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체온(문학의전당 시인선 190)
황순옥 시집
〈문학의전당 시인선〉 190. 황순옥 시인의 첫 시집 『오래된 체온』은 삶의 실존을 통해 바라본 존재에 대한 성찰이며 해석이다. 이 성찰이 의미심장한 것은 개인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시적 차원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시가 ‘사실’이라는 일상적 삶의 현상을 다루고 있지만 시가 지향하는 지점은 ‘시적 진실’의 차원으로 옮겨놓는다는 점이 그렇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그녀는 가족을 중심으로 시작해서 타인에 이르기까지, 현실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주로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는 일반적 삶의 현상 속에서 시적 진실을 끌어내는 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 성찰의 이면에 늘 뒤따르는 그림자가 있다. 그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시선이다. 65편의 작품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과 겨움의 눈길이 담겨 있다. 하지만 감정의 과잉이나 눅눅한 습기는 제거되고 없다. 특유의 담담한 어투로써 시의 형평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삶의 원근법에서 체득하고 견지한 삶의 독법에서 비롯된 것이라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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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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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글]
체온이 오래되면 어찌 되는가. 헛헛하고 허허로운 마음일 때 만나는 시인의 시선은 온통 '아름다운 것'들뿐이어서 자주 '따뜻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통증조차 감지하지 못하게 하는 그녀의 따스한 시선을 도저히 따돌릴 재주가 없다. 하여 행간마다 드러나는 '삶의 거실 같'은 시편은 '경건한 기도'처럼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시집의 제목만큼이나 오랫동안 곰삭아서 잘 발효된 시들을 그녀는 하나하나 꺼내어 스쳐가는 것들을 불러들인다. 불현듯 조우하게 되는 생의 어느 시절, 어느 한때를 담담한 필치로 펼쳐내고 있다. 담담하고 무겁지 않은, 그러나 때로는 지나치게 화사하여 벚꽃들은 '무중력의 향기 속'으로 잠입하고 '농익은 사랑'은 '세월의 한 켠'을 장식한다. '완성될 수 없'는 '무수한 추억'들을 '오래된 체온' 하나 곁들여 계절 내내 동행해보는 것은 어떨까. 좀처럼 '경계를 풀'지 못하는 꽃들도 그녀의 시 속에서는 단숨에 무장해제 될 것이다. 매 편마다 온기를 더해주는 시어(詩語)들로 눈이 부신 한때.
―최재영(시인)
[출판사 서평]
'연민'과 '겨움'의 시학
황순옥 시인의 첫 시집 『오래된 체온』은 삶의 실존을 통해 바라본 존재에 대한 성찰이며 해석이다. 이 성찰이 의미심장한 것은 개인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시적 차원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시가 '사실'이라는 일상적 삶의 현상을 다루고 있지만 시가 지향하는 지점은 '시적 진실'의 차원으로 옮겨놓는다는 점이 그렇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그녀는 가족을 중심으로 시작해서 타인에 이르기까지, 현실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주로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는 일반적 삶의 현상 속에서 시적 진실을 끌어내는 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 성찰의 이면에 늘 뒤따르는 그림자가 있다. 그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시선이다. 65편의 작품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과 겨움의 눈길이 담겨 있다. 하지만 감정의 과잉이나 눅눅한 습기는 제거되고 없다. 특유의 담담한 어투로써 시의 형평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삶의 원근법에서 체득하고 견지한 삶의 독법에서 비롯된 것이라 짐작된다. 그 행보를 따라가 보자.
