사" 또는 "세상에서 가장 두꺼운 자기변명"이라는 평을 받으며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있다.
※ 이 책은 2007년 출간된 『기억: 제3제국의 중심에서』의 개정판입니다.
"히틀러에게 친구가 있었다면, 바로 나일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 알베르트 슈페어는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을 장악했던 제3제국(1933~45)의 핵심 세력 가운데 비교적 덜 알려진 인물이다.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 나치 친위대 창설자 하인리히 힘러, 게슈타포 창설자 헤르만 괴링 등이 히틀러의 최측근이자 제국의 실세로, '비인간적'이고 '비정상적'인 가해자로 수없이 언급되어왔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슈페어가 이들만큼 세간의 호기심을 끌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다. 그는 지극히 '정상적인' 인물이었고 얼마 되지 않은 지식인(괴벨스를 제외하면 거의 유일한)이었다. 그리고 히틀러의 건축가이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군수 물자 생산을 총괄한 군수장관이었으며, 무엇보다 그 스스로 고백하듯 "히틀러의 친구"였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읽지 않았지만, 히틀러의 사진을 생일선물로 받길 원했던 "친구" 말이다.
'예술가 정치인'을 사랑한 히틀러의 건축가로 제3제국에 입성
과대망상적 도시계획 이끌어
슈페어는 만하임의 전형적인 중산층 부르주아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아버지를 이어 건축가가 되길 희망한 슈페어는 뮌헨과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당시 독일 건축계를 주도한 건축가 하인리히 테세노의 조교를 하며 생계를 잇던 슈페어는 우연히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나치당에 가입한다. 나치의 강령에 찬동한 것도, 뚜렷한 정치적 신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 당시 수많은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단지 히틀러라는 사람의 매력에 빠져 나치당원이 된 것이다. 이후 슈페어는 뜻하지 않은 기회에 나치당 청사 공사에 참여했으며,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무대 장치를 맡아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다(146~147쪽 화보 참조). 이때 히틀러의 눈에 띄어 '히틀러의 건축가'로 자리매김한다. 히틀러와 괴벨스의 대중선동을 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장치를 만든 이가 바로 슈페어인 것이다.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건축가는 이때부터 줄곧 히틀러 곁에서 독일 제국의 도시계획을 관장한다.
히틀러는 총리 청사나 관저 설계도를 직접 그릴 정도로 건축에 열정을 쏟았다. 베를린 도시계획이나 뉘른베르크, 뮌헨 재건 계획에 세세하게 관여했고, 현장 시찰도 빠지지 않았다. 그 어떤 긴급한 사안보다 설계도 한 장을 들고 가는 것이 히틀러를 만나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을 정도였다. 슈페어는 히틀러의 건축적 욕망을 채워주는 건축가였고, 과대망상에 가까운 규모와 연출을 실현해주는 기술자였다.
최연소 군수장관으로 히틀러의 총애를 한 몸에
제국의 2인자로 올라서다
전쟁이 시작된 후에도 건축가 역할에 충실할 수 있었던 슈페어는 당시 군수장관이었던 토트 박사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뒤 군수장관에 임명되었다. 슈페어의 나이 서른일곱, 최연소 장관이었다. 군수장관은 전쟁 물자 생산과 운송을 총괄하는 요직이다. 군사 업무에는 문외한이었지만 산업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온 슈페어는 탁월한 업무 수행 능력을 보이며 다시 한 번 히틀러의 신임을 얻었다.
전쟁 통에도 제3제국 내 알력 다툼은 치열했다. 슈페어를 견제하던 인사들은 슈페어가 병으로 잠시 히틀러의 옆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입지를 깎아내리려 한마음으로 뭉쳤다. 실제로 히틀러는 눈에서 멀어진 인사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고, 때로 병환을 이유로 사람을 내치기도 했다. 위기의 순간마다 슈페어는 히틀러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히틀러의 반응을 보고 나서야 안도했다.
"격렬한 부침, 긴장과 분노가 지난 후, 그날 저녁 내 기분은 유쾌했다. 모든 염려와 갈등의 이유가 깨끗이 사라진 듯했다. 친밀함과 존중이 없이는 나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괴링과 힘러, 보어만과의 권력 투쟁에서 내가 승리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 나는 그를 추종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의 관심과 영광과 위대함을 내 주변으로 끌어 모으고 싶었다."(546쪽)
슈페어는 점령지의 강제수용소 노동력을 군수 생산에 동원하면서 수감자들의 인권을 짓밟았지만, 전쟁 막바지 패배를 직감한 히틀러가 독일을 연합군에게 넘겨주기보다는 독일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라고 지시한 '초토화 작전'에 맞서 문화유산과 산업 시설 보호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슈페어는 종전과 함께 연합군에 체포된다.
