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이야기
이 책은 마가복음 전체를 61개의 단락으로 나누고 각 단락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알려주고 있다. 그 내용은 등장인물 소개, 역사적 배경, 신학적 의미 등 다양하다. 성경 본문과 함께 이 책을 읽는다면 그 내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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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 1:11)
* 세례 요한의 증언과 예수님의 세례
본 단락의 주제는 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기 위해서는 우선 예수님이 구원자의 자격을 갖춘 분이신가 하는 것을 설명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그것이 두 가지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세례 요한의 증언을 통해서이고, 둘째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입니다.
4절부터 8절까지를 살펴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를 조금 당황하게 합니다. 왜 하필이면 세례 요한일까요? 여기서 세례 요한은 개인의 자격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구약 시대의 대표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를 구약 시대에 대표자로 만들었습니까?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 참고 눅 7: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그 때까지의 인류 역사 중에서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최고의 인물입니다. 그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세례 요한이 즉흥적으로 갑자기 한 일이 아닙니다. 2절과 3절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 일을 오래 전부터 예언했었다고 말씀합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대로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 이하에서는 성령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증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자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의 형상으로 예수님께 내려 오셨습니다(10절).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음성을 들려주심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11절).
그런데 예수님의 복음을 설명하기 시작하는 본 단락에서 왜 예수님의 첫 사역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일일까요? 세례는 죄인이 받는 것입니다. 죄가 없으신 하나님은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인간이 되셨음을 뜻합니다. 인간 비슷하게 되신 것이 아니라 완전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셔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해주시기 위해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 주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보여야 할 행동은 무엇입니까?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4,5절).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나아가 회개했던 것처럼 우리도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2】마가복음 1:12-20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 예수님의 시험과 전도 그리고 제자들을 부르심
본문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2절과 13절에는 예수님의 시험이 나오고 14절과 15절에는 예수님의 전도가 나옵니다. 그리고 16절부터 20절까지에는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시험 장면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다는 말씀입니다. 사탄에게 시험을 받는 일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일을 주도적으로 진행하신 분이 성령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꼭 당해야 되는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성령님께서 적극적으로 그 일을 추진하십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그 모든 것을 감당하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실 때 천사들이 수종을 들었다고 합니다(13절). 우리들이 고난을 당할 때도 그렇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요한이 잡힌 후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전도를 하십니다. 원래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남쪽 유대를 중심지로 삼아 1년 정도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헤롯 안디바의 생일잔치 때 죽임을 당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까지 죽이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북쪽 갈릴리로 사역의 본거지를 옮기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약 2년 동안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때 외치셨던 말씀들의 핵심이 15절에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은 그 이전에 가지고 있던 죄악된 것들을 모두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은 이제 예수님께 나머지 인생을 온전히 맡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이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순종한 사람들의 예가 그 다음 부분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장면에서 공통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그 때까지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과감히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18절은 그들이 어부에게 가장 귀중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이야기하고, 20절은 야고보와 요한이 아버지 세베대를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고 말합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이토록 엄중한 일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예수님의 복음에 남은 인생을 걸어야 합니다. 그것은 어리석음도 아니고 무모함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들이야말로 참으로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3】마가복음 1:21-34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막 1:27)
*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들 자들을 치료하심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습니다(21절).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여행 중인 랍비가 회당 예배 참석했을 경우 그에게 설교를 권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활용하신 것입니다. 그런 예는 사도행전에도 나옵니다. 바울 사도가 비시디아 안디옥의 이르렀을 때 그 곳 회당장들이 바울에게 설교를 권하여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행 13:15)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2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르침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다고 하며 놀랍니다. 그 당시 서기관들은 선배 랍비들의 이름을 내세우며 그들의 권위를 이용하여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시며 자기 자신의 권위로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다는 것은 그 다음 본문에 계속 나타납니다. 병이 떠나가고(31절) 귀신이 쫓겨난 것입니다(26, 34절). 하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습니다. 그 권위 있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 속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표적이 함께 나타나도록 역사하십니다. 마가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막 16:20)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시는 장면들 속에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귀신들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25, 34절). 그런데 귀신들이 예수님을 증거하면 더 편하신 것 아닙니까? 왜 그들의 입을 막으셨습니까? 왜냐하면 그것이 덕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하고 위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 들린 자들의 입을 통해서 그것이 전해지면 품위가 떨어집니다.