'여자의 삶'에 대한 보편적 연대감
세월이라는 삶의 질곡을 통과한 자만이 쓸 수 있는 시가 있다. 황순옥 시인의 시가 그렇다. "심장을 들리지 않고서/세월의 부위에 못 박힐 수 있겠는가"(「붉은 못」)라는 대목만 보더라도 그렇다. 시인의 따뜻한 체온과 심장을 통과한 대다수의 시편에는 붉은 못 자국이 오롯이 박혀 있다. 특히 여자들―시어머니, 어머니, 딸―의 삶을 소재로 다룬 작품들이 그렇다. 그것을 나는 지긋한 나이에 도달한 여성이기에 껴안을 수 있는 '연민'과 '겨움'의 시학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국화 향기가 안개를 통과하는 동안/햇살은 땅바닥에 앉아 하루의 분량을 가늠하고 있다/거실 한쪽/언제 벗어놓았는지/흩어져 있는 옷들 주섬주섬 챙기다가/문득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시어머니,/늘 한 뼘 더 삶의 안쪽에서 서성이던 그림자/그럴 때면 장롱 구석에서 자고 있던 꽃버선이 걸어 나오고/잊고 있던 체온이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걸/오래도록 나는 어쩔 수 없이 받아내곤 한다//가난이 당연했던 여자의 삶이/그늘진 구석에 앉아 있을 때/서러운 시절만큼이나 누런 손톱 사이/시간은 튕겨져 나온 엄지발가락 관절만큼 힘드셨을,/보랏빛 고쟁이를 십 년 넘게 아끼시느라/입지도 못하고 떠난 그녀/곡선까지 누렇게 바랜 꽃버선 한 켤레/어쩌면 꽃버선이란 이승을 건너가는/신발이 아닐지도 모른다//가끔 기억 속 주름을 펼치면서/오늘도 꽃버선은 장롱 안쪽에서 또 다른 강을 건너는 중이다 (「오래된 체온」 전문)
현실이라는 기반 위에 사회적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산 자들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의 연대가 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결혼을 시작으로 아내―며느리―시어머니로 이어지는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감내해야 한다. 그 과정 중에 '여자의 삶'은 점점 사라지고 '여자의 역할'은 점점 강화되기 마련이다. 이에 여성들은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는 공동의 연대감이 자연스레 형성된다. 같은 성(性)으로 태어나 한 사회 속에서 겪어야 하는 '여자의 삶'에 대한 공통의 감정, 그것은 피로 나눈 관계보다 더 '오래된 체온'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래된 체온」은 이 시대 '여자의 삶'을 감정의 연대로 껴안은 자발적 연민과 수행으로 쓴 '겨움'의 시다. 그래서 이 시의 체온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식지 않을 것이다. '여자의 삶'이 핏줄의 관계로 이어질 경우는 어떠한가.
시집보낸 지 삼 년이 됐는데도/친정집에 묶어둔 끈 풀지 못한 채/좀처럼 옛이야기를 놓지 못하고/지난날의 꿈을/부재증명이라도 하듯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다/아이 하나 낳으면/그 아이 탯줄 끊으며/친정에 두고 간 마음 몇 개 챙겨가려나/줄어들지 않는 친정 나들이/회귀본능 같은 것,/내가 그 길었던 새댁 시절의 저녁마다/친정을 떠올렸던 것처럼/지금 나를 기대는 저 습성은/분명 온순한 시장기일 것이다/내가 내 어머니에게서/대물림 받은 분량의 공복 또한/넉넉지 못한 모유에 의존했던 때문이었을까//딸의 발자국 소리가 한동안 멈출 때면/나도 가끔은 귓속 궁금증을 일깨워/딸의 기척을 오후 내내 삭인다 (「딸」 전문)
이 작품은 시집간 딸의 잦은 친정나들이를 소재로 삼고, 딸―자전적 화자―어머니로 이어지는 모성 회귀 본능의 문제로 확장하고 있다. 지극히 개인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시가 지향하는 지점은 보편적 이야기다. 딸의 친정나들이가 "회귀본능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자전적 화자 역시 자신도 친정을 시집가서 떠올렸던 습성이 "온순한 시장기"였으며, 그것은 "내 어머니에게서/대물림 받은 분량의 공복"이란 점에서 오버랩 된다. 자전적 화자는 딸을 통해 과거 자신의 모습과 어머니의 모습을 한 공간 안에서 입체적으로 발굴해낸다. 그러므로 이 시는 개인사적 핏줄의 연대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딸들(딸―자전적 화자―어머니)을 동시에 소환하여 모성 회귀의 집단무의식, 즉 보편적 원초적 본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이 시는 단순하게 '모성 회귀'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시장기'를 절묘하게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또 시의 전개과정 중 의미 있는 것은 딸에게서 시작되었던 초점이 자전적 화자인 시인 자신에게로 옮겨진다는 점이다. 이런 점들이 황순옥 시의 장점이다. 어떤 소재를 택하더라도 자신의 내면화 과정 속에서 자신에게로 초점을 맞추고 성찰의 계기로 삼고 마는 힘. 이런 시적 전개 논리로 인해 이 시는 딸의 이야기를 취하고 있지만, 세상 모든 딸들과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이야기로 확장하는 보편적 의지를 획득한다.