나치 각료 중 유일하게 교수형을 면한 '선량한 나치'
체포된 슈페어는 다른 1급 전범들과 함께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의 법정에 선다. 변명으로 일관하고 히틀러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 다른 피고인들과 달리, 슈페어는 제3제국의 지도부가 공동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기반성과 자기변호를 절묘하게 뒤섞은 슈페어의 태도는 검사와 판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피고 유형이었고, 심지어는 '선량한 나치'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군수장관으로서 슈페어는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을 군수 생산에 동원한 최종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강제수용소 노동력 동원의 실무 책임자 자우켈이 교수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슈페어는 20년 형을 언도받는다. 이로써 슈페어는 나치 각료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나치의 실상 혹은 일상
내부자의 살아 있는 증언
"이제 회고록을 쓰시겠군요?" 재판에서 살아남은 슈페어에게 누군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는 수감 첫 달부터 회고록의 초고라고 할 만한 글을 써내려갔고, 1953년부터는 체계적으로 원고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6년 10월 슈판다우 형무소에서 출소한 그의 손에는 2,200쪽 분량의 원고가 들려 있었다.
슈페어는 엄청난 메모광이었고, 각종 업무일지, 총통의사록, 편지, 전보 등 기밀문서에 접근할 수 있었던 군수장관이었다. 2만 2,000여 건에 달하는 문서를 바탕으로 쓴 이 책은 나치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반유대주의로만 이해되는 히틀러의 인종주의는 체계적인 사고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조야한 편견의 산물이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연거푸 금메달을 목에 건 흑인 육상 선수 제시 오언스를 두고 "정글 출신의 흑인은 미개하지만 체력은 문명화된 백인보다 강하"다고 하며 흑인과 시합을 벌이는 건 공정하지 못하다고 주장하거나(117쪽), 영국군의 체격을 조롱하는 장면(204쪽)에서 우스꽝스런 인종주의의 실체를 만나볼 수 있다. 한편 핵물리학을 유대인의 학문으로 치부하고 무시한 히틀러의 편견은 오히려 다행스럽다.
"히틀러에 관한 가장 내밀한 묘사"라는 『뉴욕타임스』의 평가대로 『기억』은 매 쪽마다 내부자가 아니고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에피소드와 사건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히틀러의 건강염려증과 사이비 의사에 대한 맹신, 기이한 식생활과 반려견에 대한 애정, 사치스러운 히틀러의 애인으로 알려진 에바 브라운의 속사정, 독특한 옷차림을 선호했던 괴링의 취향, 관료주의로 부패하고 있던 나치 정권의 이면 등이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또한 《작전명 발키리》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전모 역시 이 책에서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세상에서 가장 두꺼운 자기변명일까?
슈페어는 "나는 단지 과거를 기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에 경고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그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모든 책임을 히틀러에게 떠넘기는 동료들을 "수백만 마르크를 받는 우편배달부"라고 비난하며 "지도부의 집단 책임"을 인정한 유일한 피고인이었으며, 이 책 전반에 걸쳐 지식인으로서 비판적으로 사유할 책무를 잊었던 과오를 반성한다.
하지만 슈페어의 자기반성은 자기변명일 뿐이라는 비난은 여전하다. 단순히 그가 교수형을 면해 못마땅해서는 아닐 것이다. 슈페어는 나치 정권을 유지시키고 제2차 세계대전을 연장시킨 권력자였고, 동시에 철저히 나치당 당원으로서 활동한 괴벨스나 악의 고리 끝에서 명령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며 홀로코스트를 거리낌 없이 자행한 아이히만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는 지식인이었다. 그래서 그의 뒤늦은 반성과 참회가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슈페어는 목숨을 부지했고, 우리에게 제3제국의 속살을 살펴볼 기회를 남겼다. 모든 악이 폭발하고 남은 잔해더미 위에서 책임과 반성을 외친 그를 어떻게 판단할지, 선량한 나치로 기억할지 아니면 잔악한 전범으로 기억할지는 오롯이 독자의 몫일 것이다.
※ 이 책은 2007년 출간된 『기억: 제3제국의 중심에서』의 개정판입니다.
"히틀러에게 친구가 있었다면, 바로 나일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 알베르트 슈페어는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을 장악했던 제3제국(1933~45)의 핵심 세력 가운데 비교적 덜 알려진 인물이다.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 나치 친위대 창설자 하인리히 힘러, 게슈타포 창설자 헤르만 괴링 등이 히틀러의 최측근이자 제국의 실세로, '비인간적'이고 '비정상적'인 가해자로 수없이 언급되어왔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슈페어가 이들만큼 세간의 호기심을 끌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다. 그는 지극히 '정상적인' 인물이었고 얼마 되지 않은 지식인(괴벨스를 제외하면 거의 유일한)이었다. 그리고 히틀러의 건축가이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군수 물자 생산을 총괄한 군수장관이었으며, 무엇보다 그 스스로 고백하듯 "히틀러의 친구"였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읽지 않았지만, 히틀러의 사진을 생일선물로 받길 원했던 "친구" 말이다.
