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칭의 오후(시인동네 시인선 22)
채수옥 시집
채수옥 시집 『비대칭의 오후』. 응집성보다는 이질적인 경향들의 공존이 두드러지는 시집이다. 하나의 동질적인 ‘세계’를 구성하려기보다는 자동화된 지각을 깨뜨리려는 시도를 통해 시적 사유를 전개해 나간다. 채수옥 시인은 ‘창조’가 단순한 모사나 전달이 아니라 ‘저항’하는 것, 습관화된 삶의 질병 상태를 돌파함으로써 삶을 해방시키는 실험의 일종임을 알고 있다. ‘익숙한 것’을 ‘낯선 것’으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일상’을 시적 순간으로 변모시키는 ‘낯설어지려는 경향’은 채수옥 시의 현저한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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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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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어지려는 경향
발견과 번역. '생각'은 '낯선 것'을 '낯선 것' 그 자체로 경험할 때 시작된다. 이것이 '생각'과 '습관'의 차이점이다. '습관'과 '생각'은 정반대이다. '습관'은 '생각'이 필요 없는 상태이고, '생각'은 '습관'을 벗어날 때 시작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습관'이 불편함을 야기하지 않을 때, 그것이 문제라고 느끼지 않을 때, 그 세계에 계속 머물러 있으려 한다. '습관'은 얼마나 편리한가. 하지만 '생각'은 '낯선 것'을 '낯선 것' 그 자체로 경험하는 순간만이 아니라, '익숙한 것'을 '낯선 것'으로 경험하는 순간에도 시작된다. 가령 동물들이 일상적인 환경세계에 생긴 약간의 변화에도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라. 인간 또한 익숙했던 세계에 변화가 생기면 짧은 시간이나마 긴장한다. 물론 인간은 이 긴장감을 의도적으로 연출함으로써 '기분전환'을 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생각이 시작되는 순간을 두 가지 상황으로 설명할 때, 시적 '발견'과 '번역'은 주로 후자의 경우, '익숙한 것'을 '낯선 것'으로 경험하는 순간에 집중적으로 발생한다. 이때 '익숙한 것'의 가장 흔한 사례는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세계이다. 시인에게 일상은 매우 유혹적이면서 동시에 위험한 세계이다. 많은 시인들이 이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고 '일상'에 접근함으로써 '시'에 실패한다. 왜냐하면 문학에서의 일상은 그것 자체로 긍정되기 위해 접근해야 할 세계가 아니라 '발견'과 '번역'을 통해 부정되고 재구성되어야 할 세계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문학에서 일상은 '습관'의 안락한 세계가 아니라 '생각'의 불편한 세계이어야 한다. 이 사실을 간과할 때 일상은 시의 보고(寶庫)가 아니라 무덤일 수 있다.
우리 그러지 말고 차 한 잔 할까?//기형으로 붙어버린 생각들을 매만진다/한 이불 속에서 일상의 뇌를 나눠 쓰고/우리는 다르게 성장하고//서로의 혈관 속으로/델피니움 꽃잎을 한껏 주사하는 것으로/하루를 견딘다//절반의 타협 후, 둥글어지는 보름달은/반쪽을 삼키고 부풀어 오른/남은 자의 거룩한 배//마주보고 앉아 야윈 식탁을 뜯어먹는 우리는/솜뭉치 같은 서로를/울컥울컥 토해놓는다//머그잔 속으로 떨어지는 내 눈알과/뭉개고 싶은 네 혓바닥을 천천히 저으며/굶주린 배를 긁어대는 저녁//나는 외워지지 않는 나를 복습하고/너는 이해되지 않는 너를 받아 적고 지우는/이상한 커피 타임 (「키메라증후군」 전문)
시는 "통속의 시간"(「피닉스」)을 찢으며 온다. 하지만 '세계'를 구성하는 통속의 시간이 훼손될 때, 우리는 일상적 시간의 바깥에 놓이게 된다. 시인은 이 바깥의 경험을 '증후군'이라 칭한다. 그것은 중지 또는 탈구의 경험이다. 이 시에서 '키메라증후군'은 쌍둥이들이 경험한다는 질병의 이름이 아니다. 시인은 일상의 '세계'에서 안정 상태에 있던 주체성, 자아의 동일성이 혼란을 겪는 다중인격의 순간을 질병에 비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생각'의 낯선 시간이 어떻게 도래하는가를 보여주는 명확한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화자는 '나'를 분열하여 '우리'라고 칭한다. '우리'는 "나는 외워지지 않는 나를 복습하고/너는 이해되지 않는 너를 받아 적고 지우는"이라고 말할 때의 '나'와 '너'를 합쳐서 부르는, 그렇지만 '나'와 '너'는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대상을 지시하는 이상한 대명사이다. '우리'는 복수형이지만 거기에는 동일성보다는 이질성이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 이질성이 야기하는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 명의 '나' 가운데 한 사람이 "우리 그러지 말고 차 한 잔 할까?"라고 상냥하게 말을 건넨다. 