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에서 매실로(문학의전당 시인선 193)
하병연 시집
하병연 시집『매화에서 매실로』.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자기 삶의 진솔한 현장을 독자들과 공유한다. 현재 매실농원을 하고 있는 시인은 매화꽃 만발한 자연의 아름다움, 수확의 기쁨, 과수원에 얽힌 이야기 등 직접 체험에서 비롯한 전원생활의 면모를 담백한 어조로 시 속에 그려낸다. 특히 매화나무는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그는 실제로 ‘매실 박사’로 불릴 만큼 매실나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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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문학의전당 시인선〉 193. 2003년 《농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하병연 시인의 신작 시집. 첫 시집을 통해 "이 시대 새로운 〈농가월령가〉와 24절기마다의 시적 체험을 신선한 감각으로 재창조해내고 있다"(허형만 시인)는 평가를 받은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더욱 깊어진 대지의 상상력을 관능적으로 풀어내며 체험적 진실로서의 농촌 풍경을 우리 앞에 선명하게 그려 보인다. 특히 '매화나무'라는 객관적상관물을 통해 세세한 필치로 묘사한 농촌의 전경과 그곳에 살아 숨쉬는 입말의 능숙한 활용은 문단의 유행에 편승하지 않는 시인의 뚝심을 보여준다. 그 '순정한 힘'에서 비롯한 아름다운 문장들이 노래하는 자연과 인간, 나아가 우주에 대한 성찰의 시세계는 그 진정성으로 하여 당당하고 깊다.
[추천 글]
하루 삼천 개, 100킬로그램의 매실을 딴 자의 손끝으로 꾹꾹 눌러쓴 이 고집불통의 시를, 어찌 부질없는 이론들이 재단할 것인가. 트렌드를 거부하고 자연에 순응하며 써나가는 자의 시는 당당하다. 온갖 거짓된 것들을 덜어내고 남은 정직의 자리, 수많은 의성어와 의태어들이 태어나는 그 현장에 맺힌 열매가 하병연의 시 매실이다. 내 아직 덕천강가 그의 고향이며 매실밭에 가보지는 못하였으나, 됐다, 이 수확물을 보니, 됐다, 매화의 희열(喜悅), 매화의 열락(悅樂), 매화의 법열(法悅)은 홀로 매실밭을 가꾸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 고맙다 병연 아우여. 네 손끝에서 피어난 한 방울 홍매에 붓을 찍어 겨울 창호지에 또 한 잎 매화를 그려 넣느니, 봄 오고 매화꽃 피면 그대의 밭고랑으로 날 한번 불러다오. ?유홍준(시인)
시 쓰기가 성실한 몸의 작업이라면, 시 쓰기가 성실한 영혼의 작업이라면. 여기 하병연 시인 또한 위대한 시인의 명단에 부끄럽지 않게 등재될 것이다. 세상 많은 대상 중에서도 특히 매화와 매실에 그 깊은 눈을 확대해놓고, 우리에게 함께 삶의 진실을 들여다보자고 한다. 20여 년간 농사를 직접 지으면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주 섬세하면서도 깊어서, 절로 그의 진지한 삶의 태도와 시에 대한 열정을 생각하게 한다. 매실 하나로 이렇게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그는"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이 산중에는 있다"는 그의 말대로 곳곳에 숨은 생의 비밀을 시로써 들려주고 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하여 우리가 귀 기울여 듣다보면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목소리를, 그 누구보다도 그리운 목소리를 내는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리워하며 그리워하며 그를 읽었다. ?박혜연(시인)
[출판사 서평]
하병연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자기 삶의 진솔한 현장을 독자들과 공유한다. 현재 매실농원을 하고 있는 시인은 매화꽃 만발한 자연의 아름다움, 수확의 기쁨, 과수원에 얽힌 이야기 등 직접 체험에서 비롯한 전원생활의 면모를 담백한 어조로 시 속에 그려낸다. 특히 매화나무는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그는 실제로 '매실 박사'로 불릴 만큼 매실나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듯하다. 시에 등장하는 매실나무를 따라가 보는 것은 『매화에서 매실로』를 읽는 한 독법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매실나무를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시선을 통해 느끼게 되는 것은 자연을 향한 농부의 애착과 한 시인의 삶이다. 봄에는 매실나무 가지치기를 하며 한껏 매화 향기에 취했다가 절기가 바뀌어 매실이 영글면 또 거기서 수확의 기쁨과 감사를 느끼는 시적 화자는 영락없는 농부다. 소박한 정서가 아름다운 시 「개화(開花)」를 보자.