'예술가 정치인'을 사랑한 히틀러의 건축가로 제3제국에 입성
과대망상적 도시계획 이끌어
슈페어는 만하임의 전형적인 중산층 부르주아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아버지를 이어 건축가가 되길 희망한 슈페어는 뮌헨과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당시 독일 건축계를 주도한 건축가 하인리히 테세노의 조교를 하며 생계를 잇던 슈페어는 우연히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나치당에 가입한다. 나치의 강령에 찬동한 것도, 뚜렷한 정치적 신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 당시 수많은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단지 히틀러라는 사람의 매력에 빠져 나치당원이 된 것이다. 이후 슈페어는 뜻하지 않은 기회에 나치당 청사 공사에 참여했으며,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무대 장치를 맡아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다(146~147쪽 화보 참조). 이때 히틀러의 눈에 띄어 '히틀러의 건축가'로 자리매김한다. 히틀러와 괴벨스의 대중선동을 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장치를 만든 이가 바로 슈페어인 것이다.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건축가는 이때부터 줄곧 히틀러 곁에서 독일 제국의 도시계획을 관장한다.
히틀러는 총리 청사나 관저 설계도를 직접 그릴 정도로 건축에 열정을 쏟았다. 베를린 도시계획이나 뉘른베르크, 뮌헨 재건 계획에 세세하게 관여했고, 현장 시찰도 빠지지 않았다. 그 어떤 긴급한 사안보다 설계도 한 장을 들고 가는 것이 히틀러를 만나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을 정도였다. 슈페어는 히틀러의 건축적 욕망을 채워주는 건축가였고, 과대망상에 가까운 규모와 연출을 실현해주는 기술자였다.
최연소 군수장관으로 히틀러의 총애를 한 몸에
제국의 2인자로 올라서다
전쟁이 시작된 후에도 건축가 역할에 충실할 수 있었던 슈페어는 당시 군수장관이었던 토트 박사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뒤 군수장관에 임명되었다. 슈페어의 나이 서른일곱, 최연소 장관이었다. 군수장관은 전쟁 물자 생산과 운송을 총괄하는 요직이다. 군사 업무에는 문외한이었지만 산업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온 슈페어는 탁월한 업무 수행 능력을 보이며 다시 한 번 히틀러의 신임을 얻었다.
전쟁 통에도 제3제국 내 알력 다툼은 치열했다. 슈페어를 견제하던 인사들은 슈페어가 병으로 잠시 히틀러의 옆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입지를 깎아내리려 한마음으로 뭉쳤다. 실제로 히틀러는 눈에서 멀어진 인사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고, 때로 병환을 이유로 사람을 내치기도 했다. 위기의 순간마다 슈페어는 히틀러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히틀러의 반응을 보고 나서야 안도했다.
"격렬한 부침, 긴장과 분노가 지난 후, 그날 저녁 내 기분은 유쾌했다. 모든 염려와 갈등의 이유가 깨끗이 사라진 듯했다. 친밀함과 존중이 없이는 나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괴링과 힘러, 보어만과의 권력 투쟁에서 내가 승리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 나는 그를 추종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의 관심과 영광과 위대함을 내 주변으로 끌어 모으고 싶었다."(546쪽)
슈페어는 점령지의 강제수용소 노동력을 군수 생산에 동원하면서 수감자들의 인권을 짓밟았지만, 전쟁 막바지 패배를 직감한 히틀러가 독일을 연합군에게 넘겨주기보다는 독일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라고 지시한 '초토화 작전'에 맞서 문화유산과 산업 시설 보호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슈페어는 종전과 함께 연합군에 체포된다.
나치 각료 중 유일하게 교수형을 면한 '선량한 나치'
체포된 슈페어는 다른 1급 전범들과 함께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의 법정에 선다. 변명으로 일관하고 히틀러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 다른 피고인들과 달리, 슈페어는 제3제국의 지도부가 공동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기반성과 자기변호를 절묘하게 뒤섞은 슈페어의 태도는 검사와 판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피고 유형이었고, 심지어는 '선량한 나치'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군수장관으로서 슈페어는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을 군수 생산에 동원한 최종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강제수용소 노동력 동원의 실무 책임자 자우켈이 교수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슈페어는 20년 형을 언도받는다. 이로써 슈페어는 나치 각료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나치의 실상 혹은 일상
내부자의 살아 있는 증언
"이제 회고록을 쓰시겠군요?" 재판에서 살아남은 슈페어에게 누군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는 수감 첫 달부터 회고록의 초고라고 할 만한 글을 써내려갔고, 1953년부터는 체계적으로 원고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6년 10월 슈판다우 형무소에서 출소한 그의 손에는 2,200쪽 분량의 원고가 들려 있었다.
