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건너는 산
김용주 평전
한국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부축한 숨은 일꾼을 뒤늦게나마 밝히는 데 의의를 지닌「광복 70주년 기획, 새로운 역사인물찾기」 제1권 김용주 평전 『강을 건너는 산』. 이 책은 일제 강점기에 삼일상회를 시작으로 일제에 맞서고, 6ㆍ25 전쟁 속에서 경복궁 폭격을 저지하는 등 우리의 얼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김용주의 삶을 실증 자료를 통해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Couldn't load pickup availability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일제 강점기부터 6ㆍ25전쟁까지, 민족의 고난 속에서
소리 없이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해촌 김용주의 삶을 재조명한다
ㆍ 해촌海村 김용주金龍周 [1905~1985]
해촌 김용주 선생은 1905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1923년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식산은행에 취직한 뒤 포항청년회 지육(智育)부장을 맡아 야학을 개설하는 등 조선인 계몽교육에 노력했다.
식산은행을 그만둔 뒤 포항에서 3ㆍ1운동 정신을 담은 삼일상회를 개업하고 자립의 길을 걸었다. 사립 영흥국민학교를 세워 후학 양성에 이바지했고, 경북도의회 민선도의원이 되어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차별정책을 바로잡기 위해 일본 야당 국회의원을 만나 조목조목 따지고 비판하여 동조를 받아내기도 했다. 천조신궁에 단군묘도 함께 모시자는 발언으로 일본헌병에 불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으며,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일제로부터 포항지역 총살 대상 제1호로 지목되기도 했다.
해방 후 대한해운공사를 창립해 초대 사장으로 한국해운업의 초석을 다졌고, 주일특명전권공사로 부임해 6ㆍ25 전쟁 초기 서울수복작전에서 맥아더 사령부를 설득해 서울 시내 문화재를 폭격으로부터 보호했다.
이후 전남방직 사장 겸 신한제분주식회사 회장, 민주당 참의원 및 원내총무, 대한방직협회 회장,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면제품수출조합 이사장, 한국생산성본부 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무궁화대훈장, 동탑산업훈장,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ㆍ 내용 소개
광복 70주년 기획, 새로운 역사인물찾기 ①
해촌 김용주
오해와 왜곡 속에 감춰진 어느 애국자의 진실
역사의 질풍노도를 헤치고 국가의 기둥을 세운 해촌 김용주 선생의 일대기
한국 현대사는 그 혼란만큼이나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서려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와 6ㆍ25 전쟁 등 민족의 한이 서린,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로 역사의 한 토막을 붉게 물들였다. 그 혼란을 틈타 일부는 일신의 생존과 부귀만을 좇아 민족을 속이고 나라를 팔아 연명하기도 하고, 또 일부는 희망을 잃고 잔뜩 움츠린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기도 했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보면 당연한 인간의 본성이었으리라.
하지만 깨어있는 지성들은 암울한 현실을 딛고 다음 세대를 위한 씨앗을 하나하나 심어갔다. 그중 해촌 김용주 선생은 일제의 압박과 전란의 아픔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으며 앞으로 나아가 대한민국 성장의 기초를 다진 민족중흥의 역군이다.
김용주 회고록 『풍설시대 80년』을 바탕으로 그를 되짚어본 『강을 건너는 산』은, 일제 강점기에 삼일상회를 시작으로 일제에 맞서고, 6ㆍ25 전쟁 속에서 경복궁 폭격을 저지하는 등 우리의 얼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김용주의 삶을 실증 자료를 통해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또한 이 책은 한국의 발전을 위해 온갖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나선 그의 행적을 통해 전후 한국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부축한 숨은 일꾼을 뒤늦게나마 밝히는 데 의의가 있다. 나무는 뿌리를 알고 줄기를 키워야 열매가 맺힐 수 있다. 한국 성장의 진정한 뿌리를 알아야 한국의 미래가 더욱 밝아지는 것이다.