매실나무 가지치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꽃이 피었습니다//둔한 나의 행동은 더욱 둔해졌고 혼란한 나의 정신은 꽃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꽃향기는 온 산을 덮고 땅을 덮고 나를 덮었습니다//벌들은 윙윙거리고 꽃들은 음부(陰部)를 활짝 열어두었습니다//햇빛은 따스하였고 바람은 불지 않았습니다
화자는 매화나무 아래 누워 환상 속으로 스며든다. 환상은 "하얀 비단 한복을 입고 얼굴은 작았다 다소곳 미소를 띠고/머리는 단정히 뒤로 빗어 올려 옥빛 비녀를 꽂"(「매화여인(梅花女人) 오다」)고 화자에게 다가온다. 화자는 매실나무의 환상적인 풍경과 향기에 취해 자꾸자꾸 몽환으로 빠져든다. 그 이유는 같은 시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된다. "그냥 매화(梅花) 꽃밭에 뒹굴고 싶었다 순간이 영원(永遠)이고 싶었다 소리쳤다 아무리 소리쳐도 그녀는 미소만 지을 뿐 다가오지 않았다". 화자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영원이고 이 순간만이 사랑의 절정인 것이다. 사랑에 빠진 농부의 행복한 모습을 상상해보라. 사랑에 빠진 이에겐 사랑 이외의 것은 의미가 없다. 농부에게는 하루 일거리인 가지치기도 마찬가지다. 대지에 누운 채 꽃향기에 취해 있는 저 충만한 여유와 에로틱한 사랑은 누구도 마다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나는 매화나무 속으로/걸어 들어갈 수 없네/그 많았던 벌들은 어디론가 가버리고/매화꽃잎 흩날리네/매화나무에서 매실나무로/생(生)의 문이 막 열리는 순간이네/갓난아기의 손을 잡고 있는 어미처럼/산(山) 땅이 꽃잎을 자기 맨몸 위에/가만히 올려놓네/아래로만 떨어지는 게/슬퍼할 일 아니라고/가만가만 다독이네/꽃잎이란 꽃잎 다 떨구어낸 자리에/연두의 유두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네/꽃피는 시절은 가버리고/매화나무는 매실나무로 살아가겠네/이 산중(山中)에 새들이 노래하네/이 산중(山中)에 햇빛이 들어차네/수없이 떨어진 꽃잎이/매실나무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고 있네 ―「매화에서 매실로」 전문
매화꽃잎이 흩날리면 매화와 함께 뒹굴던 화자의 밀월도 끝이 난다. 꽃이 지고 향기가 잃은 매화나무는 열매를 맺기 시작하면서 매실나무가 된다. 어떤 존재도 영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 이상 변화하지 않는다는 건 곧 죽음과 같은 의미이다. 이러한 사실을 이미 '생동(生動)'하는 자연을 통해 체득했을 화자는 그래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아래로만 떨어지는 게/슬퍼할 일 아니라고" 매화나무는 물론 시인 자신을 "가만가만 다독"이며 자연의 질서에 순응한다. 원래 봄은 짧고 꽃이 화려한 시간은 찰나인 법이다. 즐거운 시간은 상대적으로 더 짧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화자는 바뀌는 계절 속에서 우리네 인생의 진리를 되새기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계절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오면 어느새 여름이 다가오는 게 또 다른 진리이다. "꽃잎이란 꽃잎 다 떨구어낸 자리에/연두의 유두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자 "수없이 떨어진 꽃잎"들은 "매실나무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아마 화자는 꽃잎이 가는 그 꽃길을 동행할 것이다. 그 길에서 영글어가는 매실을 보며 또 다른 기쁨을 찾을 것이다.