슈페어는 엄청난 메모광이었고, 각종 업무일지, 총통의사록, 편지, 전보 등 기밀문서에 접근할 수 있었던 군수장관이었다. 2만 2,000여 건에 달하는 문서를 바탕으로 쓴 이 책은 나치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반유대주의로만 이해되는 히틀러의 인종주의는 체계적인 사고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조야한 편견의 산물이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연거푸 금메달을 목에 건 흑인 육상 선수 제시 오언스를 두고 "정글 출신의 흑인은 미개하지만 체력은 문명화된 백인보다 강하"다고 하며 흑인과 시합을 벌이는 건 공정하지 못하다고 주장하거나(117쪽), 영국군의 체격을 조롱하는 장면(204쪽)에서 우스꽝스런 인종주의의 실체를 만나볼 수 있다. 한편 핵물리학을 유대인의 학문으로 치부하고 무시한 히틀러의 편견은 오히려 다행스럽다.
"히틀러에 관한 가장 내밀한 묘사"라는 『뉴욕타임스』의 평가대로 『기억』은 매 쪽마다 내부자가 아니고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에피소드와 사건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히틀러의 건강염려증과 사이비 의사에 대한 맹신, 기이한 식생활과 반려견에 대한 애정, 사치스러운 히틀러의 애인으로 알려진 에바 브라운의 속사정, 독특한 옷차림을 선호했던 괴링의 취향, 관료주의로 부패하고 있던 나치 정권의 이면 등이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또한 《작전명 발키리》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전모 역시 이 책에서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세상에서 가장 두꺼운 자기변명일까?
슈페어는 "나는 단지 과거를 기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에 경고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그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모든 책임을 히틀러에게 떠넘기는 동료들을 "수백만 마르크를 받는 우편배달부"라고 비난하며 "지도부의 집단 책임"을 인정한 유일한 피고인이었으며, 이 책 전반에 걸쳐 지식인으로서 비판적으로 사유할 책무를 잊었던 과오를 반성한다.
하지만 슈페어의 자기반성은 자기변명일 뿐이라는 비난은 여전하다. 단순히 그가 교수형을 면해 못마땅해서는 아닐 것이다. 슈페어는 나치 정권을 유지시키고 제2차 세계대전을 연장시킨 권력자였고, 동시에 철저히 나치당 당원으로서 활동한 괴벨스나 악의 고리 끝에서 명령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며 홀로코스트를 거리낌 없이 자행한 아이히만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는 지식인이었다. 그래서 그의 뒤늦은 반성과 참회가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슈페어는 목숨을 부지했고, 우리에게 제3제국의 속살을 살펴볼 기회를 남겼다. 모든 악이 폭발하고 남은 잔해더미 위에서 책임과 반성을 외친 그를 어떻게 판단할지, 선량한 나치로 기억할지 아니면 잔악한 전범으로 기억할지는 오롯이 독자의 몫일 것이다.
목차
목차
1부
1 출생과 어린 시절
유년 - 고향에서 보낸 소년 시절 - 학교생활 - 인플레이션 - 테세노 교수의 조교로 임용 - 결혼
2 직업과 소명
아프가니스탄에서 날아온 제의 - 일거리 없는 건축가 - 보트 여행 - 1930년 9월 14일 선거 - 민족사회주의와 공과대학 - 히틀러의 첫 번째 전당대회 - 스포츠 궁전에서 있었던 괴벨스의 연설 - 나치당 가입
3 갈림길
베를린에서 주어진 첫 번째 당 임무 - 다시 만하임으로 - 히틀러의 베를린 시위대 - 당 청사 개축과 선전장관과의 첫 만남 - 1933년 5월 전당대회장 연출 - 나의 건축주 히틀러 - 히틀러의 초대