이러한 시적 상황은 정확히 '익숙한 것'을 '낯선 것'으로 경험함으로써 '생각'이 시작되는 순간인데, 다만 여기서는 주체 바깥의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주체' 자체가 문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니까 시인은 불현듯 '나'가 분열되어 있다는 느낌, '나' 안에 또 다른 '나'가 존재한다는 느낌, 그 '나들'이 갈등관계에 있다는 느낌 속에서 발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질성이 "기형으로 붙어버린 생각들"이라면, "한 이불 속에서 일상의 뇌를 나눠 쓰고"로 시작되는 진술은 그러한 이질성을 봉합하려는 의지에서 기원하는 발화이다. "서로의 혈관", "반쪽", "남은 자", "마주보고 앉아 야윈 식탁을 뜯어먹는 우리" 등은 결국 이러한 분열의 경험이 식탁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진행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바싹 어둠을 당기고 옆으로 앉아봐 네 그림자 속으로/내 한쪽 어깨가 허물어지고 나면 우린 더 모호해질 거야//비밀번호 속으로 닫힌 문 안에서/우리는 서로의 속을 후벼 파는 거야 거죽만 남을 때까지/네 발 달린 짐승이 되는 거야//타조의 날개처럼/비루한 다리는 도망치지도 못하고/삐딱한 자세로/너덜너덜할 때까지 해지고 찢어지는 거야//붙잡는 거야//발로 걷어차이고 내동댕이쳐질지도 몰라/폐기처분 딱지 등짝에 붙은 채 길가로 내몰려도/똥구멍을 향한 집착/언젠가는 너를/털썩!/주저앉히고 말겠다는 과잉된 신념 스토커의 근성//다리 부러지고 터진 창자 끌려 나와도/끝까지 버티는 거야 (「다리」 전문)
'세계'의 익숙함은 '시선'의 주체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깨진다. 동물학자들에 따르면 동물들의 환경세계와 인간의 환경세계는 매우 다르다. 동물들은, 인간 이외의 생명체는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하고 구성한다. 그러므로 시인이, 시의 화자가 인간이 아닌 존재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면 그 시선에 포착된 인간의 세계는 낯선 곳일 수밖에 없다. 시 「다리」가 노리는 효과 역시 이것이다. 추측컨대 시인은 우연히 '의자'를 보면서 어떤 생각 내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의자'를 인간의 시선에 포착된 도구-대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의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이른바 의자-되기이다. 그래서 제목에 유념하지 않고 읽기 시작한 독자들, '의자'라는 제목이 시적 대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읽은 독자들은 뒤로 갈수록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평소의 습관처럼 1연에의 행위 주체가 '인간'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한다. 실제로 1연의 내용은 그렇게 읽어도 어느 정도는 뜻이 통한다. 하지만 연이 거듭될수록 우리는 독서 습관이 불편하다는 것을, 평소의 독법으로 읽어선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진술들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서야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그것이 시적 대상이 아니라 발화 주체였음을, 그리하여 이 시가 인간이 아니라 의자의 목소리로 발화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또한 우리에게 사고하기를 강요하는 대상이 세상에 넘쳐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례의 하나이다.
유사성 또는 시적 인상주의. 채수옥의 이번 시집은 응집성보다는 이질적인 경향들의 공존이 두드러진다. 이는 등단 이후 이 시집을 출간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적 경향과 관심의 변화를 거쳤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이 시집은 하나의 동질적인 '세계'를 구성하려는 의지보다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동화된 지각을 깨뜨리려는 시도, 그것을 통해 시적 사유를 시작하려는 의지가 돋보이는 시집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채수옥은 '창조'가 단순한 모사나 전달이 아니라 '저항'하는 것, 습관화된 삶의 질병 상태를 돌파함으로써 삶을 해방시키는 실험의 일종임을 알고 있다. 어떤 시인들은 이 해방을 위해 기존의 의미론적 연쇄를 해체하는 위반의 시학을 실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채수옥의 시는 기존의 연쇄를 끊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그것을 재구성하는 데 에너지를 쏟고 있다. 이 재구성의 방식으로 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것은 유사성의 발견, 즉 체계로서의 은유이다. 채수옥의 많은 시편들은 유사성의 체계를 뼈대로 삼음으로써 일정한 연상의 계열을 만들고, 그 계열을 따라 시를 진행시킴으로써 한 편의 시를 은유적인 세계로 해석하는 발견의 기법을 보여준다. 시 「실업」은 이러한 은유체계를 가장 간결하고도 선명하게 표현된 경우이다.