봄이 되면 음부를 벌리고 만발하는 꽃잎은 아름다운 청춘의 시기를 떠올리게 한다. 돌아보면 순식간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청춘. 그러나 청춘의 길을 지나 뜨거운 태양을 받아야 매실은 익어가기 시작한다. 이때 열매는 긴긴 시간을 기다리며 완성되는 무엇에 대한 은유이다. 한 그루 나무도 가뭄과 악천후를 이겨내지 않고는 큰 그늘을 드리울 수 없다. 하물며 사람이야. 한 사람의 사람됨에도 그만한 시련이 따라붙는다. 매화나무가 매실나무로 전이되는 절기처럼, 사람도 고된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다른 열매를 맺는다. 어쩌면 농부의 일이란 힘든 계절을 보내는 매화나무를 지긋이 바라봐주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비바람과 작열하는 태양 아래 인고의 시간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농부의 발길, 길을 잃은 사람의 고통에 말없이 동참하는 자세는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땐 근 20년생 정도 되는 매실나무 같았다/나뭇가지도 크고 밑동도 제법 굵고 수형도 잘 잡혔는데/무성히 있어야 할 잎 다 지고 꽃도 없이/먼 산만, 자꾸 먼 산만 쳐다보고 있었다//생(生)의 굴곡이 어디에도 없지는 않겠지만/이 산중에 사는 매실나무도 최소한의 살림이 필요하여/가지치기를 하고, 거름을 주고, 농약 치고, 풀 베어주는/수고로움이 열매로 매다는 법인데//어느 날부터인가 앞치마를 두르고/굽고, 뒤집고, 썰고, 고우고, 자르고, 끓이고//어느덧 펄떡이는 수고로움이/하나씩 하나씩 소리도 없이 물이 올라와/깊고 깊어서 뿌리가 돌고 돌아/흰 꽃이 피고 잎이 움터 열매를 매달고//드디어 한 그루 매실나무로 완성되었을 쯤//여수 해지니네 국수집에서 100킬로그램 주문이 왔다 ―「산청매실농원」 부분
이제까지 다룬 매화나무가 어떤 몽환 속에 있었다면, 절기가 바뀌어 「산청매실농원」에 출현하는 매실나무는 좀 더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시에는 화자가 "그녀를 만났을 땐 근 20년생 정도 되는 매실나무 같았다"고 말하는 한 여자가 등장한다. 매실나무는 "가지치기를 하고, 거름을 주고, 농약 치고, 풀 베어주는/수고로움"으로 애정을 담아 보살피자 꽃을 피운다. "소리도 없이 물이 올라와/깊고 깊어서 뿌리가 돌고 돌아/흰 꽃이 피고 잎이 움터 열매를 매"단다. 그렇게 "생(生)의 굴곡"을 지나온 매실나무는 어느덧 농부 곁에 "삼천 개 붉은 마음"으로 온다. 어느 농부에게나 수확의 의미는 각별하겠지만, "삼천 배 수련하듯" 매실을 따는 「산청매실농원」 화자의 심정은 더욱 남다르다.
사실 수확의 기쁨과 노동의 강도는 비례한다. 고된 만큼 그 뒤에 찾아오는 보람도 큰 것이다. 「매실 수확을 마치고」에서 화자는 "매실을 새벽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따며 "근 한 달 동안"을 매실나무와 씨름한다. "돈이 되던 안 되던/매실이 끝나서 좋았네/정말 좋았네"라는 표현은 쉬어보이지만 결코 단순한 함의를 품고 있지 않다. 그 안에는 수확의 기쁨과 긴 시간 노동의 고됨과 수확 뒤에 찾아올 헛헛함이 다 섞여 있다. 그 헛헛함은 "명절날 자식들 다 떠난 자리를 지키는 노모"의 쓸쓸한 감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수확이 끝난 이곳으로, "다시 시끌시끌한 생(生)의 긴 잔치는/이 깊은 산중으로 찾아"(「뱀은 달아나고」)온다.