4 나의 자극제
히틀러의 손님 - 건축주 괴링 - 히틀러와 함께한 여행 - 히틀러의 야망 - 히틀러의 예술론 - 오래된 싸움꾼 - 오버잘츠베르크에서 에바 브라운과의 산책 - 환희와 망상 - 건축가 히틀러
5 건축적 과대망상
룀 사건 - 파펜을 쫓아버리다 - 힌덴부르크 장례식 - 첫 번째 승인 - 폐허 가치 이론 - 얼음 성전 - 정초식 - 뉘른베르크를 위한 계획 - 막강한 권력을 지닌 건축가
6 위대한 임무
베를린 계획 - 빈과 파리의 라이벌 - 히틀러와 그의 건축가들 - 파리박람회 독일 전시관 - 우리 시대의 신고전주의 - 미완의 프랑스 여행 - 노이라트의 완고함
7 오버잘츠베르크
보어만과 히틀러 - 오버잘츠베르크의 하루 - 티타임과 대화 - 히틀러 격노하다 - 린츠에서의 사임 - 히틀러의 예언
8 새 총리 청사
임명 - 히틀러의 병 - 모렐 박사 - 938년의 사건: 개각, 오스트리아, 뮌헨, 11월 9일 - 불길한 징조 - 새 총리 청사를 찾은 하하 대통령
9 총리 청사의 하루
기다림 - 별난 헤스 - 리더십의 '스타일' - 급진주의자들, 보어만과 괴벨스 - 히틀러를 위한 농담 - 지루한 저녁시간 - 히틀러와 음악
10 절제되지 않은
"네가 완전히 미친 게로구나" - 대로 설계 - 과대망상 - 건축 완공 시일 - 비용 - 전역에서 건축 붐이 일다 - 히틀러의 스케치 - 괴벨스 가의 스캔들 - 이탈리아 익명 여행 - 히틀러의 50번째 생일 -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 가족과 함께 - 괴벨스 부인
11 세계
히틀러 권력의 중심 -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건축물 - ,000만 인구를 대표하는 제국의회 - 히틀러의 궁전 - 폭동에 대한 두려움 - 제국 스타일 - 세계
12 그럴듯한 시작
협정 - 오버잘츠베르크 너머 북쪽 불빛 - "피" - 전쟁과 평화 - 전쟁으로 나아가는 히틀러 - 수뇌부에서 - 정전 - 파리에서 히틀러와 함께 - 전시의 건축 프로그램
13 극단
개선문 아치 아래에서 벌인 승리 퍼레이드 - 영국으로 날아간 헤스 - 미술품 수집가 히틀러와 괴링 - 대소련 전쟁 시작 - 트론트하임과 동쪽 - 나의 마지막 예술 기행 - 러시아에서의 재앙 - 제국의 2인자
2부
14 새로운 임무
드네프로페트로프스키로 날아가다 - 수뇌부 방문 - 히틀러와의 대화 - 토트의 죽음 - 히틀러의 청중 - 장관으로 임명되다 - 괴링의 출연 - 첫 번째 공식 활동 - 장애를 극복하다 - 각료실
15 준비된 즉흥곡
새 조직도 구성 - 괴링이 사임을 종용하다 - 건축과 기술 - 산업계의 자기 분담 - 내각 구성 - 성공
16 태만
과학기술 전쟁 - 총동원령을 위한 노력 - 당에 반대하다 - 전쟁을 위해 더 많은 철광을 - 수송 위기 - 원자폭탄을 놓치다
17 총사령관 히틀러
히틀러와의 상황회의 - 나의 시스템 - 기술 분야에 대한 히틀러의 지식 - 무기 시험 - 남부 러시아 방문 - 엘브루스 등산 사건 - 히틀러의 상황 판단 - 연합군, 남아프리카에 상륙하다 - 괴링과 스탈린그라드
18 음모
보어만 - 각료회의 재개 - 긴축 경제의 필요성 - 괴벨스와의 토의 - 연합 - 보어만의 시스템 - 괴벨스와 총통지휘부에서, 괴링과 베를린에서 - 대실패 - 힘러의 위협
19 제국의 2인자
괴벨스와 보어만이 협력하다 - 히틀러가 괴벨스를 견제하다 - 수감자 활용 반대 - 아시아로 향한 다리 - 구데리안과 차이츨러의 동의 - 군수 및 전시생산 장관
20 폭격
새로운 국면 - 괴링의 기만 - 루르 댐 - 표적 전략 폭격 - 함부르크 공습 - 볼베어링 - 적의 전략상착오 - 베를린 폭격 - 갈란트에 대한 히틀러의 오해 - 현실 도피
21 1943년 가을의 히틀러
변화 - 히틀러의 경직과 쇠진 - 매일의 일상 - 히틀러와 그의 개 - 헤세 왕 - 무솔리니의 탈출과 속임수
22 퇴락의 길
점령지의 군사력 - 프랑스와의 협상 - 자우켈의 반격 - 관구장들 앞에서 연설하다 - 장군들에게 거짓말을 한 히틀러 - 라플란드 시찰 - 보병 프로그램 - 자우켈이 일으킨 문제 - 괴링의 생일
3부
23 병상에서
위험한 각본 - 회복기 - 공군 관계자들과의 싸움 - 히틀러의 감정과 새로운 소리 - 나의 후계자로 거론된 인물 - 사임을 고려하다 - 다시 베르크호프로 - 히틀러의 양보 - ?옵서버?의 찬사