똑같은 예를 우리는 사도행전 16장에서도 발견합니다. 빌립보 교회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귀신들린 자가 바울을 따라다니며 그의 말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복음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귀신을 쫓아내 버립니다.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행 16:17, 18). 하나님의 말씀은 엄중하고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 삶에도 변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4】마가복음 1:35-45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막 1:38)
* 나병환자를 치료하심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되 우리 마음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섬겨야 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40-45절).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로 알리지 말고 가서 그의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율법에 명령된 일을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43-44절). 레위기 14장 1-20절은 나병이 치료되었을 경우 그가 제사장에게 가서 나병이 치료된 것을 확인 받고 최종적으로 번제와 소재를 드림으로 나병 환자의 신분에서 완전하게 벗어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실천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그가 사람들에게 치료에 대해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을까요?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럴 경우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왜곡된 인상을 갖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는 소나 양을 제물로 드리는 속죄제사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속죄제사는 참된 속죄제사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모형이요 그림자였을 뿐, 그 자체로서는 죄 사함의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군사적, 정치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의 초자연적 능력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방해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만약 예수님께서 그런 엄청난 기적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소문이 날 경우 친히 마을과 회당들을 찾아다니시며 전도하는 사역은 이제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38절 39절은 예수님께서 가까운 마을들을 찾아다니시고 회당에서 전도를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나병 환자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퍼뜨린 이후에는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45절). 사람들이 너무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 나병환자는 자신을 고쳐 주신 분이 예수님이시라고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이 예수님께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께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방법에 따라 섬겨야 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섬기는 것은 자기만족이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아닙니다.
【5】마가복음 2:1-12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 2:5)
* 중풍병자를 치료하심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있는 어떤 집에 들어가 계시자(1절)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2절). 어떤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어서 데리고 왔습니다(3절). 하지만 사람들 때문에 접근을 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지붕을 뜯어서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습니다(4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환자를 치료해 주셨습니다(5절).
오늘 이야기에서 먼저 우리의 주목을 끄는 자들은 중풍병자의 친구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통 환자 자신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을 치료하십니다(마 9:22; 막 10:52; 눅 7:50 등). 그런데 5절 말씀은 분명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환자를 치료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교훈해 줍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우리는 세계를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사회를 위하여 또 이웃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9절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셨습니다(5절). 그러자 서기관들이 마음속으로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죄를 사할 수 없는데 예수님이 이런 말을 했으니 그것은 신성모독이라는 것입니다(7절).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말과 일어나서 걸어가라고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물으십니다(9절). 당연히 일어나서 걸어가라고 하는 말이 더 쉽습니다. 그 말을 하셨다면 아무도 예수님께 신성모독이라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도발적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권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하셨습니까? 복음을 정확히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하는 것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을 양보하면 그것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닙니다. 그 일로 인해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고소하게 되고 유대인들에 의해 핍박을 받게 되는 일이 발생했지만 예수님께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똑바로 정확하게 전하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복음을 전파할 때는 담대하게 타협 없이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당연한 도리입니다.
【6】마가복음 2:13-22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 세리 레위를 부르심
본문은 예수님이 오신 이후의 세상이 그 이전과는 얼마나 다른 것인지를 여러 가지 대조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등의 죄인들과 교제를 나누십니다(15절). 세리들이 죄인 취급을 받았던 것은 그 당시의 조세제도를 악용했기 때문입니다. 세리들에게는 지역과 거두어야 할 세금액이 할당되었습니다. 그러면 세리들은 재량껏 그 액수 이상의 세금을 거두어서 로마 당국에 일정한 금액을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들이 가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복음 3장에서 세리들이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12절)라고 물었을 때 세례 요한은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13절)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죄인들과 교제를 나누시는 예수님께 항의하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대답하십니다(17절). 세리와 죄인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습니다.
또 다른 대조가 18절 이후에 나타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질문하자 예수님께서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19절). 예수님은 신랑과 같은 분이십니다. 지금 예수님 주위의 사람들은 혼인잔치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과 갔습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와 함께 있으니 그 이상 더 즐거운 잔치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금식을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도 옛 방식을 고집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것, 그리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것에 비유하십니다. 생베조각이란 아직 수분이 다 마르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수축이 다 된 낡은 옷감에 덧붙이면 수축이 진행되면서 주위의 옷감들을 다 튿어지게 만듭니다(21절). 새 포도주는 발효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새 포도주를 이미 다 굳어서 신축성이 없어진 낡은 가죽부대에 넣으면 포도주가 발효하여 팽창함에 따라 부대가 터져 버리고 맙니다(22절). 이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죄인들은 회개하고 예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죄 용서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예수님과 교제하며 살아야 합니다.