날마다 붉은 애인을 만나는 설레임은 남아 있어/혼자 점심을 챙겨먹고, 옷을 갈아입고, 한 마리 벌레처럼 산길을 걸었던/그 겨울//하루는 비가 내렸고 또 다른 날은 볕이 좋았고/그리하여 드디어 매신(梅信)이 왔을 때에는 나도 모르는 기운이 내 속에서 감돌아, 자꾸 감아 쳐 올라/붉은 꽃으로 피어올랐습니다/때마침 어디에서 날아온 공중 벌들이 그 차가운 병(病)들을 하나하나씩 떼어 메고 멀리멀리 어디론가 날아갔습니다 ―「공중에 그린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 부분
수확이 끝난 허허로운 벌판에 서 있는 매화나무를 보면 아마 많은 상념이 찾아들 것이다. "살아온 날들을 더듬거리며 이게 아닌데 싶어도 내 처지를 바꿀 수 없어/그냥 한두 시간 걸어 겨우 만났던 매화나무"에 이르러 화자는 어떤 회한에 빠져들기도 했으리라. 그렇지만 죽은 듯이 보이는 한겨울 매화나무가 봄이면 어김없이 꽃을 밀어 올리듯이, 아프고 심상(心傷)한 화자의 마음속에도 "붉은 애인을 만나는 설레임은 남아 있어"서 "붉은 꽃"을 피워올린다.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를 하늘에 그리며 다가올 이듬해 매화를 기다린다. 한 계절 내내 동고동락하다 보면 질릴 법도 한데, 매실나무를 향해 끊임없는 애정을 드러내는 데서 화자의 순수하고 맑은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농사일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기에 그만한 애정을 주어도 노동의 대가는 때때로 화자의 몸에 생채기를 내기도 하고, 화자로 하여금 "허리가 다쳐 디스크 수술을 하고 방안에 머물"게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매화를 생각하다보면 어느새 "어디에서 날아온 공중 벌들이 그 차가운 병(病)들을 하나하나씩 떼어 메고 멀리멀리 어디론가 날아"가버린다. 아파하는 '나'라는 주체의 자리에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한 대상을 향한 지고지순함을 채워놓음으로써 모든 대립과 갈등을 무위로 돌려버리는 순정한 힘. 「공중에 그린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는 하병연 시인이 이번 시집을 통해 누차 보여주는 그 순정한 힘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더욱 도드라진 빼어난 시편이다.
―시집 해설 중에서
목차
목차
제1부
씨앗
매화꽃눈
개화(開花)
올챙이가 태어나는 자리
매화
매화 피는 계절은
매화에서 매실로
My favorite things
발아(發芽)
아, 글쎄,
여자도(汝自島)
다솔사(多率寺) 와불(臥佛)
매화여인(梅花女人) 오다
제2부
비는 내리고
딱새는 알을 낳고
산청매실농원
남고 매실
별의별 사람들
경매
풍년이라는 말
매실 수확을 마치고
풀잎
뱀은 달아나고
진도
열무가 자라는 자리
아무 생각 없는 땀
낭도초등학교
지금 나는, 지금 나가 아니어서
제3부
인생이 풀이라냐 나무라냐
나무이파리만 한 일가(一家)
본촌 아재
복숭아유리나방
나무가 뜨거워지는 시절
흐르는 몸으로
깊고 푸른 밤
산청(山淸)
들판
호박
무
고구마
부추꽃
미황사 괘불재
간혹,
제4부
남명매(南冥梅)를 만나다
쇠박새
막막한 생
매실나무 가지치기
山새들의 저축
백설(白雪)
실직
기억나는 저녁
무슬목
소한
구사(九思)
숙녀 미용실
정당매(政堂梅) 돌아가시다
공중에 그린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
007 콜, 대리운전
해설 매화, 호문목(好文木)을 위한 헌사 / 이철경(시인·문학평론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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