'타인'을 향한 연민과 감응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황순옥 시인은 가족을 중심으로 하여, 타인에 이르기까지 연민의 포물선을 넓게 포진하고 있다. 「벼랑 저쪽의 한기」, 「잎들이 떨어지기 전」, 「하얀 국화」에서는 병을 소재로 삶과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사는 여자들의 모습을 주 테마로 다루고 있다. 「네잎클로버」에서는 거리를 헤매는 젊은 구직자의 모습을, 「계절을 파는 노인」, 「휘어진 그림자」에서는 초라하고 궁색한 노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오래된 체온』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대상이 바로 '사내'들이다. '사내'를 직접 시의 주 대상으로 삼고 있는 시편이 무려 9편이나 된다. 황순옥 시인은 그들을 비교적 일정한 시점에서 관찰하거나 크로키하고 있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자.
붉은 신호에 걸린 사내/지금껏 멀찍이 따돌렸던 속도들마저/뒷모습을 감춘 지 오래다/반신의 한쪽으로 몰려진 삶/감촉의 밖에서 떠도는 팔/이젠 어떠한 체험에도 이룰 수 없게 된 다리/가끔 뜨거워지던 심장도/지금은 흑백사진 속에서만 멀쩡하다/마치 호흡 속에서 덜 망가진 몸짓을 찾듯/한참을 뒤적거리고서야 움직임 한 줌 꺼내는 사내 (「정지선」 부분)
느닷없는/이웃집 사내/온기 하나 싸늘하게 내려놓고서/사내는 죽음의 강을 건넜다/몇 년 전 아내와 이혼 후/그의 삶은 극도로 헐벗기 시작했고/삶을 내려놓은 사람처럼/허탈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아주 특별한 날」 부분)
삶의 이력만큼 어수선한 수염이/손수레에 떠밀리듯 찾아드는 그 남자/안녕하세요/덜컹거리는 손수레 한구석에서/꺼내는 듯한 그 인사가 전부이다/한참을 안 보인다 싶으면/히죽 모습을 드러내고/오후가 아니라도/긴 그림자를 만들곤 한다/인생 무엇 하나 변변히/씹지 못할 것 같은 치아가/곤두박질하는 시간을 겨우 잡고 있다/누군가 던져준 주방 기구에 어깨가 싱거워지고 (「곤두박질하는 수염」 부분)
보다시피 위의 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사내'들이고, 그들은 대개 사회적 약자들이다. 「정지선」에는 반신불구의 사내가, 「아주 특별한 날」에는 자살한 사내가, 「곤두박질하는 수염」에는 고물을 수거하는 사내가 등장한다. 이외에 다른 6편에 등장하는 '사내'들도 다를 바 없다. 도시 주변에서 지리멸렬한 삶을 겨우 연명하는 이름 없는 사내들이다. 황순옥 시인은 왜 이런 사내들의 삶의 모습에 시선을 모우는 걸까? 그것은 아마도 시를 완성하겠다는 의지 이전에, 시를 통해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이전에, 삶에 대한 숭고한 자세가 그들의 불행을 부축했으리라. 그다음에 시가 왔을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민의 겨움과 감응(affect)의 감정이 시인의 마음을 움직인 게 아니라면 한 시집 속에 그 많은 '사내'들이 언급될 수 없었으리라. 그들의 형편과 처지가 자신의 삶과 관계없는 타인들일지라도 그들에 대한 갸륵한 시선이 시인의 내면에서 연민의 감정으로 동화된 자리에 시가 있다. 이로써 사회로부터 잊혀져가거나, 주목받지 못하는 생들을 시 속으로 호명한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그들, 그러나 쉽게 외면되거나 제외되는 그들을 통해서, 한 사회 공동체 안에서 공유하는 인간 존재의 핍진성의 문제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연민의 '내용'에서 연민의 '형식'으로