【7】마가복음 2:23-3:6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
* 안식일 논쟁
본문 말씀은 안식일을 비롯한 하나님의 율법 전체를 지키는 올바른 자세에 대해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에서 이삭을 잘랐습니다(23절).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24절). 바리새인들은 아마도 출애굽기 34장 21절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출 34:21). 이 구절은 안식일에는 추수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삭을 자른 일을 추수행위로 확대해석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변론이 흥미롭습니다. 안식일과는 별로 상관없는, 다윗이 제사장에게서 진설병을 얻어먹은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마가복음 본문뿐만 아니라 사무엘상 21장의 본문에도 안식일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진설병은 원래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제사장이 아니었는데도 그 진설병을 얻어먹었습니다. 진설병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 다윗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문제는 그런 율법의 준수보다 더 중요한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이 정당하다는 근거는 구약 시대 내내 그 누구도 다윗의 행위를 지적하고 정죄한 사람이 없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 구절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고 반문하십니다(25절).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의 굶주림의 문제보다 우선하지 않습니다. 안식일 규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굶주린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손으로 자른 행위는 안식일 규정보다 더 우선적인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규정의 입법취지를 설명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27절). 안식일 규정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등장합니다. 두 경우 모두 입법취지가 나와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으니 너희가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11). 그리고 신명기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애굽 땅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으니 그것을 기억하며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두 경우 모두 공통된 것은 기쁘고 좋은 일을 상기하기 위해 안식일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옥죄고 더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계명은 그 취지를 기억하며 실천해야 합니다.
【8】마가복음 3:7-19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막 3:14, 15)
* 열두 제자를 세우심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졌습니다. 원근 여러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8절). 그들의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작은 배 위에서 말씀을 하셔야 했습니다(9절).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셨을 뿐만 아니라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셨습니다(10-12절). 예수님에 대해 부르짖는 귀신들에게는, 이전에도 그러셨듯이(막 1:25)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엄히 경계하셨습니다(12절).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을 택하실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래서 열두 명을 세우셨습니다. 그들을 세우신 목적이 14절과 15절에 나타납니다.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나중에 그런 사역을 했습니다. 누가복음 9장을 보면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치료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눅 9:1, 2)
그런데 14절을 보면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을 나열하면서 제일 먼저 꼽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들 중 제일 중요한 것이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인간이었던 그들이 어떻게 복음전도의 용서가 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치료하는 권능을 가진 자가 되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전 인격을 통해 예수님께 배웠기 때문입니다. 제자가 되는 첫째 조건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올바른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꼭 확보하고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제자로 삼기 위해서는 그들이 우리와 인격적으로 만나서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세상 모든 곳으로 나아가서 만민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하실 때 제일 먼저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가서"라는 것입니다. 헬라어로는 부정과거분사가 사용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하는 모든 행동은 일단 그곳으로 간 후에 해야 할 일들이라는 뜻입니다. 일단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제자들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자도의 기본입니다.
【9】마가복음 3:20-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5)
* 바알세불 논쟁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시는 사역이 너무나 분명하고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유대인의 지도자들도 그 기적들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힘입어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다고 모함하기 시작했습니다(22절). 참고로 바알세불이라는 용어는 해충인 '파리들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용어를 마귀들의 왕을 나타낼 때 사용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고 말씀하십니다(23절). 예수님께서 지금 귀신들을 쫓아내고 계신데, 만약 예수님께서 사탄의 힘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라면 사탄의 나라가 자중지란에 빠진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귀신들을 쫓아낼 수 있는 것은 자신이 귀신들의 왕인 사탄보다 더 강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는 강한 자에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할 수 없습니다(27절).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신다는 것은 귀신들의 왕보다 예수님이 훨씬 더 강한 존재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29절).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당황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며 회개하면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석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말씀이지만 모독이라는 단어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다른 곳에서는 신성모독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모독이라는 죄의 특징은 실수로 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노력해야만 범할 수 있는 죄라는 것입니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다른 사람의 발을 밟는 것은 실수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때리거나 그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의지적으로 그 일을 실행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 그와 같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귀신의 사역이라고 모독하는 자들은 그 마음이 심히 완악한 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용서 없는 정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혹시 그런 죄를 짓지나 않았을까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런 자들은 그런 죄를 지었을 리가 없는 자들입니다.