비가 내리는 골목에/망가진 기타 하나/담벼락에 기대고 서 있다//텅 빈 울림통 속으로/빗물이 차오른다/끊어지고, 튕겨져 나온 줄 끝에/빗방울들/식솔처럼 매달렸다 (「실업」 전문)
시인은 반복적으로 은유의 시선으로 세계를 본다. 하지만 '본다'라는 술어는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딴다/경쾌하게 열리는 짓무른 시간"(「닫힌 어둠을」)이라는 표현이 말하듯이 이러한 은유체계는 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보이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은유의 시선으로 세계를 응시하려고 노력하는 순간도 없지 않겠지만, 많은 경우 은유체계는 "원형의 통조림"을 따는 순간 도래하는 시간처럼, 비(非)의지적인 사건으로 도래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 순간 은유체계는 보는 것(능동)이 아니라 보이는 것(수동)이라고 말해야 한다. 시인은 비 내리는 골목길을 지나가 우연히 버려진 기타 하나를 보았던 듯하다. 찬찬히 살펴보니 끊어지고 튕겨져 나온 줄 끝에 빗방울들이 잔뜩 매달려 있다. 시인은 그 기타에서 직장을 잃은 실업자 가장의 모습과, 힘없는 가장에게 매달려 있는 식솔들의 모습을 본다. 사회적 상상력을 전면화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아름답고도 슬픈 장면에서 우리는 삶을 대면하는 시인의 자세를 추측할 수 있다. 앞에서 우리는 시가 "통속의 시간"(「피닉스」)을 찢으며 도래한다고 말했는데, 채수옥의 시에서 이 시간은 철저하게 '일상'의 시간에 한정된다.
낯설어지려는 경향. 시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상투적이고 상식적인 감각을 갱신함으로써 세계를 '생각'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이때 '생각'이란 사변적인 어떤 성질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했듯이 '습관'의 반대말이다. 어떤 시인들은 이 작업을 매우 지적인 방식으로 행하고, 또 어떤 시인들은 감각에 의지해 수행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생각'은 '감각'에 대립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갱신에의 의지가 대부분 기존의 연결 관계를 해체하는 과정을 피할 수 없다는 것, 나아가 새로운 연결 관계를 재구성하는 과정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우리가 살핀 은유체계나 유사성의 발견에 근거한 은유의 시학은 자칫 또 다른 상투성을 노출할 위험을 지닌다. 이질적인 사물들 사이에서 한사코 유사성만을 찾으려 할 때, 이미지와 이미지의 시각적인 연관성을 지속적으로 반복할 때, 한 시인이 소유하고 있는 시적 잠재성은 '갱신'이 아니라 '체계'에의 의지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체계는 종종 낯설어지려는 경향을 다시 포획하는 안정화의 장치로 작동하기 쉽다. 어쩌면 이 시집에 포함된 많은 시편들 가운데 해설에 포함시키지는 못했지만 유사성의 발견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비대칭의 오후」나 「낙지」 같은 감각적 발상이 더 선명한 느낌으로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시의 존재이유는 낯설어지려는, 한없이 낯설어지려는 경향에 있다.
목차
목차
제1부
골목
뻐꾸기시계
레밍의 유전자
텍스트
북
포옹
수유
유령
껍질의 바깥
빨간 선
출근
지금, 여기
가방
절정의 기록
구름은 얼마?
거미줄
투명한 노래
피 흘리는 원샷!
커튼
기호 속으로
꽃들의 식사
관람
키메라증후군
닫힌 어둠을
서늘하다
꽃집 여자
제2부
실업
칸나
하모니카를 불다
반영하지 않는다
CCTV
축제
고문(?問)
비대칭의 오후
복숭아나무
갑옷
사각형의 섬
삼중주
박제 수업
없다
둥글고 푸른 방
국화
소문의 숙주
구멍 하나를 먹었는데
저 장미!
가벼운 사과
의자
불통이란 말입니다
피닉스
낙지
가학적 구름
함박, 함박눈
해설 낯설어지려는 경향 / 고봉준(문학평론가)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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