24 세 번 진 전쟁
복귀 - 연료 생산공장에 대한 전략적 폭격 - 롬멜과 해안 방어 - 노르망디 침략당하다 - 비행기 생산 부문을 인계하다 - 업계 관계자들을 앞에 둔 히틀러의 연설
25 실책, 비밀무기, 친위대
폭격을 위한 제트기 - 페네뮌데 - 전시 산업에 동원된 강제수용소 - 힘러의 로켓 연구 참여 - 경제로 손을 뻗은 친위대의 계획 - 노동자들을 훔치다 - 아우슈비츠
26 발키리 작전
암살 공모 - 괴벨스 사무실에 도착한 소식 - 모반의 중심에서 - 벤틀러슈트라세 - 프롬과의 만남 - 힘러의 괴벨스 방문 - 칼텐브루노의 방문 - 공모자 리스트 - 암살 사건의 영향 - 체포 - 사형 집행 사진
27 무너지는 서부 전선
권력을 회복한 괴벨스 - 권위를 잃은 히틀러 - 전방 시찰 - 944년 가을: 군사적 무기력 - 히틀러의 파괴 계획 - 논리의 허점을 찌르다 - 크롬 부족 - 생산 감소 - 비밀병기와 선전
28 파멸의 나락
조직의 와해 - 긴급 프로그램 - 아르덴 공격 - 북슐레지엔 - "전쟁에서 패배하다" - 메모 - 얄타에 대한 반응 - 히틀러 벙커를 위한 독가스
29 최후의 심판
전후에 대한 걱정 - 보복 - 새로운 회람 - 히틀러의 대답 - 산업계에 내린 히틀러의 사형선고
30 히틀러의 최후통첩
위협받는 루르 - 열광적인 시찰 - 사보타지를 일으키다 - 히틀러의 24시간 최후통첩 - 미공개 편지 - 히틀러가 다시 양보하다
31 12시 5분
라디오 연설 - 신들의 황혼 - 피날레 - 루스벨트의 죽음 - 살인광선 개발에 뛰어든 라이 - 에바 브라운 - 비행 준비 - 자살 계획 - 히틀러의 마지막 망상 - "반역적 연설" - 하인리치와 협력하다 - 베를린은 반격하지 않을 것이다
32 전멸
히틀러의 상태 - 두려움과 연민 - 마지막 생일 - 베르히테스가덴으로 향한 괴링 - 나의 비행 - 함부르크 라디오 벙커 - 히틀러를 마지막으로 방문하다 - 상황회의 - 마그다 괴벨스, 에바 브라운과 영원한 작별을 나누다 - 히틀러와의 마지막 대화 - 힘러와 그의 생각 - 되니츠 - 눈물 - 책임감
에필로그
33 영어의 몸
플렌스부르크 - 몬도르프 - 베르사유 - 크란스베르크 - 뉘른베르크
34 뉘른베르크
심문 - 공동 책임 - 대질 심문
35 판결
판결 - 구형 - 나의 운명 - 회의론
글을 마치며
옮긴이의 글: '기억'의 미망 속으로
주
찾아보기
1 출생과 어린 시절
유년 - 고향에서 보낸 소년 시절 - 학교생활 - 인플레이션 - 테세노 교수의 조교로 임용 - 결혼
2 직업과 소명
아프가니스탄에서 날아온 제의 - 일거리 없는 건축가 - 보트 여행 - 1930년 9월 14일 선거 - 민족사회주의와 공과대학 - 히틀러의 첫 번째 전당대회 - 스포츠 궁전에서 있었던 괴벨스의 연설 - 나치당 가입
3 갈림길
베를린에서 주어진 첫 번째 당 임무 - 다시 만하임으로 - 히틀러의 베를린 시위대 - 당 청사 개축과 선전장관과의 첫 만남 - 1933년 5월 전당대회장 연출 - 나의 건축주 히틀러 - 히틀러의 초대
4 나의 자극제
히틀러의 손님 - 건축주 괴링 - 히틀러와 함께한 여행 - 히틀러의 야망 - 히틀러의 예술론 - 오래된 싸움꾼 - 오버잘츠베르크에서 에바 브라운과의 산책 - 환희와 망상 - 건축가 히틀러
5 건축적 과대망상
룀 사건 - 파펜을 쫓아버리다 - 힌덴부르크 장례식 - 첫 번째 승인 - 폐허 가치 이론 - 얼음 성전 - 정초식 - 뉘른베르크를 위한 계획 - 막강한 권력을 지닌 건축가
6 위대한 임무
베를린 계획 - 빈과 파리의 라이벌 - 히틀러와 그의 건축가들 - 파리박람회 독일 전시관 - 우리 시대의 신고전주의 - 미완의 프랑스 여행 - 노이라트의 완고함
7 오버잘츠베르크
보어만과 히틀러 - 오버잘츠베르크의 하루 - 티타임과 대화 - 히틀러 격노하다 - 린츠에서의 사임 - 히틀러의 예언
8 새 총리 청사
임명 - 히틀러의 병 - 모렐 박사 - 938년의 사건: 개각, 오스트리아, 뮌헨, 11월 9일 - 불길한 징조 - 새 총리 청사를 찾은 하하 대통령
9 총리 청사의 하루
기다림 - 별난 헤스 - 리더십의 '스타일' - 급진주의자들, 보어만과 괴벨스 - 히틀러를 위한 농담 - 지루한 저녁시간 - 히틀러와 음악
10 절제되지 않은