【10】마가복음 4:1-12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막 4:8)
* 길가에 뿌려진 씨와 돌밭에 뿌려진 씨
본문은 유명한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이틀에 걸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농부가 뿌리는 씨앗은 네 종류의 땅에 떨어집니다. 첫 번째 땅은 길가입니다(4절). 길가에 씨가 뿌려지니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받았는데 워낙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받았기 때문에 사단 마귀가 복음을 받기 전과 똑같은 상태로 재빨리 돌려놓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준비된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성경에 몇 번 나오는데 두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의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 우연히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것 같지만 대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4장 19절에서 그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는 질문이 무엇입니까? 참된 예배 처소가 어디인가 하는 질문입니다(20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고 참된 예배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복음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던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셨던 것입니다.
또 다른 예가 사도행전 16장에 등장합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자결을 하려던 간수가 바울 일행에게 한 질문이 무엇입니까?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0)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감옥에서 간수가 죄수에게 할 질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그가 평소에 늘 구원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사도 바울과 간수의 만남이 그저 우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이 예비된 자에게 사도 바울을 보내 주셨던 것입니다. 아무 준비가 안 된 굳은 땅에서는 복음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땅은 흙이 얕은 돌밭입니다. 돌밭이란 밭에 돌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평평한 암반 위에 흙이 살짝 덮여 있는 곳을 말합니다. 어쨌든 흙이 있기 때문에 싹은 나왔지만 뿌리를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금방 타 죽어 버리고 맙니다. 여기서 뿌리를 지탱해 줄 흙이라는 것은 동료 기독교인들을 말합니다. 믿음이 생기면 교회에 나와서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 기반이 없이 혼자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곧 신앙이 시들어버리게 됩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좋은 신앙의 동료들이 있는 곳을 찾아야 합니다.
【11】마가복음 4:13-25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막 4:20)
*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와 좋은 밭에 뿌려진 씨
오늘도 씨 뿌리는 비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 번째 경우는 씨가 가시떨기에 뿌려진 경우입니다(18절). 이것은 세상의 염려와 욕심 때문에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입니다(19절).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도전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따라서 순종하면서 살지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을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의 멋진 것, 좋은 것, 가지고 싶은 것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결단의 순간에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네 번째 경우는 씨가 좋은 땅에 뿌려진 경우입니다. 그런 씨앗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20절). 이것은 앞에 소개된 세 가지 실패의 경우와 반대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이나 빌립보 감옥의 간수처럼 진리에 대해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좋은 믿음의 동료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여 환난과 박해를 견뎌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유혹의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 것은 씨앗 자체의 생명력 때문이지 밭이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좋은 밭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그곳에 씨앗이 뿌려지지 않는다면 결실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는 것은 오직 복음 자체의 생명력 때문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며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이것을 잘 설명해 주는 비유가 바로 다음 단락에 등장합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과 그 나무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 4:31, 32). 겨자씨는 작은 것이지만 그것 자체에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나중에 성장한 후에는 커다란 나무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나의 삶 속에서 신앙생활의 열매가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전도를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내가 할 일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좋은 밭이 되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동료 기독교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결단의 순간이 올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에게 뿌려진 말씀의 씨앗은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12】마가복음 4:26-34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막 4:26, 27)
* 자라나는 씨의 비유
본문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가 두 가지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렸습니다(26절). 그 사람은 매일 자고 깨고 하며 일상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심겨진 씨가 스스로 성장합니다(27절). 처음에는 싹이 나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생기더니 결국 곡식들이 열립니다(28절). 열매가 다 익으면 이제 추수를 하게 됩니다(29절).
이 비유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씨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씨뿌리는 자의 노력과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것을 두 군데서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27절의 "그가 밤낮 자꾸 깨고 하는 중에"라는 부분과 28절의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라는 부분입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은 씨 자체의 생명력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면 그 일을 통하여 열매를 거두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두 번째 것은 씨가 성장하는 데는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씨에서 작은 싹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이삭이 생기고 나중에 비로소 곡식이 열립니다(28절). 우리가 처음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그 모습이 너무나 보잘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무슨 열매를 맺게 될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은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이 주제는 두 번째 비유에서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땅에 심기는 것은 겨자씨 한 알입니다(31절). 겨자씨는 씨앗들 중에서도 아주 작은 것에 속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것이 성장한 후에는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됩니다(32절). 하나님 나라의 일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금 눈 앞에 보이는 모습이 초라하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어린 아이와 같이 미숙하다고 해서 너무 자책할 필요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다 그렇습니다.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성장시켜 주십니다.