『오래된 체온』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편이 메시지 전달에 치중하고 있다. 우리는 그 메시지를 통해 황순옥 시인이 구축한 시세계의 성격과 방향을 짐작하게 된다. 『오래된 체온』에는 실존적 삶의 곡진한 과정을 통과하는 존재 일반의 모습을 넓게 포진하고 있다. 그 응시가 예사롭지 않은 까닭은, 개인적 차원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시가 환기하는 파장은 반드시 인간 존재의 보편적 가치와 성찰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소 주제 형성의 밀도가 엉성한 경우에 있어서도, 시의 목표는 시적 진실을 장악하려는 근성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어법에는 과장된 감정의 격동이 없다. 일정한 호흡으로 담담하게 말함으로써 '연민'과 '겨움'에 도달한 감정의 진폭에 고른 형평성을 유지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유독 이미지만 돌올하게 떠오르는 한 편의 시가 있다.
공설운동장에/아주 작은 노란 공이 /떼구르르 굴러간다/요리조리/어른들 사이를 잘도 빠져나간다/이른 저녁 식사 후/사람들은 다람쥐처럼 운동장을/뱅글뱅글 돌고 있다/같이 뱅글뱅글 돌다가/돌아서서/저만치 두 팔 벌리고 서 있는/늙은 골문 사이로/꽃망울 활짝 터트리며 힘껏 들어선다/거친 호흡 꼭 껴안으며/두 뺨에는 빨간 립스틱이 찍히고/다시/가쁜 숨 하나 노랗게 굴러간다 (「노란 공」 전문)
이 시에는 설명이 없다. 메시지가 약화된 반면 경쾌한 이미지가 선명하게 부각된다. 이렇듯 말하지 않고 그냥 보여만 줘도 한 편의 좋은 시가 된다. 이 시를 황순옥 시인의 다음 행보를 예견하는 길라잡이라고 보아도 될까.
목차
목차
제1부
전압의 힘 / 정지선 / 벼랑 저쪽의 한기 / 할미꽃 / 연중행사의 진원지 / 외출 / 네잎클로버 / 잎들이 떨어지기 전 / 달력 /
황사 / 전당포 / 뿌리가 휘청거린다 / 빈손 / 먼지들이 웅성거린다 / 하얀 국화 / 아주 특별한 날
제2부
하루쯤은 / 붉은 못 / 소음 / 둑이 무너지다 / 환절기를 즐긴다 / 곤두박질하는 수염 / 아마릴리스 / 사라진 녹색 /
수돗물이 나오던 날 / 소문 / 수신 / 오래된 바람 / 외도 / 흐려지는 푸른 빛 / 아름다운 것들 / 세 들어 살다 / 오늘도
제3부
계절을 파는 노인 / 오래된 체온 / 화분 속의 봄 / 노란 기억들 / 봄의 유혹 / 몽롱한 목젖 / 따뜻한 향기 / 입추 /
잉태한 장맛비 / 불빛의 사각지대 / 휘어진 그림자 / 동백 / 의자 / 오후는 집을 끌어당긴다 / 마당 끝
제4부
어머니 1 / 어머니 2 / 어머니 3 / 아버지의 바다 / 따듯한 착각 / 딸 / 화장을 고치고 / 회귀본능 / 논두렁 / 부부 /
마늘장아찌 / 하늘이 텅 비었네 / 흔들리는 것들 / 피아노 / 편지 / 저녁 이후 / 노란 공
해설 '연민'과 '겨움'의 시학 김나영(시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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