"네가 완전히 미친 게로구나" - 대로 설계 - 과대망상 - 건축 완공 시일 - 비용 - 전역에서 건축 붐이 일다 - 히틀러의 스케치 - 괴벨스 가의 스캔들 - 이탈리아 익명 여행 - 히틀러의 50번째 생일 -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 가족과 함께 - 괴벨스 부인
11 세계
히틀러 권력의 중심 -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건축물 - ,000만 인구를 대표하는 제국의회 - 히틀러의 궁전 - 폭동에 대한 두려움 - 제국 스타일 - 세계
12 그럴듯한 시작
협정 - 오버잘츠베르크 너머 북쪽 불빛 - "피" - 전쟁과 평화 - 전쟁으로 나아가는 히틀러 - 수뇌부에서 - 정전 - 파리에서 히틀러와 함께 - 전시의 건축 프로그램
13 극단
개선문 아치 아래에서 벌인 승리 퍼레이드 - 영국으로 날아간 헤스 - 미술품 수집가 히틀러와 괴링 - 대소련 전쟁 시작 - 트론트하임과 동쪽 - 나의 마지막 예술 기행 - 러시아에서의 재앙 - 제국의 2인자
2부
14 새로운 임무
드네프로페트로프스키로 날아가다 - 수뇌부 방문 - 히틀러와의 대화 - 토트의 죽음 - 히틀러의 청중 - 장관으로 임명되다 - 괴링의 출연 - 첫 번째 공식 활동 - 장애를 극복하다 - 각료실
15 준비된 즉흥곡
새 조직도 구성 - 괴링이 사임을 종용하다 - 건축과 기술 - 산업계의 자기 분담 - 내각 구성 - 성공
16 태만
과학기술 전쟁 - 총동원령을 위한 노력 - 당에 반대하다 - 전쟁을 위해 더 많은 철광을 - 수송 위기 - 원자폭탄을 놓치다
17 총사령관 히틀러
히틀러와의 상황회의 - 나의 시스템 - 기술 분야에 대한 히틀러의 지식 - 무기 시험 - 남부 러시아 방문 - 엘브루스 등산 사건 - 히틀러의 상황 판단 - 연합군, 남아프리카에 상륙하다 - 괴링과 스탈린그라드
18 음모
보어만 - 각료회의 재개 - 긴축 경제의 필요성 - 괴벨스와의 토의 - 연합 - 보어만의 시스템 - 괴벨스와 총통지휘부에서, 괴링과 베를린에서 - 대실패 - 힘러의 위협
19 제국의 2인자
괴벨스와 보어만이 협력하다 - 히틀러가 괴벨스를 견제하다 - 수감자 활용 반대 - 아시아로 향한 다리 - 구데리안과 차이츨러의 동의 - 군수 및 전시생산 장관
20 폭격
새로운 국면 - 괴링의 기만 - 루르 댐 - 표적 전략 폭격 - 함부르크 공습 - 볼베어링 - 적의 전략상착오 - 베를린 폭격 - 갈란트에 대한 히틀러의 오해 - 현실 도피
21 1943년 가을의 히틀러
변화 - 히틀러의 경직과 쇠진 - 매일의 일상 - 히틀러와 그의 개 - 헤세 왕 - 무솔리니의 탈출과 속임수
22 퇴락의 길
점령지의 군사력 - 프랑스와의 협상 - 자우켈의 반격 - 관구장들 앞에서 연설하다 - 장군들에게 거짓말을 한 히틀러 - 라플란드 시찰 - 보병 프로그램 - 자우켈이 일으킨 문제 - 괴링의 생일
3부
23 병상에서
위험한 각본 - 회복기 - 공군 관계자들과의 싸움 - 히틀러의 감정과 새로운 소리 - 나의 후계자로 거론된 인물 - 사임을 고려하다 - 다시 베르크호프로 - 히틀러의 양보 - ?옵서버?의 찬사
24 세 번 진 전쟁
복귀 - 연료 생산공장에 대한 전략적 폭격 - 롬멜과 해안 방어 - 노르망디 침략당하다 - 비행기 생산 부문을 인계하다 - 업계 관계자들을 앞에 둔 히틀러의 연설
25 실책, 비밀무기, 친위대
폭격을 위한 제트기 - 페네뮌데 - 전시 산업에 동원된 강제수용소 - 힘러의 로켓 연구 참여 - 경제로 손을 뻗은 친위대의 계획 - 노동자들을 훔치다 - 아우슈비츠
26 발키리 작전
암살 공모 - 괴벨스 사무실에 도착한 소식 - 모반의 중심에서 - 벤틀러슈트라세 - 프롬과의 만남 - 힘러의 괴벨스 방문 - 칼텐브루노의 방문 - 공모자 리스트 - 암살 사건의 영향 - 체포 - 사형 집행 사진
27 무너지는 서부 전선
권력을 회복한 괴벨스 - 권위를 잃은 히틀러 - 전방 시찰 - 944년 가을: 군사적 무기력 - 히틀러의 파괴 계획 - 논리의 허점을 찌르다 - 크롬 부족 - 생산 감소 - 비밀병기와 선전
28 파멸의 나락
조직의 와해 - 긴급 프로그램 - 아르덴 공격 - 북슐레지엔 - "전쟁에서 패배하다" - 메모 - 얄타에 대한 반응 - 히틀러 벙커를 위한 독가스
29 최후의 심판
전후에 대한 걱정 - 보복 - 새로운 회람 - 히틀러의 대답 - 산업계에 내린 히틀러의 사형선고
30 히틀러의 최후통첩