마지막 두 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일반 백성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신 후에(33절) 제자들에게는 따로 그 모든 것을 해석해 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34절). 이것은 백성들에게는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만 그 뜻을 알려 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것은 오히려 그들이 더 잘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따로 모든 것을 해석해 주신 이유는 그들은 나중에 예수님 대신 말씀사역을 담당할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말씀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필요했습니다.
【13】마가복음 4:35-41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막 4:39)
*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심
본문은 예수님께서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 만물의 지배자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 호수 반대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35절). 예수님을 모신 배가 출항하자 사람들은 다른 배들을 타고 예수님을 쫓아옵니다(36절). 그런데 큰 광풍이 닥쳐왔습니다. 파도가 높이 일어서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37절). 그 때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즉 배 뒤쪽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공포에 질린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38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게 잠잠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바다는 잔잔해집니다(39절).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40절). 그러자 사람들은 심히 두려워하면서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고 말합니다(41절). 여기서 그들이란 제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배들을 타고 있던 사람들을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답이었을까요?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그들이 했어야 할 것입니다. 바람을 꾸짖고 바다에게 잠잠하라고 명령을 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만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대하셨던 믿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을 이루시기 전까지는 그 무엇도 하나님의 아들을 해칠 수 없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다면 바다를 향해 호통을 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바라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에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있습니다. 그 사명을 다 이룰 때까지는 우리의 인생이 끝나지 않습니다. 사탄 마귀가 우리를 공격하여 여러 가지 것들을 파괴할 수 있지만 우리의 사명은 파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명은 사단 마귀가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파도가 칠 때 두려워하지 맙시다. 오히려 우리 인생의 파도와 폭풍을 향해 잠잠하라고 명령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됩시다.
【14】마가복음 5:1-20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막 5:8)
*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심
본문은 예수님께서 데가볼리 지역에서 군대 귀신 들렸던 자를 고쳐 주신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데가볼리 지역은 요단강 건너편에 있던 이방인 거주지역입니다. 이방인들이 살던 곳이었기 때문에 돼지를 식용으로 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귀신들은 자신들이 돼지에게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12절).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자 그들은 돼지들에게 들어갑니다. 그래서 거의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갈릴리 호수로 뛰어들어서 죽어 버렸습니다(13절).
이제 돼지를 치던 자들은 큰일이 났습니다. 만약 저녁에 빈손으로 마을에 들어가서 돼지 이천 마리가 한꺼번에 호수에 뛰어들어 죽었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즉시 마을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데리고 나옵니다(14절). 자신들의 잘못으로 돼지들을 잃은 것이 아님을 아직 예수님께서 계실 때에 증명해 보이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의 설명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가시기를 간청합니다(17절).
이 단락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마귀는 우리를 멸망시키기를 원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귀도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잘 해 줄 것처럼 그들을 미혹합니다. 하지만 마귀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들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보고를 받습니다(16절).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께 보인 반응이 참으로 실망스럽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했습니다(17절). 예수님은 그들이 원한다면 그들을 위해 놀라운 일들을 행하여 주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의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저 그분을 떠나보내려고만 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두 가지를 믿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목차