지속된 경기불황과 지역, 당파, 노사 간의 대립 등으로 민심이 뿔뿔이 흩어진 지금, 우리는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일어선 김용주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강을 건너는 산』에 담긴 그의 행적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고, 희망과 열정을 품고 모두 함께 뭉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ㆍ 해촌 김용주 선생의 발자취
▶ 3ㆍ1운동의 계승을 위해 '삼일상회'라는 상호로 사업
20대 초반에 3ㆍ1정신을 담은 삼일상회(三一商會)를 개업해 당당하게 극일(剋日)의 길을 걸음. (아래 '본문 중에서' 참고)
▶ 총살 대상 1호
1945년 일본이 패색이 짙어갈 무렵, 조선총독부는 미군이 조선에 상륙하면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이 미군에 협조해, 일본에 항거하여 내란을 일으키는 등 조선독립운동이 치열해지는 동시에 중국에 있는 대한광복군이 대거 침투해 올 것이라 예측했음. 따라서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조선 전국에 걸쳐 조선의 민족주의운동에 나설 수 있는 주요 인물들을 사전에 모두 살해해서 제거한다는 방침을 세웠음.
이와 때를 맞추어 일본군 사령부는 조선을 여러 군관부로 나누어 각기 지구경비사령부를 설치했음. 미군이 조선의 어느 곳에든 상륙하면 즉각 전 조선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군정을 펴기 위한 사전준비이며, 총살 대상들을 제거하기 위함이었음.
그 조선인 제거 명단 중에 포항 지역 총살 대상 1호가 바로 김용주였음.
▶ 6ㆍ25 전쟁 시 최초 한국은행권 화폐를 일본에서 찍어와
인민군에 밀려 정부가 급히 서울을 떠나는 바람에 한국은행 본점 보유의 현찰을 후방으로 이송하지 못함. 전비(戰費)인 화폐는 무기의 1호로서, 미군 군용물자를 하역해야 하는데 인부들 노임을 지불하지 못하는 등 돈이 없어 전쟁을 치룰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주일대표부 특명전권공사로서 일본에서 최초의 한국은행권 화폐를 찍어옴.
▶ 페니실린 없으면 국군 부상병이 다 죽는다
6ㆍ25 전쟁으로 국군 부상병이 날로 늘어나고 있는데 의료약품과 특히 페니실린이 부족해 죽어가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일본에서 트럭 10대분의 각종 의약품과 페니실린을 구입해 배로 보내 죽음에 직면했던 수많은 국군 부상병들을 살려냄.
▶서울수복작전과 문화재 수호
김용주와 맥아더 사령관과의 담판으로 유엔군의 서울 수복 폭격을 전면 폭격에서 부분 폭격으로 수정하여 소중한 우리 문화재가 온전히 살아남게 했음. (아래 '본문 중에서' 참고)
▶ 인천상륙작전 시 통역과 길 안내에 필요한 재일교포 의용군 모집
일본 내의 민단과 대한청년단과 한국학생동맹 등과 협의해 일본 유학생 수백 명을 모집, 유엔군의 반격작전에 혁혁한 전공을 세움. 의용군 전사자는 50여 명에 달했고, 당시 의용군 모집 비용 약 2만 달러를 개인이 부담함.
▶ 포항 영흥초등학교 설립
포항 읍내 취학연령 아동들의 입학난이 8:1 정도로 심각한 것을 알고, 영흥국민(초등)학교를 설립하고, 야학도 개설해 배우지 못한 배움이 부족한 가정부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고 민족의식도 일깨움. 이 일로 도 경찰부 고등과와 대구헌병대 등에 불려가 온갖 고초를 겪고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낙인찍힘. 이후 해방을 맞아 보다 차원 높은 운영과 지도를 위해 학교재단을 정부에 헌납함.
▶ 전남중ㆍ고등학교 설립과 무상 헌납
전남 광주에 전남중학교(1958)와 전남고등학교(1966)를 설립해 국가에 무상으로 국가에 헌납하고, 전남방직 부설학교인 여자고등학교를 운영해 배움에 대한 갈증을 안고 있던 직원들을 배려함.
▶ 전라남도 화순군, 장흥군에 1천만 주 조림사업
1965년 헐벗은 산하를 녹화하기 위해 화순군과 장흥군과 국가로부터 국유림을 빌려 전남방직 부대사업으로 직원들과 직접 나무심기에 참여해 1천만 주 조림사업을 시작함.
▶ 광주 무등경기장 부지 무상 기부
1954년 전라남도 광주에 무등경기장을 지을 때, 전남방직 땅을 무상으로 기부함.