위협받는 루르 - 열광적인 시찰 - 사보타지를 일으키다 - 히틀러의 24시간 최후통첩 - 미공개 편지 - 히틀러가 다시 양보하다
31 12시 5분
라디오 연설 - 신들의 황혼 - 피날레 - 루스벨트의 죽음 - 살인광선 개발에 뛰어든 라이 - 에바 브라운 - 비행 준비 - 자살 계획 - 히틀러의 마지막 망상 - "반역적 연설" - 하인리치와 협력하다 - 베를린은 반격하지 않을 것이다
32 전멸
히틀러의 상태 - 두려움과 연민 - 마지막 생일 - 베르히테스가덴으로 향한 괴링 - 나의 비행 - 함부르크 라디오 벙커 - 히틀러를 마지막으로 방문하다 - 상황회의 - 마그다 괴벨스, 에바 브라운과 영원한 작별을 나누다 - 히틀러와의 마지막 대화 - 힘러와 그의 생각 - 되니츠 - 눈물 - 책임감
에필로그
33 영어의 몸
플렌스부르크 - 몬도르프 - 베르사유 - 크란스베르크 - 뉘른베르크
34 뉘른베르크
심문 - 공동 책임 - 대질 심문
35 판결
판결 - 구형 - 나의 운명 - 회의론
글을 마치며
옮긴이의 글: '기억'의 미망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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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저자
알베르트 슈페어
저자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 는 1905년 만하임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슈페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건축가가 되었다. 건축가 테세노의 조교로 일하던 무렵 히틀러와 민족사회주의 이념을 접하고 나치당에 가입한다. 나치당 청사 개조,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무대 연출로 히틀러의 눈에 띄어, 이후 베를린을 비롯해 독일 주요 도시 개발 계획을 입안하고, 총리 청사를 건설하는 등 '히틀러의 건축가'로 활약했다. 1942년 37세의 나이로 최연소 군수장관
임명되었으며, 제국의 2인자로 불릴 만큼 히틀러의 총애를 받았다.
종전 후 연합군에 체포되어 괴링, 히믈러, 로젠베르크, 카이텔, 리벤트로프, 슈트라이허 등과 함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회부된다. 슈페어는 나치 지도부의 집단 책임을 주장하며 연합군 검사 측으로부터 '최고의 피고인', '선량한 나치'로 불렸다. 빼어난 자기변호와 죄를 시인하는 태도로 20년형을 선고받아 나치 독일의 장관으로서는 유일하게 교수형을 면했다.
메모광이었던 슈페어는 슈판다우 형무소에서 편지, 일기, 업무일지 등을 바탕으로 기억을 되살려 회고록을 작성, 1966년 출소와 동시에 Erinnerungen라는 제목으로 출간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1981년 영국 방문길에 올랐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임명되었으며, 제국의 2인자로 불릴 만큼 히틀러의 총애를 받았다.
종전 후 연합군에 체포되어 괴링, 히믈러, 로젠베르크, 카이텔, 리벤트로프, 슈트라이허 등과 함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회부된다. 슈페어는 나치 지도부의 집단 책임을 주장하며 연합군 검사 측으로부터 '최고의 피고인', '선량한 나치'로 불렸다. 빼어난 자기변호와 죄를 시인하는 태도로 20년형을 선고받아 나치 독일의 장관으로서는 유일하게 교수형을 면했다.
메모광이었던 슈페어는 슈판다우 형무소에서 편지, 일기, 업무일지 등을 바탕으로 기억을 되살려 회고록을 작성, 1966년 출소와 동시에 Erinnerungen라는 제목으로 출간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1981년 영국 방문길에 올랐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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