목차
【2】마가복음 1:12-20 * 예수님의 시험과 전도 그리고 제자들을 부르심
【3】마가복음 1:21-34 *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들 자들을 치료하심
【4】마가복음 1:35-45 * 나병환자를 치료하심
【5】마가복음 2:1-12 * 중풍병자를 치료하심
【6】마가복음 2:13-22 * 세리 레위를 부르심
【7】마가복음 2:23-3:6 * 안식일 논쟁
【8】마가복음 3:7-19 * 열두 제자를 세우심
【9】마가복음 3:20-35 * 바알세불 논쟁
【10】마가복음 4:1-12 * 길가에 뿌려진 씨와 돌밭에 뿌려진 씨
【11】마가복음 4:13-25 *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와 좋은 밭에 뿌려진 씨
【12】마가복음 4:26-34 * 자라나는 씨의 비유
【13】마가복음 4:35-41 *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심
【14】마가복음 5:1-20 *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심
【15】마가복음 5:21-34 *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치심
【16】마가복음 5:35-43 *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17】마가복음 6:1-13 *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심
【18】마가복음 6:14-29 * 세례 요한의 죽음
【19】마가복음 6:30-44 * 오병이어의 기적
【20】마가복음 6:45-56 * 물 위를 걸으심
【21】마가복음 7:1-13 * 장로들의 유전을 비판하심
【22】마가복음 7:14-23 *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
【23】마가복음 7:24-30 *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심
【24】마가복음 7:31-37 을 고치심 *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심
【25】마가복음 8:1-13 * 사천 명을 먹이심
【26】마가복음 8:14-26 *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에 대한 경고
【27】마가복음 8:27-38 *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심
【28】마가복음 9:1-13 * 변화산 사건
【29】마가복음 9:14-29 *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심
【30】마가복음 9:30-37 * 수난에 대한 말씀과 제자들의 토론
【31】마가복음 9:38-50 * 지옥에 대한 경고
【32】마가복음 10:1-16 * 이혼에 대한 교훈
【33】마가복음 10:17-22 * 재물이 많은 청년
【34】마가복음 10:23-31 * 복음을 위해 포기해야 할 것
【35】마가복음 10:32-45 *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
【36】마가복음 10:46-52 * 바디매오의 눈을 고치심
【37】마가복음 11:1-10 *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심
【38】마가복음 11:11-19 * 성전을 청결케 하심
【39】마가복음 11:20-26 * 기도에 대한 교훈
【40】마가복음 11:27-33 *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논쟁
【41】마가복음 12:1-12 * 포도원 농부의 비유
【42】마가복음 12:13-17 *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43】마가복음 12:18-27 * 사두개인들의 질문과 부활
【44】마가복음 12:28-34 * 가장 큰 계명
【45】마가복음 12:35-44 * 가난한 과부의 헌금
【46】마가복음 13:1-13 *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심
【47】마가복음 13:14-27 * 재림의 예언
【48】마가복음 13:28-37 * 무화과나무의 비유
【49】마가복음 14:1-9 *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음
【50】마가복음 14:10-16 * 유월절 식사의 준비
【51】마가복음 14:17-26 * 유월절 식사
【52】마가복음 14:27-42 *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53】마가복음 14:43-52 * 유다의 도착과 예수님의 체포
【54】마가복음 14:53-65 * 예수님의 재판
【55】마가복음 14:66-72 *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함
【56】마가복음 15:1-15 *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
【57】마가복음 15:16-32 * 십자가에 못 박히심
【58】마가복음 15:33-41 * 예수님의 죽으심
【59】마가복음 15:42-47 * 예수님의 장례
【60】마가복음 16:1-8 * 예수님의 부활
【61】마가복음 16:9-20 *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와 승천
저자
저자
총신대학신학대학원(M.Div.)
네덜란드 캄펜(Kampen)신학대학(신학석사, 박사)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교수
[저서]
- 성경 관련
"설교자를 위한 공동서신 강해". 서울: 이레서원, 2004.
"설교자를 위한 요한복음 강해". 서울: 도서출판 대서, 2007.
"요한복음 이야기". 서울: 도서출판 대서, 2013.
"신구약중간사 이야기". 서울: 도서출판 대서, 2013.
"신약성경 이야기". 서울: 도서출판 대서, 2020.
- 헬라어(신약성경 원어) 관련
a. 초급 헬라어
"외우기 쉬운 헬라어 단어"(개정판). 서울: 도서출판 대서, 2021.
"기초헬라어문법". 서울: 도서출판 대서, 2019.
b. 중급 헬라어
"혼자 공부하는 신약성경 헬라어 강독". 서울: 도서출판 대서, 2008.
c. 고급 헬라어
"헬레니스틱 그릭 독해연구"(Readings in Hellenistic Greek). 서울: 도서출판 바울, 2003.
- 랍비 아람어 관련
"랍비 아람어 독해연구"(Readings in Rabbinical Aramaic). 서울: 아가페문화사, 2003.
* 번역서
- 네덜란드어
야콥 판 브럭헌. "누가 성경을 만들었는가"(Wie maakte de bijbel). 서울: 총신대학출판부, 1997.
- 독일어
야콥 판 브럭헌. "목회서신들의 역사적 배열"(Die geschichtliche Einordnung der Pastoralbriefe). 서울: 솔로몬 출판사, 1997.
- 영어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주님과 동행하십니까". 서울: 도서출판 바울, 1990.
하비 K. 맥아더. "산상설교의 이해". 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92.
게리 버지. "NIV 적용주석: 요한복음". 서울: 솔로몬, 2010.
기타 영어 번역서 10여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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