책속으로 추가(본문중에서)
▶ 3ㆍ1운동의 계승을 위해 '삼일상회(三一商會)'라는 상호로 사업
날이 갈수록 '삼일상회'가 번창하기 시작하자 그렇지 않아도 삼일운동을 연상시키는 '삼일'이란 상호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일본은 본격적으로 탄압과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만약에 일본인이 '삼일상회'라는 상호를 사용했다면 대수롭지 않게 지나갈 만한 일이었겠지만, 문제는 김용주라는 한국인이 '삼일상회'라는 상호를 버젓이 걸고 사업을 한다는데, 그것도 번창일로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눈엣가시 같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그냥 지나가도 될 만한 잔잔한 문제들을 가지고 시비를 걸더니 나중에는 경찰고등계까지 나서서 "하필 그 많은 상호 중에서 왜, 무엇 때문에 '삼일'이란 단어를 넣어서 상호를 지었느냐? 혹시 우리 모르게 독립군에게 지원금을 보내는 것은 아닌가?" 하며 생트집을 잡으며 시도 때도 없이 회사를 드나들며 트집 잡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없는 죄도 만들어 애국지사들을 구속하고, 고문하여 죄를 만들어 내는 시절임을 고려하면 한 개인으로서는 여러모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김용주는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어떡하든 '삼일상회'를 지키고 싶었지만, 날이 갈수록 일본 경찰고등계의 압박은 악랄해져 갔다. 김용주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들의 감시망에 들어갔고, 노골적으로 미행하고 있다는 점을 노출시켜 일상생활을 하는 데도 지장을 주었다. 그들이 이처럼 한 것은, 그들의 목적은 '삼일상회'라는 간판을 접게 만드는 것이었다. 김용주는 이런 고통 속에서도 어떡하든 '삼일상회'를 지키고 싶었지만, 마음과는 달리 현실은 눈물을 머금고 간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느낀 김용주의 좌절감과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라 잃은 서러움에 가슴이 아려왔다.
▶서울 수복작전과 문화재 수호
맥아더의 명령에 히키 장군도 더 이상 아무 말 못했다. 그는 김용주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갔다. 벽 전체가 한국지도로 채워져 있는 전쟁 상황실이었다. 여러 참모들이 지도를 보며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히키 장군은 벽에 붙은 지도 중에서 정밀한 서울시가지 지도 한 장을 떼어 테이블 위에 펼쳐놓은 뒤 김용주한테 색연필을 건네주며 말했다.
"당신이 말한, 폭격해선 안 될 가치 있는 문화재 위치를 여기에 표시해 보시오."
"좋습니다."
김용주는 색연필을 받아들고 덕수궁, 경복궁, 창덕궁, 남대문, 동대문 등 몇 군데를 중점적으로 가려 붉은 칠을 하다가 동작을 멈추었다. 지도에 문화재 하나하나를 지적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시는 대부분이 목조건물이라 한번 소이(燒夷)폭격을 당하면 그 일대 전체가 연소될 게 뻔했다. 김용주는 생각을 바꿔 정동을 기점으로 남대문을 거쳐 퇴계로에 이르는 반월형(半月形)의 지형을 따라 광범위하게 죽 선을 긋고 말했다.
"이 선을 중심으로 북쪽은 모두 폭격 대상에서 제외해 주시오."
참모들이 김용주가 그린 지도를 놓고 면밀히 검토하더니 불가(不可)하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건 아예 서울수복작전을 하지 말라는 것이오!"
김용주는 참모들의 반발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범위를 조금 좁혀 정동에서 을지로, 왕십리에 이르는 선을 그어 보였다. 그러자 그것도 용납할 수 없었던지 히키 장군이 김용주의 손에서 색연필을 받아, 정동에서 청계천으로 비스듬히 구부러진 선을 그어 보이며 말했다.
"이 정도로 최선을 다해 보겠지만, 절대보장은 할 수 없으니 양해하시오."
히키 장군이 그린 선에서 보면 덕수궁은 아슬아슬하고, 남대문은 아예 선 밖에 밀려나 있었다. 김용주는 덕수궁과 남대문 두 지점에 색연필로 굵은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며 말했다.
"이 두 지점에 있는 문화재는 한국 최고의 문화재요. 장군이 그은 선으로 볼 때 위치가 위치인 만큼 이 두 지점에 대해서는 특별히 주의를 해주셔야 합니다!"
"알겠소. 최선을 다해보겠소."
목차
목차
― 김용주의 6ㆍ25
F51 전투기 10대만 빌려달라고 해 | 한국은행권 지폐를 일본에서 찍은 사연 | 주일특명전권공사 | 맥아더 사령관 첫 대면 | 6ㆍ25 발발과 조총련의 발광 | 재일거류민단 육성문제 | '자유의 종' 방송과 대한(對韓)신문 | 장개석 총통, 2개 사단 파병 제의 | 페니실린 없으면 부상병 다 죽는다 | 인천상륙작전과 재일교포 의용군 | 서울수복작전과 문화재 수호 | 일본에는 고철도 안 판다 | 이 대통령 반일 감정의 극치 '왜관발언' | Dodge's Line 정책 | 특명전권공사 사임 | 맥아더 원수와의 특별한 이별
제2장 극일(克日)로 이겨낸 망국의 한(恨)
― 김용주의 일제강점기
식산은행원 시절과 청년운동 | 포항 삼일상회 | 포항운수주식회사 | 동해 정어리 어업 | 사립 영흥국민학교 설립 | 민족교육 위한 창씨와 한국역사연구회 | 정치 저항 위한 도의회의원 출마 | 총독부의 교활한 사립학교 통치 | 천조신궁에 단군묘도 함께 모시자 | 사장 취임도 거부하는 일본경찰 | 조선인 학살계획과 총살 대상 제1호
제3장 새로운 통치자 미 군정과의 줄다리기
― 김용주의 해방정국
해방조국을 위한 새 진로 설정 | 부산호와 광제호 태극기 | 대한상공회의소와 한국무역협회 창립 | 신생 한국경제의 물꼬를 트다 ― 새로운 투자 ― 미 국무성과 담판 | 태평양전쟁 징발선박 반환 교섭 | 최초 남북교역선 앵도호(櫻島號) ― 한 동포라는 믿음 ― 헌신짝이 된 동포애 | 대한해운공사 창립 | 홍콩 정기항로 개설 | 한국 군함 제1호 백두산호
제4장 독재와 무질서가 부른 4ㆍ19와 5ㆍ16
― 김용주의 정치 경제
대통령 측근의 외압과 모략 | 대한해운공사 사장 사임 | 신한학술연구회 창립 | 참의원 당선과 민주당 원내총무 | 대한중석 1백만 달러 커미션 사건 | 대일청구 5억 달러 논의 | 5ㆍ16 전야의 민주당 최고회의 | 혁명 총성과 미 대사관 방문 | 김용주가 본 내각책임제와 정당정치 | 주한 유엔군 총사령관 데커 장군과의 해후 | 일본 정계요인들과의 모임 | 용문중ㆍ고등학교 설립 | 김용주와 호남과의 인연 ― 전남중ㆍ고등학교 설립과 무상 헌납 ― 전남 화순군, 장흥군에 1천만 주 조림 ― 무등경기장 부지 무상 기부 | 대한방직협회 회장 ― 방직업 불황은 정부 정책 탓 ― 수출보상책 시행 ― 미 국무성 설득으로 원사 가격 지불 조정 ― 공판제도로 국내 판매 질서 확립 | 한국경영자총연합회 회장 ― 노사 문제는 가장 어려운 문제 ― 대화와 설득은 최선의 노사정책
제5장 냉철한 머리 따뜻한 가슴
― 김용주의 주변 이야기
김용주가 본 세계 속의 한국 | 1천만 주 조림사업 | 김용주의 작은 행복 두 가지 | 김용주가 말하는 이 사람들 ― 이승만 대통령 ― 맥아더 사령관 ― 영친왕 이은(李垠) ― 윤치호 선생 ― 일본인 후쿠지(福士) 선생 ― 민속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 친일파 박춘금
저자
저자
前 관훈클럽 총무, 前 한국기자협회 회장, 前 고려대 석좌교수
Your payment information is processed securely. We do not store credit card details nor have access to your credit card informat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